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여규(李汝圭)
[생졸년] 1713(숙종 39) ~ 1772(영조 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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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민당 이공 묘갈명 병서(旡悶堂李公墓碣銘 幷序)
무민 처사(旡悶處士)의 성은 이씨(李氏)로, 휘는 여규(汝圭), 자는 군집(君執), 본관은 울산(蔚山)이다. 중추원 지사(中樞院知事) 예(藝)가 시조이다. 7대를 전하여 한남(翰南)이라는 분이 나왔는데 첨사(僉使)를 역임하고 선무 공신(宣武功臣)에 책록되었으니, 이분이 공의 5대조이다. 생원 휘 동영(東英)과 첨사 휘 시강(時綱)과 대호군(大護軍) 휘 광연(光然)이 공의 증조와 조부와 부친이다. 호군이 연일(延日) 정식(鄭湜)의 따님을 아내로 맞이하여, 명릉(明陵) 계사년(1713, 숙종 39)에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자질이 남달랐으며 장성해서는 경서와 사서(史書)에 통달하고 예법과 법률에도 익숙하였다. 하루 종일 단정히 앉아 부지런히 힘쓰며 게으른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호군공이 관직을 잃어 녹봉을 받지 못하게 되자 공이 봉양하며 몸소 나물 캐고 낚시하면서도 고생스러운 기색을 드러내지 않았으니, 공은 두 가지 아름다움을 모두 갖추었던 것이다. 또 부모의 상을 당했을 때는 공도 나이가 많아 기력이 쇠약했지만 평소의 거처와 음식 및 아침저녁으로 성묘하는 것을 두루 엄숙히 하면서 거상을 잘하였다.
중제(仲弟)가 죄를 지어 감옥에 갇히게 되자, 공이 먼저 나서서 오랏줄에 대신 묶여 아우를 벗어나게 해 준 뒤에, 나중에 자수(自首)하여 가벼운 형벌을 받게 하였다. 비록 집과 농막을 팔기는 했지만 아우를 위한 일이었기에 아까워하지 않았다.
공은 평소 짧은 갈옷을 입어 목을 가리지도 못했고 솔잎을 먹어 허기를 달래는 것도 자주 있는 일이었다. 환곡(還穀) 독촉에 시달려 한창 고생하고 있을 때 사람들이 곡식 두 곡(斛)을 보내 주었지만 “받을 명분이 없다.”라고 하고 거절하였다. 남들과 한가로이 왕래하지 않았고 인물의 가부(可否)를 평가하지 않았으며 조정의 잘잘못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았다.
일찍이 북관(北關: 함경도)으로 부친을 뵈러 갔다가 함경도 경내에 들어섰을 때 수중다리로 자리에 눕게 되었다. 어떤 사람이 공에게 역마를 빌려 타고 가도록 권하자 말하기를,
“차라리 조(祖)처럼 될지언정 국법을 범할 수는 없다.”하였다.
금슬(錦瑟)의 연회에서도 담담히 있으니 마치 빈도(貧道 승려)와 같았으며, 다른 사람의 정려문을 지날 때면 말에서 내려 잰걸음으로 지나갔다. 섣달에 쇄포(晒: 빛바랜 베)를 도둑맞자 탄식하기를,
“저 사람은 나보다도 더 추웠나 보다. 나를 보고 눈물만 흘렸어도 내가 그냥 주었을 텐데. 본심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마침내 이런 짓을 한 것이리라.”하였다.
도둑이 가만히 이 말을 듣고 있다가 쇄포를 되돌려 주니 공이 반을 나누어 주었다. 통발을 꺼내 노비에게 주어 집으로 가져가게 하자 사람들이 물고기가 몇 마리인지 헤아려 보라고 권하였다. 그러자 말하기를,
“내가 만약 저 녀석을 의심한다면 내 마음이 먼저 좋지 않다.”하였다.
공의 흉금은 맑고 깨끗하였으며 운치는 상쾌하였다. 부모님이 돌아가시자 과거 공부를 그만두고 옛 서적에 몰두하였으며, 시문을 지을 때는 기고(奇古)함으로 자신의 뜻에 맞추기를 좋아하였다. 때때로 지팡이를 짚고 소나무와 국화가 핀 오솔길을 걸으며 한껏 자득의 즐거움을 누렸으니, 신선이 아니면 곧 은자의 무리였던 것이다.
향년 62세 되던 해 12월 12일에 세상을 떠났다. 처음에는 말릉(秣陵)에 장사 지냈다가 뒤에 치소(治所) 남쪽 봉월산(奉月山)의 자좌(子坐)로 천장(遷葬)하였다. 첫째 부인 일직 손씨(一直孫氏)를 왼쪽에 부장(祔葬)하였고, 둘째 부인 나주 정씨(羅州丁氏)는 같은 언덕에 장사 지냈다.
손씨의 부친은 운대(雲大)이고, 딸 둘을 두었는데 권창로(權昌老)와 박증석(朴曾錫)에게 출가하였다. 정씨의 부친은 지인(志寅)이고, 딸 하나를 두었는데 장수림(張守臨)에게 출가하였다. 양자는 낙민(樂民)이고 손자는 지욱(志郁)이며 증손은 명재(明載)이다. 현손은 경호(敬浩)이고 명을 부탁한 사람은 그의 아들 수일(樹一)이다. 명은 다음과 같다.
