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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강 정철의 영정
송강(松江) 정철(鄭澈)
1536(중종 31)~1593(선조 26) 경기 강화.
1585년 양사(兩司)의 논핵이 있자 스스로 퇴임했다. 이후 약 4년간 고향인 창평에서 은거하면서 〈성산별곡〉·〈사미인곡〉·〈속미인곡〉 등을 지었다. 1589년 정여립의 모반사건이 일어나자 우의정에 특배되어 최영경의 옥사를 다스렸다. 1590년(선조 23) 좌의정이 되고, 인성부군(寅城府君)이 되었다. 1591년 이산해의 배후책동에 빠져 건저(建儲)를 하려 하다가 왕의 뜻을 거슬리고 '대신으로서 주색(酒色)에 빠졌으니 국사를 그르칠 수밖에 없다'는 안덕인의 논척과 양사의 논계가 빗발쳐 파직된 뒤에 명천·진주·강계 등지로 유배생활을 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정에서 석방논의를 해 5월에 풀려났다. 평양에 있는 왕을 알현하고 의주까지 호위했다. 관찰사가 되어 강화에 머무르다가 1593년에는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기도 했다. 같은 해 12월 강화에서 58세의 나이로 죽었다. 청주 근처 관동(寬洞)에 산소와 사당이 있다. 문집으로 〈송강집〉 7책과 〈송강가사〉 1책이 전한다. 강직하고 청렴하나 융통성이 적고 안하무인격으로 행동하는 성품 탓에 동서 붕당정치의 와중에 동인으로부터 간신이라는 평까지 들었다. 정치가로서의 삶을 사는 동안 예술가로서의 재질을 발휘하여 국문시가를 많이 남겼다. 〈사미인곡〉·〈속미인곡〉·〈관동별곡〉·〈성산별곡〉 및 시조 100여 수는 국문시가의 질적·양적 발달에 크게 기여했으며, 특히 가사작품은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살린 걸작이라는 평을 받는다. 시호는 문청(文淸)이다.
<백과사전>
- 조선시대 붕당史 : 1. 선조조(1567-1608년)의 붕당정치 -
1. 선조조(1567-1608년), 붕당 小계보도
┌ 훈구/척신파(기호) 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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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호사림파(경기/충청도) : 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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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림파(영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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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남사림파(경상도) : 동인 ㅡ>┌ 조식계열(남명학파, 경상右도) : 북인 ㅡ>┌ 대북
| └ 소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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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황계열(퇴계학파, 경상左도) : 남인
1-3. 송강 정철의 왕세자 책봉건의(건저의(建儲議)) 사건(1591년)
┌ 동인(경상右도 영남사림파) : 내암 정인홍, 아계 이산해
여당 ┤
└ 동인(경상左도 영남사림파) : 서애 유성룡, 학봉 김성일
야당 - 서인(기호사림파) : 송강 정철, 오음 윤두수, 월정 윤근수
1. 서(序)
1-3편 송강 정철의 왕세자 책봉건의(건저의(建儲議)) 사건은, 1-2편 기축옥사(정여립 역모사건)가 종결되어 가던 1591년 무렵의 일이다. 그런고로, 1-2편에서 등장했던 영남사림파 및 기호사림파의 주요 지도자들이 거의 다시 출연한다. 당시는 기축옥사에 따른 충격파가 아직 가시기 전이었던지라, 옥사의 최고책임자였던 송강 정철을 바라보는 아계 이산해의 시선도 좋을 수 없었다. 아계 이산해의 생각에, 기축옥사는 기호사림파에 의해 창작된 정치모략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결국 눈에는 눈이요 이에는 이라고, 아계 이산해 역시 정치적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다. 그 목적은, 당연히 송강 정철를 위시로 한 기호사림파의 제거였다.
2. 왕세자 책봉건의(건저의(建儲議)) 문제
이미 1-2편에서도 밝혔듯이, 14대 선조는 조선왕조 최초의 방계승통(傍系承統, 왕족의 한 사람이 아들없는 임금의 후사로 들어가 代를 이음) 사례였다. 13대 명종이 후사 없이 죽자, 명종의 사랑을 받던 (11대 중종의 庶손자요, 명종에겐 조카가 되는) 하성군(선조)이 후계자로 내정된 것이다. 정통성이 부족한 지도자들이 대개 그러하듯, 선조 역시 집권기간 내내 왕권강화에 절치부심하였다. 사실, 기축옥사(정여립 역모사건) 역시 선조의 왕권강화에 대한 강박감에 의해 확대되었다고 볼 수 있다. 선조로선, 정여립과 그에 동조한 일부 남명학파 학자들의 불온한 사상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왕위승계와 관련된 역모사건이 끝난 직후였던 분위기 탓도 있고 하여, 정국의 최대현안으로서 왕세자 책봉문제가 떠오른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문제는, 선조의 정비인 의인왕후 박씨에게서 아직 후사가 없다는 데 있었다. (의인왕후 박씨는 불임이었던 관계로, 끝내 후사를 내지 못했다.) 그런데 후궁들 소생의 왕자들은 무섭게 자라고 있었다. 선조는, 후궁들과의 사이에서만 13남 10녀를 둘 정도로 자녀들이 많았다. 많고도 많은 왕자들 간에 후계경쟁이라도 시작된다면, 장차 정국안정에 걸림돌이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권력의 미래가 불안한데, 다른 나랏일이라고 잘 풀릴 리 없으니까. 조정의 주요관료들로선, 이를 미연에 방지하는 게 급선무였다.
당시 조정의 중론은 물론이요, 백성들의 분위기 역시 공빈 김씨 소생의 17살 된 2남 광해군에게로 기울어져 있었다. 공빈 김씨 소생의 18살 된 1남 임해군도 있었으나, 성격이 난폭하여 민심을 잃는 바람에 후계경쟁에선 일치감치 밀려나 있었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선조의 의중이었다. 선조의 마음은 남모르게, 여러 후궁들 중에서도 가장 총애했던 인빈 김씨 소생의 11살 된 4남 신성군에게로 가 있었다. (인빈 김씨 소생의 3남 의안군은 일찍이 요절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아계 이산해는 눈치채고 있었다. 그리고 아직 다른 관료들이 이 비밀을 감지하지 못했다는 걸 무기 삼아, 모종의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다.
3. 아계 이산해와 송강 정철
어느날, 아계 이산해(영의정)는 송강 정철(좌의정) 및 서애 유성룡(우의정) 등과 의정부(議政府)에 함께 모였다. 이날 논의의 주제는, 정국의 당면현안이었던 왕세자 책봉문제였다. 일단, 선조에게 왕세자 책봉문제를 건의한다는 데 의견이 일치됐다. 곧이어서 아계 이산해는 왕세자 후보로써 여론대로 2남 광해군을 거론했고, 송강 정철과 서애 유성룡의 뜻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 이렇게 의정부의 뜻이 하나로 모이자, 다음 경연(經筵, 오늘날의 국무회의)에서 3정승이 함께 건의하자며 합의를 보았다.
그런데 3정승 간의 합의가 있자, 아계 이산해의 정치공작이 시작되었다. 아들 이경전을 인빈 김씨의 오빠였던 김공량에게 보내, 송강 정철이 광해군을 왕세자로 추대한 뒤에 장차 인빈김씨-신성군 모자를 제거하려 한다며 무고한 것이다. 놀란 김공량은 궁궐로 달려가 인빈 김씨에게 이 사실을 고했고, 인빈 김씨 역시 선조에게 달려가 모자를 살려달라며 울기 시작했다. 아닌 밤 중에 홍두깨 같은 일을 당한 선조는, 난감해 하면서도 송강 정철이 그런 일을 꾸밀 리 없다며 인빈 김씨를 달래주었다. 하지만 선조 역시 가슴 한켠에서 의혹이 일기 시작했다.
광해군의 왕세자 책봉을 건의코자 3정승이 합의한 경연 석상에, 아계 이산해는 병을 핑계로 출석하지 않았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몰랐던 송강 정철은, 그간의 합의대로 광해군의 왕세자 책봉을 건의했다. 인빈 김씨의 일로 마음 한구석이 편치 않던 선조는, 그녀의 말이 사실로 들어나자 그만 격분했다. 송강 정철의 건의를, 왕실가족을 향한 역모로 규정한 것이다. 송강 정철은, 그 자리서 삭탈관직된 뒤에 곧장 귀양가는 신세가 되었다. 3정승 합의의 당사자 중 하나였던 서애 유성룡도, 경연 석상에 같이 있었으나, 완전히 얼어붙어 한마디도 도와주지 못했다.
[아계 이산해의 영정]
4. 송강 정철을 어찌할 것인가 - 처형론 對 귀양론
사실, 왕조국가에서 신하가 후계문제에 관여했다가 화를 입는 건 크게 드문 경우가 아니다. 불과 몇달 전까지만 해도 역모사건의 최고수사관이었던 송강 정철은, 이제 그 역모죄를 자신이 뒤집어 쓰게 되었다. 그러나 송강 정철 역시 틀린 말은 한 건 아니었다. 사실, 송강 정철이 지은 죄라면 당시의 여론을 그대로 전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권력의 안정을 위해선 왕세자 자리를 계속 비워둘 수 없었고, (1남에게서 결격사유가 있다면) 그 다음 순서인 2남으로 정하는 게 순리에 맞기도 했다. 불과 1년 뒤에 임진왜란(1592-98년)이 발발하자, 분조(分曹, 국가위기사태를 맞아 조정을 둘로 나눔)와 동시에 분조의 수장인 왕세자로써 광해군이 책봉되었던 것이다. (송강 정철 자신도,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터지자 다음달인 5월에 곧바로 석방되었다.)
문제는, 송강 정철 및 기호사림파 제거를 위해 이를 갈던 영남사림파(더 정확히 남명학파)가 이 기회를 놓칠 리 없다는 데 있었다. 특히, 남명학파는 송강 정철을 살려둘 생각이 없었다. 다른이라면 또 몰라도, 송강 정철만큼은 죽이고자 했다. 건저의(建儲議) 음모의 설계자인 아계 이산해는, 다름 아닌 남명학파의 지도자이기도 했다. 송강 정철이 정여립의 귀양에 만족하지 않았듯, 아계 이산해도 송강 정철의 귀양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에게 송강 정철 제거는 기축옥사에 대한 빚갚음 그 자체였다.
송강 정철의 목숨이 경각에 달린 이 때, 의외의 곳에서 구원의 손길이 다가왔다. 서애 유성룡을 위시로 한 퇴계학파가 송강 정철의 처형에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송강 정철이 처형되면, 그와 동시에 기호사림파에도 피바람이 불 것임은 자명한 일이었다. 자고로, 복수는 또다른 복수를 부르는 법. 퇴계학파는 그 성향대로, 정국의 경색을 원치 않았다. 무엇보다도, 서애 유성룡 스스로가 이번 건저의(建儲議) 사건이 아계 이산해의 음모임을 간파하고 있었다. 3정승 합의가 유출된 건, 차라리 둘째 문제였다. 문제는 하필 후계구도건을 가지고 술수를 꾸미는 바람에 정국이 요동치기 시작했단 것이었다.
[서애 유성룡의 영정]
5. 분노하는 남명학파
기축옥사 당시, 남명학파의 좌절감은 깊었다. 그리고 그 좌절감이, 건저의(建儲議) 사건을 낳았다. 그런데 같은 영남사림파로서 믿고 있었던 퇴계학파가, 자신들과 다른 길을 가기 시작했다. 때리는 시어미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는 옛말도 있지 않은가? 건저의(建儲議)가 음모라면, 기축옥사는 음모가 아니었나? 그런데 기축옥사 때와, 왜 말과 행동이 다른가? 남명학파의 좌절감은 퇴계학파를 향한 배신감으로, 그리고 곧 퇴계학파를 향한 분노로 치닫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송강 정철 치죄문제는, 영남사림파를 영구히 분열시키는 기폭제로 작용하게 된다.
