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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광역시중구족구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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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보 및 기사 스크랩 [50호](칼럼)족구1세대, 90년대 족구의 추억
중구연합회이사 임재홍♿ 추천 0 조회 211 15.06.20 02:0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지난 해(2014년) 연말, 인기프로그램 '무한도전'에서 '토요일 토요일은 가수다'(이하 '토토가')라는 특집 방송을 했다. 방송에서는 잊고 있었던 90년대 가수들이 출연해 당시의 히트곡들을 부르며 무대를 열광의 도가니로 만들었다. 어느덧 반년이 지났지만 그 여파는 아직도 엄청나다. 가요차트에 새롭게 진입한 노래들이 있는가 하면, 무려 10년만에 컴백한 가수들도 있다.

 

'토토가'는 내게도 정말 뜻 깊은 공연이었다. 1981년생인 내게 90년대는 이제 돌아가고 싶어도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아련한 추억이 많은 학창시절, 즉 10대의 시작이면서 끝이었기 때문이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30대 중반의 아기아빠가 된 내게 '토토가'는 10대의 아련했던 추억을 되새길 수 있었던 소중한 시간을 주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스마트폰도 없고, 통화중인 집 전화 때문에 불편한 PC통신이 막 도입되어 제대로 된 인터넷을 하기 쉽지 않았었던 시절이었지만 어느 누구도 이를 탓하지 않았다. 그것이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전 세계적인 경제호황으로 인해 많은 문화적인 콘텐츠가 넘쳐났던 90년대는 정말 즐길 것도 많았다. 가요계에는 '서태지와 아이들'을 비롯해 수많은 인기가수들이 나왔고, '모래시계', '첫사랑'과 같은 인기 드라마들은 저녁시간 길거리를 한산하게 만드는 힘을 보여주었다. 이는 스포츠도 마찬가지, 지금이야 월드컵이 벌어지면 16강 진출에 큰 희망을 걸지만 당시에는 단 1승만 해도 좋다는 마음가짐으로 TV를 시청했었고, 선수들이 유럽선수들의 슈팅을 막기 위해 몸을 날리고, 충돌로 인해 머리에 피를 흘려 붕대를 감고 뛰는 투혼에 눈물을 글썽이며 선전을 응원하기도 했었다. 연세대와 고려대의 라이벌전을 비롯한 실업팀과 대학팀간의 흥미 있는 대결을 보여주었던 '농구대잔치'의 인기는 그야말로 대박이었다.

 

그런데, 90년대는 우리 족구계에서도 정말 의미 있는 시절이었다. 족구가 창안된 것은 60년대이지만 지금과 같은 체계적인 틀을 갖추기 시작한 것이 바로 90년대이기 때문이다.

 

60년대, 공군 11전투비행단 101전투비행대대장으로 근무했던 김진섭 선생에 의해 족구가 창안되어 전(全)군에 전파되었고, 군 시절 족구를 즐겼던 이들이 전역 후 사회에서 이를 즐기며 전국적으로 확산 되었다. 하지만 체계적으로 정확한 규칙이 정립되어 있지 않다보니 각 지역마다 서로 다른 룰을 적용하여 즐기고 있었다. '코트의 규격은 XX가 맞다.', '오버네트가 허용이 된다, 안된다', '배치기가 된다, 안된다', '넌 대체 어느 나라에서 족구를 배웠냐'는 등. 한국 사회 어디나 그렇듯이 목소리 큰 자가 주장하는 규칙이 정확한(?) 규칙이 되어 족구를 즐겼다.

 

그러던 중, 1990년 4월, 대한족구협회 창립과 함께 통일된 경기 규칙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2년 뒤, 통일된 규칙하에 1992년 24, 25일 양일간 벌어진 역사적인 첫 전국족구대회' 한강사랑배 전국 족구대회'가 '서울 한강시민공원 반포지구'에서 열렸다.

참가팀은 자그마치 '327개'(당시 대회 안내 책자의 기록), 당일 대회장에는 전국의 '한 족구' 한다고 하는 이들이 모두 모여 초대 족구 챔피언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열띤 경쟁을 펼쳤다.

