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거라
아무도 보지 않을 때 이때
그러나 눈 있는 모든 이들 숨죽이며 지켜보는 이때
떠나거라 묵묵히
움직이지 않는 듯
뜨겁게 땅에 몸을 붙이고 굳굳하게
돌아올 수 없을 것이다 한 번 가면
죽은 넋 바람에 실려 빗물로는 몰라도
샛푸른 한으로 번뜩이는 신새벽 이슬로는 몰라도
서릿발로는 몰라도 통곡처럼 퍼붓은 우박, 눈발로는 몰라도
떠나가면
살아서 우리 다시 만나기 어려우리라
흐르거라 이 밤이 새기 전에
버림받은 모든 것들
모멸과 안타까움, 속쓰림을 부둥켜안고
거거라 속시원히
밤 깊어 고요할 때 이때
저 어둠의 복판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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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다시 한강을 보며/ 김사인
멀리서 보면 고요한데
가까이 다가가 속을 들어다보면
흐른다
돌에 이마를 부딪치며
오만 잡쓰레기들끼리 얼크러져
서로 기대고 또 감싸안고
피 튀기며 거칠게
비켜서서 숨 돌릴 곳은 세상 어디에도 없으므로
깊은 설움은 더 깊이 다스리고
치받는 신명은 소용돌이쳐 푼다
간발의 틈도 없이
사정없이 부딪쳐
박살이 나면 다시 몸 추스려 더욱 세차게
삶의 이 진저리나는 격렬함
그러나 다시 멀리서 보면
한강은 백치같이 무심한 얼굴로
또 한번 우리를 갈긴다
- 시집 <밤에 쓰는 편지> 1999.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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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눈물이 저 길로 간다 /김사인
눈물이 저 길로 간다
슬픔 하나 저 길로 굴러간다
물 아래 물 아래 울음이 간다
찔레꽃 한 잎 물 위에 흘러간다
오늘 못 가고 내일
내일 못 가고 모레 글피
글피도 아니고 아득한 훗날
그 훗날 고요한 그대 낮잠의 머리맡
수줍은 채송화꽃 한 무더리로
저 길로 저 길로 돌아
내 눈물 하나 그대 보러 가리
그대 긴 머리칼 만나러 가리
서늘한 눈매 만나러 가리
오늘 아니고 어제
어제도 훨씬 아닌 전생의 어느 날
눈물은 별이 되어 멀리로 지고
손발 없는 내 설움 흰 눈 위로
피울음 울며 굴러서 간다
- 시집 <밤에 쓰는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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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꽃 /김사인
모진 비바람에
마침내 꽃이 누웠다
밤내 신열에 떠 있다가
나도 푸석한 얼굴로 일어나
들창을 미느니
살아야지
일어나거라, 꽃아
새끼들 밥 해멕여
학교 보내야지
가만히 좋아하는 <창비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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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맑은 소리 /김사인
알이 아홉 달린 대추나무 단주 하나
어디서 덕원 수좌가 훔쳐다 나를 주었는데
딩딩딩 맑은 소리가
마음 안으로 울려오는 것 같아
여자를 만날 때도 술을 먹을 때도
주머니 속에 넣고 다니며 쪼물거렸는데
어느날부턴가
아무 소리 안 들린다
나는 얼씨구
비로소 개잡놈이 된 것이냐
< 가만히 좋아하는 > 2006. 창비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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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깊이 묻다/ 김사인
사람들 가슴에
텅텅 빈 바다 하나씩 있다
사람들 가슴에
길게 사무치는 노래 하나씩 있다
늙은 돌배나무 뒤틀어진 그림자 있다
사람들 가슴에
겁에 질린 얼굴 있다
충혈된 눈들 있다
사람들 가슴에
막다른 골목 날선 조선낫 하나씩 숨어 있다
파란 불꽃 하나씩 있다
사람들 가슴에
후두둑 가을비 뿌리는 대숲 하나씩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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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유리창 /김사인
사랑하기로 한다
5분이 지나면
마른 풀과 짚으로 만든 잠자리에 돌아가
혼자 눕기로 한다
긴 침묵 끝에
우리는 두 개의 강이 되기로 한다
만나면 몸짓으로만 사랑하기로
돌아가 먼 곳에 하나씩
