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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두이노의 悲歌 원문보기 글쓴이: 안개
다큐 채널, 수요일, 자정 / 배수아
나는 장마리입니다. 나는 93년 여름 휴가를 부산으로 떠났습니다. 난 서류상의 고향이 부산이죠. 그러나 그때까지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습니다. 심지어는 그곳에서 태어나지도 않았어요. 아는 사람들이 살고 있지도 않습니다. 당연하잖아요. 부산은 대도시이고 나는 대도시의 삶이 어떻다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서울 이외의 도시가 좀 두려웠습니다. 좁은 도로에 무질서한 가로 풍경하며 상점도 불편하고 익숙하지 않은 입맛의 찌개를 파는 뒷골목의 음식점들. 그런 것들이 막연하게 연상되었습니다.
내 생각이 어쨌든, 우리는 부산으로 떠나기로 했어요. 우리라고 하는 것은 나와 준배, 그리고 준배의 친구인 시로입니다. 준배와 시로는 모두 가명입니다. 미안해요. 하지만 그들은 93년 이후 모두 만난 일이 없습니다. 내가 이런 식으로 내가 텔레비전에 나와서 이야기할 것을 전혀 모르고 있으니 가명으로 말하는 것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때 준배는 보험회사 직원이었습니다. 물론 그 이전에 여러 가지 직업을 거쳤죠. 지금은 아마 다른 직업을 가지고 있으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살아 있다면 말이죠. 그는 언제나 타이와 수트를 갑갑해했고 2급 정비사 자격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가 좋아하는 것은 이해인 수녀의 시와 교황의 크리스마스 메시지를 모아놓은 작은 책과 표면에 융기를 만들어놓은 향료 바른 일제 콘돔입니다. 언젠가는 바티칸에 가서 교황에게 고해 성사를 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죽기 전에 한 번은요.
그는 고등학교 때 한 번 살인을 한 적이 있다고 했습니다. 집 나온 소녀였죠. 정말인지 거짓말인지 모르겠어요. 시체를 바다에 버렸다는군요. 그걸 마음 아파했습니다. 그는 크리스천이었으니까요. 정기적으로 교회에 나가지는 않았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상당히 광적이었습니다. 준배의 말은 이랬습니다. 한적한 피서지의 해변에서 집 나온 소녀를 강간하고 나자 그녀가 입가에 피를 흘리면서 돈을 달라고 했습니다. 준배는 돈이 없었고 그때 그는 술에 취해 있었습니다. 죽이려는 생각은 없었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소녀는 본드에 이미 반쯤은 정신이 나가 있었습니다. 소녀는 턱을 한 대 맞고 코피를 흘리며 곁에 있던 바위에 머리를 부딪히며 쓰러지더니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소녀는 이미 영양실조로 죽어가고 있는 중이었을 수도 있고 알지 못하는 유전병이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준배가 처음에 그 얘기를 했을 때 사실이든 아니든 나에게 충격이었습니다. 왜 나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걸까요. 그가 어느 정도 폭력적인 성향이 있고 자기 억제력이 부족한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특히 술을 마시면 그렇죠. 그가 나에게 말하지 않은 것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혼자 있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친구나 다른 누군가가 같이 있었을 수도 있고 본드 중독으로 눈동자까지 노랗게 되어버린 계집애 따위는 아무렇게나 되어도 좋다는 생각이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에 대해서 말한 다음에 준배는 웃으면서 사실은, 다 거짓말이야, 하더군요. 나는 혼란스러웠습니다. 그 당시 나는 준배를 아마 마음속으로 좋아하고 있지 않았을까 생각이 듭니다. 좋아하는 남자아이가 그런 말을 하면 누구라도 혼란에 빠지기 쉽겠죠. 그 일이 사실이라면 준배는 살인자였고 사실이 아니라면 그는 기괴한 것을 좋아하는 허풍쟁이에 불과할 테니까요. 시간이 서서히 흐르면서 나는 후자 쪽으로 생각이 들었습니다. 준배는 거짓말을 밥 먹듯이 했습니다. 주로 여자들을 상대로 해서였습니다. 어떨 때 준배는 진지하게 보이기도 하고 정말로 고민하고 있는 듯이 보이기도 했습니다. 밤에 잠을 자지 못해서 힘들어, 불면증이야, 이렇게 말하면서 부스스한 머리칼을 쓸어넘길 때라든지 그럴 때 말입니다. 사실은 그가 도박장에서 밤을 새웠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런 모습을 보면 가슴이 뭉클해지는 경험을 한 적이 있었으니까요.
그런 준배에 비하면 시로는 상대적으로 왜소해 보이는 체구에 두꺼운 안경을 쓰고 소심해 보였습니다. 별로 말이 없고 거짓말도 하지 않았지만 시로가 입을 다물고 있으면 어쩐지 의심스러워지곤 했습니다. 시로는 준배를 통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처음 준배가 시로를 소개해줄 때 나는 준배에게 이런 친구가 있다는 것이 이상했습니다. 시로는 껄렁껄렁하지도 않고 말 한마디가 끝날 때마다 씨발을 후렴처럼 달지도 않고 밥보다 도박을 더 좋아하는 부류도 아니고 게다가 메이저급의 대학을 나왔다고 했으니까요. 난 아마 거짓말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준배는 많은 친구들이 있었지만 시로 같은 아이는 한 명도 없었으니까요. 준배가 친한 친구라고 자랑하고 다니는 그런 아이들은 거의 대부분 별것 아닌 관계들이었습니다. 그 아이들은 준배를 모르고 있었어요. 준배가 기분좋게 술을 잘 마시고 그리고 배팅할 때 과감하고 의리를 잘 지키는 타입이라고 기억하고 있죠. 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의리라는 것이 뭔지 나는 잘 모르겠어요. 영원히 갬블러로 살아가지 않을 거면 그런 친구들과는 연을 끊는 것이 좋을 거라고 생각하고는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준배에게 말한 적은 없습니다.
