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미헌집 제9권 / 비(碑)
강호 김 선생 신도비명 병서(江湖金先生神道碑銘 並序)
선생의 휘는 숙자(叔滋)이고 자는 자배(子培)이며 호는 강호(江湖)이다. 일선 김씨(一善金氏)는 고려 시대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낸 시호가 순충(順忠)이라는 분에서 시작되었는데, 그는 전공을 세워 임금에게 활과 화살을 하사받고 또 선궁(宣弓)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았다.
이분으로부터 이후로 빛나는 인물이 이어지고 현달한 인물이 계속 나왔다. 증조부의 휘는 광위(光偉)로 양온령(良醞令)을 지냈고, 조부의 휘는 은유(恩宥)로 사재령(司宰令)을 지냈으며 참의(參議)에 증직되었다. 아버지의 휘는 관(琯)으로 진사(進士)를 지냈으며 참판(參判)에 증직되었는데, 효행이 있었다.
어머니는 정부인(貞夫人) 인동 유씨(仁同兪氏)로 고려 시대 소부소윤(少府少尹)을 지낸 인귀(仁貴)의 따님이다. 홍무(洪武) 기사년(1389, 창왕1)에 일선 연봉리(延鳳里) 선친의 집에서 선생을 낳았다. 선생은 7, 8세〔齠齔〕때부터 총명하고 비범하였다.
겨우 12세에 야은(冶隱) 길 선생(吉先生)을 따라 배워, 물뿌리고 쓸며 응하고 대답하는 방도에 직분을 극진히 하였고, 선을 밝히고 몸을 성실하게 하는 공부에 힘썼다. 15세가 되어서는 향학(鄕學)에서 학업을 익혔는데 붕우와 더불어 장난치지 않았으며, 단정히 앉아 독서하는 것을 종일토록 그만두지 않았다.
별동(別洞) 윤상(尹祥) 선생에게 《주역(周易)》을 배웠다. 갑오년(1414, 태종14)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태학(太學)에서 유학하였는데, 문정(文貞) 조용(趙庸), 문숙(文肅) 변계량(卞季良), 참판(參判) 박이창(朴以昌), 제학(提學) 조상치(曺尙治) 등 모두가 경술(經術)과 문행(文行)에 뛰어난 것으로 선생을 추대하여 앞세웠다.
세종 기해년(1419, 세종 1)에 문과에 급제하여 학유(學諭)에 임명되었다. 신축년(1421, 세종 3)에 사관(史官)에 수석으로 선발되었는데, 마침 선생을 해치는 자가 있어 파직되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어버이를 봉양할 때에는 뜻과 몸〔志體〕을 극진히 길렀다.
자제를 가르칠 때에는 일찍이 “학문하는 데 있어서는 단계를 뛰어넘어서는 안 된다.”라고 말하고는, 초보 단계에서 《동몽수지(童蒙須知)》, 《유학자설(幼學字說)》, 《정속편(正俗篇)》을 가르치고 배운 내용을 모두 배송(背誦)하게 하였고, 그러한 뒤에 《소학(小學)》에 입문하게 하여 어버이를 섬김, 어른을 공경함, 스승을 높임, 벗과 친하게 지냄 등에 종사하여 그 본원의 마음을 함양하게 하였다.
그 다음으로 《효경(孝經)》을, 그 다음으로 《대학(大學)》, 《논어(論語)》, 《맹자(孟子)》, 《중용(中庸)》을, 그 다음으로는 《시경(詩經)》, 《서경(書經)》, 《춘추(春秋)》, 《역경(易經)》을, 그 다음으로는 《예기(禮記)》를 배우게 한 뒤에 여러 역사서와 제자백가서에 이르도록 하였다.
