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성당에 다니는 교우가 귀한 "피아노 삼중주" 연주회 티켓 두 장을 주었다.
결혼 초기만 해도 대구권에서 열리던 음악회에 제법 기웃거리던 생각이 떠올랐지만 이는 잠시 접어두고,
연주회장인 아트홀 하모니아 송죽이라는 이름이 먼저 눈에 띄었다.
바로 옛날의 송죽극장이었다.
아! 송죽극장...
중고등학교 때 영화를 무던히도 많이 봤었는데...
중1 때 "황금총을 가진 사나이"라는 007 영화를 처음으로 극장에서 봤던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한동안 제작을 안하던 007영화를 피어스 브로스넌이라는 새로운 "본드"를 맞아 만든 "골든 아이"를 본 곳도 바로 이곳이었다.
결혼 후 영화에는 별 관심이 없던 마누라와 함께 잠시 회상에 젖어서 찾았던 곳.
각설하고, 당시만해도 우리 같은 중고학생들에게는 용돈이라는 개념이 없던 시대라 돈이 풍족하지 않은데다가
요즘처럼 부모들이 동행을 해주거나 표를 끊어주는 것은 상상도 못해서 개봉관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당시 대구에서 개봉관으로 분류되는 곳은 여섯 곳으로 한일, 대구, 아세아, 아카데미, 만경관, 그리고 제일극장이었다.
이들 개봉관에는 각자 나름의 특성이 있었는데, 이를테면 스타들의 그림으로 장식한 만경관은 서부극을 많이 상영했다.
007영화는 모두 대구극장서 개봉하였는데, "나를 사랑한 스파이"부터 로저 무어 시대의 영화는 모두 여기서 봤다.
별 내용없는 오락영화는 아세아서 많이 개봉을 했던 것 같고...
장소가 가장 좋았던 한일이나 아카데미서는 작품성이 있고 매스컴에서 비중 있게 다루는 영화들이 많이 상영되었다.
돈이 없는 우리 같은 학생들은 인기있는 영화들이 이곳에서의 상영을 마치고 재개봉관으로 이동하여 상영하기를 눈이 빠지도록 기다렸다.
대표적인 재개봉관이 바로 송죽과 맞은 편의 자유극장이었다.
그외에 남산시장 근처의 대한이나 대도, 칠성시장 근처의 신성, 신도극장, 그리고 국제극장도 있었다.
우리가 주로 이용하던 극장이 바로 이들 극장이었고 개봉관은 어쩌다 중간이나 기말시험을 친 후 있게되는 문화교실 때 이용을 할 수 있었다.
재개봉관은 빅히트를 치는 경우 2달 가까이나 되어서 내려오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래도 개봉관보다는 상영일수가 짧아서 요즘말로 좌석회전율이 빨랐다.
아마 상영일수가 개봉관의 절반 밖에 안 되었으므로 가능했으리라.
지금 생각하니 자유극장은 주로 중국영화를, 송죽극장은 나름대로 작품성이 있는 영화를 받았던 것 같다.
송죽극장은 화재로 새단장을 하는데 시간이 제법 걸렸는데,
중학교에 진학했을 당시 이미 새단장을 마쳐 우리가 이용하는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자유극장에 대해서 기억이 나는 것은 "백상어"라는 다큐 영화를 상영할 당시 선착순 50명에게 피터 벤칠리의 해양공포소설 "아가리(죠스의 원작 소설)"를 준 적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요즘 DVD 프리 오더(선주문) 시 일정 등위내의 고객에게 사은품을 주는 것과도 같았다.
당시 모든 장르의 영화(나는 다큐물도 굉장히 좋아해서 "사바나", "몬도가네" 등이 나오면 꼭 보러갔었다. 이런 류의 영화는 주로 제일극장에서 많이 개봉했다)를 닥치는대로 섭렵할 때였는지라 1회 상영시간이 되기도 훨씬 전에 줄을 서서 기어코 그 책을 손에 넣었다.
그 책이 그런 어려운 과정을 거쳐서 내 손에 들어와서였는지 대단히 애지중지했는데,
세하가 고등학교 다닐 당시 학급문고에 비치할 책으로 갖다줘버려서 나를 화나게 하기도 했었다.
그 책과 관련된 얘기를 좀 더하자면...
내가 자꾸 그 책의 행방을 추궁하였더니 세하가 실토를 했는데 학생들보다는 주로 선생들이 돌려가며 읽어서 교실에 비치된 적이 별로 없더라는 얘기...
