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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르다, 빨라. 청량리역에서 40분밖에 안 걸리잖아!”
“세상 좋아졌다, 좋아졌어.”
조선 세조와 얽힌 창건 설화가 전하는 수종사(水鐘寺)와 550년 넘게 자란 은행나무 거목으로 이름난 운길산(雲吉山·610.2m·남양주시 조안면)은 서울시민들에게는 짧은 거리에 비해 멀게 느껴지던 산이다. 서울 외곽에서 10~20km 거리에 불과하지만 평일, 휴일 할 것 없는 교통체증 때문에 시간이 많이 걸리고 그로 인해 스트레스를 많이 받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난해 12월 29일 중앙선 복선전철이 덕소역에서 팔당역과 운길산역을 거쳐 국수역까지 이어지면서 달라졌다. 국철 1호선 분기점인 회기역에서 산행 들머리인 운길산역까지 불과 35분이면 갈 수 있게 되었고, 그로 인해 주말이면 2,000~3,000명에 이르는 등산인이 찾을 만큼 인기 있는 산으로 부상했다. 그 혜택을 보며 운길산역까지 쉽게 다가선 황원선씨와 석상명씨를 포함한 일행은 운길산역을 빠져나오면서 즐거운 표정이었다.
날씨가 찼다. 얼음 깨지는 소리에 놀라 개구리가 동면에서 깨어난다는 경칩을 하루 넘겼건만 봄옷 차림으로 산행에 나서기에는 쌀쌀한 날씨다. 게다가 옅은 안개가 산을 희뿌옇게 가리고 있었다. 그런데도 봄 햇살이 따스하고 넉넉하게 느껴지는 건 무슨 이유 때문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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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삼라만상을 껴안을 듯 사방팔방 가지를 뻗고 있는 수종사 은행나무. 북한강을 가로지른 철교와 다리가 내려다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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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제일의 조망에 인심 넉넉한 산사
“봄철이면 거의 매일 아침 이래요. 오전 10시는 지나야 날씨가 깨끗해질 거예요.”
오전 8시 반경, 시간이 너무 이른 탓인지 뜻밖에 한가로운 전철역 부근의 슈퍼마켓 주인은 운길산 기슭은 강에 피어오르는 물안개 때문에 이른 아침이면 안개가 자욱할 적이 잦다고 귀띔해주었다. 슈퍼마켓 주인이 일러준 대로 찻길대신 마을길을 따라 계곡으로 들어섰으나 아쉽게도 능선 길을 못 찾아내고 수종사 진입로를 따르다 전망대 갈림목을 지나 샛길로 접어들었다.
능선 길로 올라서자 왼쪽으로 나뭇가지 사이로 오늘 오를 마지막 봉우리인 예봉산(禮峰山·682.2m)이 고개를 치켜들고 있고, 그 오른쪽으로 철문봉(喆文峰·632m)과 적갑산(赤甲山·564m)이 장대한 능선을 이루며 솟구쳐 있다. 소나무와 참나무 무성한 능선 길은 수종사 진입로에 비하면 호젓하기 그지없다. 수종사에서 울려퍼지는 염불과 목탁 소리가 귓전으로 다가오면서 산속 깊이 들어서는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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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종사 들머리 명상의 길. 아름드리 소나무와 낙엽송이 산사의 정취를 북돋운다.
수종사 일주문이 내려다보이는 갈림목(운길산역 2.2km·정상 0.9km) 쉼터에서 수종사 일주문으로 내려섰다. 일주문을 지나 명상의 길로 들어서자 하늘을 찌를 듯 높게 자란 거목들이 숲을 이뤄 한층 고즈넉하다. 그러다 경내에 들어서자 갑자기 안개가 걷히면서 파란 하늘과 함께 두물머리 일원이 한눈에 바라보인다.
조선 세조와 얽힌 옛 얘기 때문인지 수종사는 한층 예스럽고 멋스럽다. 좁은 터에 빼곡히 당우가 들어섰음에도 어딘가 고찰다운 균형미를 갖춘 듯하고, 불이문(不二門) 바깥 한 쪽에 550년 넘게 자란 은행나무가 괴이한 모습으로 버티고 있어 고찰 분위기가 더욱 살아난다. 은행나무 역시 세조가 기념 식수한 것이라 전한다.
