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년 도 |
1896 |
1898 |
1907 |
1909 |
1916 |
1921 |
1923 |
1928 |
1936 |
신자수 |
1 |
405 |
1,750 |
2,000 |
5,891 |
7,787 |
9,990 |
11,764 |
14,000 |
② 연길 대목구 승격
연길 지목구는 1937년 4월 13일 대목구로 승격되었다. 9월 5일 주만 교황 사절 서리 겸 길림 교구장인 가스페(A. Gaspais, 고덕혜) 주교 집전으로 백 테오도르 브레허 지목구장의 주교 서품식이 거행되었다.
③ 방인 성직자 양성
1938년 3월 21일 - 신윤철(베드로), 임화길(안드레아) 사제품.
1940년 3월 25일 - 김성환(빅토리오), 이태준(야고보) 사제품(두 분 대구대교구로 이적)
1940년 6월 29일 - 최영호(비안네) 사제품
1942년 5월 1일 - 김치호(베네딕토), 김봉식(바오로) 사제품
1945년 9월 30일 - 허창덕(치로) 사제품
1948년 4월 17일 - 다조구 대령동 출신 김남수(안젤로) 사제품을 받았다.
④ 연길 교구 승격
그 후 1946년 4월 11일에는 전 중국 교회의 교계제도가 설정되었는데, 이 때 연길 대목구도 연길교구로 승격되었다.
제4장 연길 교구가 맞게 된 정치적⋅사회적⋅종교적 상황
1. 정치적 상황
① 만주사변
1931년 9월 18일 밤, 백 테오도르 신부가 주교회의 관계로 서울에 체류하고 있을 동안 일군(日軍)이 봉천 북쪽 유조구(柳條溝) 근방에서 만철선(滿鐵線)을 폭파하고 그 다음날 아침 봉천을 완전 점령한 후, 수개월 내에 만주 전역을 장악한 사변이 일어났다. 만주는 일본의 지배하에 들어갔고 중국군 패잔병의 일부는 마적으로 변신하여 재산 약탈과 양민 학살을 일삼았다. 그들은 군자금을 징수하기 위해서 온갖 방법으로 약탈을 감행했다. 1932년 3월 1일 일본은 청 왕조의 마지막 황제인 선통제 부의(溥儀)를 집정으로 하고, 장춘을 신경이라 개칭하여 수도로 삼고 동삼성, 열하, 내몽고 동부까지를 판도로 하는 광대한 만주국을 세웠다. 그해 9월 일만의정서(日滿議定書)를 체결하고 만주국을 승인하였다. 부의는 1934년 3월에 만주국 황제가 되었다. 이제 이 제국에서는 중국인, 한국인, 일본인이 동등하게 대접되었기에 일본인의 치외법권은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 따라서 1937년초 만주에 있는 모든 영사관은 철수되었다.
② 중일전쟁과 미일전쟁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났다. 그 결과 선교활동에도 큰 어려움이 따르게 되었다. 여행을 하려면 신고를 해야 했고, 물가는 엄청나게 올랐다. 그리고 곧 이어 일본은 1941년 12월 8일 미국령 진주만을 공격함으로 태평양 전쟁을 야기시켰다. 이 전쟁으로 인해 전교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지는 않았으나 점차 일본인의 유럽 선교사들에 대한 의심이 커져갔고, 전교와 일에 대한 감시가 심해졌다. 식료품 등 물자 부족이 더욱 심화되었다. 곡식, 기름 등 가장 중요한 생필품은 배급이 되었다. 배급은 세 계급으로 나뉘어 이루어졌는데, 제1계급인 일본인은 쌀을 받았고, 제2계급인 한국인은 수수를, 셋째 계급인 중국인은 더 하등한 곡물을 받았다. 독일 선교사들은 첫째 계급으로 분류되어 쌀 이외에 밀가루를 받을 수 있었다.
③ 만주 지역의 공산화
1946년 4월초부터 소련군의 이동이 눈에 뜨이더니 4월 말경에는 거의 만주에서 철수하였다. 소련군이 철수한 이래 만주 지역 통솔자가 된 공산주의자들은 드디어 그들의 이념에 따라 교회 재산을 몰수하고 선교사들을 체포하기 시작하였다.
1949년 10월 1일에는 공산당에 의해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2. 사회적 상황
① 간도이민
간도지방으로 한국인이 진출하기 시작한 것은 1850년대부터이며 1900년대에 접어들어서는 대규모의 집단 한인촌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초기 이주자들은 생활고 등 주로 경제적 이유로 이민을 떠났으나 1910년대를 전후하면서부터는 정치적 이유가 더욱 강했고, 그 규모 역시 대규모 집단이주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을사늑약(乙巳勒約)’ 직후부터 3․1운동 이전까지 간도지방으로 이주한 한인의 통계를 연도별로 보면 다음의 표와 같다.
연 도 |
1907 |
1910 |
1912 |
1918 |
이민자수 |
71,000 |
109,000 |
163,000 |
253,961 |
1928년 서울 보좌주교인 라리보 주교의 연말보고서에 의하면 1927년도 서울교구 교우수가 56,302명이었는데 1928년에 49,147명으로 7천 명가량 줄어들었음을 보고하면서 그 감소 이유를 교구 분할(메리놀 외방전교회에 평양 지역 위임)과 독일 베네딕토 회원들의 사목지에로의 신자들의 집단 이주로 들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베네딕토 회원들의 지역에서 교우 증가가 그렇게 두드러지지 않아 서울에서 줄어든 신자가 어디로 갔는지 염려가 된다고 하였다.
1940년 이후에는 일본이 만주에 더 많은 영향력을 끼치기 위해 많은 만주의 주민들을 강제로 이주시키는 정책을 펼쳤다.
1945년 일본의 압제로부터 해방이 되자 북 만주 오지로부터 조선 사람들이 많이 사는 간도 지방으로 조선 사람들의 역이민이 시작되었다. 일제하에 일인들에게 기대서 돈을 벌고, 중국인을 멸시해 온 일부 사람들 때문에 무고한 동포들까지 ‘소 일본인’이란 모욕을 받아 피해를 입었다.
② 전염병 만연
1932년 발진티푸스가 만연되어, 3개월 동안 세 신부가 세상을 떠났다. 엄 비오(Pius Emmerling) 신부, 목 엥겔베르트(Engelbert Müller) 신부, 안 실베스터(Sylvester Aschoff) 신부가 운명했고, 안 신부의 장례미사에 참석하기 위해 용정에서 대령동으로 가던 부감목 박 콘라드(Konrad Rapp, 1896-1932) 신부가 다조구에서 일본 군인들의 총격을 받고 세상을 떠났다. 장티푸스 병에 감염되어 주 코르비니안(Corbinian) 신부가 괴롭힘을 당했고, 훈춘의 정 엑베르트(Egbert) 신부와 팔도구의 장 아도(Ado) 신부도 같은 병에 시달려야 했다.
