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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모도(席毛島)와 고려궁지(高麗宮址)를 가다.
글 쓴 이 牧 鉦 高 達 五
6월 15일 묘시(卯時) 초(初)에 일어나 조용히 외포리 선착장을 산책하노라니, 숙소에서 100여 미터 거리에 “망양돈대(望洋墩臺)”가 있어 주위를 답사합니다.
돈대 바로아래 소공원에는 거대한 자연석에 “삼별초군호국항몽유허비(三別抄軍護國抗蒙遺墟碑)”가 세워져 있으며, 그 옆으로 “삼별초군(三別抄軍)”의 이동경로에 따라 진도(珍島)와 제주도(濟州道) 주민들과의 “자매결연”을 맺은 기념으로 “진도개(천연기념물 제53호)석상(石像)”과 “제주도 돌하르방 2기”를 문. 무관으로 세워져있다.
또 바닥에는 삼별초군의 저항과 이동경로를 시대별로 기록해 놓아서 답사에 도움이 되도록 하였다. 안내문에 강화군민들이 1993년 6월 1일에 삼별초의 몽골에 대한 항쟁을 기려 세웠으며, 좌별초, 우별초, 신의군으로 이루어진 삼별초는 고려 원종이 몽골에 복속하여 개경으로 환도하자 강화군에서 봉기하였다.
인하여 이들은 1270년 6월 1일 강화도에서 전남 진도로 이동하여 항쟁하다가, 다시 제주도로 거점을 옮겨 ‘여몽연합군’에게 무너질 때까지 항전을 지속하였으며, 항쟁비는 삼별초가 몽골의 지배에 항거하여 궐기한 유허(遺墟)에 세워졌다.
1170년 무신(武臣) 정중부의 난으로 비롯된 고려시대 무신정권은 1270년 까지 100여 년간 지속되었다. 그 100년을 세 시기로 구분해 보면 이의방, 정중부, 경대승, 이의민의 집권시기 27년을 성립기로 보고, 최충헌과 최우 최항, 최의로 최씨4대 60년간을 확립 안정기, 김준과 임연, 임유무가 집권하던 시기를 마지막 붕괴기로 본다.
이 후 최씨정권이 몰락하고 원종 11년(1270) 몽고와 강화가 성립되자 삼별초의 항쟁이 일어났으며, 그들은 최씨의 사병부대들로 주모자 배중손(裵仲孫)은 왕족 승화후(承化候) 온(溫)을 왕으로 추대하여 저항하다가, 선함(船艦) 천여 척에 물자와 민중을 싣고 진도로 들어가 그 곳을 근거지로 약탈하였다.
이리하여 한때는 거제, 제주를 비롯한 30여 도서(島嶼)를 지배하여 해상왕국을 이루었으나, 김방경(金方慶)의 관군과 몽고군의 연합군에 의해 흩어지면서 일부는 제주로 들어가 마지막 저항을 하다가 1273년 원종 14년에 끝내 패하였다.(역사자료 참조)
삼별초 항쟁은 몽고의 지배를 반대하는 의미에서 시작 되었으나, 그 과정에서 민중의 약탈을 자행하여 연명하였으며, 그들의 패퇴가 몽고의 세력이 고려에 급진적으로 침투하는 계기가 되었다.
다시 가파른 언덕길을 올라 망양돈대에 오르니 주위는 솔밭으로 잘 가꿔져 있으며, 지근한 거리에 석모도(席毛島)와 대섬, 돌섬, 섬돌모루 등 여러개의 섬들이 앞바다에 점점이 떠 있도다!
또 물 가운데는 여러척의 배들이 정박 해 있으며, 여명(黎明)의 기운이 밝아오자 갈매기들이 오락가락 날고있는 풍경이 정겹고도 평화롭슴니다. 연하여 돈대는 아랫단은 원형이요, 윗단은 정사각형으로 동양사상의 천원지방(天圓地方) 원리를 적용했으며, 바닷가에 볼록솟은 언덕위에 조성되어있다.
안내문에 “망양돈대(望洋墩臺:인천광역시 기념물 제37호)”는 조선 숙종 5년(1679)에 강화유수 윤이제가 경상도 군위 어영군사 4,300여 명과 황해도, 함경도, 강원도 승군 8,000여 명을 동원하여 쌓았다 하며, 정포보(井浦堡) 관할하에 있었다. 높이3m, 폭25m, 둘레120m에 이르는 원형돈대(圓形墩臺)로서 대포를 올려놓는 포좌4문, 치첩40개소가 있었다고 적혀있다.
