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와 덕인 스님
이은봉
동네사람들은 우리 집을 청리당(靑梨堂)이라고 불렀다. 뒤곁에 제법 큰 오야나무가 있었기 때문이다. 할아버지는 우리 집 당호가 청리당이라고 불리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푸른 오야나무 집, 청리당! 청리당은 안채와 바깥채로 나뉘어 있는 있었는데, 바깥채의 사랑방은 늘 열려 있었다. 청리당의 사랑방은 우리 동네 막은골의 할아버지들이 모여 노는 작은 놀이터였다.
나는 그때 할아버지들이 사랑방에 주고받던 얘기들도 잘 기억하고 있다. 물론 할아버지들끼리 주고받는 얘기를 어린 내가 살짝 엿들은 것이었다. 그 무렵 할아버지는 어린 나를 데리고 늘 이런저런 얘기하기를 좋아했다. 지금 생각하면 내게 무언가 교훈이 될 만한 것을 전해주고 싶었던 듯했다.
그때 할아버지들에게 들은 얘기는 매우 다양했다. 얘기들 중에는 묘 자리에 관한 것도 있었고, 포졸에 관한 것도 있었고, 효자효부에 관한 것도 있었다. 물론 이 마을 저 마을의 전설도 들어 있었다. 더러는 전국의 유명한 스님들에 관한 얘기도 있었다. 가끔은 당골의 무명한 스님에 관한 얘기도 있었다.
우리 할아버지인 건옥 씨는 걱정이 많은 분이었다. 무엇보다 철이 없는 자신의 외아들, 곧 우리 아버지에 대한 걱정이 컸다. 마작을 좋아하는 아버지는 겨울만 되면 집에 들어오지 않는 날이 많았다. 혹간은 장터 삼거리다방의 미스 김과 함께 밤을 지내기도 했다. 그런 날은 대체로 온종일 함박눈이 내렸다. 그런 날은 아버지가 유성기판을 옆구리에 끼고 나간 날이기도 했다.
할아버지의 걱정은 아버지에게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할아버지를 걱정하게 하는 사람 중에는 10촌쯤 된다는 덕인스님도 들어 있었다. 할아버지를 늘 노심초사하게 하는 덕인스님은 구돌기 아저씨의 양아들이었다.
구돌기 아저씨는 우리집안의 전설이었다. 만주에 가서 생선도가를 해 큰돈을 벌었다고 하는 분이 그였다. 말년에 그는 만주의 사업을 접고 금강의 나루터인 나리재에 큰 집을 짓고 살았다. 작은 부인을 두고서도 자식을 얻지 못했는데, 그는 마음을 졸였다. 한때는 근동에서 가장 부자로 알려져 있던 분이었다.
물론 이들 얘기는 내가 아주 어렸을 때 할아버지한테 들은 것이다. 그러다 보니 지금은 할아버지와 구돌기 아저씨, 그리고 덕인스님의 촌수를 잘 기억하지 못한다. 정확한 얘기를 하지 못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구돌기 할아버지는 덕인스님을 늘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양아들이라고 하나 둔 것이 중노릇을 한다고 절에 들어가 살았기 때문이다. 덕인스님은 양아버지인 구돌기 아저씨한테 물려받은 재산으로 당골에 절집부터 한 채 마련했다. 절집의 이름은 경신사(敬愼寺)라고 불렸다. 내게는 경신사(敬神寺)로 읽혀 늘 무당의 당집을 연상시켰다. 경신사는 크고 웅장하지는 않았지만 대웅전도 있었고 산신각 있었다. 절집을 마련하는데 털어넣다 보니 덕인스님한테는 남은 재산이 별로 없는 듯했다.
할아버지는 3대 독신이었다. 삼촌이나 사촌 등 가까운 가족이 없던 할아버지는 먼 친인척에게도 정성스럽게 대했다. 구돌기 아저씨는 특히 극진히 모셨다. 구돌기 아저씨도 할아버지를 믿고 의지해 모든 대소사를 의논하고는 했다. 물론 할아버지와 구돌기 아저씨는 나이 차가 많이 났다. 구돌기 아저씨가 할아버지보다 30살은 많은 듯했다.
구돌기 아저씨의 큰 부인이 죽고 장례를 치른 뒤였다. 그 자신도 이승을 하직하기 얼마 전이었다. 이제 식솔이라고는 늙어빠진 저 자신과 작은 부인밖에 남아 있지 않을 무렵이었다. 구돌기 아저씨가 할아버지를 자신의 집으로 불렀다.
“그동안 자네가 늘 내 형편을 잘 헤아려주어 고맙네. 이제는 자네가 나와 소잠댁을 맡아주어야겠네. 나는 곧 저 세상으로 갈 사람이야. 하지만 아직 젊은 소잡댁은 그렇지를 않네. 당장 내 집으로 들어와 살게. 자네 살림은 건진이한테 주고 말이네. 경신사의 덕인스님한테 주라는 말이네. 내가 죽으면 우리 집 살림을 살며 자네가 소잠댁을 좀 맡아줘. 자네도 잘 알다시피 소잠댁은 아주 착한 사람이야. 자네가 좀 모셔도 조금도 불편하지 않을 사람이야. 남은 살림이 많지는 않네. 산도 좀 있고, 밭도 좀 있기는 해. 그것들과 이 집을 보태 자네가 소잠댁을 좀 봉양해. 건진이는 중이잖아. 덕인스님!”
