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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을 계기로 의식의 변화가
증언자 : 임주윤(남)
생년월일 : 1963. 8. 18(당시 나이 18세)
직 업 : 고등학생(현재 무직)
조사일시 : 1988. 7
개 요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임주윤 씨가 시내시위 상황을 목격한 것과 자신이 부상당한 경위 등을 증언했다.
시위대와 공수대들의 충돌 목격
5·18 당시 나는 금호고 2학년에 재학중이었다. 그때는 왜 대학생들이 시위를 하는지에 대해 뚜렷한 의식이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단지 학생으로서 느끼는 호기심과 군중심리에 휩쓸려 참여하게 되었던 것 같다.
5월 16일 오후 4시경 수업을 마치고 학교 근방에는 집으로 가는 버스가 없어서 무등경기장 앞까지 걸어와 17번 버스를 기다리던 중이었다. 그때 전남대에서 나온 듯한 6백여 명의 학생들이 스크럼을 짜고 나타났다. 그들이 '신현확 물러가라', '전두환은 물러가라' 등 구호를 외치며 무등경기장 앞을 통과하자, 길가에서 있던 시민들이 박수를 보냈다. 이때 나는 시위대 맨 뒷줄에 끼어 무등경기장에서 전남방직에 이르는 2백여 미터의 구간을 따라갔다. 전투경찰들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배가 고파서 다시 무등경기장으로 돌아와 17번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갔다.
5월 19일 오전 11시에 학교가 파하고 친구(김희갑)와 함께 무등경기장 앞에서 17번 버스를 타고 집으로 오는데, 가톨릭센터 앞에서 시위대와 공수부대가 대치하고 있었다. 버스가 도청 앞을 통과하지 못할 것을 알고 옆길로 빠지자 나는 친구와 함께 시내상황을 구경하고 싶은 호기심에서 광주고교 앞에서 내렸다. 광주고 앞에서는 군데군데 공수대들이 총으로 무장하고 지키고 서있었다. 두려운 마음에 그들을 피해 도청 쪽으로 가는 도중 MBC 방송국 앞에서 승용차 두 대가 검 게 그을려 있는 것을 보았다. 이 승용차들은 경상도 출신의 공수부대원들이 전라도 사람들의 씨를 말리려 왔다는 소문 때문에 경상도 번호를 달고있는 승용차를 보고 격분한 시민들이 불을 질렀다고 했다. 공수들은 보이지 않고 많은 시민들이 모여 차가 불에 타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30여 분간 그곳에 머물러 있다가 가톨릭센터 앞으로 갔다.
가톨릭센터 앞은 이미 한 차례 투석전이 벌어졌는지 바닥 곳곳에 돌멩이와 유리조각들이 나뒹굴고, 최루탄가스로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을 정도였으며, 많은 시민들이 모여 있었다. 겹겹이 둘러싸여 잘 보이지는 않았으나 가톨릭센터 앞에서 군인들에게 붙잡힌 속옷 차림의 젊은이 10여 명이 보였다. 그들은 손이 등뒤로 묶인 채 무릎꿇은 상태에서 땅에 머리를 박고 있었다. 공수대원들이 발로 차서 고꾸라뜨리는 모습을 보았다. 시민들은 군인들의 미치광이 같은 행동에 경악을 금치 못하면서도 무서움에 선뜻 항의하며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시민들과 공수대들은 시멘트로 만든 화분 박스를 도로 군데군데 바리케이드로 사용하며 대치하고 있었다. 그때 한 여학생이 가톨릭센터 앞의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었다. 갑자기 2명의 계엄군이 여학생에게 달려들어 욕설과 함께 머리채를 잡아채며 몽둥이로 온몸을 두들겨팼다. 그러더니 도청 앞에 서있던 군용 트럭 3, 4대가 함께 있는 곳으로 끌고 갔다. 가톨릭센터 옆 골목과 건너편 상업은행 골목 옆에서 이를 지켜보던 200여 명의 시민들이 계엄군을 향해 "나쁜 놈의 새끼들, 놔줘라" 등의 야유와 함성을 질렀다. 공수대원들은 사과탄을 던지며 시민들에게 쫓아왔다.