소나무숲 속 벤취에서 본가(本家)에 간단한 안부를 전하고 다시 나려오니 오회장님 내외분이 산책을 나와 계신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며 모두들 선착장에 모여 7시 출항배를 타고 석모도로 향합니다.
배(船)는 차와 사람들을 모두 싣고 찬란한 아침햇쌀을 받으며 뻘탕물의 바다를 항해 하는데~ 갈매기 떼들은 연신 오락가락 먹이를 쫓아 날아든다. 오가는 승객들이 갈매기들이 좋아하는 “새우깡”을 손에 쥐고 물에 던지니, 우루~루~ 몰려들어 서로 밀리고 날고 정신이 없도다!
10여 분도 안되는 시간에 “석포리선착장”에 도착하여 모두들 해장국 삼아 아침식사를 합니다. 저야 비주류(非酒類)이니 괜찮지만, 애주가(愛酒家)들이야 ‘해장국’이 필수제! 엇저녁 노래방에서 과음(過飮)했을 터이니~!
구~불~ 구~불~ 섬 일주도로를 30여 분을 달려서 석모리 보문사 주차장에 도착하니, 이른시간 이라 주차장은 텅 비어있슴니다. 아람드리 노송(老松) 앞에서 단체로 기념촬영을 마치고 가파른 언덕길을 즐겁게 오름니다.
그 사이 사하촌(寺下村)에도 많은 번창이 있어 거의 몰라 보겠으며, 이것 저것 기웃거리며 여유롭게 오르니 거대한 일주문이 나오는데, “낙가산보문사(洛迦山普門寺)”라는 현판이 첫눈에 들어온다.
현판만 보아도 부처님이 상주하시는 곳이라는 것을 알겠으며, 경내로 들어서니 어찌나 불사를 많이 했는지 참으로 장엄하고 웅장합니다 그려! 극락보전을 中心으로 하여 범종각, 3층의요사채, 오백나한전, 와불전(臥佛殿), 윤장대, 삼성각, 보문사 석실, 선방(禪房) 등 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전각들이 지어져 있슴니다.
또 석실(자연동굴) 앞에는 마치 용트림 하 듯 기이한 ‘향나무(인천광역시 기념물 제17호)’가 있는데, 밑동 지름이2.1m, 높이12m, 전체 둘레가 3.2m 정도이다. 또 6.25 동란中에 나무가 죽은 것같이 보이다가 3년 후에 다시 소생하였다고 한다.
그 앞에는 거대한 ‘맷돌(인천광역시 민속자료 제1호)’이 놓여 있는데, 설명서에 신라 선덕여왕 4년(635)에 창건한 보문사에는 나한상을 모신 “보문동천(普門洞天)”으로 유명하며, 한때 승려와 수도사들이 300여 명에 이르렀다고 하며, 이 때 사용했던 맷돌이 아직도 남아있어 지름69cm, 두께20cm로 된 맷돌이다.
이 밖에도 역사와 전통을 증명이라도 하듯 아람드리 느티나무와 거목(巨木)들이 즐비하도다! 오회장님과 서총무님 등에게 간단한 기념촬영을 해 드리고 그 유명한 나한석실(羅漢石室)을 참배합니다.
자료에 ‘보문사 석실(普門寺 石室: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7호)’은 신라 선덕여왕 4년(635)에 최정대사가 처음 건립하고 조선 순조 12년(1812)에 다시 고쳐 지은 석굴사원이다.
천연동굴을 이용하여 입구에 3개의 홍예문(虹霓門)을 만들고 동굴 안에 감실(龕室)을 만들어 불상들을 모셔 놓았으며, 석가모니불을 비롯한 미륵, 나한상과 보살을 모셔 놓았다. 이들 석불에는 선덕여왕 때 어떤 어부가 고기잡이 그물에 걸린 돌덩이를 꿈에서 본 대로 모셨더니 부처가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 오고 있다.
다시 여러계단을 올라 와불전(臥佛殿)에 들어 살펴보니, 거대한 석불을 조각하여 부처님의 열반상(涅槃像)을 모셔 놓았다. 간단히 참배한 후 보살님에게 사진촬영을 요청하니 안된다 하신다.