어린 물고기를 키우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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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나비/ 김사인
오는 나비이네
그 등에 무엇일까
몰라 빈 집 마당켠
기운 한 낮의 외로운 그늘 한 뼘일까
아기만 혼자 남아
먹다 흘린 밥알과 김칫국물
비어져나오는 울음일까
나오다 턱에 앞자락에 더께지는
땟국물 같은 울음일까
돌보는 이 없는 대낮을 지고 눈시린 적막 하나 지고
가는데, 대체
어디까지나 가나 나비
그 앞에 고요히
무릎 꿇고 싶은 날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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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봄바다/김사인
구장집 마누라
방뎅이 커서
다라이만 했지
다라이만 했지
구장집 마누라는
젖통도 커서
헌 런닝구 앞이
묏등만 했지
묏등만 했지
그 낮잠 곁에 나도 따라
채송화처럼 눕고 싶었지
아득한 코골이 소리 속으로
사라지고 싶었지
미끈덩 인물도 좋은
구장집 셋째 아들로 환생해설랑
서울가 부잣집 과부하고 배 맞추고 싶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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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주왕산에서/ 김사인
가을볕
이 엄숙한 투명 앞에 서면
썼던 모자도 다시 벗어야 할 것 같다
곱게 늙은 나뭇잎들 소리내며 구르고
아직 목숨 붙은 것들 맑게 서로 몸 부비는 소리
아무도 남은 길 더는 가지 않고
온 길을 되돌아보며
까칠한 입술에 한 개피씩 담배를 빼문다
어떤 얼굴로 저 가을볕 속에 서면
사람은 비로소 잘 익은 게 되리
바지랑대도 닿지 않는 아슬한 꼭대기
혼자 남아 지키는 감처럼
닥쳐올 그 어느 시간의 예감을 지키며
기다려야 한다면
나는 이 맑음 속에 어떤 자세로 앉아야 하리
~~~~~~~~~~~~~~~~~~~~~~~~~~
14) 가는 길/김사인
어디로 가면 되나
내 살아 홀로 그대 만나러 가는 길
어디로 가면 닿는가
남녘으로 남녘으로만 가면 우리 만나는가
북으로 북으로 치달으면 만나는가
한 목숨 내가 버리면 우리 만나는가
피 젖은 헌 가마니에 나도 가 누워
그대 묻힌 어느 시궁에 따라 묻혀서
한 시절 묵묵히 순한 지렁이떼 키우고 나면
그러면 비로소 만나질 건가
아아 언제까지 이렇게만 살 수는 없어
그대 찾아나선 길
나는 갈 곳이 없다
그대의 이름을 물을 곳이 없다
~~~~~~~~~~~~~~~~~~~~~~~~~
15) 길이 다하다/김사인
풀 하나가 앞을 가로막는다
건드리면 터질 것 같은
저 야윈 실핏줄들
빗방울 하나가 앞을 가로막는다
이미 저질러진 일들이여
완성된 실수여
아무리 애써도 남의 것만 같은
저 납빛의 두꺼운 하늘
잠시 사랑했던 이름들
이제 나에게 어떤 몸 이 용납될 것인가
설움에 눌린 발바닥과 무릎뼈는
어느 달빛에 하얗게 마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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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맨드라미 /김사인
꺽인 맨드라미여
허리 꺽인 맨드라미여
청 좋은 나훈아가
서운히도 돌아서선 돌담길이다
대추 나무 퀭한 가지 너머
하늘은 잿빛으로 얼어붙었다
잘리다 만 모가지이냐
꺽인 허리여
잿간 구석 던져진
몽당비만도 못하다
한 시절 눈부시던 선홍의 볏이
피흘리며 흙바닥을 쓸고 있구나
파장 뒤 굴러다니는
헌 신문지만도 못하다 저 목덜미,
저 목덜미 적셔
겨울비 하 염없고
아무도 내다보지 않는다
맨드라미
~~~~~~~~~~~~~~~~~~~~~~~~
17) 늦가을/ 김사인
그 여자 고달픈 사랑이 아파 나는 우네
불혹을 넘어
손마디는 굵어지고
근심에 지쳐 얼굴도 무너졌네
사랑은
늦가을 스산한 어스름으로
밤나무 밑에 숨어 기다리는 것
술취한 무리에 섞여 언제나
사내는 비틀비틀 지나가는 것
젖어드는 오한 다잡아 안고
그 걸음 저만치 좇아 주춤주춤
흰고무신 옮겨보는 것
적막천지
한밤중에 깨어 앉아
그 여자 머리를 감네
올 사람도 갈 사람도 없는 흐린 불 아래
제 손만 가만가만 만져보네
~~~~~~~~~~~~~~~~~~~~~~~~~
18) 코스모스/ 김사인
누구도 핍박해본 적 없는 자의
빈 호주머니여
언제나 우리는 고향에 돌아가
그간의 일들을
울며 아버님께 여쭐 것인가
~~~~~~~~~~~~~~~~~~~~~
19) 영월에서/ 김사인
무엇을 기다리나 산들은
해마다 목을 빼고 나무들은
우두커니 물들은 모래들은
밤마다 어디로 가서 무너지나 한번씩
어둠 속 가로질러
온통 가슴이 주저앉나 무엇을 기다려
우수수 벌판을 헤매다
아침이면 돌아오나 바람으로 우수수
기다림이 아니고야
어떻게 있을 리가
기다림이 아니고야
살이 마르고 가죽 쪼그라들 리가
기다림이 아니고야
어떻게 죽을 수나 있을까
한데 무엇을?
