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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후일담 몇 가지를 애독자님께 들려드리고자 한다.
훗날 측천여황 무조의 무씨천하는 어찌 되었는가?
태평공주 이영월은?
거란의 훗날은?
측천여황은 705년 11월 25일, 82세로 피비린내 나는 생을 마감한다. 그리고 5년 후 710년 예종 이단의 아들인 임치왕 이융기의 거사에 의해 무씨 천하는 종언을 고했다. 무씨의 친족들은 거의 다 도륙을 당하거나 흩어져버린다.
하지만 무유서는 진즉 숭산 자락에 들어가 농사를 지으며 살았기 때문에 목숨을 보존할 수 있었고, 또 한 사람, 우리 소설에는 등장하지 않는 무평일武平一이라는 인물도 난을 피할 수 있었다고 한다.
결국, 고구려 고씨를 죽인 이씨들은 무씨에 의해 심판을 받았고, 이씨들을 죽인 무씨는 다시 이씨의 발흥에 의해 심판을 받은 셈이다.
무씨 천하를 종식시킨 임치왕 이융기는 나중에 황제로 등극하는데, 그가 자신의 며느리 양귀비를 첩으로 삼아 그녀와 정한 없이 염문을 뿌린, 유명한 당 현종이다.
그는 치세 초반에 뛰어난 명군의 모습을 보였으나 후반기 들어 처음의 영기발랄하고 현명한 면모를 대거 상실함으로써 결국 대진발해국 3세 황제인 대무예(고조영 즉 대조영의 장남)에게 굴복하고 만다.
측천여황의 딸 태평공주 이영월은, 측천여황의 치세 내내 부귀와 권세를 함께 누린다. 그녀는 이융기가 즉위한 후까지도 당나라 황실의 실세로서 권력을 좌지우지하며 황제를 바꾸려 획책하다가, 황제 이융기에게 반격을 당해 죽는데, 그 해가 713년이니, 47세로(일설에는 49세) 일생을 마감한 셈이다.
불행히도 그녀가 살아생전 거느렸던 정부情夫들은 한 둘이 아니었다. 그녀가 죽었을 때 재산을 적몰 당했는데, 재물과 돈이 산처럼 쌓여 있었고, 진귀한 물건은 궁전 보물고의 그것과 같았으며, 그 밖에도 전토와 가축 등이 무수히 많았다고 <자치통감>은 기술한다.
한편, 이진영, 손만영을 이어, 거란의 왕이 된 이진영의 사촌동생 이실활은 당을 제압하고 있던 돌궐을 등에 업고, 당군이 영주의 기타 지역 안으로 한발자국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성공적으로 막아냈다.
그러나 쌍검을 잘 썼던 거란의 젊은 장수 이해락 역시 이해고처럼 700년경 당에 귀순하고, 거란을 배신한 당나라 장수 이해고의 사위가 되며<이해락신도비>, 거란 왕 이실활까지 716년, 거란팔부를 이끌고 당에 귀부해버린다<자치통감>. 이진영과 손만영의 696년 영주의거는 이로써 몇몇 영웅들의 허망한 단막극으로 막을 내리고 20년 만에 거란은 재차 당나라의 휘하에 들어가고 말았다.
하지만 영주의거는 대조영과 대진발해국에 하늘 문을 열어주고 드넓은 장을 마련해 준 역사적 무대였다. 이것이 우리민족에게 준 영주의거의 최대 선물이다. 그러나 거란족의 봉기에 힘입어 옛 고구려 영토를 거의 수복하며 나라의 기틀을 굳게 세울 수 있었던 대진발해국이 훗날 거란족에게 망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홀한성 서남쪽으로 강이 흐르고 있다. 이름하여 홀한하. 지금의 모란강이다. 어쩌면 모란강이라는 이름은 대조영(고조영)을 비롯한 발해 황족들과 귀족들이 앞을 다투어 궁성과 집집에 모란꽃을 심은 데서 연유했는지도 모른다.