그때 우리가 부산으로 여행을 떠난 직접적인 이유는 시로 때문이었습니다. 시로의 친구가 부산에서 결혼식을 한다고 했습니다. 시로는 그 결혼식에 참석하고 싶어했고 준배는 시로와 함께 휴가를 보내고 싶어했고 나는 준배와 떨어져 보내는 시간이 참을 수 없었습니다. 시로는 준배에게 이상할 정도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당구장에서 처음 만났다고 했습니다. 준배가 친구들과 항상 가곤 하는 당구장이었죠. 자정이 넘어서 문이 열리고 시로가 들어왔습니다. 혼자였죠. 준배는 결코 혼자서 당구장에 가거나 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상한 놈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어쨌든 그들은 우연히 맥주내기 당구를 치게 되었고 시로의 당구 실력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게 된 준배는 시로에게 호감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친구가 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습니다.
시로는 학위를 따기 위해 공부하고 있는 중이었고 특별한 직업이 없었지만 언제나 별로 돈이 궁한 느낌을 주지는 않았습니다. 거기에 비하면 나는 한 번도 풀 타임의 직장을 가져본 일이 없고 주머니에는 천원 이상의 돈이 있었던 적이 거의 없는 빈털터리였죠. 준배는 돈에 관해서라면 천국과 지옥을 한 주일에도 몇 번씩 왔다갔다하는 입장이었습니다. 그가 도박에서 완전히 손을 뗄 수만 있었더라면 그렇게 불행하지는 않았을 텐데, 라고 생각이 들 때가 있었습니다. 언제나 돈이 궁했고 무엇보다도 본인이 불안해했으니까요. 마리, 난 이러다가 죽을 거야. 너에게 미안해. 준배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 내가 육 개월 동안 당구장 아르바이트를 해서 모은 돈을 하룻밤에 날려버리고 돌아와서 한 말이죠. 나는 그가 죽지 않고 나타나준 것이 고마웠습니다. 준배의 눈은 수면 부족으로 거의 언제나 핏발이 서 있었습니다. 준배는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 고행을 하는 사람이나 전 재산을 버리고 은둔하는 구도자의 삶을 꿈꾸고 있었습니다. 그냥 꿈이죠. 자신이 영원히 그렇게 살 수 없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때로 위악적인 모습도 보였습니다. 죄의식과 위악 사이를 왔다갔다하면서 방황했습니다.
준배는 시로에게 여자친구를 소개시켜주기도 하고 사설 도박장에 데리고 간 듯했습니다만 그러나 시로는 뭐든지 지나치는 법이 없었어요. 시로는 피부가 희고 드라이 클리닝이 잘 된 새 셔츠를 입고 다녔습니다. 준배처럼 나프탈렌 냄새를 풍기는 구겨진 셔츠는 입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시로에게는 죄의식도 위악도 없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언제나 세 명이 함께 만나게 되었습니다. 준배는 나와 약속한 장소에 거의 언제나 시로를 데리고 나타났죠. 나를 한 번 쳐다볼 동안 시로를 향한 눈길은 열두 번도 넘었습니다. 그리고 어쩌다 나와 둘이 대화를 하게 되어도, 시로는 이렇게 말했어, 시로는 고기를 먹지 않아, 시로는 아는 것이 많아, 구약을 열 번도 더 읽었다는군, 나는 한 번도 읽어보지 못했는데, 이런 식이었습니다. 나는 어느 순간에 화가 나기도 했습니다. 말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준배를 독차지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으니까요.
그날의 여행도 그랬습니다. 부산은 먼 곳입니다. 준배는 지치지도 않고 계속해서 담배를 피워대면서 운전을 했고 시로는 뒷좌석에 앉고 내가 준배의 곁에 앉아서 준배의 담배연기를 참고 있었습니다. 시로는 원래 별로 말이 없는 편이었습니다만 준배는 끊임없이 시로에게 말을 붙였습니다. 그래서 시로는 할 수 없이 결혼하게 된 친구에 대해서 드문드문 늘어놓았습니다. 그 친구의 이름은 범수였나 병환이었나 그랬습니다. 평범한 이름이어서 기억이 나지 않는군요. 시로는 대학 때 그 친구를 알게 되었고 그들은 서로의 결혼식에 참석하자고 약속한 사이라고 했습니다. 그 친구는 대학을 졸업한 다음 줄곧 부산에 있는 한 해운 회사에 다니고 있어 그곳에서 살았고 이후 시로와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습니다. 당연히 범수인가 병환인가 하는 그 친구와 결혼하는 여자에 대해서 시로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심지어는 그 친구가 어떤 타입의 여자를 좋아하는지 갈비뼈가 드러날 정도로 마른 여자인지 아니면 살집이 좋은 여자인지 음울한 타입인지 명랑한 주근깨가 있고 피부가 하얀 여자인지 아무것도 짐작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여자에 대해서 아무런 상상을 할 수 없게 되자 준배는 좀 권태로워했습니다. 나는 고속도로 여행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고 시로와 같이 휴가를 떠나게 된 것에 대해 좀 화가 나 있었기 때문에 표정이 굳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시로와 같이 있을 때는 준배는 나에게 그다지 신경쓰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관대하기도 했습니다. 준배가 말했습니다.
“부산 여자일지도 몰라. 그렇다면 고약한 사투리를 쓰겠군.”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아닐 수도 있어. 같은 회사의 여직원일지도 모르지.”
“시로, 결혼식은 몇시지?”
“목요일 저녁 일곱시.”
“장소는?”
“해운대 감리교회.”
“목요일이라면 내일이군. 그때까지 우린 뭐하고 보내지?”
“준배, 나 파라다이스 비치에 가고 싶어.”
내가 끼어들었습니다.
“이 바보, 거기가 얼마나 비싼 줄 알아. 남포동에 가면 값싼 여관을 알고 있어.”
