쏜 살 같은 세월이다. 푸르름과 더불어 꽃향기 듬뿍 안고 다가왔던 청신한 5월이 뒷모습 보이며 떠나는 와중, 떠나는 5월이 못내 아쉬워 ,그리고 떠나는 5월을 내심 뜻 깊게 마무리 하고저 대한민국에서 땅끝 마을로 널리 알려진 경남 남해의 다랭이마을을 찾았고 그 곳을 시점으로 바래길 트래킹을 시작하기로 마음먹었다.
"다랑이" 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 산골짜기의 비탈진 곳 따위에 있는 계단식의 좁고 긴 논배미 "라고 설명되어 있다. 다랭이 마을은 손바닥만 한 논이 언덕 위에서 부터 마을을 둘러싸고 바다까지 이어졌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45도 경사 비탈에 108 개 층층 계단 ,크고 작은 680 여개의 논이 펼쳐졌다. 소개에 따르면 옛날 한 농부가 일을 하다가 논을 세여보니 논 한배미가 모자라 아무리 찾아도 없기에 포기하고 집에 가려고 삿갓을 들었더니 그 밑에 한 배미가 숨어 있었다는 일화도 있다. 그만큼 삿갓을 씌우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은 논임을 비유한 것이다. 올망졸망 손바닥만 한 작은 논이었지만 그 작은 다랭이 논밭들은 그 곳 마을 사람들이 수백 년 동안 대를 이어오며 눈물과 땀으로 악착같이 일궈온 생명줄이었다. 지금은 다랭이논밭에 벼 보다는 마늘을 많이 재배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리고 "바래길"에서 바래는 남해 사투리로 바다에 조개를 캐거나 해조류를 채취하러 가는 것을 "바래간다." 고 한 데서 유래된 것인데 마을 사람들이 생계를 위해 갯벌로 가던 길을 이어 만든 코스이며 남해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로 자리매김했다.
본격적인 바래길 트래킹을 시작하기 앞서 다랭이마을의 지리적 위치를 빙 둘러봤다. 마을을 중심으로 마치 등고선을 그려놓은 듯 촘촘히 둘러싸고 있는 다랭이 논뙈기들은 흡사 예술품을 방불케 하였고 마을 뒤로 병풍처럼 빙 둘러 선 바위산들은 마치 호위무사인 듯 싶었다. 그리고 마을 앞으로 끝없이 펼쳐진 망망대해 남해의 장쾌한 모습! 와 ! 감탄이 절로 터져나왔다.오묘하게 조화를 이룬 한 폭의 아름다운 수채화라면 이보다 더 수려할까! 무릉도원이 따로 없다는 생각이 소리없이 가슴에 똬리를 틀었다. 그리고 저 한 폭의 그림이 만약 장엄한 한 부의 교향악이라 한다면 저 촘촘한 다랭이논은 심금을 울리고 귀맛을 돋구는 화음이 되지 않을까 란 엉뚱한 생각도 들었다.
아름다운 풍경에 흠뻑 젖어 부풀어 오른 가슴을 애써 눅잦추며 바래길 트래킹을 곧장 시작했다 . 헌데 시선에 안겨온 난생 처음 목격하는 이상한 바위 앞에서 다시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가천암수바위" 로 불리는 대형 성기바위! 높이 5.8m 둘레 1.5m에 달하는 감탄할 수 밖에 없는 거대한 성기바위 앞에서 자연은 그야말로 인간의 상상력으로는 도무지 이해하고 해석할 수 없을 정도로 기이하고 신비한 존재임을 자인할 수 밖에 없었다. 성기바위를 뒤로하고 발걸음을 옮기노라니 이번엔 농가에서 수확하는 마늘냄새가,숲에서 뿜어져 오는 수목의 싱그러움이,바다에서 풍겨오는 시원하면서도 비릿한 바다냄새가 마치 서로 뒤질세라 자랑이라도 하듯 코를 간지럽히며 존재감을 위시하였다. 게다가 산새들의 합창마저 가세하다보니 기분도 발걸음도 유쾌하고 경쾌하였다.
