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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님의 "이것이 알고 싶었다-한국 워타의 내밀"[21~업데이트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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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님의 "이것이 알고 싶었다-한국 워타의 내밀"[1~20 전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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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님의 "1975년을 전후한 시기의 증인 체험담"[1-11 전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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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님의 "워타의 루머와 납량특집"[업데이트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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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님의 "폭로" [업데이트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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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어봉사를 했었던 사람의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볼일이 있어 시내에 들렀다가 익숙한 풍경을 보게되었다. 양복을 깔끔하게 차려입은 이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두명의 젊은이들이 상가문 앞에 서 있다. 증인은 쉽게 증인을 알아보는 것 같다. 아무리 같은 양복을 입었어도 증인들에게는 증인들만의 느낌이 있다. 어떤 영업사원, 샐러리맨과도 구별되는…
반가웠다. 나는 중국에서 살고있었기 때문에 호별방문을 안한지 꽤 되었다. 하지만 요즘 같은 세상에 더구나 이런 번화가에서, 그것도 아직어린 것(?)들이 호별봉사를 한다는게 얼마나 힘든지 잘 알고있었다. 내가 어릴적에는 부모님손잡고 봉사가면 부모님이 문앞에서 장시간 집주인과 성경을 펴가며 이야기를 하는 경우도 많이 보았었다. 하지만 지금은 세상이 변했다. 메밀함에서 읽지도 않고 걸러내버리는 스팸메일처럼 집주인들에게 존재감도 없어진듯 했다.
음료수라도 주며 인사하고싶어 다가갔다. 하지만 젊은 형제들은 나를 잠시 살피더니 내가 자판기를 이용하려 하는줄 알고 자리를 비켜주며 다음상가로 들어갔다. 눈빛과 표정에서도 읽을수 있다. 봉사를 하는 그들의 마음의 압박을.
한국 조직에서는 오래전부터 외국어 봉사를 밀어부쳐왔다. 특히 젊은이들이 외국어를 공부해서 봉사하라고 봉사지나 파수대에서 여러 차례 언급되었다. 그 영향인지 외국어 봉사가 부쩍늘었다. 나 역시 그 대열에 합류했던 사람으로서 외국어 봉사로 몰려드는 사람들의 관점에서 생각하고느낄수있었다.
외국어 봉사…. 이름 차체만으로도 웬지 특별해 보인다. 밖에만 나가면 잡상인 취급받는 증인들에게 외국인 봉사는 정말 오아시스와도 같았다. 아무도 자신을 상대해 주지 않는데 외국인이, 언어도 잘 통하지 않는 사람이 이야기를 들어주고 웃어준다. 심지어 어디사냐고, 연락처를 물어도 친절하게 말해준다. 책을 전해주면 고맙다고 받는다. 물론 외국인도 사실 같은 입장이었으리라… 하지만 고독한 봉사로 마음이 슬픈 증인들에게 자신들을 환영해줄수 있는 사람을 만날수 있다는것… 정말 큰 매력아닌가
게다가 외국어를 공부하니 주위에서도 대단한일 한다고 칭찬한다. 그리스도인 부모님은 적극 지원해주신다. 외국어를 배워놓으면 자신의 가치도 올라가는 것 같고, 외국에 가서 살아볼 꿈도 꿀수 있고. 무엇보다 무엇보다…. 호별봉사를 안해도 된다…. 이거 정말 큰 요인이다. 외국어 봉사이니 유학생이 있는 대학교나 외국인이 많이오는 관광지에서 활동하면 된다. 굳이 힘들게 아파트나 상가를 다니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
근거없이 한 말이 아니다. 실제로 내가 아는 한 아이가 중국어회중에 왔다. 난 그녀석이 봉사나 영적인 일에 관심도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살짝 물어봤다. 왜 힘들게 외국어봉사 하려하냐고 그아이 왈 “사실 이게 더 편해요, 매일 호별 안해도 되고”
그렇게 해서 한국에 있는 수많은 외국어집단이나 회중은 젊은사람들로 채워져 갔다. 매년 얼마의 사람들이 외국에 봉사하러 나가도 그만큼 새로운 젊은 사람들이 들어왔고 외국어 회중은 축소되지 않았다. 요즘 경제위기 영향으로 한국에 있는 외국인 근로자가 많이 떠나갔다. 외국인수는 급감했고 성서를 공부하던 외국인도 줄기 시작했다. 하지만 외국어회중에 오는 사람 한국사람의 수는 여전히 늘고있다.
한때나마 최고의 봉사라고 생각했던, 이것이 내가 조직을 위해 내자신을 희생하는 것이라고 여겼던, 한국에서의 외국어회중에 있었던 나의 삶, 그리고 중국에 가서 살았던 시간동안 겪었던 일들에 대해 몇편에 걸쳐 이야기를 쓰고자 한다.
연재를 시작하는 즈음- 사람이 거울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보고싶어하듯 때로는 다른 시각으로, 다른 방향에서 조직을 바라보고 싶었고 제 마음을 이해해 줄수 있는 사람들과 함께 깊은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앞으로 연재될 저의 어설픈 글에 격려와 조언 부탁드립니다
[외국어봉사를 했던 나의 경험1]
외국어 회중에 연합하다. 외국어 회중… 그곳에서 지낸기간동안 내가 전혀 볼수없고 경험할수 없을 많은것들을 배웠다. 봉사대상이 공장에서 일하는 중국인이었기 때문에 외곽의 공장을 다니며 중국인을 찾았고, 중국인이 있는 것을 알면 퇴근한 뒤인 저녁무렵에 방문했다.
타국에서 온 낮선이의 방문에 이들은 처음에는 놀랐지만 금새 마음을 열었다. 자신의 모국어로 이야기 하고, 중국어 책을 받을수 있어서였을까… 대부분의 중국인들은 우리를 초대했고 흔쾌히 연구를 시작했다. 내가 스스로 사람을 찾아 성서연구를 시작할때의 기쁨과 감동을 처음경험한 것도 외국어 봉사였다. 그런면에서 외국어 봉사는 나에게 큰 의미가 있었다.
하지만 좋은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봉사를 나가면 밤늦게야 끝났고, 동승한 자매들 일일이 데려다 주면 12시가 넘어 들어오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리고 워낙 장거리를 이동해서 기름값도 만만찮았다. 무엇보다 일요일에 형제들끼리 축구를 할 수가 없다는 사실이 가슴이 아팠다.
중국어 회중에 오면서 세상은 넓고 참 다양한 개성의 사람이 있음을 느끼기도 했다. 외국어회중의 특수성때문인지 항상 새로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물론 대부분은 얼마 지속적으로 하지 못하고 원래의 회중으로 돌아갔다. 중국어회중에 오는 사람도 각양각색이었다. 애써 관심없는 척하며 누구누구소개로 한번 와봤다는 친구따라강남형. 이제 걸음마 뗀 애들데리고 중국어 공부시키려 한다는 조기교육형. 학습반 있을때만 와서 공부하고 가는 학원수강형등등..