 

24개조로 나누어 토너먼트로 치러진 이 대회는 대회 첫 날이었던 24일(토), 악천후로 인해 비바람을 맞으며 어려운 경기를 치렀고, 예상보다 너무 많은 팀들이 출전하는 바람에 결국 이틀 안에 대회를 끝내지 못해 그 다음 주 대전에 위치한 '88올림픽 기념관 실내체육관'으로 자리를 옮겨 4강부터 경기를 치렀다.

 

결승전은 이찬호 선수가 이끌던 '수원 삼성전자'와 이태헌 선수가 이끌던 '울산 현대중공업'의 대결로 압축되었고, 경기는 15점 '5판 3선승제'방식이었다. 치열했던 이 경기는 양 팀의 공격수들이 다리에 쥐가 날 정도의 혈전으로 이어졌고, 결국 5세트, 풀세트 접전끝에 '수원 삼성전자'가 역사적인 대회의 초대 챔피언 자리를 차지했다. 당시 현장에서 이를 관전했던 정청식 현 논산시족구연합회장은 이 경기를 이렇게 회상한다.

'비록 지금과 같은 화려한 기술은 아니었지만 우승을 차지하기 위한 선수들 모두의 열정은 그 누구보다 뜨거웠습니다. 정말 제 기억 속의 최고의 명승부였습니다.'

 

▲한강사랑배 전국족구대회에 참가했던 논산족구단 선수들의 모습. 서있는 맨 오른쪽이 정청식 현 논산시족구연합회장이다.

(사진제공: 정청식 논산시족구연합회장)

 

당시 선수들은 정식으로 족구화가 없어 K사에서 출시한 '축구 코치화'를 신고 경기를 치렀고, 그나마도 없으면 축구화의 뽕을 그라인더로 갈아서 신기도 했다. 공식적인 공인구도 없어 '나이키'도 아닌 '나이스' 브랜드에서 만든 현재의 족구공과 비슷한 크기의 공을 공인구로 사용했으며, 코트의 규격은 7m X 8m였다. 서브는 바운드 이후의 서브를 했고, 첫 번째 서브 실수 시 다시 한 번 기회를 주는 방식이었다.

 

어느 종목이든 대회가 열리고 진행되면 스타플레이어가 탄생하는 법, 공격수에는 이찬호(삼성전자), 오병관(기아자동차), 정청식(논산족구단), 우덕식(GM대우), 이태헌(현대중공업)등이 있었고, 세터에는 이은배(삼성전자), 신경우(기아자동차), 김해수(대우자동차)등의 컴퓨터 세터들, 수비수는 허상천, 허재호(이상 삼성전자), 곽춘선, 최종헌(이상 기아자동차), 임종일, 여상수(이상 현대자동차)등 많은 스타플레이어들이 탄생했다. 이들을 일컬어 우리는 '족구1세대'라고 칭한다.

 

득점을 하면 으레 하는 파이팅 세레모니도 다 제각각이었다. 가운데 손을 모아 원을 만들어 빙빙 돌았던 논산족구단, 함께 소리를 지르며 가운데 모여 다 같이 검지손가락으로 하늘을 찌르는 세레모니를 보여주었던 기아자동차, 크게 원을 만들어 빙빙 돌다가 멈추어 양손을 들고 파이팅을 외쳤던 삼성전자. 

 

지금은 전혀 이루어질 것 같지 않은 올스타전이 열려 평소에는 적으로 마주할 수밖에 없었던 선수들이 한 팀을 이루어 펼치는 꿈의 대결도 이루어지곤 했다. 대기업 중심으로 활성화되어 회사대항으로 방송 경기가 펼쳐지면 양 팀의 직원들이 관중석에 자리 잡고 치열한 응원전을 펼쳤다. 포인트 하나에 관중들은 크게 열광하기도 했고, 때로는 탄식하기도 했으며 지금은 상상도 못할 치어리더들이 응원을 이끌었다. 여담이지만 이 당시 정작 선수들끼리는 상당히 친했는데 과열된 응원전 때문에 응원단끼리의 충돌도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충돌은 앞으로도 절대 있어서는 안 되지만 그만큼 열기가 대단했었다는 방증이기도 할 것이다.

