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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경산림 대법회 제35강 -2 (2013. 1. 7.)
大方廣佛華嚴經 卷第十三
菩薩問明品 第十.
八. 修行甚深(수행심심)
2. 智首菩薩의 偈頌答 - (3) 隨機讚歎(수기찬탄)
(4) 諸行成果(제행성과)
九. 一道甚深(일도심심)
1. 文殊問賢首菩薩(문수문현수보살)
* 種種不同(종종부동) *
2. 賢首菩薩의 偈頌答 - (1) 一法一道一心一智
(2)隨機見不同(수기견부동)
(3) 敷衍解釋(부연해석)
十. 境界甚深(경계심심)
1. 諸菩薩問文殊菩薩(제보살문문수보살)
* 十種佛境界(십종불경계) *
2. 文殊菩薩의 偈頌答
(1) 如來境界如虛空(여래경계여허공)
(2) 億劫不可說(억겁불가설)
(3) 佛境度衆生(불경도중생)
(4) 世間皆隨入(세간개수입)
(5) 佛智如虛空(불지여허공)
(6) 一切境悉了知(일체경실요지)
(7) 一切音悉了知(일체음실료지)
(8) 非識所能識(비식소능식)
(9) 非業非煩惱(비업비번뇌)
(10) 一念悉明達(일념실명달)
十一. 總結
1. 娑婆世界差別明現
법 설하는 것이 각각 다른 경우를 소개를 합니다.
(3) 隨機讚歎(수기찬탄)
慳者爲讚施하고 毁禁者讚戒하며
多瞋爲讚忍하고 好懈讚精進하며
亂意讚禪定하고 愚癡讚智慧하며
不仁讚慈愍하고 怒害讚大悲하며
憂慼爲讚喜하고 曲心讚歎捨하시니
如是次第修하면 漸具諸佛法이니라
慳者爲讚施(간자위찬시)하고,
아끼기를 좋아하는 사람, 아끼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보시를 찬탄하고,
그렇습니다. 이것은 법에 대한 보시든 물질에 대한 보시든 간에, 또 법에 대해서 아끼든지 물질에 대해서 아끼든지 아끼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보시를 찬탄하고, 또
毁禁者讚戒(훼금자찬계)하며, 禁 = 금계라고 하는 뜻에서 역시 戒지요.
계를 헐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파계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戒를 찬탄하고,
多瞋爲讚忍(다진위찬인)하고, 화를 잘 내는 사람에게는 인욕을 찬탄하고,
好懈讚精進(호해찬정진)하며,
게으르기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정진을 찬탄하며,
亂意讚禪定(난의찬선정)하고,
생각이 어지러운 사람에게는 선정을 찬탄하고, 이것이 처방전이지요.
앞에는 전부 병이라면 뒤에는 전부 처방전입니다.
愚癡讚智慧(우치찬지혜)하며, 어리석은 한 사람에게는 지혜를 찬탄하며
不仁讚慈愍(불인찬자민)하고, 不仁한 사람에게는 慈愍,
자비롭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찬탄하고
怒害讚大悲(노해찬대비)하며, 성내고 남을 해치는 사람들에게는 大悲,
크게 불쌍히 여기는 것을 찬탄하고, 大悲를 찬탄하며,
憂慼爲讚喜(우척위찬희)하고, 근심스러워하는 사람에게는 기쁨을 찬탄하고, 늘 근심걱정에 얼굴이 찌그러져 있는 사람. 그것이 憂慼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늘 긍정적이고 환희로워하고 기뻐하는 그런 삶을 찬탄해 = 讚喜하고,
曲心讚歎捨(곡심찬탄사)하시니,
曲心 = 마음이 굽으러져 있는 사람은 讚歎捨라. 이것은 평등을 말하는 것입니다. 불평등한 것을 모두 버리는 겁니다. 그대로 자비희사지요. 사무량심. 앞에는 육바라밀. 그 다음에 자비희사.
如是次第修(여시차제수)하면, 이와 같이 次第대로 수행할 것 같으면
漸具諸佛法(점구제불법)이니라. 점점 모든 불법을 구족하게 된다.
여러 가지 불법을, 뭐 여러 가지 수행법이 많습니다만, 대승불교에서는요? 이 육바라밀과 사무량심. 이것만 알면 됩니다. 수시로 이것을 ‘내가 어떻게 생활에 실천할 것인가?’ 사실은 이것만 가지고 설법해도 됩니다.
육바라밀ㆍ사무량심. 이것이 아주 짧은 게송이지만 이 게송 속에 우리의 병과, 그 병에 따르는 처방전이 아주 명확하게 이렇게 나와 있지 않습니까? 이것을 가지고 부연설명 하면, 몇 달ㆍ몇 년을 설법을 해도 사실은 남지요.
(4) 諸行成果(제행성과)
如先立基堵하고 而後造宮室인달하야
施戒亦復然하야 菩薩衆行本이니라
譬如建城郭은 爲護諸人衆인달하야
忍進亦如是하야 防護諸菩薩이니라
譬如大力王을 率土咸戴仰인달하야
定慧亦如是하야 菩薩所依賴니라
亦如轉輪王이 能與一切樂인달하야
四等亦如是하야 與諸菩薩樂이니라
諸行成果. 제행의 결과 이룸을 말하는 것이지요.
