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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속적 중생론에 대한 곡해와 연속적 중생론의 욧점정리를 통하여 갈릭님의 주장에 대하여 비판함
갈릭님에게,
감사합니다. 진지하게 이런 주제로 토론할 수 있는 상대가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감사할 일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혹시 갈릭님의 마음을 불쾌하게 하는 댓글들이나 표현들이 있었다면 사과를 드립니다. 그 불쾌한 마음을 여전히 가지고 저에게 어떤 조롱투나 비난투로 말씀하신다고 하더라도 절대로 저는 님에게 님의 하는 방식 그대로 대응하지 않을 것을 이 자리에서 선언합니다. 그것은 제가 사랑하는 두 분이 적극적으로 저에게 권면해 주셨고 그 분들에게 제가 약속을 드렸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분들에게 말씀드렸던 바가 하나 더 있습니다. 진리에 대해서는 한 걸음도 양보할 수 없노라는 것입니다.
님의 방식과 말투에 이제는 전혀 개의하지 않고, 갈릭님이 주장하는 그 논리에 대해서 논리적으로 비평하고 또한 저의 주장하는 바를 선명하게 개진해 가도록 하겠습니다. 이 점을 저의 글을 쓰는 내내 유지할 수 있도록 님도 저를 도와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1. 연속적 중생론에 대한 곡해들
먼저, 그 동안 주고 받는 두 편의 글과 댓글들을 통해서, 갈릭님이나 갈릭님과 비슷한 생각을 가지신 분들이 보여주는 오해에 대해서 몇 가지 지적하겠습니다.
첫째, 연속적 중생론을 지지하면 다른 견해를 주장하는 사람을 이단이라고 본다는 것입니다. 전혀 저는 연속적 중생론을 지지하는 글을 쓰고 또한 토론하는 가운데, 이런 주장이나 말뜻을 비춘 적이 한 번도 없다는 것을 단호하게 강조합니다. 저는 연속적 중생론이 성경적 중생론이라고 믿고 또한 개혁신학의 전통에 철저한 입장이라고 보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이단”이다, “이단적”이다, 혹은 “사이비”라고 해 본적조차 없다는 것을 발혀 둡니다. 다른 중생론을 지지하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형제” 혹은 “자매”되신 분들이 있음을 인정합니다. 진정으로 거듭나기만 한다면, 연중론을 비판하는 사람들이라도 하더라도 그리스도의 생명을 공유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오순절주의자들, 감리교주의자들, 성결교주의자들, 아니 설령 현재 “이단”이라고 불려지는 집단들 속에 있는 자들이라고 하더라도, 그리스도의 생명을 공유하고 있거나 혹은 앞으로 공유하게 될 사람들이 있음을 인정합니다. 이 점에 있어서 오해가 없기를 당부드립니다(“이단”에 속한 자라도 예수를 제대로 믿고 거듭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또 다른 주제이기 때문에 기회가 되면 토론해보도록 합시다만 지금은 아닌 줄로 생각됩니다).
둘째, 연속적 중생론을 주장하면, 회심의 순간을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고 주장한다고 곡해합하고 있습니다. 곧 거듭나는 순간의 시간을 정확하게 알 수 있다는 식으로 연속적 중생론이 주장하다고 곡해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주장을 어떤 글에서도 어떤 토론에서도 개진한 바가 없음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연속적 중생론은 중생의 시점을 오히려 ‘연장적’으로 보기 때문에 오히려 그 정확한 시점을 지적하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무의식적으로 시작되는 그 중생의 시작(연속적 중생에서 ‘초기중생’ 혹은 ‘수태’라고 합니다)에서는 더욱 그 시점을 알기 어렵고, 그 완결되는 시점이 의식적이라고 주장하기는 하지만, 그 의식적이라는 것이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가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일괄적으로 모든 사람들이 정확하게 그 시점을 감지한다고 여기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주장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저의 중생이 어느 사람보다도 더욱 의식적으로 체험되어진 바가 있다고 말할 수가 있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저 자신의 중생의 완결시점, 혹 회심의 시각을 정확하게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아는 것이 그렇게 중요하다고 여기지도 않아서 관심을 두지도 않고 있습니다. 이 점에 있어서도 곡해하시는 분들이 있어서 강조를 해 두는 바입니다.
셋째, 피터 마스터스 목사는 개혁신학자 존머리에 대하여 인격적으로 폄하하고 있다는 곡해입니다. 몇 번을 분명히 밝히고 밝혔는대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이 점을 언급하는 분들이 계셔서 이 기회에 다시 한 번 더 강조해 두려고 합니다. 피터 마스터스는 그의 책 <영혼의 의사>에서도 분명히 밝힌 바가 있듯이 존 머리교수를 존경합니다. 그의 로마서주석을 자주 인용하면서 극찬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의 목회생활을 하는 중에 많은 젊은이들이 찾아와서 질문하기를 존머리의 <Redemption: Accomplished and Applied>라는 책을 가지고 와서는 중생은 <단번에> 끝나는 데, 어떻게 회심을 촉구하는 설교나 상담이 가능한가?하고 질문을 해 오길래 그 책이 주장하는 바(존 머리교수의 모든 책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가 잘못이요, 그런 주장이 다음 세대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지적하는 것입니다. 존 머리교수의 다른 책의 주장하는 바가 아니라, 바로 그 책의 주장하는 바에 대해서 지적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그런 질문을 하러 오는 사람들이 많기에 하는 말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저 개인적으로도 피터 마스터스의 ‘연속적 중생론’을 접하기 전에 존머리 교수의 신학에 대해서 이미 알고 있었고, 내 자신이 배워온 중생론이 바로 존 머리교수가 가르치는 류의 중생론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기에 충분히 인식하고 있는 바입니다. 존 머리 교수의 이 책에서 주장하는 바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에 대해서 충분히 저도 공감하고 있고, 그래서, 연속적 중생론을 지지하는 바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존 머리교수의 전집을 모두 가지고 있고 기회되는 대로 참고하고 있다는 점을 밝혀둡니다(이런 점을 학문적 과시, 학자연하는 말이라고 오해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넷째, 연속적 중생론은 두 번의 중생을 주장하고 있다는 곡해입니다. 연속적 중생론이 중생의 시작(“수태” 혹은 “초기중생” 때로는 “중생1”이란 말로)과 그 완결(“새출생”, “중생2”이란 말로)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곡해가 있다는 생각을 해보기도 합니다만, 이런 곡해는 진실로 연속적 중생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소치임을 강조합니다. 연속적 중생론은 두 번의 중생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단 한 번의, 단회적인 중생을 주장한다는 것을 분명히 강조합니다. 단회적이되, 기간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피터 마스터스 목사는 밤하늘의 유성으로 비유합니다. 별똥별이 꼬리를 지으면서 밤하늘에 사라질 때 그 유성(별똥별)의 시작점과 사라지는 꼬리의 마지막 부분이 있습니다. 그 두 부분을 강조한다고 해서, 별똥별이 두 개라고 주장하는 식으로 곡해한다면 그것은 곡해를 넘어서서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에 대해서 이상하게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그레이스님은 이 점을 럭비공에 비유하였습니다. 타원형같이 생긴 럭비공의 앞부분과 뒷부분으로 이어지는 기간을 연상하면 럭비공의 왼쪽편에서 중생의 시작을 비유한다면, 얼마큼의 기간을 가져서 럭비공의 오른쪽편 끝부분에서 중생의 완결되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중생을 이렇게 타원형식으로 비유해 보는 탁월한 비유라고 생각되어집니다. 갈릭님이 받아들이든지 아니든지, 이러한 비유가 성경에서 나오는 것이 바로 ‘수태-출산비유’라고 연중론에서는 생각합니다. 수태에서 시작해서 수태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수태에서 시작하되, 출산에서 완결되는 것이 영적인 거듭남, 곧 중생의 순간성만 아니라 그 과정성을 적절하게 비유하는 것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연속적 중생론이 두 번의 중생을 주장한다는 곡해를 가지시면 더 이상 연속적 중생론의 주장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이해하면서 토론하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제대로 된 토론이 되었으면 해서 이 점을 분명히 강조해 둡니다.
다섯째, 연속적 중생론은 순간적 중생을 무시한다는 곡해입니다. 다시 한 번 더 강조해 둡니다. 연속적 중생론은 중생의 단회성과 더불어서 연속성(이 단회성과 연속성은 결코 대립되는 것이 아닙니다!)을 강조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순간적 중생을 결코 무시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유에 속하는 부분이고, 주권에 해당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신이 순간적으로 태어났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음을 인정합니다. 심지어, 카페에 올려져 있는 <중생론 토론을 위한 소스1~5>에서 분명히 나타나나듯이, 죄인들의 중생이 “초기중생”만 아니라, 그 “완결”에 있어서, 기간이 “있어야 한다”(must)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없어야 한다”(should not)고 주장하기까지 합니다. 곧 수태의 순간과 그 완성의 순간이 짧으면 짧을 수록 바람직하고 하나님께서 또한 원하시는 바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연중론에서 강조하고 주장하는 것은, 그렇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며 또한 초기중생과 중생의 완결의 순간이 짧고 또한 순간적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많은 경우에 그렇게 수태하여 출산에 이르게 되는 것이 순간적으로 끝나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연속적 중생론이 주장하는 바는, 바로 이런 현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결코 당위성으로서의 기간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현실로서의 기간을 어떻게 하면 설교자나 상담자가 짧게 만드는데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 가운데서 도구로 사용되느냐 하는 것에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이 연중론의 기본동기를 중의 하나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도 오해가 없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합니다.
