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와의 전쟁이 계속되고 있는 우크라이나는 24일 서른 두번째 독립 기념일을 맞았다. 동시에 이날은 지난 2월24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전면 침공한 지 꼬박 여섯달이 되는 날이다. 전쟁이 180일 넘도록 이어지고 있지만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드미트로 포노마렌코 주한우크라이나대사가 18일 오후 서울 용산구 주한 우크라이나 대사관 집무실에서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제공: 한겨레 드미트로 포노마렌코 주한 우크라이나 대사는 한국 정부와 기업이 우크라이나의 국가 재건 사업에 공식 참여해주기를 요청하며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겨울이 오기 전 우크라이나 국경 내 피란민들을 수용하기 위한 시설을 추가로 지어야 한다. 러시아의 공격을 받아 무너졌거나 점령을 당한 뒤 되찾은 도시를 복구하는 작업이 시급하기 때문이다. 23일 유럽 최대 원자력발전소 자포리자를 비롯한 동남부 전선에서는 격전이 벌어지고 있다. 우크라이나 도시가 초토화되고 수많은 사상자가 나오는 가운데 ‘협상’의 가능성은 없을까. 지난 18일 포노마렌코 대사를 만나 현재 우크라이나 전황과 협상 가능성에 대해 들었다.
―18일 기준 전쟁이 176일째(24일 기준 182일째)다. 러시아군의 공세가 심화되고 있는데 현재 상황을 어떻게 평가하나. “전선에서 제한적으로 진격 시도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의 공세가 교착상태에 빠졌다고 본다. 러시아군은 양으로 볼 때나 질로 볼 때 전혀 인상적이지 않다.”
―우크라이나 군에 승산이 있다고 보나.
“우크라이나 사람들은 ‘우리가 이길 가능성’에 대해 질문하지 않는다. 우리 미래가 달려있는 문제다. 승리를 위해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이유다. 문제는 승리가 ‘언제’냐는 것이다. 우리의 협력 국가들한테 군사적으로나 재정적으로 필요한 모든 지원을 빨리 받을수록 더 빨리 전쟁이 끝날 수 있다. 지금 푸틴을 멈춰 세우지 않으면 전쟁은 전 세계로 확산될 것이다.”
―민간인과 군인 사상자 규모에 대한 다양한 추정치가 떠돌고 있다. 대사가 파악하고 있는 민간인 사망자, 부상자 규모는 얼마인가?
“전쟁이 진행 중이라 사상자 수치를 정확하게 답변하기 어렵다. 다만 우크라이나 국방 당국의 추정대로면, 러시아군 사망자는 15일 기준 4만3750명에 이른다. 서방 협력 국가들은 부상자까지 더해서 사상자가 8만명에 이른다고 추정한다. 정확한 우크라이나군 사상자 통계를 갖고 있지 않지만 보통 공격해오는 쪽 사상자가 3대 1의 비율로 더 많다. 러시아군이 지난 2월24일 이후 전쟁범죄 2만6300여건을 저지른 것으로 보고됐다. 현재까지 어린이 358명을 포함한 민간인 6천700명이 목숨을 잃고, 693명 어린이를 포함한 8천700명이 다쳤다. 그 수는 매일 늘어나고 있다. 러시아군이 점령 중인 지역의 사상자는 제외된 수치가 그렇다.”
―자포리자 원전 근처에서 러시아-우크라이나군 사이 격전이 있었다. 러시아는 원전 인근 폭발이 우크라이나군에 의한 행위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무엇이 진실인가. 원전 인근에서의 격전은 너무 위험한 것 아닌가.
“그렇다. 대단히 위험하다. 운전 중인 원자로를 공격하는 행위의 결과는 ‘원자 폭탄’을 사용하는 것과 같다. 자포리자 원전이 유럽에서 가장 크고, 전 세계에서는 6번째로 크다는 점을 감안하면 더 그렇다. 우리가 러시아군의 자포리자 원전 지역 점령을 강하게 비난하는 이유다. 러시아는 원전을 협박과 그들의 무기를 지키기 위한 방패막이로 활용하고 있다. 우크라이나에서 핵 무기를 사용할 의사가 없다고 말하면서도 핵 시설에서 수많은 도발을 하고 있다. 올해 8월 초 무기를 가득 실은 군용 트럭,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이 자포리자 원전의 1, 2번 블록 부지로 옮겨졌다. 8월5일, 자포리자 원전 산업 현장 인근 지역에 (러시아군에 의한) 포격이 발생했다. 세 차례 포격이 명중하면서 고압 전력 공급 라인이 손상됐다. 우리는 전 세계 안보를 위해 러시아가 협박과 핵 공갈의 수단으로 원전을 사용하는 것을 멈추고, 우크라이나가 발전소 통제권을 되찾을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주길 국제사회에 강력히 촉구한다.”
―현재 우크라이나 전체 영토의 몇 % 정도가 파괴됐나.