한 나이 지긋한 할아버지께서 꽤 지속적으로 참석하셨다. 그래서 그분께 물었다. 할아버지 연세도 있고 힘드실텐데 어떻게 그렇게 열심히 공부하세요? 그러자 할아버지 형제는 북한에 가기 위해서 중국어를 배운다는 것이었다. 깜짝놀랐다. 그래서 웬 북한이냐고 물어보니 그분이 6.25때 남쪽에 피난와서 가족들은 다북한에 계시단다. 북한에 몰래 들어가 가족들 만나려면 중국에서 가짜 신분증 만들어 가야되는데 그러기 위해서 중국어를 배워야 한다는 것이었다.-_-;;
중국어회중에 있으면서 많은것들을 알게 되었다. 한국지부에서는 꽤 오래전부터 비밀리에 중국봉사를 추진해 왔다는 것이었다. 물론 공식적으로는 아무런 언급도 없다. 하지만 90년대중반쯤부터 한국지부에서 중국봉사를 위해 홍콩지부에 사람을 보내고(홍콩지부에서 오래전부터 중국대륙 봉사를 관할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사전답사를 통하여 중국동북지역인 요녕성, 길림성, 흑룡강성을 관리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홍콩측은 한국에서 인력을 보내는 것은 동의하였으나 한국에 지역을 내주려 하지 않았고 결국 이문제에 뉴욕본부까지 개입되는 상황에 이른다. 결국 97년 한국에서 처음으로 동북지역에 여러팀을 파견하게 되고, 2000년대 초반쯤 동북3성 지역을 정식으로 인도받는다. 하지만 한국이 홍콩측에서 구역을 양도받은 일로인해 한국과 홍콩지부사이에 경쟁과 묘한 알력관계가 형성되기 시작한다. 홍콩으로부터 동북3성구역을 양도받으면서 홍콩이 요구한 여러가지 조건을 수용해야했다. 홍콩지부에 한국인 봉사인력을 파견해주는 것과, 사람들의 관리 및 인사권, 즉 특파를 임명할 권한을 홍콩지부에 주어야 했다. 하지만 특파의 수당은 한국지부가 부담했다.
회중과 회중사이에 구역 때문에 마찰이 있기는 했지만 지부사이에서도 알력이 존재한다는 점은 당시 나에게 매우 놀라운 일이었다 (이 이야기는 들리는말을 하는게 아니라 제가 직접들은 이야기입니다. 95년 한국에서 중국봉사 총괄을 담당하던 전재관 형제가 요녕성을 방문했고 제가있던 곳에서 대회연설을 하며 개인적인 자리에서 이러한 일들을 이야기 해주었습니다. 그때 전재관 형제는 말했습니다. 한국지부의 목표는 베이징까지 홍콩으로부터 얻어내는 것이라고요 ㅎㅎ)
[외국어봉사를 했던 나의 경험2]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이 조직이 불완전한 인간의 집합체라는 사실을 심각하게 느낀 것은 중국어 회중에 연합한뒤였고 특히 KJJ라는 존재를 알면서부터였다.
이니셜KJJ… 중국어 봉사를 하는 사람이라면 모를수가 없는 협회 봉사부의 고위인사였다. 그 사람에게 중국봉사 파견과 특파의 권한이 있다고 했다. 지금은 그 전권을 화교출신인 H에게 넘겨주고 한직에 있다. 하지만 대회때마다 연설은 한다. KJJ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였는지는 당시 오포에서 열리던 중국어순회대회나 지역대회에서 확인할수 있었다. 대회전후 및 휴식시간에 KJJ주변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인사하려고 몰려드는 진풍경이 연출되곤 했다.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잘보여야 중국에 임명되고 특파가 될수 있다는 압박을 받는듯 했다.
KJJ는 협회에, 그것도 협회부서에서 최고파워라 불리는 봉사부, 그 안에서도 특파를 임명하고 중국봉사를 관할하는 위치였다. 중국에 가서 봉사하고 특파가 되고 싶은 사람이 의식을 하는것도 이해할수 있는 측면은 있었지만 그 가운데서 나처럼 문제가 있다는 생각을 한 사람은 얼마나 되었을까..궁금했다. 그렇다고 KJJ가 좋은 인품이나 실력을 가진 것을 아니었다. 영적 연륜이나 경험이 그렇게 많은것도 아니었으며 중국어를 잘하는 것도 아니었다. 중국어가 짧은탓에 화교출신H 형제의 둘째아들을 개인비서처럼 데리고 다녔다. 협회사이의 서신 및 연락, 그리고 문건과 관련된 것들을 개인비서를 통해 번역을 받아 읽었고 사실상 업무를 개인비서가 다 하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KJJ의 파워는 과연대단했다. 그의 수많은 친인척이 중국에 파견되었고, 얼마후에 특파가 되었다. 그리고 그와 조금이라도 관계가 있는 사람들이 그런 혜택을 누렸다. 이게 과연 우연일까…아니면 그의 주변에는 너무 훌륭한 중국어봉사 지원자들만 있는것일까… 대단한 사람이었다. 내가 아는 지인이 협회에 있었는데 그의 말에 의하면 KJJ는 대머리에 배가나온 외모에 맞지않게 운동을 좋아했고 이효리의 광팬이었다. 그의 차를 타면 언제나 이효리의 텐미닛이 흘러나왔고, 술도 매우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10분안에 남자를 꼬시는 이효리의 텐미닛을 들으며 테니스를 즐기는 협회 봉사부의 최고위원을 나는 정말로 상상할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그때까지도 여호와께서 불완전한 인간의 조직을 사용하실 뿐이며 그런것들은 나와 아무 상관이 없는, 나는 나의일만 열심히 하면 된다고 생각했었다. 드디어 때가 되었고 나는 중국에 가게 되었다. 당시 중국에가서 봉사하는 방법은 두가지가 있었는데, 협회에서 정식으로 임명해서 가는방법과 자원하는 사람이 협회에 서신을 보낸후 지정해 주는곳으로 가는 자비봉사 방식이었다. 나는 자원하는 방식으로 가게되었다.
사실 특파가 될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으며, 가서 더 중국어를 배우고 중국생활을 체험하고 그곳에서 연합할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했었다. 하지만 내가 얼마나 순진한 생각을 했는지는 중국에 가서야 알게 되었다. 그것도 바로 중국에 도착한 그날부터…
[외국어봉사를 했던 나의경험3]
중국이라는 나라… 처음 가본 사람들이나 여행차 온 사람들에게는 그저 신기하고 재미있는 곳일 뿐이지만 그곳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은 공산당이 지배하는 나라가 얼마나 통제된 삶을 사는지 느낄수 있다. 언제나 매캐한 매연과 시끄러운 경적소리로 하루를 시작하고, 길거리에 수많은 사람들의 표정없는 얼굴, 정말 불친절하고 턱없이 높은 수수료를 내야하는 관공서, 관시(아는사람통해 일처리하는것) 없이는 엄청난 불편과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사회의 공공연한 부조리등등 하지만 그러한 공산당의 통제도 울고가게 만드는 시스템이 하나있었다. 그곳 도시마다 있는 한국사람이 만든 회중이었다.