활쏘기를 배우는 데 이르러서는 또한 금지하지 않고 말하기를 “활과 화살은 몸을 보위하는 물건으로 익숙히 익히지 않을 수 없으니, 고인들은 이것으로 덕을 관찰하였다.”라고 하였다. 글씨 쓰기를 권장하면서 말하기를 “글씨는 마음의 획〔心劃〕이니, 해서(楷書)는 반드시 방정하게 써야 하고 초서(草書)와 전서(篆書)는 또한 모름지기 정밀하고 익숙하게 하고자 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사람의 자식 된 자가 평상시에 상례와 제례의 절문(節文)을 강구하지 않고 있다가 갑자기 다급한 상황에 맞닥뜨리면 망연히 아는 것이 없어 혹 불교의 습속에 빠지기도 하고 혹 무당의 습속에 빠지기도 하는 것은 매양 여기에 원인이 있다.”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책을 읽을 때에는 고인(古人)의 찌꺼기라고 말하지 말고, 힘써 자신의 분수 안의 일로 체인(體認)하고자 해야 한다. 그래서 곤궁할 때는 자신의 몸에 실천하고, 현달하여서는 남을 다스리되, 일체 성현(聖賢)을 본받아야 한다.”라고 하였다. 더욱이 사람을 가르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아, 반드시 상세히 양쪽 단서를 들추어내어 깨닫게 한 뒤에야 그만두었다.
신해년(1431, 세종 13)에 아버지 상과 어머니 상을 연달아 당하였는데, 초상(初喪)에는 한 잔의 물도 마시지 않았고 빈소를 차리자 죽을 먹었으며, 장례를 치르고는 여묘(廬墓)에서 지냈는데, 삼년상을 마치도록 수질과 요대를 벗지 않았으며 한 번도 집에 온 적이 없었다.
이 당시 나라의 풍속은 고려 시대의 폐단을 답습하여 상례를 치를 때 불교의 법식을 사용하였다. 선생께서 마음으로 항상 개탄하면서 염과 습 그리고 소상과 대상을 치름에 특별히 주문공(朱文公)의 《가례(家禮)》를 정통으로 삼았으니, 이로 인하여 민가의 풍속이 교화됨이 많았다.
기미년(1439, 세종 21)에 임금께서 경학에 밝고 행실이 닦여진 사람을 뽑아 사유록(師儒錄)을 비치하도록 명령하였는데, 선생은 수천(首薦)에 자리하여 즉시 세자 우정자(世子右正字)에 임명되었다. 신유년(1441, 세종 23)에 김해 군수(金海郡守)에 임명되었으며 임술년(1442, 세종 24)에 고령 현감(高靈縣監)으로 전직하였다.
정묘년(1447, 세종 29)에 다시 성균관 주부(成均館主簿) 겸 남학 교수(南學敎授)가 되었다. 기사년(1449, 세종 31)에 개령 현감(開寧縣監)이 되었는데, 세종께서 승하하시자 대궐을 향해 통곡하여 실성하고서야 그만두었으며, 문종(文宗)이 돌아가셨을 때도 또한 그와 같이 하였다. 이 때 선생께서 바야흐로 질병이 들었기에 고을의 사람들이 육즙을 올리려 하였으나 거절하였다.
현에 서씨(徐氏)라는 백성이 있었는데, 어려서 아버지를 잃었으며 어머니상을 당하자 아버지의 시신을 이장하여 어머니와 합장하고 또 아버지에 대하여 추급하여 삼년상을 지냈다. 이에 선생이 말하기를 “이 사람은 전답을 가꾸는 농부이나 그 지극한 성품은 가상히 여길 만하다.” 하고는 이에 그 집의 세금을 면제해주었다.
여러 번 고을을 맡아 다스림에 정치가 한결같았다. 일찍이 말하기를 “토지가 있고 백성이 있으면 또한 우리 유학을 실행할 수 있다.”라고 하면서, 혁혁한 명성을 구하지 않고 오로지 더러운 풍속을 혁파하고 육행(六行)을 흥기시키는 것에 힘썼다. 봄과 여름마다 추종(騶從)을 간소하게 하여 천맥(阡陌 농지) 사이를 출입하였다.
백성 중에 종자(種子)가 없는 이에게 종자를 빌려주었으며, 먹을 것이 없는 백성에게는 식량을 주휼해주었으며, 부지런한 백성을 위로하고 게으른 백성을 징계하였다. 그리고 관청의 빈 땅에 뽕나무를 심어 백성들이 와서 묘목(苗木)을 취해 가도록 하였다.
