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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nezuela Harry Belafonte
나라와 민족들의 화해자, 베타니아의 성모
[요약]
베네수엘라 베타니아에 사는 마리아 에스페란차
메드라노 데 비안치니(Maria Esperanza Medrano de Bianchini)는
1976년부터 1990년까지 15년 동안 모두 31번 성모 마리아의 발현을 목격했다.
성모 마리아는 자신을 ‘민족들과 국가들의 조정자’라고 말했다.
전쟁의 임박과 고통을 경고했다.
많은 사람들이 발현장소를 찾아왔으며, 수많은 기적과 징표를 보고했다.
1984년에는 모두 108명이 동시에
성모 마리아가 공공연하게 발현하는 모습을 목격하기도 했다.
1987년 베타니아의 주교는 성모발현의 정당성을 인정했다.
[개요]
[1928.11.22] 베네수엘라 베타니아에서 마리아 에스페란차가 태어났다.
[1933] 다섯 살 때 마리아는
‘성 테레사’(Saint Theresa of the Little Lower)의 환시(幻視)를 목격했으며,
성 테레사는 마리아에게 빨간 장미꽃 한 송이를 주었다.
[1940] 마리아가 기관지 폐렴으로 거의 죽게 되었을 때,
성모 마리아의 환시를 보았으며,
성모 마리아는 치료에 적합한 약물을 추천해 주었다.
‘예수성심’의 발현 이후 마리아가 사춘기가 되었을 때 마비증상이 완쾌되었다.
[1950] 비오 신부(Padre Pio)가 방문했으며 마리아에게
“내가 세상을 떠나면, 성모님이 너의 위로자가 되실 것이다.”라고 약속했다.
[1954.10.3] 마리아는 단기간 동안 프란체스칸 수녀원에 입교했지만,
성 테레사가 발현하여 성직자로서의 직무보다는
아내이자 어머니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환시 중에 목격한 ‘예수성심’은 마리아에게 로마로 가라고 일러주었으며
그곳에서 장래의 남편 제오 비안치니 지아니(Geo Bianchini Giani)를 만났다.
[1956.12.8] ‘원죄 없이 잉태된 성모 축제일’에 마리아는 제오 비안치니와 결혼했다.
[1974] 마리아와 제오 부부는
환시 중에 성모 마리아가 보여주었던 바로 그 농장을 구입했다.
성모 마리아는 그 농장이 “세상의 모든 국가들”을 위한
“지속적인 기도와 순례”의 중심지가 될 것이라고 마리아에게 예언했으며
자신은 “민족들과 국가들의 조정자”라고 소개했다.
[1976.3.25] 동굴에서 첫 번째 성모발현이 있었다.
[1984.3.25] 108명의 사람들이 동굴에서 성모발현을 목격했다.
성모님은 처음에 폭포근처에 있던 어린이들에게 발현했으며
다음에는 미사에 참석하고 있던 어른들에게 발현했다.
[1984] 주교 비오 베요 리카르도(Bishop Pio Bello Ricardo)가
성모발현에 대한 조사에 착수했다.
[1987.11.21] 대주교 비오 베요 리카르도( Archbishop Pio Bello Ricardo)는
마리아가 목격한 성모발현을 인정함으로써,
‘복되신 성모 마리아의 발현’에 대한 주교의 입장을 분명하게 했다.
[1990.1.5] 성모 마리아가 마지막으로 마리아에게 발현하시다.(31번째)
[1991.12.8] ‘성체(聖體)’(the Host)가 피를 흘리기 시작하는
‘성체기적(聖體奇績)’(eucharistic miracle)에 대한 보고가 있었다.
그 후에 베네수엘라의 수도 카라카스(Caracas)에서 표본을 분석한 결과
그것은 ‘인간의 피’와 똑같다는 결론을 내렸다.
[성체기적]
1991년 12월 8일 밤에 자정미사를 봉헌하고 있을 때
성혈(聖血)이 흐르는 성체기적이 베네수엘라 베타니아에서 발생했으며,
이날은 ‘원죄 없이 잉태된 성모 마리아 축일’(Feast of the Immaculate Conception)이었다.
베타니아 주임사제 오티 오사 아리스티자발(Father Otty Ossa Aristiza`bal) 신부는
성찬례(聖餐禮)를 마치고 성체를 네 조각으로 나눈 다음
성체 조각 하나를 입에 넣고 나머지 성체를 제대 위 받침대에 올려놓았다.