3. 종교적 상황
1919년 교황청은 일본에 교황대사관을 설치하고, 주(駐) 일본 교황사절로 하여금 한국교회의 교황사절 임무까지 겸하게 하였다. 1935년 가을, 백 테오도르 아빠스는 한국주교회의에 참석하였는데, 당시 연길교구는 한국 교계제도에 속해 있어 결국 주일 교황사절 관할 하에 들어가 있었던 것이다.
1936년 3월 19일 백 테오도르 아빠스는 이미 능동적으로 공적 활동을 해 오던 신자들과 신부들을 연길로 오게 하여 가톨릭 운동을 위한 연맹을 결성했다. 그 당시 만주에는 공산주의와 볼셰비키 운동이 만연되어 갔고, 그래서 이 운동들에 대응할 줄 아는 젊은이들을 교회는 양성해야 했다. 청소년지인 《가톨릭 소년》을 창간한 것도, 청소년들의 단체인 ‘타르시치오회’를 창설한 것도 그 깊은 뜻은 여기에 있었다.
1941년 12월 미일 전쟁 이후에는 학생들이 매달 8일에 신사 참배의식에 참여해야 했다. 그리스도교도들은 첫 번째 주일 미사 전에 동경을 향해 절하고 조국서약을 해야 했다. 만주에 있는 모든 사립학교를 해체하려는 일제의 시도가 있었고, 교실 내에 있는 십자가를 모두 떼어내야 했으며 십자가 자리에는 일본 천황의 사진을 걸어야 했다. 교무실에서는 간단한 신사(神社)의식을 거행해야 했다. 1944년 2월 모든 가톨릭 학교, 교사, 학생들과 대부분의 학교 재산은 정부에 헌납되었다.
1946년 5월, 연길교구 내 수도원 건물과 각 본당의 건물들이 몰수되고, 신앙의 자유마저 박탈되어 갔다. 33명의 수도자들은 1946년 7월부터 그 이듬해 5월까지 두만강 가까운 국경지대인 남평 수용소에 억류되어 중노동을 했다. 수용소 생활에서 석방된 선교사들은 네 그룹으로 나뉘어 독일 귀향길에 올랐다. 이로써 연길교구 내의 모든 성직자, 수사들은 한 명도 남지 않게 되었다.
제5장 중화인민공화국에서 겪어 온 중국 천주교회의 역사
1949년의 ‘제팡’(解放)이라는 공산당의 승리로 교회는 중국에서 전혀 새로운 처지에 놓였다. 천주교인들에 대하여 공산주의자들은 냉혹한 태도를 보였으니, 그 중요한 이유인즉 불행하게도 토지 소유권이 교회의 수중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천주교 선교회는 흔히 하나의 대지주가 되어 있었는데, 그것이 그 자체로 공산주의자들의 눈에는 ‘계급투쟁’의 대상인 ‘원수’로 보였고, 또 그렇게 취급되었다. 천주교인들은 또 한편 장제스(蔣介石) 궈민당(國民黨)을 지지하는 경향도 있었다. 천주교 성직계는 분명히 국민당 편이었고, 모든 외방 선교사들이 한 결 같이 반공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고 중국인 천주교인들도 모두가 한통속이었던 것은 아니고, 많은 이들이 오히려 중립적이었다.
1949년 이래 중국 천주교회의 진전 상은 당시의 정세(政勢) 변화에 따라 다섯 대목으로 나뉜다.
시련 속의 교회(1949 - 1958)
희생되고 억압받는 교회(1958 - 1966)
고생하며 죽어 가는 교회(1966 - 1976)
부활의 힘으로 살아가는 교회(1976 - 1980)
영적 투쟁으로 다져지는 교회(1980 이래)
신학적으로 해석하자면 이 각 기간은 교회가 체험한 단계들인 바로 예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 그리고 성령강림을 반영하고 있다.
1. 시련(1949~1958)
1) 산쯔(三自) 운동
1949년 10월 1일에 공산당에 의해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을 때에 중국 천주교회에는 교황 대사와 144개 교구에 중국인 신부 2,842명, 수녀 4,832, 수사 589명, 그리고 외국인 신부 2,859명, 수녀 2,059명, 수사 390명이 있었고, 신자수는 약 300만 명이었다.
1950년에 공산 정권은 <산쯔원칙>(三自原則) 즉 쯔즈(自治), 쯔찬(自傳), 쯔양(自養)을 내세워 국수주의 민족 운동을 전개하면서, 중국 주교들에게 세계 가톨릭교회와 로마 교황청에서 독립된 자립 교회의 수립을 강요하였고, 천주교의 성장을 저지하고 교회를 통제하기 위해서 여론과 언론의 조작을 통한 외국 성직자 박해와 교회 분열 공작 정책을 자행하였다. ‘산쯔’(三自)라는 ‘애국 대중운동’은,
쯔즈(自治) - 즉, 로마에 종속되지 않고 중국교회를 자율적으로 다스림
쯔양(自養) - 외국에서 원조를 받지 않고 경제적으로 자립하기
쯔찬(自傳) - 외세를 통하지 않고 복음을 중국인 자신의 힘으로만 전파하기를 뜻한다.
중국교회를 재정⋅행정⋅선교의 어느 면에서나 (종래의) 외국 영향에서 완전히 해방시키는 것이 이 운동의 명시된 목적이었다. 이를 위해 외방 선교사들이 추방되었다. 모든 선교회 학교와 병원과 교회 시설들이 폐쇄되거나 국가에 몰수되었다. 선교사들은 공공연히 제국주의 범죄자로 지탄되었다. 1951년 6월 28일에는 교황대사 리베리(Riberi) 주교가 체포되어, 그해 9월 4일에 추방되었다. 수녀들은 수천 명의 고아원 유아 살해자로, 사제들은 ‘외국 세력의 간첩’으로 단죄되었다.
베이징(北京)의 대성당(北堂)이 폐쇄되고, 성당 정면에 별이 나붙고, 대성당이 학교로 둔갑되었다(나중에는 20년도 넘게 창고로 쓰였다).
1950년에는 2,274명의 선교사가 이 나라를 떠나야 했다. 1956년에는 중국에 아직 남아 있는 선교사래야 고작 27명이었다(사제 16명과 수녀 11명). 1955년이 끝날 무렵에는 적어도 100명의 중국인 사제, 50명의 신학생, 20명의 수녀, 10명의 수사 그리고 약 4,000명의 평신도가 갇혀 있었다.
2) 애국회의 결성
1957년 7월 15일에 241명의 천주교 지도자들과 정부 대표들이 북경에 모여 <중궈 티엔주자오 아이궈휘>(中國天主敎愛國會 : Chinese Catholic Patriotic Association : C.C.P.A.)를 결성하였다. 1958년 4월 13일에는 교황청 승인을 받지 않은 중국인 주교가 탄생되었다. 교황 비오 12세께서는 두 차례에 걸쳐(1952, 1958) 회칙을 반포하여 <삼자운동>, <애국회>의 결성, 주교의 불법 선출을 단죄하였다. 이후로 교황청과 중국 교회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1966년에는 <문화혁명>이 일어나 전통 문화와 특히 외래문화와 문물이 공격의 대상이 되어 반(反) 교회운동으로 성화상의 파괴, 교회 서적의 소각, 교회 재산의 몰수와 함께 성당이 폐쇄되었으며, 성직자와 수도자들은 재판에 회부되어 감옥에 갇히거나 강제 노동수용소에 억류되었습니다.