이 때 각 고을 수령(守令)들은 모두 나이(那移)의 법률을 두려워하였기에 의창(義倉)의 곡식이 떨어지면 가만히 앉아서 굶어 죽어 가는 사람을 보기만 하고 구제할 줄을 몰랐다. 이에 선생이 말하기를 “옛날에 한소(韓韶)는 구학(溝壑)에 뒹구는 백성들을 살리고서 웃음을 머금고 땅속에 들어가고자 하였고, 급암(汲黯)은 조칙(詔勅)을 가칭해 관창을 열어 백성을 구제하면서 처벌받는 것을 사양하지 않았으니, 참으로 백성을 살리는 데에 마음을 둔다면 어찌 법을 두려워하겠는가?”라고 하고는, 군수(軍須)를 몽땅 들어내어 백성들에게 나누어주어 구휼하였다.
을축년(1445, 세종27)과 병인년(1446, 세종28)의 흉년에 온 경내 백성들을 온전히 살렸다. 만약에 수재와 한해 그리고 폭풍과 우박의 재해가 있으면 반드시 주방장에게 자신이 먹는 음식의 가지 수를 줄이도록 하였고, 감옥의 죄수 중에 가벼운 죄를 지은 사람은 모두 사면해주었다.
일식과 월식에는 몸소 스스로 흰 옷을 입고 홀을 받들고 관청 뜰에 섰다가 일식과 월식이 없어지는 것을 보고서야 그만두었다. 연례(年例)로 조정에 올리는 공물은 모두 관청에서 스스로 준비하고 백성들에게 따로 거두지 않았다. 늙고 병든 이와 부모가 없는 어린이는 모두 은혜롭게 길러주었으며, 혼인할 때를 놓친 처녀와 총각은 돈과 물자를 넉넉히 주어 시집보내주고 장가보내주었다.
이렇게 하자 풍속이 크게 변화하고 도적들은 자취를 감추었으며, 가까이 이웃한 10여 고을도 모두 그 은택을 입었는데, 이들이 공을 ‘청수백석(淸水白石)’이라 호칭하였으며, 백성들이 거사비(去思碑)를 세워주었다. 갑술년(1454, 단종 2)에 사재감 부정(司宰監副正)을 거쳐 성균관 사예(成均館司藝)가 되었다.
그해 가을에는 외직으로 나아가 성주 교수(星州敎授)가 되었는데, 성묘(聖廟 대성전)의 소상(塑像)을 밤나무 신주로 바꾸고 아들 종직(宗直)에게 위호(位號)를 바꾸어 쓰도록 명령하였다. 희준(犧樽)과 보궤(簠簋) 그리고 의탁(倚卓)과 형점(鉶坫) 등을 정결하고 완전하게 갖추지 않음이 없었으며, 친히 석전(釋奠)에 참예(參詣)하여 손수 그 의궤(儀軌)를 살펴보고 정하였다. 제생들에게 일과(日課)를 강의(講義)하고, 1개월에 세 번씩 시험을 보아 상벌(賞罰)을 내렸다.
세조 을해년(1455, 세조1)에 벼슬을 사직하고 밀양(密陽)으로 돌아왔다. 새벽에 반드시 세수하고 빗질한 뒤 가묘에 배알하였고 저녁에도 이와 같이 하였다. 집을 출입할 때나 어떤 일이 있을 때에도 반드시 가묘에 아뢰기를 모두 살아계실〔象生〕 때처럼 하였다.
제삿날에는 반드시 친히 제수를 점검하여 빠짐이 없게 하였으며, 속절(俗節 세속의 명절)과 삭참(朔參 매달 초하루에 가묘에 참배함)에 각각 품절(品節)이 있었다. 서실에서 한가하게 거처할 때 종일토록 의관을 정제하고 앉아있었기에, 비록 처자식이라 할지라도 태만한 용모를 볼 수 없었다.
병자년(1456, 세조2) 3월 2일에 정침에서 돌아가셨으며, 밀양부 서쪽 고암산(高巖山) 분저곡(粉底谷)의 신좌(辛坐) 언덕에 장례를 지냈다. 천순(天順) 기묘년(1459, 세조 5)에 원종공신(原從功臣)으로 중직대부(中直大夫) 예문관 직제학(藝文館直提學) 겸 춘추관(春秋館)에 추증되었다.
또 헌종(憲宗) 을사년(1845, 헌종 11)에 추가로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 판서(吏曹判書) 겸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 춘추관사(春秋館事) 홍문관 대제학(弘文館大提學)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 성균관 좨주(成均館祭酒) 오위도총부 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강(文康)이니, 도덕을 갖추면서 박학한 견문을 가진 것을 ‘문(文)’이라 하고 학문의 연원(淵源)을 두고서 유통시킨 것을 ‘강(康)’이라 한다.