도망치면서 뒤에 쳐진 사람들을 붙잡은 공수대들은 전신을 몽둥이로 내리쳤다.
나는 10여 명의 시민들과 함께 동구청 뒤로 해서 MBC 방송국 쪽으로 갔다. 가까스로 위기를 면한 나는 호기심에서 구경하고자 했던 생각이 싹 가시고 말았다.
함께 같던 친구와도 헤어지고 말았다. 나는 계엄군들의 만행으로 인한 놀라움과 배고픔으로 집에 빨리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전남대병원 앞까지 갔다. 전남대 병원의 오거리 길목에 대검을 착검한 공수부대원 10여 명이 일렬횡대로 열을 지어 서있는 것을 보았다.
그들을 보자 두려운 마음이 들었지만 무슨 약(환각제)인가를 먹고 내려왔다는 소문을 익히 들어왔던 터라 일부러 호기심에서 그 옆을 지나갔다. 그들의 눈은 살기로 가득 차 보였다. 발걸음을 재촉해 집으로 향하다가 가톨릭센터 앞에서 사과탄을 쏘아댈 때 헤어진 김희갑의 안부가 궁금하여 숭의실고 옆 학동 집으로 찾아갔더니 친구가 돌아오지 않았다. 되돌아나오다 마침 집에 돌아오는 친구 김희갑을 만났다.
친구는 그때 인근다방으로 들어갔다가 뒤쫓아온 계엄군에게 붙잡혀 어깨와 팔 부분을 두들겨맞았다고 했다. 그래도 교복 차림의 고등학생이라서 용케 살아서 돌아왔던 것이다.
5월 20일 오전중에는 집에 계속 있다가 오후 5시경 부모님이 안 계신 틈을 타 자전거를 타고 시내로 나갔다. 가톨릭센터 앞에서는 시위군중과 계엄군이 대치한 상태에서 투석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나는 집에 가려고 동구청 뒤로 돌아 노동청 앞으로 왔는데, 오후 6시경 노동청 앞에서 60세 후반으로 보이는 한 할아버지가 공수부대원들의 실상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순식간에 사람들이 군중을 이루었다. 이때 공수부대원들은 군데군데 대열정비가 안 된 상태로 총검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이들 중 지휘관으로 보이는 군인 한 명이 계엄군을 대동하고 다가와, "늙은 놈의 새끼가 나이를 먹었으면 집에나 있을 것이지 이런 데 나와서 헛소리를 해." 하며 노동청 앞에 3대 정도 서 있는 군용 트럭 뒤로 끌고가 몽둥이로 무자비하게 내려쳤다.
6시 30분경 도청 부근(현 콜박스)에서 친구들(이길환, 박명환)을 만나 도청 앞의 5천여 명이 넘어 보이는 시민과 시위대의 틈에 끼어 화염병 1개를 군용 트럭을 향해 던졌다.
밤도 되었고 계엄군의 잔학성을 본 후라 무서운 생각이 들어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도착한 시간은 저녁 7시경이었다. 군인들이 외곽으로 퇴각하면서 사람들을 모조리 죽인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8시쯤 계엄군이 장갑차 1대를 몰고 동네에 들어와 핸드마이크로 말했다.
"모두 집에 들어가 꼼짝 말고 있어라."
나는 집에서 3백 미터 정도 떨어진 친구(임희주)집에서 놀고 오다가 그 소리를 듣고 얼른 집으로 들어갔다. 집으로 들어간 후에는 계엄군의 모습을 볼 수 없었고, 계속 헬기가 비행하는 소리만 들렸다.
밤 10시경 집안에 있는 젊은이들까지도 전부 공수부대원들이 죽인다는 소문이 돌았다. 나는 동네 청년 10여 명과 함께 집에서 5백여 미터 떨어진 인근 산으로 피신했다. 10시 30분경 정체불명(계엄군으로 추측)의 장갑차 1대가 산을 향하여 1분간 기관총으로 발사하여 쥐죽은 듯 30여 분을 그대로 숨어 있었다. 더 높은 산 위로 올라가려 하는데 인기척이 있어 살펴보니, 반대편에서 산을 넘어온 광주 경찰서 직원이라고 밝히며 계엄군이 외곽지대로 퇴각했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 이야기를 듣자 집에 있는 것이 더 안전할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산에서 모두 내려 왔다.