- 굳이 언제, 누구와 인연이 되어 지어졌다는 얘기가 아니더라도 수종사는 명찰이다. 은행나무 옆에서든, 삼정헌(三鼎軒) 담에 기대어 바라보든 발아래 펼쳐지는 풍광은 동국제일이다.
남한강과 북한강·경안천 세 물줄기가 합쳐지며 거대한 산중호수를 빚어놓고 있다. 호수 주변의 산릉, 산봉은 부드러움의 절정이다. 물은 그냥 흐르지 않고, 물안개를 피워 올리고 그 물 안개는 산릉과 산봉을 넘고 골짜기를 파고들며 더욱 아름답고 신비롭게 산하를 꾸며주고 있다.
“와, 멋지네. 멋져. 이렇게 멋진 풍경이 있어 세상이 살 만한 거 아냐.”
풍광이 마음을 다스려준다더니, 림프암에 걸려 방사선 치료를 끝낸 지 며칠 안 된 배병달씨는 발아래 펼쳐진 풍광에 넋을 잃더니 얼굴이 활짝 펴졌다.
“차 한 잔 마시고 가요. 그래야 세월 낚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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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릉도원이 또 있을까. 수종사 삼정헌 옆에서 두물머리 일원을 바라본다. 양평 해협산이 봉화대처럼 우뚝 솟아 있다.
삼정헌 담에 기대어 무릉도원 같은 경치에 빠져 있자 넉넉한 표정의 보살은 우리를 그냥 보내려 하지 않는다. 삼정헌에서 차 한 잔 마시며 유리창 너머로 두물머리를 바라보는 맛도 좋다고 꼬드긴다. 강물을 내려다보고 서 있는 천년고찰에 사는 이들은 인심도 넉넉한가 보다. 그러나 어찌 하리요 갈 길이 먼 것을.
은행나무 뒤쪽 길목(송촌리 1.8km, 정상 1.3km)으로 들어서 능선을 오르는 사이 좁은 터에 처마를 맞댄 채 자리잡은 당우들은 정감이 넘친다. 염불소리 리듬에 맞춰 절상봉(522m) 꼭대기에 올라서자 북쪽 조망이 터진다.
시우리 송촌마을은 운길산에서 갑산(甲山·546m)을 거쳐 고래산(鯨山·531.9m)으로 이어지는 산줄기가 포근히 감싼 분지 안에 자리잡고, 고래산 뒤편으로는 천마산과 철마산이 겹을 이루고, 그 오른쪽으로는 축령산과 명지산이 파노라마를 이룬 채반겨준다.
다산이 웅지 키운 산릉 따르며 수도 서울 조망
안부로 내려서는 사이 운길산 정상은 산새가 머리를 치켜들고 주변을 살피는 듯 앙증맞은 모습으로 반겨주고, 그 왼쪽으로 예봉산과 검단산이 힘차게 솟구쳐 기운을 북돋아준다. 운길산 정상에는 이미 많은 등산인이 조망을 즐기며 쉬고 있었다. 하지만 거세게 불어대는 찬바람은 갈 길을 재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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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왼쪽)정상석이 외로이 서 있는 운길산 정상. 갑산과 천마산~철마산이 겹을 이룬 채 바라보인다. (오른쪽)절상봉을 내려서다 바라본 운길산 정상.
“어디서부터 오시는 길이에요?”
“예봉산은 우리 같은 중늙은이들에겐 너무 멀어요.”
오후 1시 급경사 계단 길과 잔설이 남아 있는 북사면 바위 길을 지나 부드러운 산릉에 접어들자 중년의 등산인들이 다가온다. 육십 전후의 이들은 덕소전철역에서 와부읍 도곡3리까지 버스로 다가선 다음 새재고개와 오거리를 거쳐 운악산으로 향하고 있었다. 따스한 햇살이 드는 곳이면 어디든 점심상이 차려져 있고, 중년의 등산인들은 봄 햇살 아래 성찬을 즐기고 있었다. 부드러운 산릉, 따스한 햇살만큼 식욕을 돋우는 요소가 또 어디 있으랴 싶었다.