如先立基堵(여선립기도)하고, 예컨대 먼저 基堵 = 기틀하고 담장.
이런 것을, 건물을 세우려면 토지를 잘 정비 해야지요. 그리고 펜스를 치든지 담장을 치든지 그런 것을 세웁니다. 그런 뒤에 그 안에다가
而後造宮室(이후조궁실)인달하야, 宮室을 그 뒤에 짓게 된다.
조그마한 집을 지어도 그렇게 하지 않습니까? 터를 고루고 그 주변을 다른 사람이 못 들어오게 펜스라도 치고 그리고 나서 그 안에서 공사를 하잖아요. 宮室을 짓게 된다.
施戒亦復然(시계역부연)하야, 보시와 지계도 또한 그와 같아서
菩薩衆行本(보살중행본)이니라.
보살의 온갖 수행 가운데 보시 지계가 근본이 된다.
譬如建城郭(비여건성곽)은, 비유하자면 성곽을 건립하는데 있어서
爲護諸人衆(위호제인중)인달하야,
모든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성곽을 두르잖아요.
忍進亦如是(인진역여시)하야, 인욕과 정진도 또한 다시 이와 같아서
防護諸菩薩(방호제보살)이니라. 모든 보살들을 防護한다 = 막아서 보호한다. 인욕과 정진은 그런 역할을 하고 있다.
譬如大力王(비여대력왕)을, 비유하자면 큰 힘이 있는 왕이
率土咸戴仰(솔토함대앙)인달하야, 모든 국토 사람들이 전부 우러러 보지요? 그 率土之民이 莫非王臣(솔토지민막비왕신)이다. 그런 옛날 관념은 그래요. 온 천하 백성들은 전부 왕의 신하다. 이런 관념이 있듯이 率土之民 = 온 천하ㆍ온 나라 사람들. 이런 뜻입니다. 전부 우러러 보고 있지요?
定慧亦如是(정혜역여시)하야, 선정과 지혜도 또한 이와 같아서
菩薩所依賴(보살소의뢰)니라. 보살이 의지하는 바가 되나니라.
亦如轉輪王(역여전륜왕)이, 또한 전륜왕이
能與一切樂(능여일체락)인달하야,
능히 일체사람들로 하여금 함께 즐거워하듯이
四等亦如是(사등역여시)하야, 자ㆍ비ㆍ희ㆍ사,
사무량심을 四等이라고도 하지요. 사무량심도 또한 이와 같아서
與諸菩薩樂(여제보살락)이니라. 모든 보살로 더불어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전륜왕이 모든 국민들과 함께 즐거워해야지요.
맹자에도 보면 그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왕은 동산을 잘 만들어 놨어요. 그래놓고, 아주 넓게 해놓고 아무도 못 들어가게 했어요.
자기들만 = 왕만 거기 가서, 그 동산에서 사냥도하고 노는 겁니다.
어느 나라 왕은 동산이 조그만 해요. 그런데 개방을 해가지고 모든 국민들이 다 가서 놀 수 있도록 해놨어요. 그래 맹자에게 어느 나라의 동산이 넓으냐? 이것을 질문을 합니다. “넓은 동산을 만들었어도 국민이 못 들어가게 하는 동산은 평수가 아무리 넓다 하더라도 그것은 좁은 것이고, (사람이 못 들어가니까 좁지요.) 아무리 100평이나 200평 밖에 안 되는 동산이라 하더라도 모든 국민이 다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게 했으니까 그 동산이야말로 무한히 넓은 동산이다.” 아이고 맹자도 대단해요. 이런 소리를 할 줄 알아요. 하하하하하 그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것을 與民同樂이라고 그래요.
여민동락 = 백성들과 더불어 함께 즐거워한다. 낙을 함께 누린다하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런 입장에서는 여기 부처님의 가르침이야 더 말할 나위 없지요.
그 다음에 아홉 번째
九. 一道甚深(일도심심)
1. 文殊問賢首菩薩(문수문현수보살)
* 種種不同(종종부동) *
爾時에 文殊師利菩薩이 問賢首菩薩言하사대
佛子야 諸佛世尊이 唯以一道로 而得出離어시늘 云何今見一切佛土의 所有衆事가 種種不同이니잇고
所謂世界와 衆生界와 說法과 調伏과 壽量과 光明과 神通과
衆會와 敎儀와 法住가 各有差別이니 無有不具一切佛法하고
而成阿耨多羅三藐三菩提者니이다
一道甚深, 한 길로 심히 깊다.
文殊問賢首菩薩, 현수보살에게 묻는 것입니다. 種種不同이라.
爾時에 文殊師利菩薩이
問賢首菩薩言하사대, 현수보살에게 물어 말하되
佛子야 諸佛世尊이
唯以一道(유이일도)로 而得出離(이득출리)어시늘,
오직 한 길로써 出離. 벗어남을 얻었거늘,
云何今見一切佛土(운하금견일체불토)의, 어찌하여 지금 보니까
一切佛土의 所有衆事(소유중사)가, 있는바 온갖 종종방편이지요.
여러 가지 일들이
種種不同이니잇고? 왜 각각이 다릅니까?
불교에 얼마나 많은 방편이 있습니까? 무수한 방편이 있지요.