그리고 한 학년이 끝이 나서 그 책이 다시 내손에 들어왔을 때는 표지는 다 날아가버린 "넝마"가 되어 나를 몹시 실망시켰는데,
아이러니컬하게도 스필버그가 만든 영화가 한일극장에서 개봉되었을 때는 내가 세하를 데리고 그 극장에 가서 보았다.
재개봉관을 거친 영화는 3류관으로 흐르는데 산격동에는 코리아극장이, 봉덕동에는 남도극장이 있었다.
이상하게 도심에는 3류관이 없었고, 3류관은 국민학생들이 많이 찾았다.
산격국민학교 다닐 당시 최초로 본 "자막" 영화가 "타잔"이었다.
그리고 왕우의 "외팔이"도.
3류관은 국민학교의 문화영화까지도 모두 책임을 졌다.
장소와 시간만 알려주던 중고교 때의 문화교실과는 달리 한 학년 전체가 선생의 인솔 하에 줄을 서서 극장으로 향하던 그 모습...
"청년 김옥균"을 부민극장인가에서 그렇게 봤고, "울지 않으리" 같은 반공 영화를 신도극장서 봤다.
그리고 시간이 조금 흐른 후에는 "동시상영"도 하고...
이상하게 영화를 그렇게 좋아했음에도 불구하고 동시상영 영화를 본 기억은 별로 없다.
지금은 재개봉관이라는 개념이 없다.
"킹콩" 같은 초대형 프로젝트에 의해 기획된 블록버스터도 단 한번의 상영으로 끝이 난다.
대부분의 영화는 옛날 재개봉관으로 내려갈 즈음에는 이미 DVD로 출시된다.
다만 대규모 블록버스터들이 이곳저곳에 걸리면서 1년 가까이나 되어야 종영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이런 영화들은 DVD 제작 때도 스페셜 피처(특별부록)나 디렉터스 컷(감독판, 확장판)으로 제작하느라 시간이 오래 걸리기도 한다.
"반지의 제왕" 시리즈는 본 영화가 12시간, 부록이 24시간 이상이다.
대학교에 진학하면서부터는 나름대로 용돈이라는 개념도 생기고,
또 아버지에게서 돈을 뜯어내는 규모도 커져서(책값이 비쌌으니) 그때부터는 주로 개봉관을 이용했다.
당시는 재미있는 영화가 있으면 혼자서도 얼마든지 보러다녔다.
요즘이나 당시나 변함이 없는 것은 "명절 특수"였다.
당시는 명절 때면 주로 성룡이나 이소룡 같은 홍콩의 무협스타들의 영화 간판이 극장에 걸렸다.
한일극장의 "정무문"이나 만경관의 "취권" 등과 같은 이름없는 대중 예술가들이 손으로 그린 영화간판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한일극장에 걸렸던 "정무문"의 마지막 스틸 장면을 그린 포스트는
이소룡의 점프장면만 떼어서 신도극장에 다시 걸리기도 했다.
시간이 조금 흐른 후에는 헐리우드의 블록버스터들이 그 자리를 차지했고, 명절 때 "스타워즈"(제일)나
"터미네이터2"(한일) 같은 영화는 표를 사기 위한 줄이 수 Km나 되는 장사진을 이루어 뉴스가 되기도 했다.
결혼을 한 후에는 이른바 소극장이라는 것이 생겨났다.
대구에 최초로 들어선 곳은 제일2관이나 자유(재개봉관이 아닌 올리브 칼라의 옆쪽)극장 같은 곳이었다.
이런 곳에는 주로 빅히트를 기대하기는 힘들지만 입소문이 퍼져 나름대로 짭짤한 수익이 예상되는 영화들이 걸렸다.
제일2관에서는 "시라노", "가면속의 아리아", "마스크"를 본 기억이, 자유극장서는 "여인의 향기"를 본 기억이 있다.
영대 복지관에도 이런 규모의 소극장이 생겨 학생들을 많이 유혹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 소극장은 지금 극장의 형태인 "멀티 플렉스" 영화관의 시초였던 셈이다.
그만한 크기의 스크린을 가진 공간이 한 건물에 적게는 7~8개 많게는 11~12개가 있다는 점이 다를 뿐이었다.
당시만 해도 작은 화면에 단층으로 되어 있는 객석은 생소하기 짝이 없었는데...
어느 순간 모든 극장이 그렇게 바뀌었던 것이다.
심지어 대구라는 지방 도시의 위성도시랄 수 있는 경산의 대표적인 극장인 경산극장까지 멀티관의 형태를 띠고 있을 정도이다.
다만 결혼 후 극장 가는 일이 뜸해져서 그 변화를 실감할 수가 없었던 것 같았다.