앞으로 조선시대 붕당史에선, 특정인의 치죄문제로 붕당이 분열하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된다. 건저의사건(1591년) 때 송강 정철 치죄문제로 빚어진 영남사림파(동인)의 남/북인 분당, 갑인환국(1674년) 때 우암 송시열 치죄문제로 빚어진 기호남인의 청/탁남 분열, 경신환국(1680년) 때 기호남인 치죄문제로 빚어진 기호사림파(서인)의 노/소론 분열, 임오화변(1762년, 사도세자 폐출/사사 사건)에 대한 평가문제로 빚어진 벽/시파 분열 등이 그 좋은 예이다. 송강 정철의 치죄문제는, 그중 첫번째 사례라 할 것이다.
<출처: 하교길가 옆에서>
경기도 고양시 신원동 송강마을의 강아(江娥)묘
詠紫薇花(자미화)
一園春色紫薇花 일원춘색자미화
纔看佳人勝玉釵 재간가인승옥채
莫向長安樓上望 막향장안누상망
滿街爭是戀芳華 만가쟁시연방화
봄빛 가득한 동산에 자미화 곱게 피어
그 예쁜 얼굴은 옥비녀보다 곱구나
망루에 올라 장안을 바라보지 말라
거리의 모든 사람들
꽃다운 네 모습 연모하여 다투리라
기녀 강아(江娥)의 사랑
조선조의 대 정치가였던 송강 정철은 문학적인 소질도 뛰어나서 우리말로 된 주옥같은 가사와 시조를 많이 남겼다. 그는 바른 소리를 잘 하는 성품으로 인해 유배생활과 은둔의 생활을 반복하게 되는데 이때 많은 작품을 쓴 것으로 보인다. 그 중에서도 특히 사미인곡(思美人曲)과 속미인곡(續美人曲)은 후대의 김만중, 홍만종 등에 의해 우리나라 최고의 연군지사(戀君之詞)로 평가받게 된다. 비록 그의 삶은 정치적인 여파로 파란만장했으나 노래로 일세를 풍미한 풍운아임에는 틀림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지은 두 미인곡은 부엌데기나 초동조차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으니 말이다.
이러한 송강을 평생을 바쳐 사랑한 기녀로, 송강이 전라감사로 가있을 때 머리를 얹어 준 자미(紫薇)라는 동기가 있었다. 송강이 그녀를 가까이 하자 남원 사람들은 그녀를 송강의 이름을 따서 ‘강아’라 불렀다. 나중에 도승지가 되어 서울로 가게된 송강은 다음과 같은 시를 써주며 자신을 잊을 것을 당부하였다.
“봄빛 가득한 동산에 핀 자미화는, 다시 보니 옥비녀보다 아름답구나, 망루에 올라 장안을 바라보지 마라, 거리의 사람들 모두 꽃다운 모습 사랑하리라”
그렇게 송강을 떠나 보낸 강아는 10여 년 동안 그를 만나지 못하다가 강계로 귀양갔다는 소식을 듣고 수천 리 길을 달려갔으나 잠깐의 해후 끝에 또 다시 이별하게 된다. 서울로 갔던 강아가 왜란으로 인해 어수선한 틈을 타 다시 강계로 갔으나 귀양에서 풀린 송강은 이미 그곳을 떠난 뒤였다. 강아는 그가 평양을 향해 떠났다는 말을 듣고 남쪽으로 가다가 왜적에게 잡히고 만다. 이때 송강의 제자인 이량(李亮)을 만나게 되고, 자신의 몸을 바쳐 일본군 대장인 고니시(小西)를 유혹하여 평양성 탈환에 큰공을 세우게 된다. 고니시에게 몸을 더럽힌 강아는 더 이상 송강을 섬길 수 없게 되자, 소심(素心)이란 여승이 되어 그 남은 생애를 모함을 받아 억울하게 죽은 송강의 한을 푸는 것에 정성을 다했다. 그 후 정권이 바뀌어 송강의 신원(伸寃)이 이루어지자 송강마을에 와서 송강의 묘소를 지키다 여생을 마치게 된다. 그러나 송강과 강아의 사랑은 각각의 외줄타기였던 것으로 보인다. 송강의 생애와 작품을 통해서 볼 때 그의 사랑은 나라와 임금에 대한 충이 중심을 이루었으며, 송강을 위해 평생을 바친 강아의 사랑은 오직 지아비를 향한 정절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그 후 송강 묘소는 충북 진천으로 옮겨졌으나 강아의 묘소는 그대로 송강마을에 남아있다. 비록 평생을 바쳐 사랑한 낭군의 곁으로는 가지 못했지만, 살아서 이루지 못한 사랑의 한을 안고 송강 대신 고향을 외롭게 지키고 있는 것이다.
송강마을 입구인 39번 국도변에는 송강의 시비가 서 있고, 송강고개를 넘어가면 송강이 낚시를 했다는 송강소와 송강모퉁이 등이 있다. 마을 뒷산 중턱에 송강의 묘소가 있었는데, 권필이 송강묘를 지나며 지은 한시가 유명하다
“빈산 낙엽 진 나무에 비는 쓸쓸히 내리고, 재상의 풍류가 이처럼 적막하구나, 슬픈 마음에 술 한 잔도 올리기 어려운데, 옛날의 미인곡만 지금도 불려지는구나”
송강을 사랑한 여인의 한과 임금을 사랑한 송강의 삶을 함께 간직한 이 곳 송강마을을 답사해 보면 다른 곳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애틋한 정서를 느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정철의 작품
식영정(息影亭)
식영정은 가사문학관 옆의 작은 언덕 위에 세워진 정자이다. 바로 담양 가사문학의 중심이 되었던 정자이다. 이 정자는 1560년(조선 명종 15년)에 김성원이 장인인 임억령을 위해 세운 정자라고 한다. 장인을 위해 자미탄(현재 광주로 자리로 옛날 이 물길의 이름이 자미탄이었다고 합니다)이 시원하게 내려다보이는 자리에 정자를 짓고 장인에게 이름 짓기를 권유하자, 임억령이 지은 이름이 식영정(息影亭)이라 한다. 식영정(息影亭)이란 이름은 그림자도 쉬어가는 정자라는 뜻이라 한다. 한시에 능했던 임억령다운 운치를 느낄 수 있다.
김성원은 식영정 아래 서하당이라는 정자를 지었는데, 아마 주로 식영정에서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이 김성원은 강 건너 환벽당의 김윤제에게 학문을 배웠는데, 송강 정철 역시 김윤제의 문하로 두 사람은 동문수학한 절친한 사이라 한다. 이 일대의 옛 지명이 ‘성산’으로, 송강의 성산별곡(星山別曲)이 바로 이 일대의 정취와 김성원의 풍류에 대해 읊은 가사로 알려져 있다. 이 식영정이 가사문학의 대표작 중의 하나인 성산별곡의 무대인 것이다. 또 당시 사람들은 임억령, 김성원, 고경명, 정철 네 사람을 ‘식영정 사선(四仙)’이라 불렀는데, 이들 네 사람이 각각 성산의 경치 좋은 20곳씩을 정해 노래한 총 80수의 식영정이십영(息影亭二十詠)을 지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眞玉歌(진옥가)
기생 진옥은 가야금을 뜯고
송강 정철은 목청을 한껏 가다듬어 노래했다.
옥이 옥이라커늘 번옥(燔玉)만 여겼더니
이제야 보아 하니 진옥(眞玉)일시 분명하다
나에게 살송곳 있으니 뚜러볼가 하노라
(燔玉=돌로 구워 만든 인조옥)
송강 정철의 시조창이 끝나자 지체 없이 진옥(眞玉)이 받았다.
쇠라 쇠라 하기에 순수하지 못한 섭철로만 여겼더니
이제야 자세히 보니 정철(正鐵→鄭澈)임에 틀림없구나.
나에게 골풀무 있으니 그 쇠를 녹여볼까 하노라.
(섭철=잡다한 쇳가루가 섞인 쇠)
사미인곡(思美人曲)
송강가사(松江歌辭) 성주본(星州本)
<현대어 풀이>
이 몸이 태어날 때에 임(임금)을 따라 태어나니,
한평생 함께 살아갈 인연이며, 하늘이 모를 일이던가?
나는 오직 젊어 있고 임은 오로지 나만을 사랑하시니,
이 마음과 이 사랑을 비교할 곳이 다시 없다.
평생에 원하되 임과 함께 살아가려고 하였더니,
늙어서야 무슨 일로 외따로 두고 그리워하는고?
엊그제(얼마 전에)는 임을 모시고 광한전(궁중)에 올라 있었더니,
그 동안에 어찌하여 속세(창평)에 내려 왔느냐?
내려올 때에 빗은 머리가 헝클어진 지 3년일세.
연지와 분이 있네마는 누구를 위햐여 곱게 단장할꼬?
마음에 맺힌 근심이 겹겹으로 쌓여 있어서 짓는 것이 한숨이요,
흐르는 것이 눈물이라. 인생은 한정이 있는데, 근심은 한이 없다.
무심한 세월은 물 흐르듯 흘러가는구나.
더웠다 서늘해졌다 하는 계절의 바뀜이
때를 알아 지나갔다가는 이내 다시 돌아오니,
듣거니 보거니 하는 가운데 느낄 일도 많기도 많구나.
봄바람이 문득 불어 쌓인 눈을 헤쳐 내니,
창 밖에 심은 매화가 두세 가지 피었구나.
가뜩이나 쌀쌀하고 담담한데, 그윽히 풍겨오는 향기는 무슨 일인고?
황혼에 달이 따라와 베갯머리에 비치니,
느껴 우는 듯, 반가워하는 듯하니, (이 달이 바로)임이신가 아니신가?
저 매화를 꺾어 내어 임 계신 곳에 보내고 싶다.
그러면 임이 너를 보고 어떻다 생각하실꼬?
꽃잎이 지고 새 잎이 나니 녹음이 우거져 나무 그늘이 깔렸는데,
(임이 없어) 비단 포장은 쓸쓸히 걸렸고,
수놓은 장막만이 드리워져 텅비어 있다.
연꽃 무늬가 있는 방장을 걷어 놓고,
공작을 수놓은 병풍을 둘러 두니,
가뜩이나 근심 걱정이 많은데, 날은 어찌 (그리도 지루하게) 길던고?
원앙새 무늬가 든 비단을 베어 놓고
오색실을 풀어 내어 금으로 만든 자로 재어서 임의 옷을 만들어 내니,
솜씨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격식도 갖추었구나.
산호수로 만든 지게 위에 백옥으로 만든 함에
(그 옷을) 담아 얹혀 두고 임에게 보내려고 임 계신 곳을 바라보니,
산인지 구름인지 험하기도 험하구나.
천만 리나 되는 머나먼 길을 누가 찾아갈꼬?
가거든 (이 함을) 열어두고 나를 보신듯이 반가워하실까?
하룻밤 사이의 서리 내릴 무렵에 기러기가 울며 날아갈 때,
높다란 누각에 혼자 올라서 수정알로 만든 발을 걷으니,
동산에 달이 떠오르고 북극성이 보이므로,
임이신가 하여 반가워하니 눈물이 절로 난다.
저 맑은 달빛을 일으켜 내어 임이 계신 궁궐에 부쳐 보내고 싶다.
(그러면 임께서는 그것을) 누각 위에 걸어 두고
온 세상에 다 비추어 깊은 산골짜기도 대낮 같이 환하게 만드소서.
