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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위대한 각성(BC 7세기~BC 5세기) 아르카익 시기..
"오리엔트 전제 군주들의 통치지역에서 초기 미술이 발흥한 곳은 강이 접해있는 땅과 오아시스 지역으로 식량과 식수의 수급이 가능한 지역이었고 이러한 사회구조는 수천년 동안 지속되었다."..
장황하게 3부작으로 서술했던 초기 미술의 시작을 짧게 요약하여 보았습니다.
그리스 시대부터는 역사의 흐름 그리고 미술의 역사에 대한 세월이 단축되고 다양해지기 시작합니다..
중앙의 전제군주에 의한 통치가 있는 장소에서는 전통이라는 허울뿐인 억압에 의거 통일된 양식이 발전하는 것은 동서양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당연한 귀결이라고 보아야하겠죠!
크레타를 중심으로한 동부 지중해는 그곳들과는 다른 환경과 토양에서 파생된 크레타 문명이 발달하였다가 전술한 다양한 원인으로 야기된 인구의 극감에 뒤이은 사회의 해체로 "유럽 후기 청동기 암흑기"가 500여년동안 지속됩니다!
한때 이집트에 사신을 보낼 정도로 부유하다 몰락한 크레타의 전통은 에게해를 중심으로 한 그리스 도시 국가로 전승되어 BC700년경 태동합니다..
초기 그리스는 여러개의 작은도시들이 모이면서 명령 체계가 정비된 신격화된 존재가 없었기에 크레타의 단순함과 명쾌한 배열만 남았을뿐 뚜렷하게 전해지는 양식는 없었습니다.
그리스 아티카 지방의 "아테네"가 등장하면서 미술사에서 뚜렷하고도 중요한 혁명의 결실을 맺습니다..
이집트 문화를 원류로 계승발전시킨 크레타 미술을 넘어서 과감하게 "인체"를 탐구하고 표현하기 시작합니다..
전통의 굴레에 사로잡힌 이집트식 표현을 과감하게 탈피하여 신체의 근육 골격등을 표현하며 실제 모습을 표방한다는 혁명에 가까운 창조가 시도되어지고 성행합니다.
이러한 혁명은 조각에서 시작되어 회화에도 이어지며 뒤이어서 회화에서는 원근법에 의한 단축법이라는 미술사를 뒤바꾸는 위대한 발견을 합니다.
도시국가의 시민들은 타 지역의 전제군주 체제에서 의문없이 복종해야했던 통치수단으로의 신과 위정자들의 전통과 전설에 의문을 나타내면서 자유롭게 사물의 본질과 대하여 토론을 통한 탐구를 시도했습니다.
☆2011년 방문했던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
☆아크로폴리스의 중심에 위치한 파르테논 신전..
자유로운 토론을 통한 합의가 도출되며 과학과 철학이 과거와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급속하게 발전하면서 결과물로 장엄한 신전이 건축되고 신전을 화려하게 장식하기 위하여 조각과 그림에서 신체의 탐구에 대한 결과물이 나타납니다..
모두들 잘 알고있는 "원반 던지는 사람"이 이 시대를 대표하는 작품입니다.(말미에 후술)
☆2011년 방문한 아스완에서도 차량으로 5~6시간을 이동하는 아부심벨..
방문당시 위대한 이전공사를 두고 위대한 과학의 결실 운운했는데 요즈음은 잠잠~~
이집트의 조각 부조 작품도 명료하게 무려 5천년이 넘는 세월동안 시도되었음에도 권위라는 망령을 벗어나지 못함으로 딱딱하고 어색하며 부자연스러움에서 해방되지 못했습니다.
초기 그리스 부조는 이런 성가신 전통과 권위라는 굴레에서 해방됨으로 제한없이 표현되었지만 배열의 명료성과 아름다움을 유지하면서 자유롭고 거친 부분이 없습니다.
예술이란 예술가의 주관과 사회 일반 관념에 화합하면서 모두가 수긍하는 측면으로 창조되는 것이라는 속성이라는 것을 증명합니다!