마지막으로, 용어에 대해서 곡해되고 있는 바를 지적하겠습니다. 1) 첫째는 “연속적 중생론”이라는 용어자체에 대해서입니다. 저는 이 용어자체가 완벽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 이 용어만이 “연속적 중생론”이라는 용어로 주장하는 바를 모두 다 가르킬 수 있다고 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떤 다른 용어가 적절하게 개발되어서 제안되면 충분히 검토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연장적”, 혹은 “과정적”...이런 용어들을 제안하시는 분들이 계시지만, 감사하게 여기면서도 만족스럽지 못한 바가 있어서 오해가 있지만 완벽한 용어가 나올 때까지 임시로라도 이 “연속적”이란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앞에서 설명드린, “단회적이면서 그 처음과 끝부분이 붙어있으면서도 늘어나서 붙어있지 않다고도 볼 수 있는 형국”을 어떤 용어로 표현할 수 있느냐는 관건입니다. 갈릭님이라도 님께서 그렇게 비판하고 있는 “연속적 중생론”을 보다 더 나은 용어로 규정하시고 비판하신다면, 님의 비판이 더욱 효과적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2) 둘째는 begetting again 과 bearing out 이란 용어에 대한 곡해입니다. 저는 이 단어를 영적 수태의 의미를 담아서 “수태”와 “새출생”으로 번역했습니다. 갈릭님은 “재발생”과 “새출생”이라고 번역했습니다. 뒷부분의 bearing out에 대한 번역은 일치되기 때문에 저도 만족합니다. 하지만, begetting again 이란 단어를 “재발생”이라고 번역하는 것은, 미흡하다고 여겨서 “생명의 탄생”이라는 사건 자체에 대한 오해가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닐까 해서 지적해 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올려놓은 짧은 글에서도 강조했지만, begetting이란 단어는 생명탄생사건에 있어서 “남자”의 역할을 강조하는 단어입니다. 성경의 족보를 영어로 읽어보면 분명합니다. 이것과는 달리 bearing이란 단어는 생명탄생사건에 있어서 "여자"의 역할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남자의 역할은 씨를 뿌리는 것이고, 여자는 그 씨를 받아서 잉태하고 자궁에서 키워서 출산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begetting이라는 단어는 “재발생”이라는 단어가 번역이 잘못된 것이 아니지만, 생명탄생의 사건의 과정을 서술하기에는 충분치 못한 번역이고 또한 곡해에 이르게 되는 번역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개혁신학자들의 설명이 어떠한지 잘 아시리라 생각됩니다.
곡해되고 있는 다른 점들도 있지만 기회되는 대로 그 점들을 언급하고 다시 정리하기로 하고 현재의 토론에서는 이 점만 언급해도 충분하리라고 여겨집니다. 다른 곡해점들은 아래에서 개진되는 갈릭님의 견해에 대한 비판에서 언급되겠습니다. 오해하지 마시기를 바라는 것은, 위의 곡해점들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은 갈릭님이 이런 곡해를 하고 있다는 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연중론을 비파는 다른 사람들이 이런 곡해를 하고 있는 것을 댓글들을 통하여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갈릭님이 보여주는 있는 오해는 갈릭님의 글을 직접적으로 비판하는 글에서 제가 언급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기 전에 저는 갈릭님의 주장하는 바를 요약해 보려고 합니다. 제가 갈릭님의 주장하는 바, 곧 연속적 중생론을 비판하는 그 요지를 잘 이해하고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서 생산적인 토론이 되느냐 아니냐 달라지겠기 때문입니다.
2. 갈릭님의 주장에 대한 요약
1) 갈릭님의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철저한 강조를 치하함
저는 이 점에 대해서 진심으로 치하를 드리고 또한 감사를 드리는 바입니다. 왜냐하면 저도 갈릭님만큼이나 철저하게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강조하는 신앙의 노선에서 생활해 왔고, 지금도 여전히 그 노선을 누구보다도 더 강하게 지키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향하여 제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지적하고 또한 교육시켜가려고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앞으로 언제든지 갈릭님에게 배우고 하문하고 또한 치하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그 마음을 평생 놓치지 마시고 하나님 중심,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높이면서 살아가시기를 기원하는 바입니다.
주여, 저의 마음이 이런 말이 두 마음이 아닌 것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2) 갈릭님의 주장하는 바의 욧점정리(?은 이렇게 요약하는 것에 대해서 갈릭님의 의견이 어떤지 확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붙여둔 것입니다!)
(1) 갈릭은 칼빈의 중생개념이 지나치게 넓게 규정됨으로 인하여 성경을 벗어났다고 주장한다?
[이런 요약의 근거]: 갈릭님의 견해가 이러하다는 근거: 갈릭님은 제가 현대개혁신학자들의 “넓은 의미의 중생”을 칼빈의 중생론과 일치시키고 있다고 하면서(물론 저는 그렇지 않다고 반박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칼빈의 중생론을 이렇게 평하고 있습니다: [홀리죠이님이, 칼빈의 중생 개념을 넓은 의미의 중생 개념으로 알고 거기에 맞추어서 연속적 중생론을 끌고가시는데 결코 그렇게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벌콥은 이에 대해서 말하기를, “칼빈은 구원의 순서의 다양한 항목들을 체계적인 방법으로 분류한 최초의 인물이다. 하지만 카이퍼가 지적했듯이 그의 분류는 형식적인 면에서 볼 때 하나님의 활동보다는 인간의 행동을 강조하고 있으므로 다소 주관적이다. 후에 개혁파 신학자들은 이러한 결점을 바로잡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벌콥 조직신학 p.662). 여기서 “다소 주관적이다”라는 말은 아주 점잖은 말로 “틀렸다, 그릇되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칼빈의 중생개념을 그대로 써서는 안될 것입니다. 지금은 칼빈을 비롯해서 종교개혁시대, 17세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및 표준문서에 나타나는 중생에 대한 가르침을 그대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중생에 대한 개념을 광범위하게 넓게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넓게” 사용한다는 것은 여러 가지 개념을 섞어서 또는, 순서를 바꾸어서, 또는, 중생의 여러 요소들을 구분하지 못하고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파란 색으로 표시한 부분 중에서 굵게 표시한 곳을 보면, 칼빈의 중생개념이 “다소 주관적이다”고 하는 카이퍼의 평가는 아주 점쟎은 말이고, 칼릭님 자신의 평가로는 “틀렸다, 그릇되다”는 것입니다. 저는 요약은 아직 “틀렸다,그릇되다”는 표현의 의미가 분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떤 의미로 그릇되고 틀렸다는 것인가가 분명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칼빈의 중생개념이 성경을 벗어난 것이라는 의미로서 그릇되고 틀렸다는 것인가, 아니면 어떤 다른 의미로서인가가 분명하도록 갈릭님이 재진술해야 할 이유는, 성경에 나오는 “중생”이라는 개념이 단순히 칼빈이 중생개념 속에 포함시키고 있는 회심이나 성화의 개념만이 아니라 심지어는 “만물의 회복”이라는 의미까지도 포함시키고 있다는 점(마19:28)을 고려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저의 이 말은, 우리가 개인의 중생을 논하게 될 때에 “만물의 회복”이라는 의미까지 포함해서 사용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칼빈도 그렇게까지 거의 무한대로 의미를 확장시켜서 ‘중생’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저의 지적은, 현대개혁주의신학에서 사용되는 “좁은 의미의 중생”개념이 너무 협소해서 성경에서 사용되는 일반적인 개념보다도 더 좁다는 바빙크의 지적을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첫 번째 글에서 지적한 것처럼(갈릭님은 전혀 주의하지 않고 있습니다만), 바빙크는, 좁은 의미의 중생개념을 설명한뒤에 말하기를 “그러므로 만일 교의학이 이 개념을 영적 생명의 이식에 제한한다면, 교의학은 성경이 일반적으로 중생이나 위로부터의 출생, 하나님에게서의 출생을 말하는 것보다 이 개념에 더 좁은 의미를 부여하는 것”(개혁교의학, 79쪽)이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바빙크가 말하고 있는 것은, 소위 현대개혁신학자들이 규정하고 있는 영적 생명의 이식으로서의 중생, 곧 좁은 의미의 중생은 성경에서 사용되는 중생보다 그 개념이 더 좁다는 것입니다. 바빙크의 말은, 학문적 토론의 논리를 위해서 이런 “좁은 개념의 중생”을 사용할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 “좁은 의미의 중생”의 성경의 “중생”개념을 모두 다 표현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사용되는 “중생”의 의미는 이 좁은 의미의 중생보다는 더 넓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소리로만 “중생”이라고 하지 말고 성경에서 말하는 “중생”의 의미와 일치시키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점에 있어서 갈릭님은 저의 요약에 대해서 평해주셔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퀘스쳔마크를 붙이든지 아니든지 결정해놓고 토론이 계속 이어지게 될 것입니다. 칼빈이 틀렸다는 것이 칼빈의 중생개념이 비성경적이라는 의미이냐고 홀리죠이가 질문하는 것입니다. 물론, 칼빈을 제가 우상화시키고 있지 않다는 것 정도는 상세히 덧붙이지 않아도 되겠지요.
(2) 갈릭은 홀리죠이가 비판하는 '순간적 중생론'은 허수아비다고 주장한다?
[이런 요약의 근거]: 갈릭님은 그의 두 번째 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순간적 중생론이 누구에 의해서, 어떠한 문제가 있는지 보지도 못했고 알지도 못합니다. 다만, ‘영혼의 의사’ 책을 읽고 피터 마스터스가 연속적 중생론이 주장하는 것과 반대에 서 있는 한 부류를 전체로 싸잡아 언급하는 것에 대해서 분명 잘못되었다고 생각을 했고, 비판글에 분명이 이 부분을 명시를 했었습니다. 그러므로 연속적 중생론을 반대한다고 해서 무조건 여러분들이 설정해놓은 순간적 중생론자로 몰고, 연속적 중생론자들이 순간적 중생론을 비판하는 그 비판을 그대로 쏟아 붓는 어리석음을 행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저는 순간적 중생론이 누구에 의해서, 어떻게 주장되는지에 대해서 잘 모릅니다. 다만, 제가 글을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연속적 중생론이 잘못되었다는 것과, 그것이 전혀 성경적이지 않다는 것과, 그것이 또한 전혀 개혁파 중생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파란색을 굵게 표시해 놓은 부분을 보면, 갈릭님은 분명하게 연속적 중생론을 주장하는 홀리죠이가 설정해 놓은 순간적 중생론자로 자신을 몰아붙이지 말라고 부탁합니다. 이런 면에서 자신은 연속적 중생론들이 비판하는 그런 순간적 중생론자들은 아님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아주 좋습니다. 하지만 계속 이어지는 댓글과 홀리죠이가 표를 만들어서 갈릭님이 순간적 중생론자가 아니라면 어떤 면에서 다른 지를 갈릭님의 용어로 천명해달라고 부탁드렸고, 또한 관련주제들을 원하는 대로 첨가할 수 있노라고 제안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거절하였습니다. 홀리죠이가 비판하는 ‘순간적 중생론’은 실제하지 않는 홀리죠이가 머리 속에서 만들어 둔 허수아비이지만, 갈릭님이 비판하는 ‘연속적 중생론“은 결코 그런 류의 허수아비가 ”절대로" 아니라고까지 장담을 하였습니다.
여기서 분명히 하고 싶은 것은, 마스터스목사나 홀리죠이가 비판하고 있는 “순간적 중생론”은 <영혼의 의사>라는 책에서 언급하고 있는 존 머리교수의 책 곧 <Redemption: Accomplished and Applied>라는 책(머리교수의 다른 책이 아니라)에서 언급하고 있는 중생개념임을 지적해두고 싶습니다. 올려놓은 <중생론토론을 위한 소스1~5>에서 보면, 존머리의 이 책만 아니라, 마스터스 목사는 다른 개혁신학자의 이름과 책명까지 거론해 놓고 있습니다. 여기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연속적 중생론자가 비판하고 있는 “순간적 중생론”이 “허수아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갈릭님이 이런 순간적 중생론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해서, “순간적 중생론” 자체가 허수아비라는 식으로 평가하는 것은, 지나친 바가 있다는 점을 언급해놓고 싶은 것입니다.