2. 희생과 억압(1958~1966)
1958년부터 1966년까지의 이 시기에는 공산당 정부의 태도가 마치 교회 자체를 반대하는 것은 아니고 오로지 외세의 영향을 받는 제도로서의 교회에만 대처하는 것처럼 나타났다. 1958년 이후에는 중국의 천주교회가 두 가지 차원에서 존재했다 : ‘애국’ 교회들은 대중 예배를 위하여 공개되어 있었는데, 1951년에 설립된 종교 사무국(宗敎事務局)과 애국회의 고위층을 통하여 국가의 날카로운 감시를 받았다. 그러나 지하에서 몰래 모이던 작은 가정교회들도 있었다. 공개된 ‘애국’ 교회들은 가톨릭(보편)교회의 요구들에 따라 종교생활을 영위할 수가 없었다. 또한 수많은 교회가 폐쇄되었고, 교회건물들이 몰수되어 다른 목적에 전용되었다.
이 시기에 중국천주교회는 그 생존에 위기를 겪어야 했다. 지하활동은 국가와 그 공무원들에 의해 불법으로 간주되고 형사적 처벌로 탄압 받았다. 수많은 사제들이 징역형을 선고 받았고, 순화교육 수용소에서 강제노동을 해야 했으며, 방문자를 만날 수가 없었을 뿐더러, 성서와 미사마저 금지되었다.
1960년, 마침내 모든 천주교 신학교가 닫혀 버렸고, 그 결과 새 사제의 배출은 완전히 끝나고 말았다. 1952년까지는 아직 교회가 16개의 신학교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1955년에는 상하이(上海)에서 월쉬(J.Walsh, MM) 주교가 유일하게 남은 신학교 한 곳을 간신히 꾸려 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이 시설마저 폐쇄되자 교회의 존속이 위협을 받게 되었다.
1959년, 홍콩(香港)에서 당시 포교성 장관이던 아가지니아니(Agaginiani) 추기경의 사회로 한 회의가 열렸는데, 이 회의에서는 중국에서 거행된 주교 성성식들이 ‘유효’하며 중국 천주교회는 ‘열교’가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요한 23세 교황의 재위기간(1958-1963) 중에, 중국교회에 대한 바티칸의 태도에 새로운 변화의 조짐이 비로소 나타났다. 처음에는 아직 교황도 정부를 단죄하고 애국회의 회원들을 비판하는데, 다만 그 처지에 대하여 좀 더 큰 이해를 보이면서 정부와 애국회의 지도자들에게 계속 대항해 온 이들에 대한 성원의 뜻을 알린다.
1961년에는 바티칸의 이 태도 변화가 자못 역력히 드러난다. 요한 23세의 뒤를 이어 교황직에 오른 바오로 6세(1963-1978)는 중국 지도자들이나 중국 인민과 대화하고자 하는 소망을 명백히 피력한 첫 교황이었다.
3. 고난과 죽음(1966~1976)
1966년 5월에서 1976년까지 10년간의 ‘무산자 문화 대혁명’(無産者 文化大革命)은 지금까지도 중국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이 시기에 중국에서는 완전히 새로운 종교정책이 시작되었다. ‘지하’고 ‘애국’이고 가릴 것 없이 그리스도인이라면 모조리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1960년대 후반에 미처 감옥에 들어가지 않았던 사람들은 문화혁명 중에 엄청나게 더 가혹한 박해에 마주쳤다. 이후 중국에서는 그리스도교 활동의 모든 표지가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외적으로 중국의 교회는 죽고 묻혔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여전히 특히 가정교회들 안에 계속 살아 있었다.
그러다가 모택동의 생시에 처음으로 북경의 ’난탕‘(南堂)이 문을 열었는데(1971), 1979년까지 이 대성당은 공개 예배가 거행된 중국 유일의 천주교회였다. 여기에는 그러나 거의 오로지 외교관과 외국인 손님들만이 찾아왔고, 그나마 집전 사제와 개인적인 접촉을 한다는 것은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4. 부활의 힘(1976~1980) - 종교 관용 정책
1976년에 마오저뚱(毛澤東)이 사망하고 그의 미망인 장칭(江靑)에 의하여 개시된 ‘사인방’의 체포 이래 중국 사태에 하나의 급진전이 있었다. 실권을 장악한 덩샤오핑(鄧小平)은 중국의 현대화를 위해 외국의 자본과 기술을 도입하면서 문호를 개방하는 과정에서 외국인들의 신앙생활을 위해 성당이 다시 문을 여는 것을 허용하였다. 이후로 <애국회>의 이름 아래에서 교회생활은 활성화되었고 교회는 몰수된 재산도 되돌려 받고, 비교적 자유롭게 활동하면서 성장의 길에 들어섰다.
1978년 이래로 많은 사제들이 더러는 이삼십 년씩 옥고를 치른 끝에 석방되어 귀가했다. 대부분이 즉각 사목에 헌신했고, 1979년 7월 25일에는 푸티에산(傳鐵山) 신부가 북경의 ‘애국회’ 주교로 선임되어 1964년 이래의 빈자리를 채웠다. 중국인들은 1958년에 시작했던 교황청 승인 없는 주교 서품식을 다시 실행에 옮기게 된 것이다(1958년과 1962년 사이에 도합 45명의 주교가 성좌의 인준은 없으나 유효하게 서품되었다.).
국가의 도움으로 조금씩 새로 단장하게 된 교회들이 곳곳에서 애국회와 협력하는 사제들에게 맡겨졌다. (외국인 방문자들 역시 애국회하고만 접촉해야 했다.)
1980년 2월에 교황청의 고위 성직자가 중국을 방문하면서 중국과 바티칸은 관계 개선의 길에 들어섰다. 같은 해 6월에는 <중국천주교교무위원회>(中國天主敎敎務委員會)와 <중국천주교주교단>(中國天主敎主敎團)이 구성되었다.
교황청과의 이 첫 접촉 후로는, 중국교회와 연결된 다리들이 종래에 생각했던 것보다는 많이 있게 됐고, 여러 가지 면에서 전보다 개선되었다.
5. 영적 투쟁(1980년 이후)
새로운 다리가 중국 천주교인들을 향해 놓이기 시작했다. 주교․사제․수도자․평신도 등 수백 명이 이에 참여했다. 중국 대륙에 자리한 홍콩과 마카오 두 교구의 주교들도 다리가 놓이는 데에 이바지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정치적 개방으로 교회 안에서도 가능해진 갖가지 새로운 접촉은 희망을 일깨웠는가 하면 실망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불교․도교․이슬람․개신교․천주교 등 다섯 교단이 국가에 의하여 공식적으로 인정되어 있다. 다만 이들 공인 종교 단체 밖에서 종교적으로 활동하는 것은 단연코 ‘미신’으로서 탄압 받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종교의 ‘자유’는 없는 것이다. 공인된 모든 종교도 중국이라는 테두리 안에서만 전개될 수 있다. 즉 외국의 종교단체들에 의한 어떠한 의존관계도 허용되지 않는다.
