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릉도 3 - 도동에서 섬일주 버스를 타고 동구미 거쳐 태하에서 수토역사 전시관에!
울릉도로 가는 배편은 강릉, 묵호, 후포 그리고 포항 4곳에서 출발하는데 우리 일행 2명은 어제 8월
24일 포항 여객선터미널에 09시 20분에서 출항하는 썬라이즈호를 탔는데 날씨가 안좋은
탓으로 파도가 심하게 쳐서 배멀미 에 고생하며 3시간 40분 후 13시에 울릉도 도동항 에 내립니다.
미리 전화로 예약한 팬션 을 찾아 체크인을 하고는 조금 쉬다가 나와 언덕길을 걸어서
3거리 에서 좌회전을 해서 성인봉 등산 을 한후 내려와 울릉도 시가지
와 부두를 구경하고는 하룻밤을 자고......... 25일 일어나 밖으로 나와 아침을 먹습니다.
그러고는 도동 버스터미널 에서 버스 시간표를 보니 여기서 출발해 시계 방향 으로
한바퀴 도는 버스 는 7시 50분에 출발했고 다음 버스는 9시 40분인데 또 다른
버스는 울릉도 북쪽 천부에서 출발해 시계방향 으로 한바퀴 도는 버스 도 있습니다.
우리는 저 버스가 여기 도동 버스터미널에 들어왔다가 나가는지라 터미널 에서
8시 35분 버스를 타니 요금은 읍면 경계 안에서는 1인당 1천원이고 경계
를 벗어나면 1,500원인데...... 신용카드로 결제하면 100원이 싼 900원인가 합니다.
버스는 언덕길을 올라가 좌회전을 해서 구불구불 산 허리에 난 비탈길
을 마치 곡예하듯 달려내려가서는 항구 사동항 으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어제 울릉도로 들어올때는 날씨가 나빠 파도가 엄청치는데다가 멀미약을 출발 20분
전에 너무 늦게 먹었던 탓인지 무지 고생했는데 시간표를 보니 도동에서 포항 으로
나가는 배는 3시간 40분 이 걸리지만.... 여기 사동항에서 후포 로 가는 배는 2시간 30분 이라?
망설이다가 배멀미 때문에 1시간 10분이나 단축할 수 있다면 행선지를 바꾸는게
좋겠다 싶은데...... 출발지와 운행 회사가 다른지라 일행이 휴대폰으로
제이에이치 페리 인터넷 홈페이지 에 접속해서 예약 및 신용카드로 결제 를 합니다.
그러고는 도동항에서 출발하는 대저해운 홈페이지로 들어가 내가 예약한 배표를 취소하는데 이름과
생년월일 및 휴대폰 번호 3가지만 입력하니 바로 취소가 되는게 참 간편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버스를 타고 오면서 휴대폰으로 2가지 작업을 완료했기로 사동항 에서 내리려던
계획을 바꾸어 다음 정류소 동구미 에 내리기로 하는데 여기 사동항은
2024년 경비항기 취항을 목표로 비행장을 건설 하는 공사인지 참 어수선 합니다.
동구미에 내리니 좀 썰렁하기는 한데 여긴 동구미몽돌 해변이라 불리는데 바로
앞 바다에 화산 폭발 로 인해 특이하게 생긴 2개의 바위 가 있어 볼만합니다.
공사중이라 내려가기 힘든지라 멀리 둘러가기 보다는 그냥 다시 언덕길을 올라 마을로 들어가
살펴 보니 뒷산이 참 아름답게 생겼는데........ 여기 동네는 향나무 자생지 라고 합니다.
내려오니 원래 길은 마을을 지나 언덕을 올라갔는데 얼마전에 해안가에 터널 이 뚤렸으니
이제 버스는 바로 터널로 지나가는 것 같은데 공사하면서 부대 공사로 정류소 를
지어준 탓에 안에 들어가니 에어컨도 되고 전광판 모니터 가 있어 쉬기에 참 좋습니다.
조금 기다려서는 이번에는 도동항에서 9시 40분에 출발해 10시에 여기 동구미 에
도착하는 버스에 타는데.... 조금 연착이 되기로 실은 좀 걱정하기도 했습니다.
터널을 지나 조금 더 달려서는 서면의 면 소재지 라는 제법 규모가 있는 남양
이라는 마을을 지나는데...... 울릉도에는 교회 가 많은게 특색인가 합니다.
그러고 버스는 게속 달려서 10시 25분에 태하 라는 마을에 도착하기로 내려서는
마을에서 작은 내를 건너서 조금 걸어서 "울릉 수토역사 전시관" 으로
들어가는데 뜰에는 조선시대의 군함 판옥선 이 한척 버티고 서 있는게 특이합니다.
3층에 영상물 이 상영되지 않는 관계로 입장료는 받지 않는다고 하길래 가뿐 마음으로
들어가 사진이며 지도등 전시물을 둘러보는데 안용복의 2차에 걸친 일본
도해 를 보노라니....... 저 안용복 장군의 동상은 부산의 양정에도 서 있는게 떠오릅니다.