천지가 겨울의 추위에 얼어 생기가 막혀,
흰 눈이 일색으로 덮여 있을 때 사람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날짐승의 날아다님도 끊어져 있다.
(따뜻한 지방이라 일컬어지는 중국에 있는)
소상강 남쪽 둔덕(전남 창평을 이름)도 추움이 이와 같거늘,
하물며 북쪽 임 계신 곳이야 더욱 말해 무엇하랴?
따뜻한 봄 기운을 (부채로) 부치어 내어 임 계신 곳에 쐬게 하고 싶다.
초가집 처마에 비친 따뜻한 햇볕을 임 계신 궁궐에 올리고 싶다.
붉은 치마를 여미어 입고 푸른 소매를 반쯤 걷어 올려,
해는 저물었는데 밋밋하고 길게 자란 대나무에 기대어서
이것 저것 생각함이 많기도 많구나.
짧은 겨울 해가 이내 넘어가고, 긴 밤을 꼿꼿이 앉아,
청사초롱을 걸어 둔 옆에 자개로 수놓은 공후를 두고,
원앙새를 수놓은 이불이 차기도 차구나.
(아, 이렇게 홀로 외로이 지내는) 이 밤은 언제나 샐꼬?
하루도 열두 때, 한 달도 서른 날,
잠시라도 임 생각을 말아 가지고 이 시름을 잊으려 하여도
마음 속에 맺혀 있어 뼈 속까지 사무쳤으니,
편작과 같은 명의(名醫)가 열 명이 오더라도 이 병을 어떻게 하랴.
아, 내 병이야 이 임의 탓이로다.
차라리 사라져(죽어져서) 범나비가 되리라.
꽃나무 가지마다 간 데 족족 앉고 다니다가
향기가 묻은 날개로 임의 옷에 옮으리라.
임께서야 (그 범나비가) 나인 줄 모르셔도 나는 임을 따르려 하노라.
속미인곡(續美人曲)
(序詞)
뎨 가는 뎌 각시 본 듯도 한뎌이고.
텬샹(天上) 백옥경(白玉京)을 엇디하야 니별하고,
해 다 뎌 저믄 날의 눌을 보라 가시난고.
어와 네여이고. 내 사셜 드러보오.
내 얼굴 이 거동이 님 괴얌즉 한가마난
엇딘디 날 보시고 네로다 녀기실새
나도 님을 미더 군뜨디 전혀 업서
이래야 교태야 어즈러이 구돗떤디
반기시는 낫비치 녜와 엇디 다라신고.
누어 생각하고 니러 안자 혜여하니,
내 몸의 지은 죄 뫼 가티 싸혀시니
하날히라 원망하며 사람이라 허믈하랴
셜워 플텨 혜니 조믈(造物)의 타시로다.
(本詞)
글란 생각 마오.
맺힌 일이 이셔이다.
님을 뫼셔 이셔 님의 일을 내 알거니
믈 가튼 얼굴이 편하실 적 몃날일고.
츈한(春寒) 고열(苦熱)은 엇디하야 디내시며,
츄일(秋日) 동텬(冬天)은 뉘라셔 뫼셧난고.
쥭조반(粥早飯) 죠셕(朝夕) 뫼 녜와 가티 셰시난가.
기나 긴 밤의 잠은 엇디 자시난고.
님 다히 쇼식을 아므려나 아쟈하니,
오날도 거의로다, 내일이나 사람 올까.
내 마음 둘 데 업다 어드러로 가쟛말고.
잡거니 밀거니 놉픈 뫼헤 올라가니
구롬은 카니와 안개난 므스일고.
산쳔(山川)이 어둡거니 일월(日月)을 엇디 보며
지척(咫尺)을 모르거든 쳔리를 바라보랴
찰하리 믈가의 가 뱃길히나 보쟈하니
바람이야 믈결이야 어둥졍 된뎌이고.
샤공은 어디 가고 븬 배만 걸렷나니
강텬(江天)의 혼쟈 셔셔 디난 해를 구버보니
님다히 쇼식이 더옥 아득한뎌이고.
모쳠(茅詹) 찬 자리의 밤듕만 도라오니
반벽(半壁) 쳥등(靑燈)은 눌 위하야 발갓는고.
오르며 나리며 헤뜨며 바니니
져근덧 녁진(力盡)하여 픗잠을 잠간 드니,
졍셩(情誠)이 지극하야 꿈의 님을 보니
옥(玉)가튼 얼굴이 반(半)이나마 늘거셰라.
마음의 머근 말삼 슬카장 삷쟈 하니
눈믈이 바라 나니 말인들 어이하며
졍(情)을 못다하야 목이 조차 몌여하니
오뎐된 계셩(鷄聲)의 잠은 엇디 깨돗던고.
(結詞)
어와, 허사(虛事)로다. 이 님이 어데간고.
결의 니러 안자 창(窓)을 열고 바라보니
어엿븐 그림재 날 조찰 뿐이로다.
찰하리 싀어디여 낙월(落月)이나 되야이셔
님 겨신 창 안해 번드시 비최리라.
각시님 달이야카니와 구즌 비나 되쇼셔
<현대어 풀이>
(서사序詞 : 자신의 처지 한탄)
(甲女) 저기 가는 저 부인, 본 듯도 하구나,
임금이 계시는 대궐을 어찌하여 이별하고,
해가 다 져서 저문 날에 누구를 만나러 가시는고?
(乙女의 대답) 물경의 탓이로다(자탄)
(乙女) 아, 네로구나. 내 사정 이야기를 들어보오.
내 얼굴과 이 나의 태도는 임께서 사랑함 직한가 마는
어쩐지 나를 보시고 너로구나 하고 특별히 여기시기에
나도 임을 믿어 딴 생각이 전혀 없어,
응석과 아양을 부리며 지나치게 굴었던지
반기시는 낯빛이 옛날과 어찌 다르신고?
누워 생각하고 일어나 앉아 헤아려 보니,
내 몸의 지은 죄가 산같이 쌓였으니,
하늘을 원망하며 사람을 탓하랴.
설워서 여러 가지 일을 풀어내어 헤아려 보니,
조물주의 탓이로다.
(본사本詞 : 임에 대한 충정, 임의 소식, 독수 공방의 외로움)
(甲女) 그것일랑(그렇게는) 생각하지 마오.
(乙女) 마음속에 맺힌 일이 있습니다.
예전에 임을 모시어서 임의 일을 내가 알거니,
물같이 연약한 몸이 편하실 때가 몇 날일꼬?
이른 봄날의 추위와 여름철의 무더위는 어떻게 지내시며,
가을날 겨울날은 누가 모셨는고?
자릿 조반과 아침저녁 진지는 예전과 같이 잘 잡수시는가?
기나긴 밤에 잠은 어떻게 주무시는가?
임 계신 곳의 소식을 어떻게 해서라도 알려고 하니,
오늘도 거의 저물었구나. 내일이나 임의 소식 전해 줄 사람이 올까?
내 마음 둘 곳이 없다. 어디로 가자는 말인고?
나무 바위 등을 잡기도 하고 밀기도 하면서 높은 산에 올라가니,
구름은 물론이거니와 안개는 또 무슨 일로 저렇게 끼어 있는고?
산천이 어두운데 일월을 어떻게 바라보며,
눈앞의 가까운 곳도 모르는데 천 리나 되는 먼 곳을 바라볼 수 있으랴?
차라리 물가에 가서 뱃길이나 보려고 하니
바람과 물결로 어수선하게 되었구나.
뱃사공은 어디 가고 빈 배만 걸렸는고?
강가에 혼자 서서 지는 해를 굽어보니
임 계신 곳의 소식이 더욱 아득하구나.
초가집 찬 잠자리에 한밤중에 돌아오니,
벽 가운데 걸려 있는 등불은 누구를 위하여 밝은고?
산을 오르내리며 강가를 헤매며 시름없이 오락가락하니,
잠깐 사이에 힘이 지쳐 풋잠을 잠깐 드니,
정성이 지극하여 꿈에 임을 보니
옥과 같이 곱던 얼굴이 반 넘어 늘었구나.
마음속에 품은 생각을 실컷 사뢰려고 하였더니
눈물이 쏟아지니 말인들 어찌 하며,
정회(情懷)도 못 다 풀어 목마저 메니,
방정맞은 닭소리에 잠은 어찌 깨었던고?
(결사結詞 : 임금을 그리워하는 마음)
(乙女) 아. 허황한 일이로다. 이 임이 어디 갔는고?
즉시 일어나 앉아 창문을 열고 밖을 바라보니,
가엾은 그림자만이 나를 따라 있을 뿐이로다.
차라리 사라져서(죽어서) 지는 달이나 되어서
임이 계신 창문 안에 환하게 비치리라.
(甲女) 각시님. 달은커녕 궂은 비나 되십시오.
이 작품은 선조 임금에 대한 자신의 애틋한 심정을 진솔하게 노래한 연군가사이다.
이 작품은 <사미인곡>의 속편처럼 인식되지만 언어의 구사와 시어의 간절함이 오히려 더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사미인곡>은 임에게 정성을 바치는 것이 주이고 독백체(평서체)를 택하여 한자 숙어와 전고(典故) 등을 사용하여 다소 사치스럽고 과장되게 표현하고 있다. 이에 비하여 <속미인곡>은 자기의 생활이나 감정을 표현하고, 대화체를 사용하여 사연을 보다 극적으로 유도하고 있으며, 한자 숙어와 전고를 거의 사용하지 않고 고유어를 사용하여 화자의 생각과 감정을 소박하고 진실되게 표현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속미인곡>은 <사미인곡>을 지을 때보다 작자의생각이 한결 원숙해진 후의 작품이라 볼 수 있다.
갑녀의 눈에 비친 을녀의 모습은 신분의 전락과 방황의 이미지로 요약된다. 을녀는 원래 고귀한 신분이었으나 지상으로 내려진 인물이며, 현재적 상황에 안주할 수 없어 끝없이 과거의 상태를 지향하는 인물이다. 을녀는 적선(謫仙) 혹은 굴원과 상통하는 이미지를 지니고는 있으나 기본적으로 사랑하는 임으로부터 버림받은 여인이다. 을녀의 존재의의는 오직 임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부여받을 수 있다. 결국 을녀의 '님'은 ① 절대적 존재(일월 같은 존재), ② 을녀에게 사랑이 식어 가는 임(지는 해를 구버 보니), ③ 인간적 번뇌에 시달리는 임으로 나타난다.
이 작품이 조선조 선비들에게 높게 평가되는 이유는 우선 언어 구사의 공교함, 우리말의 효과적 사용, 비속함이 없음, 그 사(辭)가 우아하고도 곡진함 등의 세련된 표현미와 그리고 화자의 간절한 뜻과 충신연군지정을 지니고 뜻이 깨끗하고 절개가 곧은 주제적 깊이, 다음으로 작가 송강의 탁월한 예술성, 마지막으로 정서가 비정하면서도 방정한 감동적 효용성에 있다.
<속미인곡>의 화자의 위상은 작중에서 자신의 신세를 하소연하는 두 여인이다. 이 여인들은 물론 송강의 분신이다. 따라서 두 여인이 주고받는 하소연의 실상은 송강 자신의 내면의식의 문학적 투사라 할 수 있다. 갑녀는 을녀에게 질문을 던져 그의 하소연을 유발해 내고 그의 하소연을 종결 짓는 역할을 하고 있으며, 반면 을녀는 갑녀의 질문에 응해 푸념 어린 신세한탄을 곡진히 피력함으로써 작품의 정서적 분우기를 주도하는 역할을 한다.