여기는 방편보다도
所謂世界(소위세계)와, 세계가 각각 다르고
衆生界와, 중생계가 다르고
說法과, 설법이 다르고
調伏과, 사람을 조복시키는 법이 다르고 또
壽量과, 壽量이 달라요. 오래 사는 사람, 좀 얼마 못 사는 사람, 또
光明과, 光明도 다르고요. 이것은 부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중생도 그렇지만 부처님도 역시 그래요.
神通과, 光明도 다르고, 神通도 다르고요.
衆會와, 대중이 모인법회도 다르고
敎儀와, 교화하는 의식도 또한 달라요.
法住가, 법이 얼마동안 머물러 있는가? 아까 청량스님이 표현한 제5 오백년에 대한 그런 이야기가 있었는데요. 법이 머무는 것. 그것도 각각 달라요. 그렇지요. 우리나라 스님들을 보더라도 당대에는 굉장했는데 뒤가 없는 사람들, 멀리 안 가는 사람들, 그 법이 오래 안 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 크게 소문은 안 났어도 그 법이 오래오래 지속 되는 그런 경우도 있고요. 회사가 그렇고, 법이 그렇고, 가문이 그렇고, 가풍이 그렇고 모든 분야가 다 그렇습니다. 그것이 法住에 해당되는 것이지요. 그런 것이
各有差別(각유차별)이니, 각각 차별이 있으니
無有不具一切佛法(무유불구일체불법)하고,
일체 불법을 갖추지 아니하고
而成阿耨多羅三藐三菩提者(이성아뇩다라삼먁삼보리자)니이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루는 것이 있지 않습니다. 그런 내용을 질문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 현수보살의 게송 답이라.
2. 賢首菩薩의 偈頌答
時에 賢首菩薩이 以頌答曰
時에 賢首菩薩이 以頌答曰
그 때에 현수보살이 게송으로 답해 가로되,
(1) 一法一道一心一智(일법일도일심일지)
文殊法常爾하야 法王唯一法이니
一切無礙人이 一道出生死니라
一切諸佛身이 唯是一法身이며
一心一智慧니 力無畏亦然이니라
一法一道一心一智.
제가 소제목을 그렇게 붙여놨는데요.
文殊法常爾(문수법상이)하야, 문수여 법이라는 것이 항상 늘 그러해
法王唯一法(법왕유일법)이니, 법왕은 알고 보면 오직 하나의 법이다.
법의 왕은 오직 하나의 법이다. 뭔가 하니
一切無碍人(일체무애인)이 一道出生死(일도출생사)니라.
이것을 원효스님이 아주 노래삼아 부르면서 늘 경주 시내를 돌아다녔다.
一切無碍人一道出生死라. 아마 요석공주하고 썸싱이 있고 나서부터 이 노래를 그렇게 많이 불렀다는 겁니다. 一切無碍人이 一道出生死. 근사하잖아요? 일체 아무 것도 걸림이 없는 사람은 一道出生死라. 한 길로 생사를 벗어났는데, 소소한 범인들이 그 도의 깊이를 어찌 알겠습니까?
一切無碍人 = 일체 걸림이 없는 사람은 한 길로 생사를 벗어나느니라.
一切諸佛身(일체제불신)이 唯是一法身(유시일법신)이며,
일체 모든 부처님의 몸이라고 하는 것은 오직 한 법신이다.
통째로 진리의 몸이 그것이다 이겁니다. 산천초목 천지만물이 전부 一法身입니다. 그대로가 법신 비로자나불 몸이다 이 말이지요.
唯是一法身이니다.
一心一智慧(일심일지혜)니, 한 마음으로 하나의 지혜일뿐이니
力無畏亦然(역무외역연)이니라. 이것을 부처님으로 표현할 때 십력으로 표현하고, 사무외로도 표현하고 그러지요. 역시 그 부처님이라고 하는 것도 또한 그러하니라.
(2) 隨機見不同(수기견부동)
如本趣菩提에 所有廻向心하야
得如是刹土와 衆會及說法이니라
一切諸佛刹이 莊嚴悉圓滿이나
隨衆生行異하야 如是見不同이니라
隨機見不同이라. 근기를 따라서 그 見이 不同하다.
如本趣菩提(여본취보리)에 所有廻向心(소유회향심)하야,
本趣菩提 = 근본보리에 회향하는 마음이 있는 것과 같이
得如是刹土(득여시찰토)와, 이와 같은 刹土와
衆會及說法(중회급설법)이니라. 衆會 = 대중들의 모임과 그리고 설법이 같으니라.
一切諸佛刹(일체제불찰)이
莊嚴悉圓滿(장엄실원만)이나, 그 장엄이 모두모두 원만하지만,
隨衆生行異(수중생행이)하야, 중생들의 행하는바가 다른 것을 따라서,
사실 모든 부처님의 국토는, 부처님의 안목으로 볼 때, 뭐 그것이 인도가 됐든, 아프리카가 됐든, 한국이 됐든, 미국이 됐든 똑 같습니다. 그리고 어디 없이 사실은 모두 다 莊嚴悉圓滿입니다.
제가 자주 언급하지만, 부처님께서 始成正覺(시성정각)하시니
其地(기지)가 堅固(견고)하야 金剛所成(금강소성)이라.