모란화는 부귀와 존영을 상징한다. 모란화는 원래 들꽃이었다. 하지만, 어진님을 그리워하며 목 놓아 부르다가 어진님 환꽃에 의해 모란꽃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모란강 가에 세운 대조영의 수도 홀한성은 지금의 흑룡강성 영안시 동경성東京城이다<태백일사/대진국본기>. 동경성에 만발했던 모란꽃에 대해, 발해의 “부자들은 정원과 연못을 만들고 모란꽃을 심는데, 많은 집은 이삼백 그루나 되었다”고 <송막기문>은 말한다. 동경성의 모란꽃은 붉은 색과 황색이 있었다.
대조영이 설립한 도읍, 홀한성(동경성)은 송화강 동쪽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고, 중국 역사학자 김육불(1887-1962)의 <발해국지장편>(1934)이 장분張賁의 <동경기東京記>를 따와 말한다. 동경성 북쪽과 서쪽으로는 큰 강물 즉 모란강이 성을 에워싸 흐른다. 남쪽과 동쪽에도 해자가 있었을 것이다.
동경성의 서남쪽에는 유명한 관광지 경박호가 있다. 성 밖의 수십 리는 평원이다.
동경성 서남으로 십여 리 되는 곳의 모란강에는 연꽃의 바다가 있다. 여름에서 가을로 철이 바뀔 때가 되면 연꽃이 붉게 피어 수십 리 안이 구름 비단처럼 빛나고 파랑새, 물오리가 위아래로 난다.
토착민들이 쪽배를 타고 연꽃을 꺾으며 돌아다닌다. 그들은 아마도 옛 동경성 대진발해국 고구려인들의 후예들이었으리라.
강을 따라 30리 내지 40리 정도 거슬러 올라가면 폭포가 있는데, 토착민들은 이 폭포를 수해水海라 부른다. 폭포수의 물소리가 몇 리 밖에서도 들렸다고 한다.
홀한하의 아름다운 정취는 우리 이야기의 마지막 무대다.
강물 위에는 연꽃이 흐드러지게 핀 계절이다. 양안의 길 위에는 모란이 줄지어 서 있으나 모란꽃은 진 지 이미 오래다. 바야흐로 초가을의 산들바람이 볼을 적신다. 해는 어느덧 서산을 향해 기울고 있다.
“창발가! 보방!”
아리따운 여인의 목소리가 강변의 연꽃 위를 스치고 파문을 일으킨다.
서너 살과 대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 두 아이가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이쪽을 돌아보더니 여인의 손짓에 달음박질했다.
여인의 손에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과자 두 개가 들려 있다.
“조심해라! 잘못하다간 물에 빠질라!”
아이들과 여인이 노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고조영, 아니 대조영의 가슴에는 새삼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조영은 하염없이 여인을 바라보다가 눈물을 감추려는 듯 고개를 돌린다.
조영의 눈길이 닿는 곳에 수 십리를 걸쳐 붉은 연꽃이 비단을 깔아놓은 듯하다. 파랑새가 적색 구름을 이고 하늘을 난다.
‘저 꽃이 모란이라면 좋겠군. 하지만 모란꽃은 떨어진 지 오래되었지.’
상념에 젖은 조영이 문득 옆을 바라보고 말했다.
“여보게 처남.”
조영의 옆에는 지성적 이미지가 물씬 풍기는 한 젊은이가 시립해 있었다.
“네, 폐하!”
“연꽃이 가히 환상적이지만, 이 물 이름을 연수蓮水라 하지 말고, 모란강이라고 고쳐 부르는 게 좋겠네.”
“···?”
고조영의 시선은 연꽃으로 이루어진 붉은 구름비단 바다를 헤매다가, 이내 그에게로 천천히 다가오는 여인에게 가서 머물렀다. 여인은 고상한 품위의 자줏빛 옷을 입고 있다. 옷자락이 늦여름 하늬마파람에 나부낀다.
‘아, 저 여인이 미시아라면, 미시아라면···.’
그러나 그의 입에서는 자연스레 여미아를 연상시키는 말이 흘러나온다.
“여보게 처남, 나의 내자가 모란꽃처럼 보이지 않는가?”