1980년 이래 중국의 천주교회가 큰 진보를 이룬 것은 사실이나 아직 한 문제가 미해결로 남아 있다 : 로마의 주교인 교황과의 관계, 바티칸과의 관계라는 문제이다.
마오저뚱 사후, 중국정부의 개방정책 초년에는 새 정책에 바티칸과의 관계 개선도 포함되리라는 희망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 기대는 충족되지 않았다. 1980년 6월, 22년의 옥고 끝에 출감된 덩이밍(鄧以明, Dominkus Tang) 주교를 애국회와 국가가 광저우 교구 주교로 선임했는데, 바티칸에 들른 덩 주교를 바티칸에서도 광저우 대주교로 임명하자 애국회가 반발한 사건이 있었다. 그 결과 1981년 6월 광둥성 애국회와 광저우 교구는 덩 주교의 주교 직위를 박탈하고 애국회 대표직에서 해임시켰다.
이 사건 이후 북경에서는 5인의 새 주교가 서품되었는데(1981년 7월 24일), 주례자는 애국회의 새 회장 종화이더(宗懷德) 주교였다. 1981년 9월 27일에도 두 차례의 서품식이 있었고, 그 후로는 정규적으로 주교 서품식이 이어졌다. 1985년 1월(상해의 진루시엔(金魯賢) 주교와 리시더(李思德) 주교 서품)과 1986년 11월에도 서품식이 있었다.
다른 한 편 애국회와 어떤 타협도 거부하고 독자적인 지하활동을 추진하는 이들도 있었는데 이들은 계속 탄압과 체포를 당해야 했다. 1981년 11월, 상하이에서는 20명 이상의 사제와 신도들이 체포되었다. 이 모든 사실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중국교회 내부의 상황은 개선되어 가고 있었다.
오늘날 주도적인 종교정책 분위기가 결정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1982년에 당(黨)에서 이른바 ‘19호 문건’을 발표하고부터였다. 이 문서에서는 기존의 실용주의 자세가 강화되었다. 그것은 종교적 재건에 안전과 자신감을 부여하는 것이었고, 이로써 천주교회의 많은 자발적 활동이 청신호를 얻게 되었다.
매우 의미심장한 조짐이 나타난 것은 1985년 7월 3일이었다. 이 시점에서 바로 샹하이의 합법적 주교인 궁핀메이(龔品梅) 주교가 거의 30년간의 구금 끝에 석방된 것이다. 나라의 곳곳에서 교회 건물들이 각 종교 공동체들에게 다시 반환되는 일이 강력히 추진되었고, 신학교와 수녀원들이 신설되었다. 1984년에는 북경의 천주교 푸렌 대학(輔仁大學)에서 공부했던 동창생들의 모임도 생겼다. 자선사업 분야에서도 교회에 솔선적 활동이 허용되었다.
1986년 말에 북경의 한 교회회의에서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천주교회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새로운 자료들이 발표되었다. “그 동안 개방된 천주교회는 1,900군데가 있으며, 대신학교 여덟과 소신학교 셋 그리고 수녀원 열 군데가 있고, 1980년 이래로 20개 교구를 위하여 22인의 주교가 서품되었다. 950명 이상의 천주교인이 전국 또는 지방 차원에서 ‘중국 인민 정치 협상회의’의 회원이며, 1,600명 이상의 천주교인이 어떤 방식으로든 국가의 표창을 받았다.” 라고. 여기서 강조하고자 한 것은, 천주교회가 중화인민공화국 안에서 다시 하나의 공인된 사회생활제도가 되었다는 것이었다. 1986년 11월 16일부터 19일까지 약 200명의 천주교 주교․사제․신도들이 모여 회합을 하였는데, 이 회의에서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쇄신운동에 당분간 문호를 개방하지 않겠다고 합의하였다. 그리고 트렌트 공의회에서 규정되었던 라틴어 미사예식을 고수한다고 주교단 서기장 양가오젠 주교는 발표했다.
바티칸에 대한 관계에 있어서는, 종래와 마찬가지로 모든 외세로부터의 중화인민공화국 천주교회의 독립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1989년 6월 4일의 <천안문사태> 이후로 성직자들이 체포되고 교회는 과거보다 좀 더 심한 정부의 감시와 통제를 받으며 교회 생활은 다시 위축되고 있는 현실이다.
제6장 중국 교회의 재건과 관계 개선을 위한 방법 모색
1. 중국 복음화의 전망
<천안문 사태> 이후로 중국은 인민의 불만이 곧 폭발할 것 같은 화산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러나 정부가 막강한 힘으로 인민을 억압하고 있고, 중국인의 참고 견디는 특성으로 보아 폭발하지 않으리라는 견해도 없지 않다. 또한 중국 정부는 경제 발전을 위해 문호 개방을 지속하지 않을 수 없는 동시에 인민에 대해서는 강력하게 통제해야 하는 이율배반적 상황에 놓여 있다. 이러한 모순된 현 사회 속에서 많은 중국인들이 공산주의와 그 체제에 대해 불만을 갖고 있고 어떠한 대변혁을 갈구하고 있다. 더욱이 동구권의 변화 사례는 중국 안에서 긴장과 위기의 분위기를 만들고 있다. 오늘날 중국의 집권층이 확고한 위치에 있는 듯이 보이지만 변화가 오리라는 것이 일반적 견해이며 현 지도층을 대체할 만한 마땅한 인물이 없어 권력 승계에 위기가 닥친다면 중앙 권력이 약화되어 지방 분권 상황이 일어남으로써 중국 전체가 혼란에 빠지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어지러운 상황 속에서 중국인들은 종래의 정신 유산인 유교에서보다는 다른 곳에서 삶의 의미를 추구하려는 움직임이 특히 지성인들과 젊은이들 안에서 나타날 때에 교회는 복음을 전파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맞이할 수 있게 될 것이라 전망해 본다.
2. 중국 복음화의 방법
예수회원 이스마엘 줄로아가는 한 세미나에서 다음과 같이 제안하였다. “현재 중국 정부의 통제와 감시 속에서도 교회는 중국에 대한 관심을 버리지 않고 계속 접촉해야 할 것이다. 중국과의 접촉은 직접적으로 선교 및 사목 활동보다는 간접적 방법으로 정보와 문화의 교류, 사회봉사, 교회 서적의 제공, 성직자 양성을 위한 재정적 지원을 통해서 친교 관계를 맺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또한 교회 지원의 대상이 중국 교회에 관계되는 분야가 아니더라도 중국 정부의 요청이 있을 때에는 가능한 일이라면 협조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교회는 중국 교회에 눈을 돌릴 수도 있지만 중국인 전체를 위한 복지에 기여하는 것도 교회의 임무라는 사실을 유의해야 합니다. 이러한 사회사업에 기여하는 일이 중국 공산 정권을 지지하거나 정부 시책에 협조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또한 중국 교회 분야에 있어서도 교회는 <애국회>의 요청에 외면하지 않고 가능한 한 받아들이는 자세를 갖춤도 바람직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접촉에 있어서는 정부의 <애국회> 강제 조직과 이를 통한 교회 내정 간섭에 이의를 제기하여야 합니다. <지하교회>와의 접촉에는 중국 정부의 승인과 <공인교회>의 사전 상의가 전제됨을 유념해야 합니다. 모든 접촉에는 슬기로움이 필요합니다.”
