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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
설교본문 : 열왕기하 12:1~21, 시편 100:1~5
설 교 자 : 송호영 목사
설 교 일 : 2015년 7월 5일(맥추감사주일)
오늘은 맥추감사절입니다. 맥추절은 유월절로부터 7주가 지나서 지키는 절기이므로 칠칠절, 혹은 오순절이라고도 하고, 밀과 보리의 추수를 시작하는 절기이므로 초실절이라고도 합니다.
맥추감사절이 밀과 보리를 추수할 때의 감사절이라는 의미 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한 후 시내산에서 하나님과의 언약을 세우고 율법(말씀)을 수여받은 것을 기념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맥추감사절에 담긴 이 두 가지 의미가 오늘날에는 각각 다르게 지켜져서 말씀을 수여받은 것을 기념하는 날은 오순절 성경강림절로 지키고, 밀과 보리를 추수하는 것을 기념하는 절기는 맥추감사절로 지킵니다.
● 신약시대인 오늘날 구약의 절기인 맥추감사절을 지켜야 하는 이유
지금은 신약시대인데 구약의 절기인 맥추감사절을 지켜야 할 필요가 있느냐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신약의 교회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결코 아닙니다. 신약의 교회는 구약의 전통을 이어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신약의 말씀만이 아니라 구약의 말씀도 함께 읽고 보는 것입니다.
다만 구약의 전통 중에서 예수께서 바꾸신 것은 달리 지킵니다. 예를 들어 구약의 안식일(토요일)은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날로 주일로 지키고, 구약의 유월절은 예수께서 마지막 유월절 양으로 죽으셨다 부활하셨으니 부활절로 대신 지키며, ‘세데르’로 불리는 유월절 음식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기념하는 성찬식으로 지킵니다.
이렇게 유월절은 부활절과 성찬식으로 지키므로 구약의 절기 중에 맥추절과 초막절, 두 절기가 남았습니다. 초막절은 모든 곡식을 다 추수하여 저장한 후 드리는 감사의 절기이니 오늘날 가을에 드리는 추수감사절이 되고, 남은 하나 맥추절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성령강림절과 맥추감사절로 나누어 드리는 것입니다.
● 농사짓지도 않는 사람들이 왜 맥추감사절과 추수감사절을 지켜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먹을 양식을 주셔서 우리가 그 양식을 먹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농사를 짓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주께서 우리에게 풍성한 양식을 주신 것에 대한 감사의 예배를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 그러므로 오늘 맥추감사절을 맞아 감사의 의미를 되새기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저는 먼저 열왕기의 말씀을 통해 감사를 잃어버린 자들의 삶을 살펴보고, 이어서 시편 100편의 말씀을 통해 우리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감사가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지를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제 1 장 : 감사를 잃어버린 사람들
1. 성전수리를 명하는 요아스
열왕기하 12:2에 나오는 요아스는 일곱 살 때 왕이 되었습니다. 그가 일곱 살 때 왕이 된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그의 아버지 아하시야가 북왕국 이스라엘 왕 요람의 병문안을 갖다가 요람을 죽이는 예후에 의해 아하시야도 죽임을 당했는데, 그때 요아스의 할머니인 아달랴가 자기가 왕이 되기 위해 아하시야의 아들들(아달랴에게는 친손자들)을 모두 죽였습니다.
그때 요아스의 고모인 여호세바가 1살도 안된 간난아이 요아스를 자기 침실에 몰래 숨겼고, 그 후 요아스는 6년 동안 여호세바의 남편인 제사장 여호야다의 보호를 받으면서 여호와의 성전 안에서 지냈습니다. 그리고 6년이 지나 요아스가 일곱 살이 되었을 때 제사장 여호야다가 여호와의 성전을 지키는 군사들을 이용하여 아달랴를 죽이고 요아스를 유다의 왕으로 세운 것입니다.
요아스는 대제사장 여호야다 덕분에 죽지 않고 살아서 왕까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요아스는 자기의 생명의 은인인 여호야다의 가르침대로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삶을 살아갑니다.
요아스가 왕이 된 후 첫 번째 한 일은 그의 할머니인 아달랴가 망가뜨린 여호와의 성전을 다시 회복하는 일입니다. 요아스는 제사장들에게 성전의 부서진 곳을 복구할 것을 명합니다. 성전을 복구하라는 명령은 곧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을 다시 회복하라는 명령과 같은 것이니 이 일은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일이었습니다.
요아스는 제사장들에게 성전의 부서진 부분을 복구하라고 명하면서 그 복구비용을 다음 세 가지의 헌금으로 충당하라고 명하였습니다.
① 각 사람이 통용하는 은(4절)
이것은 모든 사람이 의무적으로 내는 인두세(人頭稅)와 같은 성격의 헌금입니다. 출애굽기 30:11~16을 보면 20세 이상의 모든 사람들은 부자나 가난한 자나 할 것 없이 모두 동일하게 반 세겔을 낼 것을 규정하였습니다.