“18일 기준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영토의 약 21%, 마을 2600개 이상을 점령하고 있다. 전쟁 전 우크라이나 국내총생산의 19%를 담당했던 곳들이다.”
드미트로 포노마렌코 주한우크라이나대사가 18일 오후 서울 용산구 주한 우크라이나 대사관 집무실에서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제공: 한겨레
―각 도시에서 도시 재건사업이 진행 중이다. 국제사회가 다양한 지원을 하고 있는데, 한국 정부나 기업은 어떤 지원을 하고 있나. “한국은 1억달러(1341억원) 규모의 인도적 지원 의사를 밝힌 상태다. 이에 대해서 한국과 긴밀하게 협의하고 있다. 현재 각 나라는 우크라이나 영토의 특정 지역을 선택해 아주 기초적인 부분부터 재건을 맡기로 했다. 예컨대 유럽 투자 은행은 해방 뒤 마리우폴, 영국은 키이우, 폴란드는 르비우, 튀르키예는 하르키우를 재건하겠다고 했다. 지난 문재인 정부 때부터 이러한 재건 사업에 대해 한국 정부에 줄곧 설명했다. 한국도 한 지역, 또는 도시 한 곳을 골라 재건 사업을 맡아달라고 했다. 외교부, 국회, 그리고 기업에도 요청했다. 이에 대한 한국 쪽의 구체적인 제안이 담긴 답변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한국이 우크라이나를 위해 충분한 지원을 한다고 생각하나.
“어려운 질문이다. 한국 정부가 어떤 나라를 이렇게 큰 규모의 재정 지원을 한 전례가 없는 것으로 안다. 다만 우크라이나는 매달 전쟁에 비용을 대고 있기 때문에 분명히 재정 지원이 더 필요하다. 한국 정부한테서 군사적 지원은 사실 받지 못했다. 한국 정부가 군사적으로 관여할 것인가. 이것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질문이다. 전쟁을 끝내기 위해서는 재정적, 정치적 지원뿐 아니라 군사적 지원이 필요하다. 충분하냐고 묻는다면 충분하지 않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윤석열 대통령을 만나서 설명한 적이 있나.
“윤 대통령이 후보일 때 만날 기회가 있었다. 대선 일주일 전에 만나 아주 의미있는 대화를 했다. 당시 윤 후보는 우크라이나를 돕는 데에 열정을 보였고 국제적 협력에 참여할 의사를 밝혔다. 물론 임기 초기에 국제 정치적으로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을 이해한다. 다만 한국 정부가 가능한 한 가까운 미래에 ‘실질적인 단계’를 밟아주기를 기대한다.”
드미트로 포노마렌코 주한우크라이나대사가 18일 오후 서울 용산구 주한 우크라이나 대사관 집무실에서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제공: 한겨레
―재건 사업에서 가장 시급한 것은 무엇인가.
“일단 러시아군에 의해 점령됐거나 심각한 공격을 받고 있는 우크라이나 동부 등 다른 지역에서 서부로 피란을 온 (국내) 난민 수백만명을 수용할 시설이 급하다. 겨울이 오기 전 이들이 지낼 곳을 마련해야 한다. 또한 우크라이나가 되찾은 지역에서 학교와 도로, 다리 등 시민들이 매일 이용하는 사회 간접 시설을 빠르게 복구해야 한다.”
―재건에는 얼마나 걸릴까.
“전쟁이 끝나서 전체 피해 규모를 평가할 수 있을 때까지 재건 기간을 예측하긴 어렵다. 다만 우크라이나는 도시 재건과 동시에 경제 회복을 위해 △연간 국내총생산 성장률 7% 이상 △경제 복잡성 지수 상위 25위 △세계은행 인전자본지수 상위 25위 △1990년에 비해 이산화탄소 배출량 65% 감축 등 ‘국가 회복 계획’을 세우고 있다. 시급성에 따라 상·하수도 수리, 다리 재건, 전쟁 뒤 유럽연합 기준에 따른 인프라 시설 복구, 산업 구조 전환을 할 계획인데 올해 적어도 600억∼650억 달러가 필요하다.”
―최근 곡물 수출이 시작됐다. 현재 우크라이나에는 얼마나 많은 양의 곡물이 비축돼 있나.
“수출용 곡물 재고는 2천만톤에 달한다. 미국 농무부에 따르면, 우크라이나는 전 세계 밀 수출의 10%를 담당 고 있다. 그밖에 옥수수는 14%, 보리 17%, 해바라기유는 47%다. 엄청난 양이다. 이 곡물들은 러시아에 의해 우크라이나와 항구에 쌓여있다. 러시아는 국제적 기근을 자기들의 이익을 추구하고 신식민지 외교 정책을 추구하기 위한 지렛대로 활용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농민들이 전쟁 와중에도 농사를 지으려 애쓰고 있다. 우크라이나 농업은 세계 식량 사정에도 중요한 문제다. 현재 농업 생산 현황은 어떠하고 가장 큰 어려움은 뭔가?
