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버닝’이 오버랩되는 2019년 노동정세
정현철 (민주노동자시흥연대 의장)
2019정세와 상황설명_민주노총.hwp
“옛날과 달리 지금은 분노의 원인을 설명하기 어렵고 싸워봤자 소용없다는 무력감이 있다. 세상은 더 좋아지지만 정작 자신에겐 미래가 없는, 그런 처지의 젊은이들에겐 세계 자체가 미스터리로 보이지 않을까 했다”
영화 ‘버닝(Burning)’을 디렉트한 이창동감독의 인터뷰 일부분이다. 영화 버닝은 우연히 만난 어릴적 친구 해미(전종서)가 사라지자 주인공 종수(유아인)가 이를 찾아 나서는 미스터리물이다. 종수는 벤(스티븐 연)이라는 정체불명의 남자를 의심하고 결국 그를 살해한다.
“저한텐 세상이 수수께끼 같아요” 주인공 종수의 대사다. "인과관계나 답이 분명하지 않고 삶이 나아지지 않는 세상에서 누구를 대상으로 싸워야 할 지 모르는 미스터리가 분노로 이어졌을거라 생각했다“ 이창동 감독의 코멘터리다.
한국 경제상황과 이를 둘러싼 다양한 세력의 원인분석과 해법을 보고 있노라면 영화 버닝이 오버랩된다.
한국경제는 위기다. 많은 전문가들이 위기라고 진단한다. 하지만 위기의 폭과 심각성, 발생원인과 그에 따른 해법에 대해서는 제각각이다. 복잡하고 다양하다. 너무 복잡하게 얽혀있다보니 원인을 꼭 집어내기가 쉽지 않다. 인과관계가 명확치 않은 것이다.
그러나 자본과 보수언론, 보수정당(이하·그들)은 ‘소득주도성장’을 범인으로 지목하고 집요하게 물고늘어진다. 그것을 목졸라 죽일 것처럼 보인다. 소득주도성장의 상징이 최저임금이다. 그래서 최저임금은 난도질 당했다. 기승전-최저임금 구도를 만들어 모든 불안과 위기의 주범으로 낙인 찍었다. 하지만 그들도 안다. 최저임금이 주범이 아니라는 것을. 다만 그들에겐 마녀사냥의 사냥감이 필요했을 뿐이다. 최저임금인상으로 저소득계층의 소득수준이 나아지고, 불평등한 분배구조가 개선되고, 한계기업이 퇴출되고, 비정상적으로 많은 자영업의 자연스러운 구조조정 등 선순환구조가 느리지만 진행되고 있는 사실 ("최저임금 비판 보도? 소설 쓰고 몰아가... 팩트는, 하위 10%-상위 10% 임금 격차 확 줄어" 김유선,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이사장, 오마이뉴스 2018.12.28.)을 애써 외면하거나 모른척한다.
정부의 태도변화가 여기에 기름을 부었다. 최저임금산입범위 확대로 한발 후퇴하더니, 점점 최저임금을 무용지물로 만드는 정책을 더하고 있다. 최저임금 결정구조 변경 등을 추진할 계획이다.
최저임금뿐만이 아니다. 노동시간단축도 그들의 포로가 되었다. 탄력적근로시간제도 이제 상징이 되었다. 탄력적근로시간제도 치열한 정치공방을 하게 될 것이다. 최저임금과 비슷한 과정과 결론에 다다를 것으로 예상된다.
여기에 덧붙여 주휴수당도 타겟으로 삼으려하고 있다. 대통령의 지지도가 하락하고 있는 틈새를 타고 주휴수당문제를 최저임금과 버무려 쟁점으로 만들어 폐기하려는 것이다. 말도 안되는 논리를 말이되게 만드는 괴변으로 밀어부칠 것이다.