첫째 부인은 곡산 한씨(谷山韓氏) 변(變)의 따님이고, 둘째 부인은 밀양 박씨(密陽朴氏) 사재감 정(司宰監正) 벼슬을 지낸 홍신(弘信)의 따님이다. 종보(宗輔), 종익(宗翼) 두 아들과 김중로(金仲老)에게 시집간 딸은 한씨가 낳았다.
문과에 급제하여 직학(直學)을 지낸 종석(宗碩), 진사가 되어 관교수(官敎授)를 지냈으며 호가 고당(苽堂)인 종유(宗裕), 문과에 급제하여 판서를 지냈고 증직이 영의정(領議政)이며 시호가 문충(文忠)인 점필재(佔畢齋) 선생 종직(宗直) 아들들과 강척(康惕)과 민제(閔除)에게 시집간 딸들은 모두 박씨가 낳았다.
종석의 아들 치(緻)는 진사를 지냈고, 연(縯)은 진사에 합격하여 관교수(官敎授)를 지냈으며 호가 사지당(四止堂)이다. 종유의 아들은 회(繪), 수(綬), 굉(紘)이다. 종직의 아들 숭년(嵩年)은 참봉을 지냈으며, 딸 세 명은 왕자 사부(王子師傅) 유세미(柳世湄), 생원(生員) 이핵(李翮), 직장(直長) 신용계(申用啓)에게 각각 시집갔다. 증손자와 현손자 이하는 많아서 다 기록하지 못한다.
선생의 주손(胄孫)인 진학(鎭學)이 신도비를 세우기 위하여 나에게 비명을 지어달라고 부탁하였다. 아, 선생께서 조정에서 벼슬했던 사실과 가정에서의 의범(懿範)은 이미 점필재의 《이준록(彝尊錄)》과 참판(參判) 정공(鄭公)의 묘갈명에 모두 실려 있다.
그리고 《유종록(儒宗錄)》에 말하기를 “우리 유교가 동방으로 가서 포은(圃隱)이 야은(冶隱)에게 전하고 야은이 선생에게 전하였다.”라고 하였으니 이러한 점들을 마땅히 명(銘)해야 한다.
명은 다음과 같다.
상례를 삼가고 먼 조상을 추모하여 예로써 풍속을 바로잡은 것은 / 愼終追遠之以禮正俗
오직 선생의 효성의 법도이네 / 惟先生孝思則也
임금을 공경하고 백성을 사랑하여 도로써 조정에 선 것은 / 敬君愛民之以道立朝
오직 선생께서 선한 마음을 잡은 성실함이네 / 惟先生秉心塞也
포은과 야은을 조종으로 하여 / 祖圃宗冶
후학을 계도하였네 / 以啓後學
오직 선생의 계왕성개래학(繼往聖開來學)의 공로를 / 惟先生繼開之功
누가 감히 현양하랴 / 孰敢揚扢也
아, 선생이여 / 於乎先生
그것은 어두운 거리에 장차 밝은 일월을 회복한 것 같네 / 其如昏衢將復明之日月也歟
<끝>
[註解]
[주01] 선궁(宣弓) : 김선궁(金宣弓)의 초명은 김선(金宣)으로, 문하시중 삼중대광(門下侍中三重大匡)ㆍ정난 보국 공신(靖難輔國功臣)
에 책록되고 선주백(善州伯)에 봉해졌으며, 정종 때에 다시 대승(大丞)으로 추봉되었다. 김알지의 29세손으로 문성왕의 7세손이
며 신라 김씨 마지막 왕손인 체의공(體誼公)의 아들이다.
15세에 태조 왕건의 원정군에 종군하여 공을 세웠으며, 태조로부터 어궁(御弓)을 하사받고 선궁이라는 이름도 하사받았다. 김선궁
이 고려 개국의 일등 공신이 되고 문하시중에 올랐으므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일선(一善)으로 하였다.
[주02] 양온령(良醞令) : 궁궐에 술을 제공하는 일을 맡은 관청인 양온서(良醞署)의 영(令 정8품)이다.