그의 눈길은 여전히 여인을 향한 채, 목소리는 옆의 젊은이에게로 간다.
대조영의 처남 임아상任雅相이 내내 어리둥절한 표정이다.
임아상은 임가노장주 임장청의 손자다. 불행히도 한 때는 곁길로 빗나가 설소와 낭야왕 이충에게 고용되어 이고생李高生이라는 가명을 사용하며 고조영과 이해고, 사비우를 독살하려 했던 장본인이다.
훗날 이 사람은 대진발해국에서 문적원감(국립도서관 관장)의 벼슬을 하며 <삼일신고>와 <단기고사> 등 환국, 배달국, 단군조선 시대와 관련된 중요 서책을 보존하는데 큰 공헌을 했다. 위의 두 책을 제외한 대부분의 서적들은 모두 소실되고 말았지만.
임아상이 침묵을 지키자 조영이 독백한다.
“모두가 흘러간 옛날이야길세.”
두 아이의 손을 잡고 그에게로 걸어오는 여인이 하늘의 적옥赤玉 빛 구름과 붉은 빛 연꽃바다 사이에서 발군의 미를 뽐내고 있다. 대조영의 시선이 그녀에게 꽂혀 떠나지 않는다.
그는 한 차례 눈을 비비고 다시 그녀를 세밀히 응시했다.
“오, 이런! 미시아, 저기 오는 저 여인이 미시아가 아닌가?”
“네?”
임아상이 놀라는 표정이다.
조영이 갑자기 여인을 향해 큰 소리로 불렀다.
“미시아!”
여인이 하늘하늘 그에게로 걸어온다. 얼굴에 신비로운 웃음을 가득 담고서.
여인이 코앞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폐하, 부르셨습니까?”
“미시아! 내가 예전에 당신의 무덤에 삼일채를 넣어버렸다고 하지 않았소?”
여인은 여전히 생글거린다.
“하지만 그건 거짓말이었소!”
대조영은 품속을 뒤져 세 개의 옥비녀를 꺼내었다. 서쪽에서 붉은 빛을 토하는 태양의 광채에 비취색 옥비녀가 그윽한 자태를 완연히 드러냈다.
여인이 그것을 보더니 얼굴에 눈물을 글썽거린다.
“폐하! 가지고 계셨군요.”
“이 삼일채는 세 여인의 것이었소. 내가 간직하면서 세 여인을 잊지 못했지.”
여인이 갑자기 대조영 앞에 무릎을 꿇으면서 말한다.
“폐하, 그것은 삼위일체 상제 하나님을 영원토록 잊지 말라고 제작된 옥비녀이옵니다!”
“아니오. 이건 세 여인의 목숨 건 우정을 잊지 말라고, 하늘이 내게 주신 옥비녀요.”
조영이 여인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말을 이었다.
“어서 일어나시오. 그대의 모습이 가히 천상의 선녀 같구려.”
“폐하, 저의 아씨께서 공자님을 찾고 계십니다.”
“아씨? 당신의 아씨가 누구요?”
그녀가 손을 들어, 황홀한 웃음이 담긴 자기 볼을 가리며 대답했다.
“거란의 무상가한 이진영 어르신의 따님이십니다.”
“오, 이런! 내가 그분을 여기서 만나기로 했지?”
순간, 조영의 눈에 근 스무 해 전 그날의 광경이 아른거린다. 송막도독 이진영의 딸 이루하가, 유주 남쪽의 파사사로 그를 초대해 그녀와 만나기로 했던 그날의 광경이.
그 때 선녀 같은 이 여인이 자기 앞에 하늘거리고 다가와 무릎을 꿇고 옥 같은 음성을 발할 때, 그의 가슴은 황홀하다 못해, 아주 돌아버리고 말지 않았던가?
그의 가슴에서 긴 한숨이 자기도 모르게 새어나왔다.
바로 그 때 한 고고한 고승이 아리따운 두 여인과 함께 서산 위의 태양을 등지고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오, 대덕님! 그 동안 평안하셨습니까?”