 

▲올스타전에 참가한 선수들의 기념촬영. 당시 군포에서 벌어진 첫 여성부 대회에서 시범경기 형식으로 전국족구연합회에 마련한 이벤트였다.

당시 1부리그 선수들이 심판판정에 민감하게 반응해 볼성 사나운 모습들도 자주 연출되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전국족구연합회에서 이 대회에 1부리그 선수들을 직접 심판으로 배치해 심판들의 에로사항들을 몸소 체험하게 했다. 선수들 역시 적극적으로 나섰다.

(사진제공: 정청식 논산시족구연합회장)

 

어느덧 시간이 흘러 이들이 물러가고 이제 새로운 스타플레이어들이 그 빈자리를 채웠고, 기술은 날로 발전해 눈높이가 높아진 우리 족구인들에게 과거의 경기영상은 그저 아날로그 화질속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비춰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떤 종목이든 누군가 만들어 놓은 기본적인 틀을 바탕으로 발전이 이루어져 왔다. 우리 족구 역시 마찬가지, 오병관의 안축 밀어차기, A킥 안축 찍어차기, 이찬호의 안축 감아차기, 우덕식의 발코, 임영훈의 넘어차기, 정청식의 뛰어 발등차기등의 기술이 바탕이 되어 지금의 화려한 기술들이 완성되었고, 많은 시행착오들을 통해 지금의 체계적인 경기 규칙들이 완성되었으며, 이들이 만든 협회가 초석이 되어 지금 우리가 간절히 바라는 대한체육회 가맹을 통한 엘리트 종목으로 나아갈 수 있는 여건 또한 마련되었다는 사실을 절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비록 이들이 강만규, 이광재가 하는 화려한 공격도 신진이, 천유빈과 같은 화려한 수비도 하지는 못했지만 지금보다 더욱 척박했던 환경에서 우리 족구를 지금과 같이 발전시킨 밑거름이 되었던 것 만큼은 확실하다. 이런 이들의 업적이 현역 스타플레이어들의 업적보다 작다고 누가 감히 이야기 할 수 있겠는가? 이런 선배들을 배제한 채, 우리 족구의 발전을 논한다면 이는 '도둑놈 심보'다.

 

90년대, 우리 족구가 세상에 알려지고 널리 성행하기 시작했다. 비록 지금보다도 척박한 환경이었지만 함께 족구의 발전을 위해 각자의 이득에 연연하지 않고 순수한 마음으로 뛰었던 시절이었다. 우리 족구계에서도 참 특별하고 아름다웠던 시절이었을 것이다. 다시 돌아갈 수는 없지만 그래서 더 아름다웠던 90년대여~! 정말 찬란하고, 또 고마웠다.

 

이제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 족구인들은 선배들이 뿌려놓은 밑거름을 바탕으로 우리 족구를 발전시켜야 한다는 책임을 떠안았다. 하지만 '내가 족구 1세대다.', '내가 없으면 족구는 안된다.', 심지어 '내가 족구를 만들었다.'고 주장하는 한심한 족구인들이 판을 치고 있는 것이 우리 족구계가 처한 현실이다. 과연 그들의 그러한 주장들이 우리 족구의 발전에 도움이 되는 것인지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다. 아울러 우리들의 후배족구인들이 훗날 우리를 두고 어떤 평가를 내릴지 심각하게 고민해 보았으면 좋겠다. 어쩌면 그들은 우리를 일컬어 '각자의 이득에 연연해 족구의 발전을 가로 막았던 암울했던 세대'라고 평가하지 않을까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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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1.) 이 글을 쓰는데 많은 도움을 주신 '정청식 논산시족구연합회장님'과 '곽춘선 현대파워텍 부단장님'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PS2.) 오랜만에 칼럼을 썼습니다. 사실 개인적으로 50번째 칼럼인 만큼 조금 더 의미있는 칼럼을 쓰고 싶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준비기간이 길었습니다. 없으시겠지만 혹시나 기다리셨던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앞으로도 미덥지 못한 글로 찾아 뵙겠습니다. 많은 응원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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