내가 중국에서 살면서 내가있는 회중에 뭔가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알아차리는데는 한달도 걸리지 않았다. 그곳에는 두명의 장로가있었는데 심각하게 갈라져 있었다. 회중일을 의논하는 것 빼고는 아예 말조차 하지 않았으며, 서로 편하기 위해 집단을 둘로 갈라서 사실상 대면할 일도 없었다. 그런 분위기에서 나를 비롯한 새로온 사람들은 선택을 강요받아야 했다. 한쪽을 선택하는 순간 한쪽은 적이 될수밖에 없는… 나와 비슷하게 온 사람들은 모두 순수하고 합리적인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모두에게 잘하려고 노력했고, 그 사람들과의 유대는 나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 하지만 결국 감독자의 눈밖에 나면서 우리는 엄청난 갈굼을 당하게 된다.
주거권의 박탈. 내가 살 집을 내가 선택할수 없었다. 개인집에서 집회를 보기 때문에 감독자는 현지인(집회참석하는 중국인)을 고려해서 현지인들이 많이 사는 빈민가 부근에 방을 정하게 했다. 물론 방값은 내가 냈다. 정작 감독자는 잘사는 사람들이 사는 구역에 큰 집을 얻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자기 집에서는 대회도 보고 숙소제공도 해야되기 때문이었다. 중국은 벤츠와 달구지가 같이 길을 다니는 세상이다. 엄청난 부자와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거지가 한도시에 산다. 감독자는 잘사는 사람들 사는 좋은 구역에서 살았고 나 같은 사람들은 빈민가수준의 방을 얻어 살아야 했다. 불편이 이만저만이아니었다. 겨울에는 창가에 놓은 물통이 얼었고, 변기는 막히기 일쑤였다. 다행히 중립에서 고생한 경험이 있어 견딜수 있었다. 참 아이러니했다.
사생활의 박탈. 수시로 전화가 왔다. 회중일의 명목하에 이런저런일로 바빴다. 심지어 밤에 전화해서 내일 학교 가지 말로 자기 따라다니며 일하라고 통보하기도 했다. 매일매일 물건나르고, 현지인봉사 명목으로 돌아다니며 힘쓰는일 해주는 식으로 노동을 하기가 일쑤였다. 일주일에 5일 나가야 할 수업중 2,3일은 항상 희생해야 했다
어느날은 갑자기 나를 저녁에 불러서 사귀는 여자 있냐고 물어보는 것이었다. 없다고 했더니 거짓말하지 말란다. 알고보니 내가 없는동안 우리집에 들어와서 내 컴퓨터를 열어본 것이었다. 사진속에 있는 친한 자매 사진을 보고서는 나에게 다그치는 것이었다. 그 형제는 안전 명목으로 형제자매들의 집 열쇠를 하나씩 가지고 있었다. 그게 필요한 부면도 있었지만 이렇게 사생활 감시수준이 될줄은 생각도 못했다. 중국에 있는 순간부터 내가 항상 쓰던 다이어리는 백지상태가 되었다. 왜냐면 나는 나의 스케쥴을 계획할수 없었다. 내가 할일은 항상 그런식으로 통보받았기 때문에….참 답답했었다.
뺑뺑이. 중국에 봉사하러 갔다고 쉽게 되는 것은 아니었다. 한국 사람들은 언어표현의 한계가 있었고, 안전을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아무나 만나는게 쉽지 않았다. 그래서 대부분 현지인이 자기의 친구나 이웃에게 봉사해서 연구제의를 받아들이면 한국인에게 인계해 주곤 했다. 사람은 현지인이 찾고 연구사회는 한국인이 하는, 꽤 좋은 방법이었다.
그런데 감독자는 현지인에게 연구를 하려는 사람을 찾으면 아무에게 주지말고 자신에게 말하면 자신이 알아서 배정해 주겠다고 회중에서 광고한다. 그리고 현지인들에게 소개받은 연구생은 대부분 자기 부부가 가져갔고 정말 귀찮거나 가망없는 사람들은 싫어하는 사람에게 배정되었다.
나는 버스를 타고 두시간을 가야하는 오지에 있는 사람을 배정받아 매일 담배연기와 구린내가 나는 시골버스를 타고 가서 연구를 하고와야 했다. 갔다오면 하루가 다 지나갔고 다음날은 앓아누울 지경이었다. 내 친구는 우울증에 걸린 사람을 인계받아 발전없는 공부를 했다.
반면 잘하는 사람은 언제나 감독자 부부의 것이었다. 이런 생활이 몇 개월 지속되다가 드디어순방기간이 되엇다. 심각하게 고민한 끝에 애로사항을 순감에게 말하기로 친구들과 합의를 봤다. 하지만 우리는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순감형제가 감독자와 의형제수준의 절친한 사이라는 사실을 전해들었기 때문이었다.
[외국어봉사를 했던 나의경험 4]
내가 있던 곳에 4대천왕이라는 사람이있었다. 순회구에서 악명높은 4명의 감독자들이었다. 그중 한명인 S는 돈안쓰기로 유명했다. 다른 사람들과 식사를 하는 뭘 하든 1원한푼 쓰지 않는 사람이었다. 씀씀이가 인색한 사람들이 마음도 인색한 법. 자기가 관리하던 도시에서 맘에안드는 사람들을 괴롭히는데도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었다. 당시 같은 회중에 있던 두명의 젊은 자매들과 사이가 몹시 안좋았는데 어느날 두 자매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을 불러놓고 자매들과 연락과 교제도 하지 말라고 으름장을 놓았다고 한다. 감독자가 공공연히 왕따를 시킨것이었다. 한국에서 중국어집단이 생길 초창기부터 봉사를 한 탓에 연줄과 인맥으로 중국특파까지 되었으나 그 악명은 점점 더해갔고, 결국 중국어봉사 관할하는 H의 눈밖에 나서 지금은 특파 박탈당하고 한국으로 돌아왔을 거라는 추측만 난무한다.
또한명은 P라는 사람인데 사람의 외모를 가지고 평가하는건 옳지 못하지만 정말 첫인상부터 절대 사람들에게 좋은 느낌을 줄수없는 외모의 소유자였다. 음악, 노래를 매우 좋아했는데 기타도 잘치며 가족,친척이 다 음악계통에 있다고 했다. P는 한국에서 중국 개척을 시작하면서 처음 파견된 사람중 하나였다. 자신이 초창기 멤버이며, 중국최장 경력자라는 사실은 사람을 거만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P는 젊은 형제들을 형제로 대하지 않았다. 한번은 우리구역에 외부연사로 와서 모인자리가 있었는데 이렇게 말했다.