“주 예수님의 은혜로 평안했습니다. 마라나타! 폐하의 낯도 더욱 환해졌습니다.”
경승 고양원이다.
그의 뒤를 따르는 두 여인 가운데 한 여인은 백설을 인 고고한 매화를 연상시키고, 다른 여인은 내실에서 그윽한 향기를 풍기는 고개 숙인 난화 같다.
조영은 인사도 나누기 전, 다짜고짜 손바닥을 펼쳐 손에 들고 있던 삼일채를 그들에게 보인다.
“삼일채가 여기에 있습니다!”
두 여인의 얼굴에 놀람의 빛이 가득하다.
아직 무더운 남풍에 섞여 일진의 갈바람이 사람들의 얼굴을 매만지고 지나갔다.
대조영이 고개를 돌려 두 아이의 손을 잡은 여인에게 잠깐 시선을 주었다. 그녀를 흘끗 바라본 후 대조영은 먼 허공을 향해 머리를 들었다. 그의 낯에 기쁨의 빛이 가득하다.
그가 새로 출현한 인물들을 잊어버린 듯, 뇌까린다.
“미시아, 미시아.”
그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을 때, 서쪽의 구름 속 태양은 붉은빛을 하늘 가득 퍼치고 있었다.
고조영은 나라를 일신하고자 성을 대大씨로 고치고, 국호 역시 후고구려에서 대진국大震國으로 바꾸며, 수도를 동모성으로부터 동북쪽 홀한하(모란강) 가의 홀한성(동경성)으로 이전했다.
원래 북부여 시조 해모수 이후로부터 해(태양)씨와 고高씨는 고구려 왕실에서 교호적으로 사용된 성씨다. 해모수의 후예 고주몽부터 고구려 왕실이 고씨를 사용했고, 백제를 세운 해모수의 자손들은, 해씨나 고씨를 선택하지 않고, 자기들의 먼 조상인 “부여”를 성씨로 삼았다.
역시 부여국 해씨의 후손이 세운 신라는 “해” 대신 “박(밝)”을 사용한다. 신라의 왕실 “박(밝)”씨 성은, 밝달임금 즉 단군檀君(밝은 땅[양달]의 임금. 그래서 “檀”은 “밝달나무” 단)과도 연결되어 있다. 단군의 자손이라는 뜻이다. 부여의 해모수 역시 단군조선 임금의 자손으로서 “단군”(중국의 “황제”나 이집트의 “파라오”와 유사한 임금칭호) 임금을 자칭했었다.
그러나 부여와 고구려왕실의 후손 고조영은 부여씨도, 해씨도, 고씨도 모두 마다하고, 대大씨를 선택했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대중상 후손들의 계보 가운데 하나인 <협계태씨족보>는 그의 조상들이 “걸걸乞乞”이라는 성씨를 사용했다고 기술하지만, 이는 성씨로서 너무 이상하지 않은가? 거지 중의 상거지? 유사한 발음의 한자어도 있었을 터인데 왜 하필, “빌어먹다”라는 낱말을 선택해서 감히 자기 조상들의 성을 칭한단 말인가? 이는 아마 <신당서/발해전>의 인용일 것이다.
고구려의 전체 행정조직은 5개의 부部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이것은 단군조선과 대부여의 오가五加 제도를 이어받은 것이다. 5부를 “다섯 부족”이라고 보는 것은 매우 그릇된 시각이다.
고구려는 단군조선과 대부여처럼, 국토 전체를 중앙과 동서남북 다섯 개의 행정구역으로 나누어, 당연히 각 구역을 왕족이 다스렸다. 그러므로 각부의 통치자는 모두 왕족이며 대대로 세습되었다.
연개소문과 그의 조상들은, 서부 즉 연나부의 통치자였는데(중국 사서는 그래서 연개소문을 “서부대인”이라 칭함), 그들이 고구려 왕족이었음은 연개소문의 아들 연남생 비문에서도 밝혀졌다. 이는 당연한 것이다.
북부 즉 제나부(절나부)는 흑부黑部라고도 불렸는데, 북부는 흑수(흑룡강) 혹은 흑수말갈족을 포함한 행정구역이었다.