오티 신부가 나머지 성체를 내려다보았을 때,
놀랍게도 성체에서 빨간 물체가 흘러나왔으며
그것은 마치 상처에서 뿜어나는 것처럼 보였다.
오티 신부는 성체를 성배(聖杯)에 담아
다음 날 오전 6시까지 감실(龕室)에 두었다.
[Tabernacle (감실, 성막): 성당 안에 성체를 모셔 둔 곳이다.
감실 안에는 성체를 담은 성합(聖盒)이 있으며 그 밑에는 성체포가 깔려 있다.
초기 그리스도교 시대에 성체는 그 안전을 위해 집안에 모셨으나
4, 5세기경부터 성체를 성당에 모셔 두는 관습이 생겨
8세기에는 제단에 모시게 되었다.
1215년 제4차 라테란(Lateran) 공의회에서 이를 확정시키고
1918년 교회법으로 의무화되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교회는
감실을 견고한 금속으로 정교하게 만들어
안전하게 잠글 수 있도록 했으며
적절하게 장식하여 성체의 위엄을 나타나게 하였다.
또한 미사 후에 감실에 성체를 모셔 두는
첫째 주목적은 노자영성체를 시켜 주는 데에 있고
2차적 목적은 미사 외에도 영성체를 시켜 주며
그리고 형상 속에 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흠숭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크게 만들고 또 성체를 많이 모실 필요 없이
제대 중앙이나 제대 옆 등 성당의 적절한 장소에 위치하게 했으며
성당 안에 단 하나의 감실만을 두게 하였다.
감실 앞에는 성체를 모셔 둔 것을 알리고 성체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작은 램프(성체불)를 켜 두도록 하였다.
신자들은 감실 앞에 지나갈 때 깊은 절을 함으로써 존경을 표시한다]
다음날 아침 다시 보았을 때
성체에서는 여전히 피가 흐르고 있었으며,
오티 신부는 성체를 성광(聖光)에 담아 미사에 참석한 신자들에 보여주었다.
수녀원을 방문한 오티 신부와 성혈이 흐르는 마리아의 두 손
모두들 성체가 피를 흘리는 것을 목격했으며
흐르는 성혈은 성광(聖光)의 밑바닥을 채울 정도였다.
몇몇 신자들은 그 모습을 캠코더로 찍기도 했다.
로스 테케스의 주교 리카르도(Bishop Ricardo of Los Teques)는 제안을 받아들여
성체를 베네수엘라의 수도 카라카스에서 성분분석을 하기로 결정했으며,
바로 그 빨간 물체는 ‘실제’ 인간의 피라는 통보를 받았다.
그 후에 기적의 성체를 안전하게 보관하기 위해서
그리고 순례자들이 방문하여 경배하도록 하기 위해서
로스 테케스에 있는 ‘아우구스티안 수녀회’(Augustinian Nuns) 수도원으로 보냈다.
[2004.8.7] 마리아 에스파란차가 미국 뉴저지에서 세상을 떠났다.
[2010.1.31] 뉴저지 메투첸 교구의 주교
폴 그레고리 부트코스키(Bishop Paul Gregory Bootkoski)는
마리아를 복자(福者)와 성인(聖人)으로 시복(諡福)하기 위한 위원회를 조직했다.
마리아는 베네수엘라에서 베타니아에서 태어났지만
미국 뉴저지에서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그녀의 시성문제는 뉴저지에서 관여하게 되었다.
[발현 당시 성모님의 모습]
마리아는 발현 당시 성모님의 모습을 이렇게 설명했다.
“성모님께서 발현했을 때 성모님은 나무 위로 올라갔으며,
저는 아름다운 그 모습을 목격했습니다.
머리는 갈색, 짙은 갈색이었고 눈빛은 엷은 갈색이었으며
눈썹은 아주 멋있고 아름다웠습니다.
작은 입과 오뚝한 코는 너무 아름다웠고
피부는 실크같이 부드러워 보였으며 갈색이었습니다.
너무나 아름다웠습니다.
아주 젊은 모습이었으며 머리칼은 여기까지,
어깨까지 흘러내려 있었습니다.”
[메시지]
성모 마리아는 1976년 3월 25일부터 1990년 1월 5일까지
모두 31번 발현했으며 그 중에서 24번은 1984년 이후에 발현했다.