광주는 해방되었다, 그러나...
5월 22일 오후 2시 집 앞에서 평복, 교련복 차림의 시위대들이 군용 트럭과 버스를 타고 몽둥이로 차를 두드리면서 '전두환을 처단하자' 등의 구호를 훌라송에 맞춰 부르며 화순 방면으로 가는 것을 보았다. 시위대들이 동네 구멍가게에서 음료수 등을 사면서 구경나온 사람들에게 '21일 시내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광주는 해방되었다'는 소리를 전해 주었다. 나는 시위대의 말을 듣고 시내상황이 궁금해서 자전거를 타고 도청 앞으로 갔다. 도청 앞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5월 21일 외신기자들이 격전 당시의 사진을 찍었다느니, 수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느니 하며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나는 상무관에 시체들이 있다는 말을 듣고 그곳으로 갔다.
상무관 안까지 들어갈 용기가 안 나 문 앞에서 내다보니 많은 관들이 상무관 안을 꽉 메우고 있었다. 일부 가마니로 덮여진 시체도 있었고 관뚜껑이 봉합 안 된 채 널려 있는 시체도 부지기수였다. 봉합이 된 것은 신원확인이 된 것인지 이름이 관 위에 씌어져 있었다. 그리고 가족의 행방을 찾는 사람들이 시체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확인하는 모습도 보였다. 이미 가족의 시체를 발견하고 대성통곡하는 유족들의 모습도 여기저기서 보였다.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상무관 앞을 나 와 집으로 오는 도중에 지원동 쪽으로 가는 큰 다리에서 군용 트럭 앞좌석에 놓여져 있는 직경 30센티미터 정도의 커다란 핏덩이를 보았다. 숭의실고 앞 냇가에는 군용 트럭 2대가 전복되어 뒹굴고 있었다. 이곳에서 시민군과 계엄군간의 격전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5월 23일 아침 6시경 지난 밤새 내내 들려오던 총성이 그치자 어떤 상황인가 알아보고자 대문 밖으로 나가보았다. 탄피를 줍는다고 따라나오던 동생을 집안에 있게 하고는 22일 화순 방면으로 가다가 피신온 대학생(서울대 경제학과 3년, 성명미상)과 함께 대문 밖으로 5미터 정도 나오니, 집으로부터 1백50미터 떨어진 근산(공동묘지)에 매복되어 있던 공수부대원 4명이 우리 쪽으로 다가오며 총을 쏘았다. 순간 나는 뒤쪽 어깨로부터 온몸에 뜨거운 것이 전해 왔다.
관통상을 입고 집에 들어가 마루에 누워 있자 계엄군들이 곧 뛰어들어와 누가 총에 맞았느냐고 했다. 계엄군이 부상당한 나를 2, 3개의 탈지면을 어깨에 넣고 붕대로 윗몸을 감아 대강 지혈한 후 나를 군 주둔지인 산으로 끌고 갔다. 거기서 내가 학생이라고 하자, "너희들 때문에 우리들이 죽고 있다." 하면서 군인이 곤봉으로 관통을 당한 환부를 때리고 군화발로 가슴을 걷어찼다.
1시간 정도 지나서 응급환자를 실을 헬기가 왔다. 헬기에는 김남용(논에 가다가 총상) 씨와 손모 씨, 부상군 3명이 함께 탔다. 시민군들이 헬기에 총을 발사하기에 고공비행을 하였다.
통합병원에서 조선대병원으로
상무대에 내리자마자 군용 병원차로 위의 부상자들과 함께 육군통합병원으로 옮겨졌다. 병원에 도착한 후 나는 잠자지 말라는 군의관의 소리를 들으면서 의식을 잃었다. 의식이 돌아올 무렵 기자들이 뺨을 때리면서 나이, 직업, 어디서 부상당했는가 등을 물었다. 완전히 의식을 회복한 다음에야 교실 한 칸 남짓한 병실에 80여 명이 넘는 부상자들이 있는 것을 보았다. 병실은 보초병의 카빈총 무장 하에 외부와 완전히 차단되었고 라디오 등도 전혀 청취할 수 없었다. 다른 부상자들과는 내부에서 대화가 가능하였으나 가끔 보초 군인으로부터 말조심하라고 주의를 받곤 했다. MBC 방송국 앞에서 계엄군에게 총개머리판으로 머리를 심하게 두들겨 맞은 신묘섭(당시 농고 3, 현재 용인정신병원 입원중) 씨는 통합병원으로 수송된 후 20일 만에 깨어나더니 정신이상 증세를 보이며 '신현확 물러가라' 등의 구호를 큰소리로 외치곤 했다. 또 김영묵 씨는 목포 방면에서 논에 가다가 계엄군의 총상으로 팔이 절단나는 부상을 당했다고 했다.
