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네타리안 작가로 유명한 스즈모토 유이치가 근무 태만으로 키사에서 쫓겨났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지만 그것이 단지 게으름 때문이었다고 보기 힘든 상황이 있었습니다.
스즈모토는 과학을 좋아하고 SF 쪽을 잘 쓰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클라나드의 코토미 루트나 플라네타리안 같은 좋은 글들을 쓸 수 있었죠.
반면 마에다 준은 과학과 거리가 먼 사람입니다. 에어나 카논의 여우 같은 걸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듯이, 옛날 전설 같은 신비한 것들을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스즈모토와 반대라고 할 수 있죠.
클라나드에 과학적인 요소를 집어넣었던 것은 스즈모토였습니다. 키사 작품들이 과학적인 것처럼 보였던 것도 스즈모토의 공이 컸던 것이죠. 스즈모토가 퇴사한 이후에 과학 쪽을 좀 아는 시나리오 작가들이 키사와 일한 덕도 있긴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이들보다 스즈모토 유이치의 과학 지식이나 작문 수준이 더 높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스즈모토에게 주술이 주가 되는 유키네 루트를 맡겼으니, 과학과 반대인 미신이라고도 할 수 있는 주술에 대한 글은 스즈모토가 내키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진척이 잘 되지 않았고, 유키네 루트에서 머문 나머지 스즈모토가 맡은 다른 루트인 스노하라 남매 루트는 손도 대지 못했죠. 결국 유키네 루트는 카이와 마에다가 나머지를 써야 했고, 남매 루트는 보조 작가에게 맡겨야 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맡은 루트가 많았던 마에다 준이 고생해서 얼굴이 삭을 정도였어요.
아마 이 때문에 마에다는 스즈모토를 좋게 보지 않았을 거고, 알려져 있다시피 애초에 히사야 나오키에 대한 존경심 때문에 키사에 들어온 스즈모토는 자신과 성향이 반대인 마에다와는 가까워 질 수 없었을 겁니다. 짤리는 것이 아닌 스즈모토가 자진 퇴사하는 쪽으로라도 결국 스즈모토는 키사를 떠났을 거라고 봅니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대화와 소통을 통해 스즈모토가 싫어하는 이야기 거리는 맡기지 않고, 스즈모토도 융통성을 발휘해서 과학과 거리가 멀어도 과학과 반대되는 정도가 아니면 어떻게든 애써 써보거나 했다면, 이후 키사 작품들 수준이 더 좋아져서 섬머 포켓이 나오기 전에도 최고 수준을 유지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것입니다. 뭐 그 기간 동안의 작품들 수준이 낮은 건 아니었지만 좀 더 좋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런데 키사를 나온 후에도 작품 활동이 뜸한 걸 보면 스즈모토 유이치가 게으르기는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옮긴 회사에서도 과학과 거리가 먼 것만 써야 하는 처지인 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