보수정당과 언론은 소득주도성장을 폐기하고 기업친화정책으로 선회를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다. 거기에는 노-정관계의 파탄까지 포함하고 있다. 기업친화정책은 노조억압정책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정부는 한편으로 민주노총의 경사노위 참여를 요구하면서, 다른 한편으론 반 노동정책을 펴는 이율배반적인 행태를 보이고 있다. 자칫 반노동정책으로 선회할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예상하듯이 2019년은 문재인정부가 기로에 설 것이다. 촛불의 힘을 기반으로 야심차게 추진했던 개혁정책들을 더 밀고 갈 것인지, 아니면 포기할 것인지 갈림길에 있는 것이다. 이미 지난해 최저임금법 개악, 52시간 처벌유예 등을 통해 정책기조가 후퇴하고 있음은 분명해보인다. 그리고 경제활성화를 강조한 대통령의 신년사나 고용노동부의 업무보고가 그러한 심증을 뒷받침해준다. 다만 서서히 뒷걸음칠 것인가, 아니면 등을 보이고 달아날 것인가의 정도 차이가 남아있을 뿐이다.
2019년 노동계 주요이슈는 ○ ILO 창립 100주년을 맞아 ILO 기본협약 비준문제 ○ 탄력적근로시간제 ○ 최저임금, 주휴수당 ○ 비정규직 정규직화 ○ 지난해 연말 통과된 산업법(김용균법) 시행령을 둘러싼 공방 ○ 주력성장산업의 후퇴, 특히 자동차산업의 위기와 대응 등 풀어야 할 숙제가 쌓여있다. 어느 것 하나 쉽지 않은 난제들이다.
어려운 과제들인 만큼 노동계의 고민과 역할도 깊고 중요할 수 밖에 없다.
민주노총은 위원장 신년사를 통해 ”문재인 정부를 비판만하는 것은 평론가 몫이지, 2,500만 전체 노동자의 대표인 민주노총의 사회적 책임과 역할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평론보다는 강력한 비판과 투쟁이, 방관보다는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개입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투쟁과 교섭 병행전략을 다시한번 확인한 것이다.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참여 여부를 결정하게 될 1월 28일 민주노총 대의원대회는 2019년 이후 노정관계를 결정짓는 분수령이 될 것이다.
노동조합 조직율을 높이는 문제는 노동운동의 발전을 위해 미룰 수 없는 과제다. 2017년은 노조 조합원이 200만명을 넘어서 정부수립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올해도 노동조합 조직률은 다소 높아질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여전히 OECD 최하위 수준이다. 노조 조직률을 높이기 위한 활동은 노동운동이 가장 주력해야 할 과제임은 두말할 나위 없다.
또한 자본의 수직계열화 정책으로부터 비롯된 하청외주화, 비정규직 문제와 그로부터 파생된 1,2차 시장간의 격차해소를 위한 노력도 필요하다. 본질적으로는 자본의 수직계열화정책을 폐기 시켜야 하나 그것을 타파할 힘은 노동자들의 단결에 의해서 가능하다. 하지만 지금처럼 노동이 분절된 상황에서는 단결력을 도모하기가 쉽지 않다. 노동자계급의 단결을 위해서라도 정규직과 비정규직,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차이를 줄여가기 위한 내부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산업구조의 변화, 경제위기 등에 대한 대안과 새로운 대안경제, 사회모델의 제시 등 대안세력으로서 위상을 갖을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주류경제학에서 노동은 경제의 하부단위에 불과하다. 하지만 노동자들은 지난 수백년간의 투쟁을 통해 ”노동자는 상품이 아님“을 선언하고 사람이 중심이되는 새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왔다. 경제위기와 4차산업혁명같은 산업구조에 대한 대안도 결국 사람중심의 경제체제, 사회체제를 만드는 것이다. 노동운동이 대안세력으로 자리잡을 수 있도록 조합원들과 소통하고, 치열하게 토론하며, 투쟁해야 할 것이다.
영화 버닝의 여주인공 해미는 아프리카 부시맨족의 '리틀 헝거'와 '그레이트 헝거' 문화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리클헝거는 당장 배가 고픈사람이며, 그레이트 헝거는 삶의 의미가 주린사람을 말한다. 해미는 그레이트 헝거가 되고싶어 한다. 보다 멀리 바라보고 2019년 투쟁을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렇지 않으면 복잡한 현실에 부딪쳐 인과관계를 찾지 못하고 미스테리에 빠져 엉뚱한 곳에 분노를 폭발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