“하지만 커피 정도는 마실 수 있겠지. 파라다이스 비치에서 말야.”
시로가 나에게 말하면서 미소지었습니다.
“준배, 피곤하면 운전 교대해도 좋아.”
나는 남포동의 여관 따위는 절대로 들어가고 싶지 않았지만 준배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넌 운전을 난폭하게 해서 안 돼. 돌아올 때는 시로가 한다고 했으니 괜찮아.”
부산에 도착한 것은 저녁이 막 시작되려고 하는 무렵이었습니다. 무엇보다 배도 고프고 오랫동안 차를 타고 있어서 피곤했지만 해운대로 가기로 했습니다. 엄청나게 길은 좁고 차들도 많았고 신호등을 지키는 차는 하나도 없는 것 같았습니다. 도로는 먼지와 소음과 차들로 가득했습니다. 해운대에 도착해서 우리는 파라다이스 비치로 가서 커피를 마시기로 했습니다. 그 사이 시로는 친구에게 전화하고 있었습니다. 파라다이스 비치의 커피숍에서 나는 그녀를 처음 보았습니다. 그녀가 커피숍 안으로 걸어 들어왔을 때 많은 사람들의 눈길이 그녀에게 쏠렸습니다. 준배나 시로의 눈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녀는 키가 컸고 물기 머금은 채 길게 찢어진 아름다운 눈동자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미용실에 다녀온 듯 컬이 들어간 머리는 어깨에서 물결치고 마치 금방 결혼식장에 입장하려 하는 신부처럼 섬세한 레이스 무늬가 들어간 블라우스와 스커트를 입고 값비싸 보이는 소가죽 샤넬 핸드백을 들고 있었습니다. 자신을 쳐다보는 사람들의 시선 따위는 별로 신경쓰고 있지 않은 듯이 태연한 걸음걸이로 빈 테이블을 찾아 앉았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것에 굉장히 익숙해져 있는 태도였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런 식의 시선을 즐기거나 의식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뭐라고 할까요, 당연하게 생각하면서 좀 귀찮아하는 그런 식이라고 할까요. 그녀는 그렇게 태어났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거라고 믿고 있으면서 초조한 듯이 테이블보 가장자리를 만지작거리고 있었습니다.
“나는 언제나 저런 여자들을 한 번 사귀어봤으면 하고 바랬어.”
준배는 시로에게 말했습니다.
“저런 여자들은 속옷을 어떤 것을 입을까.”
“뭐, 별다른 것이 있을까. 의외로 시시하게 캘빈 클라인 정도로 차리고 있을지도 몰라.”
시로가 적당히 대꾸해주었습니다.
“넌 어때, 속옷을 뭘 입지?”
준배가 나에게 물었습니다.
“난 언제나 할인매장에서 사.”
“마리 넌 레이스가 달린 걸 좋아하니?”
시로가 우리들 몫으로 커피와 아이스크림과 매실 주스를 시키면서 물었습니다.
“전혀 아냐. 난 면으로 된 것만 사.”
“저런 여자들은 이름이 뭘까.”
준배는 여전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김소연.”
시로가 대답했습니다.
“그건 너무 평범해. 민영이라든지 정우라든지 산희 뭐 그런 이름을 갖고 있을 거 같군.”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난 저 여자가 김소연이라는 데 걸겠어.”
“어떻게 그렇게 자신할 수 있지?”
“나 아마 그녀를 알고 있는 거 같아. 몇 년 전에 알고 지내던 여자가 아니었을까 생각이 들고 있는 중이야.”
시로는 안경을 올리면서 준배에게 말했습니다. 그때 우리들의 시선을 느꼈는지 그녀가 우리를 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눈동자가 커졌습니다. 우리가 영문을 모르고 있는 사이에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우리들의 테이블로 걸어왔습니다.
“시로.”
그녀의 목소리는 호흡을 미처 정리하지 못해 거슬릴 정도로 굴곡이 심했습니다.
“너 시로 맞지?”
시로는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와 악수했습니다. 그리고 의자를 권했습니다.
“넌 소연이지, 김소연.”
“여기서 이렇게 만나다니 꿈인가 생각했어.”
“우리들은 음, 휴가를 보내러 왔어. 이 친구는 준배라고 하고 여기는 마리라고 하지. 우리는 모두 친구야.”
시로는 우리들을 소개했습니다. 준배는 깨지기 쉬운 설탕과자를 잡듯이 소연의 손을 잡았고 나는 그냥 고개를 숙여 인사했습니다. 시로가 우리는 모두 친구야 할 때 그 말투는 어쩐지 과장되어 있다고 나는 느꼈습니다. 시로는 소연이란 여자와 벽을 두어야 할 필요가 있거나 아니면 반대로 벽을 가장하여 그녀에게 다가가려 하고 있는지도 몰랐습니다.
“친구들이라고?”
소연은 좀 멍한 표정을 지어 보이면서 우리들을 둘러보았습니다.
“이곳에서 묵을 거니?”
“아닙니다, 우리는 남포동으로 갈 거예요.”
준배가 재빨리 소연에게 대답했습니다.
“너는 여기 어쩐 일이야?”
시로가 소연에게 물었습니다.
“나, 난 내일 중요한 약속이 있어서 여기 뷰티 숍에 들렀어. 시원한 것이 마시고 싶어서 이곳에 들어왔어. 여기서 시로 너를 만나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어.”
“사 년 만인가, 아니면 오 년?”
“팔십팔년에 마지막으로 만났으니까. 오래되었지.”
“계속해서 부산에서 살았어?”
“아니, 난 일 주일 전에 내려왔어. 계속 서울에 있었어.”
그리고 소연은 덧붙였습니다.
“너도 그랬니?”