“어이 젊은애들…집합” “차렷”
형제라는 칭호보다는 즉석에서 만든 별명이나 이름을 부르곤 햇다. 지금은 길림성 어디에서 도시전체 감독자로 있다고 한다. 그곳에 가게된 내 친구…이미 충분히 악명을 듣고, 마음 단단히 먹고 갔다. 몇 년이 지난 지금 연락이 왔다… 한국으로 돌아가고싶다고…
또 한 사람은 L인데 내가 직접 만나거나 대면하지 않아서 잘은 모른다. P와 마찬가지로 초기 파견된 사람중 하나였으며, 나이가 가장 많은 연로자에 속했다. 하지만 이분도 만만치 않은 사람이었다. 이분이 있는 도시는 한국 사람만 들어가면 둘로 갈라져 싸우는게 다반사였고 결국 그게 회중분위기로 연결되어 회중수가 늘기는커녕, 점점 줄어들었다. 같이 일하기 위해 파견된 한국사람은 1년을 못넘기고 스스로 이사가버리고 협회에서 또 한국사람을 보내주면, 또 못견디고 가버리고… 결국 심각성을 안 협회에서도 이분을 돌아오게 하려 했지만 워낙 연륜과 완고함이 있어 어떻게 하지고 못하고 그냥 한도시에 모셔두고 있다고 한다.
중국에서는 장로,봉사의종 같은 신권용어를 쓰지않고 증인과 관련된 모든 명칭이나 단어를 대체용어로 사용하고있다. 봉사의종은 대리 장로는 부장 순감은 이사, 이런식으로 불렀었다. 하지만 몇 년전부터 칭호를 사용하지 않도록 했다. 그 이유는, 정말로 칭호처럼 사람을 대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회중보다는 회사의 개념이 정립되면서, 일반회사와 다를바가 없는 현상이 마구 생겨났다. 장로는 봉종을 자신의 부하처럼 마구부려먹고, 일 잘못하면 큰소리지르고 공적인일과 사적인일을 구분못하고 간섭하고 형제를 형제가 아니라 종취급 했다. 한 장로가 하던 말이 생각난다.
"너넨 종 맞아. 봉종아니야? 종들은 장로가 시키면 하는거야”
시켜도 무얼시키느냐가 중요한 것이었다. 순감오면 안마시키고, 나중에는 안마시술소 모셔가기도 하고 저녁에 집합시켜서 당구치고 술과 양꼬치 먹고 자기 연구생 이사하거나 힘쓸일 있으면 봉종 인력파견하고 정말 이루 말할 수가 없는 이해할수 없는 일들을 해야했다. 중국에서의 생활은 정말로 회중이 아닌 회사였다. 내가 월급받고 일하는게 아니라 내 돈써가며 다른사람 수발드는….
지금까지 간략하게 이야기를 썼다. 중국봉사에 조금도 관련이 없었던 분들이 보면 저게 뭐야? 하는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다. 어떤분들은 이렇게 생각하실 것이다. 그럼 다른데로 가면 안되? 아니면 그냥 한국에 나오면 되지….? 사실 그곳에 있는 사람들도 안다. 그곳엔 한국에서 설명할 수 없는 현상들이 많이 일어난다는 것을. 중립갔다온 분들은 그곳 형제들 사이에 별의별 일들이 다 일어난다는 것을 아시는것처럼.
하지만 참을 수밖에 없다. 왜냐, 눈밖에 나면 결국 손해보는건 자기이기 때문이다. 옳은소리 하거나 소신대로 행동했다가는 찍히기 쉽상이다. 찍히면 그 이후의 생활은 학교에서 왕따당하는 학생이나 다를바가 없게 된다. 그리고 미래를 위해서 참는다. 특파가 되기 위해서는 견뎌야 한다… 특파가 되려면 감독자에게 좋은소리들어야 하고 그게 결국 순감에게 좋은말 하게 되는거고, 그래야 특파가 될수 있다. 결국 알지만 참는것이다. 자신을 위해서… 그것이 다 큰 임무를 맡기기전에 여호와께서 시험하시는 것이라고 또는 시간이 지나면 바로잡아 지게되어있다고 위안하며 참는것이다…
과연 이런 현상들을 협회에서는 모를까? 모를리가 없다. 너무나 잘 알고있다. 지금 한국협회에서 제일 크게 신경쓰는게 바로 중국봉사다. 문제점이 많다는것도, 그 자세한 내막도 잘 알고있다. 하지만 크게 개입하지 않는다.
이미 말했지만 중국에서 일하는 특히 초창기 파견멤버부터 순감, 대리, 도시 감독자까지 오랜 개인적 친분과 연줄, 친인척 관계로 뭉쳐져 있다. 과연 누가 자신의 친척의 친척, 사돈의 팔촌을, 친구의 친구를 과감하게 떼어내는 일들을 할수 있을까… 그리고 그 안에서 이미 기득권층이다. 힘없는, 왕따 당하는 사람들은 결국 자기가 돈떨어지고 시간지나면 돌아가게 되어있다. 한번은 장로와 어떤 갈등으로인해 이야기 했다. 그때 이렇게 물었다.
"형님, 협회에서도, 출판물에서도 조직이나 장로들이나 다 불완전한 인간이라고, 따라서 실수도 있고 잘못도 할때가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 맞아”
“그래서 전 그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말하는 거 아닙니까?”
“아니, 넌 그걸 말할 자격이 없어, 그건 여호와께서 바로잡으실 문제이지 너가 관여할 일이 아니거든”
그때 알았다. 조직에서 때로는 불완전하며 실수할수도 있다고 하는건 스스로의 잘못을 인정하는게 아니라는걸. 다음 이어지는 편에서 제가 생각하는 가장 심각한 문제에 대해 본격적으로 들어가보겠습니다
[외국어 봉사를 했던 나의 경험5]
강제로 무언가를 한다는 것. 여호와의 증인과는 동떨어진 것으로 보였다. 무엇이든지 자원하는 영으로 되는거라고 생각해 왔었기에… 하지만 한국지부가 홍콩으로부터 동북3성을 양도받고 양적으로 엄청난 팽창을 할수있었던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강제성에 있었다.
사실 사람들이 특파로 파견되어 협회에서 생활비, 집세, 학비, 비자문제를 해결해주면서 봉사를 해나간다면 재정적 한계가 있는 협회에서 얼마나 진척이 가능할까? 더 많은 인력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협회의 방침이 바뀌게 되었다. 비밀리에 특파를 파견해서 개척하는 법에서- 대규모 자비 봉사자를 마련하는 쪽으로 급선회하게 되었다. 그후 순방때만 되면 감독자는 중국으로 가라고, 지금빨리 가야 빨리 특파로 임명이 난다고 빨리 가서 더 큰곳에서 봉사하라고 격려했다.