(3) 갈릭은 홀리죠이가 칼빈의 중생개념과 칼빈후의 개혁신학자들의 넓은 의미의 중생을 일치시키는 혼동을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요약의 근거]: 홀리죠이는 자기 글에서, “칼빈의 중생개념이 요즘 개혁신학자들이 ‘넓은 개념의 중생’으로 사용하고 있는 중생과는 다른 면이 있지만, 그것 때문에 저의 논지를 비판하는 것은, 과장된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지적하였고 그것이 어떻게 과장되었는지를 설명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갈릭님은 이렇게 저를 비판하고 있습니다: “제발 좀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홀리죠이님은, 분명, 처음 글에서, 넓은 의미의 중생개념과 칼빈의 중생개념을 같게 생각했고, 그래서, 칼빈의 폭넓은 중생 개념에다, 오늘날 개혁주의의 좁은 중생개념을 조합하여, ‘중생->믿음->중생’이라는 표현을 만들어 사용했습니다” 다시 한 번 더 부탁하고 싶은 것은, 저의 글을 제대로 읽어가면서 비판해 주셨으면 하는 점입니다. 저의 이 점에 있어서의 요지는, 칼빈의 중생개념과 현대개혁신학자들의 “넓은 의미의 중생”개념 모두가 다 “믿음->중생” 도식을 만족시키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들간의 중생개념이 일치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칼빈도 그렇고 현대개혁신학자들도 넓은 의미의 중생개념을 사용할 때에는 “믿음->중생”이라는 도식, 곧 믿음으로 인하여 넓은 의미의 중생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점입니다.
저의 주장하는 바를 정확하게 알고 비판하시되 비판하시려면, 칼빈에게 있어서 과연 믿음이 중생에 앞서고 있는가 아니면 뒷서고 있는가 하는 점에 유의하셔서 관찰하시고, 또한 현대의 개혁신학자들이 “넓은 의미”의 중생개념을 설명할 때 과연 그 선후가 어떻게 되는가에 주목해서 살펴보신 뒤에 홀리죠이가 과연 잘못되었는가를 비평해 주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의 관찰하는 바로는 좁은 의미의 중생 뒤에 믿음이 오지만, 이 믿음 뒤에 넓은 의미의 중생이 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학자들의 이름이 거명되어야 한다면 님의 견해를 비평할 때 언급하도록 하겠습니다.
(4) 갈릭은 현대의 개혁신학에서 주장하는 중생관은 좁은 의미의 중생이다고 주장한다?
[이런 요약의 근거]: 갈릭님은 고맙게도 개혁신학계내에서 중생의 개념을 규정하는 면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어 왔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방향에서 중생의 개념으로 현대개혁신학계에서 정착되어진 것은 좁은 의미의 중생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점에 있어서 갈릭님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신학자들은, 새사람이 구체적인 성향을 드러내는 것은, 그것이 드러나기 전에 하나님께서 행하신 어떤 일, 즉 생명을 심으시고, 그리고 그 생명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반응할 수 있도록 영적인 귀를 열어주시고, 새생명이 하나의 사람임을 나타내기 위해, 하나님께서 그 지배적인 성향을 변화시킨 일,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역,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에 주의를 기울인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신학자들의 사유의 결과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성경에 많은 부분에 언급되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고, 그것을 조직하여서 ‘재발생(begetting again)’이라는 좁은 의미의 중생 개념을 도출해 낸 것입니다. 그리고 이 개념이 훨씬 더 “중생”이라는 용어와 맞아떨어진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갈릭님은, 좁은 의미의 중생개념을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전의 개혁신학자들이 사용하고 있던 넓은 의미의 중생개념은 ‘중생’이라는 용어와는 맞아떨어지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 같다는 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홀리죠이에게는 의문이 생기는 것입니다. 분명히 갈릭님은 첫 번째 글에서 “넓은 의미의 중생”을 설명하기를, “성령에 의해서 심겨진 새생명이 인간의 의식세계에 처음으로 나타나는 것을 가리켜서 말”한다고 합니다. 이런 정의까지도 홀리죠이로서 아주 흡족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어느 것이 진정한 중생이냐는 것입니다. 좁은 의미의 중생이 진정한 중생이냐, 아니면 넓은 의미의 중생이 진정한 중생이냐는 것입니다. 갈릭님의 말에 의하면 좁은 의미의 중생개념이 ‘중생’이란 용어와 맞아떨어진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넓은 의미의 중생개념은 ‘중생’이란 용어에 맞아떨어지지 않게 된다는 뜻으로 들리게 됩닏. 여기서 갈릭님의 중생에 대한 설명이 홀리죠이에게는 미흡하게 여겨지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의 생산적인 토론을 위해서 갈릭님에게 있어서 “넓은 의미에서의 중생”은 “중생”인가 아닌가? 하는 점을 분명히 발혀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것입니다.
(5) 갈릭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나 도르트신조 등은 중생개념을 현대개혁주의신학자들과는 다르게 쓰기 때문에 틀렸다고 주장한다?
[이런 요약의 근거]: 갈릭님은 개혁주의신조들이 중생을 다루고 있는 것에 대해서 분명히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전에는, 중생이라는 용어가 결코 오늘날과 같이 독립적으로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라든지, 혹은 도르트 신조 등도, 효과적인 부르심 아래 중생을 회심과 구분하지 않고 사용한 것입니다. 심지어, 어떤 경우는, 칭의와도 혼용해 쓰고, 성화와도 혼용해 사용하였습니다. 이렇게 되어진 이유는, ‘신생, 혹은 새출생(new birth)’에 초점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못하는 바가 아닙니다. 하지만, 갈릭님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갑니다. 칼빈의 중생개념을 빗대어서 이런 신조들조차 하나님의 활동보다는 인간의 행동을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보는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현대의 개혁신학자들은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좁은 의미의 중생개념을 정교화시켜왔다고 하는 것입니다.
홀리죠이의 의문은 이것입니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나 도르트신조와 같은 고백문서들이 주장하는 중생의 개념과 현대개혁신학자들이 주장하는 중생의 개념이 불일치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과연 현대의 개혁신학자들이 자신들의 중생개념을 정교화시켜갈 때에 이전의 개혁주의신조들에서 표현하고 있는 중생의 개념에 있어서 하나님 주권적인 면만 초점을 맞추었고, 인간의 행동을 함축하고 있는 개념들에 대해서 전적으로 무시하게 되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물론, 회심이나 성화 같은 것에서 인간의 행동이 드러남을 현대개혁신학자들이 강조하고 있음을 무시하면서 그렇게 했겠느냐고 질문하는 것이 아닙니다. 현대의 개혁신학자들이 신조들 속에 담겨져 있는 중생개념의 복합성을 세분화시켜가고 정교화시켜갈 때에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려는 경향 때문에 좁은 의미의 중생에 초점을 맞추고 ‘중생’이라는 용어를 사용했겠느냐는 것입니다. 넓은 의미의 중생에 초점을 맞추어서 ‘중생’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 개혁신학자들은 없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 점에 있어서 넓은 의미의 중생과 좁은 의미의 중생개념을 모두 함축하면서 현대의 개혁신학자들이 중생개념을 쓰고 있지 않는가 되물어 보고 싶은 것입니다. 이 점은 갈릭님의 글을 구체적으로 비평할 때 다시 언급될 것입니다.
(6) 갈릭은 수태(초기중생)과 출산(새출생) 사이에 인간적인 노력과 애씀이 개입되면 그것은 모두 신인협동적이기 때문에 비성경적이고 비개혁신학적이다고 주장한다?
[이런 요약의 근거]: 아마도 하나님의 주권을 강력하게 옹호하고 싶어하는 갈릭님의 입장에서 보면, 제가 별도로 근거를 제공하지 않아도 이 점은 분명하지 않을까 싶어서 그냥 넘어갑니다. 하지만, 혹시라도 제가 갈릭님의 견해를 오해하고 있는 것이 있는가 싶어서 이렇게 요약해 보는 것입니다. 아니라면 아니라고 해주시면 갈릭님의 견해의 의미를 다시금 재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7) 갈릭은 효과적인 부르심 이후에 하나님의 말씀이 개입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만을 강조하는 것이 되어야지 믿음과 같은 인간의 반응에 대해서 말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은 “짓거리”이다고 주장한다?
[이런 요약의 근거]: 이 요약도 갈릭님의 하나님의 주권을 옹호하고자 하는 동기에서 표현된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짓거리’같은 표현을 사용하신 것조차도 이해가 됩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바라고 한다면, 저라도 그렇게 표현하겠습니다. 하지만, 6번과는 별도로 이것을 요약정리해 보는 것은, 6번에서 강조하고 있는 “인간적인 노력과 애씀”이라는 요소와 7번에서 강조하고 있는 “믿음과 같은 인간의 반응”에는 차이가 있다고 여기고 있을 지 모르겠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갈릭님의 입장을 분명하게 이해하기 위한 조치임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8) 갈릭은 좁은 의미의 중생과 넓은 의미의 중생 사이의 관계를 묻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주장한다?
[이런 요약의 근거]: 이 8번의 요약은 어쩌면 갈릭님이 구체적으로 표명해 놓은 바가 없기 때문에 참으로 궁금하게 여기는 바입니다. 물론, 갈릭님은 “좁은 의미의 중생”개념과 “넓은 의미의 중생”개념을 잘 정리해 주셨습니다. 저도 그 정의에 대해서 흡족하게 여기는 바입니다. 제가 궁금해 하는 것은, 바로 이 두 개념의 관계에 대해서입니다. 지금까지의 글에서 한 번도 이 두 개념간의 “관계”에 대해서 언급해 놓지 않은 것 같습니다. 실은, 연속적 중생론의 핵심은 이 두 개념간의 관계에 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점에 대해서 전혀 언급해 놓은 바가 없어서 요청을 드리는 바입니다.