북부는 특히 흑수말갈족을 포함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독립을 우려한 나머지, 그들과의 결속을 튼튼히 다지고자, 고구려 왕실은 북부의 종친들에게서 왕비를 취하는 경우가 많았다.
고구려 왕위는 처음에 연나부(서부)에서 맡다가, 나중에 중앙부 즉 계루부에서 맡게 되었다고 중국사서는 말한다.
고구려는 계루부에서 대대로 왕위를 세습하면서 나머지 동서남북부의 왕족 종친들을 견제하기 위해, 그들의 성을 바꾸어버렸다. 그 때 서부(연나부) 왕족의 성은, “연淵”으로 바뀐다.
신라도 박혁거세 왕이 취임한 이후 중앙의 왕권을 강화하고, 지방의 왕족 종친들(부여족임)을 견제하기 위해, 2세 남해왕 때 6부(여섯 부족이 아닌, 여섯 행정구역임)의 이름과 6부 통치자들(왕족 종친들)의 성姓을 바꾸었음이 <삼국사기/신라본기>에 기록되어 있다.
고구려의 북부 즉 제나부는 고구려 말기에 남부의 백두산 근처에 살던 말갈족까지 아우르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대조영의 부친 대중상의 출신지가 백두산 말갈 지역이라는 태씨 족보 등의 기록에서 이를 추정할 수 있다.
대조영은 북부의 통치 왕족이었든지 아니면, 발해 고씨의 후손이었든지, 혹은 중앙 계루부 왕족의 종친이었을 것이다. 셋 중 전자의 가능성이 가장 높다.
대조영 가문이 북부 왕족 종친이었다면, 그들의 성은 고구려 왕실에 의해, 말갈을 아우르라는 뜻에서 “걸걸”(“걸걸”은 “커커” 즉 “크다”는 뜻의 말갈어로 학자들이 추정함)로 바뀌었을 것이다. <신당서>에서 대중상을 “걸걸중상”으로 표기한 까닭이 아마 거기에 있을 것이다.
동일한 예로, 백제왕족이었던 흑치상지 가문의 성씨가, “부여”씨(백제 왕족의 성씨)에서 “흑치”씨로 바뀐 것은, 왕실과 조정에 의해 흑치 지역 통치자로 임명된 이후임이 분명하다.
<신당서> 등은 말갈어 “걸걸”을 중국어로 음역할 때, 발해와 말갈족을 비하하기 위해(주변 이민족의 명칭에 대한 중국의 비하어법은 유명하고, 고대로부터 내려온 악습이었다), 빌어먹는 자가 되라는 뜻에서 “걸걸乞乞”로 표기했음이 분명하다.
고구려의 5부 이름은 연나부, 절나부, 소나부, 순나부 등인데, 중국사서가 각 이름의 중간 “나那”자를 비슷한 발음의 종 노奴 자로 바꾸어 기록한 것도 비하어법이다.
훈족을 “흉노족匈奴族”(흉칙하고 험악한 종놈들)이라고 칭한 것, 남만, 서융, 북적 등의 단어에도 모두 이런 비하가 어느 정도 담겨있다.
특히 고구려의 전신인 고리국高麗國(나라이름에서는 麗를 “리”라고 발음함)을 지칭할 때, 중국사서들이 비슷한 글자인, 나무 마를 “고藁”에, 끊어질 “리離” 자로 표기한 것도(“말라 비틀어져 혈통이 끊어질 나라”라는 욕설임), 고구려를 증오한데서 비롯된 것이다.
나중에 고구려를 표기할 때도, “려” 자를 본래의 고울 려麗로 쓰지 않고, 그와 유사한 시커먼 가라말 려驪를 써서 “시커먼 가라말 같은 고구려놈들”이라는 비하어법을, 중국사서들은 버젓이 사용했던 것이다. 그 밖에도 비하 어법이 더러 나온다.
이런 비하 악습 전통은, 고대 신시배달국 시대부터 중국인들의 조상들에게서 유래된 것이다.