이렇게 있다는 것이
기다림인 줄을 까맣게 잊고
모든 길 끊어진 영월에서
나는 대체 누구의 잠을 대신 자는가
누구의 밥을 대신 먹는가
누구의 걸음을 대신 걷는가
~~~~~~~~~~~~~~~~~~~~~~~
20) 유필(遺筆)/ 김사인
남겨진 글씨들이 고아처럼 쓸쓸하다
못 박힌 중지마디로 또박또박 이름을 적어놓고
어느 우주로 스스로를 흩었단 말인가
겨울밤
우물 깊이 떨어지는 두레박소리
~~~~~~~~~~~~~~~~~~~~~~~
21) 허공장경(虛空藏經 )/김사인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학교를 중퇴한 뒤
권투선수가 되고 싶었으나
공사판 막일꾼이 되었다
결혼을 하자 더욱 어려워
고향으로 내려가 농사를 지었다
떨어 먹고 도로 서울로 와
다시 공사판
급성신부전이라 했다
삼 남매 장학적금을 해약하고
두 달 밀린 외상 쌀값 뒤로
무허가 철거장이 날아왔다
산으로 가 목을 맸다
내려앉을 땅은 없어
재 한 줌으로 다시 허공에 뿌려졌다
나이 마흔둘
하늘이 휑뎅그렁 비었구나
뒤축 무너진 헌 구두나 끌고
나는 또 쓸데없이
이 집 저 집 기웃거리며 늙어가겠지
~~~~~~~~~~~~~~~~~~~~~~~~~~
26) 여름날 /김사인
풀들이 시드렁거드렁 자랍니다
제 오래비 시누 올케에다
시어미 당숙 조카 생질 두루 어우러져
여름 한낮 한가합니다
봉숭아 채송화 분꽃에 양아욱
산나리 고추가 핍니다
언니 아우 함께 핍니다
암탉은 고질고질한
병아리 두엇 데리고
동네 한 바퀴 의젓합니다
나도 삐약거리는 내 새끼 하나하고
그 속에 앉아
어쩌다 비 개인 여름 한나절
시드렁거드렁 그것들 봅니다
긴 듯도 해서 긴 듯도 해서 눈이 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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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개나리/ 김사인
한번은 보았던 듯도 해라
황홀하게 자지라드는
저 현기증과 아우성 소리
내 목숨 샛노란 병아리떼 되어 순결한 입술로 짹짹거릴 때
그때쯤 한번은
우리 만났던 듯도 해라
몇 날 몇 밤을 그대
눈 흡떠 기다렸을 것이나
어쩔거나
그리운 얼굴 보이지 않으니
4월 하늘
현기증 나는 비수로다
그대 아뜩한 절망의 유혹을 이기고
내가 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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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필사적으로/ 김사인
비 오고, 술은 오르고, 속은 메슥거려 식은땀 배고, 비는 오는데,
어디 마른 땅 한 귀퉁이 있다면 이 육신 벗어던졌으면 좋겠는데,
어쩌자고 눈앞은 자꾸 아련해지나, 양손에는 우산과 가방 하나씩
쥐고, 자꾸 까부라지려 하네. 비는 오고, 오는데, 몸뚱이는 젖은
창호지처럼 척척 늘어지는데, 기억에도 희미한 옛 벗들 그림자,
환등(幻燈)과도 같이, 가슴에 예리한 칼금 긋고 지나가네. 한 손에
우산, 또 한 손엔 내용불상(內容不祥)의 가방을 쥐고 필사적으로,
달리 마땅한 폼이 없으므로 다만 필사적으로, 신발에 물은 스미고,
신호는 영영 안 바뀌는데.