- 485m 봉 너머 안부에서 점심을 먹는 사이 운길산으로 향하는 이들이 지나갔다. 이들은 팔당역에서 출발해 예봉산에 오른 다음 여기까지 2시간 반밖에 걸리지 않았다고 한다. 그들 스스로 표현했듯이 성격 급한 이들이다.
다시 산행에 나섰다. 오후 1시를 넘어서자 하늘에는 바람이 거세게 불어대지만 부드러운 봄 길은 꿈에 부풀고 희망에 들뜨게 한다. 어제 긴 가뭄 끝에 모처럼 봄비를 맞은 산릉은 부드럽다 못해 푹신할 정도였다. 산길은 융단처럼 부드럽고, 산릉의 나뭇가지들은 새털처럼 가볍게 느껴졌다.
오른쪽으로 반딧불이가 살 만큼 맑고 깨끗한 마을이, 왼쪽 멀리엔 예봉산과 검단산을 가르며 흐르는 한강 물줄기가 바라보인다. 이러한 풍광을 양쪽에 끼고 걸을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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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철문봉 북쪽 활공장에서 서울시와 하남시를 바라본다. 미사리를 감싸안으며 흘러내린 한강수가 여의도 쪽으로 흘러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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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수터(0.37km)~새재고개길·예봉산(1.64km)·세정사(1.9km)·운길산역(5.2km) 길이 나뉘는 오거리 갈림목에 닿자 이제 오후 2시인데 기온이 뚝 떨어진다. 안내판 옆에 다산 정약용의 시 ‘치마폭에 매화를 그리다’가 적혀 있다.
예봉산 남쪽 끝자락이 뻗어내린 능내역 부근 조안면 능내리 마현마을은 조선 후기 대학자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1762~1836년)이 태어나고 생을 마친 곳이다. 이 마을에서 태어나 예봉산 자락을 오르내리며 웅지를 키운 다산은 경기도 암행어사와 동부승지 병조참의 벼슬까지 올랐으나 순조 1년(1801년) 신유박해 때 경북 포항 장기로 유배된 후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그 해 10월 전남 강진으로 유배갔다.
강진 유배 때부터 조선 후기 실학사상을 집대성해온 그는 순조 18년(1818년) 유배생활에서 풀려나 고향인 마현마을로 돌아와 또다시 예봉산을 오르내렸다. 하지만 어릴 적 꿈 대신 형들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는 산길이었다. 예봉산 남쪽 강 건너 천주교 성지 천진암을 바라보며 신유교사로 순교한 셋째 형 약종(若鍾·1760~1801년)을 그리워하고, 유배지 흑산도에서 죽은 둘째 형 약전(若銓·1758~1816)을 그리며 비통한 마음을 달랬던 길이다.
“이거 바람 맞으러 왔나 봐요. 이젠 몸이 날릴 것 같아요.”
오거리에서 허리길 따라 적갑산 능선에 올라서자 부드러운 산릉이 반겨주지만 바람은 우리를 받아주지 않으려는 듯 강하고 차갑게 불어댔다. 김수영(크로니산악회)씨는 아침 나절 따뜻한 햇살에 속지 않으려 준비해왔다며 두툼한 우모복을 꺼내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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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왼쪽)호젓한 운길산~철문봉 능선. 봄비를 맞은 능선길이 융단처럼 부드럽다. (오른쪽)서울과 하남시, 남양주시·양평군 일원의 산봉이 한눈에 바라보이는 예봉산 정상.
길이 한층 넓어졌다. 아무래도 덕소까지 전철이 연결된 지 오래고, 또 1997년 말 팔당역까지 전철이 연결된 이후 예봉산에서 새재고개까지 잇는 산길을 오간 등산인이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적갑산 직전 482m 봉에 오르자 덕소 일원이 빤히 내려다보였다.