그 땅이 견고해서 다이아몬드로 이루어졌더라. 깨달음의 안목으로 보면 어느 지역ㆍ어느 국토ㆍ어느 나라 할 것 없이, 모두가 그 장엄이 그대로 원만한 상태입니다. 우리는 내 입장에 맞추어 가지고, 또 그 입장이라고 하는 것이 그야말로 좁디좁은 소견으로 살아온, 그야말로 콧구멍만한 소견으로 살아온 그 것이지요. 그것가지고 잣대로 삼아서 모든 것을 재려고하니까 그것이 어디 맞아 떨어집니까? 전부 불평불만 부족한 것투성이고, 불만스러운 것투성이고, 나하고는 전부 안 맞고 그렇지요. 그런데 여기뭐라고요?
一切諸佛刹이 莊嚴悉圓滿이라.
그 장엄이 하나도 건들지도 않고 현재 있는 그대로입니다. 그 장엄이 모두 원만하나, 중생들의 행하는 바를 따라 다르다 말입니다.
如是見不同(여시견부동)이니라.
이와 같이 그 보는 바가 같지 아니하다. 중생들의 소견에 문제가 있는 것이지, 무슨 지역이라든지 국토라든지 상황이라든지 무슨 기후라든지, 거기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3) 敷衍解釋(부연해석)
佛刹與佛身과 衆會及言說이여
如是諸佛法을 衆生莫能見이니라
其心已淸淨하고 諸願皆具足한
如是明達人이라야 於此乃能覩니라
隨衆生心樂과 及以業果力하야
如是見差別하니 此佛威神故니라
佛刹無分別이며 無憎無有愛로대
但隨衆生心하야 如是見有殊니라
以是於世界에 所見各差別이니
非一切如來 大仙之過咎니라
一切諸世界에 所應受化者는
常見人中雄하나니 諸佛法如是니라
敷衍解釋이라. 부연해서 해석한다.
佛刹與佛身(불찰여불신)과, 부처님의 세계, 그리고 부처님의 몸
衆會及言說(중회급언설)이여, 衆會 = 대중들의 모임, 그리고
言說 = 말씀.
如是諸佛法(여시제불법)을, 이와 같은 모든 불법을
衆生莫能見(중생막능견)이니라. 중생이 능히 보지 못한다. 그것을 어찌 다 이해하겠습니까? 다 못 보지요?
其心已淸淨(기심이청정)하고, 그 마음이 이미 청정하고
諸願皆具足(제원개구족)한, 모든 소원이 다 구족한
如是明達人(여시명달인)이라야, 이와 같이 明達한 사람.
밝게 통달사람이라야
於此乃能覩(어차내능도)니라.
여기에 또한 능히 그러한 사실을 볼 수가 있다.
隨衆生心樂(수중생심락)과, 衆生心에서 좋아하는 바와, 그리고
及以業果力(급이업과력)하야, 業果의 힘을 따라서, 그렇지요.
업 따라서 다 다르잖아요. 또 각자 좋아하는 바가 또 다 달라요.
如是見差別(여시견차별)하니, 이와 같이 보는 것이 차별하니
此佛威神故(차불위신고)니라. 이것은 부처님의 위신력 때문이다.
佛刹無分別(불찰무분별)이며, 佛刹에 분별이 없음이여
無憎無有愛(무증무유애)로대,
미워할 것도 없고 또한 사랑할 것도 없음이로되,
但隨衆生心(단수중생심)하야, 다만 중생들의 마음을 따라서
如是見有殊(여시견유수)니라. 이와 같이 그 견해가 다름이 있느니라.
그것 참, 근래에 일반적으로 자주 쓰는 것이 아까 말씀드렸지만, 견해가 다르다는 것이지 틀린 것은 아니다. 라고 하는 이 사실, 참 상당한 발견이지요. “다름이 있느니라.” 여기 틀리다고 말은 안했잖아요. 한결같이 다르다고만 말했지, 화엄경에서는 다르다고만 말했지, 틀리다ㆍ옳지 않다. 라고 표현은 잘 안합니다. 중생의 견해가 다름이 있느니라.
以是於世界(이시어세계)에, 이것으로써 세계에
所見各差別(소견각차별)이니, 所見이 각각 차별하나,
非一切如來(비일체여래) 大仙之過咎(대선지과구)니라.
一切如來. 여래를 大仙. 그러지요. 큰신선의 허물이 아니다.
우리 본마음의 허물도 아니고, 부처님의 허물도 아니고, 보살의 허물도 아니고 단 우리생각. 개인적으로 떠올리는 그 생각들이 문제가 있는 것이지요.
一切諸世界(일체제세계)에
所應受化者(소응수화자)는, 응당히 교화를 받을 사람들은
常見人中雄(상견인중웅)하나니, 항상 人中雄.
사람가운데 영웅을 보나니, 부처님이지요?
諸佛法如是(제불법여시)니라. 모든 부처님의 법이 이와 같느니라.
그렇습니다. 부처님도, 눈을 뜨고 보면 항상 그대로, 온 우주 법계에 여여하게 있는 것이지요. 소동파의 시처럼 산천초목이 그대로 비로자나법신 부처님이고, 온갖 소리는 부처님의 광장 설법이다. 하는 그런 내용입니다.