고대 그리스 미술은 이집트, 바빌론, 크레타 문명을 자양분으로
미케네 미술을 계승 발전시켰는데 사학자들은 시기에 따라 4가지 양식으로 구분합니다!
1. 기하학적 시기
출토 유물에 추측이 불가능한 기하학적 무늬가 많은 시기로 BC1,000년경의 전술한 암흑기~~
기하학적 시기의 도자기들~~
그리스 박물관 소장품들..
2.아르카익 시기(위대한 각성).
아르카익의 뜻은 "태초에", "더낡은"이란 뜻으로 기교없이 소박함을 의미하는데 암흑기를 지나 인구가 늘어나고 농업기술이 발전하며 도시국가들을 통하여 발전한 시기(BC700~BC480)를 지칭하는데 선두 주자는 아테나와 스파르타이며 역사적인 사건은 BC479년 페르시아 전쟁이 종료됩니다.
"위대한 각성"의 시기는폴리스간의 경제적 정치적 갈등이 생기면서 확장을 위한 전쟁이 빈발하던 시대~~
영화나 신화에도 등장하는 것처럼 참전용사들의 신격화 영웅화가 권력자들에 의하여 통치수단, 전쟁승리를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던 시대입니다.
미화된 영웅담 선전물의 선두주자를 미술이 담당했습니다..
귀족들은 당시 당연히 전사 계층으로 만들어낸 영웅적 이미지는 자뻑이며 사회적 지위의 세뇌를 통한 강화 수단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쿠로스(청년 나체 입상 조각의 총칭)"는 미적표현과 영웅담의 창조로 힘과 권위를 상징하는데 일조를 했다.
곰브리치는 미술사에서 쿠로스 조각의 무릎을 지적하며 "혁명"은 시작되었다고 묘사한다.
조각가들은 기존의 틀을 벗어나 눈을 사용하여 수없는 시행 착오를 겪으며 보다 사실적인 인체를 묘사하기 시작했으며 부와 명예를 위하여 예술가들이 모두가 사실대로 표현하기 위해 경쟁하면서 혁명은 들판의 불처럼 걷잡을수 없이 타오릅니다.
대표적인 조각이 "클레오비스와 비톤"이라는 신화적 인물의 조각입니다!
두 형제의 어머니 헤라에게 봉사한 신화속 이야기를 토대로 그들의 효심과 용맹이 이상화된 모습으로 표현되어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에 헌납되었다고 합니다.
☆그리스 ∙ 아르카익기의 쿠로스형의 2구의 청년상. 1893~94년 델피(델포이)에서 발굴됨. 대좌(台座)의 명문에 의해 헤로도토스에 보이는 헤라 여사제의 쌍동이 형제상이라는 것과 작자는 폴리메데스(Polymedes, 또는 아가메데스 Agamedes, 이름 끝에 medes의 문자만 남아 있음)인 것이 알려짐. B.C. 590년경의 작으로, 소수의 초기 펠로폰네소스 조각의 양식을 알게 되는 가장 중요한 작례. 파로스 섬 산(産) 대리석, 상의 높이 2.18m, 2.16m. 델피 미술관 소장.
아르카익기의 또 다른 유명한 유물은 그리스의 당시 대표 수출품인 도자기~~
표면의 문양으로 전투장면을 주로 등장시킴으로 생활속에서도 전쟁의 당의성과 전사들의 역할을 주입식으로 각인시키는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도자기의 그림에서 조각의 무릎에 비견되는 혁명은 "인류역사상 최초로 정면에서 본 발의 표현"이었다..
곰브리치의 서술을 옮기면 "예술가들이 눈으로 보고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표현하는데 3천년이상이 걸렸으며 이제 혁명은 시작됩니다."
☆세르베루스, 헤라클레
스가 그려진
에트루리아 물병..
☆폴리페모스를 눈멀게하는 오디세이..