시로는 음 하고 간단하게 대꾸했습니다. 그것이 김소연을 처음 본 자리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상하지 못하게 김소연과 어울리게 되었습니다. 나나 준배는 너무나 당연하게 그녀를 이전에는 만난 일이 없었고 시로와도 팔십팔년 이후로 만난 일이 없다고 했습니다. 소연은 차를 마시고 나서 나와 함께 화장실로 갔습니다. 거기서 그녀는 핸드백에서 페이저를 꺼내더니 꺼버렸습니다. 그리고 거울을 들여다보면서 눈치채지 못하게 한숨을 쉬었습니다. 그녀는 꽤 공들인 화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무척 예쁘네요.”
내가 칭찬하니 그녀는 살짝 얼굴을 붉히며 오늘 사진촬영을 할 일이 있었다고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남자들이 기다리는 로비로 나갔습니다. 소연의 블라우스와 내 흙투성이 청바지는 좋은 대조가 되어서 나는 가능하면 그녀와 나란히 서서 걷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 다음에 우리가 간 곳은 남포동에 있는 NASA라는 나이트클럽이었습니다. 그곳으로 우리를 데리고 간 사람은 준배였습니다. 그곳에서 우리들은 어리석게도 취해버렸습니다. 나는 준배가 정말로 소연에게 어떤 속옷을 입고 있는지 물어볼까 봐 조마조마했습니다. 그러면 그녀가 화낼 테니까요. 소연이 신경쓰고 있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 시로 한 사람인 것은 분명했지만 우리에게도 예의 바르게 하려고 애쓰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적당한 순간이 되었을 때 준배에게 어떤 일을 하고 있느냐고 묻기도 했고 나에게 현대백화점에서 쇼핑할 일이 있으면 자기가 도와줄 수 있다고 연락하라는 말까지 했습니다. 준배와 나는 그녀와 명랑하게 얘기했지만 그녀가 시로에게 말을 걸면 우리는 약속한 듯이 입을 다물고 술을 마셨습니다.
“시로, 마리는 너의 여자야?”
소연은 그렇게 시로에게 물었습니다.
“그렇다고 할 수도 있고 아니라고 할 수도 있지.”
시로는 웃지도 않고 말했습니다.
“그건 무슨 뜻이야, 시로?”
“마리는 준배와 나 모두의 여자이기도 하고 그리고 아무에게도 속해 있지 않기도 하니까.”
그런 식의 농담은 준배와 시로가 언제나 주고받곤 하던 농담이었습니다. 우리들 중에서 그 농담을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은 소연 한 명뿐이었습니다.
“시로, 넌 내가 여기 있는 것 알고 온 게 아니야?”
“난 정말 몰랐어. 우리는 그냥 휴가를 떠난 거야, 휴가라구.”
“우리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너는 곧 유학을 떠날 것처럼 말했어.”
“그땐 그랬지.”
“그런데 왜 떠나지 않았어?”
“일이 꼬였어.”
“넌 계속 서울에 있으면서 연락 한 번 하지 않았어.”
“우린 끝났잖아.”
“그때 난 아니었어.”
“하지만 지금, 지금은 끝난 거잖아.”
“그때 넌 일방적이었어.”
“지금은 아무것도 아니잖아.”
“…….”
“부정하지 못하지?”
소연은 고개를 돌리고 술을 마셨습니다. 이렇게 다 취해버리면 운전은 누가 하나 나는 좀 걱정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나도 곧 취해서 스테이지에서 춤추다 보니 걱정 따위는 사라졌습니다. 어차피 뭐 어때, 하고 나는 춤추면서 생각했습니다. 죽었다 깨어나도 나는 소연처럼 그 존재 자체로 남자들에게 빛이 되는 그런 여자는 되지 못할 것이고 준배에게 나는 있어도 없어도 그만인 그런 여자친구였을 것입니다.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 준배가 돈을 많이 벌고 호텔에서 스테이크를 먹고 고급차를 모는 신분이 된다면 준배는 나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준배가 나를 여자친구로 인정하고 데리고 다녔던 것은 갬블러로 살아가는 준배의 생활을 간섭하지 않으면서 내가 준배를 좋아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마 그랬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예쁘지도 않고 품위가 있는 것도 아니고 교육을 많이 받았거나 돈이 많은 것도 아닙니다.
“당신, 어떻게 해서 시로를 알게 됐죠?”
스테이지 위에 소연이 올라와서 내 귓가에 대고 물었습니다. 소연은 그날 많이 취해 있었고 이마에 한줄기 땀이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대형 에어컨이 있었지만 격렬하게 춤추기에는 아무래도 더웠으니까요.
“준배를 통해서 알게 된 것뿐이에요. 준배는 시로를 당구장에서 만났죠.”
“당구장이라구요?”
소연은 이마를 찡그리고 손바닥으로 이마의 땀을 닦았습니다. 그녀는 좀 지쳐 있는 것같이 보이기도 했습니다.
“어디에 있는 당구장이죠? 혹시 당구 클럽 아카데미?”
“아녜요. 준배는 그런 곳에 가지 않아요. 영등포 시장 안에 있는 거라고 들었어요.”
소연은 입을 다물었습니다. 그녀는 어지러운 듯이 눈을 감더니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했습니다. 내가 괜찮다면 같이 갔으면 좋겠다는 말도 덧붙였습니다.
“좋아요.”
내가 괜찮다고 하자 우리는 화장실로 갔습니다. 소연은 자리에 들러 핸드백을 챙겼습니다. 마치 소중한 것이 들어 있는 것 같다고 말하자 소연은 좀 부끄러워했습니다.
“사실은 담배도 피우고 싶고, 그래서요.”
“당신 같은 사람이 끽연자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요.”
“좀 부끄러워요, 난. 많이 피우지는 않지만 오늘은 흥분되어서 그런지 피우고 싶어요.”