3. 베네딕토 16세 교황님이 중국교회 구성원들에게 보낸 서한
- 베네딕토 16세 교황께서 2007년 5월 27일 중국교회 구성원들에게 보낸 서한 -
[이 서한의 목적]
- 형제적 친밀함의 표현
- 교회 생활과 복음화 임무에 관련된 몇 가지 지침 제시
[제1부 : 교회의 상황/ 신학적 측면/ 세계화와 현대성과 무신론]
- 중국의 사회 경제적 발전과 큰 진보를 이루어 온 점 고려
- 현 시대의 두 가지 현상 : 특히 젊은이들 사이에서 인간의 영적 초월적 차원과 그리스도교에 대한 관심이 점점 커져가는 것과, 다른 한편, 대도시들에서 전국으로 퍼져나가고 있는 물질주의와 향락주의의 경향이 나타남.
제1천년기 - 유럽에 그리스도교가 뿌리내림
제2천년기 - 아메리카 대륙과 아프리카 대륙에 뿌리 내림
제3천년기 - 아시아 대륙에서 신앙의 큰 열매를 수확하게 될 것이라는 분명한 인식이 생김
- 중화인민공화국 당국과 어떠한 형태든 대화를 시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의 의미 - “교회는 어느 모로도 정치 공동체와 혼동될 수 없으며, 결코 어떠한 정치 체제에도 얽매이지 않는다. 동시에 교회는 인간 초월성의 표지이며 보루이다.”(사목헌장 76항)
- 정의로운 사회는 교회가 아닌 정치를 통해 실현되어야 합니다.
- 보편 교회의 일치는 같은 신앙과 같은 세례뿐 아니라 성찬례와 주교직에 뿌리를 둡니다.
- 모든 주교가 베드로의 후계자와 이루는 교계적 친교는 모든 가톨릭 신자의 신앙과 삶의 일치를 보장합니다.
[중국의 주교직]
- 현재 중국에서는⋯서품되지 않은 사람들, 때로는 세례 받지 않은 사람들까지 다양한 국가 기관의 이름으로 주교 임명을 포함하여 중요한 교회 문제에 관한 결정들을 내리고 통제하고 있는 어려움에 직면해 있습니다.
- 주교는 축성과 함께 세 가지 구체적인 임무를 받습니다. 가르치는 임무, 거룩하게 하는 임무, 다스리는 임무이며, 이 셋이 합쳐서 사목 임무를 이룹니다.
- 현재 중국에는 일부 주교들이 교황의 위임 없이 서품을 받았고, 필요한 법적 허가를 요청하지 않았거나 아직 받지 못하였습니다. 하지만 유효하게 서품된 주교들에게 성품을 받았고 가톨릭 주교 서품 예식이 존중된 것이 확실하다면 유효하게 서품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황과 친교를 이루지는 않지만 그들은 성사 집전을 통해 비록 합법적이지는 않다 해도 그들의 직무를 유효하게 수행합니다.
[제2부 : 사목 생활 지침/ 성사, 교구와 본당 통치]
- 성찬례 공동 거행의 문제 - 동일한 신앙 고백 그리고 교황과 보편 교회와의 교계적 친교가 전제 되어야 합니다.
- 교황의 위임 없이 축성된 주교품은 비합법적이지만 유효합니다. 또한 그들이 수여하는 사제 서품은 유효하며, 그러한 주교와 신부가 집전하는 성사들도 유효합니다. 불가피한 경우 신자들은 교황과 친교를 이루고 있지 않는 이들도 찾아갈 수 있습니다.
[사제들]
- 사제들 영성의 샘에서 빛과 힘을 이끌어 내야 할 것입니다. 오랫동안 신부가 없어 사제를 목말라 하는 이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 보편 교회에서 거행하는 성 목요일 사제의 날이나 또는 더욱 적절한 다른 기회에, 사제들이 한 공동체로서 신앙 고백을 새롭게 하는 것보다 더 뜻 깊은 행위는 없을 것입니다.
- 성직자에 대한 계속 교육의 필요성이 부각되고 있습니다.
[성소와 양성]
- 최근 50년 동안, 중국 교회는 사제성소와 봉헌 생활 성소의 풍성한 꽃을 피워왔습니다.
많은 토착 수도회들이 생겨났습니다.
- 신중한 성소 식별, 예비성소자들에 대한 세심한 교육과 지도가 필요합니다.
- 인간적, 영적, 철학적-신학적, 사목적 측면과 관련하여 더욱 견실한 양성이 이루어지도록 보장할 필요가 있습니다.
- 사제의 독신 생활에 대한 교육 강조
- 수도 성소와 관련하여, 정결과 가난과 순종의 서원을 통하여 그리스도에게 자신을 전부 봉헌하는 은사를 증언하는 것과 오늘날 중국의 사회 역사적 상황에서 복음을 선포해야 하는 요구에 응답하는 것 두 차원을 더욱 분명히 고려해야 합니다.
[평신도와 가정]
- 중국 평신도들은 신앙을 용감히 증언해 왔습니다.
- 여러분은 목자와 이루는 친교 안에서 교회 생활의 모든 영역에 더욱 자발적으로 참여하여야 합니다.
- 가정은 젊은이들의 인격적 성숙의 터, 생명을 전달하는 곳, 아시아 문화에서의 가정의 소중함과 그 가치 인정해야 합니다.
[어른 그리스도교 입문]
- 예비신자 교리교육 기간 적절히 운용,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쇄신의 풍요로움 체험, 세례 후 재교육 기간 견실하게 운용
[선교 소명]
- 선교사인 교회는 복음을 선포하고 증언하도록 부름 받고 있습니다.
[결론 : 중국교회를 위한 기도의 날]
- 5월 24일은 신자들의 도움이신 성모 기념일인데 앞으로 전 세계 가톨릭 신자들이 기도 안에서 중국 교회와 일치하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상하이의 서산 성모 성지에서 신자들의 도움이신 성모님을 큰 신심으로 공경하고 있습니다.
[축복]
- 부활의 아침을 인내로이 기다리신 교회의 어머니이시며 중국 교회의 모후이신 지극히 거룩하신 성모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고, 요셉 성인과 중국의 수많은 순교 성인들과 더불어 여러분 모두를 위하여 전구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로마 성 베드로 좌에서 교황 재위 제3년 2007년 5월 27일 성령강림대축일
교황 베네딕토 16세
4. 중국 교회를 다녀온 이들의 회고와 전망
1) 박영대 베네딕토(우리신학연구소 소장) 중국 방문 회고
2007년 6월 10일부터 18일까지 북경, 석가장, 한단, 심양의 중국 천주교회를 둘러보았다. 본당, 신학교, 교구 사회사목 기구, 언론기관, 사회복지 시설(병원, 양로원, 장애인 시설 등)을 방문하였고, 각 교구 주교⋅하북성 정부 종무국장 등 여러 사람들을 만났다. 짧은 일정이었지만 중국 천주교회의 변화상을 느낄 수 있는 값진 체험이었다.