여덟가지로 갈릭님의 견해를 요약해 보았습니다. 이것들 외에도 여러 개 더 추가할 수도 있겠지만, 갈릭님의 견해를 비판하는 항목에서 좀 더 추가해볼까도 싶습니다. 미흡하다고 여기신다면, 갈릭님께서 친히 자신의 견해를 정리 요약해 주셔도 좋습니다. 님의 견해를 분명하게 이해해서 갈릭님도 불만이 없을 정도로 갈릭님의 견해를 잘 이해해야 그 다음에 갈릭님의 견해를 비판하는 것이 순서일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갈릭님의 홀리죠이가 요약한 정리에 대한 입장을 기다리는 중에 제 나름대로의 갈릭님의 견해의 문제점에 대해서, 곧 님은 절대불변의 진리인 것처럼 확신해서 도저히 깨뜨려지지 않을 것이라고 절대확신하고 있는 님의 견해를 비판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것은 갈릭님이 생각하는 연속적 중생론이 '허수아비'에 그칠 뿐이라는 것 뿐만 아니라, 갈릭님의 논리 자체에 문제점이 많이 있다는 점에 집중해 볼까 합니다.
3. 홀리죠이의 갈릭님의 견해에 대한 비판
1) 유효적 소명의 시기설정에 대해서(벌콥과 바빙크를 비교함)
먼저, 소명, 곧 유효적 소명과 중생(특별히 좁은 의미의 중생)의 관계에 대해서 살피면서 갈릭님의 견해를 비판하도록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갈릭님은 바빙크의 견해에 기초하여 유횩적 소명과 좁은 의미의 중생을 제가 일치시키고 있는 것에 대해서, 벌콥의 논리로 인용하여 비판하고 있기 때문에, 바빙크와 벌콥의 견해를 제대로 비교하면서 저 자신의 견해를 더욱 선명하게 주장할 수 있겠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 먼저 갈릭님의 견해를 옮겨놓아 보겠습니다: “...좁은 의미의 중생은 효과적인 부르심과 구별됩니다. 이 점은 홀리죠이님이 잘못 짚으셨습니다......다시 말하면, 좁은 의미의 중생과 효과적인 부르심은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갈릭님은 지금 반복해서 좁은 의미의 중생과 효과적인 부르심이 같지 않음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이런 갈릭님의 반복되는 역설은, 제가 유효적인 부르심과 좁은 의미의 중생이 일치된다고 한 것이, 그 뜻이나 의미하는 바가 일치된다는 것이 아님을 간과한 것 같습니다. 제가 의미했던 바는 그 ‘시점’이 일치된다는 것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 바빙크는 분명히 저의 손을 들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빙크의 말입니다: “능동적 의미의 중생, 거듭나게 하는 하나님의 활동은 단지 부르심, 즉 효과적 소명에 대한 다른 이름일 뿐이다”(개혁교의학, 80쪽). 바빙크의 말하는 바는, 능동적 의미의 중생으로 불려지는 ‘더 좁은 의미의 중생’은 유효적 부르심과 이름만 다를 뿐 동일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동일하다는 것은, 유효적 부르심이있을 때 그 부르심에 의해서 좁은 의미의 중생이 발생하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정확하게 시점이 일치된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이 점에 대해서 비판하면서 갈릭님이 인용하고 있는 벌콥의 견해는 과연 어떤 것일까요? 과연 이런 주장을 하고 있는 저의 견해가 벌콥의 인용한 글에 의해서 비판될 수 있는 것일까요? 과연 갈릭님은 홀리죠이의 주장을 제대로 비판하고 있는 것일까요?
갈릭님은 다음과 같은 벌콥의 글을 인용하면서 “중생과 부르심의 차이”가 있음을 논증하려고 합니다: “엄격한 의미에서 즉 “재발생”으로서의 중생은(좁은 의미의 중생을 말합니다.) 인간의 잠재의식에서 발생하며, 인간이 이에 대해 취할 수 있는 어떠한 태도와도 독립되어 있다(다시 말하면 인간 편에서의 모든 의지적 활동 등과는 관련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역이라는 것입니다.). 반면 부르심은 의식을 대상으로 하며, 의식생활의 일정한 성향을 내포하고 있다. 이는 중생은 안으로부터 역사한다면, 부르심은 밖에서 유래한다는 사실에 기인하는 것이다. … 더욱이 중생은 창조적이며 초자연적인 성령의 사역으로, 이로써 인간은 다른 상태로의 전이, 즉 영적인 사망의 상태에서 영적인 생명의 상태로 옮겨지게 된다. 반면 효과적인 부르심은 목적론적이며 새로운 생명을 이끌어 내며 하나님의 방향으로 나아가게한다. 이는 새로운 성향이 발현되게 하며 새생명을 활동하게 한다.”
이 글을 보면, 첫째 갈릭님은 좁은 의미의 중생과 유효적 부르심의 일치를 주장하는 저를 비판하려고 하다가 그만 다른 반대방향의 극단적 주장을 하게 되는 오류를 범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벌콥의 번역된 글을 보면, 유효적 부르심이 좁은 의미의 중생이 아니라고 하는 듯 하면서, 오히려 좁은 의미의 중생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기 때문입니다. 번역상 그렇다는 것입니다. 제가 굵게 표시한 부분을 보면 효과적인 부르심이 “새로운 생명을 이끌어내”고, “새로운 성향이 발현되게 하며 새생명을 활동하게 한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넓은 의미의 중생과 일치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갈릭님은 유효적인 부르심이 좁은 의미의 중생과 일치가 되는 것이 아니라(이 점은 홀리죠이가 주장하는 바입니다!), 넓은 의미의 중생과 일치한다고 보는 것인가? 그 뒤에 이어지는 다음과 같은 갈릭님의 또 다른 벌콥의 글의 인용을 하면서 주장하는 것을 보면, 그렇게 보는 것 같이 여겨집니다: “다시 말하면, 언약관계에 있는 자들의 경우(유아들)와는 달리, 믿지 않고 있다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믿는 자들의 경우 하나님께서 새생명을 심으시고 그것이 효과적인 부르심에 의해 새생명이 발현하고 의식세계에 그 모습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회심까지도 동시에 일어난다, 즉 순간적이라는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유아들의 경우와는 구분하고 있지만, 성인들의 경우에는 효과적인(유효적인) 부르심과 새생명이 발현되는 것, 의식세계에 그 모습을 들어내는 것, 그래서 회심과도 일치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유효적인 부르심과 넓은 의미의 중생 사이에는 순간적이라는 주장을 하는 것입니다. 좁은 의미의 중생이 아니라, 넓은 의미의 중생과 일치를 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과연 벌콥의 글이 이런 주장에까지 이르게 되는 갈릭님의 견해를 지지해주는 것일까요? 벌콥의 위의 글을 갈릭님과 같이 한글번역으로 보면 언듯 그런 결론에 이르는 것이 합당하다고 여겨질지 모르지만, 영어원문으로 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벌콥의 인용문 중에 굵은 푸른색깔로 표시된 부분을 제가 영어로 옮겨와 보겠습니다: “Effectual calling, on the other hand, is teleological, draws out the new life and points it in a God-ward direction. It secures the exercises of the new disposition and brings the new life into action." 이 문장에서 갈릭님이 주목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teleological 이라는 단어의 의미하는 바와 points, a God-ward direction, 그리고, secures 와 같은 단어들의 의미와 뉘앙스입니다. 먼저, teleological 하다는 것은, ‘목적론적’이라고 번역해 두면서도 그 뜻에 대해서는 주목하지 못하시고 있는 것 같은데, 이 단어는, 지금 당장 순간적으로 성취되는 것을 의미하기 보다는,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곧 효과적인 부르심이란 어떤 목적을 갖고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어떤 목적입니까? a God-ward direction을 향해서 나아가게 되는 그 무엇입니다. 그 목적을 향해서 지금 당장 실현되는 경우도 있지만 그 방향을 향해서 points 하는 것입니다. 효과적인 부르심을 할 때에는 그 목적하는 방향을 향하여 points 하는 것이지 반드시 당장 이 부르심과 동시에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를 분명하고 확실하게 강조하는 것이 마지막의 secures 라는 단어입니다. 새로운 기질의 실행을 ”확보한다“고 번역되어야 하는데, 한글번역에서는 이런 의미가 도저히 살아나지 않습니다. 지금 당장 새로운 기질이 실행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어느 정도의 기간이 지날지는 분명하지는 않지만, 실행될 것을 확실하게 담보하는 것이 무엇이냐? 바로 효과적인 부르심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효적인 부르심과 이런 기질이 처음으로 실행되는 넓은 의미의 중생과 일치하는 것은 벌콥의 의도와는 너무나도 빗나가는 주장이 되는 것입니다. 벌콥의 의도는, 유효적인 부르심으로 인하여 앞으로 있게 될 새로운 생명의 발현, 새로운 기질의 실행이 될 것이 분명하게 담보되는 일이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벌콥의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의 유효하신 부르심은 넓은 의미의 중생(갈릭님이 주장하는 바와 같은)이라기 보다는, 홀리죠이가 주장하는 좁은 의미의 중생과 더욱 일치하는 개념이 될 것입니다. 개념상 일치하는 것이 아니라 시기적으로 일치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벌콥은 갈릭님을 지지하기 보다는 오히려 홀리죠이의 손을 번쩍 들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단어에 유의하게 되면, 벌콥이 중생을 정의하면서 유효한 부르심과 중생을 설명하고 있는 다음의 문장이 더욱 선명하게 이해되어질 것입니다(제가 앞선 글에서 번역했던 글입니다. 영어와 함께 다시 한 번 인용해 둡니다):
“(1) Logically, the external call in the preaching of the Word(except in the case of children) generally precedes or coincides with the operation of the Holy Sprit, by which the new life is produced in the soul of man.논리적으로, 말씀이 선포되는 외적 부르심(유아의 경우에는 제외)은 일반적으로 성령의 역사하심을 앞서거나 병행합니다. 그 역사하심으로 새생명이 사람의 영혼 속에 생겨납니다. (2) Then by a creative word God generates the new life, changing the inner disposition of the soul, illuminating the mind, rousing the feeling, and renewing the will. 그러고 나서 창조적인 한 말씀에 의해서 하나님께서는 새생명을 산출하시는데, 그것으로 영혼의 내적 기질을 바꾸시고, 마음을 밝히시며, 감정을 촉발하시고, 의지를 새롭게 하십니다. In this act of God the ear is implanted that enables man to hear the call of God to the salvation of his soul. 이러한 하나님의 활동으로, 인간영혼의 구원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해서 들을 수 있게 하는 귀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This is regeneration in the most restricted sense of the word. In it man is entirely passive. 이것이 중생이란 단어의 가장 좁은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입니다. 이때 인간은 전적으로 수동적입니다. (3) Having received the spiritual ear, the call of God in the gospel is now heard by the sinner, and is brought home effectively to the heart. 영적 귀를 받게 됨으로 인하여, 복음을 통한 하나님의 부르심이 이제 죄인에게 들려지게 되고, 그 마음 속에 제대로 효과를 발휘하게 됩니다. The desire to resist has been changed to a desire to obey, and the sinner yields to the persuasive influence of the Word through the operation of the Holy Spirit. 거부하고자 하는 욕구가 순종하고자 마음으로 바뀌게 되고, 죄인은 성령의 역사하심을 통하여 말씀의 설득하시는 영향력에 굴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This is the effecuctual calling through the instrumentality of the word of preaching, effectively applied by the Spirit of God. 이것이 설교의 말씀의 도구됨을 통하여 부르시는 효과적인 부르심입니다. (4) This effectual calling, finally, secures, through the truth as a means, the first holy exercises of the new disposition that is born in the soul. 최종적으로, 이 효과적인 부르심은, 진리의 수단을 통해서, 영혼 속에 심겨져 있던 새로운 기질이 첫 번째로 거룩하게 실행되는 것을 확보합니다. The new life begins to manifest itself; the implanted life issues in the new birth. 새로운 생명이 스스로를 나타내기 시작합니다; 이미 심겨져 있던 생명이 새출생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This is the completion of the work of regeneration in the broder sense of the word, and the point at which it turns into conversion. 이것이 바로 중생이란 단어의 더 넓은 의미로서 중생의 일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회심이 일어나는 것입니다”(Berkorf, p.471). (위의 영어문장의 secures 를 '확보합니다'로 새롭게 분명히 번역해 둡니다)
이 첫 번째 항의 비판을 요약한다면, 유효한 부르심과 좁은 중생을 일치시키는 점에 있어서 바빙크나 벌콥이나 모두 갈릭님의 손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바로 홀리죠이의 손을 들어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2) 계시를 넘어서는 하나님 절대주권의 강조에 대해서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강조에 대해서 갈릭님에 대해서 치하하고 또 치하하고 싶다는 것 앞에서도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다시 한 번 그렇게 해 드리고 싶습니다. 하지만, 언제나 하나님의 주권의 문제가 나오면 정녕 정통 칼빈주의자들이라고 한다면 반드시 피해야 양극단이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곧 알미니안주의라는 스킬라(Scylla)와 더불어 반드시 유념해야할 또 다른 위험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이퍼 칼빈이즘이라는 커립디스(Charybdis)입니다. 자신이 정통 칼빈주의자라면 반드시 인식하고 있어야 할 위험입니다. 갈릭님이 저의 주장, 곧 연속적 중생론을 비판하면서 자꾸만 변질된 칼빈주의요, 알미니안적 요소가 있다고 하여서 이 두 가지 위험을 홀리죠이는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는 점을 밝혀두고자 합니다. 갈릭님은 연속적 중생론을 이렇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다시 한번 더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유효적인 부르심에서 사용되어졌다고 해서, 믿음이 중생 전에 온다는 전제는 결코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 자체의 성격상, 알미니안주의 중생관을 보여주는 시도일 뿐입니다.”