이련은 성씨를 잃어버렸고 / 二連失其姓
백결은 이름마저 남아 있지 않기에 / 百結並泯其名
내가 무민 처사의 봉분에 성과 이름을 기록하노라 / 余故名姓於旡悶處士之塋
<끝>
[ 註解]
[주01] 두 가지 아름다움 : 학문을 게을리하지 않음과 부모를 봉양하며 고생을 마다하지 않음을 말한다.
[주02] 죄를 …… 되자 : 원문은 ‘의안(宜岸)’인데, 《시경》 〈소완(小宛)〉에 “가엾은 우리 병들고 과약(寡弱)한 자여, 안옥(岸獄)에 마땅
하다 하도다.〔京我塡寡 宜岸宜獄〕” 한 데서 나왔다. 여기서는 어떤 죄를 지어 옥살이를 하게 된 상황을 의미한다.
[주03] 오랏줄 : 원문은 ‘휘(徽)’이다. 《주역》 〈감괘(坎卦) 상육(上六)〉에 “휘묵(徽纆)을 써서 묶고 가시나무 숲 속에 가둬 3년이 되어도
벗어나지 못하니, 흉하다.〔係用徽 于叢棘 三歲不得 凶〕” 하였다.
[주04] 수중다리 : 종아리에 종기가 난 것으로 아랫도리가 습하면 이 병이 생긴다고 한다.
[주05] 조(祖)처럼 될지언정 : 조(祖)는 황제(黃帝)의 아들인 유조(纍祖)를 가리키는데, 원유(遠遊)를 좋아하다가 길에서 죽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를 제사 지내면서 행신(行神)으로 삼았다고 한다. 《漢書 卷53 景十三王傳 註》
[주06] 금슬(錦瑟)의 연회 : 기생들이 참여한 잔치를 말하는 것으로, 금슬은 비단의 문양처럼 칠을 한 현악기이다. 두보가 “돈 뿌렸던 대궐
잔치에 언제쯤 초대되어, 금슬 타는 가인 옆에서 잠깐 취해 볼거나.〔何時詔此金錢會 暫醉佳人錦瑟傍〕” 한 데서 나왔다. 《杜少陵
詩集 卷6 曲江對雨》
[주07] 통발을 …… 하자 : 《무민당집(无悶堂集)》 부록 〈유사(遺事)〉에 의하면, 부모를 봉양하기 위해 족인(族人)과 함께 강에서 낚시를
하다가 고기가 담긴 통발을 하인에게 주어 먼저 집으로 돌려보내던 상황이다.
[주08] 이련(二連) : 이련은 소련(少連)과 대련(大連)인데, 거상을 잘했던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예기》 〈잡기 하(雜記下)〉에 “소련과
대련은 거상을 잘했는데,……동이의 아들이다.〔少連大連 善居喪……東夷之子也〕” 하였다.
[주09] 백결(百結) : 5세기 중엽 신라 때 거문고의 명수이다. 경주의 낭산(狼山) 아래에 살았는데 집이 가난하여 해진 옷을 백 군데나 기워
입어 마치 메추리를 달아맨 것과 같으므로 백결 선생이라 불렸다고 한다. 《三國史記 卷48 百結先生列傳》
ⓒ한국고전번역원 | 이성민 (역) | 2010
자료출처 > 향산집 > 향산집 제13권 > 묘갈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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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旡悶堂 李公 墓碣銘 幷序
無悶處士姓李名汝圭、字君執。蔚山人、中樞院事藝爲鼻 祖。七傳而至翰南官僉使勳宣武。於公五世生員。諱東英 僉使、諱時綱 大護軍、諱光然曾祖。祖考也、護軍。聘延日鄭 湜女。明陵癸巳生公。幼有異質、長通經史習禮律、終日 端坐、矻矻無怠容。護軍喪而貧取、養之躬、執采釣而不見 勞苦、二美萃也。及丁二艱、年旣衰、居處飮食若晨昏省墓、 內外斬斬一是善居者、仲弟宜岸先代徽緩之。然後令自 實得從輕。雖撤屋鬻庄、爲弟謀則不惜平居短褐、不掩脰 好、啜松葉以充飢、催糴方困、人遺二斛、却之曰、無名也。與 人無閒、追逐不可否人物、不言朝政得失。嘗北關省親入 界、臥或勸借郵乘曰、寧祖法不可于錦瑟之筵、恬然若 貧道過人旌閭、下馬以趨、當臘失晒布嘆曰、彼寒甚我乎、 面啼當顯授喪心乃爾耶。盜竊聽還之分畀、其半拔笱送 奴人、勸數尾曰、我而疑渠、我心已先不好。衿度瀅潔、韻致 蕭洒親歿廢擧潛心古書爲詩文喜奇古以適情有時杖 藜逍遙於松菊之逕、盎然自得之樂、非道人卽隱類也。年 六十之十二月十二日歿。始葬秣陵、後遷治南奉月山子 坐。前配一直孫氏祔左。繼羅州丁氏同原。孫父雲大二女、 權昌老、朴曾錫。丁父志寅一女、張守臨。嗣男樂民、孫志郁、 曾孫明載、玄孫敬浩、請銘者、其子樹一也。銘曰、
二連失其姓、百結竝泯其名。余故名姓於無悶處士之塋。<끝>
響山文集卷之十三 / 墓碣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