- 시집 '가만히 좋아하는'(2006.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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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 어린 처녀의 외간 남자가 되어/ 김사인
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 어린 그 처자
발그라니 언 손에 얹혀
나 인생 탕진해버리고 말겠네
오갈 데 없는 그 처자
혼자 잉잉 울 뿐 도망도 못 가지
그 처자 볕에 그을려 행색 초라하지만
가슴과 허벅지는 소젖보다 희리
그 몸에 엎으러져 개개 풀린 늦잠을 자고
더부룩한 수염발로 눈꼽을 떼며
날만 새면 나 주막 골방 노름판으로 쫓아가겠네
남는 잔이나 기웃거리다
중늙은 주모에게 실없는 농도 붙여보다가
취하면 뒷전에 고꾸라져 또 하루를 보내고
"나 갈라네" 아무도 안 듣는 인사 허공에 던지며
허청허청 별빛 지고 돌아오겠네
그렇게 한두 십 년 놓아 보내고
맥없이 그 처자 몸에 아니나 서넛 슬어놓겠네
슬어놓고 나 무능하겠네
젊은 그 여자
혼자 잉잉거릴 뿐 갈 곳도 없지
아이들은 오소리 새끼처럼 천하게 자라고
굴속같이 어두운 토방에 팔 괴고 누워
나 부연 들창 틈서리 푸설거리는 마른 눈이나 내다보겠네
쓴 담배나 뻑뻑 빨면서 또 한 세월 보내겠네
그 여자 허리 굵어지고 울음조차 잦아들고
눈에는 파랗게 불이 올 때쯤
나 덜컥 몹쓸 병 들어 시렁 밑에 자리 보겠네
말리는 술도 숨겨놓고 질기게 마시겠네
몇 해고 애를 먹어 여자 머리 반쯤 셀 때
마침내 나 먼저 숨을 놓으면
그 여자 이제는 울지도 웃지도 못하리
나 피우던 쓴 담배 따라 피우며
못 마시던 술도 배우리 욕도 배우리
이만하면 제법 속절없는 사랑 하나 안 되겠는가
말이 되는지는 모르겠으나.
(문학동네 2002년 겨울호)
~~~~~~~~~~~~~~~~~~~~~~
30) 기다림/ 김사인
-여자의 말
내 뜰에 내리던 비가
대문을 넘어 사람들 오가는 행길 가에서
그대를 기다리며 내려요
그대가 돌아오면 갈아입힐 옷가지 몇 품에 안고
손 부비며 손 부비며 기다려요
저번 날은 강 복판 흐름 위에 앉아 흘러가시더니
날 못보고 혼자 강물 되어 흐르시더니
이제쯤 바다에 닿으셨나요.
지쳐 돌아올 그대를 위해
나는 하루에 열 번도 더 머리를 빗어요
열 번도 더 마당을 쓸어요
내 나무들은 밤마다 강가로 걸어나가
푸르르 푸르르 울다 돌아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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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풍경의 깊이 / 김사인
바람 불고
키 낮은 풀들 파르르 떠는데
눈여겨보는 이 아무도 없다
그 가녀린 것들의 생의 한순간,
의 외로운 떨림들로 해서
우주의 저녁 한때가 비로소 저물어간다,
그 떨림의 이쪽에서 저쪽 사이, 그 순간의 처음과 끝 사이에는 무한히 늙은 옛날의 고요가, 아니면 아직 오지 않은 어느 시간에 속할 어린 고요가
보일 듯 말 듯 옅게 묻어 있는 것이며,
그 나른한 고요의 봄볕 속에서 나는
백 년이나 이백 년쯤
아니라면 석 달 열흘쯤이라도 곤히 잠들고 싶은 것이다.
그러면 석 달이며 열흘이며 하는 이름만큼의 내 무한 곁으로 나비나 벌이나 별로 고울 것 없는 버러지들이 무심히 스쳐가기도 할 것인데,
그 적에 나는 꿈결엔 듯
그 작은 목숨들의 더듬이나 날개나 앳된 다리에 실려온 낯익은 냄새가
그 어느 생에선가 한결 깊어진 그대의 눈빛인 걸 알아보게 되리라 생각한다.