화장실에 들어가 소연은 담배를 피우고 손을 씻었습니다. 소연이 찬물을 얼굴과 목에 끼얹었습니다. 그녀의 얼굴은 눈에 띄게 붉었습니다. 그녀는 핸드백 속에서 작은 유리병을 꺼내더니 알약을 꺼내 수돗물로 삼켰습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냥 신경안정제일 뿐이에요, 하고 말하면서 웃었습니다. 소연의 화장은 땀으로 지워지고 마스카라는 번졌습니다. 소연은 손수건에 물을 묻혀 얼굴을 닦았습니다.
새벽까지 우리는 즐거웠습니다. 아니 단순히 즐거웠다고 말하기에는 부족한 뭔가가 있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소연은 시로에게 다가가려고 했고 준배는 소연에게 추근대려고 했고 시로는 일부러 나와 연인인 척했고 나는 준배와 덜 친한 척했습니다. 그래서 소연은 나를 질투했고 춤추다가 준배가 슬쩍 엉덩이를 만져도 모른 척하고 있었으며 그러면서 시로가 나와 얼마나 친한지 탐색하려 했고 내가 싸구려 에나멜을 손톱에 칠하고 있고 슈퍼마켓에서 산 선글라스를 가지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자 노골적으로 날 경멸했으며 마침내 새벽이 되자 자정의 시계 소리를 들은 신데렐라처럼 자리에서 일어섰습니다.
“시로, 난 가야 해.”
“이 시간에 어디로 간다는 거야?”
시로는 내 어깨에 팔을 올리고 있으면서 대꾸했습니다.
“해운대에 아파트가 있어.”
소연의 발음은 불분명했습니다.
“키가 어디 있을 텐데.”
“하루 정도 집에 안 들어가면 어때? 우리와 같이 여관으로 가.”
준배가 소연을 끌어안듯이 하며 자리에 앉혔습니다.
“아니, 난 내일, 아니 오늘이구나, 중요한 약속이 있어. 들어가서 잠을 좀 자둔 다음 나가봐야 해.”
“얼마나 중요한 약속인데 그래, 취소하면 안 될까?”
준배가 미련이 남는다는 듯이 소연의 팔을 놓지 않으며 물었습니다.
“중요한 약속이야. 변경할 수 없어.”
소연은 테이블 바닥을 내려다보면서 침통하게 말했습니다. 시로가 소연을 향해서 몸을 내밀고 물었습니다.
“그 중요한 약속이란 것은 몇시지?”
“저녁 일곱시.”
“장소는 집에서 가까운 곳이겠지?”
“해운대 감리교회.”
우리는 잠시 침묵을 지켰습니다. 나이트클럽 안은 여전히 시끄러워서 대화를 하려면 소리를 질러대야 하는 상황이었으니 침묵이라는 것은 이런 경우에 좀 이상하지만요. 소연이 갑자기 울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소리없이 눈물만 흐르고 있어서 나는 소연이 땀을 흘리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시로가 내게 키스했습니다. 가벼운 키스였습니다. 잘 자라는 인사나 아니면 이제 헤어질 때가 되었으니 다시 만날 때까지 건강하라는 식의 그런 입맞춤이었죠. 나와 시로와 준배는 모두 그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시로의 입에서는 맥주 냄새와 바나나 껍질 냄새가 났습니다. 우리는 이제 슬슬 일어나 준배가 알고 있다는 여관으로 돌아가야 할 때라고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때 말 한마디 없이 시로와 나를 보고 있던 소연이 몸을 반쯤 일으키더니 어떻게 해볼 겨를도 없이 시로의 뺨을 때렸습니다. 찰싹, 하고 금속성의 꽤 큰 소리가 났습니다. 우리가 영문을 모르고 소연을 쳐다보고만 있자 소연이 연거푸 시로의 뺨을 세 번 더 때렸습니다. 찰싹, 찰싹, 찰싹.
그리고 소연은 테이블에 엎드리더니 소리내어 울기 시작했습니다.
“난 기다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렸어. 모든 것을 버리고 기다리는 것말고 내가 더이상 할 수 있는 게 없었는데.”
술에 취한 소연을 시로와 준배가 번갈아가며 안아서 여관으로 옮기는 일은 힘들었습니다. 차는 나이트클럽 앞의 거리에 그냥 세워놓기로 했습니다. 모두 취했으니까요. 소연은 시로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했습니다만 제정신인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여관은 남포동 뒷골목의 초라한 벽돌길 사이에서 이끼와 곰팡이 냄새 나는 벽들로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준배는 이미 나이트클럽에서 꽤 많은 돈을 썼기 때문에 여관비는 나와 시로가 나누어서 냈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방을 하나밖에 빌리지 못했습니다. 소연을 침대에 누이고 우리는 불을 끄고 누웠습니다.
“주사위 하나와 카드 한 벌만 있으면 시간을 지루하지 않게 보낼 수 있는데.”
준배가 어둠 속에서 중얼거렸습니다.
“소연, 너 그렇게 많이 마시고 내일 화장이 잘 받을까 몰라.”
시로가 침대 위의 소연에게 묻자 소연이 흐흥 하고 코웃음으로 대꾸했습니다. 나는 잠이 전혀 오지 않았지만 어떻게 해서든 잠을 자려고 노력하는데 잠들지도 않은 채 꿈을 꾸었습니다. 누군가 내 몸을 만지는 것 같았습니다. 어둠 속에서 흰 옷을 입은 소연이 방을 나가고 있었습니다. 여관은 욕실이 복도 끝에 있었습니다. 누군가 소연, 화장실에 자주 가는군, 하고 놀렸습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요. 나는 잠시 잠이 들었다가 깨었다고 생각합니다. 아직 채 날이 밝지는 않았습니다. 준배가 침대 위에 앉아 있었습니다.
“안 자?”
불을 켜지 않았지만 방 안에는 소연도 시로도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잠이 안 와.”
나는 반듯하게 누운 채 천장을 보면서 대답했습니다. 번쩍거리는 싸구려 합판 가구로 만든 화장대 위에 소연의 핸드백이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다른 애들은?”