② 각 사람의 몸값으로 드리는 은(4절)
이것은 각 사람이 성전에 바치는 성전세로 20세 이상 60세 이하의 남자는 은 50세겔, 여자는 은 30세겔을 바치도록 되어 있습니다(레 27장)
③ 자원하여 여호와의 전에 드리는 은(4절)
이것은 오늘날의 감사헌금과 같은 것으로 하나님께 바치기를 원하는 자가 자원하여 드리는 예물입니다.
④ 각각 아는 사람들에게서 받아들여(5절)
여기에 십일조가 빠진 것은 십일조는 제사장과 레위인의 생활비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유다 왕 요아스는 생활비를 제외한 모든 헌금을 성전복구비로 충당하도록 명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제사장들이 각자 아는 사람들에게서 받아들여 그것을 성전복구비로 충당하라고 명했습니다. 이것은 아달랴로 말미암아 바알 신앙이 남왕국 유다에 유입되었고, 따라서 헌금 바치는 일들이 많이 느슨해졌으므로 제사장들로 하여금 주변 사람들에게 헌금 바칠 것을 독려하여 성전 보수비로 사용하도록 한 것입니다.
2. 성전 수리를 하지 않는 제사장들
그런데 요아스가 왕이 된지 23년이 지나도록 제사장들이 성전복구에 전혀 나서지 않았습니다. 성경에 그 이유가 나와 있지 않으니 잘 알 수 없습니다만, 본문의 문맥을 통해 추정하여본다면, 그것은 이웃에게 독려하여 받아들인 헌금을 자기들이 사용하지 않고 성전복구비로 내놓아야 하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신앙이 좋지 않은 때였으니 십일조가 잘 바쳐졌을 리 없었을 것이고, 그렇다면 제사장들의 삶이 그리 넉넉지 않았을 것입니다. 제사장들은 그것을 성전세와 자원하여 바치는 헌금 등을 통해서 부족한 살림을 충당하였을 텐데, 그것을 모두 성전복구비로 내라고 하니 신이 나지 않은 것입니다.
요아스가 그가 왕이 된지 23년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 이때에 이 말을 한 것은, 이때 그의 나이가 30세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때부터는 그의 고모부인 대제사장 여호야가의 섭정을 받지 않고 그가 독자적으로 왕권을 행사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요아스는 대제사장 여호야다를 포함한 제사장들을 불러 성전 수리를 하지 않은 것에 대하여 책망합니다.
● 제사장들이 성전 수리에 열심히 하지 않은 이유 :
제사장들이 왜 23년이나 성전수리에 참여하지 않고 있었을까요? 본문에 그 이유를 자세히 밝히고 있지 않으나 본문의 말씀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이유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① 제사장들의 이기심 때문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왕의 명령이 없었다면 그 돈은 제사장들의 호주머니로 들어갈 돈입니다. 그런데 그 돈을 성전복구비로 사용하라고 하니 마음이 상한 제사장들이 이 일에 열심히 참여하지 않은 것입니다.
② 제사장들의 체면 때문
또 하나는 제사장들에게 그들이 아는 주변 사람들을 독려하여 헌금을 거두라고 한 점입니다. 제사장 체면에 마치 오늘날의 영업사원들처럼 사람들에게 헌금을 내 달라고 부탁해야 한다는 것이 영 마땅치 않은 일이었던 것입니다.
➡ 그러나 이 일은 여호와의 성전을 복구하는 일이었습니다.
제사장들은 하나님을 위한 일에 자기들의 이기심이나 체면 따위를 벗어던지고 왕이 명령한 그 날부터 온 힘을 다하여 했어야 했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이기심이나 체면 때문에 하나님의 일을 훼방하는 자들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자칫하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됩니다.
3. 제사장들을 호령하는 요아스
요아스는 제사장들에게 헌금을 걷으라고 하니 그들이 움직이지 않았던 것을 보고, 생각을 바꾸어서 헌금을 바치고자 하는 자들이 제사장의 손을 통하지 말고, 성전을 복구하는 자들에게 직접 가져다주게 하라고 명을 내립니다. 그리고 제사장들은 성전을 복구하는데 일체 관여하지 말 것을 명합니다.
제사장들 역시 성전이 복구되어야 한다는 데에는 같은 생각이지만 자기들이 나서서 하고 싶은 일은 아니었으니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여 성전복구는 일꾼들이 직접 헌금을 받아서 하는 방식으로 하도록 했습니다.