이미 B.C. 8세기 말경 ‘동방화양식’에 의하여 기하학양식의 속박에서 벗어난 도기화는 B.C. 7세기에 신흥 교역도시 코린토스를 비롯해 엘레트리아, 카르키스, 스파르타(⇒라코니아) 등 그리스 본토 각지와 크레타, 로도스, 멜로스, 키오스 등의 섬들과 소아시아 각 도시에서 각각 독자적인 양식을 창조 발전시켰다. 그러나 기하학양식 이래의 전통을 지닌 아티카는 B.C. 6세기에 흑회식 화법을 완성하여 곧 다른 가마를 압도, 그리스 도예의 중심지로 성장한다.
도공들은 스스로의 일에 보람을 가졌기 때문에 도화공(陶畫工)도 가끔 작품에 서명을 남기고 있다. B.C. 570년경 도공 에르고티모스와 화공 크레이티아스에 의한 걸작『프랑수아의 병』을 낳은 아티카 흑회식 도기화는 엑세키아스 작품으로 그 절정에 달한다.
B.C. 530년경 안도키데스의 화가들이 활동할 무렵에 적회식 기법이 발명되었다. 에우티미데스와 에우프로니오스 등은 상의 세부를 붓으로 그려 그때까지 없었던 선의 자유, 풍부, 정확성을 부여하는 이 기법을 활용하여 도기화의 새로운 영역을 열었다
예술가들이 눈을 믿고 있는 그대로를 표현하면서 "원근법에 의한 단축법"을 발견한것도 이시기입니다.
*단축법
대상을 위나 아래 또는 사선으로 바라보면서 인물이나 길이가 실제보다 짧아보이도록 그리는 회화기법.. 용어는 몰라도 일반인들도 사진찍을때 능숙하게 사용합니다,
미술가들은 이제 더 이상 평면적인 묘사와 의문없는 답습에 국한되지 않고 대상의 각도에 따른 시각적인 사실성을 표현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르카익 후기에는 지금까지 표현되지 않았던 인간관계와 감정의 표현까지 시도하면서 고대미술의 오랜 제약에서 벗어나 그들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원반던지는 사람..
원반 던지는 사람(Discobolus, 그리스어: Δισκοβόλος, 디스코볼루스)은 고대 그리스의 조각가 미론이 제작한 청동상이다. 제작연대는 기원전 460년~450년으로 추정된다. 미론이 제작한 원본은 소실되었지만, 그 작품을 그대로 본딴 고대 로마의 복제품들이 여럿 전해지고 있으며, 미론의 집으로 추정되는 장소에서 원본보다 축소된 청동상과 1791년에 발굴된 대리석 조각상이 가장 유명하다.(아래에 상술~~)
미론은 기원전 480년부터 기원전 440년까지 활동한 고대 그리스의 작가로, 당대 최고의 조각가로 이름났다. 아테네에서 대부분의 생애를 보낸 그는 특히 운동 선수의 조각상으로 유명하였다. 그는 주로 청동으로 작업하였는데 역동적인 자세와 사실적이고 섬세한 세부묘사를 할 수 있었고, 대리석보다 가볍고 옮기기도 쉅고 복제가 가능하기에 택한 것으로 보인다.
<원반 던지는 사람>은 손에 원반을 잡고 던지기 위해 몸을 회전할 준비를 하면서, 팔을 뒤로 빼고 체중을 오른발에 싣고 있는 자세의 운동 선수를 소재로 했다. 미론은 선수가 순간적으로 정지한 상태를 포착하였는데, 이와 같은 우아한 조화와 균형이 나타나는 행동의 순간을 '리스모스 (reythmos)'라 일컬었다. 미론은 이 리스모스의 상태를 재현한 최초의 조각가로 평가받는다.