멀티관이 대세가 되면서 이젠 영화도 다양한 메뉴를 한 자리에서 골라서 즐길 수 있는 문화로 바뀌어 버렸다.
함께 한 극장에 가면서도 애들은 "슈렉"을, 우리는 다른 것을 본다.
그리고 옛날에는 명절 때는 아침 9시 반에 가도 정작 표는 3회차나 4회차, 어떤 경우에는 5회차 것을 구입하기도 했었다.
돈은 없고 있는 것이라고는 시간밖에 없는 우리는 끊자 마자 들어가 끼니를 걸러가며 몇회씩이나 반복해서 보곤 했다.
예매라는 개념이 없던 시기에 가슴 졸이며 앉아보다가 제 회차 관객이 와서 비켜달라면 비켜주고...
결국 3번 4번을 보며 제자리에 앉아서 끝까지 보고 간 경우도 많았다.
요즘은 양상이 바뀌어 예고편이 끝나면 극장 직원이 출입구를 닫아버리고 종영과 동시에 관객들을 다 내보낸다.
한번 더 보려면 물론 돈을 더 내야 한다.
옛날 같이 손으로 그린 간판도 없고, 실시간으로 남은 객석 수가 줄어들 때마다 가슴을 졸이기도 한다.
"왕의 남자"를 46번 봤다는 그 사람도 9번만 각종 이벤트사에서 무료 시사회 표를 구해서 보고 나머지 37번은 표를 구해서 봤다고 한다.
모두 조조를 봤대도 얼마야? 14만 8천 원인가!!!
하루 6회 상영으로 보고, 옛날 같으면 아침 일찍 먹고 김밥 두 줄 사서 6일만 투자하면 될텐데...
아! 이 얼마나 비인간적이고 몰인정한 형태란 말인가?
송죽극장이 극장으로서의 수명을 다한 이유가 짐작이 갔다.
멀티관이 대세인 지금 세상에 극장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200석 정도니 지금의 1관 정도 규모)
대형 스크린을 가진 송죽극장이 재개봉관이라는 개념이 없어진 상황에 홀로 맞서기는 힘들었으리라...
옆에 연주를 들으러 온 나이 지극한 신사분이 대뜸 나를 보더니
"전에는 스크린이 저쪽으로 나 있었는데..." 한다.
"스크린은 원래 지금 위치가 맞습니다. 화재 이후에 그렇게 바뀐 모양이죠."
말하자면 송죽극장 2세대 이용자였던 나로서는 그 정도 대답밖에 해줄 수가 없었다.
잠시 감회에 젖어본다.
우리나라의 예측불가능한 엄청난 속도의 변화앞에 스러져 자그마한 문화공간으로 새로 탄생한 송죽극장.
결혼 후 1년에 영화 1~2편 관람이 고작이던 시기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래도 4~5편은 보는 것 같다.
"반지의 제왕-왕의 귀환",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스파이더맨 2", , "오페라의 유령", "킹콩", 그리고 "왕의 남자".
이들 영화의 공통점은 모두 시네마 M에서 본 것들이라는 것이다.
이 외에도 몇 편이 더 있지만 다 들지는 않겠다.
이 극장은 전국 유일의 단일 스크린에 대형화면을 자랑하는 영화다.(참고로 HIJ열의 17,18,19번이 최적의 관람 조건이라나)
이런 면에서 어느새 구세대가 되어버린 나에게는 참 행복한 편인 것 같다.
MBC가 수익보다는 대시민 문화공간으로 활용하며 개조를 하지 않는 것도 나에게는 다행이고...
그러나 극장의 형태만 빼면 옛모습은 찾을 수 없으니, 관람석은 한 층으로 되어 있고 또 예매한 시간에만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내가 은연중에 시네마 M을 찾는 이유는 아마 위의 이유―벌써 내가 구세대가 되었기 때문인 것 같다.
한 영화를 정해놓고 한 극장에서만 상영하는 방식...
연속으로 볼 수 있는 장점은 없지만 그래도 가장 우리 입맛에 맞는 스타일이기 때문이 아닐까?
지금도 옛날 방식의 극장이 있다면 "킹콩"과 "왕의 남자"를 1회부터 끝회까지 계속 볼텐데...
첫댓글 재미있는데 좀 기네요...ㅎㅎㅎ
재개봉관으로는 305번지 근처에 동아극장이 있었고, 코리아 극장은 침산동 아니었나, 그리고 한약방이 있던 봉덕동에는 수성극장이 있었는데 아버지와 함께 서산대사를 관람했던 곳이지, 그 유명한 여로는 대도극장에서 봤고... 어쩌다 봉덕동에서 산격동까지 걸어올 때는 극장을 지날 때 만큼은 걸음이 느려지곤 했지.