다시 말해 갑녀가 작품의 전개와 종결을 위한 기능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면 을녀는 작품의 주제 구현에 중추적 역할을 하고 있다. 더욱이 갑녀는 종결시 '구즌 비'를 말함으로써 보다 강한 의지를 드러낸다. 즉 갑녀도 송강의 분신의 하나라면 나만 이렇게 슬플 것이 아니라 님도 슬프게 하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그리고 을녀의 존재 의의는 오직 임을 통해서만 실현되기 때문에 임이 사라지자 자신의 존재 의의도 무화되고 그 결과 거기에 원망이 자리할 틈이 없게 된다. 임의 사람을 잃은 그녀에게 주어진 것은 끊임없는 실의와 자기 반성뿐이다. 이러한 자기 반성은 그녀를 임에 대해 더욱 종속적이게 만들며, 반면 임의 존재적 가치를 더욱 절대화시키는 구실을 해 준다. 그녀는 임이 자신을 버린 것이 자신의 잘못 때문이라는 자성적 성숙함을 드러내면서 모든 것을 운명(조물의 탓)으로 받아들이는 운명론적 체념 속으로 빠져든다. 자신을 저버린 임에 대한 을녀의 태도는 끊임없는 모성애적 사랑과 절대적 존재에 대한 희구로 표출된다. 즉 이 작품의 중심화자인 을녀는 자신을 버린 임, 반응 없는 임에 대한 절대 애의 표상으로 형상화되어 있다. 그녀에게는 앙탈도 저주도 없으며 오직 순종적, 모성애적 사랑만이 자리한다. 을녀의 형상은 남성 유학자로서 송강이 임금을 상정하고 쓴 글이라는 특수성에 기인한 것으로 시가사에서 그 위치를 차지한다.
이 작품에서 임의 모습, 즉 임의 위상은 구체적으로 형상화되어 있지 않다. 독자에게 제공되는 유일한 정보는 그가 천상 백옥경에서 살고 있는 인물이라는 점이다. 임이 천상 백옥경에서 살고 있다는 것은 그가 신선과 같은 고귀한 존재라는 것이다. 임은 범인과는 다른 고매한 존재며 절대적 가치를 지닌 존재다. 그러나 화자는 이러한 인식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 임을 매우 애처롭고 안쓰러운 존재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을녀에게는 일월과 같은 존재로 인식된다. 그리고 을녀에게 임은 점차 사랑이 식어 가는 임이기도 하다. 더욱이 인간적인 번뇌에 시달리는 임이기도 하다. 그러면서도 을녀에게는 지극한 안식처로 인식되기도 한다. 이는 을녀의 마음속에 있는 임이지 실제의 임의 모습은 아니다. 을녀는 임을 일월과 같은 절대적 존재로 받아들이며 자신의 삶의 의의를 되돌릴 수 있는 오직 한 분으로 인식하고 있는데 임을 향한 여인의 이러한 절대애적 사념이 이 작품의 중요한 특성을 이룬다. 화자와 대상인 임과의 거리는 을녀에게 있어 기본적으로 천지의 차이이다. 심정적으로는 가까우나 현실적으로는 임이 부재하고 있기 때문에 을녀는 임과의 거리를 좁혀 보려는 끝없는 노력을 전개한다. 즉 그녀가 높은 산에 오르는 것은 이러한 노력의 의식적 표현이며 뱃길을 찾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그 거리가 을녀의 노력에도 가까워지지 않는다는 데에 이 작품의 비장성이 부여된다. 구름과 안개는 그녀의 임에로의 가능성을 가로막는 장애 요소로 작용하며 바람과 물결은 그녀에게 장애요소이다.
그녀가 풋잠에서나마 임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현실적 절망에 대한 심리적 보상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모든 꿈이 그렇듯이 그녀도 꿈속에서 만단 정회를 충분히 펼 수가 없었다. 이는 작품에 안타까운 정조를 더해 줄뿐만 아니라 임과의 거리를 단축해 보려는 그녀의 열망이 꿈처럼 허무한 것임의 또 다른 표현이다. 임과의 거리를 조금이라도 좁혀 볼 수 없는 그녀에게 마지막으로 남겨진 것은 죽음으로서의 초월이다. '낙월'로 표현되는 대목은 죽어 낙월이 되기 전에는 임과의 해후는 불가능하다는 좌절적 인식의 표현이며 그 때에야 임의 사람을 어느 정도 되돌릴 수 있다는 절망적 소원의 표현인 것이다. 결국 이 작품은 을녀와 임과의 거리가 결정적으로 멀어진 상황에서 출발하여 이 거리를 좁혀 보려는 을녀의 허망한 노력으로 이어지다가 마침내 이의 불가능성을 깨닫고 이를 죽음이라는 비극적 초월로 극복해 보려는 작품적 성격을 지닌다. 여기성 비장미가 드러난다.
이러한 을녀는 고려가요의 여성 화자의 성격과는 다르다. 고려가요의 여성 화자는 서민적, 유녀적(遊女的) 성격이 짙으나 <속미인곡>의 화자는 평범한 일상 부녀자의 모습은 있으나 자신의 감정을 통제할 줄 아는 유교적 도덕녀로서의 성격이 강하기 때문이다. 즉 고려가요의 화자처럼 직접적인 여성의 앙탈, 푸념 등이 없다.
임을 향한 을녀의 이런 처절하리만큼 숭엄한 사랑의 모습은 그것이 유교 사회에 살던 남성 작가의 손에서 나왔다는 점에서 또한 작가 송강이 임금을 상정하고 지었다는 점에서 가능할 수 있었던 여성상이라 하겠다. 그만큼 을녀는 남성 위주의 유교 사회에서 앙모될 수 있는 임에게 저버림을 당한 여인으로 취할 수 있었던 당대의 모범적 여인상이다. 이러한 모습, 즉 당대의 유교적 취향에 잘 부합된 을녀, 쉬운 우리말 가사, 연정시적 성격 등에서 널리 애창된 것이다.
관 동 별 곡 (關東別曲) - 정 철- - 송강가사(松江歌辭) -
( 자연을 사랑하는 깊은 병이 들어 은서지에서 지내고 있었는데 )
관동 팔백리(八百里)에 방면(方面)을 맛디시니
( (임금이) 800리나 되는 강원도 지방의 관찰사의 소임을 맡겨 주시니 )
어와 셩은(聖恩)이야 가디록 망극(罔極)하다.
( 아, 임금의 은혜야말로 갈수록 그지 없구나. )
연츄문(延秋門) 드리다라 경회남문 바라보며
( 경북궁의 서쪽 문으로 달려들어가 경회루 남문을 바라보며 )
하직(下直)고 믈너나니 옥절(玉節)이 알픠 셧다.
( (임금께) 하직하고 물러나니, 임금이 내리신 관찰사의 신표가 행차의 앞에 섰다. )
평구역 말을 가라 흑슈로 도라드니,
( 평구역(양주)에서 말을 갈아 타고, 흑수(여주)로 돌아드니 )
셤강(蟾江)은 어듸메오, 티악(雉岳)이 여긔로다.
( 섬강(원주)은 어디인가, 치악산(원주)이 여기로다. )
쇼양강(昭陽江) 나린 믈이 어드러로 든단 말고.
( 소양강(춘천)에서 흘러 내리는 물이 어디로 흘러간단 말인가? )
고신(孤臣) 거국(去國)에 백발도 하도 할샤
( 임금님 곁을 떠나는 외로운 신하가 백발도 많기도 많구나. )
동쥐 밤 계오 새와 북관뎡(北寬亭)의 올나하니,
( 동주(철원)의 밤을 간신히 세우고 북관정에 오르니 )
삼각산 뎨일봉(第一峰)이 하마면 뵈리로다.
( 삼각산 제일봉이 웬만하면 보이겠구나. )
궁왕(弓王) 대궐 터희 오쟉(烏鵲)이 지지괴니
( 옛날 태봉국 궁예왕의 대궐터였던 곳에서 까막까치가 지저귀니 )
쳔고(千古) 흥망(興亡)을 아난다 몰아난다.
( 천고의 흥망을 알고 우짖는 것인가, 모르고 우짖는 것인가 )
회양(淮陽) 녜 일홈이 마초아 가탈시고.
( 회양이라는 네 이름이 (중국의) '회양'이라는 이름과 마침 똑같구나. )
급댱유(汲長孺) 풍채(風彩)를 고텨 아니 볼거이고.
( 중국 '회양' 태수로 정치를 잘했다던 급장유의 풍채를 다시 볼 것이 아닌가? )
( 감영 안이 무사하고 시절이 삼월인 때에 )
화쳔(花川) 시내길히 풍악(楓岳)으로 버더 잇다.
( 화천 시냇길이 금강산으로 뻗어 있다 )
행장(行裝)을 다 떨티고 셕경(石逕)의 막대 디퍼
( 여행 장비를 간편히 하고 돌길에 지팡이를 짚어 )
백쳔동(百川洞) 겨테 두고 만폭동 드러가니,
( 백천동을 곁에 두고 만폭동으로 들어가니 )
은(銀)가튼 무지게 옥(玉)가튼 룡(龍)의 초리
( 은 같은 무지개처럼, 옥 같은 용의 꼬리처럼 )
섯돌며 뿜는 소리 십리예 자자시니,
( (아름다운 폭포수가) 섞이어 돌며 뿜어내는 소리가 십 리에까지 자자하니 )
들을 제는 우레러니 보니난 눈이로다.
( 멀리서 들을 때엔 우레 소리 같더니, 가까이서 바라보니 온통 하얀 눈빛이구나. )
금강대 맨 우층의 션학(仙鶴)이 삿기치니,
( 금강대 맨 꼭대기에 선학이 새끼를 치니 )
츈풍(春風) 옥뎍셩(玉笛聲)의 첫잠을 깨돗던디,
( 봄바람에 들려오는 옥피리 소리에 첫잠을 깨었던지 )
호의(縞衣) 현샹(玄裳)이 반공(半空)의 소소 뜨니,
( 흰옷, 검은 치마로 단장한 학이 공중에 솟아 뜨니 )
셔호(西湖) 녯주인을 반겨셔 넘노는 듯.
( 서호의 옛주인과 같은 나를 반겨 넘나들며 노는 듯하네. )
소향노(小香爐) 대향노(大香爐) 눈 아래 구버보고,
( 소향로, 대향로봉을 눈 아래로 굽어보고 )
졍양사(正陽寺) 진헐대(眞歇臺) 고텨 올나 안잔마리,
( 정양사 진헐대에 다시 올라 앉으니 )
녀산(廬山) 진면목(眞面目)이 여긔야 다 뵈나다.
( 금강산의 참모습이 여기(진헐대)에서 다 보이는구나 )
어와, 조화옹(造化翁)이 헌사토 헌사할샤.
( 아아, 조물주가 야단스럽기도 야단스럽구나 )
날거든 뛰디마나 셧거든 솟디마나
( 날거든 뛰지 말거나 섰거든 솟지 말거나 할 것이지, 날고 뛰고 섰고 솟은 변화무쌍한 봉우리)
부용(芙蓉)을 고잣는 듯 백옥(白玉)을 믓것는 듯,
( 부용(연꽃)을 꽂아놓은 듯, 백옥을 묶어 놓은 듯, 아름다운 산봉우리여 )
동명(東溟)을 박차는 듯 북극(北極)을 괴왓는 듯.
( 동해 바다를 박차는 듯, 북극성을 괴어 놓은 듯, 그렇게도 힘찬 기상의 봉우리여. )
놉흘시고 망고대(望高臺) 외로울샤 혈망봉(穴望峰)이
( 높도다 망고대여, 외롭구나 혈망봉이 )
하늘의 추미러 므스 일을 사로리라
( 하늘에 치밀어 올라가 무슨 일을 아뢰려고 )
쳔만 겁(千萬劫) 디나도록 구필 줄 모로난다.