~~~~~~~~~~~~~~~~~~~~~~~~~~
32) 딸년을 안고/ 김사인
한 살배기 딸년을 꼭 안아보면
엄숙해진다 술이 번쩍 깬다
그 가벼운 몸이 우주의 무게인듯
신기하고 슬퍼진다
이 목숨 하나 건지자고
하늘이 날 세상에 냈나 싶다
사지육신 주시고 밥도 벌게 하는가 싶다
사람의 애비된 자 어느 누구 안 그러리
그러나 소문에는
단추 하나로 이 목숨들 녹게 돼 있다고도 하고
미친 세월 끝없을 거라고도 하고
햐여, 한가지 부탁한다 칼 쥔 자들아
오늘 하루 일찍 들어가
입을 반쯤 벌리고 자는 너희 새끼들의
그 바알간 귓밥 한번 들여다 보아라
귀 뒤로 어리는 황홀한 실핏줄들
한번만 들여다 보아라
부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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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시를 쓰며 1 / 김사인
아저씨
쥐새끼처럼 치사하게 살고 싶어요
시 같은 것이야 뉘집 개아들이 물어가도 상관 안하고
살고 싶네요 불온하지 않게
양처럼 쥐처럼 온순하고 고상하게
고급 향수같은 불란서 영화같은
곱고 아련한 시 쓰고 싶어요 천진무구하고 싶어요
환장하겠어요
낙골 판자촌 날라리 공동변소에 똥 떨아지는 소리 같은 것은
이 세상에 없는 것으로 치고 싶어요
싹 없애 주었으면 좋겠어요
그렇게만 살다가
쥐새끼처럼 밟혀 죽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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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사랑은 어디서 우는가/ 김사인
재개발도 안 되고 철거만 가능하다는 곳
삶이 문턱에서 허덕거린다
햇살은 아무나, 것이나 붙들어 들어갔다 뺏다 하고
선과 악이 날마다 쌈박질하며
그 속으로 더욱 궁둥이를 들이밀고
사람들은 달아나려 매번 자기를 죽이면서도 눈을 뜨는
내 바닥 불륜의 씨앗이 작은 방죽처럼 둥그렇게 모여 있는
닭장촌, 그곳
정착지도 모르고 날아들었다가 가로등 불빛에
타 죽어가는 날벌레 명줄 같은 금기의 자유
오누이가 사랑을 하고 사촌오빠가 누이를 범해 애를 낳는
온몸 짓푸른 얼룩을 감추기 위해 더워도 옷을 벗지 않는
엄마가 얇은 시멘트 벽 옆집 남자랑 도망가 없어도
어른이 되어가는 그곳
수많은 세대들이 서너 개의 공동화장실을 들락거려도
그곳 문밖에 버려진 작은 화초들, 으깨진 보도블록에서 솟아나는 풀들
바닥 틈 속에서 살랑살랑 흔들리고 있다
간혹 보일 듯 말 듯한 꽃도 토해 놓고
나 도망가다 멈춰선 그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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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겨울 군하리/ 김사인
쓰다버린 집들 사이로
잿빛 도로가 나있다
쓰다 버린 빗자루같이
나무들은 노변에 꽂혀있다
쓰다 버린 담벼락 밑에는
순창고추장 벌건 통과 검정 비닐과 스티로폼 쪼가리가
흙에 반쯤 덮여있다
담벼락 끝에서 쓰다버린 쪽문을 밀고
개털잠바 노인이 웅크리고 나타난다
몹시 느린 걸음으로 어디론가 간다
쓰다 버린 개가 한 마리 우줄주줄 따라간다
이발소 자리 옆 정육점 문이 잠시 열리고
누군가 물을 홱 길에 뿌리고 다시 닫는다
먼지 보얀 슈퍼 천막 문이 들썩하더니
훈련복 차림의 앳된 군인 하나가
발갛게 웃으며
신라면 다섯 개들이를 안고 네거리를 가로질러 달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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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노숙/ 김사인
헌 신문지 같은 옷가지들 벗기고
눅눅한 요위에 너를 날것으로 뉘고 내려다본다
생기 잃고 옹이 진 손과 발이며
가는 팔다리 갈비뼈 자리들이 지쳐보이는구나
미안하다
너를 부려 먹이를 얻고
여자를 안아 집을 이루었으나
남은 것은 진땀과 악몽의 길뿐이다
또다시 낯선 땅 후미진 구석에
순한 너를 뉘었으니
어찌하랴
좋던 날도 아주 없지는 않았다만
네 노고의 헐한 삯마저 치를 길 아득하다
차라리 이대로 너를 재워둔 채
가만히 떠날까도 싶어 네게 묻는다
어떤가 몸이여
2005년 [현대문학상] 수상작
~~~~~~~~~~~~~~~~~~~~~
37) 밥/ 김사인
술 번쩍 깨리
두고 온 이들 떠올라 목은 메이리
밥 한 그릇의 묵묵한 의관정제!