[주03] 길 선생(吉先生) : 길재(吉再, 1353~1419)를 말한다. 본관은 해평(海平), 자는 재보(再父), 호는 야은(冶隱)이다. 고려 말 삼은
(三隱) 중에 한 사람이다.
[주04] 윤상(尹祥) : 1373~1455. 본관은 예천(醴泉), 자는 실부(實夫), 호는 별동(別洞)이다. 정몽주의 문인인 조용(趙庸)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396년(태조 5)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대사성에 이르렀다. 경학에 밝았고 문장에 뛰어났다. 저술로 《별동집(別洞
集)》이 있다.
[주05] 조용(趙庸) : ?~1424. 본관은 진보(眞寶), 호는 송정(松亭)이다. 정몽주(鄭夢周)의 문인이다. 1374년(공민왕 23) 문과에 급제하
여, 조선 세종 때 관직이 예문관 대제학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주06] 변계량(卞季良) : 1369~1430.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거경(巨卿), 호는 춘정(春亭)이다. 벼슬은 대제학(大提學)을 역임하였으
며, 문집으로 《춘정집(春亭集)》이 있다.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주07] 박이창(朴以昌) : ?~1451. 본관은 상주(尙州)이다. 1417년(태종17) 진사시에 합격하여 한림원에 보직되었으며, 그 뒤 우부승지
와 호조 참판, 형조 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1451년(문종1) 9월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갈 때 먼 길에 대비하여 많은 곡식을 가
져간 것이 죄가 되어 돌아오는 길에 의주에서 붙잡히게 되자 국법을 어긴 것을 뉘우치고 자결하였다.
[주08] 조상치(曺尙治) :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자경(子景), 호는 정재(靜齋)ㆍ단고(丹皐)로, 길재(吉再)의 문인이다. 1455년(세조
1) 집현전 부제학에 발탁되었고, 세조가 왕위를 찬탈한 뒤 예조 참판에 임명하였으나 사직하고 은거하면서 후학을 양성하였다.
1791년(정조 15) 단종의 장릉(莊陵)에 배향되고, ‘노산조 부제학 조상치지묘(魯山朝副提學曺尙治之墓)’라 새긴 묘비를 세워
세조의 신하가 아님을 밝혀 충의를 기렸다. 그의 시문은 임종시에 모두 소각되었다.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주09] 동몽수지(童蒙須知) : 중국 송나라 주희(朱熹)가 지은 아동 교육용 수신서(修身書)이다. 의복ㆍ갓ㆍ신을 갖추는 일, 올바른 언어
와 걸음걸이를 익히는 일, 주변을 정리하고 청소하는 일, 책을 읽고 글자를 쓰는 일, 기타 일상생활에서 해야 할 여러 가지 일 등 어
린이가 지켜야 할 기본적인 도리와 예절을 적어 놓은 것이다.
[주10] 수천(首薦) : 한 사람의 벼슬아치를 임명하기 위하여 세 사람의 후보자를 추천할 때, 첫째로 추천된 사람을 말한다.
[주11] 육행(六行) : 여섯 가지 행실로, 효도함〔孝〕, 우애함〔友〕, 동성간(同姓間)에 화목함〔睦〕, 이성간(異姓間)에 화목함〔婣〕, 이웃간
에 신실(信實)함〔任〕, 서로 구휼함〔恤〕이다.
[주12] 추종(騶從) : 높고 귀한 관원을 뒤따라 다니는 하속(下屬)이다.
[주13] 나이(那移) : 공금을 빌려 쓰고 유용하는 것을 말한다.
[주14] 한소(韓韶)는 …… 하였고 : 후한(後漢) 때 한소가 영현장(贏縣長)으로 있을 때에 다른 현(縣)의 백성들이 구도(寇盜)에 의해 생업
(生業)을 잃고 영현의 경내로 들어와 의식(衣食)을 요구하는 자가 매우 많아지자, 한소가 그들의 굶주림을 불쌍히 여겨 관창(官倉)
을 열어서 만여 호(戶)나 구제하였다.