● 먼저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하십시오.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이들처럼 자기 이익을 따지면서 하지 마십시오. 만일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이때의 제사장들처럼 자기 이득을 따져가며 한다면, 주께서도 우리에게 주님의 피의 권세를 거저 주셨던 모든 것을 다기 거두어 가실 것입니다. 주께로부터 거저 용서받았고, 거저 구원 받았으며, 거저 영광을 얻었는데 우리는 주님의 일을 하면서 이득을 따진다면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치신 주님께 할 일이 아닙니다.
4. 일꾼들보다도 못한 제사장들
15절에서 제사장들은 일꾼들에게 헌금을 넘겨주면서 그 헌금의 사용 내역에 대한 회계 감사를 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헌금을 사용하는데 성실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제사장들은 그렇지 못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제사장들에게 맡겼을 때 23년이나 지지부진했던 것이 일반 일꾼들에게 맡기니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권한을 가졌으나 책임은 감당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 큰 죄입니다. 남들보다 두 배의 권한을 가졌다면 열매 또한 두 배로 남겨야 합니다. 당신이 만일 남들보다 더 높은 직책에 있든지, 더 많은 돈을 가졌든지, 더 많은 지식을 가졌다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에게 그만큼 많은 열매를 요구하신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 권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십시오.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힘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 돈을 자기 것으로 여기고 하나님을 위해 사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또한 그 돈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게 되므로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렵다고 예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구하기 전에 그것을 가졌을 때 무엇을 할 것인지를 먼저 생각하십시오. 권한만 가지려하지 말고, 그 권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려 하십시오.
5. 여호야가 살아있는 동안만 하나님을 섬기는 요아스
그러나 대제사장 여호야다와 제사장까지 책망하면서 성전복구를 완료할 것을 명령한 요아스는 그를 살려준 여호야다가 살아있는 동안에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았습니다. 여호야다가 죽자 기다렸다는 듯이 요아스는 말씀대로 사는 모든 일을 중단하며 아세라 목상과 우상들을 섬깁니다. 이에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가 그 일이 잘못이니 하나님께서 그의 일을 형통치 못하게 하실 것이라고 말하자, 요아스가 스가랴를 죽입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진노하셔서 요아스가 그의 부하들의 칼에 맞아 죽게 하십니다(역대하 24:17~27).
● 사람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십시오.
신앙생활을 처음 할 때에는 누군가를 신앙의 롤모델로 삼고 그를 의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그는 신앙에 도움을 주는 자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믿고 의지할 자는 오직 하나님뿐입니다. 요아스처럼 누군가를 지나치게 의지하면, 혹 그가 실족하여 믿음을 잃어버리거나 여호야다처럼 먼저 세상을 떠난다면 그와 함께 믿음도 같이 잃어버릴 위험이 있습니다. 우리는 오직 주님만 의지하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6. 아람 왕 하사엘의 침공
요아스가 자기의 생명의 은인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를 죽인 후 아람 왕 하사엘이 블레셋 땅 가드를 점령한 후 예루살렘으로 쳐들어옵니다. 이에 요아스는 성전에 있던 모든 성물과 왕실 창고에 있는 것까지 합하여 모든 금을 아람 왕 하사엘에게 바칩니다. 이로써 요아스의 믿음은 형식적인 것이었을 뿐 실상은 모두 가짜였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사람이 무서워 하나님의 것을 바친 것은 그가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무서워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 믿음을 말로만이 아니라 행동으로 나타내 보이십시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일을 지키는 일이라든지,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세상일과 겹쳤을 때 하나님 섬기는 일을 뒤로 미루고 세상일을 먼저 한다면, 요아스처럼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두려워하는 것이 됩니다. 이렇게 되면 그가 입으로 하나님을 어떻게 고백을 하든 그는 믿음 없는 자로 인정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더 크신 분으로 믿고 있다면 그 믿음을 말로만이 아니라 행동으로 나타내 보이십시오.
7. 요아스의 죽음
아람 왕 하사엘의 침공은 유다 왕 요아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마지막 시험이었습니다.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가 그에게 경고한 바와 같이 그가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치 않은 일을 하면 멸망을 당하는 자가 되는데, 아람 왕 하사엘의 침공으로 그가 하나님을 바르게 믿는 것인지를 확인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왕실 창고에 있는 것은 물론 하나님께 바쳐진 것까지 모두 하사엘에게 주어 그가 하나님을 전혀 의지하지도 신뢰하지도 않고 있었음이 밝혀졌습니다. 이 일이 있은 지 얼마 후 요아스는 자기 신하의 칼에 맞아 죽습니다.
● 성령으로 시작하여 육체로 마친 요아스
우리의 인생이 다윗처럼 성령으로 시작하여 성령으로 끝나는 인생이 되도록 기도합시다. 요아스처럼 처음에는 제사장들에게 호령할 정도로 믿음이 좋았다가 나중에 형편이 달라지니 믿음을 버리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 오시기 전에 세상은 더욱 혼란스러워질 것입니다.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 나의 형편이 어떻게 달라지든 상관없이 우리는 다윗처럼 항상 주님을 섬기는 자가 됩시다.
