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 고도 시안에서 진시황을 만나다.
봄을 재촉하는 밤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새벽 6시 정각, 남한산성 해설사를 태운 버스가 광주시청에서 김포공항을 향해 출발했다.
새벽 찬 공기를 가르며 한 시간 여 달려 김포공항이 가까워질 무렵 아침이 비로소 짙던 어둠의 장막을 엷게 걷어냈다.
3월6일 10시 시안(Xipan)까지 1010마일(3시간10분소요) 하늘을 날아가기 위해 우리들은 아시아나 항공기에 탑승을 서둘렀다.
시차는 1시간, 현지시간 30분에 시안(서안)의 함양공항에 도착했다.
<광주해설사>란 피캣을 들고 우리를 마중 나온 현지 가이드(김란)가 공항식당으로 안내 했 으며 그녀의 고향은 연변의 용정이라고 해서 우리와 한 핏줄이라 여겨 친밀감이 들었다.
시안은 산시성(섬서성)내의 성도로 중국 6대도시(북경, 상하이등)의 하나이며 천년의 역사를 간직한 고도로 진시황제 시 수도였던 장안으로 더 유명하다.
BC 221년 진시황이 6국을 통일하고 수도를 장안 또는 함양이라 지칭했던 연유로 시안의 공항을 함양 공항이라 한다.
명나라 주원장이 수도를 남경으로 옮기기 이전 당나라 때는 장건이 서역무역을 열어 동서양 문화 교류의 중요한 요충지로 실크로드의 기점이기도 했다.
당시 인구가 백만을 넘었다하니 문화와 상권의 중심부로 번성했던 큰 도시였음을 가히 미루어 짐작이 간다.
아마도 찬란한 문화를 꽃피운 신라가 이곳으로부터 선진 문물을 받아드리지 않았을까?
북경은 오천년의 역사, 상하이는 고작 1백년의 짧은 역사에 비해 시안은 고대 13개 국가가 수도로 삼았던 천년의 역사를 품은 천혜의 요새였다.
주나라 진나라 당나라에 이르기까지 1,000여 년 간 수도로서 도시의 위용을 자랑했던 시안에 현재 남아 있는 황제의 무덤이 71기로 멀리 보이는 언덕은 대부분 황릉이라 해도 무방하다고 가이드가 전한다.
천년의 고도로서 그 깊은 역사의 베일을 쉽게 벗어내지 않으려는 듯 3월의 시안은 마치 구름이 낀 흑백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케 했다.
땅을 파기만 하면 유물이 나오고 곳곳에 산재해 있는 유적들로 인해 년간 강수량이 500-700mm라는 건조한 흙빛 도시 시안에 생동감을 불어넣는가보다.
시안은 한반도 43배 크기의 산시성(섬서성)성도이자 중국이 주력하고 있는 서부개발의 중심지이기도 하여 땅위에는 정보기 반도체 태양광 전지 등 신흥 산업이 빠르게 발전해 땅 밑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공존하고 있다.
이곳에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는 것은 아마도 건축에만 37-8년이 걸렸다는 진시황의릉과 병마용이지만 중국 정부의 방침으로 아직 미공개 상태여서 미스테리로 남겨질 모양이다.
1)진시황제의 아방궁
아방궁은 중국 대륙에 최초로 통일 왕국을 세운 진시황이 기원전 212년에 착공을 시작한 대규모 황궁이며 아방이란 사방이 넓다는 의미에서 붙여졌다는 설이 있다.
사기에 의하면 아방궁의 규모는 동서로 650m 남북으로 115m로 1만 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 한다.
시황제는 함양궁을 비롯하여 그가 멸망시킨 6국의 궁전을 본뜬 육궁에서 미인들과 즐기면서도 만족하지 못하고 더 큰 궁전을 지으려고 했다.
아방궁 건설에만 죄수 70만 명이 동원 되었으나 시황제 생전에는 완성되지 못하고 2세 황제가 나머지 공사를 진행했다.
아방궁은 BC 207년 항우가 진나라를 멸망시킬 때 불태워졌다 하며 불길이 3개월 동안 꺼지지 않았다고 한다.
현재 복원된 건물은 당시의 1/3에 불과하다.
6국의 통일 위업을 달성하고 영원히 살아남기를 갈망했던 시황제가 50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하였으니 인간만사가 허망이라 아니할 수 없음이 안타까운 일이다.
인걸은 오간데 없고 그의 이름과 유물만이 당시를 회상하기에 충분하다고나 할까?
진시황제 사망 후 4년 만에 진나라는 한나라에 의해 지구상에서 사라져 이름을 잃었으나 그 남은 유적들은 세계의 이목을 끌며 수많은 광관인파를 중국이라는 나라로 불러들이고 있다.
2)당 현종과 양귀비의 화청지
화청지는 시안에서 25Km 거리에 있으며 화산으로 가는 길에 볼 수 있는 3.000년의 역사를 지닌 온천이며 시안의 여산 산록에 있다.
온천수의 수온은 섭씨43도로 당 현종은 양귀비를 위해 <해당탕>이 지어 전성기를 맞았었다. 양귀비가 하루에 6번씩 목욕을 하고 머리를 말렸다는 종탑 모양의 루가 있어 당 현종이 얼마나 양귀비를 사랑했나를 연상케 하는 곳이다.
서주말기에 주유왕은 이궁을 세웠고 진나라에 시황제는 려신탕을 세웠다.
당나라 때인 644년에는 현종이 크게 확장하고 <화천궁>이라 개칭하였다고 한다.