한강은 폭을 한층 넓혀 미사리를 껴안으며 잠실을 향해 흘러내리고 그 뒤로 북한산은 괴이하면서도 장엄한 산줄기를 좌우로 펼치고 있다. 바람이 몰아쳤다. 한강 바람이다. 좋다. 마음껏 마시고 싶다. 봄이 오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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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런대며 걷노라니 적갑산 정상이다. 이제 예봉산과 그 오른쪽 어깻죽지 뒤로 검단산이 고개를 슬쩍 내밀며 우리를 쳐다본다.
“와, 킬리만자로다!”
이제 동으로 청계산(658.4m)을 비롯해 유명산(862m)·중미산(833.9m) 등 양평 일원의 산봉이 죄다 들어온다. 그 중 용문산은 군계일학의 풍광을 보여준다. 흰눈을 인 1,157m 높이의 정수리는 아프리카 적도의 킬리만자로(5,895m) 정상 키보를 바라보는 듯 신비롭기 그지없다.
오늘 우리가 걸어온 산줄기도 예사롭지 않다. 운길산에서 적갑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은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놓고 있었다. 산릉에 빙 둘러싸인 진중리 일원은 수종사에서 바라보이는 두물머리와는 다른 세상이었다. 다산은 어쩌면 그 안에 새 세상을 만들 꿈을 꾸며 산을 오르내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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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예봉산 남서릉상의 조망대. 한강을 가로지른 팔당대교와 하남시 뒤로 두루뭉술한 남한산성 일원이 바라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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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문봉 직전 활공장에 올라서자 이제 김포평야를 향해 흘러내리는 한강 줄기가 빤히 바라보인다. 김포평야를 가르는 한강수가 빤히 보일 만큼 조망이 뛰어난 활공장을 거쳐 다산 삼형제가 오르내리며 학문(文)의 도를 밝혔다(喆)는 철문봉을 넘어서자 예봉산이 손을 뻗으면 닿을 듯 가까워지고, 널찍한 안부는 새 둥지처럼 아늑하게 느껴졌다. 그런 산세는 나 홀로 느끼는 것은 아닌가 보다. 안부 너른 풀밭 곳곳은 등산인들의 발길로 인해 새가 둥지를 튼 듯 풀이 푹 주저앉아 있다.
예봉산 정상에 올라서자 일망무제의 조망이 다시 한 번 감격케 한다. 이제 서울이 내 가슴속, 내 눈 안에 들어오고, 관악·북한·도봉·수락산이 모두 내 발 아래인 양 나를 향해 고개를 조아리고 있다. 두물머리에서 합쳐진 한강수는 양옆에 검단산과 예봉산을 가른 다음 기세가 한층 당당해져 서울을 관통하고 있다. 아니, 산과 산을 가로지르며 흘러내려 수도 서울의 젖줄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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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운길산~적갑산~예봉산 개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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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릉에 찬바람 기승부려도 산기슭은 봄 찾아와
“안 내려갈 거야? 다섯 시가 넘어가는데 뭘 그리 머뭇거리고 있는 거야.”
취재팀에 비해 이른 시각에 예봉산 정상에 도착한 배병달씨는 봄바람에 콧속의 림프암이 깨끗이 사라졌는지 활기 찬 표정을 지으며 하산을 재촉했다. 하지만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일. 정상 한 쪽에 자리잡은 간이매점에 들어서 예봉산 별미 감로주를 한 잔 쭉 마신다.
남서릉은 곤두박질하듯 가파른데도 예봉산 등로 중 최고 인기를 누리는 산길답게 길이 잘 나 있다. 간간히 앞이 트여 숨을 고르게 해주고, 호된 내리막에 장딴지가 뻐근해지고 땀이 배일 만하자 경사가 누그러진다. 하산을 시작한 지 40분 만에 내려선 널찍한 안부 삼거리에서 왼쪽 길로 내려서자 이제 산책로처럼 널찍하게 다듬어진 소나무 숲길이 나타난다.