( 오랜 세월 지나도록 굽힐 줄을 모르느냐? (그 지조가 놀랍구나) )
어와 너여이고, 너 가트니 또 잇난가.
( 아, 너(망고대, 혈망봉)로구나. 너 같이 지조가 높은 것이 또 있겠는가? )
개심대(開心臺) 고텨 올나 즁향셩(衆香城) 바라보며,
( 개심대에 다시 올라 중향성을 바라보며 )
만이쳔봉(萬二千峰)을 녁녁(歷歷)히 혀여하니,
( 만 이천봉을 똑똑히 헤아려 보니 )
봉(峰)마다 맺혀잇고 긋마다 서린 긔운
( 봉우리마다 맺혀 있고 끝마다 서려있는 기운이 )
맑거든 조티 마나, 조커든 맑디 마나
( 맑거든 깨끗하지 말거나, 깨끗하거든 맑지나 말거나 할 것이지, 맑고 깨끗함을 함께 지닌 산봉우리의 수려함이여. )
뎌 긔운 흐텨 내야 인걸(人傑)을 만들고쟈.
( 저 맑은 기운을 흩어 내어 뛰어난 인재(人材)를 만들고 싶구나. )
형용(形容)도 그지업고 톄셰(體勢)도 하도 할샤.
( 모양도 끝이 없고 몸가짐새도 많기도 많구나 )
텬디(天地) 삼기실 제 자연(自然)이 되연마는,
( 천지가 생겨날 때에 자연히 되었지만 )
이제 와 보게 되니 유졍(有情)도 유졍할샤.
( 이제 와서 보게 되니 (천지창조에) 조물주의 뜻이 깃들어 있기도 하구나. )
비로봉(毘盧峰) 샹샹두(上上頭)의 올라 보니 긔 뉘신고.
(비로봉 정상에 올라가 본 사람이 있다면 그가 누구인가? (저렇게 아득하니 아마 없을 것임) )
동산(東山) 태산(泰山)이 어느야 놉돗던고.
( (비로봉을 바라보니, 공자님 말씀이 생각나네. 공자는 동산에 올라 노나라가 작고, 태산에 올라서 천하를 작다고 했으니) 동산과 태산 중 어느 것이 높던가? )
노국(魯國) 조븐 줄도 우리는 모라거든,
( 노나라가 좁은 줄 우리는 모르거늘 )
넙거나 넙은 텬하(天下) 엇띠하야 격닷 말고.
( 넓거나 넓은 천하를 공자는 어찌해서 작다고 했는가? )
어와 뎌 디위를 어이하면 알 거이고.
( 아! 공자의 저 높은 정신적 경지를 어떻게 하면 알 수 있을 것인가? )
오라디 못 하거니 나려가미 고이할까.
( 오르지 못하는데 내려감이 이상하겠는가? )
원통(圓通)골 가난 길로 사자봉(獅子峰)을 차자 가니,
( 원통골의 좁은 길로 사자봉을 찾아가니 )
그 알픠 너러바회 화룡(火龍)쇠 되어셰라.
( 그 앞에 넓은 바위가 화룡소가 되어 있구나 )
천년(千年) 노룡(老龍)이 구비구비 서려 이셔,
( 마치 천 년 묵은 늙은 용이 굽이굽이 서려 있어 )
듀야(晝夜)의 흘녀 내여 창해(滄海)예 니어시니,
( 밤낮으로 흘러내려 넓은 바다로 이어졌으니 )
풍운(風雲)을 언제 어더 삼일우(三日雨)를 디련난다.
( 용아, 너는 풍운을 언제 얻어 임금의 은총을 백성에게 내려 주려느냐? )
음애(陰崖)예 이온 플을 다 살와 내여사라.
( 헐벗고 굶주린 백성을 모두 살려 내려무나. )
마하연(磨河衍) 묘길샹(妙吉祥) 안문(雁門)재 너머디여,
( 마하연, 묘길상, 안문재를 넘어 내려가 )
외나모 써근 다리 블뎡대(佛頂臺) 올라하니,
( 썩은 외나무 다리를 건너 불정대에 오르니 )
천심절벽(千尋絶壁)을 반공(半空)애 셰여 두고,
( (조물주가) 천 길이나 되는 절벽을 공중에 세워두고 )
은하슈(銀河水) 한 구비를 촌촌히 버혀 내여,
( 은하수 큰 굽이를 마디마디 잘라내어 )
실가티 플텨이셔 뵈가티 거러시니
( 실처럼 풀어서 베처럼 걸었으니, (그렇게 십이폭포의 모습이 아름다우니 )
도경(圖徑) 열 두 구비, 내 보매난 여러히라.
( 도경에 그려진 십이폭포가 내가 보기에는 여럿이구나 )
니뎍션(李謫仙) 이제 이셔 고텨 의논하게 되면,
( 이백이 (<망여산폭포>에서 여산폭포를 극찬했는데), 이제 있어서 다시 의견을 나누게 되면 )
녀산(廬山)이 여긔도곤 낫단 말 못하려니.
( 여산폭포가 십이폭포보다 낫다는 말을 아마도 못할 것이다. )
( 금강산중을 계속 보겠는가, 동해로 가자꾸나. )
남여(籃輿) 완보(緩步)하야 산영누(山映樓)의 올나하니,
( 가마를 타고 천천히 산영루에 오르니 )
녕농벽계(玲瓏碧溪)와 수셩뎨됴(數聲啼鳥)는
( 눈부신 푸른 시냇물과 여기저기서 지저귀는 새울음소리는 )
니별(離別)을 원(怨)하는 듯,
( 나와의 이별을 원망하는 듯하고 )
졍긔(旌旗)를 떨티니 오색(五色)이 넘노는 듯,
( 깃발들은 서로 오색이 어우러져 넘노는 듯하고 )
고각(鼓角)을 섯부니 해운(海雲)이 다 것는 듯.
( 북과 피리를 섞어 부는 것에 따라 바닷구름이 다 걷히는 듯 )
명사(鳴沙) 길 니근 말이 취션(醉仙)을 빗기 시러,
( 밟으면 소리를 내는 모랫길에 익숙한 말이 취한 신선을 비스듬히 실어 )
바다흘 겻테 두고 해당화(海棠花)로 드러가니,
( 바다를 곁에 두고해당화꽃밭으로 들어가니 )
백구(白鷗)야 나디마라, 네 버딘 줄 엇디 아난.
( 갈매기야 날아가지 말아라, 내가 네 벗이 될지 어찌 알고 날아가느냐 ? )
금난굴(金蘭窟) 도라 드러 총셕뎡(叢石亭) 올라하니,
( 금난굴을 돌아 들어서 총석정에 오르니 )
백옥누(白玉樓) 남은 기동 다만 네히 셔 잇고야.
( 마치 옥황상제가 사는 듯한 백옥루의 남은 기둥 네 개가 서 있구나 )
공슈(工수)의 셩녕인가, 귀부(鬼斧)로 다다믄가.
( 공수가 만든 공작품인가? 조화를 부리는 귀신 도끼로 다듬었는가? )
구타야 뉵면(六面)은 므어슬 샹(象)톳던고.
( 구태여 육면으로 만든 기둥의 벽은 무엇을 본뜬 것인가 )
고셩(高城)을란 뎌만 두고 삼일포(三日浦)를 차자가니,
( 고성은 저만치 두고 삼일포를 찾아가니 )
단셔(丹書)는 완연(宛然)하되 사션(四仙)은 어데 가니.
( (사선이 남석으로 갔다는) 붉은 글씨는 바위에 뚜렷한데, 영랑, 남랑, 술랑, 안상은 어디로 갔는가 )
예 사흘 머믄 후의 어디가 또 머믄고.
( 여기에서 사흘을 머문 후에 어디로 가서 또 머물렀던 것인가? )
선유담(仙遊潭) 영낭호(永郞湖) 거긔나 가 잇난가.
( 선유담, 영랑호 그곳에나 가 있었던가 )
쳥간정(淸間亭) 만경대(萬景臺) 몃 고데 안돗던고.
( 청간정, 만경대 몇 곳에 앉았던가 )
니화(梨花)는 발셔 디고 졉동새 슬피 울 제,
( 배꽃이 벌써 떨어지고, 접동새가 슬프게 울 때, )
낙산(洛山) 동반(東畔)으로 의샹대(義相臺)예 올라 안자,
( 낙산 동쪽 언덕으로 의상대에 올라 앉아 )
일츌(日出)을 보리라 밤듕만 니러하니,
( 일출을 보려고 한밤중에 일어나니 )
샹운(祥雲)이 집픠는 동 뉵뇽(六龍)이 바퇴는 동,
( 상서로운 구름이 피어나는 듯, 여섯 마리 용이 해를 떠받치는 듯 )
바다헤 떠날 제는 만국(萬國)이 일위더니,
( 바다에서 해가 떠날 때는 온세상이 흔들리더니 )
텬듕(天中)의 티뜨니 모발(毛髮)을 혜리로다.
( 하늘에 치솟아 뜨니 가는 터럭도 모두 셀 수 있을 만큼 환하다. )
아마도 녈구름 근쳐의 머믈셰라.
( 아마도 흘러가는 구름이 해 근처에 머물까 두렵구나 )
시션(詩仙) 어데 가고 해타(咳唾)만 나맛나니.
( 내 심정과 같은 시를 읊은 이백은 어디 가고, 그의 시(등금릉봉황대)만이 남았느냐? )
텬디간(天地間) 장(壯)한 긔별 자셔히도 할셔이고.
( 천지간에 굉장한 이야기가 그의 시에 자세히도 표현되어 있구나. )
샤양(斜陽) 현산(峴山)의 텩툑을 므니 발와
( 석양 무렵 현산의 철쭉꽃을 잇달아 밟아 )
우개지륜(羽蓋芝輪)이 경포로 나려가니
( 신선이 탄다는 수레를 타고 경포로 내려가니 )
십리(十里) 빙환(氷紈)을 다리고 고텨 다려,
( 십 리나 뻗어 있는 얼음을 다리고 다시 다린 듯한 잔잔한 호숫물이 )
댱숑(長松) 울한 소개 슬카장 펴뎌시니,
( 큰 소나무에 둘러싸인 속에서 마음껏 펼쳐져 있으니, )
믈결도 자도 잘샤 모래를 혜리로다.
( 물결도 잔잔하기도 하구나, 그 물 밑의 모래를 셀 수 있을 만큼 맑구나 )
고쥬(孤舟) 해람(解纜)하야 뎡자(亭子) 우희 올나가니
( 한 척의 배를 띄워 정자 위에 올라가니 )
강문교(江門橋) 너믄 겨틔 대양(大洋)이 거긔로다.
( 강문교를 넘은 곁에 동해 바다가 거기로구나. )
둉용(從容)한댜 이 긔샹(氣像), 활원(闊遠)한댜 뎌 경계,
( 조용하도다 이 경포의 기상이여, 넓고 아득하구나 저 동해의 경계여. )
이도곤 가잔 데 또 어듸 잇단 말고.
( 이곳보다 아름다운 경관을 갖춘 곳이 또 어디에 있단 말인가 )
홍장(紅粧) 고사(古事)를 헌사타 하리로다.
( 고려 우왕 때의 박신과 홍장의 사랑이야기가 야단스럽다고 하겠구나. )
강능 대도호(大都護) 풍쇽(風俗)이 됴흘시고,
( 강릉 대도호는 풍속이 좋구나. )
졀효졍문(節孝旌門)이 골골이 버러시니,
( 효자, 열녀, 충신을 표창하는 붉은 문이 고을마다 널렸으니 )
비옥가봉(比屋可封)이 이제도 잇다 할다.