“산책을 나갔어.”
“이 시간에?”
“음.”
“아무 일도 없었어?”
“그럼, 무슨 의미로 묻는 거야?”
준배는 화도 내지 않고 조용하게 대꾸했습니다. 나는 갈증이 나서 화장대 위의 주전자의 물을 따라 마셨습니다.
“몰라. 특별히 무슨 생각이 있어서 물은 것은 아냐.”
물을 반쯤 마시고 컵을 화장대 위에 내려놓는데 컵의 물이 쏟아졌습니다. 아마 술을 많이 마셔서 손목의 힘이 없었나 봐요. 난 웬만큼 술을 마셔서는 정신을 잃거나 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특히 맥주를 마셔서는 별로 취하지 않았어요.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아마 지쳐 있었나 봐요. 물은 화장대에서 흘러내려 이불을 적셨습니다.
“이봐, 조심하지 않고 뭐하는 거야. 그거 마시고 취했어?”
준배가 침대에 앉은 채 잔소리를 했습니다.
“미안. 실수였어.”
타월을 가져와 바닥과 화장대를 닦았습니다. 소연의 핸드백에도 물이 묻었습니다. 나는 소연의 핸드백을 닦아주다가 문득 그 안이 보고 싶어졌습니다.
“준배, 나 이 백 안을 보고 싶어.”
준배는 아무런 말도 없이 벽에 기댄 채 앉아 있었습니다. 나쁜 일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나는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불을 켤 것도 없이 뿌연 빛이 스며들어오는 창가로 가서 앉아 나는 소연의 핸드백을 열었습니다. 무엇인가를 훔치려는 생각은 처음에는 없었습니다. 정말입니다. 준배도 없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준배는 내가 소연의 핸드백을 열고 내용물을 하나하나 꺼내보는 것을 구경만 하고 있었습니다. 평소의 준배와 다르다는 것을 빨리 알았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나는 준배가 운전에 지친데다가 잠을 못 자서 그럴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소연의 핸드백에서 내가 가장 처음에 꺼낸 것은 지난 저녁에 파라다이스 비치의 화장실에서 소연이 꺼버린 페이저였습니다. 그것은 여전히 꺼져 있었습니다.
“준배, 소연이 무슨 일을 하는 여잔지 알고 있어?”
“백화점의 디스플레이 일을 한다고 하더군.”
“소연은 아직도 시로를 좋아하고 있는 것 같아.”
“우리와 상관없는 일이잖아.”
샤넬의 케이크 아이섀도와 립스틱 팔레트와 작은 향수같이 어느 여자들이나 지니고 있는 자질구레한 것들을 소연도 갖고 있었습니다. 향수를 흠뻑 뿌린 손수건과 지갑과 가죽 케이스의 메모지와 알약이 들어 있는 유리병과 만년필과 티슈에 싸여진 반지. 진짜 다이아몬드일까? 나는 반지를 먼지투성이 유리창에 비춰보았습니다. 흰 봉투에 싸인 꽤 많은 현금이 나온 것은 의외였습니다.
“준배, 백만원은 되겠는데.”
내가 봉투를 보여주자 준배는 도로 넣어두라고 했습니다.
“당연히 도로 넣어둘 거야. 그냥 구경만 하는 거라니까. 너도 그녀의 속옷을 궁금해했잖아. 나도 그러는 것뿐이라니까.”
“나는 남자니까 그렇지.”
“그만둬, 그녀는 부자고 나는 가난해. 그러니 호기심 정도야 가질 수 있는 거 아냐?”
마지막에 나온 것은 나무 십자가가 달린 흰 묵주였습니다. 십자가의 뒤에는 작은 글씨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나는 침대 위로 올라가 묵주를 준배의 목에 걸어주고 그를 안았습니다.
“훔치는 거야?”
“이것만.”
“왜, 다른 것이 더 탐나지 않아?”
“이것이 갖고 싶어. 결혼식의 맹세가 씌어진 묵주야.”
“마리, 나 너에게 말할 것이 있어.”
“말하지 않아도 돼, 준배.”
“지금 말하지 않으면 용기가 사라져서 말하지 못할 거야.”
“영원히 말하지 않아도 돼.”
“어젯밤 네가 잠들어 있을 때 시로가 나에게 소연의 속옷이 보고 싶지 않느냐고 물었어.”
“그래서 봤어?”
“처음부터 끝까지 소연은 차가웠어. 나는 나중에 알았어. 소연은 죽어 있었던 거야.”
나는 오싹 소름이 끼쳤습니다.
“소연은 저녁 일곱시에 결혼식에 가야 해.”
“알고 있어.”
“그래서 시로는 어디로 갔어?”
“소연을 데리고 나갔어. 아마 병원으로 갔겠지.”
“어느 병원?”
“그건 모르겠어.”
“준배, 모두 다 거짓말이지?”
“사실이야.”
“옛날에도 이런 거짓말을 했었잖아.”
“그때도 사실이었어. 아니 그때는 거짓말이지만 이번은 사실이야. 내 팔목의 맥박을 만져봐. 얼음처럼 차가운 게 느껴지지 않아?”
나는 준배의 팔목을 만져보았습니다. 정말 차가웠습니다. 그러나 나는 믿지 않았습니다. 한 번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은 또다시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이제 소연과 시로가 돌아오고 해장국을 먹으러 가는 아침이 되면 준배는 자기가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리겠죠.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어쩌면 시로는 소연을 집에 데려다주려고 나갔을지도 모릅니다. 소연의 핸드백까지는 시로는 생각하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시로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소연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나와 준배는 해가 높이 떠오를 때까지 잠들어 있었습니다. 날이 밝자 이끼와 곰팡이투성이의 담이 열린 창문 밖으로 드러나고 쥐들이 돌아다니는 소리와 썩은 수돗물 냄새가 났습니다.