숲길을 빠져나가자 등산인들이 환한 표정을 지으며 계곡을 따라 내려서고 있다. 숲길을 빠져나와 물가로 내려서며 김수영씨는 얼굴이 활짝 펴졌고, 최준회씨는 사나흘이면 봄이 활짝 피겠다는 화답으로 맞장구쳐주었다.
“이것 보세요. 꽃봉오리가 맺혔어요. 아니 저건 개구리 아니야? 봄이 왔나 봐요.”
산 위에 아무리 찬바람이 기승을 부려도 산기슭에는 봄이 스며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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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길잡이>
산행만 6시간…도곡리로 빠지면 1시간 이상 단축
운길산에서 철문봉과 예봉산을 잇는 능선은 서울 근교에서 보기 드물 정도로 자연미가 넘치고 조망 또한 뛰어난 종주 코스다. 숲 또한 좋아 삼림욕 차원의 산행지로도 그만이다. 운길산 정상 아래 수정사는 세조와 얽힌 얘기가 전하는 고찰로, 두물머리 조망과 함께 불이문(不二門) 앞에 자라고 있는 550년생 은행나무로도 이름이 높다.
저녁 무렵 예봉산에서 팔당역 쪽으로 하산하면 물고기 비늘처럼 반짝이는 한강수와 주변의 도시를 감싸고 있는 관악산, 북한산, 도봉산이 어우러지는 풍광이 그야말로 동국 최고다.
운길산 등로는 세 가닥인데 그 중 송촌마을 코스는 운길산역에서 1.5km 이상 차량 소통이 빈번한 국도를 따라야 하기 때문에 잘 이용하지 않는다. 따라서 수종사 진입로나 생태농원 초록향기 앞에서 시작하는 산길을 따르도록 한다. 초록향기 기점 코스는 계곡을 거쳐 능선으로 올라붙은 다음 정상 직전 헬기장으로 이어진다.
능선 길을 따르다 수종사에 들르려면 ‘하산길 2.2km, 정상 0.9km’ 안내판 지점에서 오른쪽 일주문으로 내려서도록 한다. 수종사에서는 정상 직등로(0.8km)나 절상봉 경유 산길(1.3km) 중 한 길을 택해 정상까지 오를 수 있다.
운길산 정상에서 예봉산으로 가려면 서쪽 능선을 따라야 한다. 급경사 데크 길을 내려선 다음 바위를 끼고 돌면 첫 번째 안부. 이후 오거리에 다가서기까지 485m 봉, 505m 봉, 482m 봉, 449m 봉 등 야트막한 봉우리를 네 개 넘어서야 한다. 적갑산·새재고개·세정사 길이 나뉘는 오거리 갈림목에서 체력이 떨어진 사람은 오른쪽 ‘옹달샘 0.37km’ 방향으로 빠져 새재고개에서 도곡리로 내려서도록 한다. 한 시간이면 도곡리까지 하산이 가능하다.
오거리에서 예봉산 쪽으로 가려면 계속 능선 길을 따르거나 능선 왼쪽 허리길을 따르도록 한다. 어느 길을 택하든 남쪽 방향으로 진행하면 적갑산과 활공장·철문봉을 거쳐 예봉산 정상에 올라선다.
‘감로주’를 파는 간이매점이 있는 예봉산 정상에서 하산로는 다양하게 잡을 수 있다. 가장 짧은 길은 남서릉 길로 급경사 능선을 타고 50분쯤 내려서다 완경사 잘룩이에서 왼쪽 길로 빠지면 마을을 가로질러 팔당2리 마을회관 앞으로 내려선다. 정상에서 동쪽 능선을 타면 율리봉으로 향한다.
정상에서 20분쯤 내려서면 ‘벚나무쉼터’라는 팻말이 붙어 있는 안부 삼거리에 닿는다. 여기서 오른쪽 산길을 따르거나 급경사 오르막을 거쳐 율리봉을 넘어선 다음 남릉을 따라 율리고개까지 내려선 다음 오른쪽 길을 따라도 팔당2리 마을회관 앞으로 내려선다. 마을회관에서 팔당역까지는 5분 남짓 거리다.