우리는 가는 교구마다 신학교를 방문했다. 많은 젊은이들이 신학교에서 사제 수업을 받고 있었고, 모든 교구가 신학교 운영에 힘을 기울이고 있었다. 신학교를 운영하고 가르치는 일은 외국서 유학하고 돌아온 젊은 사제들이 맡고 있었다. 활기가 넘치는 이 젊은 사제들을 보면서 늙은 중국 천주교회가 새롭게 변화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2) 타이위안(太原) 교구 류허(六合) 천주교회 방문
2002년 8월 17일에 부제 왕지앤공(王建公, 안토니오)의 사제 서품식이 거행되었다.
‘김대건 신부 장학회’는 1999년부터 2002년까지 2명의 중국 신학생의 유학을 주선하여 서울 대신학교에서 교육을 받도록 하였다. 이들이 양성과정을 마치고, 지난 6월 29일과 8월 17일 중국 현지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중국 텐진(天津) 교구 리동 신부와 타이위안(太原) 교구 왕지앤공 신부이다.
200년 가까운 역사를 지닌 타이위안 교구 류허 본당의 신자수는 6천여 명이고, 마을 주민의 9할 이상이 가톨릭 신자라고 하는데, 서품미사에 참석한 인원은 약 1만 명에 이르렀다. 사제서품미사를 주례한 당시 78세의 리찌언당(李建唐) 주교는 그해 12월, 주교 서품 32주년을 맞이하였다. 그 날 사제서품미사에는 서울대교구 김수창 신부를 비롯한 한국인 사제들과 이 본당 주임 짱준하이(張俊海) 신부를 포함한 타이위안 교구 사제단 등 48명이 함께 하였다. 이날 서품 미사에는 주수욱⋅백운철(이상 가톨릭대)⋅서춘배(서울 해방촌본당) 신부 등 한국사제들도 함께 했다. 서품식에는 여규태 한국순교자현양회 회장과 현양회원단, 왕 부제를 지원한 해방촌본당의 박상설 사목회장 등 130여명의 한국 신자가 참석, 새 사제의 탄생을 축하했다.
서품식에 다녀온 김수창 신부는 “중국교회 고위 관계자가 진보적인 서구라파 쪽보다는 중도적인 한국의 신학 교육이 중국교회에 더 적합하다는 인식을 갖고 있다.”고 한 말을 전해주었다.
3) 사랑의 씨튼 수녀회 오영숙 수녀 <중국 방문기>
- 2007년 6월 10-18일까지 여행, 회고록 중 일부 퍼옴
① 6월 11일 일기
베이징의 남당교회에는 주임사제인 장 프란시스코 하비에르 신부와 두 분의 보좌 신부가 있고 그 외에도 도움을 주는 신부 네 명이 더 있다고 하는데 장 신부님은 5대째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구교 집안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얼마 전에 돌아가신 주교님이 생전에 사회사목을 확장시켜 교구 내 복지센터 9곳과 의원 3곳, 그리고 각 본당마다 사회 사목분과를 두어 가난한 아이들과 가족들, 고아, 에이즈 계몽운동과 환자방문, 나환자, 자연재해 희생자들을 돕는 활동을 한다고 하는데 특히 나환자를 돕는 일에 한국 수녀님들이 헌신을 하고 있다고 한다.
남당교회는 언어교육센터를 운영하여 7,000여 명 정도가 참석을 하는데 영어, 불어, 한국어, 독일어 등을 가르치고 도서관과 출판사를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북경교구 18개 본당에 신자는 70,000명 정도, 사제는 55명이고, 사제평균연령은 35세라고 한다. 문화혁명당시 종교탄압으로 사제양성을 할 수 없었으므로 문화혁명전 사제와 그 후의 수품자 간의 연령차이가 크다. 문화혁명 후 종교 자유가 인정된 뒤에 처음으로 사제품을 받은 이들이 현재 40세 정도이다.
남당성당 신자는 6,000명가량인데 중국신자는 약 3,500명, 외국인신자는 약 2,500명 정도이며, 80%는 노인이고, 20%가 젊은이로 구성되어 북당성당보다 더 활동적이며, 세례자는 1년에 58명 정도이다.
북경교구 전체 세례자는 300명으로 세례자 대다수가 30세 이상이며 이들 중 어린이는 30-50명 정도라고 한다.
현재 중국에서는 각 교구의 교구장이 수녀회를 창설하여 운영하고 있는데 북경교구에는 성 요셉 수녀원이 있고 회원은 50명이다. 이곳 수녀님들은 전례 때만 수도복을 입고 평상시에는 수도복을 입지 않는다. 수녀님들이 하는 일은 우리나라와 거의 비슷하여, 본당, 병원, 교구청, 시설(양로원, 고아원 등)에서 사목을 한다.
신학교의 신학생은 36명이고 서품 후 7년 된 사제는 1년 동안 사제 재교육을 받는데 현재 37명의 사제가 이 교육에 참석하고 있으며, 7명의 중국인 교수 신부와 객원교수들을 초빙하여 강의를 하고 있고, 건물은 1996~2006년까지 10년에 걸쳐 지었는데 외국원조와 정부보조로 지었다.
현재 중국에는 12개의 신학교가 있는데 그중 허베이 교구 신학교가 가장 크며 신학생은 150명 정도이고 사천성, 내몽고, 산동성에서 오는데 국가에서 학력을 인정하는 유일한 신학교라고 한다. 신학생들은 신학교를 졸업하면 자신의 소속교구로 돌아가 봉사를 하고 있다가 정부에서 서품허락이 떨어져야 서품을 받을 수 있다고 한다.
② 6월 12일 - 석가장 교구 방문
점심 후 신학교 방문을 했다. 석가장 신학교는 119명의 신학생들이 있고, 철학 2년 신학 4년 과정으로 현재는 신학과 2, 3학년이 없는데 그 당시 정부로부터 신입생 선발 허락을 얻지 못해 신입생을 받을 수 없었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시설미비와 교수부족 때문이었다고 한다. 여기서는 철학과 2학년이 끝난 후 소속 교구로 돌아가 1년 동안 실습을 한 후 다시 신학 과정에 들어가는데 주로 허베이교구 신학생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허베이성에는 8개의 교구가 있다는데 (1987년 중국 정부에서 8개로 교구 정리를 함) 교황청에서는 13개로 알고 있다. 현재 이 신학교에는 151명의 신학생이 소속되어 있는데 그중 119명은 학교에서 공부 중이고, 32명은 사목실습을 하고 있으며 20여명의 교수신부 중 14명은 현재 가르치고 있고, 7명은 해외유학 중이며 필요한 교수진은 객원교수로 채우고 있다고 한다.
