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 성흥사 회주 송월 법원 스님
생사 갈림길서 마이산 1000일 기도 후 출가…군산불교 새 지평 열어
공사장서 막일하며 ‘술’
결국 6개월 시한부 진단
짐 나르며 기도비 마련
자신 처지에 때론 눈물
꿈속의 신장이 ‘황달 치료’
정진력 붙으며 기도 회향
폐사 직전의 성흥사 주지
‘달마도’ 보급하며 ‘전법’
재소자 포교만도 20여 년
“그들도 부처 될 귀한 사람”
성흥사, 중창 불사로 일신
장차 ‘노인복지’에도 매진
성흥사 회주 송월 스님은 평소
“‘전법의 길을 떠나라!’는 부처님 말씀을 늘 새긴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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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물녘 눈을 뜨는 열나흘 달빛처럼/ 어둠을 밀어내는/
청청한 저 눈, 눈빛,/ 주장자 비껴들고서 짐짓 딴청이시네 // … //
보리심(菩提心) 한 자락도 부여잡지 못한 아침/
세상 밖 바람결에 귀를 잃어버렸구나!/ 부릅뜬 눈썹 끝에서/ 쏟아지는/ 바람소리’
(김종호 시 ‘달마도를 걸다’ 중에서)
달마도가 기운 넘치는 생동감을 얻으려면 소림사 면벽 9년의 정진력이 농축된 ‘눈’이 살아야 한다.
군산 성흥사 회주 송월법원(松月法圓) 스님의 화폭에서도 그 청정한 눈은 강렬하게 빛난다.
일필휘지로 내려간 가사(법의)의 선(線)도 강한 듯 부드럽게 펼쳐져 있어 일품인데,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조고각하(照顧脚下)’ 등의 글씨가 예사롭지 않다.
송월 스님 스스로
“하나의 재능은 대낮에 외로운 등불이라 범속(凡俗)을 벗어나지 못한다.
(2016, ‘꽃은 피고 지고 또 피고’ 전시회)”고 했지만
1990년대 전후 호은(湖隱) 이학용(서예), 호암(浩庵) 윤점용(서예),
창현(創玄) 박종회(문인화) 선생으로부터 서예와 문인화를 사사하며 내공을 쌓아 온 작가이다.
제3회 대한민국 종합미술대전 입상(1990)에 이어 대한민국 서화 백일장 대상전 특선(1992),
국제 서화 초대 작가상(1995), 세계 서화 대상 전 초대 작가상(2000) 등 굵직한 이력을 써 왔다.
송월 스님 작품 세계에서 독특한 점 하나가 있다.
수행자이자 서예가이고 화가인 송월 스님의 작품을 소장한다는 게 예삿일은 아닌데
달마도 만큼은 꽤 많은 사람이 간직하고 있다. ‘달마도 10만 장 보시’ 원력과 인연이 닿은 작품이다.
송월 스님의 달마도.
20대 중반, 직장 생활하며 한 푼 두 푼 모은 돈에 대출금을 더해 돼지 축산업에 뛰어들었다.
고향 정읍에서 키워가던 청년의 푸른 꿈은 이내 산산이 조각났다.
제2차 석유파동에 돼지고기 과잉 공급까지 맞물려
생돈 한 마리가 3만7000원, 한 근당 300원까지 떨어졌다.
1979년 발생한 ‘돼지 파동’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는데 여진까지 고려하면 1년이 넘는다.
소규모 자본으로 시작한 청년은 6개월도 버틸 힘이 없었다.
울고 또 울다가 헤진 가슴을 부여잡고 집을 나왔다.
한낮의 공사장에서 벽돌을 나르고 받은 돈으로 술을 사서 숙소로 돌아왔다.
자신의 울분과 한탄을 술이 달랠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지만 그래도 술이 있어야 했다.
마시고 마시다 지쳐야 잠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전국을 떠돌아다닌 시간만도 거의 2년이었으니 간과 위가 성할 리 없다.
황달에 시달리며 밥 한술도 넘기기 어려운 지경에 처했고
급기야 김포 공사장에서 쓰러져 사경을 헤맸다.
살 수 있는 시간은 최대 6개월이라는 진단까지 받았다.
약을 지으러 나섰다가 우연히 만난 무속인으로부터 “기도하면 낫는다”는 말을 들었다.
그 무속인은 진안 마이산으로 간다고 했다.
마이산의 숫마이봉과 암마이봉으로 갈라지는 지점의 천왕문 인근에 작은 기도처가 있었다.
기도비를 내고 들어앉았지만 좁은 방에 이런저런 물건까지 쌓여 있어 눕기는커녕 앉기도 어려웠다.
하여 작은 굴을 찾아 짚을 깔고 앉았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홀로 다짐했다.
“여기서 1000일 기도를 올리겠다!”
‘관세음 정근’을 시작했다.(1982) 스승의 지도를 받으며 정진하는 게 아니어서
당장 힘이 붙지는 않았지만 내심 믿고 있었다.