며느리를 빼앗아 비로 삼은 당 현종과 양귀비 시절에는 이곳이 매우 번성하였고 정치의 중심지가 되었었으나 안사(안녹산)의 난 이후 화청천은 쇠락의 길을 열었다.
당현종 말기 안녹산의 난이 일어나 대부분 불에 타고 후에 청나라와 중국 정부에서 30%만 복원하는데 그쳤다.
중국 역대 제왕이 행궁별장을 세워 휴양하던 곳이며 당나라말엽 현종과 양귀비가 사랑으로 세월은 낚았던 곳으로 양귀비의 로맨스를 노래한 백낙천의 서사시<장한가>로 더 유명하다.
그러나 사랑하던 양귀비를 제 목숨과는 바꿀 수 없었던지 안녹산의 난을 피해 도주로에서 사랑하는 여자의 죽음을 외면해야했으니 소극적이고 비겁한 황제가 아니었나 싶다.
나라를 망친 양귀비가 환관 고력사의 손에 끌려가는 것을 수수방관해야만했고 그녀의 일족을 안녹산의 병사들에게 내어주어 주살하게 했으니 말이다.
안녹산의 난을 피해 도망가던 중 인근 불당앞 배나무에 비단 천으로 목을매 자결 하였다고 한다. 그녀의 나이 38살 경국지색의 미모로 15년간 당 현종과의 화려했던 권세가 이렇게 일장춘몽으로 막을 내렸다.
화청지는 당나라 7대 현종과 양귀비의 욕탕으로 더 많이 알려져 흥미를 끄는 곳으로 상징적 조형물인 양귀비의 조각상이 눈길을 끈다.
진, 한, 수, 당 이전인 주나라 때 2.800년 전에 이미 여궁을 세웠고 진시황은 별궁을 짓고 려산탕이라 불렀다.
당대에는 온천 주변에 많은 전각을 짓고 탕천궁이라 하였다가 747년 다시 화청궁이라 개칭하였다. 양귀비가 목욕을 했다는 해상탕은 지금도 섭씨43도의 온천수가 가득한데 광물질을 많이 포함하고 있어 관절염과 피부병에 좋다고 한다.
참고
양귀비는 양귀비꽃에 견줄만큼 뇌살적인 미모였던것 같다.중국의 4대미녀 서시, 왕소군, 초선과 더불어 현세에 까지 이름이전해지는 것을보니.
본명은 양옥환이며 산시성 출신이지만 어린 시절 부모를 여의고 관리이던 숙부 양림의 집에서 살았다. 노래와 춤에 능하고 인물이 출중해 17세에 당 현종의 18번째 아들 수왕 이모의 비로 6년간 살다가 23살에는 시아버지의 여자로,27세에는 현종의 비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진시황 병마용 박물관
세계8대 불가사이의 하나이며 세계문화유산 병마용은 국왕이 죽으면 병사를 순장하는 풍습으로 병마용이 든 갱에는 병사를 본떠 만든 도용들과 말, 마차등이 매장 돼있다. 하나하나의 모습이 제각각인 것으로 보아 실존 인물이었던 것으로 추정 되어 착각을 일으키게한다.
병마용은 1974년 중국 시안 외각에서 우물을 파던 농부3명에 의해 우연히 발견 되었다.중국 정부에서는 본격적인 발굴로 이것이 진시황제의 릉에 함께 묻힌 병마용 갱이라고 발표했다.1호 갱에는 6,000여기의 병마가 매장돼있고 가장 최근의 갱에는 장군용이 발굴되어 지휘소였던 것으로 추정된다.1호갱의 평균신장은 173cm 3호갱 신장은 180cm에 달해 신장으로도 계급의 구분을 보여준다.
3)진시황릉
중국 최초의 황제인 진 시황제의 릉이다. 여산 또는 역산은 산시성시에서 30km떨어져 있는 동현의 원산원에 있는 야산이다. 13세에 즉위한 진시황이 즉위 후 BC 246- 208년까지 39년간 공사를 했으며 동원 인원만도 70만 명에 이른다고 사마천의 사기 진시황 본기에 전해지고 있다. 항우가 30만의 병사를 동원하여 도굴을 했다는 기록과 황소의 난 때도 도굴이 이어졌다.
엄청난 양의 수은으로 강을 이루어 바다가 형성될 정도였다고 사마천의 사기에 기록 되어있다.
진시황제는 진나라 31대 왕이며 BC 259-210중국 최초의 황제이다. 이름은 영정으로 조나라 상인출신인 승상 여불위의 아들이라는 설도 있다.
불로불사의 열망이 컸으며 대규모 문화탄압사건인 분서갱유사건을 일으켜 수양제와 더불어 중국역사상 최대의 폭군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반면 도량형을 통일하였고 전국시대 국가들의 장성을 이어 만리장성의 틀과 기초를 다졌으며 분열된 중국을 통일하고 황제제도와 군현제를 닦으므로 2천년 중국 왕조들의 기본 틀을 만들었다.
진시황제 영정은 13세에 등극하여 기원전 210년에 50세의 나이로 붕어함으로 영원한 제국을 꿈꾸었던 진 나라는 그가 사망하고 4년 만에 망했다.
진시황의 병마용 도용들이 만들어질 당시에는 채색된 도용이었으나 햇빛에 노출되자 불과 몇 시간 만에 색이 바래어졌다.
2호 갱은 병사가 도열해 있는 1호 갱과는 달리 궁노병, 기마병, 전차병이 포진 하고있다. 3호 갱은 지휘부로 장군용 전차 1량이 채색된 상태로 발견되었다.
첫댓글 샘 덕분에 공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