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에 세워져 있는 광개토대왕비 모형. 황순원 소설 <학>의 시간적 배경 6.25는 임진왜란과 더불어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2대 국제전쟁이었다.
1915년 3월 26일 〈소나기〉, 〈학〉, 〈독 짓는 늙은이〉, 〈별〉, 〈카인의 후예〉, 〈나무들 비탈에 서다〉 등의 소설가 황순원이 태어났다. 간결하고 세련된 문체, 휴머니즘 정신, 한국인의 전통적 삶에 대한 애정 등을 즐겨 소설 제재로 삼은 그는 “한국 현대 소설의 가장 높은 봉우리에 위치한다”는 평가를 얻고 있다.(네이버 《한국현대문학대사전》 〈황순원〉)
중 ‧ 고등학교 국정 국어 교과서에 실려 거의 대부분 국민들에게 읽힌 〈소나기〉와 〈학〉은 ‘국민 소설’이라 할 만하다. 제목은 너무나 평화롭지만 〈학〉의 시간적 배경은 살벌하기 짝이 없는 6 ‧ 25전쟁 시기이다. 이야기는 38도선 접경 지역을 공간적 배경의 첫머리로 해서 시작된다.
남한군이 수복한 이 동네에 성삼이 들어선다. 그에게는 고향 마을이다. 성삼의 어린 시절 친구 덕재가 포승줄에 묶인 채 끌려온다. 북한군 점령 시기에 덕재는 농민동맹 부위원장을 역임했다. 그러나 사람을 죽인 적은 없다.
북한군에 부역했던 사람들은 모두 도망을 갔는데 덕재는 그냥 남아 있다가 체포되었다. 덕재는 늙은 아버지와 만삭의 아내를 남겨둔 채 떠날 수가 없었다. 성삼은 덕재를 호송하는 임무를 자원해서 맡는다.
길을 가는 중 성삼과 덕재는 학들이 논밭에 하얗게 앉아 있는 광경을 본다. 둘은 어릴 때 학을 잡아서 데리고 놀다가 풀어준 적이 있다. 서울 사람들이 학사냥을 왔기 때문이다. 문득 성삼이 덕재에게 학사냥을 하자면서 포승을 풀어준다. 덕재는 처음에는 의심하지만 이내 성삼의 속마음을 깨닫고 도망간다.
〈학〉은 공공연한 죽임이 난무하는 극단적 비인간화의 현장에도 애틋한 삶이 피어나는 휴머니즘을 보여준다. 그와 반대로 〈소나기〉는 평온한 농촌마을에서 애처로이 이승을 하직하는 소녀의 죽음을 이야기한다.
53년이나 흘러 아득한 1970년 중학교 교실에서 배운 〈소나기〉를 떠올릴 때마다 대구에서 발생한 ‘개구리 소년’들의 죽음이 생각난다. 1991년 3월 26일에 일어난 사건이다. 이날은 30년 만에 부활한 지방차지 선거일이었다.
휴교가 되자, 초등학교 1∼6학년 다섯 명이 개구리를 잡으러(실제로는 '도롱뇽 알을 주우러') 마을 뒷산에 갔다. 그리고 여섯 달 뒤 다섯 어린이는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아직도 사건은 미궁에 빠져 있다. 그 탓에 심지어는 “안 잡는 걸까, 못 잡는 걸까”라는 유언비어까지 떠돈다. 아이들은 어디로 갔을까? 황순원 소설 〈별〉의 어머니와 누이처럼 별이 되었을까.
2020년 9월 25일에 블로그에
<개구리 소년>이라는 제목으로 올렸던 글을 다시 읽어본다.
중국 고대 요 임금이 길을 가던 중 한 노인의 노래 격양가擊壤歌를 들었다.
“해 뜨면 일하고日出而作
해 지면 쉬고日入而息,
우물 파서 마시고鑿井而飮
밭 갈아 먹으니耕田而食,
임금의 덕이 내게 무슨 소용이 있으랴帝力于我何有哉!”
임금이 있는지 없는지 백성들이 신경을 쓰지 않는 정치가 최고의 정치라는 뜻이다. 우리나라는 사람들이 모이기만 하면 정치 이야기를 하고, SNS도 연일 정치 이야기로 북적댄다. ‘개구리 소년 사건’ 같은 일이 벌어지고, 그 진상을 밝혀내지 못하는 것도 그 원인의 하나일 것이다.