베타니아의 성모님이 준 메시지는 '화해’와 ‘사랑’으로 요약할 수 있다
“얘들아, 보라, 어머니의 사랑을,
어머니는 너를 아끼나니…
정의와 사랑과 평화와 화해의 법으로
너를 이끄는 출발점이 바로 어머니, 어머니의 사랑이니라!”
“너를 부른다. 화해의 위대한 순간이 다가왔기 때문이다,…
내 모든 아이들에게, 지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내 사랑을 펴노니
예수 그리스도에게 충실하도록 하거라.
그러면 단합의 놀라운 비밀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니라.…
그래야 우리들 모두는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열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서로 용서하거라. 서로 사랑하거나. 서로 봉사하거라.…
너희들 모두는 하느님의 아이들이나니.
모두가 사랑받을 것이니라.”
[기적, 치유, 징표]
베타니아에서 보고한 기적과 치유는 500여건 이상 일어났으며,
1991년 12월 8일 ‘성체(聖體)’(the Host)가 피를 흘리기 시작하는
‘성체기적(聖體奇績)’(eucharistic miracle)에 대한 보고가 있었다.
그 후에 베네수엘라의 수도 카라카스(Caracas)에서 표본을 분석한 결과
그것은 ‘인간의 피’와 똑같다는 확인을 했다.
2,000명 이상을 조사한 결과 순례자들은
성모 마리아를 직접 목격했다고 주장했다.
그 외에도 언덕에서 퍼져 내려오는 안개, 수많은 꽃들,
보이지 않는 합창소리, 장미향기 그리고 태양의 불규칙한 이동 등
천상의 다양한 현상이 있었다.
마리아는 성흔(聖痕)과 달콤한 향기의 분출 등을 포함하여
수많은 기적이 발생하는 장본인이었다.
성체는 그녀의 입에도 나타났으며 치유와 공중부양,
두 지점에 동시적으로 존재하기, 예언능력 등을 보여주었다.
가장 놀라운 현상 중의 하나는
마리아의 가슴에 자연스럽게 피어나는 장미꽃이었으며
이러한 현상은 모두 16번 있었다.
[인정]
교구의 주교 비오 베요 리카르도(Bishop Pio Bello Ricardo)는
1984년 위원회를 조직하여 성모발현에 대한 조사에 착수했다.
베타니아의 성모발현 목격자들을 인터뷰하고 500건 이상의 기적의 치유를 조사했다.
그러한 치유에는 어린 아기의 ‘척추피열’(spina bifida) 치유도 포함되어 있으며,
그 결과는 뉴욕에 있는 ‘웨스트체스터 카운티 메디컬 센터’
(Westchester County Medical Center)에 보관된 자료에서 확인할 수 있다.
[1987.11.21] 리카르도 주교는 이렇게 선언했다.
“베타니아에서 발생한 성모발현을 반복해서 조사연구하고
주님께 진지하게 정신적인 분별력을 간청한 후에
저는 성모발현이 정당한 것이며
초자연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선언합니다.
따라서 저는 공식적으로
성모발현이 발생했던 장소를 성지(聖地)로 인정합니다.”
[1995] 성모발현을 목격한 마리아는
모범과 경감 및 믿음의 증진과 기독교적 가치에 크게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95년 베네수엘라의 수도 카라마스에서
‘세실리오 아코스타’(Cecilio Acosta) 상(賞)을 수상했다.
[목격자의 생애]
마리아 에스파란차는 1928년 11월 22일
베네수엘라 모나가스 주 산 라파엘 마을에서 태어났다.
다섯 살 때 ‘성 테레사’(Saint Theresa of the Little Lower)가 발현하는
신비로운 첫 체험을 했다.
오리노코 강(Orinoco River)의 깊은 물에서 솟아오른 성 테레사는
마리아에게 빨간 장미 한 송이를 던져주었다.
12살 때 심각한 기관지폐렴으로 몹시 아팠지만,
마르가리타 섬(Margarita Island)의 수호성인
성모 마리아의 환시를 본 후 기적적으로 회복되었다.
사춘기에 들어서자 마리아의 건강은 다시 허약해졌으며
심장의 박동은 점점 더 악화되었다.
그 후에는 부분적인 마비증세가 나타나기도 했다.
22명의 의사들은 모두들 마리아가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마리아는 예수성심의 발현을 목격한 후 완쾌되었으며
처음으로 수백 개의 메시지를 주님으로부터 받았다.