이상 야릇한 생각이 들어 허공(虛空)을 바라보며 주위의 전각들만 디카에 담아, 낙가산 중턱에 “마애석불좌상(磨崖石佛坐像)”이 있는 곳으로 오름니다. 차라리 ‘와불부처님’께 바로 여쭈어 볼 것을...
10여 분정도 가파른 돌계단을 올라 마애불이 계시는 곳에 이르니, 스님께서는 사시공양 염불에 열중이시다. 오르는 중간 중간 종이에 소원을 적어 ‘소원성취’를 비는 “전망대”도 전에 없던 것이 보이고, 돌계단도 새로 말끔히 단장되어 있어 노약자(老弱者)분들이 참배하시기에 쉽도록 하였다.
마애불은 낙가산 중턱에 깎아지른 바위면에 비스듬히 새겨져 있으며, 그 위로는 눈썹바위처럼 거대한 처마바위가 비를 가려주기 위해 덮혀있는 것 같으다. 좌향은 서해바다를 바라보는 절경에 위치해 있으며, 불상 앞에는 2기의 석등이 세워져 있다.
마애석불좌상(磨崖石佛坐像: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9호)은 네모진 얼굴에 커다란 보관(寶冠)을 쓰고 뒤에는 광배가 있으며, 두손을 모아 정병(淨甁)을 들고 연화좌대(蓮華坐臺) 위에 앉아있다.
가슴에는 큼직한 만(卍)자가 새겨져 있고, 얼굴에 비해 코가 높고 크며, 좁은 이마에 귀는 커다랗게 늘어져서 모든 중생들의 고통을 다 들어 주실 것 같슴니다. 하여 얼굴이 그렇게 조화롭지는 못하며, 각진 어깨에는 법의(袈裟)를 입고 있다.
불상의 크기는 높이가32척, 폭이11척인데, 이는 관음보살의 32응신(應身)과 화신(化身)을 상징한 것으로 풀이되고 있으며, 마애불 조성은 1928년 금강산 표훈사 주지 이화응과 보문사 주지 배선주가 조각한 것이라고 한다.
보문사는 관음보살의 성지로서 남해 보리암, 동해 낙산사 홍련암과 더불어 우리나라 3대 관음도량이다. 고요히 서해 바다를 바라보면~ 지척에 소송도(小松島)와 대송도(大松島)가 그림처럼 물위에 떠 있도다!
또 보문사 주변의 경치와 사하촌(寺下村)의 모습들이 한폭의 동양화처럼 다가오며, 그 우측으로도 많은 개발이 진행되고 있어 더 많은 발전이 있을 것으로 예상됨니다. 게다가 강화도와 석모도 사이에 2017년 8월 준공 예정인 다리가 놓여지면 더욱 아름다운 섬으로 조성되리라!
모두들 모여 이런 저런 여담으로 얼마를 쉬다가 다시 하산길로 접어들어 주차장에 당도하니, 그새 발디딜 틈이 없슴니다. ‘석포리선착장’에도 예외는 아니어서 출발대기 차량들이 3열 4열로 줄을 서 기다림니다.
선창가 갈매기는 먹이 찾아 날아 드는데
뱃전에 기댄 나그네는 뭘~ 찾아 왔는고
보문은 멀어지고~ 강화는 다가 오는데~
고려궁의 자취를 찾아 벗님들은 가시네
84번 지방도를 타고 외포리에서 인산리, 선행리, 남산리를 거쳐 강화읍내에서 다시 이정표를 따라 고려궁지(高麗宮址)에 도착하니 시계는 12시10분을 조금 지나있다. 더운 날씨에 모두들 힘드실 텐대도~ 답사에 열중이시다.
이럴 땐 제가 괜히 기쁨니다~ 먼저 높은 동산에 위치한 “성공회 강화성당”을 답사하기로 하여 가파른 여러개의 돌계단을 올라서니, 주일예배가 한창 진행중 이시다. 문 밖에서 선채로 간단한 예를 드리고 이곳 저곳 둘러 봅니다.
정문인 솟을삼문 위에는 ‘성공회강화성당(聖公會江華聖堂)’이라는 편액이 우에서 좌로 새겨져 있으며, 본당 건물은 한옥으로 지어져서 정면4칸, 측면10칸의 2층집에 팔작지붕 양식의 직사각형이다.