十. 境界甚深(경계심심)
1. 諸菩薩問文殊菩薩(제보살문문수보살)
* 十種佛境界(십종불경계) *
爾時에 諸菩薩이 謂文殊師利菩薩言하사대
佛子야 我等所解를 各自說已로소니 唯願仁者는 以妙辯才로
演暢如來의 所有境界하소서
何等이 是佛境界며 何等이 是佛境界因이며
何等이 是佛境界度며 何等이 是佛境界入이며
何等이 是佛境界智며 何等이 是佛境界法이며
何等이 是佛境界說이며 何等이 是佛境界知며
何等이 佛境界證이며 何等이 是佛境界現이며
何等이 是佛境界廣이니잇고
境界甚深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부처님 경계를 뜻하는 것입니다.
제대로 하면 “佛境界甚深” 이렇게 해야 되겠지요.
諸菩薩이 問 文殊菩薩이라. 여러 보살들이 문수보살에게 묻는 것입니다.
爾時에, 그 때에 諸菩薩이
謂文殊師利菩薩言하사대, 문수보살에게 물어 말하되,
佛子야 我等所解(아등소해)를, 우리들이 알고 있는 바가
各自說已(각자설이)로소니, 알고 있는 바를 다 각각 이야기했다.
저~ 앞에서는 문수가 묻고 다른 보살이 대답을 했지요? 여기는 다른 모든 보살들이 문수보살에게 묻는 겁니다. 그럼 문수보살이 대답을 해야 될 차례인 겁니다.
唯願仁者(유원인자)는, 오직 원 하옵노니 어지신 문수보살께서는
以妙辯才(이묘변재)로, 미묘한 변재로써
演暢如來(연창여래)의 所有境界(소유경계)하소서.
여래의 所有境界를 演暢하소서. 설명 좀 해주십시오. 이 말입니다.
여래의 경계를 이야기할 사람은 오직 문수보살뿐입니다. 물론 다른 보살들의 이름을 빌려서도 얼마든지 표현이 되었지만, 아주 확실히 드러나게 여래의 경계를 이렇게 이야기한다. 라고 하는 경우는 문수보살입니다. 딴 보살은 감히... 내용상은 여래의 경계를 이야기하는 것처럼 경전에 돼있습니다. 돼있지만, 주로 그렇게 명문화 하지는 않습니다. 뭘 묻는가 하니
何等(하등)이 是佛境界(시불경계)며, 이것은 전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總(총)이라고 그러지요. 그 다음에 別(별)인데요.
何等이 是佛境界因(시불경계인)이며, 그랬습니다.
앞에서는 무엇이 부처님의 경계냐? 또 무엇이 부처님의 경계 因이냐? 그랬습니다. 境界因이라고 하는 것은 말하자면 부처님의 경계는 무엇으로써 씨앗을 삼습니까? 원인을 삼습니까? 이런 말이지요.
何等이 是佛境界度(시불경계도)며, 그랬습니다. 이것은 부처님 경계에 있어서 중생을 제도하는 의식. 度 = 중생 제도라는 뜻입니다. 중생을 제도하는 의식이 무엇입니까? 이 말입니다. 또
何等이 是佛境界入(시불경계입)이며, 그랬습니다.
이것은 중생을 근기 따라서 제도하려면 세상에 들어가야 됩니다. 그 세상에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중생들의 근기에, 어떤 상황에 들어간다고 하는 뜻을 入이라고 그랬어요. 또
何等이 是佛境界智(시불경계지)며, 그랬습니다.
무엇이 부처님경계의 지혜냐? 이것은 능히 아는 지혜. 또
何等이 是佛境界法(시불경계법)이며, 그랬습니다.
이것은 소지지법 = 반드시 알아야할 법. 그 다음 일곱 번째는
何等이 是佛境界說(시불경계설)이며, 그랬습니다.
이것은 원음으로써, 원만한 음성으로써 말하자면 설하시는 부처님의 말씀.
그것을 물으신 것이고, 또 여덟 번째는
何等이 是佛境界知(시불경계지)며, 그랬습니다.
이것은 체상을 밝게 안다. 體와 相을... 본체와 그 본체의 현상들을 밝게 아는 것. 그것을 佛境界知, 그랬어요. 또
何等이 佛境界證(불경계증)이며, 이것은 안으로 평등한 것을 증득한 것, 그것을 佛境界證이라고 그래요. 그 다음에
何等이 是佛境界現(시불경계현)이며,
佛境界現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법을 나타내는가? 하는 現자는 법을 나타내는 것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 다음에
何等이 是佛境界廣(시불경계광)이니잇고? 그랬습니다.
그 불경계의 량이 작고ㆍ크고 하는 그러한 것들을 표현해서 佛境界廣.
廣자 하나만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이것 아주 까다로운 내용입니다.
因이라고 원인 因.
度 = 중생 제도하는 것.
入 = 들어가는 것.
智 = 지혜.
法 = 법.
說 = 설법.
知 = 아는 것.
證 = 증득한 것.
現 = 나타내는 것.
廣 = 넓이의 大ㆍ小. ←이것을 물었습니다. 이것을 여러 보살들이 문수보 살에게 물은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요.
2. 文殊菩薩의 偈頌答
時에 文殊師利菩薩이 以頌答曰
時에, 그 때에
文殊師利菩薩이 以頌答曰, 문수보살이 게송으로 답해가로되
(1) 如來境界如虛空(여래경계여허공)
如來深境界여 其量等虛空하시니
一切衆生入호대 而實無所入이니라
如來의 深境界(여래심경계)여, 깊고 깊은 경계여
其量이 等虛空(기량등허공)하시니, 그 양이 허공과 같으니
一切衆生이 入(일체중생입)호대 而實無所入(이실무소입)이니라.
