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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 대해 전해지는 많은 일화 중 시러큐스의 왕 히에론의 왕관이 순금으로 이루어졌는지를 생각하다 방법을 발견하고는 옷 입는 것을 잊어버리고 "알았다!(Eureka!)를 외치며 거리로 뛰쳐나왔다는 "목욕탕 사건"이 유명하다. 그는 이 때 발견한 "역학의 제1법칙(부력의 법칙)"으로 왕의 왕관에 다른 물질이 섞여있음을 밝혀 냈다. 합성 도르레장치를 발명하여 많은 사람들이 달라붙어야 움직일 수 있는 커다란 배를 혼자서 간단히 끌어올렸고, 또 지렛대를 발명하여 "나에게 서 있을 자리를 다오. 그러면 지구를 움직여 보일 것이다."라고 주장했다고도 한다. 그가 젊은 시절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의 도서관에서 공부 할 당시 "아르키메데스의 스크류(screw)"라는 유명한 기계를 발명했는데 이것은 들에 물을 대거나 늪지의 물을 빼내기 위해 고안된 것으로 오늘날까지 이집트에서 이용되고 있다고 한다. 그의 천부적인 재능은 전쟁 무기를 개발하는 데도 힘을 발휘했다. 무적의 마르켈루스 군대도 아르키메데스의 무기 때문에 3년 동안이나 시러큐스를 포위하고 있어야 했다. 적의 배에 무거운 돌을 떨어뜨릴 수 있는 투석기라든지, 적의 배를 물에서 끌어올릴 수 있는 기증기 등 그의 무기는 로마 병사들이 사기를 꺽어 놓기에 충분했다. 이에 방심한 시러큐스인들은 다이아나 축제 기간에 술과 향락에 빠져 경계를 소홀히 하는 바람에 기습을 당하고 말았고, 연구에 몰두하느라 도시가 침략 당한 것도 모르고 있던 아르키메데스는 로마 병사에 의해 죽음을 당했다. 적장 마르켈루스는 아르키메데스를 존경하고 있었기에 그의 죽음을 애통해 했고, 평소묘비에 직원기 등에 내접하는 구의 그림을 새겨 달라고 했다는 아르키메데스의 소원을 받아들여 주었다. 아르키메데스가 위대한 무기를 만들고 많은 발명을 했지만 그가 진정으로 사랑한 것은 순수 수학이었다. 플루타르크의 말을 빌면 그는 자신의 발명품들을 저서나 주석서로 남기지 않았고 그런 기술이 상업화나 단순한 사용, 이익을 남기기 위한 모든 일을 더럽고 천박한 것으로 생각하여 거부하고 그의 온 사랑과 포부를 순수한 학문에만 두었다고 한다.
아르키메데스의 저작은 수학적 설명의 깔끔한 표현, 우아한 끝맺음, 위대한 독창성, 계산 기술과 논증의 엄격함 등을 보여주는 걸작품이며 놀라울 정도로 현대 논문집들의 논문과 유사하다. 약 열 개의 논문이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고 그 외에도 많은 논문이 쓰여졌지만 분실되었다는 흔적이 있다. 평면 기하에 대한 논문으로 <원의 측정, Measurement of a Circle>,<포물선의 구적법, Quadrature of the Parabola>,<나선에 관하여, On Spirals>가 전해진다. <원의 측정>에서 아르키메데스는
명제1. 원의 넓이는 직각을 낀 두 변이, 한 변은 원의 반지름과 같고 다른 한 변은 원의 둘레와 같은 직각삼각형의 넓이와 같다. 또한 π 값에 대해서도 논하고 있다. 명제2. 원둘레의 그 지름에 대한 비는
이를 소수점으로 표현하면 3.140845…<π <3.142857…로 π 값을 소수점 아래 두자리까지 정확하게 계산하고 있다. 이 계산을 위해 아르키메데스가 사용한 방법은 원에 내접하는, 또 외접하는 정다각형의 변을 늘려 가면 원둘레와 다각형의 둘레가 점점 근사하게 됨을 이용하였고, 이 계산을 위해 어려운 제곱근을 계산을 수행해 냈다. <포물선의 구적법>에서는 포물선에 둘러싸인 부분의 넓이를 무한등비급수를 이용해서 찾는 방법을 보여주는데 이는 매우 비상한 방법으로 오늘날 미적분학 책에서도 다루고 있다. <나선에 관하여>에서는 오늘날 아르키메데스의 나선으로 알려진 곡선
3차원의 공간기하학에 관한 논문으로 <구와 원기둥에 대하여, On the Sphere and Cylinder>, <의원추와 회전타원제에 대하여, On Conoids and Spheroids>란 논문이 있는데, 이 중 <구와 원기둥에 대하여>에서 구의 겉넓이에 대하여 다음 명제를 증명하였다.
명제3. 임의의 구의 겉넓이는 구의 대원의 넓이에 4배이다.
즉, 구의 겉넓이가 4
산술에 관한 논문으로 <모래 계산가, Sand Reckoner>가 있다. 여기서 아르키메데스는 지구의 중심을 중심으로 하고 태양까지의 거리를 반경으로 하는 구를 모래로 가득 채운다면 이 모래에 대한 상한이 어떻게 되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큰 수의 표현에 대한 산술 체계를 이용하고 있다. 이 계산을 통해 그는 그리스인의 수 개념의 범위를 엄청나게 확대시켰고, 또한 한없이 커가는 수의 구성가능성과 함께 수의 무한성이라는 개념도 담고 있다. 그 외 <평면 평형에 대하여, On Plane Equi libriums>, <부체에 관하여, On Floating Bodies>란 응용수학 논문이 남아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수학자를 세 사람만 꼽아 보라고 한다면 아르키메데스, 뉴턴, 그리고 가우스를 꼽을수 있을 것이다. 고대 최고의 지성이었던 아르키메데스는 철두철미하게 근대적이었다. 흘라톤의 과도한 엄밀성을 요구하는 철학이나 수에 대한 신비주의적 사고 등 그 무엇에 사로잡히는 일없이 자유로이 사고를 전개했던 유일한 고대인이었다. 그리스의 수학자들이 유클리드나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보다 아르키메데스를 더 따랐더라면 17세기에 데카르트나 뉴턴과 함께 시작된 근대 수학의 시대, 같은 세기에 갈릴레이의 손에서 시작된 근대 문리학의 시대를 2,000년 전에 앉아서 맞이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볼테르의 말대로 "아르키메데스의 머릿속에는 호머의 머릿속보다 더 많은 상상력이 들어 있었다. -수학사랑 통권 7호에서 발췌- |
출처 ; http://210.99.195.2/~jhso92/frame-men.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