실제로 특파를 꿈꾸는 한국의 수많은 독신들과 부부들이 집과 재산을 정리하고 중국으로 가게 되었다. 재산정리하면 손에 몇천이상 나온다. 그리고 그 돈이면 중국에서도 몇 년은 살수 있다. 그 기간안에 특파가 되면 되니까… 그렇게 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중국으로 달려가는 황금러시가 아닌 특파러시 현상이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하지만 협회는 잘 알고있었다. 그렇게 재산을 처분하고 간 사람들을 전부 특파를 임명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재정도 한계가있고, 무엇보다도 중국에서의 확장은 자비봉사를 하는 사람들의 돈과 인력이 중요한 것이었지, 사람들을 특파가 되도록 하기위해 그런 중국러시 바람을 불게 한건 아니엇다.
특파가 되어야 한다는 절박감은 사람들이 그곳에서 어떤 일도 하도록 만들게 되었다. 봉사를 하기위한 경쟁은 더욱 치열해졌고 서로 많은 연구와 재방을 하기위해서 경쟁이 과열되었다. 연구생, 재방건수 때문에 싸움이 나는 일도 허다했다. 일년에 두차례 순방과 세차례의 대회는 좀더 자신을 알리고 추천을 받기위한 치열한 로비의 현장이 되었다. 서로 방문하는 순감이나 외부연사를 숙소제공하려고 경쟁했다.
내가 보기에는 방문하는 사람들- 그들 스스로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런 것들을 자신들이 몸이 뻐근하다고 말하면 바로 사우나로 모셔가고 몸이 어디가 좀 허약하다고 하면 바로 중의원으로 가서 침맞을 수 있고 자기 취미가 뭐라고 하면 바로 저녁마다 무료로 취미를 즐길 수 있다는 사실을. 좋아하는 음식이 뭐라고 말하면 일주일 식단에 내내 올라온다는 것을. 하지만 그들은 중요한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사실 자신들은 특파임명에 별로 관여하지도 않고 그럴권한도 거의 없다는 사실을.
그러나 시간이 지났고,,,,, 수많은 독신과 부부들이 재정이 바닥나고, 특파가 요원해지자 귀국하게 되었다. 내가 아는 여러 사람이 끝까지 버티다가 결국 돈벌어야겠다고 한국에 돌아가는 경우도 여럿 보았다. 그때의 그 쓸쓸함은 이루말할수 없었다.
하지만 몇몇 순감들은 그런 일들을 너무나도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하곤했다. "어느 도시에 누구 누구는 돈 다떨어지니까 울면서 떠나더라"고 "그러게 왜 집을 팔아오냐, 그런건 너무 무식한 올인이다"는 등… 누구에게도 떠나는 사람에 대한 배려와 동정심 보다는 경쟁자가 줄었다는 생각과, 저렇게 돈깎아 먹으면서 오는건 어리석다는 생각만을 하게되는듯 했다.
[외국어봉사를 했던 나의 경험6]
한국이든 중국이든 한국지부가 관할하는 구역은 운영방침이나 기조가 비슷한 것 같다. 하지만 몇해전에 얼마의 조정이있었다. 특파의 수당이 줄어든 것이었다. 한국에서는 특파의 수당이 정해져 있지만 중국에서는 다르게 지급된다. 도시마다 물가,방세,학비등의 차이가 엄청나기 때문에 일괄적용에는 무리가 있는듯 보였다.
그리고 한국지부에서도 중국인을 특파로 임명하는 경우가 생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중국인은 한국인보다 더 적은 돈으로 살아갈수 있다. 생활비도 그렇고, 중국내에서 체류문제를 신경쓸 필요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한국사람을 특파임명하는 것보다관리나 비용면에서 훨씬 좋았다. 중국현지인의 입장에서도 나쁠게 없었다. 중국사람이 아무리 일해봐야 월급은 그수준이다. 작은도시에서는 1000위안(20만원)부터이고 대도시의 경우 2000위안(40만원) 넘는 수준이다. 그것도 대학나온 사람들 이야기고 밑에서 일하는 경우에는 1000위안정도면 많은 수준이었다.
특파의 월급조정은 한국인 입장에서는 삭감된 부분이 많은듯 했다. 그때 감독자가 하던 말이 생각난다. 중국에서도 한국처럼 특파들은 일반 전도인들의 지원이 필요하게 될거라고… 꿈도 야무진 소리처럼 들렸다.
두번째는 순감의 수당이 없어졌다. 순감역시 특파와 같이 월급을 받는 입장이었는데 순감의 월급이 없어졌다고 했다. 그럼 순감은 무얼먹고 사느냐? 자신의 비용을 청구 할수있게 되었다. 더 많이 눈치볼수 밖에 없는 식이엇다. 청구를 하더라도 최소한의 비용으로만 할 뿐이라고 했다. 이점을 회중 사람들 모아놓고 언급하였다. 그러면서 말했다. 그런 사람들을 돕고 부양하는 일에 정규파이오니아들이 참여해야 한다고… 그러면서 방문때마다 자원하는 사람들은 교통비나 식사비로 돈을 줄수 잇다고, 물론 자원하는 사람에 한해서였다.
하지만 중국에 사는 사람들 형편이 넉넉할수 없었다. 중국에 사는이상 재정은 줄면 줄었지 늘지않는 상황에서, 자기 생활계획도 어려운데 특파가 순감까지 비용으로 지원해 주어야 한다는 마련은 너무 상황에 맞지 않는 것이었다. 한국지부는 이곳 사람들이 얼마나 힘들게 아끼고 사는지를 정말 몰라서 이러는걸까? 역시…어느정도는 자원하는 사람들이 주는경우도 있었지만 그 돈으로 생활전반에 비용을 충당하는 것은 무리였다. 나 역시 여러 번 생활비를 주었지만 언제부터인가는 그러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고, 식사를 대접하고 후대를 할지언정 돈을 주지는 않았었다.
하지만 그후 순감들이 회중에 비용을 청구할수 있게 되었다. 방문 마지막날에 비용을 청구하였고, 그돈은 헌금 통장에서 지출되었다. 순감에 대한 월급을 끊고 비용을 중국에 있는 사람들의 지원으로 바꾸고, 부족하자 회중에 헌금을 청구할수 있게 변해버렸다. 정말 궁금했다. 전체 순감의 숫자가 몇이나 되길래 그런 조정을? 표면상으로는 자원이지만 사실상 강제성을 띨수밖에 없는 그런 마련을 왜 했는지?
원래 사람들은 순감에게 돈을 준다해도 떠나기 전에 주곤한다. 순감들이 회중에서 청구도 하고, 개인적으로 돈도받고, 일석이조로 얻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래서 감독자가 순방전에 돈을 주실분이 있으면 마지막에 주지말고 미리 주라는 광고를 여러 차례 하는 일도 생기게 되었다. 참으로 웃기지만 웃을수 없는 현상이었다.