“1000일 후엔 건강한 모습으로 서 있을 것이다.”
더위와 추위, 그건 견딜 수 있었다.
산 아래 기도객들의 짐을 산 위의 기도처로 옮기는 일을 해 기도비를 마련해 갔는데
아픈 몸에 버겁기는 했어도 감내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초저녁 산 아랫마을의 집들이 하나둘씩 불을 밝힐 때마다
밀려오는 고향의 그리움과 현 처지의 서러움을 가누기는 어려웠다.
1년이 지날 무렵 꿈을 꾸었다. 신장님이 나타나서는 긴 꼬챙이로 배를 ‘꾸∼욱’ 눌렀다.
평소 ‘뱃속의 이 덩어리만 풀어지면 살겠는데!’ 하던 바로 그 부위였다.
꿈에서 깨어 보니 희유하게도 속이 편해져 있었다.
정진에 힘이 붙으니 그리움과 서러움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희열이 차올랐다.
1000일 관음기도를 회향한 후 곧바로 전주 대광사를 찾아가 성공 현묵(性空 賢黙) 스님을 친견했다.
처음 본 거사였지만 성공 스님은 한눈에 재목임을 알아보았다.
“공부를 많이 했구나!”
은사로 인연 맺은 성공 현묵 스님이 직접 삭발해 주었다.(1985)
성흥사는 중창 불사로 일신했다.
원래의 군산 성흥사(聖興寺)는 오성산(227m) 도진봉 8부 능선에 자리한다.
조선 헌종 10년(1844) 허경 선사가 창건한 사찰로 1988년 전통사찰로 지정됐다.
은사 성공 스님의 명으로 송월 스님이 이 산사에 온 건 1992년 늦여름.
풀은 우거져 있고 공과금도 제때 못 내 전기도 끊겨 있었다.
그해 동짓날 법회에 참석한 불자는 2명이었다. 방도를 찾던 오랜 궁리 끝에 한 생각이 떠올랐다.
‘달마도를 선물하자. 10만 명 중 1만 명은 거실에 걸지 않겠나!’
불보살님 상호가 아닌 달마이니 비불자라도 종교적 거부감은 크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이미 정식으로 서예를 배워둔 덕에 ‘붓질’은 자신 있었더랬다.
오래전부터 항아리에 보관해온 보이차를 꺼내 손수 우려내던 송월 스님이
그때를 회상하듯 들고 있던 다관을 잠시 내려놓았다.
“봉고차에 넣을 기름값 1만 원이 없어 산을 넘어가 시내버스를 타고 시내로 나갔던 때가 많았습니다.
물건을 사려 가게에 들어섰는데 저를 보자마자 주인이 ‘아저씨, 뭐 드려요?’ 해요.
승복을 입고 있던 저로서는 참 당혹스러웠습니다.”
당시의 군산은 개신교의 세가 유독 강했다.
절의 소식을 알리는 소식지부터
‘법구경’, ‘금강경’, ‘화엄경’에 나오는 대목을 요약한 법문집을 발간해 사람들에게 전했다.
봉고차는 세워도 책자 발간만은 멈추지 않았는데
군산 인쇄소에 갖다준 액수만도 1억 원이 넘을 정도다.
“불교의 세가 약하다고 손 놓고 가만 앉아만 있으면 더 위축됩니다.”
군산에서는 보기 드물게 어린이 여름불교 학교를 열었다.
일일찻집을 열어 불우이웃 돕기에도 나섰다.
군산 공군38전대의 법당 부처님이 비를 맞는다는 소식을 듣고는 선운사 재곤 스님과 달려갔다.
미군의 승인이 있어야 신축이 가능했는데 끈질긴 설득과 당부 끝에 승인을 받아냈다.
중창불사로 세운 호국 군성사의 현판은 송월 스님 글씨다.
군산 불자의 힘으로 어렵게 세운 군산 불교회관이 거의 멈춰 있을 때
다양한 불교‧문화강좌 프로그램으로 활성화한 장본인도 송월 스님이다.
척박한 땅에 부처님 말씀이 흐르게 하고, 침체한 불교를 일으켜 세워 군산불교의 새 지평을 열었다.
송월 스님은 2000년부터 재소자 포교에 매진했다.
2019년 10월 송월 스님은 제74회 교정의 날 기념식에서 국무총리상을 수상했다.
2000년부터 재소자 교화에 매진해 온 공로가 인정된 것이다.
스님들 사이에서도 재소자 교화는 ‘난제 중의 난제’로 꼽힌다.
거의 무한정 도와야 하는 데다 일부 출소자들의 해코지도 일어나기 때문이다.
원력과 담력 없이는 엄두도 내지 못한다.
“출소한 분이 절을 찾아온 다음 날 새벽에 나가 보니 불전함이 일주문 밖에 깨져 나뒹굴어져 있어요.
‘그래도 그렇지!’ ‘오죽하면!’ 만감이 교차합니다.”