( 집집마다 벼슬을 줄 만하다는 요순 시절의 태평성대가 지금도 있다고 하겠구나. )
진쥬관(眞珠館) ?셔루(竹西樓) 오십쳔(五十川) 모든 믈이
( 진주관 죽서루 밑의 오십천 흘러내리는 물이 )
태백산(太白山) 그림재를 동해로 다마 가니,
( 태백산 그림자를 동해로 담아가니 )
찰하리 한강(漢江)의 목멱(木覓)의 다히고져.
( 차라리 그 그림자를 한강의 남산에 닿게 하고 싶어라. )
왕뎡(王程)이 유한(有限)하고, 풍경(風景)이 못 슬믜니,
( 관리의 여행길은 유한하고, 풍경은 싫지 않으니 )
유회(幽懷)도 하도 할샤, 객수(客愁)도 둘 듸 업다.
( 그윽한 회포가 많기도 많구나, 나그네의 근심을 둘 곳이 없구나 )
션사(仙사)를 띄워 내여 두우(斗牛)로 향(向)하살까.
( 신선이 탄다는 뗏목을 띄워서 북두칠성 견우성으로 향해 볼까? )
션인(仙人)을 차자려 단혈(丹穴)의 머므살까.
( 사선을 찾으러 단혈이란 동굴에 머물러 볼까? )
텬근(天根)을 못내 보와 망양뎡(望洋亭)의 올은말이,
( 하늘 끝을 끝내 보지 못하여 망양정에 오르니 )
바다 밧근 하늘이니 하늘 밧근 므서신고.
( 바다 밖은 하늘이니 하늘 밖은 무엇인가 )
갓득 노(怒)한 고래, 뉘라셔 놀내관대,
( 가뜩이나 노한 고래(파도)를 누가 놀라게 하였길래, )
블거니 쁨거니 어즈러이 구난디고.
( 물을 불거니 뿜거니 어지럽게 구는 것인가 )
은산(銀山)을 것거 내여 뉵합(六合)의 나리는 듯
( 마치 은산(파도)을 꺾어 내어 온세상에 흘러내리는 듯 )
오월(五月) 댱텬(長天)의 백셜(白雪)은 므스 일고.
( 오월 하늘에 백설(포말)은 무슨 일인가 )
( 어느덧 밤이 깊어 물결이 가라앉아서 )
부상(扶桑) 지척(咫尺)의 명월(明月)을 기다리니,
( 해뜨는 곳 가까운 곳에서 떠오를 명월을 기다리니 )
셔광(瑞光) 쳔당(千丈)이 뵈는 듯 숨는고야.
( 상서로운 달빛이 구름사이로 보이다가 이내 숨는구나 )
쥬렴(珠簾)을 고텨 것고 옥계(玉階)를 다시 쓸며,
( 구슬로 만든 발을 다시 걷어 올리고 층계를 다시 쓸며 )
계명셩(啓明星) 돗도록 곳초 안자 바라보니,
( 샛별이 돋아나도록 꼿꼿이 앉아서 명월을 바라보니 )
백년화(白蓮花) 한 가지를 뉘라서 보내신고.
( 연꽃 한 가지(달)를 누가 보내셨는가 )
일이 됴흔 세계(世界) 남대되 다 뵈고져.
( 이렇게 좋은 세상을 남들에게 다 보여주고 싶구나 )
뉴하쥬(流霞酒) 가득 부어 달다려 무론 말이
( 좋은 술을 가득 부어 달에게 묻는 말이 )
영웅(英雄)은 어디 가며 사선(四仙)은 긔 뉘러니,
( "영웅은 어디 갔으며 사선은 그들이 누구이더냐" )
아모나 만나보아 녯 긔별 뭇쟈하니,
( 아무나 만나 보아 옛소식을 묻자 하니 )
션산(仙山) 동해(東海)예 갈 길도 머도 멀샤.
( 선산 동해에 갈길이 멀기도 멀구나. )
숑근(松根)을 볘여 누어 픗잠을 얼픗 드니
( 소나무 뿌리를 베고 누워서 선잠을 얼핏 드니 )
꿈애 한 사람이 날다려 닐온 말이,
( 꿈에 신선이 나타나 나에게 이르는 말이 )
그대를 내 모라랴, 샹계(上界)예 진션(眞仙)이라.
( "그대를 내가 모르겠는가, 그대는 하늘나라에 살았던 신선이라 )
황뎡경(黃庭經) 일자(一字)를 엇디 그릇 닐거 두고
( 황정경 한 글자를 어찌 잘못 읽어 )
인간(人間)의 내려와셔 우리를 딸오난다.
( 인간 세상에 내려와서 우리를 따르는가? )
져근덧 가디 마오. 이 술 한 잔 먹어 보오.
( 잠깐만 가지 마오. 이 술 한 잔 먹어 보오." )
븍두셩(北頭星) 기우려 챵해슈(滄海水) 부어 내여,
( 북두칠성을 술잔으로 삼아기울여서 창해수를 술로 삼아 부어 내어 )
저 먹고 날 머겨늘 서너 잔 거후로니
( 저 먹고 나에게 먹이거늘, 서너 잔 기울이니 )
화풍(和風)이 습습(習習)하야 냥액(兩腋)을 추혀드니,
( 봄바람이 산들산들 불어 양쪽 겨드랑이를 추켜드니 )
구만리(九萬里) 댱공(長空)애 져기면 날리로다.
( 높고 아득한 하늘에 왠만하면 날 것 같은 기분이로다. )
이 술 가져다가 사해(四海)예 고로난화,
( " 이 술을 가져다가 온 세상에 고루 나누어 )
억만창생(億萬蒼生)을 다 취(醉)케 맹근 후의,
( 모든 백성을 다 취하게 만든 후에 )
그제야 고텨 맛나 또 한 잔 하쟛고야.
( 그때 다시 만나 또 한 잔을 하자꾸나 " )
말 디쟈 학(鶴)을 타고 구공(九空)의 올나가니,
( 이 말이 끝나자 신선이 학을 타고 높고 아득한 하늘로 올라가니 )
공듕(空中) 옥쇼(玉簫) 소리 어제런가 그제런가.
( 공중에서 들려오는 옥피리 소리가 어제인지 그제인지 모르게 아득히 들려오는구나 )
나도 잠을 깨여 바다흘 구버보니,
( 나도 잠을 깨어 바다를 굽어보니 )
기픠를 모라거니 가인들 엇디 알리.
( 깊이를 모르니 그 바다 끝을 어찌 알겠는가 )
명월(明月)이 쳔산만낙(千山萬落)의 아니 비쵠 데 업다.
( 명월이 온 산과 촌락에 비치지 않은 곳이 없구나)
[작품 해설] 이 작품은 조선 선조 13년(1580)에 송강 정철이 그의 나이 45세 되는 정월에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3월에 관동 팔경을 두루 유람하고서 그 도정과 산수, 풍경과 고사, 풍속 등을 읊은 가사이다. <관동별곡>은 조선시대 가사 문학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으며, 숙종 때 김만중은 우리 나라 참된 문장은 송강의 <관동별곡>,<사미인곡>,<속미인곡> 세 편이라고 칭송하기도 하였다. 이 작품의 분량은 2율각(律刻) 1구로 헤아려 총 293구인데, 내용은 3단계로 구성되어 있다. 서사에서는 관찰사로 임명되어 여행에 오르는 동기를 밝히고, 본사에서는 부임지인 원주에 도착한 후 다시 관내를 순행하기 위해 길을 떠나 금강산 내외를 구경하면서 감상을 옮겼다. 결사에서는 동해의 달맞이와 꿈속에서 만난 신선과의 풍류를 노래하고 있다. 이 <관동별곡>은 기괴한 금강의 산수와 미려한 동해의 풍경, 그리고 장엄한 대자연을 붓끝으로 약동하여 신비에 대한 묘사와 감탄이 극치에 다다르고, 용어는 모두 34언 어주에 맞추어져 있으며, 한문 사용이 비교적 적다. 가장 특이한 점은 ‘연군(戀君)과 선어(仙語)’라고 할 수 있다. 이 두 가지가 처음부터 뒤섞여 그 맥락을 이었는데, 이 중에서 연군은 아첨과 허위가 아닌 진지한 작자의 태도임을 느낄 수 있다. 절묘한 언어의 조탁과 유연한 음률의 조화가 일품이며, 감탄사의 적절한 사용과 대구의 조화, 생략법 등을 사용하여 상당히 긴 가사지만, 독자로 하여금 조금도 지리한 감을 주지 않는다. 이와 같이, <관동별곡>은 종래의 많은 유람가사가 미치지 못할 만큼 독창적이며 서정적인 작품으로서 가장 대표적인 거작이다.
성산별곡(星山別曲)
[1]
엇던 디날 손이 성산의 머믈며셔
서하당 식영정 주인아 내 말 듯소.
인생 세간(世間)의 됴흔 일 하건마난
엇디한 강산(江山)을 가디록 나이 녀겨
적막 산중의 들고 아니 나시난고
송근(松根)을 다시 쓸고 죽상(竹床)의 자리 보아
져근덧 올라 안자 엇던고 다시 보니
천변(天邊)의 떳난 구름 서석(瑞石)을 집을 사마
나는 듯 드는 양이 주인과 엇더한고
창계(滄溪) 흰 믈결이 정자 알픠 둘러시니
천손운금(天孫雲錦)을 뉘라셔 버혀 내여
닛는 듯 펴티는 듯 헌사토 헌사할샤
산중의 책력(冊曆) 업서 사시(四時)를 모르더니
눈 아래 헤틴 경(景)이 쳘쳘이 절노 나니
듯거니 보거니 일마나 선간(仙間)이라
[2]
매창(梅窓) 아젹 벼테 향기예 잠을 깨니
선옹(仙翁)의 해욜 일이 곳 업도 아니하다
울 밋 양지 편의 외씨를 삐허두고
매거니 도도거니 빗김의 달화 내니
청문고사(靑門故事)를 이제도 잇다 할다
망혜(芒鞋)를 뵈야 신고 죽장(竹杖)을 흣더디니
도화 픤 시내 길히 방초주(芳草洲)의 니어셰라.
닷봇근 명경(名鏡) 중(中) 절로 그린 석병풍(石屛風)
그림애를 버들 사마 서하(西河)로 함끠 가니
도원(桃園)은 어드매오 무릉(武陵)이 여긔로다
[3]
남풍이 건듯 부러 녹음(綠陰)을 혜텨 내니
절(節) 아는 괴꼿리난 어드러셔 오돗던고
희황(羲皇) 벼개 우희 픗잠을 얼픗 깨니
공중 저즌 난간(欄干) 믈 우희 떠 잇고야
마의(麻衣)를 니믜 차고 갈건(葛巾)을 기우 쓰고
구브락 비기락 보난 거시 고기로다.
하루밤 비 끠운의 홍백련(紅白蓮)이 섯거 픠니
바람끠 업시셔 만산(萬山)이 향긔로다
염계(염溪)를 마조보와 태극(太極)을 뭇잡는 듯
태을진인이 옥자(玉字)를 헤혓는 듯
노자암 건너보며 자미탄 겨테 두고
장송(長松)을 차일(遮日)사마 석경(石逕)의 안자하니
인간(人間) 유월(六月)이 여긔는 삼추(三秋)로다
청강(淸江)의 떳는 올히 백사(白沙)의 올마 안자
백구(白鷗)를 벗을 삼고 잠 깰 줄 모르나니
무심코 한가하미 주인과 엇더하니
[4]
오동(梧桐) 서리달이 사경(四更)의 도다오니
천암만학(千巖萬壑)이 나진들 그러할가
호주(湖洲) 수정궁을 뉘라셔 옴겨 온고
은하를 띄여 건너 광한전의 올랏는 듯
짝 마즌 늘근 솔란 조대(釣臺)예 셰여두고
그 아래 배를 띄워 갈 대로 더뎌 두니
홍료화(紅蓼花) 백빈주(白빈洲) 어느 사이 디나관데
환벽당(環碧堂) 용(龍)의 소히 뱃머리예 다하셰라.