원반 던지는 사람이 몸을 비틀고 있는 이유는 해부학적으로 완벽한 모습의 인물과 운동감을 묘사하고 싶어했던 당대 조각가의 요구를 만족시켰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운동선수들의 누드는 울퉁불퉁한 근육을 상세히 묘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미론은 원반을 던지는 순간을 몸의 긴장된 힘과 섬세한 균형으로 전달하였다. 원반을 던지는 인물은 원반을 돌아보면서 긴장되기보단 평온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 고대의 조각가들은 스포츠의 이상을 미학적으로 구현하기 위해 얼굴 표정보다는 몸의 형상에 초점을 두었기 때문이다.
조각상의 비율은 오른쪽 넓적다리와 왼쪽 종아리, 몸통과 오른팔이 이뤄낸 각으로 강조되었다.
☆<원반 던지는 사람> 역시 고대 로마에 제작된 청동 복제품이 존재한다.
☆ <팔롬바라의 원반 던지는 사람 (Discobolus Palombara)>이라는 명칭의 이 청동상은 원본보다는 축소된 155cm 크기로 2세기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1781년에 발굴되었다. 현재 독일 뮌헨의 고대 조각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원반 던지는 사람>은 대리석 복제품도 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은
☆<타운리의 원반 던지는 사람> (Townley Discobolus)이다. <팔롬바라의 원반 던지는 사람>이 발굴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790년 하드리아누스 별장에서 발굴된 것으로, 로마의 미술감정가였던 토머스 젠킨스가 경매에 부쳐 찰스 타운리가 400파운드에 사들였다. 1805년 7월에는 타운리의 여타 대리석 조각품과 함께 영국 런던의 대영박물관이 매입해 지금까지 이곳에 소장되어 있다. 이 조각상은 머리 부분이 잘못된 각도로 놓여 있어, 원반을 돌아보기보다는 아래쪽을 향해 있는 것으로 복원되어 있다. 1948년 런던 올림픽 포스터의 소재가 되기도 하였으며, 2010년에는 내한하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전시되었다.
<원반 던지는 사람> 뿐만 아니라 미론이 제작한 모든 청동상은 전해지지 않는다. 미론 뿐만 아니라 고대의 청동 조각상은 새로운 조각을 만들거나 전시에 무기를 만드는 데 녹여 썼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품이 소실되기 전에, 고대 로마 시대의 조각가들이 부유층들의 수요에 맞춰 유명한 그리스 조각상들을 대리석과 청동으로 여러 복제품을 만들었다. 이렇게 탄생한 고대 로마의 복제품들은 그리스의 원본이 어떠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가 되기도 한다.
*라오콘 군상
라오콘 군상은 트로이 신관 라오콘과 그의 두 아들이 포세이돈의 저주를 받는 장면을 묘사한 고대 그리스 조각상이다. 1506년에 로마에서 발굴되어 바티칸 미술관에서 대중에 공개된 이후 가장 유명한 그리스 조각 중 하나가 되었다. 이례적으로 플리니우스가 극찬한 조각상과 매우 비슷하다.
트로이의 신관 라오콘과 그의 두 아들이 바다 뱀으로부터 공격을 당하는 모습을 묘사하며, 인물들의 크기는 실제 인간의 크기보다 크며, 높이는 10미터가 약간 넘는다.
서양 미술에서 인간의 고통에 대한 원형적 상징이었으며, 예수의 수난이나 순교를 나타내는 기독교 예술에서 묘사되는 고통과는 달리, 이 군상의 고통은 어떤 속죄의 힘이나 보상을 나타내지는 않는다. 고통은 일그러진 얼굴 표현으로 나타나며, 분투하는 몸체, 특히 모든 부분이 뒤틀리는 라오콘의 몸체와 조화된다.
플리니우스는 이 작품이 로도스섬 출신의 세 명의 그리스 조각가가 제작했다고 주장하였으나, 제작 시기나 주문자는 제시하지 않았다.
양식 면에서는 그리스 전통 내에서 그리스 미술의 가장 훌륭한 예 중의 하나로 생각되지만, 이것이 원본인지 청동으로 만들어진 이전 동상의 복제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이 작품이 기원전 2세기의 원본이라는 견해는 이제 거의 없으며, 많은 사람들이 이 작품을 이전에 청동으로 황제 시대에 만들어진 원작의 복제품으로 여기고 있다.