물론 할아버지는 그때 구돌기 아저씨의 말씀을 거역하지 않았다. 구돌기 할아버지는 정말로 오래지 않아 이승을 떴다. ㄱ런 뒤 할아버지는 당신의 조모와 함께 소잠댁을 10년이 넘게 잘 모시고 살았다. 생전에 할아버지는 이 두 분의 제사를 직접 지내 드리기까지 했다.
덕인스님, 이건진 씨는 신수가 아주 훤한 분이었다. 뽀얗고 흰 얼굴의 덕인스님은 우선 인물로 한 몫을 했다. 덕인스님은 할아버지보다 10살쯤 어렸다. 이 멋진 덕인스님은 바랑을 매고 가끔씩 막은골의 청리당에 들르고는 했다. 그때마다 덕인스님은 대문 앞에서 목탁을 두드리며 큰소리로 반야심경과 천수경을 외워댔다. 할아버지를 향해 일종의 시위를 하는 것이었다. 나도 이렇게 목탁을 두드리며 경을 읽는 덕인스님을 여러 차례 뵌 적이 있다. 그때마다 사랑방의 할아버지는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기껏 반야심경이나 천수경을 외우며 탁발을 다니다니! 중이 공부를 해야지. 공부를! 금강경을 읽어야지…….”
할아버지가 소잠댁을 모시고 살던 나리재 집은 6·25 전쟁 중에 불에 타버렸다. 덕인스님이 탁발을 하던 때는 할아버지가 막은골에 제법 규모 있는 청리당을 마련한 뒤였다. 불교공부는 짧지만 사주는 잘 보는 분이 덕인스님이었다. 동네 사람들도 불공을 드리러 경신사에 가기보다는 사주를 보러 경신사에 가고는 했다. 어머니는 경신사의 당사주에 의하면 말년의 자신이 아들 셋을 두고는 떵떵거리며 살 팔자라고 좋아했다.
할아버지의 말씀에 따르면 덕인스님은 아주 게으른 중이었다. 천도제도 제대로 지낼 줄 모른다고 걸핏하면 핀잔을 하고는 했다. 덕인스님이 큰 절에서 큰 스님을 모시고 제대로 공부를 하지 않은 땡중인 것만은 분명했다. 그런데도 덕인스님이 우리 집에 탁발을 나오면 할아버지는 언제나 융숭하게 대접했다. 식사도 겸상을 해 차리도록 했고 바랑에 쌀을 가득가득 채워 보내고는 했다.
내가 초등학교 저학년 때의 일이다. 덕인스님은 아들 하나를 데리고 와 공양주로 일하던 진보살을 아예 안주인으로 들였다. 할머니는 “게으른 땡중이 고기 맛은 알아 가지고……”하며 찍는 소리를 했다. 그러면 어머니는 “덕인스님도 살림을 살아야지요. 밥도 해주고 빨래도 해주어야 할 게 아니어요” 하고 말했다.
안주인으로 들어앉자 진보살은 아예 자기가 직접 바랑을 지고 탁발을 나오기도 했다. 너나없이 보릿고개를 넘기기가 힘들었던 1960년대 초의 일이었다. 들녘인 막은골에서도 농토가 좀 넉넉한 청리당 등 몇 집만 겨우 양식걱정을 하지 않았다. 당연히 경신사의 당골은 막은골보다 형편이 안 좋았다. 산골인 경신사에서 양식이 떨어져 막은골로 탁발을 나오는 것이었다.
할머니는 진보살을 볼 때마다 입을 삐쭉이고는 했다. 할머니는 진보살이 데리고 온 아들 최성내를 앞세워 탁발을 하는 것을 못마땅했다. 저것이 거렁뱅이지 중이냐고 두렁두렁 지껄여대고는 했다. 그때마다 어머니는 할아버지의 뜻에 따라 바랑에 가득가득 쌀을 채워주고는 했다. 할아버지는 밥상머리에 앉아서도 늘 최성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많이 먹으라고 말하고는 했다.
6.25 전쟁이 끝난 뒤 누구나 다 힘들었던 시기를 경신사의 덕인스님은 남의 사주나 봐주며 게으르게 살다가 열반했다. 나는 그의 내면을 잘 모른다. 지금쯤 만났더라면 대화가 좀 되었을지도 모르는데……. 할아버지한테 일하기가 싫어 중질을 한다고 구박을 많이 받기도 했지만 인물만은 훤하던 덕인스님! 그분은 내가 기억하는 첫 번째 스님이었다.(《불교평론》 2015년 가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