특파의 감봉과 순감의 비용청구는 당시에도 많은 사람들의 화제가 되었다. 실제로 여러 사람들이 개인적 자리에서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 하곤 했다. 결국 협회는 비용절감이고 중국에 있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헌금을 더 많이 내라는 의미 아니냐고. 아무리 비용이나 효율을 고려해도 당시 경제 위기가 시작되면서 환율이 급등하는 마당에 그런 상황을 고려하지 않는거냐고 여러 사람들이 논리있고 합리적으로 주장했었다. 심지어 감독자조차도 마련에 의아해 했었다. 하지만 그문제 조차도 협회의 마련에 그런식으로 왈가왈부 하지 말아야 한다는 위에서 방침이 내려오고 난 후에는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외국어 봉사쪽의 최근의 소식들입니다]
오랜만에 글을씁니다. 그동안 정신없는 일들이 너무 많아서 글쓸 여력이 없었습니다. 자주들어오곤 했었지만, 오래동안 진지하게 글을 읽고 생각할 시간도 없었네요.
한국 협회에서 밀어부치고 있는 외국어 봉사에도 여러가지 변화가 생겼습니다. 한때 중국어붐을 일으키며 수많은 형제자매들의 중국러시가 일어나던 때가 무색할 만큼 중국에 봉사하려 오려는 자비 봉사자들이 줄었습니다. 얼마전 이곳 순감과 이야기를 했는데 그분이 그러시더군요. 점점 한국에 돌아가려는 사람은 많은데 들어로는 사람은 없다고요...
사람이 부족해서 협회에도 지원요청을 했지만 지금은 지원자가 없다고 하네요. 돌아가는 사람은 늘어나고,,, 새로들어오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미 불려놓은 회중은 한국인 형제들이 와야만 유지가 되는데, 이 추세는 1,2년 후면 한국인이 더 급감하여 운영에 차질을 빚게될 거라고 합니다. 이런 배경에는 최근 경기침체와 환율상승의 영향이 큽니다. 사실 위안화 환율은 달러보다 더 많이 상승하였고, 위안화는 중국 경제가 발전하는 만큼 다시 절하될 가능성이 그리 크지 않습니다.
하지만 더 큰 요인은 한국에 있는 외국어 봉사하는 사람들이 너무 똑똑해졌다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예전만 해도 협회에서 중국가라고 하면 뒤도안돌아보고 떠나는 열성적인 사람들이 많았지만 지금은 사람들이 냉철해졌습니다. 수많은 먼저간 친구들을 통해 그곳 상황을 듣게 되었고, 그곳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부조리들도 알고 있고 한국지부가 관할하는 동북쪽에 가봐야 고생만 하고, 권력다툼에 휘말릴게 뻔하다는걸 알게된겁니다. 중국 봉사에 대한 환상이 많이 사라졌다고 볼수 있겠지요.
그나마 숫자도 적은 중국에 가려하는 사람들은 남쪽으로 가려고 합니다. 남쪽이란 한국지부가 관할하는 동북3성을 제외한 다른 모든곳을 통칭합니다. 홍콩지부가 관할하는 그곳은 세계 각국의 외국인 봉사자들이 있어 서로 존중하고 개인 프라이버시를 존중하는 분위기가 잡혀있고, 더 자원해서 새로운 곳을 개척하는 사람들에게는 쉽게 임시특파 신청서를 내준다고 합니다.
다들 남쪽으로만 가려고 하니 한국지부도 크게 신경쓰고 있다고 합니다. 최근에 방침이 변경되었는데 예전에는 중국에 가고자 하면 무조건 중국에 회중에 1년이상 연합하고, 협회에 자원신청서를 내고 협회에서 지정해주는 도시로 가야 했었습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고 중국에 간다면,,,추천을 하지 않는 불이익을 주었죠. 그런데 최근에는 한국어 회중에 있는 사람도, 중국어 하나도 할줄 모르는 사람도 중국에 가고자 하면 보내준다는 것이었습니다.
한때는 형제들 추전을 해주지 않는, 사실상 강등조치를 취하던 상황에서 이제는 상관없으니 무조건 가라고 하는....이런 표준은 과연 누구의 생각입니까? 저는 정말 묻고 싶습니다. 과거에 제가 중국에 순수히 유학가려 할때도 가면 봉사의종과 파이오니아 놓게된다며 부모님에게 그런 충격을 주고싶냐고 으름장 놓던 조정자의 얼굴이 떠오르네요...
저는 이제 중국생활을 마치고 곧 한국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짐을 정리하던 저에게 몇가지 제안이 들어왔습니다. 지금 어디어디에 새로운 집단을 개척할 계획이고, 제가 그곳으로 가면 빨리 특파가 될수 있다. 자기가 밀어주겠다라고 순감이 말하시더군요... 그리고 제안을 받아들이면 빨리 장로추천을 해주겠다고요...
그래서 전 장로임명은 봉종 임명과는 다른 성령이 임명하는 것 아니냐고, 빨리 되고 싶은 생각도 없거니와, 개인적으로 부족하다고 생각한다고...말했습니다. 그랬더니 지나친 겸손을 교만이라며, 특권을 사모하고 추구하는 것이옳은 것이라는 조언을 들었습니다. 그런 말을 들으니 예상은 했었지만 기분이 좋지는 않더군요.
그래서 전 물었습니다. 장로임명은 여호와의 영이 아는것 맞습니까? 조직책에서도, 그리고 최근에 배운 봉사지에서도 그점을 언급하였는데요? 맞다고 하는군요..그것은 여호와의 성령이 작용하고 임명하는 것이라고요.
그래서 다시 물었습니다. 미국에있는 제 친구에게서들은 말입니다... 왜 한국에서는 20,30대 형제들이 많이 장로로 임명되는데 유럽이나 미국에서는 20.30대 장로는 거의 없고 40,50대 넘어가서야 장로가 되는걸까요? 한국만 왜 유독 다르다는 느낌이들까요? 아니면 한국만 특별한 건가요? 그 형제도...허허 웃으시며 대답을 안하시더군요... 혹시 제가 영성에 문제가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할까봐 그이상은 대화하지 않았습니다.
암튼 이래저래 많은것을 생각하게 되는 요즘이었습니다. 휴일...추석... 여러분들 모두 편안하고 넉넉한 시간 보내시길 바랍니다
[이곳에 들어오신 현역 증인 여러분께]
안녕하십니까? 반갑습니다. 여러분들처럼 저 역시 현역 형제입니다. 어릴적부터 지금까지 나름대로 충실하게? 살아왔다고 자부하는 사람이에요. 여러분들은 어떻게 이곳을 들어오게 되셨는지요? 혹시 마음한구석 호기심과, 배교자를 접한다는 두려움을 가지고 계신지요? 저역시 여러분들과 마찬가지로 내가 속한 이곳이 참조직이며, 신권조직의 백성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습니다.