2세기 전의 페르가몬 양식을 사용하기 때문에 또 다른 사람들은 이 작품을 다른 시대에 제작된 원본의 복제라고 보고 있다. 이 작품은 부유한 로마인, 아마도 황실 가문의 저택을 위해 주문된 것으로 보인다. 제작 연대는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시기 [기원전 27년과 기원후 68년 사이]가 선호되기는 하지만 기원전 200년 경부터 기원후 70년대까지 다양하게 제시되었다.
발굴된 조각상은 훌륭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긴 하지만, 몇 개의 부분이 소실된 상태이다. 분석가들은 이 작품이 고대의 여러 시기에 재조형되었고, 발굴된 이후에는 여러 번의 복원을 거쳤다고 주장하였다.
☆키돈과 히마티온을 입은 코레..
작품에서 보이는 것처럼
여신상과 코레라고 불리우는 소녀상에서는 인체를 싸서 암시하는 착의의 표현을 추구했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면서도 균형감과 무게중심까지 고려했던 조각들~~
프락시텔레스는 기원전 4세기 경 코스 섬의 사람들은 비너스 상을 만들어달리는 의뢰를 받았다. 하나는 옷을 입은 비너스 상이었고, 다른 하나는 나체의 비너스 상이었다. 코스 섬 사람들은 나체상이 상스럽다고 여겨 옷 입은 비너스 상을 사들였다. 그런데 정작 시간이 지나고 보니 중고 떨이로 나체 비너스 상을 사와서 전시한 크니도스 섬의 나체상이 더 유명해져서, 코스 섬 사람들이 자기들의 선택을 후회했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야사가 아니라 플리니우스가 기록한 내용이다).
☆크니도스의 비너스. 이 상의 모델이 된 사람은 고급 매춘부로 알려져있다. 때문에 페미니즘 철학에서도 가끔 다루는 조각상이다.
사람들은 나체의 비너스 상을 좋아했을까? 단순하게 말하자면 이 시대에도 성상품화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래디컬 페미니즘을 정립한 1960년대의 철학자 슐라미스 파이어스톤은 계급 투쟁은 기껏해야 2000년의 역사이지만, 성별 투쟁은 수만년의 역사라고 말했다. 남성이 여성의 신체를 대상화하며 폭력을 휘두른 역사야말로 여성이 겪어야했던 변증법적 투쟁의 역사였다는게 파이어스톤의 설명이다. 파이어스톤의 말대로 이 때도 성욕을 주체 못한 젊은 남성들이 상스러운 조각상을 보러왔다.
우리는 이 조각상을 예술로 대하고 있다. 그렇지만 언제나 말하듯 예술은 근대의 개념이며 고대 그리스 시대에 비너스 상은 예술이지만 동시에 십자가이기도 하고 음란물의 개념이기도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고대 그리스 신화 중에 조각을 사랑해서 생명을 불어넣은 피그말리온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실제 이때 그리스 청년들도 프락시텔레스의 비너스 상을 보고 매혹되어서 조각상을 추행(?)했다는 기록들이 남아있다.
그래도 조금은 알고있고 다양하게 여행으로 경험한 기록이 있는 시대라고 자신있게 적었는데도 여전히 삐리하죠~~
능력이 이뿐인걸 어쩌겠어요!
너그럽게 "아름다움의 세계"편으로 이어가보겠습니다..
주제넓게 미술사를 언급하고 있는데 나무가 아니라 잎도 제대로 보지를 못하면서 숲을 언급하고 있어서 지송~~
그렇지만 글의 포멧에 대한 원칙은 정해서 역사와 시대정신을 먼저 언급하고 전문가들이 언급하는 미술사, 그리고 간단하게 개인의 생각을 언급하고 대표되는 몇점의 작품을 소개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습니다!
방만한 글로 방을 어지럽힌다면 거듭 지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