“준배, 시로는 돌아온다고 했어?”
“모르겠어.”
“전화도 하지 않고 어디로 가버렸을까.”
“아마 일곱시의 결혼식에 갔을 거야.”
“…….”
우리는 복도 끝의 욕실에서 대강 씻고 여관을 나왔습니다. 소연의 핸드백을 메고 나는 거울 앞에서 맵시를 살폈습니다. 키 작고 청바지 차림인 나에게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준배의 수트는 엉망으로 구겨져 있었지만 할 수 없었습니다. 나이트클럽 NASA에 도착하자 더 큰일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누군가 타이어를 전부 다 펑크내버린 겁니다. 네 개 전부 다요. 준배는 평소에 알고 있던 모든 욕설을 동원해서 저주를 퍼부었습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죠. 아직 나이트클럽은 오픈하지 않았고 이마와 목덜미에 내려꽂히는 햇빛은 현기증을 일으킬 정도로 강했습니다. 도로의 곳곳은 파헤쳐져서 지하철 공사나 가스관 공사를 하고 있었고 자욱한 먼지는 지상 십 미터까지 고여 있는 듯했습니다. 그리고 어디에나 넘치는 소음, 소음. 껍 씹는 소리와 침 뱉는 소리도 천둥처럼 들렸습니다. 서울 번호판인 차가 불법주차 되어 있으니 상인들 중 누군가가 타이어를 펑크냈겠죠. 당장 가진 돈도 없이 이런 일을 당했으니 준배가 화를 내는 것도 당연했습니다.
“다시는 부산에 오지 않겠어, 다시는. 내가 이 빌어먹을 도시에 다시 온다면 사람도 아니지.”
간신히 수소문한 정비소에 차를 견인시키고 돌아오면서 준배는 투덜거렸습니다.
“이 빌어먹을 도시에 사는 사람들도 모두 다 저주할 거야. 빌어먹을 바다나 빌어먹을 여관도 모두 다. 온통 빌어먹을 것뿐이야.”
“준배, 난 여기가 서류상의 고향이야.”
준배는 그 말을 듣자 무섭게 눈을 부릅떴습니다. 우리는 무덥고 지쳤습니다. 나는 무엇보다도 끊임없이 계속되는 이 소음에서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억센 말투, 포장도로를 뚫는 해머의 진동, 자동차의 경적 소리, 광기에 가득 찬 싸움, 오토바이의 엔진음, 노점상들의 호객. 나와 준배는 손을 잡고 도망치듯이 소음 사이를 달렸습니다. 우리는 어느새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고 마침 버스가 한 대 앞에 와서 멈추자 이것저것 생각할 겨를도 없이 버스에 올라탔습니다. 울컥, 구역질과 함께 현기증이 났습니다. 나는 철퍼덕 버스 바닥에 주저앉았습니다.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햇빛과 소음에 사정없이 지친 때문이었겠죠.
“우리 어디로 가는 거지?”
준배가 나를 내려다보면서 물었습니다.
“아무 데나 가서 내리면 돼.”
“이 버스는 어디로 가?”
“나도 몰라.”
부산은 이상한 도시였습니다. 어쩌면 그렇게 하염없이 길기만 한지. 어쩌면 그렇게 높은 벼랑에 집들을 짓고 마을을 만들어놓았는지. 우리가 내린 곳은 하역작업을 하는 부두였습니다. 좁은 바다가 흐르고 있고 그 위로 붉은 다리가 놓여져 있었습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바닷물 냄새와 선박 기름 냄새가 뭉클거리며 달려들었습니다. 이마에 검은 땀방울을 흘리는 사람들이 돌아다니고 있었습니다. 벽돌을 깐 길은 시커먼 기름이 흐르고 있고 부둣가에는 컨테이너들이 끝없이 들어서 있고 그늘 하나 없었습니다. 우리는 걸어서 붉은 다리를 건너기로 했습니다. 다리 위에는 트럭들이 질주하고 뿌연 먼지에 앞이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내가 다리의 난간에 기대자 손과 티셔츠에 붉은 녹가루가 묻었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다리 난간에 기대야 했습니다. 토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 꼴로 결혼식에 갈 수 있을까?”
준배가 내 등을 두드려주면서 물었습니다.
“준배, 난 교회에 들어갈 수가 없어. 이런 차림인걸.”
“상점에 가서 수돗물이라도 얻어 올까? 너 너무 지쳐 보인다.”
“난 괜찮아. 조금만 쉬면 좋아질 거야.”
그때 나는 보았습니다. 붉은 다리 아래의 더러운 기름투성이 바닷속에 반쯤 가라앉은 채 둥둥 떠가는 소연의 모습을. 처음에 그것을 보았을 때는 너무 현기증에 지쳐서 헛것을 보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헛것이 아니었습니다. 소연은 컬이 풀어져서 엉망이 된 머리를 하고 값비싸 보이는 레이스의 블라우스를 입은 채로 부둣가의 좁은 바다에 잠겨 있었습니다. 그런 레이스의 블라우스는 흔한 것이 아닙니다. 아무나 살 수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소연의 발은 신발이 벗겨져 있었고 스커트는 더러워진 채 다리에 휘감겨 있었습니다. 화장은 지워지고 입술은 퉁퉁 부르튼 채 그리고 눈은 멍하니 뜬 채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소연은 나를 알아보지 못하고 천천히 흘러갔습니다. 당연하겠죠. 그녀는 나를 잘 알지 못하고 이미 죽어버린 지금 나는 너무나 무의미한 존재였을 테니까요. 이 말을 듣는 사람들은 아마 믿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준배도 그랬습니다. 준배는 내가 소연을 물 속에서 보았다는 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넌 언제나 거짓말만 하잖아, 하고 말했을 뿐입니다.
“더위를 먹어서일 거야.”
준배가 내 이마에 손을 얹으면서 말했습니다.