안용복 이 일본에 두차례 간 도시는 돗토리현 요나고 인데 몇년 전에 돗토리 에서 동해(일본해) 바닷가에
강의 모래와 화산재가 해풍으로 수만년에 걸쳐 형성된 사막 사구(沙口)와 돗토리성을 보고 돗토리역
에서 기차를 타고 시마네현 마쓰에로 가는중에 구라요시 (倉吉 창길)를 거쳐 요나고 에 들른적이 있습니다.
요나고 米子(미자) 역 “0 番 ホ-ム(0번 홈)” 에서 鬼太朗(귀태랑) 열차 를 타고 사카이 미나토
(境港) 에 도착해 내려서 “미즈키시게루 水木しげる” 로드 를 찾으면.... 도로변에 서
있는 귀신과 요괴 동상 들을 보는데 일본은 지진, 해일, 화산폭발이며 홍수와 태풍등
가혹한 자연환경과 종교 神道(신도) 때문인지 귀신과 요괴에다가 도깨비 가 많은 나라입니다!
이곳 고향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요괴 만화 “게게게노기타로 ゲゲゲの鬼太郞”를 그린 水木
しげる(미즈키시게루) 의 만화를 컨셉 으로 요괴 조각상 을 세웠는데 미즈키는 2차대전때
태평양 라바울에서 미군 폭격에 왼팔을 잃은 때문인지 전쟁의 참화를 다룬 만화 를 그렸습니다.
코로나 전만해도 우리나라에서 돗토리현과 시마네현 을 가는 가장 싼 방법으로 DBS 크루즈
가 있었으니 목요일 밤 동해시 에서 떠나면 금요일 아침에 사카이 미나토 에 도착하니
1박 2일로 두 현의 여러 도시를 둘러보고는 토요일 밤 에 다시 크루즈 를 타면
일요일 아침에 동해시 에 도착하는데....... 왕복에 195,000 원부터 275,000(1등석) 했습니다.
우산국 (于山國)은 6세기초까지 울릉도를 지배했던 고대왕국으로 일본삼대실록에는 세라국 (細羅國)이라는
이름으로도 나오는데, 우산 토착민과 동예 또는 옥저 에서 건너온 예맥계 유민이나 삼한계 유민들로
추정되며 일본삼대실록에는 일본인들과는 간단한 한자 필담을 제외하면 말과 글이 통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고구려에 속해 있던 말갈족 이 훗날 여진족 으로 불리니 고구려시대 이전 오래전 부터 만주와
연해주 그리고 함경도에 대를 이어 거주했는데.... 11세기에 이 함경도의 여진족 해적
들이 강원도 동해안과 일본 서해안 에 해적질 을 다녔으니, 일본 기록에는 1019년 3월
도이인(刀伊人 여진족)들이 50척의 배를 타고 쓰시마(대마도對馬島) 에 쳐들어왔다고 합니다.
여진족 해적 들이 중도에 반드시 울릉도에 들르는 지라.... 일본을 약탈하러 가던길인 1018년에
울릉도에서 무자비한 약탈 로 궤멸적인 타격을 받은후, 1022년에는 남아있던 우릉성주
와 아들 부어잉다랑등 주민들 이 모두 고려로 귀부하니 우산국은 완전히 멸망 했고,
조선초인 태종때에는 공도령(空島令) 으로 주민 쇄환 정책을 펼쳐 무인도 상태로 있었습니다.
고려 공민왕 때 왜구는 경상, 전라도는 물론이고 함경도와 평안도에 출몰하며 황해도에 상륙해 개경
을 노리니 수도를 한양이나 철원등 내륙으로 천도 하자는 주장까지 대두되는데.... 24년간
100회 가 넘는 침입으로 고려는 쑥대밭 이 되었으며 우왕 때에는 15년간 왜구의 침략 횟수는
무려 370회 에 달했으니..... 1년에 25회 꼴로 38년간 왜구가 무려 470회나 고려를 침략한 것입니다.
강화가 함락되고 수도 개경이 위협당해 계엄령이 선포 되었고 수도를 내륙으로 옮기자는 논의가 있었으며
고려 강산은 산산히 찢어져 피로 얼룩지니, 섬과 해안은 사람의 자취는 찾아볼수 없는 무인지경 으로
변해 황폐화 되었는데, 왜구 침탈은 횟수도 많고 병력도 대규모에 이른 것은 요시노의 남조 조정이
교토의 북조와 전쟁군비를 확보하기 위해 대거 왜구의 대열에 참가했기 때문으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조선조 들어서도 왜구침탈 이 끊이지 않자 태종과 세종 임금은 울릉도에 공도령(空島令) 을
내리는데.... 왜구의 피해가 심한지라 울릉도에 관리를 보내는 것 보다는 차라리
주민들을 육지 로 이주시키고 섬을 비우는게 낫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으로, 섬에 숨어
들어간 백성이 없는지 확인해서 잡아오거나 일본 어부를 쫓아내기 위해 순시선 을 보냅니다.
