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섭리를 본뜬 한옥 집을 지을 때는 자신의 몸을 기준으로 삼고 안정감을 고려했다. 일반적으로 서민들의 집의 방 크기는 한 변이 15척(尺)1)이었다고 한다. 15×15가 최소한의 평면이었다. 형편이 좋아지면 18척으로 사방을 정할 수 있었고, 신분이 높아지면 21척이나 24척을 설정했다. 15척(3×5), 18척(3×6), 21척(3×7), 24척(3×8), 27척(3×9)…. 보는 바와 같이 모두 숫자 3과 관련이 있다. 3은 천일(天一), 지일(地一), 태일(太一)의 천지 조화수와 같다. 또한 5라는 수는 한국 사람들의 평균신장 5척과 같다. 또한 5는 오행으로 보면 토(土)로서 우주의 중심에 해당한다. 그런 3과 5가 합쳐 15수를 이루었다. 보통 15×15의 방에서 기거했는데, 우주 대자연의 섭리 안에서 생활한 것이라 하겠다. 15척 중앙에서 보면 좌우와 전후에 7.5척씩의 간격이 생겨난다. 여기에 7.5척은 평균 신장 5척과 앉은키의 눈 높이까지의 평균치 2.5척이 합쳐진 것이다 평면뿐만 아니라 입면 구성도 마찬가지이다. 방의 천장 높이를 보통 7.5척으로 잡는다. 앉은 키 위에 서 있는 사람 한 길2)을 합한 수치이다. 이것은 기(氣)의 원활한 소통을 위한 것이다. 대청마루 또한 기의 순환을 고려하여 만들어졌다. 마루 중심부 가장 높은 자리를 10자로 잡은 것이다. 5자를 사람들 평균신장으로 설정했을 때 마루에 서 있는 사람의 머리 위로 한 길이 되는 여유를 두게 한 것이다. 대청마루는 보통 평균신장의 두 배를 잡는다. 마루는 서서 생활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여 설계했다. 백회에서 솟아오른 기(氣)가 기세 좋게 뻗어나가 순환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높이로 만들어진 것이다. 옛날에는 마을공동체 단위의 생활을 했기 때문에 방은 개인을 위한 공간으로, 대청은 대중을 위한 열린 공간으로, 마당은 마당대로 큰일을 치르는 공간으로 쓰였다. 개인과 대중을 함께 고려한 가장 합리적인 구조가 우리의 전통한옥이라 할 수 있다. 한옥은 특별한 소재로 만든 인위적인 구조물이 아니다. 나무와 흙, 돌 등 자연 그대로의 소재를 이용했다. 한옥은 마루, 온돌뿐만 아니라 지붕의 기울기, 기단, 창과 문 그리고 돌담에 이르기까지 자연섭리에 바탕을 둔 철학과 정밀한 과학이 어우러져 있다. 생활의 가장 기본적인 의식주에서부터 자연의 섭리, 곧 우주의 섭리에 따르는 지혜를 가진 한민족! 미래세계를 주도할 문화대국으로서 다시 우뚝 설 날을 기대해 본다. --------------------- 1)척(尺)=자: 한 치의 열 배(약 30.3cm) 2)길: 여덟 자 또는 열 자(약 2.4미터 또는 3미터). 또는 사람의 키 정도의 길이 ※ 양옥은 1890년대 기독교 선교사들에 의해 전파된 이후, 일본의 민족말살정책에 의해 의도적으로 더 널리 보급되었다. 그리하여 지금은 한옥을 찾아보기가 거의 힘들 정도다.
| |
경북 영덕군 영해면 원구리.
경수당 박세순이 32세 때인 선조 3년(1570년)에 99칸 규모로 건립하였으나
박세순의 장증손인 박문약의 우연한 실화로 인하여 현종 9년(1668년)에 소실되었는데,
건물이 소실된 후 박문약은 3일간 소복을 입고 통곡한 후 재건에 힘을 기울여
숙종 39년(1713년)에 현재의 규모로 복원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경북 영덕군 영해면 괴시리. 영양남씨 괴시파 종가로
약 300년 전인 17세기 말에 남붕익이 창건했다고 전한다.
경남유형문화재 제287호. 조선 중기 숙종 12년(1686) 장예원판결사 정응두 선생의 현손 정형초가
건립한 고가로 현재의 건물은 1924년에 중수한 것이다.
경남 거창군 위천면 감천리. 중요민속자료 제205호. 조선 후기의 가옥이며, 1820년에 후손들이 중창하였다.
정면 6칸, 측면 2칸이며, 두줄박이 겹집에 내루에 눈썹지붕이 따로 설치되어 있다.
경북 영덕군 축산면 인양리. 경북기념물 제84호. 조선 숙종(1627∼1704년) 때 영남학파의 거두로
성리학자인 갈암 이현일의 종택이다. 갈암의 11대손 이병주의 증조부 이수악(영남 북부지역의
총의병대장)이 항일구국운동 거점으로 활용한 종택이다.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307호. 운악 이함선생의 차남 선교랑 이시형
(호:우계)의 살림집으로 약 400여년간 보존되어 내려오고 있다.
17세기 말 조선시대 양반주택의 대표적 예로서 한양조씨 옥천 조덕린(1658∼1737)의 고택이다. 살림채는 안동지방을 중심으로 대거 분포되어 있는 뜰집(ㅁ자집)의 전형적인 평면구성을 보인다.
경북 안동시 임하면 천진리. 보물 제450호. 조선시대.
경북 안동시 송천동 1226. 경북문화재자료 제47호.
1710년에 건립된 고성이씨 지례종택으로 입향조 이후장공의 손자인 이원보공이 창건했다.
경북 청도군 운문면 순지리. 경북민속자료 제90호. 이 건물은 취죽당 김응명의 8대손
김몽노의 생가이다.
1993년 운문댐의 건설로 순지리 406번지에서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였다.
경북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 중요민속자료 제73호. 조선시대. 현재 이 집은 월성손씨의
후손인 손영호의 소유로 되어 있으며 서향집으로 대문채, 사랑채, 안채로 구성되어 있다.
경북 상주시 낙동면 승곡리. 경북민속자료 제32호. 이 건물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한 후에
이조참판에 추증된 바 있는 조정(1555∼1636)이 지은 것이다.
추사 김정희 고택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43호.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실학자이며 서예가인 추사 김정희선생(1786~1856)의 옛 집이다.
안채와 사랑채 2동짜리 건물로 조선 영조(재위 1724~1776)의 사위이자
김정희의 증조할아버지인 김한신에 의해 지어진 집이라고 한다.
건물 전체가 동서로 길게 배치되어 있는데,
안채는 서쪽에 있고 사랑채는 안채보다 낮은 동쪽에 따로 있다.
사랑채는 남자주인이 머물면서 손님을 맞이하던 생활공간인데,
¬ 자형으로 남향하고 있다. 각 방의 앞면에는 툇마루가 있어 통로로 이용하였다.
안채는 가운데의 안마당을 중심으로 사방이 막힌 ⃞자형의 배치를 보이고 있다.
살림살이가 이루어지던 안채는 문을 들어서면 바로 보이지 않도록 판벽을 설치하여 막아 놓았다.
대청은 다른 고택들과는 달리 동쪽을 향하였고
안방과 그 부속공간들은 북쪽을 차지하고 있다.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며, 지형의 높낮이가 생긴 곳에서는
사람 인(人)자 모양의 맞배지붕으로 층을 지게 처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