하~~ 좋은 표현입니다. 일체중생이 모두 여래의 경계에 들어가지만, 전부 그 나름대로 부처님경계에 다 조금씩ㆍ조금씩 각자 방향 따라서ㆍ취향 따라서 들어가지만, 而實無所入이니라. 혹은 관세음보살로 들어가고ㆍ혹은 지장보살로 들어가고, 심지어 산승ㆍ칠성, 온갖 인연 따라서ㆍ취향 따라서 그렇게 들어가지만 들어가는 바가 없지요. 사실은 표시가 없잖아요. 우리는 화엄경으로 들어가고ㆍ혹은 법화경으로 들어가고, 여래의 경계는 허공과 같다.
(2) 億劫不可說(억겁불가설)
如來深境界의 所有勝妙因은
億劫常宣說하야도 亦復不能盡이니라
如來深境界(여래심경계)의 所有勝妙因(소유승묘인)은,
부처님의 깊고 깊은 경계의 그 원인, 수승하고 미묘한 씨앗은
億劫常宣說(억겁상선설)하야도, 억 겁 동안 항상 설명한다 하더라도
亦復不能盡(역부불능진)이니라. 또한 다시 다할 수가 없느니라.
(3) 佛境度衆生(불경도중생)
隨其心智慧하야 誘進咸令益케하시니
如是度衆生이 諸佛之境界니라
佛境度衆生, 부처님의 경계에서 중생 제도하는 것.
隨其心智慧(수기심지혜)하야, 그 마음의 지혜를 따라서
誘進咸令益(유진함령익)케하시니, 유혹하고 또 나아가게 사람을 끌어들이려면 뭔가 수단을 쓰지요. 유혹하고 나아가게 해서 함께 이익을 얻게 하는 것, 이익하게 하나니.
如是度衆生(여시도중생)이, 이와 같이 중생을 제도 하는 것이
諸佛之境界(제불지경계)니라. 모든 부처님의 경계더라.
(4) 世間皆隨入(세간개수입)
世間諸國土에 一切皆隨入하사대
智身無有色하시니 非彼所能見이니라
世間皆隨入이라. 세간이 다 따라 들어가다.
世間諸國土(세간제국토)에
一切皆隨入(일체개수입)하사대, 일체 다 따라서 들어가지만
智身無有色(지신무유색)하시니, 지혜의 몸에는 색이 없어요.
우리 육신처럼 이런 색을 가지고 있지 아니하나니
非彼所能見(비피소능견)이니라. 다른 사람, 다른 사람이 능히 볼 바가 아님이라. 彼 = 다른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이 능히 볼 바가 아니다. 부처님이 지혜의 몸이니까요.
(5) 佛智如虛空(불지여허공)
諸佛智自在하사 三世無所礙하시니
如是慧境界가 平等如虛空이니라
佛智如虛空이라. 부처님 지혜는 허공과 같다.
諸佛智自在(제불지자재)하사, 제불의 지혜는 자재 하시사
三世無所碍(삼세무소애)하시니, 삼세에 걸림이 없으시니
如是慧境界(여시혜경계)가, 이와 같은 慧 = 지혜의 경계가
平等如虛空(평등여허공)이니라. 평등하여 허공과 같나니라.
(6) 一切境悉了知(일체경실요지)
法界衆生界가 究竟無差別을
一切悉了知하시니 此是如來境이니라
一切境悉了知라. 일체경계를 다 了知한다.
法界衆生界(법계중생계)가 究竟無差別(구경무차별)을,
법계와 중생계가 구경에 차별이 없는 것을
一切悉了知(일체실료지)하시니, 일체를 다 아나니
此是如來境(차시여래경)이니라. 이것은 여래의 경계다.
법계 그대로 중생계고, 중생계가 그대로 법계다ㆍ진리의 세계입니다.
중생세계하고 진리의 세계하고 다른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바로 그 자체에서 진리를 보는 겁니다. 중생, 거기에서 진리를 보는 겁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중생에서 부처를 봐야 됩니다.
그것이 제가 늘 주창하는 “인불사상” 이지요. “사람이 그대로 부처님이다.” 고 하는 인불사상입니다. 究竟無差別이라 했잖아요. 결국 가서는 차별이 없다. 우리 잘 알고 있는 心佛及衆生是三無差別(심불급중생시삼무차별). 이라고 하는 내용하고 똑 같은 것이지요. 그것을 一切悉了知하시니 此是如來境이라. 이것은 여래의 경계다.
(7) 一切音悉了知(일체음실료지)
一切世界中에 所有諸音聲을
佛智皆隨了하사대 亦無有分別이니라
一切世界中(일체세계중)에 所有諸音聲(소유제음성)을,
일체 세계에 있는 모든 음성들을
佛智皆隨了(불지개수료)하사대, 부처님의 지혜가 다 따라서 알아요.
이것 참, 액면대로 그냥 우리가 이해를 해서 이런 것 하나쯤 있으면 참 좋겠지요? 저절로 영국을 가면 영어하고ㆍ중국가면 중국어하고ㆍ일본가면 일본어하고ㆍ스페인가면 스페인어하고,
一切世界中에 所有諸音聲을 佛智皆隨了라고 했잖아요. 다 따라서 안다.