이런 비판을 하시는 갈릭님을 보면서 하나님의 주권을 아주 강조한다는 면에서 앞에서처럼 치하하고 싶은 마음이면서 더불어서 이렇게 강력하게 알미니안주의를 경계하고 있는 면에서 감탄까지 하고 싶은 마음임을 먼저 분명하게 밝힙니다. 왜냐하면 님이 알미니안주의를 경계하는 것만큼이나 홀리죠이 또한 알미니안주의를 강력하게 경계하고, 제가 속한 신앙노선에서 이런 알미니안주의를 강력하게 경계하면서 뿌리뽑기를 호소해 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저만큼 이런 면에서 강력하게 주장하는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학자연한다고 비아냥거리지만 않는다면, 저의 알미니안주의에 대한 연구가 얼마 정도인지도 밝혀두고 싶습니다. 알미니우스의 전집을 소장하고는 그 전집을 통해서 진정 그가 주장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검토하고 있다는 정도만 언급해 두겠습니다.
교회역사는 우리들에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한쪽을 경계하다가 다른 쪽의 함정에 빠지는 예가 종종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저는 갈릭님이 그런 위험에 빠져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염려가 간혹 스쳐지나가곤 합니다. 왜 그런지 님의 글을 통해서 직접 살펴보고 나서 우리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인 성경은 과연 이 점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를 검토해 보고자 합니다.
먼저, 갈릭님은, 홀리죠이가 좁은 의미의 중생과 넓은 의미의 중생 사이에 하나님의 말씀선포와 그것에 대한 반응으로서의 믿음이 들어가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비판합니다: “좁은 의미의 중생과 넓은 의미의 중생 사이에 하나님의 말씀이 강조되어 삽입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이미 믿음(과 회개)를 전제하고 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추론에 불과합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성령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쓰셔서, 말씀과 함께 죄인을 부르실 때, 먼저 성령께서 그 말씀을 듣고 반응하도록 하기 위해서 새생명을 심으시고,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를 열으셔서 듣게 하시고, 말씀에 반응하게 하시고, 새생명이 새생명임을 드러내게 하실 때에는, 그것이 새생명의 작용이기 때문에 그것이 의식 세계에 나타나기 전까지는 인간편에서의 그 어떤 의지적인 활동과 역할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역사요 일인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믿음이 들어가다니요. 새사람이 의식세계에 모습을 드러내게 되면, 즉 새로운 출생이 있게 되면, 그때서야 능동적인 활동, 즉 회개와 믿음이 있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넓은 의미의 중생이란 그 말씀에 대한 반응으로서의 믿음과 회개의 결과로서 오는 것임을 이미 전제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라는 말 역시 잘못된 전제에 불과한 것입니다. 다시 한번 더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유효적인 부르심에서 사용되어졌다고 해서, 믿음이 중생 전에 온다는 전제는 결코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 자체의 성격상, 알미니안주의 중생관을 보여주는 시도일 뿐입니다.“
이런 비판은, 갈릭님과 같이 유효적 부르심을 넓은 의미의 중생과 동일시하고 있는 경우에는 합당하다고 생각됩니다. 갈릭님의 입장에서 보면, 유효적 부르심이 일어나면 그것에 대해서 순간적으로 동시적으로 반응하여 넓은 의미의 중생만 아니라, 심지어 회심까지도 일어나기 때문에, 그 중간에 무엇이 개입될 수도 없고, 개입할 수도 없는 지경입니다. 그러니, 하나로 동시에 일어나는 사건을 둘로 나눠서 그 사이에 들어가서는 안될, 혹은 들어갈 수도 없는 것을 집어넣으려는 것처럼 보이는 연속적 중생론의 시도가 마치 알미니안주의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문제는 과연 이런 비판이 정당한가 하는 것입니다.
갈릭님의 이런 비판에는 미흡한 바가 한 두 가지 보입니다. 첫 번째는, 과연 유효적 부르심이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넓은 의미의 중생과 동시에 일어나는 것이냐 하는 것, 두 번째는, 유효적 부르심의 전후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작용하느냐 하는 점에 대한 미흡한 통찰, 바로 이 두 가지입니다. 바빙크와 벌콥을 포함하고 또한 개혁신조들 모두는 유효한 부르심을 통해서 중생에 이르게 되는데, 먼저, 외적 부르심을 통해서 전달된 하나님의 말씀이 효과적으로 작용하기 시작함으로 인해서 ‘좁은 의미의 중생’이 이뤄지게 되고, 그 ‘좁은 의미의 중생’을 통해서 말씀을 들을 귀와 감각이 생겨나서 그 말씀이 듣는 이의 귀와 감각에 효과있게 들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효과적인 부르심’이 의미하는 바입니다. 그러므로, 이 ‘효과적인 부르심’이 있기 위해서는 먼저 ‘외적 부르심’으로 사용되는 하나님의 말씀의 작용이 있고, 그 ‘외적 부르심’이 ‘효과적인 부르심’으로 전환될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그 말씀의 영이 되시는 성령님이 작용하셔서 들을 귀와 감각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런 효과적인 부르심과 ‘동시’에 ‘넓은 의미의 중생’이 일어나는가 하는 것입니다. 연속적 중생론에서는 이 부분에서 명백하게 강조합니다. 순간적으로도 일어날 수가 있다. 하지만,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순간적이냐 아니면 연속적이냐는 논란이 발생하게 되는 셈입니다. 연속적 중생론을 반대하고 비판하는 분들은, 연속적일 수가 없다고 하는 것 같습니다. 반드시 순간적이고 동시적으로 일어난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 유효적 부르심과 중생(어떤?) 사이에 하나님의 말씀이 개입되거나 혹은 인간의 노력이나 애씀이 개입되는 것을 반대하고 그것을 ‘짓거리’라거나 알미니안적 요소가 개입되는 것이라고 비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위에서 인용된 벌콥의 글에서 분명하게 보여지는 것처럼, 유효적인 부르심(곧 좁은 의미의 중생과 동시에 발생하게 되는) 이후에 그 중생이 완결되는(곧, 넓은 의미의 중생에 이르게 되는) 과정에서 “도구로서 진리를 통하여”(through the truth as a means) “영혼 속에 심겨져 있던 새로운 기질이 첫 번째로 거룩하게 실행되는 것을 확보”하게 됩니다(This effectual calling, finally, secures, through the truth as a means, the first holy exercises of the new disposition that is born in the soul). 주의 할 것은 여기서 "확보"하는 것 자체가 종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확보"는 시작일 뿐이고, 이 "확보"로부터 "시작"되어서 혹은 순간적이거나 혹은 얼마간의 기간을 거쳐서 그 심겨진 거룩한 기질이 "실행되는 것"이 중생의 완결이 되는 것입니다. 넓은 의미의 중생의 일이 완결(completion) 된다는 것입니다. 이 완결된 중생, 곧 넓은 의미의 중생이 회심과 동시에 일어나는 사건이 되는 셈입니다.
이 점이 이해된다면, 최소한 벌콥에게 있어서(바빙크도 마찬가지이고 나아가서 모든 개혁주의신학자들과 신조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유효적인 부르심 이후에 하나님의 말씀이 사용되는 것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이 이런 하나님의 말씀을 도구로 사용하는 것에 대해서 알미니안주의라고 비판하지 않았고, 오히려 권장하였습니다. 최소한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 10장에서 고백하고 있는 “유효적 소명”에 대해서만 언급해도 충분할 것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중생”의 개념이 최근의 학자들에 의해서 사용되는 “좁은 의미의 중생”이 아니고 “넓은 의미의 중생”임을 고려한다면,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생명으로 예정하신 모든 이들, 그리고 이들만을 자기가 정하시고 용납하신 때에 이들이 본성적으로 처해있는 죄와 사망의 상태로부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은혜와 구원으로 말씀과 성령을 통하여 효력있게 부르기를 기뻐하신다.” 이 고백에 나타나는 효력있는 부르심은, 중생의 시작으로서의 “좁은 의미로서의 중생”만이 아니라, 그 중생의 일이 완결되는 ‘넓은 의미의 중생’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을 유의하면서 그 다음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이들의 마음을 밝히시어 하나님의 일을 구원에 이르도록 영적으로 알게 하시고, 돌같은 마음을 제거하시고, 살같은 마음을 주시고, 의지를 새롭게 하시고, 전능하신 능력으로 그들이 선을 향하도록 정하시고, 효력있게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신다. 그렇지만 그들은 은혜로 인하여 기꺼이 자원하게 되어 아주 자유롭게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간다.” 진지하게 한 번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이 효과적으로 나 자신을 부르셨을 때 단 순간에, 한순간에 모든 것이 동시적으로 완결되었던가 하고 말입니다. 그 부르심이 효과적으로 작용하기 “시작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마음 깊은 곳에서는 주저하는 마음과 거부하는 마음, 혹은 불안과 염려와 의혹이 여전하지 않았던가 말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어이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비춰지는 빛에 의해서 점점 밝아지게 되고 기어이는 어느날 거부할 수 없는 은혜로 인하여 결국 주님 앞에 무릎꿇고 항복선언을 하고 말았던 것이 대부분의 크리스챤들의 고백이 아니더란 말인가요?