운길산~예봉산 능선 종주는 6시간 정도 걸리는 긴 코스이지만 능선 길이 워낙 부드러워 힘든 줄 모르고 산행할 수 있다. 도중에 체력이 달린다 싶으면 오거리 갈림목에서 옹달샘 방향으로 진행해 새재고개에서 도곡리로 내려서도록 한다. 새재고개에서 동쪽 시우리 송촌마을로도 임도가 이어지지만 교통이 불편한 편이다(예봉산 팔당역 원점회귀코스, 운길산 중리마을 원점회귀코스는 코스가이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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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왼쪽)지난해 말 전철이 개통된 운길산역. 주말이면 2,000~3,000명의 등산객이 이용하는 전철산행 기점이다. (오른쪽)전철에서 쏟아져 내린 등산인들이 능선 길을 따라 운길산 정상으로 오르고 있다.
>> 교통
용산발 팔당·운길산 경유 국수행 국철은 약 30분 간격으로 운행한다. 지하철 1호선을 탈 경우 회기역에서 갈아타도록 한다. 용산발 첫차 05:50·막차 22:42(회기역 22:42 경유), 청량리발 첫차 05:30. 운길산역발(팔당역과 5분 차이) 막차 평일 23:20(용산)·23:48(청량리), 토요일 23:14(용산)·23:48(청량리), 휴일 23:31(용산). 요금 회기역→팔당역 일반 1,300원·교통카드 1,200원, 운길산 일반 1,400원·교통카드 1,300원. 역 별 출발 시각은 코레일 홈페이지 참조(홈페이지 메인화면 중앙의 ‘도움말’→‘열차시각 및 운임표’ 클릭 후 광역열차시각표 ‘용산-국수’ 파일열기 참조).
>> 먹거리
운길산역 부근의 하우스마차(식당·슈퍼·031-576-0155, 011-9967-1851)에서는 순두부·국수 등 가벼운 음식을 팔고 있다. 수종사 진입로 초입의 삼거리 부근에는 가마솥순두부 전문인 운길산장(031-576-5952), 장어와 흑돼지 전문인 운길산농원(031-576-8908), 장어와 삼겹살 전문인 두물장어(031-576-8727), 옛날 순두부 집인 초록향기(031-576-8702) 등 음식점이 여럿 있다.
예봉산 들머리인 팔당리 마을회관 주변 닭백숙 전문 싸리나무집(031-576-1183)은 오래전부터 등산인들에게 인기 있는 집이다. 닭도리탕(암탉 35000원, 장닭 45,000원), 손·콩칼국수(4,000원)·돼지껍질(5,000원), 쑥부침(5,000원) 등을 판다. 싸리나무집 맞은편 북촌골(031-576-3323)은 엄나무닭백숙(35,000원), 오리주물럭(30,000원)을 자신 있게 내놓는 음식점이다. 감로주(1되 5,000원)도 마실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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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소>
운길산 수종사
세조와 얽힌 얘기 전하는 고찰
대한불교조계종 제25교구 본사인 봉선사 말사인 수종사(水鐘寺)는 신라 때 창건된 고찰로 고려 태조 왕건이 상서로운 기운을 좇아 이곳에 이르러 구리종을 얻음으로써 부처님의 혜광을 통해 고려를 창건했다는 전설과 함께 조선 세조와 얽힌 얘기가 전하는 고찰이다.
조선 후기 전국의 사찰에 관한 내용을 조사해놓은 <범우고(梵宇攷)>에 따르면, 세조가 이 절에 친히 행차해 땅을 파서 샘을 찾고 종을 발견했다고 하여 수종사라 이름 지었다고 전한다. 1939년 석조 부도를 중수하면서 1439년(세종 21년)에 조성된 부도로 확인되어 조선 초기에 창건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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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왼쪽)수종사 대웅보전. 조선 세조와 얽힌 일화가 전하는 고찰이다. (오른쪽)수종사 들머리에 위치한 미륵석불. 산사를 찾는 이들을 부드러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다.