이에 관창을 주관하는 자가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하자, 한소가 말하기를 “구학(溝壑)에 뒹구는 사람들을 살려주고 이것 때문에
죄를 받는다면 웃음을 머금고 땅속에 들어갈 것이다.”라고 했는데, 끝내 죄를 받지 않았다. 《後漢書 권92, 荀韓鍾陳列傳》
[주15] 급암(汲黯)은 …… 않았으니 : 전한(前漢) 때의 직신(直臣) 급암이 왕명으로 지방을 순시하다가 하남(河南)에 이르렀을 때, 그 지
방 백성들은 크나큰 굶주림에 처하여 혹은 부자간에 서로 잡아먹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이에 급암은 조칙(詔勅)을 가칭하여 그곳
관창을 열어 백성들을 구제한 뒤에 조정에 돌아와서 임금에게 조칙을 가칭한 죄에 대하여 처벌받기를 청했으나, 임금이 그를 어질게
여겨 용서하였다. 《漢書 권50, 張馮汲鄭列傳》
[주16] 희준(犧樽)과 …… 형점(鉶坫) : 모두 대성전에 제사를 올릴 때 쓰는 기물이다. 희준(犧樽)은 소 형상의 모양으로 만든 술그릇이고,
보궤(簠簋)는 서직을 담는 제기이다. 의탁(倚卓)은 신위를 두는 탁자이고, 형점(鉶坫)은 국그릇이다.
[주17] 살아계실〔象生〕 : 원문 ‘象生’은 궤연(几筵)이라는 뜻이니, 자손들이 살아 있을 때와 똑같이 받든다는 의미이다.
[주18] 이준록(彝尊錄) : 김종직(金宗直)이 1497년(연산군3) 아버지 숙자(叔滋)의 보도(譜圖), 연기(年紀), 종유(從遊), 사업(事業) 등
을 수집하여 편찬, 간행한 책이다.
[주19] 참판(參判) 정공(鄭公) : 정홍경(鄭鴻慶, 1768~?)을 말한다. 본관은 초계(草溪), 자는 치영(穉永), 호는 운강(雲崗)이다. 1813년
(순조13)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사성을 거쳐 1827년(순조27) 승정원 좌부승지와 공조 참판에 이르렀다. 채제공(蔡濟恭)의 문인
이다. 그의 묘갈명은 《강호선생실기(江湖先生實記)》 권3에 실려 있다.
[주20] 포은(圃隱) : 정몽주(鄭夢周, 1337~1392)로, 본관은 연일(延日), 자는 달가(達可), 호는 포은이다. 성리학의 종조(宗祖)로
일컬어지고 문묘(文廟)에 종사되었으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주21] 유종록(儒宗錄)에 …… 하였으니 : 《유종록(儒宗錄)》은 청(淸)나라의 어떤 유학자가 편찬한 것인데, 이 말이 우리나라 하겸진(河
謙鎭)이 편찬한 《동유학안(東儒學案)》에서 인용되어 있다. <끝>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 송희준 (역) | 2015
--------------------------------------------------------------------------------------------------------------------------------------------------------
[原文]
江湖金先生神道碑銘 並序