국제대회에 참석하셨나요? 공개강연에서 웬트워스 형제가 1975년에 관해 이야기 하는 것을 들으셨나요? 어쩌면 우리가 태어나기 이전에 일들입니다만, 여러분들은 그때의 일을 잘 아실겁니다. 저와 친한 한분은 그때를 이렇게 회상합니다. 그때 자신은 아무것도 모르는 꼬맹이였지만 부모님은 열심있는 증인이셨다고요. 1975년 이전의 여호와의 증인은 마치 1992년 휴거를 믿은 다미선교회와 다를바 없는 분위기였답니다. 그 당시의 회중은 정상적으로 집있고 일하는 즉, 재산을 처분하지 않는 사람들은 믿음에 심각한문제가 있는사람으로 간주되었다고 하니 그때의 열풍이 얼마나 강했는지 짐작하실 겁니다. 그 분위기에 부모님 역시 집을 팔고 헌금하고 파이오니아에 매진하였다고 합니다. 결국 1975년은 지나갔고 여파로 그만둔 많은 사람들 중에 하나가 되셨다고 하네요.
하지만 1975년에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썰물빠지듯 나간게 아님을 아시나요? 대규모로 나가는 일들은 1978년에 있었고, 그해에 수많은 증인들이 급감하였지요. 78년에 협회에서는 공식적으로 75년의 인간통치의 끝에 관한 견해를 부정합니다. 일부 열심있는 사람들의 행동쯤으로 규정하며, 협회에서는 재산을 처분하고 세속일을 그만두는 지침을 내리지 않았으며, 불만,의심을 갖는 사람들은 기회주의적인 행동이며, 자신의 불충성스런 동기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입장을 표명합니다. 그때, 수많은 사람들이 떠나게 된 것이죠.
시간은 계속 흘렀고, 30년이 넘은 지금 협회에서 국제대회를 통해, 그것도 공개강연에서 75년을 언급하며 그때 잘못 예측하였다고 사실상 처음으로 인정하게 됩니다. 하지만, 인정하는 말을 한 후 웬트워스 형제는 이렇게 묻습니다. 이렇게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야 말로 이 조직이 참조직임을 증명하지 않습니까? 그때 전 허탈한 탄식을 내뱉었습니다. 정말로 하고싶은 결론은 이 조직은 그래도 참조직이다 라는 것임을 알았죠. 과연 그 말을 할수 있을까요? 전 의심이 들었습니다.
그 이후 이어지는 여러가지 비유는 전혀 마음에 와닿지 않았습니다. 임산부가 통증이 있다가 애기가 나오지 않는다고 아예 안나오는 것이냐? 파수꾼이 바람소리에 놀라 가족들을 깨웠다고 비평받아야 하느냐? 이런 비유들은 조금도, 정말 조금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사실 협회에서는 제기되는 여러가지 문제에 대해 조직역시 인간이다, 불완전한 인간이기에 잘못하는 면이 있을수 있다며 어느정도 인정해왔습니다. 하지만 잘못을 인정하는 동시에, 잘못의 지적은 용납하지 않는 모순적인 행태를 계속 보여왔습니다. 그렇다면 잘못은 어떻게 바로잡아 질까요? 성령의 인도로 빛이 밝아지듯 바로잡혀 가는걸까요? 아니면 75년의 사건처럼 시간이 잘못을 증명하게 되는걸까요?
저는 이곳에 오는 여러분들이 성급하게 조직이 잘못되었다는 결론을 내리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조직에 대해 관심을 갖고, 조금 더 이성적이고 냉철하게 바라볼수 있는 시각을 갖게 된다면 그걸로 만족합니다. 성서를 연구하듯이, 조직을 연구하고 알아보기를 바랄뿐입니다.
오래전 일이지만 한때는 증인들이 적극적으로 소위 배교자와 만나 토론을 벌이는 일이 많이 있었습니다. 제가 십대일때만 해도 상대를 격파하기 위해 성서를 연구하고, 배교자들이 주장하는 자료나 유인물도 봐가며, 때로 형제들끼리 공유하기도 했었습니다. 사실 그때의 배교자라고 해봐야 성서의 교리에 대해 논쟁하는 경우였습니다. 배교자들과 이야기 하고 안될때는 장로의 도움도 청하기도 하였으니까 그런쪽으로 토론이 매우 활발하였습니다.
하지만 90년대 중후반쯤부터 배교자들을 피할것을 권고하였고, 토론은 커녕 만나거나 인사도 하지 말라는 권고를 받습니다. 유엔가입등등 문제가 제기되면서 그런 방침은 더욱 강화되었고, 몇 년전에는 배교자와 만나거나, 유인물을 읽거나, 인터넷으로 접하는 것은 이미 배교자가 된 것과 같은 처분을 받게 되었습니다. 치사적인 독극물이라는 묘사와 함께, 집회때마다 조정자가 심각하게 광고하는 것을 본 기억이 잇을 겁니다. 어떤 방법으로든 배교자, 자료를 접하는 것은 사법문제의 대상이라고요.
성서교리의 논쟁에 있어서 적극적으로 임하던 협회가, 자체의 문제(유엔가입,75년등)와 관련하여 외적으로는 철저한 무반응, 내적으로는 엄중한 단속으로 일관하는 것을 이해할수 없었고 성서 원칙을 과잉적용하여 우연이든 어떤 방식이든 소위 배교자를 접하는 것만으로도 배교로 판단하는 이유조차 받아들이기 힘들었습니다. (성서시대에 배교자란 예수를 부정하고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었음을 기억한다면, 조직에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을 배교자로 규정한 점에 대해서 협회는 성서적 근거를 다시 제시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글이 길어졌으니 빨리 마치겠습니다. 저역시 현직 증인이며, 여러분들과 같습니다. 물론 조직에서 배운것도 있고 좋은것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제가 굳게 믿었던 것들이, 때로는 이것의 여호와의 인도라고 생각하며 제가 젊음의 모든 것을 다해 추구했던 것들이, 사실은 지극히 개인적인 조직안의 일개 사람의 결정이었음을 알게 되었을 때, 허탈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 카페에 들어온 것을 배교자의 길에 들어서는 순간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두려움과 호기심을 그대로 받아들이십시오. 자신의 지적능력과 이성을 믿고, 냉철한 시각으로 모든 것을 바라보기 위해 노력하십시오. 저 역시 그렇게 하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각자의 결론은 각자가 내게 되겠지만 전 ‘증인’보다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과 추구해야 할 방향에 더 무게들 두고 싶다고요.
[내 마음속의 갈등과 혼란]
아시다시피 전 중국에 있습니다. 돌아가는 날이 눈앞에 다가왔습니다. 열심히 정리하고있구요... 이곳에서 살아왔던, 그리고 앞으로는 다시 경험하지 못할것 같은 생활이 아쉬워 시간날때마다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사진찍고 있습니다. 이제 제가 돌아가는걸 여기 한국사람들도 다 아네요... 평소에 연락도 안하는 사람들이 식사대접 한다고 초대를 많이 해줍니다. 하지만 저는 거절하고 하나도 가지 않고 있습니다.