우리 민족은 9부족으로 이루어진 환족(환하고 밝은 민족이라는 뜻)이 중추를 이루었다.
그런데, 신시배달국 치우임금 때 우리에게 혼이 난 중국인들은, 우리민족을 그 때부터 구환(아홉부족의 환한 민족)이라 부르는 대신 구려九黎(아홉 부족의 시커먼 놈들)라 불렀음이, 중국사서에 나타난다.
대조영은, 고구려의 제나부(북부)를 다스리던 고구려왕족의 성씨, 즉 자기 조상들의 성씨가 “크다”는 뜻의 말갈어 “걸걸”로 바뀌어 있었으므로, 이를 한자어 “대大”로 새롭게 수정, 표기했을 가능성이 높다.
반면, 그가 말갈인 혈통이라는 학계 일각의 주장은, 거의 성립되기 어렵다. 이를 의미하는 듯한 <신당서>와 <신당서>를 인용한 것 같은 <협계태씨족보/발해국왕세략사>만 유일하게, 발해왕조가 속말말갈이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대조영이나 대중상을 꼬집어 말갈인이라고 칭하지는 않는다.
대조영의 선조들이 고구려의 제나부 즉 흑수말갈과 속말말갈 등을 다스리던 고구려왕족이었다면, 그가 속말말갈 사람으로 오인된다 하더라도 이상할 것은 없다.
이에 반해, 대조영이 고구려왕족의 혈통이라고 칭하는 중국 사서들은 최소한 10개 이상이며, <협계태씨족보>의 다른 부분, 그리고 금석문을 비롯한 기타 자료는 대조영이 고구려 왕족의 후손임을 보여준다.
그가 만일 발해 고씨의 후손이나, 고구려의 계루부 왕족 고씨의 후손이었다면, 망해버린 고구려의 전철을 밟지 않겠다는 뜻에서 유사한 의미의 “대大”로 개성改姓했을 것이다.
한편, 우리 사서 <삼국유사>는 신라의 옛 기록을 인용해, 대조영을 “고구려의 옛 장수 高麗舊將”라고 칭한다. 그는 고구려 왕족 출신으로서, 젊은 시절부터 장수의 지위를 지니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대조영의 아들들로는,
첫 아내 장씨가 낳은 대무예(장남), 문예, 술예를 제외하고도,
대창발가昌勃價(아마, ‘창문이 밝다’는 뜻), 대보방寶方, 대림琳, 대번蕃, 대호아胡雅, 대낭아朗雅 등이 있었다
<책부원구>.
중광重光(대중상의 연호) 32년(699년) 부친 대중상을 이어 제위에 오른 대조영은 연호를 천통天統으로 바꾸고, “하늘문天門”이 열린 대진국을 반석 위에 굳게 세운다.
그가 어떤 자세로 자신을 건사하며 나라를 통치했는지가, 서기 714년, 그가 쓴 <삼일신고> 찬사贊辭에 엿보인다.
짐이 대업을 계승하여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전전긍긍하며, 빈지문을 봉해도 망령된 생각이 달라붙으니, 어찌하면 이에서 벗어나 높이 오를 수 있으리?
朕承丕緖 夙夜戰兢 封蔀粘妄 曷由超昇
향을 피우고 꿇어앉아 <삼일신고>를 읽으니 느낌과 호흡과 촉감이 이내 맑아지도다. 바라옵고 비옵나니 잠잠히 도우시사, 이 몸이 타락하지 않게 하시고 무너지지 않게 하소서
焄馞跪讀 三途乃澄 庶祈默祐 勿墜勿崩
그로부터 5년 지나,
천통 21년, 당 현종 개원 7년, 서기 719, 기미년 3월에
대조영은 별세한다<구당서/본기><협계태씨족보>.
대조영이 잠들자 여미아, 이루하, 극시아 세 여인은 세 개의 옥비녀, 삼일채三一釵를, 그의 무덤에 함께 안장했다.
천추만세 후에 세상에 다시 출현하길 고대하며.
(<연연세세모란화야>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필자의 다음 소설 <이얼에도 환꽃피어>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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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
2025. 10. 31. 가을하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