바래길이 워낙 거의 해안선을 따라 펼쳐지다보니 트래킹을 하다가 지치면 시원한 바닷물에 발을 담그고 바위에 걸터앉아 끝없이 펼쳐진 망망대해를 바라보며 나 홀로만의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여유까지 부릴 수 있어서 너무 흐뭇했다. , 솔직히 그 순간보다 더 평온하고 시원하고 호젓한 느낌을 가져본적 없다. 아주 잠시였지만 바위에 걸터앉아 밀려가고 밀려오는 파도를 바라보며 새삼스레 인생살이의 단순한 이치도 깨우쳤다. 소리없이 다가왔다 말없이 세월의 뒷안길로 사라져가는 5월처럼 영원한 것은 워낙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영원한 기쁨도 ,영원한 슬픔도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 ,밀물과 썰물이 교차하듯 기쁨과 슬픔도 그러하다는 것 ,너무 기쁨의 포로도,너무 슬픔의 노예도 되지 말자는 것...
함께 있되 홀로 존재하는 저 바위들 처럼 의연한 모습으로 묵언으로 메시지를 던지고 노래부르는 실존자로 거듭나야함을 어슴프레 느꼈다. 바다의 냄새가 다르고 숲이 풍기는 내음이 다르듯 바다와의 교감을 뒤로하고 다시 숲길을 걷노라니 숲은 숲대로 또 다른 생의 이치를 살며시 심어주었다. 다름아닌 길섶 구석진 곳에 수줍은 듯 다소곳이 얼굴을 내밀고 있는 뜻밖의 달맞이꽃을 발견하고 감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노르스름한 빛깔의 달맞이꽃이 그처럼 이쁠 수가 있을까 !... 모든 꽃이 다 그러하겠지만 달맞이꽃은 그처럼 이쁘면서도 자기가 아름답다고 결코 한 마디도 내 비치지지 않는다 . 갸륵하고 순수한 그 모습 바라보며 어쩌면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향기를 선사하고 즐거움을 주며 사랑의 화신으로 자리매김 하는 것이 꽃의 속성이 아닐까 조용히 생각해보았다 . 장미가 코스모스를 시샘하지 않고 진달래가 개나리를 넘겨보지 않듯 오롯이 자기의 모습으로 조용히 살아가기 때문에 이 세상의 모든 꽃들이 그처럼 아름다운 것 또한 아닐지!...
다랭이마을에서 종점 미국마을까지 장장10km 남짓한 다래길,때로는 시원한 해풍에 온 몸을 헹구고, 때로는 우거진 숲속에서
산새들의 지저귐에 귀 기울이며
,때로는 구슬땀 흘리시며 마늘 수확에 여념이 없는 농부들의 모습 바라보며 그렇게 6시간 남짓이 드래킹하면서 자연의 변화를 살피며 꽃이 피고 지는 것을 지켜보는 일은 곧 마음을 비우는 일이며 자연을 가까이하며 걷는 것은 자신을 세계로 열어놓는 것임을,그리고 발로 , 다리로, 몸으로 걸으면서 인간은 자신의 실존에 대한 행복한 감정을 되찾을 수 있음을 고스란히 느꼈다.
자연을 사랑하고 자연을 가까이하며 자연에 젖어드는 한 하늘,바다,산,구름,별,강물...이 모든 자연의 풍경들은 어김없이 우리의 숨 가쁜 사유의 심박수를 낮춰 줄것이며 자연과 함께하는 시간이 많을 수록 우리는 더 너그럽고 더 넉넉하며 더 생기 넘치는 존재로 거듭나리라 굳게굳게 믿었다.
남해 바래길 드래킹은 자연을 사랑하고 자연을 아끼며 자연과 함께 하려는 변함없는 나의 마음 에 또 다른 한 줄기의 푸른 빛을 심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