先生諱叔滋。字子培。號江湖。一善之金。肇於麗朝。門下侍中謚順忠。以戰功授弓矢。錫名曰宣弓。自後聯赫繼顯。曾祖諱光偉。良醞令。祖諱恩宥。司宰令贈參議。考諱琯。進士贈參判。有孝行。妣貞夫人仁同兪氏。高麗少府少尹仁貴女。以洪武己巳 。生先生于一善之延鳳里先人第。自齠齔。聰悟異凡。甫十二。從冶隱吉先生學。盡職乎灑掃應對之方。勉力乎明善誠身之工。及成童。肄業鄕學。不與朋徒遊嬉。端坐讀書。終日不撤。受易於別洞尹先生祥。甲午中司馬。遊太學。趙文貞庸。卞文肅季良 。朴參判以昌。曺提學尙治。以先生經術文行。咸推先焉。世廟己亥文科。拜學諭。辛丑。首選史官。適有惎之者。罷歸鄕里。養親極志體。敎子弟。嘗曰爲學不可躐等。初授童蒙須知。幼學字說正俗篇。皆背誦。然後令入小學。從事事親敬長隆師親友。以涵養其本原。次孝經。次大學語孟中庸。次詩書春秋易。次禮記然後及諸史百家。至於學射亦不禁曰。弓矢衛身之物。不可不閑習。古人以此觀德。勸書字曰。書心畫也。楷必方正。草及篆。亦須要精熟。又曰。爲人子者。平時不講求喪祭節文。倉卒茫無所知。或淪於佛惑於巫。每坐此。又曰。讀書勿謂古人糟粕。務要體認。自家分內事。窮而行己。達而治人。一切以聖賢爲法 。尤誨人不倦。必諄諄叩兩端。開悟而後已。辛亥。荐遭內外憂。喪而勺水不入口。殯而歠粥。葬而廬墓。終三年。不脫絰帶。一不到家。時國俗襲麗弊。治喪用浮屠。先生心常慨然。殮襲練祥。特以朱文公家禮爲正。民俗多化之。己未。上命選經明行修者。置師儒。錄先生居首薦。卽除世子右正字。辛酉。拜金海郡。壬戌。移高靈縣。丁卯。復爲主簿兼南學敎授。己巳。除開寧縣監。世宗昇遐。向闕哭失聲而止。文宗賓天。亦如之。時先生方患疾。邑人欲進肉汁拒之。縣有徐民。幼而孤。及母喪。移父合窆。又追服三年。先生曰。壠畝之人。其至性可嘉。乃復其戶。屢典州郡。治政如一。嘗曰有土地有人民。是亦可以行吾學也 。不求赫赫名。專以革汚俗興六行爲務。每春夏寡騶。出入阡陌。民之無種者貸之。乏食者周之。勤者勞之。而惰者懲之。栽桑於官之隙地。令民取種。時各邑守宰。怕那移之律。義倉告罄。則坐視餓莩而不知救。先生曰。昔韓韶活溝壑之民。而欲含笑入地。汲黯矯制發倉。而不辭伏罪。苟存心於民。何懼於法。盡發軍須以賑給之。乙丑丙寅之歉。闔境全活。若有水旱風雹之災。必令厨人减膳。獄囚小罪。盡赦之。日月之食。身自素服。奉笏立於庭。見甦乃已。年例貢獻。皆自備。不征於民。老疾孤幼。皆有惠養。男女失時者。優給資裝。使之嫁娶。風俗丕變。盜賊屛跡。隣近十餘州。皆被其澤。號爲淸水白石。民有去思焉 。甲戌。由司宰副正。爲成均司藝。秋出爲星州敎授。改聖廟塑像爲栗主。命子宗直。更題位號。犠尊簠簋。倚卓鉶坫。無不精完。 親詣釋奠。勘定儀軌。講課諸生。一月三試。隨以賞罰。世祖乙亥。辭職歸密陽。晨必盥櫛。拜家廟。夕亦如之。出入及有事必告。皆象生時。遇忌日。奠需必親檢無缺。俗節朔參。各有品節。燕居書室。終日衣服冠而坐。雖妻子。不見惰慢之容。丙子三月二日。易簀于寢。奉窆于府西高巖山粉底谷負辛原。天順己卯。以原從功臣贈中直大夫藝文館直提學兼春秋館。憲廟乙巳 。加贈資憲大夫吏曹判書兼知義禁府事春秋館事,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成均館祭酒,五衛都摠府都摠管。謚文康。道德博聞曰文。淵源流通曰康。配谷山韓氏。變之女。改娶密陽朴氏。司宰監正弘信之女。男宗輔,宗翼。女金仲老。韓氏出也。男宗碩。文直學。宗裕進士官敎授。號苽堂。宗直文判書贈領議政謚文忠。是佔畢齋先生。女康惕閔除。朴氏出也。宗碩男緻進士。縯進士官敎授。號四止堂。宗裕男繪綬紘。宗直男嵩年參奉。女王子師傅柳世湄。生員李翮。直長申用啓。曾玄以下。蕃不錄。先生胄孫鎭學。爲營神道碑。責銘於福樞。噫。先生立朝事實。居家懿範。已悉於畢齋彝尊錄。參判鄭公碣文。而儒宗錄云 。吾道東。圃隱傳之冶隱。冶隱傳之先生。是宜銘。銘曰。
愼終追遠之以禮正俗。惟先生孝思則也。敬君愛民之以道立朝。惟先生秉心塞也。祖圃宗冶。以啓後學。惟先生繼開之功。
孰敢揚扢也。於乎先生。其如昏衢將復明之日月也歟。<끝>
四未軒文集卷之九 / 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