“준배, 네가 소연을 바다에 버렸니?”
“아니.”
나는 붉은 다리 난간에 기대어 앉았습니다. 검은 기름이 둥둥 뜬 바다가 난간 사이로 내려다보였습니다. 준배는 이마에 땀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나는 소연의 핸드백에서 손수건을 꺼내 준배의 땀을 닦아주었습니다. 빌어먹을, 지독한 더위야, 하고 준배가 말했습니다. 손수건에서는 숨막히는 향수 냄새가 났습니다. 타이를 풀어헤친 준배의 셔츠 깃 사이로 나무 묵주가 보였습니다. 나는 어쩐지 안심하는 마음이 들었어요. 바깥 세상은 끝도 없이 엉킨 실타래의 혼란투성이지만 준배는 내 곁에 있습니다. 그러면 되는 것 아닌가요. 어렵게 생각하려고 하면 할수록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습니다.
“준배, 우리 돌아가자.”
“시로와 결혼식에 참석하기로 약속했잖아.”
“시로는 잊어, 그는 우리와 같은 종족이 아니야.”
“소연의 가방을 돌려줘야 하잖아.”
“누구에게?”
준배는 말이 없었습니다. 준배와 나는 두 마리 개처럼 부둣가 붉은 다리 위에 앉아 있었습니다. 나는 눈을 감았습니다마는 더러운 물 속을 멍하니 풀어진 표정을 하고 떠가던 소연의 얼굴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나는 준배를 만나지 않고 살아갈 수도 있었고 준배는 시로와 함께 내기 당구 같은 것을 치지 않고 시간을 보낼 수도 있었고 소연은 우리를 만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다른 방법으로도 우리는 다른 세계에서 충분히 즐기면서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준배는 소연 같은 여자를 텔레비전 화면으로만 만나고 나는 준배를 사랑하지 않고 시로는 대학 앞의 당구장에서만 당구를 친다면.
“해운대.”
준배가 지나가는 차들을 향해서 한 손을 높이 쳐들고 외쳤습니다.
“태워줄까요?”
우리를 태워준 차는 냉방 장치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간신히 숨을 쉴 수 있었습니다. 차에 타고 있던 남녀는 검은색 정장을 입었습니다.
“해운대 어디까지 가나요?”
운전을 하고 있던 남자가 물었습니다. 부산의 언어는 아니었습니다. 이들도 다른 곳에서 여름을 보내기 위해 찾아온 것 같았습니다.
“해운대 감리교회.”
준배가 짧게 대답했습니다.
“어쩜, 우리도 그곳으로 가는데. 오늘 저녁 그곳에서 결혼식이 있어서요.”
앞자리의 여자가 나를 뒤돌아보며 미소지었습니다.
“결혼식에 참석하러 가시나요? 저녁 일곱시의 결혼식이라니, 드문 일이죠.”
준배는 하얗게 질린 채 아무런 말도 없이 창 밖을 쳐다보기만 했습니다. 나는 소연의 핸드백에서 티슈에 싸인 반지를 꺼내서 밝은 빛 아래서 보았습니다. 아름다웠습니다. 네번째 손가락, 네번째 손가락이야. 거기다 끼워봐. 준배가 말했습니다. 반지는 좀 끼었지만 나의 네번째 손가락에 들어갔습니다. 손가락을 쳐들고 밝은 빛 아래서 보니 마치 내 모든 몸의 다른 부분도 내 인생의 다른 부분도 반지처럼 아름다워진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반지처럼, 지금 우리가 타고 있는 고급차처럼, 마치 소연처럼. 나는 관객처럼 객관화된 비극을 감상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 해가 지나고 난 다음에 나는 그런 파편화된 느낌들이 형상화되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어떤 얼굴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그 얼굴이 스쳐 지나갈 때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습니다. 낯선 얼굴이었으니까요. 그런데 그 얼굴이 지나간 뒤 한참이나 흐른 뒤에 나는 내가 그를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낯선 얼굴이고,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것이 분명하지만 말입니다. 그곳은 서울역 광장이었습니다. 비둘기가 떼지어 날아오르고 있었습니다. 나는 뒤를 돌아보고 그 낯선 얼굴을 찾았습니다. 나는 멋진 앤클라인 가을 투피스를 입고 좀 오래되었지만 새것보다 더 고급스러운 소가죽 샤넬 핸드백을 들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간혹 나를 돌아보기도 합니다. 낯선 얼굴은 보이지 않습니다. 역 근처를 배회하는 사람들은 대개 병들고 굶주린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나는 점점 걸음을 빨리 합니다. 건물과 건물의 틈새, 포장마차의 질척한 뒷면, 코인 로커 앞에서 서성이는 부랑자들, 싸구려 기름 냄새를 풍기는 튀김 가게들. 나는 끊임없이 헤매입니다. 마침내 지하도 아래로 내려온 나는 플라스틱 벤치에 누운 한 낯선 얼굴을 발견하고 그에게 묻습니다.
준배, 당신은 준배 아닌가요?
아니오.
그가 귀찮다는 듯이 돌아눕는데 그의 목에 걸린 흰 나무 묵주가 흔들리는 것이 보입니다. 결혼식의 맹세를 할 때 쓰는 것입니다. 나는 그 얼굴을 쳐다봅니다. 그러나 나에게는 너무나 낯선 얼굴입니다. 도무지 존재했을 것 같지 않은 존재의 기억. 내 인생과 아무런 상관 없는 결혼식의 묵주. 결코 친구가 될 수 없는 사람들, 목요일 저녁 일곱시의 감리교회. 이 세상에서 정말로 일어났던 일은 아마도 아무것도 없을 것입니다. 나를 포함해서 많은 사람들이 거짓말을 하고 있겠죠. 그리고 길게 드리워진 신부의 베일을 쓰고 교회 안으로 내가 걸어 들어가면 사람들은 아무도 나를 알아보지 못하고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