날짜는 기억할 수 없으나 육군통합병원에 있을 때 전남합동수사본부에서 나와 부상자 1명씩 의사대기실로 불러내어 시위참여 여부를 조사했다. 내가 집 앞에서 총에 맞았다고 하니까 그곳에서는 총격전이 없었다며 협박하고 유도심문을 하였다. 조사과정에서 구타는 없었다. 그리고 치료하는 도중 모기관에서 나온 5만 원을 병실내 부상자들에게 전부 돌렸다. 그러자 전남대 사학과 3년 김윤희(현재 서울 거주) 씨가 돈 봉투를 던지며 이런 것 주려고 사람 죽이고 때렸느냐며 악을 쓰고 소동을 부리자 돈 봉투를 전달하러 왔던 사람의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 뒤 조사과정에서 학생으로 보이는 이추자(당시 임신 3개월쯤, 현5·18 부상동지회 여부회장)씨가 김윤희로 오인되어 구타당했다는 소문을 들었다.
조선대병원으로 옮겨진 뒤 친구(백명환, 이길환)들의 이야기를 들으니 6월에 지원동 방죽에서 수영하고 내려오는 길에 길 옆 산에서 썩은 냄새가 나기에 파보니 신원을 알 수 없는 시체 2구가 묻혀 있더라는 것이었다. 이들 시체는 퇴각하던 공수부대원들이 암매장했던 것으로 보인다.
6월 20일에 육군통합병원에서 조선대병원으로 옮겨 9월에 퇴원하기까지 석 달 간에 걸쳐 입원 치료를 받았다. 그 후에는 약국을 경영하는 누님의 도움을 받아 자가치료를 했다. 1987년 10월 26일 기독병원에 재수술을 받았다. 현재는 재수술 경과를 알고자 한 달에 두 번 정도 병원에 다니고 있다. 당시의 관통상으로 왼쪽 팔꿈치가 탈구되어 제대로 사용할 수 없으며 쉬 피로감을 느끼고 복통까지 동반한다. 이 복통은 육군통합병원에서 수술이 끝난 후 내가 갈증으로 물을 찾자, 계엄군에게 몽둥이로 온몸을 두들겨맞고 팔과 다리를 대검에 찔렸던 신경진(당시 학생, 부상자동지회 회원)씨가 준 우유를 먹고 생긴 것이다.
광주항쟁은 민족생존을 위한 투쟁이었다
5·18 이후 나는 조선대 전자계산학과를 졸업하고 현재는 5·18 광주민중항쟁 부상자 동지회에서 조직부장을 맡고 있다. 당시는 5·18이 왜 일어났는가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었다. 그저 군중심리에 의해 시위에 참여했으나 내가 부상을 당하고 난 후 조금씩 의식의 변화가 일어났다. 도청 앞에서 김밥을 싸서 주시던 아주머니들의 모습과 광주시민들의 질서정연하고 단결되었던 모습 등은 5·18이 결코 폭도나 불순분자의 난동이 아니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5·18은 멀게는 동학농 민전쟁과도 그 맥을 같이하는 것으로 학생은 물론 노동자, 농민들까지 군부독재에 저항한 자기생존을 위한 투쟁이었다.
5·18에 대한 정부의 보상은 물질적인 것보다 정신적인 것이 앞서 부상자, 유가족들에게 씌워진 폭도, 불순분자 등의 오명이 씻어지고 위상이 정립되어야 할 것이다. 나는 정확한 진상규명을 통하여 5·18 희생자들과 광주시민의 명예를 회복시키기 위해 투쟁을 계속할 작정이다.
(조사.정리 옥유화) [5.18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