한 비구니 스님의 청으로 군산 교도소에서 첫 법문을 했다.
어떤 말을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데 등에서 식은땀이 죽죽 흐른 것은 똑똑히 기억한다.
그로부터 8년 후 출소자 한 명이 찾아왔다.
리어카 장사라도 하겠다며 돈을 요구할 줄 알았는데
그는 각각 50만 원이 적립돼있는 통장 2개를 내놓았다.
“원래 교회 신도였는데 스님이 법문을 한다고 해서
‘무슨 말을 하나?’하고 법석에 처음으로 참여했다고 합니다.
제가 처음 법문한 그날입니다. 자기를 고발한 사람을
출소만 하면 가만 안 두겠다며 복수심에 사로잡혀 있었는데
법문을 듣는 순간 ‘내 허물이다’라는 생각이 들더랍니다.
그 자리서 ‘불교를 믿겠다’ 선언하고는 그날부터 거의 매일 천 배를 올렸다고 합니다.
무려 8년 동안입니다. 교도소를 자주 방문하며
올 때마다 먹을 것을 갖고 오기에 부자 절인 줄 알았는데
출소 후 슬쩍 한 번 절에 와보니 가난하더랍니다.
교도소에서 일하며 꼬박꼬박 모은 돈 모두를 시주한 겁니다.”
편지로 전해온 감사 한 마디,
출소해서 보인 밝은 미소가 재소자 교화를 지속하는 원동력이라고 한다.
“하늘은 녹(복‧능력) 없는 사람을 내지 않고, 땅은 이름 없는 풀을 키우지 않는다.
(天不生無祿之人 地不長無名之草‧‘명심보감’)고 했습니다.
상불경보살(常不輕菩薩)님은 누구에게든 ‘나는 그대들을 업신여기거나 가볍게 보지 않노라.
그대들은 반드시 부처님이 되실 분들이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재소자도 복 있고 부처님 되실 분들입니다.”
송월 스님은 사실상 증‧개축이 불가능한 산속의 절은 시민선방 등으로 활용하고 있다.
대신 2006년부터 불사를 시작해 영산보전, 적멸보궁, 약사전, 사리탑 등이 들어선
산 아래의 절(성흥사)을 축으로 포교에 집중하고 있다.
그런데 이 불사 과정에서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지금의 성흥사 터를 매입하기 시작한 2006년.
대구의 유성철 고미술 수집가가 고려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금동 9층불탑과 통일신라 쌍사자 석등 등 성보 15점을 성흥사에 기증했다.
그만한 사연이 있다. 유씨가 기증한 유물을 수집한 무렵부터 몽둥이에 두들겨 맞는 악몽을 꾸었다.
부인의 꿈에는 ‘성흥사’라는 절 이름과 묘령의 스님이 나타났다고 한다.
유씨는 수소문 끝에 군산 성흥사를 찾아왔는데
놀랍게도 자신이 소장하고 있는 관음보살상과 똑같은 관음상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16년 전인 1990년 성흥사에서 사라졌던 성보였다.
이 모든 게 부처님 뜻일 것이라 여긴 유씨는 선친이 남긴 성보까지 성흥사에 기증했다.
마이산에서의 1000일 관음기도 가피일까?
“관세음보살님께서 맺어 주신 불연이자 부처님 가피입니다!
현재 성흥사는 9900㎡(3000평) 대지의 절반만 활용하고 있습니다.
남은 땅에 양로원 등을 건립해 노인복지에 힘쓰려 합니다.
노인인구가 증가하고 있는 현실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송월 스님이 포교를 위해 제작했다는 책 중에서
마지막 쪽의 ‘약력’ 위에 새겨진 큰 글씨가 한눈에 들어왔다.
‘내 성불 한 생을 늦추더라도 이생에서 전법 포교하리라!’
마이산 탑사에서 1000일 관음기도를 회향하며 세운 원력이라고 한다.
스리랑카에서 이운해 온 부처님 사리가 봉안된 연못.
“제가 가장 귀히 여기는 부처님 말씀이 있습니다.
‘전법의 길을 떠나라! 같은 길을 두 사람이 함께 가지 말라.
나도 법을 설하기 위해 우루벨라로 간다.’”
달마의 눈보다 더 강렬하고도 청정한 눈빛이었다.
성흥사 회주 송월 스님의 포교와 불사는 지금도 진행 중이다.
채문기 상임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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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월 스님은
1955년 전북 정읍 출생. 1982년 입산.
1985년 성공 현묵 스님을 은사로 출가.
2011 세계서예 전북비엔날레 서예작가 초대전,
2015 제30회 아스로파예술 국제전시회,
2016 북경 국제서화 명가 초대전.
현재 사)한국 그린피아 전북연맹회장, 새군산포럼 공동대표,
군산경찰서 경승회장,
군산대 평생교육원 전담 교수 등을 맡고 있다
2022년 7월 13일
출처 : 불교언론 법보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