了 = 요달했다.
만능 통역기가 요즘 개발이 되고 있지요? 어느 정도 개발이 상당히 되었습니다. 전화기에도 그것 다운받아가지고 하면, 어지간한 것 번역 다 해줘요. 영어로도 해주고 일어로도 해주고 중국어로도 해주고요. 그런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아주 정교해지면 정말 이제 외국어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말 그냥 딱 하면, 전화기 앞에 놓고 우리말로 하면 바로 영어로도 번역해주고ㆍ일본어로도 번역해주고요. 그 쪽에서도 영어나 일본어로 하면 바로 우리말로 번역이 되어서 내가 들을 수 있고요. 동시통역이 그냥 아무 걸림 없이 되고 하는 그런 기술은 이제 머지않았습니다. 지금 상당히 많이 되어 있습니다. 한 50%는 성공한 상태입니다.
亦無有分別(역무유분별)이니라. 또한 분별이 없다.
(8) 非識所能識(비식소능식)
非識所能識이며 亦非心境界라
其性本淸淨을 開示諸群生이시니라
非識所能識이라. 식으로서 능히 알 바가 아니다.
이것은 조사스님들의 경전 해석이라든지 논설을 쓸 때, 아주 많이 인용하는 구절입니다.
非識所能識이며 亦非心境界(역비심경계)라. 그랬습니다.
식으로써 능히 알 바가 아니다. 이것은 識情ㆍ情識, 그 다음에 우리가 심경계. 우리가 흔히 心意識. 부처의 경계를 우리가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은 莫不由斯心意識(막불유사심의식). 그랬습니다. 심의식을 말미암지 아니한 것이 없다. 이 심의식 때문에 사실은 우리가 본성자리를 제대로 꿰뚫어보질 못한다. 그랬습니다. 심의식 = 6식ㆍ7식ㆍ8식이지요. 우리는 그 경계 속에서 놉니다. 그런데 깨달음의 경지는 그 심의식으로 될 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식으로 능히 알 바가 아니고, 또한 心境界도 아니다. 이렇게 표현을 했는데, 심의식으로 되어 있는 = 6식ㆍ7식ㆍ8식으로서는 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하는 것입니다. 정말 그 경계를 뛰어넘어야, 뛰어넘어야 말하자면 툭 터진 그런 어떤 佛智慧. 부처의 지혜에서 모든 것을, 본성을 우리가 볼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 여기 보면 그 다음에
其性이 本淸淨(기성본청정)을, 그 성품 본래 청정한 자리. 그것은 6식으로도 안 되고ㆍ7식으로도 안 되고ㆍ8식으로도 안 됩니다. 우리는 기껏해야 6식ㆍ7식ㆍ8식의 경계입니다. 其性本淸淨. 우리의 본성이 청정한 것을, 그러니까 여기 性 = 우리본성을 말하는 것이고, 心意識할 때 그 心 = 6식을 말하는 것입니다. 마음 心자도 쓰는 경우에 따라서 이렇게 다릅니다. 분명히 그렇게 이해해야 되겠지요. 그 본성은, 성품이 본래 청정한 것을
開示諸群生(개시제군생)이시니라. 모든 群生들에게 開示 하느니라.
부처님은 완전히 其性이 本淸淨. 그 성품이 본래 청정한 자리에서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는 心意識경계에서 알아듣는 겁니다.
심의식 경계에서 알아들으니까 아무리 본래 청정한 본성자리에서 이야기를 해도 그것이 납득이 잘 안 되는 겁니다. 알쏭달쏭한 겁니다.
그야말로 기차를 타고 서울을 막 달려가면요? 빌딩도 막 달려가요. 나는 가만히 있는데 빌딩이 막 달려가요. 사실은 내가 가만히 있는 것은 아니지요. 내가 탄 기차가 빨리 달리는 것이지요. 산도 간다니까요. 산도 가고 빌딩도 막 지나 가요. 그것이 가는 것이 아니잖아요. 그것은 불생멸입니다. 움직이지 않는 것인데 내가 움직이니까 가만히 있는 것마저도 움직이는 것으로 보이는 겁니다. 이치가 그와 같습니다.
그와 같아서 우리가 심의식을 가지고 본성이 청정한 자리, 본심ㆍ본심, 본마음ㆍ마음ㆍ마음, 그 깊은 그 마음, 불생불멸의 그 마음을 이해하려고 무진 애를 쓰긴 쓰는데, 그것이 얼른 탁~ 와 닿지가 않는 겁니다. 그 한 꺼풀 탁 벗어져야 되거든요. 그것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한 꺼풀 탁 벗어졌을 때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불생멸의 입장에 있으면 생멸하는 것도 불생멸입니다. 연기마저도 불생불멸이라니까요. 아침이슬ㆍ저녁연기마저도 불생불멸이 되는 겁니다. 내가 불생불멸이 되면 아침이슬ㆍ저녁연기, 무상하기 이를 데 없는 그 존재마저도 불생불멸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내가 생멸하면 산천초목도 막 지나가요. 막 움직입니다. 빌딩이 쉭쉭 막 지나가버립니다. 빌딩이 언제 움직이든가요? 이치가 그와 같습니다.