이층에는 ‘천주성전(天主聖殿)’이라는 편액이 달려있고, 기둥에는 5개의 주련(柱聯)이 달려 있어 꼭 사찰에 온 기분이 들며, 문간 옆의 종각(鐘閣) 안에는 범종(梵鐘)까지 달아 놓았다. 자료에 내부는 “바실리카 건축” 양식에 따라 10칸 中 8칸은 예배실, 2칸은 성의실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다.
江華聖堂(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11호)은 광무 4년(1900) 대한성공회 초대 주교인 “코프” 주교에 의해 건립되었으며, 1889년 코프씨가 영국에서 한국주교로 서품을 받은 후 7년 뒤 1896년 6월 강화에서 한국인 신자에게 세례를 주고, 그로부터 4년 후 이 성당을 건립했다.
또 종각 옆에는 조그만 비석이 3개 세워져 있는데, 초대주교故요한기념비. 주교단公아덕기념비. 조선성공회제3세 주교조마가기념비 등이다. 본래는 경사진 대지를 전면(前面)에 석축을 쌓아서 수평되게 하였으며, 전체는 배가 나아가는 형국으로 주위의 산들이 잘 감싸주고 있어 대단한 길지(吉地)이다.
돌계단을 내려와 빈 터 옆에는 ‘용흥궁’으로 가는 안내문이 있어 좁은 고샅 안으로 몇걸음을 나려가니 산기슭 양지바른 자리에 고즈넉이 자리하고 있으며, 대문에는 “용흥궁(龍興宮)”이라는 편액이 달려있다.
대문 입구에는 두 개의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가 세워져 있으며, 글씨는 너무 퇴색되어 분별키 어렵다. 문 안에는 철종의 잠저(潛邸)임을 기록한 비석과 비각이 있고, 건물은 내전1동, 외전1동, 별전1동 등이다.
건물은 전체적으로 홑처마에 팔작지붕 양식이며, 창덕궁 낙선재와 같이 소박한 분위기를 풍긴다. 본래는 초갓집 민가였는데 철종이 왕위에 오르고난 후 강화유수 정기세(鄭基世)가 철종 4년(1853)에 건물을 새로 짓고 ‘용흥궁(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9호)’이라 했으며, 고종때(1903) 청안군 이재순이 중수했다고 한다.
철종(哲宗)은 어릴적 이름이 원범(元範)이고, 그는 영조의 고손자이며 사도세자의 증손자이다. 정조임금의 이복동생 은언군(恩彦君)이 조부이고, 전계군(全溪君)이 아버지다. 조부인 은언군은 아들 상계군(常溪君)이 반역을 꾀했다 하여 강화에 유배되었다가 1801년 신유박해 때 부인 송씨와 며느리 신씨가 ‘천주교인’이라 하여 죽음을 당하니, 이때 은언군도 목숨을 빼앗긴다.
또 아버지와 형 원경(元慶)은 이원덕과 민진용이 원경을 왕으로 옹립하려는 모반을 계획하다가 발각되어 사사(賜死)되었다. 원범이 강화에 유배되어 온 것은 11살 때 였으며, 그는 어린시절 왕족이라는 이유로 부모와 형제, 친척들의 수 많은 죽음을 보아 왔기에 스스로 처신을 숨기고 땔나무를 하며 살았을 것으로 짐작되며, 그의 나이 19세 때(1849) 헌종이 후사 없이 붕어하자 6촌안에 드는 왕족이 없었다.
이에 7촌 아저씨뻘 되는 강화도령 철종이 등극하게 되었으며, 철종이 즉위하자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였고, 또 친정 조카뻘인 김문근의 딸을 철종의 비(妃)로 책봉하여 안동김씨 세도정치가 시작되어 그는 세도정치의 희생물이 되었다.
인하여 세도정치의 폐단은 극심해서 삼정(田政, 軍政, 還穀)이 문란해지고 백성은 도탄에 빠져 각처에 민란이 일어나 끝내는 ‘동학운동’으로 확산된다. 초갓집에 살면서 가장 밑바닥 생활을 해 왔던 철종은 이런 정치의 소용돌이 속에 고뇌를 거듭하다 옥좌에 오른지 14년 6개월 만인 33세의 젊은 나이로 한 많은 세상을 떠난다.
비통함을 넘어 고소(苦笑)를 머금은 채 다시 주차장 쪽으로 나오니, 길가에 작은 비각이 있는데 ‘김상용 순절비(金尙容 殉節碑:인천광역시 지방기념물 제35호)’이다.