식사가 그냥 식사가 아닌걸 왜 모르겟습니까 훗훗. 벌써부터 로비(?)가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다들 조심스레 물건 어떻게 처분할거냐고 물어보기 시작합니다. 컴퓨터나 핸드폰, 심지어 자잘한 물건들까지 혹시 자기에게 줄 생각 없냐고 농담반진담반으로 묻는 사람도 있습니다. 연구생과 재방 몇건이냐고 묻는 사람도 있습니다. 자기에게 인계해 달랍니다. 참 작은거에 집착하는거 같아보이지만 어느정도 이해는 됩니다. 다들 어려운데 불경기에 허리띠 졸라매고 아껴가며 열심히 살고 있으니까요...
함께 봉사나 연구라도 같이하는 날이면 저에게 항상 하는 말이 있습니다. 괜찮다...한국가서 다시 열심히 시작하면된다...계속 봉사의 정신을 가지고 있으면 여호와께서 길을 열어주실 것이다... 남아있는 사람들에게 저는 실패자로 보이는 걸까요...? 잠재적인 특파를 위한 경쟁자가 줄었다고 생각할까요...?
그런 말들을 들으면서 생각합니다. 증인조직에서는 무엇인가를 그만두거나 특권을 내려놓을때 죄책감 내지는 스스로 자책을 느끼도록 되어있는것 같습니다. 회중광고에서 아무개는 더이상 무엇무엇이 아닙니다...라고 광고할때 정말 어떤 심정일까요. 정말 건강상의 이유로, 가족부양을 더 짊어지기위해, 어떤 이유로든 맡은 특권이란 것을 내려놓을수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공개적으로 더이상 아니라고 광고하는 것은 누구를 위한 일일까요?
세상 일에서도 전직에 대한 예우가 있습니다. 꼭 그런 대우를 바라는 건 아니지만, 내려놓는 사람을 위한 형식적이든,감정적이든, 그러한 고려가 없다는게 참 답답합니다. 얼마전 제가 아는 한 형은 일이너무 바빠 그동안 힘들게나마 지속해오던 정파를 놓았습니다. 얼마있다가 자기가 왕국봉사회 광고를 하는데 광고목록에 자기 이름이 있다더군요. 자기가 연단에서 자기는 더이상 정규파이오니가 아님을 알려드립니다...라고 광고했답니다. 그리고 집회후 바로집에가서 술을 마셔야만 했다는 말을 전화로 들었습니다. 이것이 이제 앞으로 내려놓기를 시작할 저의 모습인것만 같습니다.
한동안 돌아다니다가 중국 피시방에 들어가서 이 카페에 접속했습니다. 차칸사람 님이 쪽지를 보냈는데 잘못보낸거 같습니다. 답장을 쓰려고 하는데 한국어 키보드가 없어 방법이 없네요...ㅎㅎ
저는 요즘 레이몬드 프랜즈의 양심의 위기를 며칠째 읽고 있습니다. 특히 이중표준에 대한 사건과, 협회의 시각은 정말 무섭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습니다. 이중표준이라는게 내 주변에도 있을수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지난주 집회때 봉사회에서 청소년들이 학교에서 중립을 지킬수 있도록 부모여러분이 도와주십시오라는 프로가 있었습니다. 집회프로는 전세계가 다 같지만 봉사지는 중국판이 따로나오고 프로그램도 많이 다릅니다. 그때 회중에 이사온지 얼마안된 형제가 그 프로를 다루더군요... 이 형제가 아주 FM식으로 프로를 다루었습니다. 한국에서는 국기경례도 하지않고 투표도 하지 않는다. 회중에 자녀들이 그렇게 할수 있도록 부모가 인도해야 한다... 듣던 중국 사람들 눈이 휘둥그래집니다...그리고 당황하는 조정자분의 표정이란....
왜냐구요? 이문제는 그동안 중국에서 침묵으로 묵인되던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중국에 회중에 수많은 중국형제자매들이 있고 대부분 하나씩 자녀가 있습니다. 전부는 아니지만 상당수 자녀들이 한국인과 나의성서이야기책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만약 이자녀들이 학교에서...성서에서 배운대로, 아니 우리가 배웠덙대로 행동하면 어떤일이 벌어질까요?
공산주의 나라에서 국기경례를 하지않고 노래를 부르지 않으면? 중국은 중학교부터 군복입고 군사훈련을 받는데 그걸 하지 않으면?
매년 수많은 공산당 관련 동원행사가 있는데 참가하지 않으면? 그건 단지 학교에서 부모님 찾는정도로 일이 마무리 되지않을 것입니다. 이건 어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중국은 회사도 국영기업이 많고 국영기업은 사실상 공산당 간부아래 있습니다. 일반 회사원들도 국가행사때마다 동원됩니다.
얼마전 중국은 공산당 건국60주년을맞아 엄청난 대대적인 행사가 있었는데요. 저희 회중에 한 형제는 합창단원으로서 도시마다 방문하여 국가를 부르는 공연을 하게되었습니다. 이분이 양심의 가책을 느끼시고 조정자를 찾으셨습니다. 결과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분은 합창에 계속 참가하셨습니다. 하지만 최대한 립씽크를 하라고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중국인 형제자매들은 자녀가 학교에서 모든걸 하고, 자신들 역시 국가 행사에 참여합니다. 대부분은 그에대해 무감각하며, 이점에 대해 성서의 견해와 다른것이 있는지 자각하지 못합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점에 관해 중국에서는 어떠한 지침도 견해도 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약 한국처럼 방침을 세운다면, 중국에서 파룬궁처럼 될게 뻔하기 때문이지요.
분명 공산주의 사회에서 국가를 숭배하는 일이 학교에서,회사에서 벌어지고 있고, 수많은 중국 형제자매들이 아무 의식없이 참여하고 있음을 잘 알지만 그에대해 손을쓰지 않고 있습니다. 이런 생각이 듭니다.... 만약 중국이 민주화가 되고 종교의 자유가 생기면 그때 바꿀까요?
첫댓글 제 바로아래 여동생이 현제22살로 17살때부터 중국어집단을다니면서 현재는 중국어를 마스터했고 현재는 직장다니면서 중국갈돈을마련한다고 1년째 저로고있는데 과연 말려야하겠네요.. 그곳 실정이 그런줄은 몰랐습니다. 저희 아버지에게도 이번 추석에 올라가서 말씀드려야겠네요... 우리아버지는 적극추천하면서 밀어주고 계시던데...씁쓸하군요...정보 감사합니다.
저의 탈관에 많은 도움이 되는 글이었습니다.
일목요연하고 ,깊이 공감되어 흥미롭게 읽었네요 ㅎㅎ
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이런 경험을 공유해 주신점 너무~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