2002년 9월 26일 대구광역시 달서구 성산고등학교 신축 공사장 뒤편 500m 지점에서 어린이 다섯 명의 유골이 발견됐다. 이곳은 50사단 사격장 부지였다. 아이들이 집단으로 타살된 때는 1991년 3월 26일 혹은 그 직후였는데, 50사단 사격장은 1994년까지 그곳에 존재했다. 그래서 아이들이 총에 맞아 죽은 것이 아니냐는 추측이 나돌기도 했다.
성서초등학교 6학년 우철원(13)과 같은 마을 동생들인 조호연(12), 김영규(11), 박찬인(10), 김종식(9) 다섯 명이 사라진 때는 1991년 3월 26일이었다. 목격자들에 따르면 아이들은 도롱뇽 알을 주우러 간다면서 마을 뒷산인 와룡산에 올랐는데, 그 이후 종적이 묘연해졌다. 경찰은 연 인원 35만 명이나 되는 수사 인력을 동원했지만 유골이 발견될 때까지 아이들의 행방을 알아내지 못했다.
경찰은 아이들이 납치된 것으로 보고 수사를 시작했다. 당시 서울시 교육청이 배포한 전단에는 <대구 어린이들을 찾아줍시다>라는 제목 아래
"살펴볼 점 :
대구 사투리를 쓰는 소년 /
껌팔이, 구두닦이, 음식점 심부름, 소매치기 /
연락할 곳 739-9700, 736-1908-9, 730-7966"
과
다섯 어린의 사진·이름·나이가 실려 있다. 이는 경찰의 초기 판단이 일반인의 상상력 수준에 불과할 만큼 무성의하고 무능했다는 사실을 입증해준다.
처음부터 너무나 엉성했던 경찰 수사
1992년 8월 20일 경기도 안양 지방 노동사무소에 40대 남성의 전화가 걸려 왔다. 경북 칠곡군 한센병 환자 거주촌에 아이들이 암매장되어 있다는 제보였다. 경찰은 강제 수색을 실시했고, 신문과 방송은 '칠곡 나환자촌 건물 지하실에 실종 성서 국교생 5명 암매장'이라는 제목을 달아 보도했다. 황당한 보도와 수색에 한센촌 사람들은 분노했지만 그 피해를 회복할 길은 전혀 없었다.
1992년 5월에는 한 주간지가 '전문가 기고' 형식을 빌어 아이들이 북한으로 납치되었다고 보도했다. "수령님을 흠모한 나머지 영일만에서 공작선을 타고 자진 월북했다"고 말하게 하려고 아이들을 유괴했다는 논지였다.
1996년 1월 12일에는 실종자 중 한 명인 김종식 어린이의 아버지가 아이들을 죽여 자기집에 암매장했다는 어떤 교수의 주장에 따라 경찰이 굴삭기로 그 집 화장실과 부엌 등을 파헤치는 일이 벌어졌다. 김종석 군의 아버지는 그후 간암에 걸려 2001년 세상을 떠났는데 "이승에서 다하지 못한 아버지 노릇을 저승에서 종식이를 만나 하겠다"는 유언을 남겼다.
"북한 납치, 한센촌 매장" 유언비어에 춤춘 공권력
이윽고 유골이 발견되자 경찰은 저체온증으로 아이들이 죽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경북대 법의학팀은 타살이 분명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이 사건은 2006년 공소시효가 만료되었고, 국회는 공소시효를 연장해달라는 유족들의 요청에 부응하지 않았으며, 경찰은 그 이후에도 범인 색출에 아무런 성과를 내지 못했다.
해마다 3월 26일이 되면 사건 발생지 아래인 대구 달서구 세방골에서는 추모 행사가 열린다. 하지만 부모들은 이미 70-80 노인이 되었고, 김종식 어린이의 아버지처럼 세상을 떠난 유족도 있다. 도대체 이처럼 어이없는 공권력을 어느 다른 나라에서 또 볼 수 있을까?
정부도 언론도 말 그대로 수준 이하였다. 개구리 소년 사건은 우리나라의 형편없는 국격을 있는 그대로 증명해주었다. 이제라도 개구리 소년 사건은 재조사되어야 한다. 공권력의 권위가 달려 있다. 어디 그뿐인가. '나무를 베는 데는 한 시간, 기르는 데는 100년'이라고 했듯이, 나라의 공신력도 마찬가지다.
첫댓글 어처구니 없는 일이었네요.그래서 성서란 곳을 이유없이 무서워했는데 성서에서 가까운 다사에 터를 잡고 살줄은 몰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