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영산 치맛자락 원골 추억.
김흥식 (교육산업신문사 대표)
내가 태어나고 자란 제원면 제원리 150번지. 그 옥상에 올라가면 언제나 월영산은 나를 반갑게 불렀다. 직선거리 4.5km. 찬란한 아침 해는 언제나 이 산에서 떴다. 둥근 보름달도 이 산에서 떴다. 금산군의 동쪽 끝에 위치한 월영산은 군 전체에서 가장 부지런한 산이다. 월영산은 매일 나를 깨워 학교에 보냈으며, 읍내에서 공부를 마치고 지친 걸음으로 돌아오는 신작로에 커다란 보름달을 보내 나를 마중했다. 제원사람 모두는 월영산을 보며 이렇게 자랐을 것이다.
기러기공원이 자리한 원골은 금강줄기 전체에서 가장 빼어난 풍광을 자랑한다. 월영산 앞자락이 바로 원골이다.
1966년 여름, 지금부터 43년 전, 중학교 2학년 때 일이다. 저녁 식사를 마치자 여자 동창 2명이 찾아왔다. 순자랑 영숙이었다.
“인순네 사랑방으로 빨리 모이래”
“왜? 뭔일인데?”
“몰라, 와보면 알아”
당시 제원동네엔 흉흉한 소문이 돌았었다. 누구네 큰 딸이 자살을 했는데, 같은 동네 누구랑 연애하다 그랬다는 거다.
지금이야 ‘남녀칠세부동석’이란 말 자체가 없어졌지만 호롱불 켜던 그 당시엔 남녀 동창생끼리 한 방에 모인다는 그 자체가 사건(?)이었다. 겨우 중2인 어린 것들이.
인순네 사랑방엔 고동균 고은자 김도연 김순자 김영옥 김예순 김인옥 김춘애 김홍철 김흥식 박영숙 박용태 손미애 손순옥 조분선 한인순 한정아 허양님 이렇게 18명이 모이게 됐다. 남자와 여자. 초등학교때는 자주 볼 수 있었지만 중학교에 들어가자 남녀가 갈라져 가까이 볼 기회가 거의 없었다.
한 방에서 자세히 보니 여자 동창들은 이미 숙녀가 되어 있었다. 초등학교 때 보다 훨씬 예뻐보였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모르지만 갑자기 원골로 천렵을 간다는 거다. 나랑 몇몇 남자애들은 조금 망설이긴 했으나 딱 부러지게 안간다는 말을 못했다. 회비는 얼마씩, 누구는 뭘 준비하고... 등등 일사천리로 정해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걱정이었다. 여자들이랑 놀러간다는 말을 엄마에게 어떻게 하지? 아버지가 난리치면 어떻게 하지? 도저히 그 말을 꺼낼 수 없을 것 같았다.
이튿날, 편지봉투에 몰래 쌀을 담아 주머니에 넣고는 모이는 장소인 동균네 집 바깥마당으로 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그곳엔 우리 엄마와 아버지가 와 있지 않은가. 우리 친구들의 엄마 아빠들이 리어카에 솥단지랑 장작이랑 그릇이랑... 천렵에 필요한 물건을 싣고 있지 않은가. 세상이 뒤집힐 일이었다. 엄마들끼리는 이미 정보가 통했던 것이리라.
‘중2 어린 것들이 뭘 어떻게 해먹겠어. 우리가 도와줘야지’
나룻배를 타고 천내강을 건너 원골로 갔다. 그곳에는 6학년때 담임이셨던 3분중 박천본 이동기 선생님이 계셨다. 선생님들은 엄마들이랑 애당초 친숙한 사이라서 더 즐거워 하셨다. 그날 월영산 치맛자락인 원골에서 가진 천렵을 나는 평생 잊지 못한다.
그날 이후 육십 턱 밑인 지금까지 우리는 제원농협앞 삼거리서 100m 앞의 여자 친구를 부를 때 “양님아~” 하고 큰소리로 부른다. 육십 다 된 노인들이 그렇게 주책을 떨어도 아무도 이상하게 보지 않는다. 참 신기한 일이다. 제원동네에서 우린 아직도 중2 철부지다.
첫눈 내리는 오늘따라, 먼저 떠나간 도연이 예순이 미애가 보고 싶어진다.
<월간 '비단물결' 2009년 12월호>
첫댓글 선배님...드디어 입출하셨군요..어쨋든 축하 합니다...잘 되시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