여기에 수많은 말씀들이 동원되는 것입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에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행2:38),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행16:31)과 같은 류의 구절들을 수없이 인용할 수 있겠지요. 이 말씀들이 선포되는 배경을 보면, 전혀 그 마음 속에 성령의 역사가 없는 사람들을 향하여 선포된 것이 아닙니다. 사도행전2:38절만 해도, 마음에 찔려 어찌할꼬 하는 사람들(행2:37)을 향해서, 그리고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라고 질문하는 빌립보의 간수를 향해서 선포된 말씀들입니다. 이미 유효적 부르심이 일어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에게 도구로서의 진리(the truth as a means)가 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이 말씀을 듣고 반응하여서 구원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이 바로 성경의 증언들인 것입니다.
이런 점들을 고려한다면, 유효적 부르심과 구원, 곧 넓은 의미의 중생 사이에 하나님의 말씀이 사용되는 것을 알미니안주의라고 평가하는 것은, 다른 면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하는 것을 비록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유효적 부르심 이후에는 하나님의 말씀의 사용을 무시하고 있는, 교회역사를 통해서 등장했던 하이퍼 칼빈주의적 주장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 점에 있어서는 스펄존 당시에 칼빈주의자 스펄존목사를 알미니안주의자로 몰아붙이면서 비판하였던 그 당시의 하이퍼칼빈주의자들과 유사한 주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점에 있어서 스펄존의 설교 중의 한 구절만 인용해 두겠습니다:
“네번째 원리는, ‘우리가 그리스도께 간절하게 순종하는 행동은 우리가 그를 온전하게 신뢰하는 것과 반대되지 않고, 도리어 필요한 일’입니다. 저는 이제 그 점을 여러분에게 보여주려고 합니다. 제가 알고 있는 형제들이 있는데, 그들이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자, 여기 보세요! 목사님이 부흥회라고 부르는 것을 붙잡고 있어요. 그리고 간절함과 흥분어린 연설을 통해서 사람들을 일깨우려고 애를 쓰고 있군요. 목사님께서는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의 일을 하실 것을 알지 못하나요? 이러한 노력들은 결국 하나님의 손에서 일을 빼앗아 버리려고 노력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올바른 방식은 그를 신뢰하는 것이고,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형제여, 옳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말하는 당신이 말이 일리가 있다고 봅니다. ‘그를 믿고 아무 것도 하지 말라니’ 말입니다. 저는 그대가 그리스도를 믿고 있는 것을 확신하지 못할 자유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만일 그대가 누구인가를 기억하고 제가 그대의 집에 갔었던 일을 기억한다면, 그대는 정말 비참해질 것이고, 절망에 겨워할 것입니다. 내가 아는 불신앙적인 사람이 바로 그대이기 때문입니다. 십중팔구는 그대는 자신이 구원받았는지 전혀 알지 못할 것입니다”(스펄존의 이적과 비유설교 I, 크리스챤다이제스트, 252쪽).
물론 제가 지금 스펄존이 말하는 바와 같이 “불신앙적인 사람이 바로 그대”라는 식으로 갈릭님을 두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스펄존이 상대하고 있는 불신앙적인 사람이겠지만, 그 사람들 가운데는 바로 스펄존이 평생 싸워왔던 하이퍼-칼빈주의자들이 포함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스펄존의 이 싸움에 대해서는 이안 머레이가 쓴, <The Forgotten Spurgeon>(Banner of Truth, 1966)에서 잘 기술되어 있는데, 이 책 속에 하이퍼- 칼빈주의자들을 보면서, 갈릭님의 주장이 떠오르는 것입니다. 그 주장을 말하는 것입니다.
제가 바라는 바는, 저와 연속적 중생론을 비판하다가 갈릭님이 그만 다른 쪽 극단, 곧 하이퍼-칼빈주의라는 커립디스에 빠지는 잘못을 범치 않으시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말씀과 그에 대한 반응의 설정범위에 대해서
너무나도 감사한 것은, 갈릭님이 외적 부르심에서만 아니라 유효적 부르심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이 도구로 사용되어진다는 것을 인정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큰 즐거움입니다. 연속적 중생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유효적인 부르심이 있고 나서 넓은 의미의 중생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말씀이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갈릭님은 그런 실수를 범하지 않는 것 같아서 참으로 반가운 것입니다. 갈릭님은 분명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외적 부르심, 내적 부르심의 도구가 되어지는 것은 맞습니다. 성령께서 그것을 스셔서 중생의 역사를 이루십니다.” 문제는, 갈릭님이 바로 뒤에 이런 말을 덧붙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홀리~님이 넘겨짚은 것처럼 말씀에 대한 반응으로서 넓은 의미의 중생 앞에 믿음이 오고, 그 믿음에 의해서 넓은 의미의 중생에 이르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갈릭님의 견해는 제가 이해하는 바로는, 유효적인 부르심과 넓은 의미의 중생 사이에 하나님의 말씀이 도구로서 사용되어지기는 하지만, 인간의 반응으로서의 믿음이라는 것은 들어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들어오게 되면 갈릭님에게는 그것이 “알미니안주의 중생관을 보여주는 시도일 뿐”이 되는 셈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 제가 비판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어렵지 않게 말입니다. 이것은 성경구절들 몇구절만 들어도 충분할 것입니다. 곧, 성경에서는 여러 곳에서 “구원”을 얻는 것이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고 분명히 은혜라고 강조하면서도(예, 엡2:8,9)서도 바로 동일한 이 구절에서 동시에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이 구절을 영감을 받아 기록한 바울은, 은혜로 얻는 구원과 믿음으로 얻는 구원을 결코 대립적으로 여기지 않고 있음에 분명합니다. 믿음으로 구원얻었다고 해서 그것이 인간적이며 알미니안주의라고도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다음과 같이 말하는 사도바울이 알미니안주의자이겠습니까?: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행16:31).
어쩌면 이런 저의 설명을 듣고, 그 구절에서 말하는 “구원”은 “중생”을 의미하는 것도 더욱이 “넓은 의미의 중생”은 더더욱 아니다고 할 지 모르겠습니다. 예, 그렇습니다. 분명히 “구원”이지, “중생”, 혹은 “넓은 의미의 중생”이라고 표현되어 있는 것이 아님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과연 “구원”과 “중생”의 관계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이 구절 속에 나오는 “구원”이란 단어 속에 “중생”이란 개념이 포함되어 있지 않는 것일까요? 그렇다면 “중생”이 없는 “구원”이 가능하다고 주장하고 싶은 것인가요?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 구절들의 “구원”이 “중생”을 포함하는 것으로서의 구원이라고 한다면 이 구원 앞에는 반드시 “믿음”이라는 요소가 와야 한다는 것은 불문가지입니다. 믿음 없이 구원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구원이 “중생”을 포함하는 것이라면 이 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은 또한 “중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논리입니다.
그렇다면 이 '구원'속에 포함되는 '중생'은 어떤 의미로서의 중생일까요? 좁은 의미로서의 중생일까요? 넓은 의미로서의 중생일까요? “좁은 의미로서의 중생”이라고 하면 말 그대로 영적으로 죽어있는 상태의 사람이 믿음으로 반응한다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을 주장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효적 부르심 곧 좁은 의미의 중생이 일어나기 전에는 믿음으로 반응한다는 것은 그대로 알미니안주의의 주장이 되는 것입니다.(제가 이런 주장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믿음으로 작용할 수 있는 기능 자체가 아예 없는, 그대로 죄와 허물로 죽어 있는 상태(엡2:1)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넓은 의미의 중생”만 남았습니다. 이미 하나님의 유효한 부르심과 더불어서 좁은 의미의 중생을 겪은 사람은 그 부르심에 의해서 반응할 수 있는 능력을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았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씨앗이 되는 것이지요. 활동하는 믿음, 행동하는 믿음이 아닙니다. 단지 믿음으로 활성화될 수 있는 가능성으로서의 씨앗인 것입니다. 이 씨앗이 활성화되어서 싹이 되어 나오는 것, 그것이 바로 넓은 의미의 중생이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 “중생”이 되는 것일까요? “믿음”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이 믿음은 이미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비록 인간의 지정의가 개입되어진 것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주권은 손상시키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하나님의 주권의 활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은혜로 말미암는 것과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이 결코 대립적으로 기술되는 것이 아니라 병행적으로 기술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입니다. 이것을 부정하면 성경을 부정하는 것이고, 이 성경을 부정하는 것이 바로 하이퍼-칼빈이즘이 주장하는 견해입니다. 알미니안주의를 경계하다가 다른 극단에 빠져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계시 이상을 넘어서는 것이지요. 이때의 믿음의 좁은 의미의 중생에서 심겨진 믿음의 씨앗이 드디어 활성화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으라 그리하면”이라는 수많은 구절들이 성경에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 구절들은 아예 좁은 의미의 중생조차 되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들려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경우에 개혁신학의 전통에서는 외적 부르심이라고 합니다. 이 외적 부르심이 내적 부르심,곧 유효한 부르심으로 전환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달려 있는 것이기 때문에, 전도자는 때를 얻든지 얻지 못하든지 전하여야 할 의무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딤후4:2).
하지만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갈릭님도 인정하신 것처럼, 이 외적 부르심에서만 하나나님의 말씀이 도구로 사용된 것이 아니고, 유효적 부르심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이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저의 관점에서는 유효적 부르심이 있고 나서도 하나님의 말씀이 도구로 된다는 것이지요. 문제는, 이 유효적 부르심에서나 유효적 부르심 이후에 오는 하나님의 말씀의 도구됨에 대해서 갈릭님과 저의 의견에 있어서 차이가 나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다음 항목에서 설명하면서 갈릭님의 의견을 비판하기로 하겠습니다.