참된 신앙인이 되겠다는 깊은 뜻을 가지고 있던 마리아는
메리다(Merida)의 프란체스칸 수녀원에 잠시 동안 체류했다.
그러나 1954년 10월 3일 수녀원 기도실에 있을 때에
성 테레사(Saint Theresa of the Little Flower)의 환시를 목격했으며
성 테레사는 마리아에게 그녀의 직무는 신앙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아내이자 어머니가 되는 것이며
그래야만 자신을 축성(祝聖)받을 수 있을 것이고
세계를 여행할 수 있을 것이라고 일러주었다.
같은 날 ‘예수성심’이 발현하여 마리아에게 로마로 가라고 알려주었으며,
그곳에서 마리아는 ‘라바스코 수녀원’(Sisters of the Ravasco Institute)에서 살았다.
그리고 성 베드로 바실리카에 있는
‘원죄 없이 잉태된 성모 마리아 기도실’(Chapel of the Immaculate Conception)에서
1958년 12월 8일 제오 비안치니 지아니(Geo Bianchini Giani)와 결혼하면서부터
수녀원을 떠났다.
마리아 부부는 아들 하나, 딸 여섯 등 모두 7명의 자녀를 두었으며 현재 모두 결혼했다.
자녀들의 이름을 나이순으로 열거하면
마리아 인마큘라다(Maria Inmaculada), 마리아 에스페란차(Maria Esperanza),
마리아 그란시아(Maria Gracia), 지오바니(Giovanni), 마리아 코로모토(Maria Coromoto),
마리아 아우질리아도라(Maria Auxiliadora) 및 마리아 델 카르멘( Maria del Carmen) 등이다.
파킨슨 질병 등으로 고통을 받던 마리아는
미국 뉴저지 해안가 가까이에 있는 ‘
서던 오션 카운티 병원’(Southern Ocean County Hospital)에서
2004년 8월 7일 토요일 오전 4시 36분 75세로 세상을 떠났다.
전 가족이 임종을 지켜보았으며,
마리아의 병실은 짙은 장미향으로 가득 차 있었다고 한다.
마리아는 성모님으로부터 수없이 많은 메시지를 받았다.
어떤 때는 날마다 메시지 하나씩을 받기도 했습니다.
첫 발현 시부터 성모님은 수많은 역사적 사건, 전쟁,
서로 다른 중대한 발생 등을 예언했으며,
이 모든 일들은 실제로 전 세계에서 발생했다.
이처럼 비극적인 예언에도 불구하고 마리아는
언제나 희망을 가지고
성모님의 메시지를 충실하게 모든 사람들에게 전했다.
마리아는 성모발현을 목격한 여러 사람들 중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목격자라고 볼 수 있다.
하느님으로부터 수많은 선물을 받은 마리아는
인간적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을 목격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상처에서 흘러나오는 ‘성혈(聖血)’로
고통을 받은 마리아는 치유, 공중부양, 두 지점에 동시에 존재하기,
앞으로 일어날 사건의 예언 등 놀라운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가장 특이한 여러 가지 현상 중 한 가지는
마리아의 가슴에서 자연스럽게 피어나는 장미꽃이었다.
이러한 현상은 16번 있었다.
또한 마리아의 입에 구체적으로 발현한 성체(聖體)와
몸에서 풍기는 장미 향기 등은 비오 신부가 체험했던 것과 똑같았다.
마지막으로 마리아에게 발현한 장미꽃의 경우는 성 테레사의 경우와 똑같았다.
‘성체기적’은 1991년 12월 8일 베타니에 동굴을 책임지고 있던
사제 오티 오사 아르스티자발 신부(Fr. Otty Ossa Aristizabal)가
야외 교회에서 미사를 집전하고 있을 때에 발생했다.
성찬례(聖餐禮)를 하고 있던 오티 신부는
성체를 네 조각으로 나누어 높이 들어 올려 축성한 후,
제대 위 받침 ‘패튼’(patten)에 올려놓은 다음 한 조각을 입에 넣어 삼켰다.
그렇게 하고나서 오티 신부가 패튼을 내려다보았을 때
거기에 올려놓았던 조각 하나에서 피의 흔적을 발견했다.
메디컬 테스트 결과 그것은 인간의 피와 똑같은 것으로 판명되었다.
Our Lady Of Betania
베타니아(베네쥬엘라) 성모 마리아의 발현
첫댓글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