굳이 <범우고>를 뒤지지 않더라도 수종사는 세조와 관련된 창건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세조가 신병 치료차 금강산에 다녀오다 두물머리에서 하룻밤 머물 때 어디에선가 종소리가 들려와 다음날 사람을 시켜 알아보니 운길산 정상 바로 아래 바위굴에 18나한상이 있었다. 종소리는 굴 속으로 물방울이 떨어지면서 울려나온 소리였던 것이다.
세조는 이를 기이하게 여겨 이곳에 절을 짓게 하고 절 이름을 수종사라 하였다 한다.
불이문 앞 높이 35m 둘레 6.5m의 은행나무는 수령이 550년 넘은 거목으로, 이 역시 세조가 수종사 창건을 기념해 식수한 기념수라 전하고 있다.
수종사는 다산과 사상적 교분이 두터웠던 다성 초의선사(茶聖 草衣禪師·1786~1866년)에 의해 다도 명소가 된 곳이기도 하다. 다산의 강진 유배시절 차와 사상을 나누는 사이 교분이 두터워진 초의선사가 다산이 고향으로 돌아간 뒤 어느 날 해남 두륜산 일지암에서 수종사를 찾아와 시 한 수를 남기기도 했다.
“한잠 자고 일어나니 차 한 잔 줄 사람 없을까? 게을리 경서 읽다가 눈곱 씻었네. 그대가 여기 있는 줄 알고 이곳 수종사까지 오지 않았나.”
수종사 삼정헌에서는 차를 무료로 제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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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내 정약용 유적지
실학정신 담긴 <여유당전서> 저술한 생가
중앙선 능내역 부근의 마현마을은 조선 후기 대학자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1762~1836년)의 생가로 알려진 명소다. 다산의 실학사상은 오늘날 학문이 실제 생활에 이용돼야 한다는 실사구시 정신의 실천으로 생활과 문명 발전에 크게 기여하는 업적을 남겼다.
16세 때 성호 이익의 학문을 접했고, 이벽에게 서양서적을 얻어 읽으며 실학과 서학에 눈뜨기 시작한 다산은 정조 13년(1789년)에 문과에 급제해 예문관 검열이 되었다.
그러나 천주교인이라는 낙인이 찍혀 충남 해미로 귀양갔다가 열흘 만에 풀려나고, 이후 경기도 암행어사를 지낸 다음 동부승지 병조참 벼슬까지 올랐으나 주문모 신부의 잠입사건으로 형 정약전과 함께 이 사건에 연루돼 충청도 금정찰방으로 좌천되었다. 순조 1년(1801년) 신유박해 때는 경북 포항 장기로 유배된 후 황사영 백서사건이 일어나 그해 10월 전남 강진으로 유배가는 등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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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산 정양용 선생 좌상. 뒤쪽으로 생가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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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 유배 시절부터 조선 후기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다산은 순조 18년(1818년) 유배생활에서 풀려나 고향인 마현마을로 돌아온 뒤 유배지에서 보게 된 부패한 관리들을 타파하고, 비참한 생활고로 고통 받는 백성들을 구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1836년 2월 22일 별세하기까지 <흠흠신서(欽欽新書)> 30권, <경세유표(經世遺表)> 49권, <목민심서(牧民心書)> 48편 등 정치·경제의 제도 개혁을 주장한 500여 권의 <여유당전서>를 저술했다.
다산 생가에는 묘, 저서 사본, 일대기를 표현한 지오드라마 등이 전시된 기념관이 있다. 7월 말 개장 예정으로 공사 중인 박물관에는 실학 관련 유물이 전시될 예정이다. 기념관 관람시간은 하절기(3~10월)에는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 동절기(11~2월)는 오전 9시~오후 4시. 연중 무휴 무료 개방. 문의 031-590-2481.
- 굳이 언제, 누구와 인연이 되어 지어졌다는 얘기가 아니더라도 수종사는 명찰이다. 은행나무 옆에서든, 삼정헌(三鼎軒) 담에 기대어 바라보든 발아래 펼쳐지는 풍광은 동국제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