1984년 신학교 문을 다시 열 때는 시내에 있는 주교관에서 시작하였는데 학생 수가 점점 늘게 되자 1926년 당시 분도회 수도원이었던 현재의 땅을 돌려 달라고 요구하여 1989년 이곳으로 이사하여 지내면서 4년에 걸려 새 건물을 지어 1999년에 현재의 건물이 완성되었다고 한다.
③ 6월 14일
한단 교구의 천 주교님은 문화혁명 후 남아있던 4명 성직자 중 한 분이고, 지금 교구 내 신부님이 100여명, 주교님이 설립한 수녀원에는 200여명의 수녀들이 있고, 한단교구의 신자수는 150,000명, 전체 인구는 800만 명이라고 한다.
현재 중국교회의 문제는 첫째 증거생활의 부족인데 40년간 닫혀 있던 교회로 신자들이 그동안 자기 신앙을 드러내지 못하고 개인 신심 중심의 생활이었기 때문에 여전히 그 둘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실천, 나눔이 부족한 게 문제라고 한다.
둘째로는 복음화의 문제이다. 대부분은 세습신앙으로 아직 종교의 자유가 완전히 보장된 것이 아니라 선교를 하는데 문제가 있고 신자 간에도 40대미만과 80대 이상의 신자들 사이에 융화되지 못하는 부분과 사제들 간의 층도 많다고 한다. 두세대간의 세대갈등이나 차이가 심각하다고 하는데 신부, 수녀들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④ 6월 16일 - 심양교구 방문
1시 30분에 진 주교님(김패헌, 83세)과 보좌 주교님(배군민. 39세)을 만나 뵈었다. 부주교가 두 분인데 지금 한분은 독일 분도회에서 영성학 공부를 하고 있다고 했다. 80여분의 신부님들 중 문화혁명 이전의 신부님 다섯 분은 82세 이상이시고, 나머지는 45세 이하 이시란다. 교구 신학교가 있고 본당이 62개. 5개의 양로원. 5개의 진료소. 그리고 신자수는 10만 명이다. 현재 심양교구는 정부와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고 수녀, 사제들이 해외 유학을 많이 가 있다고 한다. 수녀원은 두 곳이 있는데, 심양의 성모성심회(파리외방 선교회에서 시작)와 무순의 예수성심회(메리놀회에서 시작)이다.
교구소속 남자 수도회는 없고 성모성심회, 프란치스꼬회가 들어와 있다고 한다.
[심양 대신학교 방문]
4층 건물의 신학교에는 운동장도 없고 유일하게 농구장 하나가 있었다. 8회에 걸쳐 240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는데, 그 중 160명이 서품을 받았다고 한다. 심양 신학교는 중국 전역에서 신학생을 받는 학교였고, 12명의 상주 교수신부와 외부강사, 교수 수녀가 있었다. 현재 41명의 신학생이 공부를 하고 있고(2반), 2년에 한 번 신입생을 받는데 5월 31일에 27명이 졸업을 해 소속 교구로 돌아갔고, 7월 중순에 신입생을 모집할 것이라고 했다.
현재 수녀님들을 위한 2년제 신학원을 운영 중인데, 중국도 성소가 점점 감소하고 있어, 평신도 교리신학원을 신설할 예정이고, 지금까지 이 학교를 졸업한 조선족 신부는 연길에 1명, 흑룡강에 1명이 있다고 하였으며, 5학년이 끝난 후 6~8개월간 실습을 한다고 했다.
이 신학교는 왜관 분도회의 도움을 받고 있는데, 현재는 황동환(이사악) 신부가 신학교에 상주하면서 중국어도 배우고 라틴어 초급반을 맡고 있었다.
5. 중국 교회에 관한 통계자료들
1) 중국 가톨릭교회 현황
중국 가톨릭 통계는 자료마다 약간씩 차이를 보인다. 홍콩 성령연구센터와 아시아 뉴스에 따르면 애국회와 지하교회를 합한 신자수는 1200만 명(전체 인구의 0.9%), 교구는 138개다. 2004년 성인 영세자 수는 15만 명이었다.
중국 정부가 국민의 1%에도 미치지 않는 가톨릭을 경계하는 이유는 중국이 바티칸과 외교관계를 수립하면 중국교회는 보편교회와 한 몸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중국이 내세우는 외교관계 수립 전제조건 중 하나가 내정 불간섭이다. 보편교회 영향으로 중국교회가 정치 사회 현실에 대해 '복음적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면 사회가 혼란해질 것을 염두에 둔 포석이다.
[중국 가톨릭교회 현황] 평화신문 2007년 4월 5일자
구성 인원 및 신학교 교회 구분 |
주교 |
신부 |
신학교 |
신학생 |
수녀 |
애국회(정부등록교회) |
67명 |
1,870명 |
14 |
580명 |
3,500명 |
지하교회(미 등록교회) |
44명 |
1,100명 |
10 |
800명 |
1,700명 |
2) 한국의 각 신학대학에 재학 중인 중국인 및 외국인 신학생 현황
2010년 8월 현재
학 교 명 |
중국 신학생 |
기타지역 신학생 |
합 계 | |||
학 부 |
대학원 |
학 부 |
대학원 |
학 부 |
대학원 | |
가톨릭대학교(서울) |
2 |
1 |
베트남 1 |
방글라데시 2 |
3 |
3 |
수원가톨릭대학교 |
- |
1 |
미국 1 베트남 1 호주 1 |
- |
3 |
1 |
광주가톨릭대학교 |
- |
- |
멕시코 1 |
- |
1 |
- |
부산가톨릭대학교 |
해당 사항 없음 | |||||
대구가톨릭대학교 |
해당 사항 없음 | |||||
대전가톨릭대학교 |
1 |
1 |
잠비아 2 몽골 1 베트남 2 |
방글라데시 2 |
6 |
3 |
인천가톨릭대학교 |
3 |
1(신부) |
잠비아 1 가고시마 1 |
가고시마 2 |
5 |
3 |
소 계 |
6 |
4 |
11+1 |
4+2 |
17+1 |
8+2 |
※ 인천신학교 가고시마 교구 신학생은 한국인으로서 가고시마 교구 소속으로 입학함.
※ 2011년 후쿠오카 교구 신학생으로 입적될 3명의 한국인 후보자가 인천가톨릭대학교에 입학을 준비하고 있음.
제7장 맺는 말
1. 중국의 현실 진단
중화인민공화국은 56개 다민족 국가로서, 중국인의 92%가 한족이다. 즉 92%의 한족이 8%의 소수민족을 지배하는 나라이다.
중국의 정치체제는 행정구조가 모두 이중구조로 되어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그 예로, 각 시에는 시장이 있다. 그러나 실권은 시의 당위원회 서기가 갖고 있다.
그리고 소수 민족이 많이 사는 지역을 ‘OO 민족자치구’ 라 말하고, 자치구보다 작은 지역은 ‘OO 민족자치주’라고 말한다. 티베트는 ‘티베트 민족자치구’ 이고, 조선족은 ‘조선족 민족자치주’ 이다.