제 2 장 :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
요아스가 그의 고모부인 제사장 여호아다가 죽자마자 그렇게 하나님을 떠나 죄에 빠진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 역시 예배를 드렸고 하나님의 성전을 복구하기도 했으며, 심지어 제사장들을 호령하기까지 했습니다만, 그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감사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솔로몬과 요아스, 이 두 사람에게 공통점이 있습니다. 솔로몬은 성전을 지은 사람이고 요아스는 성전을 복구한 사람입니다. 이들은 성전을 짓거나 복구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들 마음속에 다윗과 같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감사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솔로몬은 성전을 짓고 난 후에 여자 1,000명을 맞이하고 우상을 섬겼으며, 요아스는 성전을 복구하고 제사장 여호야다가 죽자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숭배하는 자가 된 것입니다.
1. 기쁨으로 예배를 드리십시오.
- 그 이름을 송축할지어다(4절) :
왕의 통치를 기뻐하는 백성들이 왕의 이름을 부르며 즐거움의 환호를 올리는 것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을 기억하며, 우리에게 복 주시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즐거워하며 환호하는 것, 이것이 예배입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현실의 당면한 문제에 빠져 예배의 자리에서도 괴로운 심정으로 하나님께 복을 달라고 간구의 기도를 합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도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예배의 자리는 나의 개인의 문제로 기도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예배는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무엇을 받는 자리가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께 몸과 마음을 드리는 자리입니다. 감사의 마음을 담아 수고한 땀의 결과물인 예물을 들고 하나님께 나아가 감사하며 찬양하는 자리입니다.
그러므로 마치 기쁨과 설레는 마음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러 가는 것과 같이, 예배당에 가기 위해 집에서 출발할 때부터 기쁨으로 노래하면서 나아갑니다. 그리고 예배당에 들어가서도 하나님을 향하여 기쁨과 감사로 예배를 드립니다.
2. 예배를 받으시는 분이 누구인지 알고 예배를 드리십시오.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3절)
만일 하나님이 누구신지,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셨는지도 알지 못한 채 예배를 드린다면, 그는 하나님께 왜 예배를 드려야 하는지를 전혀 알지 못한 채 예배를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 예배의 기쁨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기쁨이 아니라, 그 날 예배당의 분위기에서 오는 기쁨일 것입니다. 그런 예배와 그런 기쁨은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는 하나님이 누구신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무엇을 하셨는지를 알고 드리는 예배이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이 우리의 왕이신 것이 뛸 듯이 기쁜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우리가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이 온 몸을 다해 찬양을 해야 하는 일인 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른 예배를 드리기 위해 성경공부를 통해서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배우십시오.
3. 감사함으로 예배를 드리십시오.
-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4절) :
1) 감사의 예물을 가지고 성전문과 성전 뜰에 들어가는 것
2) 감사함으로 예배의 문이 열린다는 것 : 여기에서 말하는 예배의 문이란 성전의 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의 자리로 들어가는 문이라는 뜻.
우리는 오늘 예배를 드리기 위해 예배당 문을 열고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하나의 문을 더 들어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참된 예배를 드리는 곳으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이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계신 진짜 교회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시고 내가 하나님 안에 있는 이 은혜의 예배의 자리로 들어가는 문이 바로 감사입니다.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갑니다.
요아스는 예배를 드렸지만 감사함으로 드리는 예배가 아니었으므로 하나님의 은혜 속에 있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고모부인 제사장 여호야다가 죽자 그 환경의 변화를 극복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떠나는 자가 된 것입니다.
주께서 오시기 전 마지막 때에 큰 혼란이 일어날 것이라고 주께서 누차에 경고하셨습니다. 이 혼란의 때를 이기려면 매 주일 예배드릴 때마닥 감사함으로 드리는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맥추감사절만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예배드릴 때마다 감사함으로 드리십시오.
토요일마다 주일을 준비할 때 헌금만 준비하지 말고, 하나님께 드릴 감사의 기도도 준비하십시오. 한 주간 주께서 나를 어떻게 도우셨는지 내가 주일 예배 때 주께 감사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메모지에 적어 오십시오. 그리고 예배를 드릴 때 한 주간 동안 나와 내 가족과 우리 교회와 이 나라와 이 민족을 도우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양하며 영광 돌리십시오. 이것이 우리가 들어야가 할 예배의 문입니다.
주님
솔로몬이나 요아스처럼
눈에 보이는 무엇인가
하나님 앞에 내세울 공로로
교만해지는 자가 되지 않게 하옵소서.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찬양하며
기쁨으로 주께 노래하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그래서 예배를 드릴 때마다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참된 예배를 드리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