“현재 우크라이나 농민들은 어려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항만을 봉쇄하고 농업 인프라를 고의로 파괴하면서 세계 식량 위기를 심화시키고 있다. 전쟁과 러시아의 일부 지역 점령, 포격 등으로 우크라이나의 올해 농산물 수출 전망은 전년에 비해 훨씬 적을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몇 달 안에 수확량이 최대 7천만톤이 될 것으로 예상한다. 우리는 가능한 한 빠르게 흑해를 통해 곡물 수출을 하려는 의지를 강하게 갖고 있다. 어떤 수단으로도 이를 막거나 미루지 않는다.”
―우크라이나의 겨울은 매우 혹독할 것으로 예상된다.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 동남부 지역에 아직 남아있는 시민들에게 전기, 수도 공급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고 알고 있다.
“정부는 파괴된 도시의 시설을 복구하고 시민들이 악조건 속에서 겨울을 나게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겨울을 나는 문제는 우크라이나뿐 아니라 다른 유럽 국가들도 겪게 될 것으로 보인다. 가스 요금은 오르고 전력은 부족할 것이다. 러시아는 에너지 공급으로 이들 국가를 정치적으로 협박하고 있다. 유럽 국가들은 러시아와 오랜 관계를 끊는 것이 낫겠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유럽과 전 세계 국가가 에너지 공급처를 바꾸거나 에너지 체계를 태양열, 풍력, 원자력 등으로 머지않아 전환할 것으로 본다. 우크라이나에서는 산업 생산 체계가 무너지면서 전력 생산량이 남기 때문에 부족하지 않을 것으로 보이지만, 러시아가 우리의 원전이 생산하는 전기를 차단할 가능성이 있어서 위험하다.”
드미트로 포노마렌코 주한우크라이나대사가 18일 오후 서울 용산구 주한 우크라이나 대사관 집무실에서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제공: 한겨레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동부 지역이 완전히 폐허가 돼 가고 있다. 협상의 가능성이 있나.”
“협상에 대해서 생각하려면 러시아가 상황을 지난 2월24일 전으로 되돌려 놔야 한다는 게 우크라이나 정부 공식 입장이다. 정부는 현시점에서 협상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우크라이나 시민의 89%는 전쟁이 국제적으로 인정된 국경으로, 우크라이나 영토의 완전한 해방으로 끝나야 한다고 믿는다. 예를 들어, 현재 러시아 점령 아래 있는 마리우폴의 시민 수만 명이 러시아군에 의해 살해됐다. 이 도시의 시민이 어떻게 러시아의 지배를 받아들일 수 있겠나. 러시아군 점령 지역의 시민은 계속해서 격렬하게 저항하고 있다. 죽음과 파괴, 공포만을 가져오는 이른바 ‘러시아 세계’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정부는 목표를 달성할 때까지 멈추지 않을 것이다. 휴전이나 비무장화는 적절하지 않다. 우리는 또 다른 ‘동결된 갈등’을 조성하거나 다음 침략을 준비하려는 러시아가 쉴 수 있게 놔두고 싶지 않다. 우리가 제시한 조건으로 협상할 수 있을 만큼 러시아가 약해질 때까지 싸울 것이다.”
22일 우크라이나 오데사에서 여성들이 아기와 함께 방공호에 피신해있다. EPA 연합뉴스© 제공: 한겨레
―우크라이나 시민들의 여론은 어떤가. 시간이 흐르면서 시민들이 국가 전역에서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상황에 지쳐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현재 상황은 시민들에게 정말 ‘딜레마’다. 전쟁이 계속되는 한 더 많은 사상자가 발생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양보하거나 협상할 수는 없다. 우리가 현재까지 러시아군에 의해 잃은 영토(전 영토의 21%)는 한국의 영토와 맞먹는 크기다. 어떻게 그냥 포기할 수 있겠나. 그들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계속 쳐들어올 것이다. (전쟁을 멈추면) 준비를 단단히 하고 더 앞으로 나아가기를 반복할 것이다. 이게 바로 젤렌스키 대통령이 러시아를 최소한 2월24일 이전 시점으로 물리치려고 하는 것이다. 우리가 타협하려 하면 그들이 멈춰야 할 이유가 없다. 처음에는 우크라이나의 절반, 그 다음은 또 다른 절반을 차지하고 소비에트 연방이 차지했던 동유럽으로 나아갈 것이다. 2차 세계대전에서 나치 독일이 완전히 패배한 뒤에야 평화 프로세스가 시작된 것처럼 러시아가 완전히 패배해야 전쟁을 멈출 수 있다. 지금 이 시점에서 멈추면 1∼3년 뒤에 또 다른 갈등이 발생할 것이다.”
노지원 기자 zon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