그런데 요즘도 재개봉관이 있기는 있나? 옛날에 세준이가 칠성극장에서 잠시 일한 적이 있었는데, 가져온 포스터를 보고 같이 습작을 하기도 했고, 그리고 후야에게 있어서 가장 감명 깊은 영화는 아마 신상이 아닌가 하는데, 요즘이야 두 번 세 번 영화를 보는 사람도 많지만 그 당시 후야가 그 영화를 세 번인가 봤으니..
동아극장은 50,51,55번 버스 노선상에 있었지. 코리아극장은 물론 침산동에 있었는데 산격동에는 극장이 없었으니 그곳까지 걸어가서 봤고. 봉덕동은 남도극장이 맞음. 수성극장은 수성교건너에 있었는데 지화네 집에 놀러갔다가 역도산을 본 기억이. 한때 롤러 스케이트장으로 바뀌었었는데 지금은 어찌 되었는지...
요즘은 재개봉관이 당연히 없지. 재개봉을 하긴 하는데 드문 경우. 예를 들어 "반지의 제왕" 시리즈가 개봉될 때 맞춰 전편들이 재개봉 된 경우가 있었고, 우리나라 영화 "형사"도 재개봉 된 적이 있지. 그렇지만 옛날 개념의 재개봉은 아니고.. "신상"은 산격동에 있을 당시 고헌형님이 얼마나 얘기를 재미있게 해주던지..
50,51번 노선상에는 동아극장이 없었고, 55번 노선상에는 있었음
그랬던가? 세 버스의 노선이 비슷해서... 그나저나 그 버스들 탈 때는 동아극장의 포스트와 달성공원, 명덕로타리 근처에 있던 볼링장의 큰 볼링핀(당시만 해도 경이롭게 보였음)이 눈요기를 시켜주었는데...
나는 수성극장에서 서부극 '장교'를 처음 보았는데...아련한 옛날 이야기....
제가 극장에서 첨본 영화는 '증언'이었고 첨 가본 극장은 침산동에 있었던 코리아 극장이었던 것 같습니다. 사월형과 같이 갔었던 것으로 기억되고,초등 저학년 이었으며 걸어서 갔던것 같습니다. 당시에는 제작비가 1억이나 들었다고 대단한 영화라고 한 것으로 기억됩니다만.탱크에 나뭇가지를 많이 꽂아둔 장면 기억남.
"증언" 김창숙이 주연한 반공영화. 요즘으로 보면 그런 내용으로는 극장에 내걸기가 좀 그럴 것 같던데... 제작비가 1억이라 했지만 당시 우리끼리 "인민군 옷값만도 5000만 원 넘게 들었겠다."는 말이 나돌 정도. 이 영화도 국민학교 때 선생 인솔 하에 손에 손 잡고 문화영화로 봤을 걸... 한강 철교 폭파 미니어처 촬영.
난 대구에서 극장에 가서 본 영화는 문화교실 말고는 별로 기억나는 것이 없고, 화동에서 가설극장 갔던 기억이 선명하네.<저 하늘에도 슬픔이...> 내리는 빗속을 어린 주인공이 울면서 달려가는데 '얼굴에 흐르는 물이 빗물일까, 눈물일까?' 어릴 때도 그런 생각을 했던 기억...
사모누나 직장 다닐 때 우리한테 보여준 영화: 콰이강의 다리(대구), 13일의 금요일(제일), 빅라켓(아카데미), 또 뭐가 하나 더 있었던 것 같은데... 야튼 남매가 많으니 여러 문화를 고루 받아들일 수가 있어서 좋은 것 같더군.
혹시, <쿼바디스> 아닌가 몰라.그러고 보니 13일의 금요일은 생각나네.제일극장에서 본 것 같은데 <테스>도 있고...
쿼바디스는 아닐세. 극장에서 두 번을 봤는데 한번은 만경관에선가 문화교실로, 한번은 난진이가 소개시켜 준 효대생과 봤지. 그리고 테스는 본 적이 없는 영화.
내용은 추억하기에도 좋고 잼있는데 정말 너무 길다...사월~ 독자를 배려하여 가로로도 조금 짧게 끊어서 쓰고 긴 건 2,3편으로 나눠서 올리는 것도 좋은건데...참고해 주시지요? 네티즌 경력 그 정도면 온라인에서 보기 편한 것도 고려해 봐야할 듯...?
고려는 해봤는데 전부다 내용이 하나로 연결되는 것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