우리가 그 경지에 이르지 못했다고 해서 불생불멸을 부정하면 큰일 나는 것이지요. 우리가 아침마다ㆍ저녁마다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 외우지 않습니까? 분명히 그런 이치가 있는 겁니다. 그것을 開示諸群生. 그랬습니다. 其性本淸淨을 開示諸群生이니라. 이 구절을 참 많이 인용합니다. 다른 조사스님들 보면요. 불교에 있어서 어떤 깨달음의 경지ㆍ심성의 문제ㆍ심의식의 문제는 이걸로 그냥, 이것이 근본입니다. 이 네 구절이 근본이 돼가지고 이야기가 되니까요.
(9) 非業非煩惱(비업비번뇌)
非業非煩惱며 無物無住處며
無照無所行일새 平等行世間이시니라
非業非煩惱. 업도 아니고 번뇌도 아니다.
非業非煩惱며, 업도 아니고 번뇌도 아니며,
無物無住處(무물무주처)며, 사물도 없고 住處도 없으며,
無照無所行(무조무소행)일새, 비춤도 없고 행하는 바도 없을세.
平等行世間(평등행세간)이시니라. 평등하게 세간을 행하나니라.
이것이 우리본성이 청정한 자리에 떡~ 앉아있으면, 그 자리에 턱~ 앉아있으면 그냥 이렇게 되는 겁니다. 非業非煩惱입니다. 無物無住處입니다.
無照無所行. 照 = 우리마음이 사물을 이렇게 이해할 때, 그것을 照라고 그러지요. 밖을 향해서 비추는 것. 행하는 바도 없고 平等行世間이라. 평등하게 세간을 행한다. 모두가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으로 삶을 살아간다. 그런 뜻입니다.
(10) 一念悉明達(일념실명달)
一切衆生心이 普在三世中이어늘
如來於一念에 一切悉明達이시니라
一切衆生心(일체중생심)이 普在三世中(보재삼세중)이어늘,
三世. 과거ㆍ현재ㆍ미래에 두루두루 다 있어요. 일체중생의 마음이 과거ㆍ현재ㆍ미래에 꽉 깔려있어요. 그야말로 一念卽時無量劫(일념즉시무량겁)입니다.
如來於一念(여래어일념)에 一切悉明達(일체실명달)이시니라.
여래는 一念가운데서 일체를 明達한다 = 밝게 통달하느니라.
그 다음에 菩薩問明品의 總結.
十一. 總結(총결)
1. 娑婆世界差別明現(사바세계차별명현)
爾時此娑婆世界中에 一切衆生의 所有法差別과 業差別과
世間差別과 身差別과 根差別과 受生差別과 持戒果差別과
犯戒果差別과 國土果差別을 以佛神力으로 悉皆明現하며
總結. 총 결론입니다.
娑婆世界差別明現이라. 사바세계에도 차별되게 밝게 나타난다.
爾時에
此娑婆世界中에, 이 사바세계 가운데에 一切衆生의
所有法差別(소유법차별)과, 법의 차별과
業의 差別(업차별)과 世間의 差別(세간차별)과
身差別(신차별)과, 몸의 차별과 根의 差別(근차별)과
受生差別(수생차별)과, 생을 받는 그런 차별과
持戒果差別(지계과차별)과, 계를 가지는데 대한 결과로서의 차별과
犯戒果差別(범계과차별)과, 계를 범하는데 대한 결과로서의 차별과
國土果差別(국토과차별)을 以佛神力(이불신력)으로, 佛神力으로써
悉皆明現(실개명현)하며, 모두모두 다 환하게 부처님 神力은 내려다보고 있다.
2. 法界差別明現(법계차별명현)
如是東方百千億那由他와 無數無量無邊無等과
不可數不可稱不可思不可量不可說인 盡法界虛空界一切世界中에
所有衆生의 法差別과 乃至國土果差別을 悉以佛神力故로
分明顯現하시니 南西北方과 四維上下도 亦復如是하니라
如是東方百千億那由他(여시동방백천억나유타)와,
이와 같이 동방으로 백천억 나유타와
無數ㆍ無量ㆍ無邊ㆍ無等(무수무량무변무등)과,
不可數ㆍ不可稱ㆍ不可思ㆍ不可量ㆍ不可說(불가수
불가칭불가사불가량불가설)인
盡法界虛空界一切世界中(진법계허공계일체세계중)
所有衆生(소유중생)의 法의 差別(법차별)과
乃至國土果의 差別(내지국토과차별)을
悉以佛神力故(실이불신력고)로, 모두 부처님이 神力을 쓴 까닭에
分明顯現(분명현현)하시니, 분명하게 밝게 드러내시니
南西北方(남서북방)과 四維上下(사유상하)도
亦復如是(역부여시)하니라. 또한 다시 이와 같으니라.
이렇게 해서 菩薩問明品, 내용이 아주 참 알차고, 중요한 내용들이 참 많았습니다. 오늘 공부만 하더라도, 기본적인 육바라밀과 사무량심. 이 열 가지가 수행의 아주 기본이지요. 그 다음에 다문에 대해서 이야기라든지, 해태한 문제에 대한, 게으름의 문제라든지 과거 조사스님들이 자주 인용하는 그런 내용들이 많이 菩薩問明品안에 실려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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心佛及衆生是三無差別(심불급중생시삼무차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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