각 자치구에는 주석이 있는데, 주석 자리는 모두 소수민족이 차지한다. 그러나 실권은 자치구의 당위원회 서기에게 있으며, 이 서기 직책은 반드시 한족이 맡는다. 절대로 소수 민족에게 서기 자리를 주지 않는다.
문제는 중국 젊은이들이 (특히 소수민족의 경우 그들의 미래가 없기에) 과거의 역사에 대해 바로 알려고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평소 ‘이것이 옳은 것인가?’라는 질문을 별로 하지 않고 그냥 현실 상황에 따라 가는 편이다.
그러나 한편 중국인은 자존심이 강한 민족이다. 그러기에 그들의 자존심을 건드려서는 안 된다. 중국인은 자신들을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나라’ 라고 생각하고 있고, 자신들은 천자국(天子國)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천자는 다른 나라의 우두머리는 평등할 수가 없고, 천자는 유일무이한 존재이다.
2. 긴급진단 - 바티칸-중국, 어제와 오늘
- 두 나라 국교 정상화에 애국회가 걸림돌 -
중국교회에 대한 바티칸의 정책 노선은 몇 차례 변화를 겪었다.
신앙교리성과 인류복음화성은 그동안 애국회에는 강경한 입장, 지하교회에는 유연한 입장을 견지했다. 그러나 바티칸은 1993년 직접 주관하는 지하교회(미등록 교회) 주교 임명과 서품도 곧 중단할 것이라고 발표했고, 실제 몇 년 뒤 주교 임명을 완전히 중단했다.
대신 애국회의 임의적 절차에 따라 서품을 받게 되는 주교들에게 사도좌의 사전 승인을 받으라고 촉구했다. 그게 여의치 않으면 적어도 사도좌와 모종의 협약에 의해 승인받았음을 밝혀 자신들의 위상에 규칙이나 질서를 세우라고 말했다.
바티칸 인류복음화성 장관 톰코 추기경(은퇴)은 강경 노선을 고수했다. 그러나 홍콩 성령연구센터(중국교회 전문연구소) 책임자 페르난도 필로니 신부(2007년 당시, 필리핀 주재 교황대사)는 애국회 소속 신부들이 집전하는 미사에 참례하는 것을 금지한 조치를 철회해 달라고 요청했다.
애국회는 합법성이 결여된 주교 임명과 서품을 강행했다. 그렇지만 점진적 변화는 있었다. 교황청으로부터 무언의 승인을 받아 주교를 임명하는 횟수가 점점 늘어나고 있는 점이 그것이다. 교황청이 1월 20일 "오늘날 중국 주교들과 사제들은 거의 대부분 사도좌와 긴밀히 친교하고 있다." 고 밝힐 정도로 관계가 호전됐다. 하지만 낙관은 이르다. 중국과 바티칸의 앞길에 많은 장애물이 있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이탈리아에 본부를 둔 '아시아 뉴스' 책임자 세벨레라 신부는 "최근 흥미로운 변화라면 중국 정부조차 애국회와 거리를 두려고 하는 점"이라며 정부와 애국회 관계를 주시하고 있다.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회 지아칭린(賈慶林) 의장은 2월 13일 정부가 공인하는 종교(가톨릭ㆍ개신교ㆍ이슬람ㆍ불교ㆍ도교)의 애국회 지도자들을 만난 자리에서 "종교는 조화로운 사회 건설에 긍정적 역할을 할 수 있다."며 "종교인들은 사회 조화를 옹호해야 하며, 여러분은 그들의 요청을 경청해야 한다."고 말했다. 조화로운 사회 건설은 후진타오 국가주석이 강조하는 슬로건이다.
세벨레라 신부는 "최근 한 공식조사에 의하면 중국 공인 종교의 신도 수는 약 3억 명"이라며 이에 대한 분석을 내놨다. "이 숫자로 추산하건대 애국회가 통제하는 공식조직으로부터 마음이 떠나 있는 신도 수는 약 2억 명이다. 근거는 간단하다. 종교 활동은 지극히 개인적 분야인데 애국회 통제를 따르려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애국회는 소속 신자들에게조차 비난을 받는 상황이다. 가톨릭의 모든 재산을 장악하고 있는 애국회 지도자들이 부동산을 멋대로 임대, 매각하기 때문이다. 수익금을 교구에 귀속시키지 않고 자기 주머니에 슬쩍 넣는 경우도 있다.
정부 지도자들은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애국회 권한을 축소하려고 한다. 한 소식통에 의하면 중국 외교부는 바티칸과 완전한 외교관계 수립까지 염두에 두고 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서거 직후, 베이징 외교가는 애도 전문을 보내고, 사랑의 선교회 초청 의사를 밝히는 등 바티칸에 유화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주력했다. 그런데 정작 애국회가 정부의 그런 변화 움직임에 부정적 태도를 보인다. 애국회는 수녀들 입국을 막고 있다. 또 지하교회 사제들에 대한 체포와 구금을 부채질하고 있다.
애국회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지도자는 '중국의 평신도 교황' 이라 불리는 류바이니엔(劉柏年, 안토니오, 73) 선생이다. 그는 지난해 11월에도 적절치 못한 수단을 동원해 비합법적 주교 서품을 관철시켰다. 류바이닌엔의 주 표적은 자신의 명령에 따르지 않는 지하교회, 홍콩의 젠제키운 추기경, 그리고 교회의 자유를 주창하는 세력이다"
평화신문 2007년 4월 5일자
3. 한국 교회와 중국 천주교회와의 상화적 관계 전망
- 김남수 주교님의 사제서품 50주년 회고록을 중심으로 -
- 김남수 주교님의 사임 이유 중 가장 소중했던 것은 북방 선교에 대한 김 주교님의 염원 때문이라 하셨다(서품 50주년 회고록 430쪽). 이들을 향한 소명을 주교님은 “한국 교회에 내려진 지상 명령”이라 일컬으셨다.
- 성소가 줄어들고 있는 유럽이나 미주 교회에 중국 선교를 의탁하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요한 바오로 2세 전임 교황님이 한국을 두 번이나 방문하신 것도 아시아에 거는 희망을 한국교회에 기대하셨기 때문이셨다. (세계성체대회 때에 오셔서 직접 주교단에 해 주신 말씀)
- 북한과의 관계에 있어서 정부 주도로 무엇인가 하고 싶어 하나, 더 먼저 민간 주도 교류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서품 50주년 회고록 435쪽)
- 덕원 신학교와 연길 교구 수도 공동체의 활동시기에 대부분의 자금원은 수도 공동체가 담당했었다. 중국이나 북한에서 활동할 경우 경비 문제에 대한 대안책이 필요하다. 우리가 중국에 가서 성당도 지어주고, 학교도 해야 하고, 무엇이든 전부 우리 힘으로 해야 한다.
- 지금 중국에서 전교할 수 있는 길은 중국인 신부님의 협조자로서만 가능하다. 중국인 신부님이 요청하는 일만 할 수 있다. 겸손한 사제, 선교사적 견해를 지닌 사제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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