여기서는 중생 이전에 믿음이 온다는 것이 너무나도 분명한 사실임을 성경구절들을 통해서 입증하고 그렇지 않다고 하는 갈릭님의 견해를 비판한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이제 다음 항목으로 넘어가지요.
4) 전도(회심촉구)설교의 무력화 혹은 모호화에 대해서
저는 연속적 중생론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모두 전도설교나 회심촉구설교를 아예 무시한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또한 그렇게 말해 본 적도 없습니다. 어쩌면 연속적 중생론을 이론적으로 이해하면서도 실제로는 전도를 하지 않는 사람도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점을 인정합니다. 전도는 증거의 영이 되시는 성령님의 주장하시는 열심으로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순간적 중생론을 주장하든, 연속적 중생론을 주장하든, 아니면 제 3의 중생론을 주장하든, 성령님께서 사용하심으로 인해서 전도가 전도가 될 것입니다. 이 일에 더욱 정진하시는 갈릭님이 되기를 바랍니다(저는 저의 아들과 함께 전도에 대한 꿈을 꾸고 그것을 실행하고 있습니다. 아들이 연속적 중생론에 따라서 회심하여서 그런지 전도에 열심이 얼마나 있는지 모릅니다).
연속적 중생론을 비판하시는 갈릭님에 대해서 이 점에 대해서 언급하고자 하는 것은, 연속적 중생론을 비판하게 되면, 전도설교나 회심촉구설교를 전혀 하지 않고 부정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이 아니라, 제가 다시금 분명하게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단순히 전도설교와 회심촉구설교를 ‘무력화’시키거나 모호화시킨다는 것입니다. 그 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겠습니다.
갈릭님은 분명히 외적 부르심에서만 아니라, 내적인(효과적인) 부르심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이 사용된다는 점을 인정하였습니다. 저도 전적으로 동감한다고 앞에서 밝혔습니다. 문제는, 외적인 부르심을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하여서 전도/설교/상담할 때에와 내적인(효과적인)인 부르심을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하여 전도/설교/상담할 때에, 갈릭님의 입장에 서게 되면, 몇 가지 문제점이 발생하게 됩니다. 첫 번째는, 그 두 가지 경우에 따라서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도/설교/상담해야 하는지에 대한 구분도 되지 않고(어쩌면 갈릭님은 이런 구분의 필요성에 대해서 느끼지도 못하고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두 번째, 지금 전도/설교/상담하고 있는 대상의 영적 상태에 대한 진단에 대해서 무관심하게 되고, 그것 때문에, 세 번째, 유효적 부르심에 의해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말씀을 사용하실 때에 그 말씀이 하나님의 주권 하에 사용될 수 있도록, 호소하고, 설득하고, 강권하는 노력에 대해서 무관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맡겨두는 것이 전도/설교/상담자의 역할이라고만 생각하는 것이 갈릭님과 같은 사람들의 견해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 번 더 말씀드립니다. 갈릭님과 같은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전도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중생하지 못하였다는 말씀도 더더욱 아닙니다. 또한 전도에 힘쓰지 않는다는 것도 아닙니다. 제가 연속적 중생론을 통하여서 제기하는 것은, 과연 얼마나 영혼구령(soul-winning)을 위하여 효과적으로 전도/설교/상담을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갈릭님은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효과적인 부르심에서의 말씀은 새생명을 새사람의 성향으로 나타날 수 있도록 만드는, 역사하는 말씀이지, 인간의 노력이 가미된 믿음을 형성시키는 말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저도 갈릭님의 견해에 전적으로 공감하는 것은, “효과적인 부르심에서의 말씀은 새생명을 새사람의 성향으로 나타날 수 있도록 만드는, 역사하는 말씀”이라는 점입니다. 또한 “인간의 노력이 가미된 믿음을 형성시키는 말씀이 아니라”는 것도 어떤 의미냐에 따라서 공감할 수도 있다고 여깁니다. 그 “인간의 노력”이라는 것이 인간의 자생적인 능력이나 부패한 본성 가운데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면 전적으로 갈릭님의 말에 공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믿음”이라는 것이 그런 인위적인 믿음이 있는 것이 사실이고 인간의 종교적인 열심에 의해서 생성된 것도 없는 것이 아니지만, 과연 계시의 말씀인 성경의 빛을 비춰볼 때에 “믿음”이란 것이 과연 모두 다 그런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던 것처럼, 우리가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은, 은혜로만 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는다는 사실에 동의하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로 죄인들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그 믿음이란 것이 도대체 어디에서 생성되는냐는 것입니다. 물론, 갈릭님이 주장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것임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제가 질문하는 것은, 그 하나님의 주권이 어떤 식으로 방식하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서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인 성경은 분명히 기록하기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2:13)라고 합니다. 그리고 바로 앞부분에서는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물론, 이 구절에 나오는 “구원”은 미래적인 완성된 구원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지금 이 구절을 인용하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이 이루어지는 방식이나 원리를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이 행사할 때 그 주권이 행사되는 죄인들의 소원을 두고 행하는 것이 무시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의 행사와 소원을 두고 행하는 것이 너무나도 조화롭게 역사하시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이지요.
이러한 하나님의 주권이야말로 개혁신학자들이 주장해왔고, 그 앞서서 신앙고백들이 고백해왔던 것입니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9장의 <자유의지>의 4절에서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을 회개시키고 은혜의 상태로 옮기시면, 죄 아래 처한 본성적 속박에서 그를 해방하시고 오직 자기의 은혜로 그에게 능력을 주사 그가 영적으로 선한 일에 의지하고 행할 수 있게 하신다.” 어쩌면 이 구절을 인용하는 것 자체도 갈릭님이 반대하실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몇 마디를 이 구절에 대한 저의 인용에 대해서 몇마디를 덧붙이겠습니다. 여기서 웨신의 작성자들은, “하나님게서 죄인을 회개시키고 은혜의 상태로 옮기시면”이라고 합니다. 이 “은혜의 상태”를 “넓은 의미의 중생”이나 “회심”이라고 만일 갈릭님이 이해하셔서 저의 이 구절 인용에 대해서 반대하신다면, 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오직 자기의 은혜로 그에게 능력을 주사....의지하고 행할 수 있게 하신다”라고 하는 구절까지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이 구절은 원문은, 이렇게 말합니다: “and, by His grace alone, enables him freely to will and to do...” “자유롭게”라는 말이 들어가 있는 것에 주목해 보십시오.
제가 이런 주장을 통해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유효적 부르심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에 의해서 주도적으로 사용될 때, 혹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주권적으로 사용하실 때에, 인간의 노력과 애씀이 비록 공로가 되는 것도 아니고, 그것 자체로서 작동하는 것도 아니지만, 그것들을 주권적으로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그 주권에 의해서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도구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만 도구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에 의해서 형성되는 믿음 또한 도구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을 칼빈은 기독교강요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원인론을 인용하면서 질료적 원인이라고 표현한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질료적 원인이란, 도구와 방편으로 사용되는 말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도구가 될 뿐만 아니라, 그 말씀에 반응하여 일어나는 믿음조차도 도구가 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 믿음이 어떻게 형성되도록 전도/설교/상담자가 힘쓰고 애써야 하는 지는 어쩜 자명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거스리는 것이 아니라, 그 주권 하에서 그리고 그 주권에 의하여서 허용하는 도구를 활용하여서 힘쓰고 애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하나님의 주권하에서 허용하신 정당한 도구들을 힘써서 사용하고 애쓰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주권을 빙자하여 그 마땅한 바대로 행하지 않는 자로서 평가되는 것이 아닐까 두려워하는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그런 자들을 주님께서는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평하셨고(마태복음 25:14-30), 스펄존목사는 이런 사람들을 “불신앙자”라고까지 극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까지 보지는 않습니다만, 바울사도의 로마서나 고린도전후서를 묵상하면 할수록 이런 평가가 너무나도 실감나게 다가옵니다. 바울사도야말로 이런 회심을 위한 전도에 힘쓰고 애썼던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갈4:19).
바로 앞에서 저는 칼빈을 언급하면서 칼빈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원인론을 인용하였다는 점에 대해서 말하였습니다. 이것은 제가 의도적으로 말한 것입니다. 이 칼빈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 신정통주의를 주장하는 칼 바르트류의 역사이해와 칼빈주의적 메소디즘의 역사이해가 판이하게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다음의 마지막 항목에서 이 점을 약간만 더 말씀드리고 저의 결론을 내리도록 하겠습니다.
5) 칼 바르트의 칼빈주의역사이해와 칼빈주의메소디즘의 역사이해에 대해서
제가 앞에서 칼빈의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대한 인용에 대해서 언급했는데, 다음의 기독교강요에 나오는 칼빈의 글을 직접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철학자들은 사물이 형성되는 데는 네 가지 원인이 관계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원인들을 살펴보면, 우리의 구원을 실현하기 위해서 어떤 원인도 행위와 관련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것이다. 성경은 도처에서, 우리가 영생을 얻은 동력인은 하늘 아버지의 자비와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사랑이라고 선언한다. 물론 질료인은 그리스도인데, 그는 순종함으로 우리에게 의를 가져 오셨다. 형상인은 믿음이 아니고 무엇인가? 요한은 이 세 가지 원인을 한 문장에 포함시킨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 목적인에 관해서는, 사도 바울은 그것이 하나님의 공의를 나타내는 증거와 하나님의 인애에 대한 찬양으로 구성된다고 증거하고, 같은 곳에서 다른 세 가지도 명백하게 말한다. 그는 로마서에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3:23~24; 엡1:6,참조)고 말한다. 여기서는 그는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자비로 우리를 포용하신 것을 제일 원인이라고 지적한다. 그 다음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라고 한다(롬3:24). 우리에게 의를 가져다 준 질료인이 여기에 표현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롬3:25)라고 한 말에는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적용되는 형상인이 나타나 있다. 끝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롬3:26)고 부언한 것은, 하나님의 의를 증명하기 위한 것이라는 목적인을 가르킨다. 그리고 이 의는 화목을 근거로 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바울은 화목을 위하여 그리스도를 내어주셨다고 언급한다. 그래서 에베소서1장에서도 그는 이렇게 가르친다. 우리는 순전히 하나님의 자비로 그의 은혜에 참여하게 되고, 이 일은 그리스도의 중재로 실현되며, 믿음으로 받게 되고,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이 완전히 빛나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였다(엡1:3~14). 이와 같이 우리의 구원은 그 모든 부분이 우리의 밖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왜 우리는 여전히 행위를 믿거나 자랑하는가? 하나님의 은혜를 아무리 반대하는 원수라도, 만일 성경 전체를 부인할 생각이 없다면, 동력인이나 목적인에 대해서 우리와 어떤 논쟁을 일으킬 수는 없다. 그들은 질료인과 형상인에 대해서 그릇된 생각을 가졌고, 마치 우리의 주장하는 바가 믿음과 그리스도의 의와 나란히 자리를 차지하는 듯이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은 이런 생각에 대해서도 크게 반대한다.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의이신 동시에 생명이시며, 이 의라는 은혜는 믿음에 의해서만 우리의 소유가 된다고 가르칠 뿐이다"(기독교강요 3권14장17절).