이 비는 조선 인조 때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종묘를 모시고 강화도로 피란했으나, 청군(淸軍)이 이곳마저 함락하자 남문루(南門樓) 위에 화약을 쌓아놓고 불을 붙여 순국(殉國)한 선원(仙源) 김상용선생의 위국충절을 기리기 위해 정조 때 유수로 부임한 공의 7대손 김매순(金邁淳)이 건립한 순절비이다.
당초 순절비는 구(舊) 남문지(南門址)에 있던 것을 1976년 현 위치로 옮겨 세우던 中 숙종 26년(1700)에 당시 강화유수인 선생의 종증손(從曾孫) 김창집(金昌集)이 세운 구비(舊碑)가 발견되어 신. 구비를 나란히 세워 놓았다.
고려궁지(高麗宮址)는 다른 곳에 있는지 찾을 수 없고, 나중에 알고보니 이 공원은 “용흥궁”을 조성하기 위한 소공원이라! 일정상 다음기회에 답사하기로 하고 강화역사박물관으로 달림니다.
84번 국도를 타고 10여 분을 달려 송해면 부근리에 도착하니, 넓은 잔디밭에 거대한 지석묘(支石墓)가 보이고 그 옆으로 새로지은 “강화역사박물관”이 자리한다. 역사박물관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사적 제137호 강화 고인돌”의 공원내에 위치한다.
1층 매표소 입구에는 “유물기증자명단”에 모두 85명의 기증자, 기탁자, 수목기증자가 기록되어 있으며, 출입구 진열대에는 소량의 수공예품들이 전시되 있다. 또 1층 로비에는 조선 숙종 때 승려 ‘사인비구’가 만든 ‘강화동종(보물 제11-8호)’이 전시되 있고, 조선시대 선두포 제방공사(1706년) 과정을 기록하여 세운비석 ‘선두포축언시말비’가 있다.
내부에 들어서니 “마니산 참성단 천제”를 모시는 광경이 보이고, 그 옆으로 청자상감통형잔과 투각잔받침, 고려시대 동경, 석인상, 잡상, 청자진사연화문표형주전자, 조선시대 어재연(1823~1871) 장군의 수(帥)자기, 강화반닫이, 사랑방기구, 안방기구, 정족산전투, 영상실 등이 있다.
연하여 2층에는 강화의 선사시대유물, 청동기모형 마을, 강화의 구석기. 신석기문화, 강화의 청동기문화, 세계의 거석문화, 우리나라 고인돌, 부근리고인돌 축조과정, 해문방수타국선신물과(海門防守他國船愼勿過)비문 등이 전시돼 있다.
이 밖에도 이틀동안 답사한 여러 곳에 문화유산들의 역사적 배경을 동화로 그려 설명 해 놓은 것도 있으며, 아직도 박물관내 도록(圖錄)이 없어 더 이상의 자료를 기억하기에는 필자의 한계가 느껴집니다.
넓은 공원 잔디밭에는 거대한 “강화지석묘(사적 제137호)”가 있고 상당한 거리의 한켠에는 “화순 핑매바위 고인돌(개석식)”이 전시돼 있는데, 화순 고인돌은 바둑판식, 탁자식, 개석식 등 다양한 형식의 고인돌이 596기가 있다.
그 中 “화순 핑매바위 고인돌”은 길이7m, 무게가 200t이 넘는다고 하며 무덤보다는 제단 고인돌로 보고 있다. 이 밖에도 “하도리 오류내 고인돌” 등 여러기가 전시되 있다. 또 잔디밭에는 “세계문화 및 자연유산 보호에 관한 협약” 동판이 전시돼 있으며, 동판에는 “세계유산 위원회는 고창, 화순, 강화 고인돌 유적지를 세계유산일람표에 등록한다. 2000년 12월 2일”이라고 적혀있다.
올 때는 빈 보따리 였는데 갈 때는 한 보따리 구나
강화 역사는 찬란하고 보문의 진리는 영원 하도다
천하의 벗들이 우연찮게 만나 한생 연분이 크구나
팔삼 인연이 영원하여서 구구 팔팔 무병장수 하세
단기 4347년(서기2014년) 6월 14, 15일
강화도 광성보, 전등사, 이규보 묘소,
석모도 보문사, 강화도 성공회강화성당,
용흥궁, 강화역사박물관을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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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당일 답사에서 "고려궁지"는 제대로 찾지 못해 답사치 못했으며~
일정상 시간이 여의치 못해 교동도에 "향교"와 "고려궁지"는 훗날로 미룸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