그 곁에서
흩어지는 몸 겨우 추슬러 봄
풀린 눈 다시 힘주어 뜨고 무릎 꿇어 봄
북받쳐오름이여
오오 나는 죄 많은 사람이로다
저 흰밥 고봉 너머 고향의 강물 넘실대고
낫질하던 팔뚝들
적적하게 돌아눕는 노모의 좁은 어깨
대체 나는 어디에 무엇으로 엎질러져 있단 말인가
돌아앉아 담배만 빨고 있는 굽은 등
저 밥 한 그릇
~~~~~~~~~~~~~~~~~~~~~~~~~~
38) 고향의 누님/김사인
한 주먹 재처럼 사그라져
먼데 보고 있으면
누님, 무엇이 보이는가요
아무도 없는데요
달려나가 사방으로 소리쳐봐도
사금파리 끝에 하얗게 까무라치는 늦가을 햇살뿐
주인 잃은 지게만 마당 끝에 모로 자빠졌는데요
아아 시렁에 얹힌 메주덩어리처럼
올망졸망 아이들은 천하게 자라
삐져나온 종아리 맨살이 차라리 눈부신데요
현기증처럼 세상 노랗게 흔들리고
흔들리는 세상을 손톱이 자빠지게 할퀴어 잡고 버텨와
한소리 비명으로 마루 끝에 주저앉은
누님
늦가을 스산한 해거름이네요
죽은 사람도 산 사람도 떠나 소식 없고
부뚜막엔 엎어진 빈 밥주발
헐어진 토담 위로는
오갈든 가난의 호박 넌출만 말라붙어 있는데요
삽짝 너머 저 빈들 끝으로
누님
무엇이 참말 오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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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친구에게 / 김사인
뭐 굳이 칼자루 들고 나서자는게 아니잖어 세상 일이 식칼로 무 자르듯 그렇게 썸뻑 진저리나게 속시원하게 끝장나는 거 아니 잖어 꼭 베어야 베는 건가 찔러야 찌르는 건가 우리가 찌르지 않아도 지가 와서 부른 배때기 이 날끝에 디밀걸 등을 쳐다보면 간도 빠지는 거지 간 빼자고 등을 쳐서 될까 암, 찌르자고 찌르지는 말아야지 조급해 할 것 없이 슬근슬근 우리는 그저 슬근슬근 톱질할 뿐이야 너무 해찰은 부리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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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80년대 복판에서 이런 중국 만만디 (慢慢的)가 어디 있을 법한가. 도무지 서울대 국문학과 따위 다닌 것 같지 않게 저 속리산 산골 세수한 적 없는 노루 같은 사람의 먹물 흔적 작파한 막걸리집 입담이다.
불의와 모순, 그리고 시대의 악이란 성급한 변혁논리로 대응해서는 안된다는 것, 세상 일에는 익어가는 시간이 있어야 한다는 것, 공격보다 자멸을 위한 긴 전략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혼자 남은 술집의 독백으로 풀어낸다.
근대시라기보다 임꺽정 시절의 소리인가. 나는 이 시를 판소리 창으로 불러봤다.
. 고은〈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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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사인 시인님 프로필
서울대 국문과 졸업,1982 시와 경제에 시로
" 한국문학의 현단계 1" 에 평론에 발표하며 등단했고
자유실천문인협의회,민족문학작가회의 등에서
오랫동안 활동하셨습니다
동덕여대 문창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신동엽창작기금>,< 현대문학상> 등을 수생했고
2006년도에 <대산문학상>을 받았습니다
시집으로 "밤에 쓰는 편지" (1987,청사 ,1999, 문학동네에서 재발간)와
" 가만히 좋아하는 (2006년 창비) 등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