굵게 붉은 색으로 칠한 부분을 보시면 칼빈이 분명히 질료적 도구로서 믿음을, 형상적 도구로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구원, 곧 중생(넓은 의미)에 이르게 된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의 주권을 손상시키는 것이 아님을 칼빈도 인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앞의 항목에서 강조했기 때문에 저는 이런 칼빈의 입장을 가지고 좀더 큰 범위의 역사해석에 대한 논의를 전개해 보려고 합니다. 길지는 않을 것입니다. 저도 시간에 압박을 받으면서 살기 때문에 빨리 이 글을 끝내고 싶기 때문입니다.
갈릭님도 신정통주의에 대해서 들어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을 언급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신정통주의입장에서 칼빈과 칼빈의 후예로 알려진 칼빈주의자들, 특별히 17~18세기의 청교도들과 개신교정통주의자들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정통적 칼빈주의자들과 신정통적 칼빈주의자들이 첨예하게 대립되어 있다는 것도 아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대립에 있어서 단초를 제공한 사람이 바로 칼 바르트인 것도 아실 것입니다. 칼 바르트는 칼빈을 존경한다면서도 그 칼빈을 추종한다고 하는 칼빈의 후예들, 17~18세기의 청교도들과 그 후예들은, 칼빈의 사상을 곡해하였다고 비판합니다. 이런 칼 바르트의 17~18세기 청교도들에 대한 이해는 생각밖에 세계의 학계내에, 그리고 한국교회의 학계와 교회내에 깊이 뿌리 내리고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청교도들과 정통신앙을 옹호한다고 하는 사람들 가운데서조차도 겉으로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실상 주장하고 있는 바를 면밀히 검토해 보면, 칼 바르트의 신학적 관점에서 청교도들이나 그 후예들을 평가하고 있는 경향들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저는 그들 중에서 혹시 갈릭님도 포함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우려를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논의 중에 현대개혁주의신학자들이 강조하는 “좁은 의미의 중생”에만 집중하고, “넓은 의미의 중생”이란 것이 있다는 것은 인식하면서도, 갈릭님의 논리전개와 사고방식에 있어서 별로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17~18세기의 청교도들과 그 후예들에 대한 관점이 상당히 부정적이고 최소한 소극적이라는 인상을 남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갈릭님의 글을 다음에 옮겨놓습니다: “이것은, 신학자들이, 중생을 인간의 행동을 강조하고, 중심으로 논의하던 것에서 이제는 하나님의 전적인 일, 하나님의 주권하에서 일어나는 일로 바꾸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오늘날 개혁주의 중생론에 있어서의 큰 특징 중에 하나이고, 그 다음으로 특징적인 것은, 그러면서 더욱, 중생을 회심과 구분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회심과 중생을 구분하는 것이 오늘날 개혁주의 중생론에 있어서 또한 획기적인 변화인 것입니다. 이전에는 그렇지 않았고, 또한 17세기의 일부의 신학자들도 중생과 회심을 구분하지 못하고 상호교환적으로 사용하였는데, 아마도 연속적 중생론을 주장하는 분들도 이처럼 구분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여기서 갈릭님은, 17세기의 모든 신학자들에 대한 것이 아니고, 일부의 신학자들이라고 하였지만, 그들이 “구분하지 못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연속적 중생론을 주장하는 저같은 사람들도 “구분을 못하는 것 같”다고 하였습니다. 구분하지 못하는 것과 구분하지 않는 것은 차이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글로 티클을 잡고자 하지는 않겠습니다. 17세기 신학자들 가운데에 그렇게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연속적 중생론을 주장하는 저는 그것을 구분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정확하게 개념적으로 구분하고 있고, 논리적 순서 뿐만 아니라 시간적 순서까지도 고려하면서 이 중생론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그런 지엽적인 것에 대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아주 큰 역사이해에 관한 것입니다. 칼 바르트의 칼빈과 칼빈주의자들에 대한 역사적 이해를 암묵적으로 받아들인 많은 사람들이(소위 개혁주의신학을 한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청교도들과 17~18세기의 개신교 정통주의를 비판적인 각도에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런 비판적인 각도가 얼마나 잘못되었는지에 대해서 장황하게 늘어놓고 싶지 않습니다. 단지, 칼빈신학교의 리챠드 뮐러교수가 최근에 한국에 들어와서 강의한 것이나, 그의 책이 한국에서 번역이 진행되고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는데, 이미 서구의 개혁신학계 내에서는 칼 바르트의 역사이해가 얼마나 천박한지에 대해서 리차드 뮐러교수가 강력한 펀치를 먹여버렸다는 것만 언급해 놓겠습니다. 칼빈의 이해와 칼빈주의자들의 중생 이해는 그렇게 크게 다른 것이 아니고, 또한 현대 칼빈주의자들에게 있어서도 이런 칼 바르트신학에 물들어 있는 경향들에 대해서 강력한 비판적 무기를 제공해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칼 바르트와 그 신학에 물들어 있는 사람들의 17~18세기 청교도들과 개신교정통주의에 대한 비판을 어느 정도 이해되기도 합니다. 실상은 저도 모르는 가운데, 그 칼 바르트류의 실존적 사고방식과 위기의 말씀신학을 어릴 때부터 체득해 왔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저는 칼 바르트의 역사이해가 결코 해답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칼 바르트의 17~18세기 신학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다고 하는 것은, 바로 칼빈 자신이 17·18세기 청교도들과 정통 개혁주의자들이 빠져들었다는 스콜라티시즘의 언어들을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볼때에 분명합니다. 곧 앞의 인용문에서 분명히 볼 수 있는 것처럼, 칼빈은 스콜라티시즘으로 비판되어지는 아리스트텔레스의 철학적 개념들을 서슴없이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용어를 사용한다고 해서 칼빈이 스콜라티시즘에 빠져들었다고 비판하는 사람은 개혁주의신학을 한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칼 바르트신학에 빠져있는 사람들조차도 칼빈을 그렇게 비판하지 않습니다. 칼 바르트신학을 추종하거나 영향을 받아서 17~18세기 청교도들과 개신교정통주의를 비판하는 사람들의 비판이 정당치 못하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칼빈주의자들에 대한 역비판으로 청교도들이나 개신교정통주의를 변호하고 싶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욱 분명한 성경적 근거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을 균형있게 강조하는 칼빈주의적 메소디즘의 역사이해와 그 신앙의 실행을 통해서 변호할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이 글에서는 길게 늘어놓지 않겠습니다. 이미 양무리마을카페의 한 게시판이 이런 목적을 가지고 개설되어 있기 때문에, 이 점만 명시해 두어도 충분하리라 생각됩니다.
이성과 열정, 신학과 경건,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 올바로 이해된 칼빈주의, 곧 열정 칼빈주의, 이것이야말로 한국교회와 세계교회에 제시되어야 할 좌표이기 때문입니다. 칼빈주의가 칼빈주의가 아니라, 열정이 있는 칼빈주의가 칼빈주의이고, 메소디즘이 아닌 칼빈주의는 칼빈주의가 아니라는 로이드 존스의 탁월한 식견이 저의 것이기를 기대해 봅니다. 또한 갈릭님의 것이 되기를 소망해 봅니다.
효과적 부르심이 있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서 작용할 때 그 말씀에 대해서 죄인이 믿음과 회개로 반응하도록 전도/설교/상담을 하면서 권고/설득/호소하여야 할 책임이 있음을 강조하는 연속적 중생론이 아니고, 어떤 중생론이 이 칼빈주의 메소디즘의 전통을 이어가는 것이라고 여길 수 있겠습니까?
주님께서 이 글을 통해서 갈릭님의 마음에 조금이라도 이 연속적 중생론에 대한 오해가 해소되는데 사용하시다면, 오직 주님께만 영광이 되겠습니다. 그것이 홀리죠이의 거룩한 기쁨 중의 하나가 될 것입니다.
4. 요약 및 결론
연속적 중생론에 대한 곡해에 대해서는 요약할 것도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갈릭님의 견해에 대해서 제가 요약한 것에 대해서도 다시 요약할 것 없을 것입니다. 제가 아직 명쾌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부분이 있다고 여겨지는 부분에 대해서는 갈릭님이 정확하게 설명해주셔서 저의 이해를 도와주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그 요약 뒷부분에 있는 퀘스쳔마크가 느낌표로 바뀌게 될 것으로 기대합니다.
저는 토론의 핵심은, 유효적 부르심 이후에 믿음과 회개라는 것이 들어가고 나서 넓은 의미의 중생에 이르게 되느냐(홀리죠이의 견해), 아니면 믿음과 회개가 들어가는 것은 알미니안주의의 중생론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 일어나도록 전도/설교/상담자가 시도해서는 안된다는 것(갈릭님의 견해) 중에서 어느 것이 옳으냐 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저는 갈릭님의 견해를 비판하였습니다. 저는 유효적 부르심 이후에 믿음과 회개가 있고(이것은 인간의 본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의 영향력으로 인해서 일어나게 되어서) 결국은 중생(넓은 의미의 중생)에 이르게 되고 바로 이 때가 회심의 때임을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니, 애당초에 제가 주장하였던 도식이 성립되는 것으로 강조한 것입니다. ‘(좁은 의미의 중생)->믿음/회개->(넓은 의미의) 중생’....이 도식이 하나님께서 당신의 주권으로 죄인들을 그 말씀을 도구로 사용하시며 또한 믿음과 회개로 말미암아 구원(넓은 의미의 중생)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그에 대하여 인간의 요청되는 반응(하나님의 주권을 넘어서는 것이 결코 아닌)을 너무나도 간단히 요약정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오순절주의자들의 2차축복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고, 알미니안주의자들의 신인협동이론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주권만을 인정하고 고백하되, 그 주권의 역사하시는 방식이 인간의 자원케 하는 의지와 지성, 나아가서 감성까지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역사, 중생케 하시는 역사를 너무나도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중생의 역사는 단회적이면서도 과정적인 것입니다. 이 두 개의 개념, 곧 단회적이고 과정적이라는 것은 결코 대립되는 것이 아님을 한 번 더 강조해 둡니다.
긴 글 읽어주신다고 수고많으셨습니다.
솔리 데오 그로리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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