청강(淸江) 녹초변(綠草邊)의 쇼 머기난 아해들이
석양의 어위 계워 단적(短笛)을 빗기 부니
믈 아래 잠긴 용이 잠 깨야 니러날 듯
내끠예 나온 학이 제 기슬 더뎌두고 반공(半空)의 소소 뜰 듯
소선(蘇仙) 적벽(赤壁)은 추칠월(秋七月)이 됴타 호듸
팔월 십오야(十五夜)를 모다 엇디 과하는고
섬운(纖雲)이 사권(四捲)하고 믈결이 채 잔 적의
하늘의 도단 달이 솔 우희 걸려거든
잡다가 빠딘 줄이 적선(謫仙)이 헌사할샤
[5]
공산의 싸힌 닙흘 삭풍(朔風)이 거두 부러
떼구름 거느리고 눈조차 모라오니
천공(天公)이 호사로와 옥(玉)으로 고즐 지어
만수천림(萬樹千林)을 꾸며곰 낼셰이고
앏 여흘 가리 어러 독목교(獨木橋) 빗겻는듸
막대 멘 늘근 즁이 어내 뎔로 갓닷 말고
산옹(山翁)의 이 부귀를 남다려 헌사마오
경요굴(瓊瑤窟) 은세계(銀世界)를 차자리 이실셰라
[6]
산중의 벗이 업서 한기(漢紀)를 싸하 두고
만고(萬古) 인물을 거사리 혜혀하니
성현(聖賢)도 만커니와 호걸(豪傑)도 하도할샤
하늘 삼기실 제 곳 무심(無心)할가마는
엇디한 시운(時運)이 일락배락 하얏는고
모를 일도 하거니와 애달옴도 그지업다
기산(箕山)의 늘근 고블 귀는 엇디 싯돗던고
박소래 핀계하고 조장이 가장 놉다
인심이 낫 갓타야 보도록 새롭거늘
세사(世事)는 구롬이라 머흐도 머흘시고
엊그제 비즌 술이 어도록 니건나니
잡거니 밀거니 슬카장 거후로니
마음의 매친 시름 져그나 하리나다
거믄고 시옭 언저 풍입송(風入松) 이야고야
손인동 주인인동 다 니저 바려셔라.
장공(長空)의 떳난 학이 이 골의 진선(眞仙)이라
요대(瑤帶) 월하(月下)의 행혀 아니 만나신가
손이셔 주인다려 닐오대 그대 긘가 하노라.
[현대어 풀이]
어떤 지나가는 나그네가 성산에 머물면서,
서하당 식영정의 주인아 내 말을 들어 보소.
인간 세상에 좋은 일이 많건마는,
어찌 한 강산을 갈수록 낫게 여겨,
적막한 산중에 들어가고 아니 나오시는가.
솔뿌리를 다시 쓸고 대나무 침대에 자리를 보아,
잠시 올라앉아 어떤가 하고 다시 보니,
하늘가에 떠 있는 구름이 서석을 집을 삼아.
나가는 듯하다가 들어가는 모습이 주인과 어떠한가.
시내의 흰 물결이 정자 앞에 둘러 있으니,
하늘의 은하수를 누가 베어 내어,
잇는 듯 펼쳐 놓은 듯 야단스럽기도 야단스럽구나.
산 속에 달력이 없어서 사계절을 모르더니.
눈 아래 헤친 경치가 철을 따라 절로 생겨나니,
듣고 보는 것이 모두 신선이 사는 세상이로다.
매창 아침볕의 향기에 잠을 깨니,
산늙은이의 할 일이 아주 없지도 아니하다.
울타리 밑 양지 편에 오이씨를 뿌려 두고,
김을 매고, 북을 돋우면서 비 온 김에 가꾸어 내니,
짚신을 죄어 신고 대나무 지팡이를 흩어 짚으니,
도화 핀 시냇길이 방초주에 이어졌구나.
잘 닦은 거울 속에 저절로 그린 돌병풍,
그림자를 벗 삼아 서하로 함께 가니,
무릉도원이 어디인가, 여기가 바로 그곳이로다.
남풍이 문득 불어 녹음을 헤쳐 내니,
철을 아는 꾀꼬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희황 베개 위에 선잠을 얼핏 깨니,
공중의 젖은 난간이 물 위에 떠 있구나.
삼베옷을 여며 입고 갈건을 비껴쓰고,
허리를 구부리거나 기대면서 보는 것이 고기로다.
하룻밤 비 온 뒤에 붉은 연꽃과 흰 연꽃이 섞어 피니,
바람기가 없어서 모든 산이 향기로다.
염계를 마주하여 태극성을 묻는 듯,
노자암을 건너보며 자미탄을 곁에 두고,
큰 소나무를 차일삼아 돌길에 앉으니,
인간 세상의 유월이 여기는 가을이로구나.
청강에 떠 있는 오리가 흰 모래에 옮겨 앉아,
흰 갈매기를 벗 삼고 잠깰 줄을 모르나니,
무심하고 한가함이 주인과 비교하여 어떤가.
오동나무 사이로 가을달이 사경에 돋아오니,
천암만학이 낮보다도 더 아름답구나.
호주의 수정궁을 누가 옮겨 왔는가.
은하수를 뛰어 건너 광한전에 올라 있는 듯.
한 쌍의 늙은 소나무를 조대에 세워 놓고,
그 아래에 배를 띄워 가는 대로 내버려 두니,
홍료화 백반주를 어느 사이에 지났길래.
환벽당 용의 못이 뱃머리에 닿았구나.
푸른 풀이 우거진 강변에서 소 먹이는 아이들이,
석양의 흥을 못 이겨 피리를 비껴 부니,
물 아래 잠긴 용이 잠을 깨어 일어날 듯,
연기 기운에 나온 학이 제 집을 버려두고
반공에 솟아 뜰 듯.
소동파의 적벽부에는 가을 칠월이 좋다 하였으되,
팔월 보름밤을 모두 어찌 칭찬하는가.
잔 구름이 흩어지고 물결도 잔잔한 때에,
하늘에 돋은 달이 소나무 위에 걸렸으니,
달을 잡으려다 물에 빠졌다는 이태백의 일이 야단스럽다.
공산에 쌓인 낙엽을 북풍이 걷으며 불어,
떼구름을 거느리고 눈까지 몰아오니,
천공이 호사로워 옥으로 꽃을 피워
온갖 나무들을 잘도 꾸며 내었구나.
앞 여울물 가리워 얼고 외나무다리 걸려 있는데,
막대를 멘 늙은 중이 어느 절로 간단 말인가.
산늙은이의 이 부귀를 남에게 소문내지 마오.
경요굴 은밀한 세계를 찾을 이가 있을까 두렵도다.
산중에 벗이 없어 서책을 쌓아 놓고,
만고의 인물들을 거슬러 세어 보니,
성현도 많거니와 호걸도 많고 많다.
하늘이 인간을 지으실 때 어찌 무심하랴마는,
어찌 된 시운이 흥했다 망했다 하였는가.
모를 일도 많거니와 애달픔도 끝이 없다.
기산의 늙은 고불(古佛) 귀는 어찌 씻었던가.
소리가 난다고 핑계하고 표주박을 버린 허유의 조장이 가장 높다.
인심이 얼굴 같아서 볼수록 새롭거늘,
세상사는 구름이라 험하기도 험하구나.
엊그제 빚은 술이 얼마나 익었느냐?
술잔을 잡거니 권하거니 실컷 기울이니,
마음에 맺힌 시름이 조금이나마 덜어지는구나,
거문고 줄을 얹어 풍입송을 타자꾸나.
손님인지 주인인지 다 잊어버렸도다.
높고 먼 공중에 떠 있는 학이 이골의 진선이라.
이전에 달 아래서 혹시 만나지 아니하였는가?
손님이 주인에게 이르기를 그대가 곧 진선인가 하노라.
이 작품은 송강이 16세 때부터 27세에 등과(登科)할 때까지 10년간 낙향해 있던 성산(星山)이란 지명을 제목으로 하여 쓴 작품이다. 성산은 당시의 창평 지곡리 성산(별뫼)이며, 현재로는 전남 담양군 남면 지곡리에 해당한다.
<성산별곡>은 이 서하당과 식영정을 중심으로 성산의 임천(林泉) 사이를 소요하던 생활과, 특히 김성원을 경모하여 쓴 작품이다. 저작 연대는 송강의 나이 25세 때인 1560년(명종 15)이다. 저작 연대에 대해 종래에는 <사미인곡> <속미인곡>의 연대와 같은 것으로 추정했으나, 김사엽(金思燁)이 발견한 <서하당유고(棲霞堂遺稿)>에 의해 그 저작연대가 바로잡아졌다.
우음(偶吟) - 우연히 읊다
流水峽中出(유수협중출) : 흐르는 물, 골짝에서 나와
迢迢何所之(초초하소지) : 아득히 어느 곳으로 흘러가는가
爾能達江漢(이능달강한) : 네가 능히 강한에 이른다면
吾欲寄幽思(오욕기유사) : 내 그윽한 그리움을 부쳐보련다
촌거잡흥(村居雜興)- 시골에 사는 흥취
年年禾滿野(년년화만야) : 해마다 벼는 들판에 가득
處處酒盈蒭(처처주영추) : 여기저기 술은 항아리에 넘친다
肯泣楊朱路(긍읍양주로) : 양주가 갈림길에 운 것처럼 울어볼까
寧悲宋玉秋(녕비송옥추) : 차라리 송옥의 가을노래를 슬퍼하리라
죽림가대월(竹林家對月)- 대나무 숲 속, 집에서 달을 보며
舊歲靑天月(구세청천월) : 지난해, 푸픈 하늘 저 달
迎之白玉堂(영지백옥당) : 백옥당에서 맞이하였도다
如何東嶺影(여하동령영) : 어찌하여 동쪽 고개의 달 그림자
照此竹林觴(조차죽림상) : 대나무 숲, 내 술잔 속을 비추는가
관동야작1(關東夜酌1)- 관동에서 밤에 술을 마시며
夜酌移西檻(야작이서함) : 서쪽 난간으로 옮겨 술을 마시는데
春心繞北辰(춘심요북신) : 봄 마음은 밤하늘 북극성을 두른다
明朝嶺東路(명조령동로) : 내일 아침 영동 길에는
嵐翠濕衣巾(람취습의건) : 비취빛 산기운 사람의 옷을 적시리라
관동야작2(關東夜酌2)- 관동에서 밤에 술을 마시며
卜夜開深酌(복야개심작) : 밤을 가려 깊은 술자리 차려
論懷對獨燈(론회대독등) : 외론 등불 마주보고 회포를 나눈다
江南一千里(강남일천리) : 강남은 일천리 먼 곳이라
消息杳難承(소식묘난승) : 소식은 아득하여 듣기조차 어렵구나
증김군영1(贈金君瑛1)- 김군 영에게 주며
積雪留歸客(적설유귀객) : 쌓인 눈이 돌아가는 객 잡아두고
松黃煖夜杯(송황난야배) : 관솔불 피워서 밤에 술을 데우고 있다
十年如逝水(십년여서수) : 십년 세월이 흐르는 물과 같아
逝水不重來(서수불중래) : 흘러간 물은 다시 오지 않는 법이도다.