그러니까 처음엔 3년 마다 섬의 상태를 확인할 관리를 파견하였으나 점차 느슨해져서 중종 이후로는
아예 파견 기록이 없습니다. 그러다가 숙종 때인 1693년 부산 어부 안용복이 울릉도 에
고기잡으러 갔다가 왜인들이 섬에 거주하며 고기잡는 것을 보고 항의하다 일본으로 잡혀갔다 옵니다.
이후 일본 막부에서는 도해금지령 을 내리는데, 한국측은 울릉도와 독도 두 섬 모두 가지 말랬다고
해석하고 반면에 일본에서는 조선령인 울릉도에만 가지 말라고 했다고 다르게 해석 합니다.
왜인들에게 잡혀서 오키 隱岐 섬을 거쳐 돗토리번 요나고 로 끌려왔으면서도, 요나고 관리들에 이어
돗토리성의 태수(번주) 호키슈에게 불려가서도 울릉도가 조선땅 이라고 주장합니다. 울릉도가
조선땅 이라는 대답을 듣고 나가사키와 대마도 를 통하여 귀국하던 안용복 은 대마도 에서 잡힙니다.
안용복은 대마도에서는 물론이고 그후 귀국해서도 동래부 에서 "곤장 100대를 맞는 중형" 에 처해
집니다. 그러고도 안용복은 3년 후인 1696년에 다시 일행을 규합해서 돗토리현 요나고 에
이르러서는 일행들이 조선 관복을 입고 조선의 고위 관리를 사칭 해 같은 주장을 하였던 것이지요?
하지만 대마도가 개입하니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강원도 양양으로 돌아왔다가 현감에게 구금된후 탈출
해 부산으로 도주했다가 잡혀 서울로 압송돼 월경죄 에 관리사칭죄 로 국문을 받는데, 노론은
사형 을 주장했으나 김구만등 소론 에 의해 간신히 사형만은 면해 유배형 에 처해졌으니 이후
벽촌에 묻혀 숨죽이고 살다 죽었으니.... 세종대왕때 죽도록 매를 맞고 쫃겨난 장영실의 처지 와 같네요?
놀란 조선 조정은 안용복에게 월경죄와 관리 사칭죄를 물어 곤장을 치고 감옥 에 가두고는 장한상
을 울릉도에 파견하는등 다시 정기적 사찰 을 하다가 고종 때인 1881년에 순시선을 보냈더니,
조선인 60인과 왜인 120인이 섬에 거주 하는지라 쫓아내고는.... 1883년에 경상도와 전라도
사람들 20호를 이주시키니 현재 울릉도 주민들의 조상으로 이주 역사는 140년 쯤 되는가 봅니다?
조선이 울릉도에 조선인을 살지 못하게 한 때문인지 한반도 남부에 영향력을 어느정도 준 가야나
삼한들의 속국으로 살아남아 인지도가 있는 탐라국에 비해, 울릉도는 인지도는 물론 기록
조차 거의 없다시피한 실정이며... 그나마 언급되는 기록은 신라 지증왕 대 펼쳐진 이사부
의 공격과 여진족 해적들의 침탈로 인해 멸망 한후 우산국의 유민들이 고려에 귀화한 것뿐 입니다.
1989년에는 신라인 도래인의 후예 임을 주장하는 동해(일본해)에 자리한 시마네 島根(도근)현 의원
들이 선조들의 옛 고향인 경상북도를 방문하여 같은 "신라인의 후예라며 자매결연" 을 맺은
바가 있는데..... 1905년 2월 독도(다케시마) 를 일본 제국 시마네현으로 편입고시한 100
주년을 기념해 2005년 3월 16일 시마네현은 "다케시마의 날" (일본어: 竹島の日) 을 지정합니다.
1618년 일본 에도 막부에서 “竹島(독도, 다케시마) 도해봉서” 를 발급한 것은 돗토리현의
요나고시 의 오오야가(大谷家) 와 무라카와가 (村川家) 인데 왜 시마네현 으로 했을라나?
그건 아마도 고대에 바다를 건너온 신라인들이 정착한 곳이, 일본에서 아마테라스신을 모신
이세신사 에 이어 두번째로 크며 스사노오신을 모신 이즈모대사가 있는 시마네현의
이즈모 라... 그런 연유로 시마네현으로 편입 했고 기념일 까지 제정한 것으로 짐작 됩니다?
한국 영토인 독도를 일본인들이 지금도 다케시마 라고 부르며 자기 영토라고 우기는 것은
1618년 다케시마 도해면허, 1660년 마쓰시마 도해면허, 1836년 하치에몽에
대한 판결문 등..... 일본 어부들이 수백년간 독도에서 조업 해온 실적을 근거 로 내세웁니다?
조선 태종과 세종이 울릉도에 공도령 (空島令) 을 내리고 주민들을 육지로 철수 시키니
“울릉도가 빈 섬” 이라, 일본 정부의 허가를 얻어 독도에 조업하러 간 일본 어부
들이 독도와 “울릉도에 상륙해 움막” 을 짓고 어업과 산림 벌채 를 했기 때문으로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