봉정연수(奉呈烟叟)- 연수에게 받들어 드리다
烟波望不極(연파망불극) : 안개 낀 파도, 보아도 끝이 없고
日月思悠悠(일월사유유) : 밤낮 그리운 생각 아득하기만 하여라
愁倚碧梧檻(수의벽오함) : 시름겨워 벽오동 난간에 기대어보니
仙舟何處遊(선주하처유) : 신선 탄 배는 어느 곳에서 노니시는가?
송강정(松江亭)
明月在空庭(명월재공정) : 밝은 달빛 빈 뜰 안에 가득한데
主人何處去(주인하처거) : 주인은 어딜 갔는지
落葉掩柴門(낙엽엄시문) : 나뭇잎은 떨어져 사립문을 덮고
風松夜深語(풍송야심어) : 소나무에 바람 불어 밤 깊도록 속삭이네.
대점봉최희직기1(大岾逢崔希稷棄1)- 대점에서 희직 최기를 만나다
山村酒初熟(산촌주초숙) : 산촌에 술이 갓 익어가니
千里故人來(천리고인래) : 천리 먼 곳에서 고향 친구 찾아왔네
寸心論未盡(촌심논미진) : 속 마음 다 말하지도 못했는데
庭樹夕陽催(정수석양최) : 뜨락 나무들은 지는 해 재촉한다네.
여강취음(驪江醉吟)- 여강에서 취하여 읊다
落日那能住(락일나능주) : 지는 해, 어찌 잡으랴
重陰不可開(중음불가개) : 어두어진 그늘은 밝히지 못한다
驪江西達漢(려강서달한) : 여강은 서편으로 흘러 한강에 닿으리니
醉後一登臺(취후일등대) : 취한 후에 한번 등대에나 올라보리라.
식영정잡영차운9(息影亭雜詠次韻9)- 식영정 노래의 운을 빌려- * 芳草洲(방초주)
古峽深如海(고협심여해) : 오래된 골짜기 바다 같이 깊어
芳洲草似綿(방주초사면) : 꽃 피는 섬이라 풀은 솜결 같구나
初宜雨後屐(초의우후극) : 비 뒤에 처음은 나막신 신기에 좋겠더니
更合醉來眠(갱합취래면) : 다시 생각하니 술취한 후에 잠자기 좋아라.
제심공정벽(題沈公亭壁)- 심공의 정자 벽에 제하여
不見休文丈(불견휴문장) : 휴문장 심약을 뵙지 못하니
空聞集勝亭(공문집승정) : 빼어난 정자에 모인단 말 헛소문이어라
中秋端正月(중추단정월) : 중추절의 단아한 보름달
携酒扣巖扃(휴주구암경) : 술 가져와 바위 문이나 두드리리라.
서하당잡영1(棲霞堂雜詠1)- 서하당의 노래
野鶴招常至(야학초상지) : 들의 학을 불러 오게 해도
山精喚不應(산정환불응) : 산에 정기는 불러도 답이 없구나
停杯一問月(정배일문월) : 술잔 멈추고 한번 달에게 물노니
豈獨古人會(개독고인회) : 어찌 친구만을 모임에 초대하는가.
척금헌잡영4(滌襟軒雜詠4)- 척금형 노래- * 瓦村返照(와촌반조)
不耐送人時(불내송인시) : 떠나보낼 때는 못 견디겠더니
還宜覓酒處(환의멱주처) : 술집 찾으려니 도리어 기쁘구나
孤舟渡口橫(고주도구횡) : 외로운 배가 나루 건너 비끼어 가니
我欲江南去(아욕강남거) : 나도 저 강남 땅으로 떠나거리고 싶어라.
증김군영(贈金君瑛)- 김군영에게 주며
皓首吾兄弟(호수오형제) : 흰 머리들, 우리 형제
秋風此離別(추풍차이별) : 가을 바람 속에 이같은 이별이라
臨岐一杯酒(임기일배주) : 가림길에서 한 잔 술
風雨助吟思(풍우조음사) : 비바람이 시 읊을 생각을 돕는다.
석상구호3(席上口號3)-자리에서 소리내어 읊다
渚鷺雙雙白(저로쌍쌍백) : 물가에 백로는 쌍쌍이 희고
江雲片片靑(강운편편청) : 강가의 구름은 조각조각 푸르구나
世間無別恨(세간무별한) : 세상에 한스러운 이별 없다면
吾亦一杯停(오역일배정) : 나 또한 한잔 술도 멈추어보련다.
객야석별1(客夜惜別1)- 나그네와 밤에 아쉽게 이별하다
不是耽杯酒(불시탐배주) : 술이 탐나서가 아니라
應緣愴別情(응연창별정) : 이별의 정이 슬퍼서라오
明朝送君後(명조송군후) : 내일 아침 그대 보낸 뒤
風雨滿孤城(풍우만고성) : 비바람 외로운 성에 가득 하리라.
객야석별2(客夜惜別2)- 나그네와 밤에 아쉽게 이별하다
孤燈落寒燼(고등락한신) : 외로운 등불 차가운 재에 떨어지고
缺月送淸光(결월송청광) : 이지러진 달은 맑은 빛을 보내는구나
把酒復怊悵(파주부초창) : 술잔 잡고 다시 슬퍼하노니
論情誰短長(론정수단장) : 정을 논한다면 누가 더 길고 짧을까.
야좌견회(夜坐遣懷)- 밤에 혼자 앉아 회포를 풀다
深夜客無睡(심야객무수) : 깊은 밤, 나그네 잠 자지 못하고
殘生愁已生(잔생수이생) : 남은 인생, 이미 시름만 묻어난다
當杯莫停手(당배막정수) : 술자리 당하고선 멈추지 못하나니
萬事欲無情(만사욕무정) : 세상만사에 무정하게 살고 싶어서라.
객관별성중임(客舘別成重任)- 객관에서 성중임과 이별하며
曙色依依至(서색의의지) : 새벽 빛은 조금씩 밝아오고
離觴袞袞傾(이상곤곤경) : 이별의 술 잔을 연방 기울이노라
我心如短燭(아심여단촉) : 내 마음 짧아진 촛불 같아서
垂死更分明(수사경분명) : 다 타갈 무렵에야 더욱 밝아진다.
별임서회(別林婿檜)- 사위 힘회와 작별하다
北嶽啣杯客(북악함배객) : 북악에서 술 마신 손님
東床坦腹人(동상탄복인) : 동쪽 상에 배 깔고 엎드린 사람
林間對落日(림간대락일) : 숲 속에서 지는 해 마주보며
醉後見天眞(취후견천진) : 취한 후에 순수함을 보여주지요.
봉증군회구계2(奉贈君會舊契2)- 옛 친구 군회에게
世事長含淚(세사장함루) : 세상 일에 길이 눈물 머금고
離懷獨對樽(이회독대준) : 이별의 마음 홀로 술잔을 대하네
月中三峽水(월중삼협수) : 달빛 아래에 삼협의 물소리
淸夜不堪聞(청야불감문) : 밝은 밤에 차마 듣지 못하겠네.
주석희증죽림수영윤(酒席戱贈竹林守英胤)- 술자리에서 죽림수에게 주다
偶爾逢春酒(우이봉춘주) : 우연히 봄 술을 만나니
依然發舊狂(의연발구광) : 의연히 옛 발광 일어난다
王孫休記憶(왕손휴기억) : 왕손이여 기억하지 마시라
醉語大無當(취어대무당) : 취중어라 신경 쓸 일 없소이다.
계주문(戒走文)
내 시름 어디 두구 남의 웃음 부러워하랴.
내 술잔 어디 두고 남의 무리에 들겠는다.
옥 같은 처음 마음이야 변할 리가 있으랴.
"내가 술을 즐기는 이유는 네가지가 있다.
첫째는 불평불만 때문에, 두번째가 흥이 있을 때,
세 번쨰는 손님 접대를 위해서"라고 하고
그 중간에 가서, "내가 벼슬을 그만 두었다가도
다섯 번씩이나 임금으로부터 부름을 받았는데
기왕 벼슬이 싫고 시골 살이가 좋으면
문 닫고 들어 앉아 말과 행동만 조심하면 될 것을
지장 없이 왔다 갔다 하고, 않을 말 잘하고,
그 천가지 만가지 잘못이 모두 술에서 나온다.
취했을 때에는 마음 내키는 데로 했다가
깨고 나면 아무것도 모른다.
누가 혹 취중에 했던 일을 말해 주면
처음에는 믿기지 않다가 사실을 알고 나서는
부끄러워 죽고만 싶은 것이다.
그런데 오늘 그렇게 하고사도 내일 그짓을 또하는 것이다.
송강 정철 묘소
1. 정송강사
2. 송강묘소 입구
3. 송강 정철묘소 잘못된 안내판 (출생연대:1536~1539년)
4. 송강과 부인 합장묘소... 그아래는 큰아들묘이다.
5. 송강묘소
6. 송강묘소 문인석
7. 송강묘소 산신석
8. 위에서 본 전경
9. 송강 신도비
<사진: 民草 제공>
가사문학관 / 식영정
담양엔 흔히 대나무 문화만 있는 줄 안다. 그러나 조선 중기 가사문학의 대가들 즉, 송강 정철, 그리고 그의 스승 송순 등이 산수좋은 담양에 정자를 짓고 학술활동을 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담양의 누정과 원림 나들이에 앞서 꼭 들러야 할 곳이 바로 가사문학관과 식영정으로 조선 중기 국문학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가사문학의 진수를 한 눈에 살펴볼 수 있다.
식영정(息影亭)
명종 15년(1560) 서하당 김성원(棲霞堂 金成遠, 1525-1597)이 창건하여 장인(丈人)인 석천 임억령(石川 林憶齡, 1496-1568)에게 증여한 것이다.
제봉 고경명(齊峰 高敬命, 1533-1592), 송강 정철(松江 鄭澈, 1536-1593)등과 함께 '식영정 사선(息影亭 四仙)'으로 부르기도 한다.
서하당 김성원은 송강의 처외재당숙으로 송강보다 11년이나 연상이었으나 송강이 성산에 와 있을 때 같이 환벽당(環壁堂)에서 공부하던 동문이었다.
송강 정철은 이곳 식영정과 환벽당, 송강정(松江亭) 등 성산 일대의 미려한 자연경관을 벗삼으며『성산별곡』을 창작해냈던 것이다. 또한 송강은 이곳을 무대로 하여 면앙정 송순( 仰亭 宋純), 하서 김인후(河西 金仁厚), 고봉 기대승(高峰 奇大承) 등 당대의 명유들을 스승으로 삼았으며 제봉 고경명, 옥봉 백광훈(玉峰 百光勳), 귀봉 송익필(歸峰 宋翼弼) 등과 교우하면서 시문을 익혔다.
서하당(棲霞堂)
식영정 바로 곁에 본인의 호를 서하당이란 또 다른 정자를 지었다고 하며 최근 복원하였다. 『서하당유고(棲霞堂遺稿)』행장(行狀)을 보면「庚申公三十六歲 築棲霞堂于昌平之星山 爲終老計……」란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서하당과 식영정이 1560년에 지어졌음을 알 수 있다.
식영정 옆에는 1973년 송강집(松江集)의 목판을 보존하기 위한 장서각(藏書閣)을 건립하였으며, 1972년에는 부속건물로 부용당, 성산별곡(星山別曲) 시비(詩碑)가 건립되어 있다.
부용당
이곳은 식영정 외에도 풍광이 수려하여 유상지(遊賞地)로도 이름난 곳이 많은데 자미탄(紫薇灘), 노자암, 방초주(芳草州), 조대(釣臺), 부용당(芙蓉堂), 서석대(瑞石臺) 등이 있었으나 광주호가 생기면서 일부는 물에 잠기고 현재는 부용당만이 최근 새로 지어졌다.
환벽당
<사진자료: 차한잔의 풍경 제공>
가사문학관
<사진자료: 파빌리언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