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한글날 국경일 제정운동에 나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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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살리고 빛내기 68] 한글단체 한글날국경일제정국민위원회 활동 |
한글날은 일본 강점기인 1926년에 ‘가갸날’이라는 이름으로 조선어연구회 회원들이 앞장서서 만들었고 1928년에 이름을 ‘한글날’로 바꾼 뒤 한글날마다 한글을 살릴 것을 다짐하고 한글 맞춤법을 만들고 표준말을 정하고 우리말 말광을 만들었다. 그 일을 하다가 조선어학회 회원들이 일본 경찰에 끌려가 옥살이를 하고 이윤재, 한징 두 분은 고문과 추위를 이기지 못하고 옥에서 돌아가셨다. 그렇게 목숨까지 바치며 한글을 갈고 닦아서 해방 뒤에 한글로 교과서를 만들고 말글살이를 할 바탕을 마련했다. 그리고 1946년부터 한글날을 공휴일로 정하고 44년 동안 한글을 빛내어 자주독립국을 이루자고 다짐하던 자주 독립운동 날이었다.
그런데 1990년 정부는 경제단체가 공휴일이 많아서 나라 경제가 어렵다고 공휴일을 줄여달라고 하니 한글날을 공휴일에서 빼버렸다. 그 뒤에는 한글이 살고 빛나는 것을 마땅치 않게 생각하는 일본식 한자혼용을 주장하는 반민족 친일세력들이 있었고, 그 뒤에는 일본이 있었다. 한글이 태어나고 500년이 넘었는데도 공문서와 신문도 한글로 쓰지 않고 일본 식민지 교육으로 길든 일본 한자말을 일본처럼 한자로 쓰자는 무리들이 판치는 마당에 한글날을 더욱 성대하고 뜻있게 보내야 하는데 오히려 정부가 한글날을 짓밟았다. 한글이 살아야 나라 기운이 살아나고 자주 문화가 꽃펴서 경제도 더 좋아지는데 거꾸로 가고 있었다. 참으로 한심한 정부요 경제인들이었다. 국민은 도저히 한글날을 짓밟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바로 한글문화단체모두모임(회장 안호상)은 국회와 정부에 한글날을 국경일로 제정하자고 건의하고 한글날 국경일 제정 공청회도 열었다. 한글단체 중심으로 한글날 국경일제정 촉진위원회(위원장 안호상)도 꾸렸다. 나는 그때 한글학회 외사부 간사, 한글문화단체모두모임 이사로서 14대 국회 때부터 국회의원 이름패를 한글로 바꾸라는 운동을 하면서 국회에 출근하다시피 했다. 그래서 여러 국회의원들을 알고 있었기에 한글단체 대표들과 함께 그 국회의원들에게 한글날 국경일 제정 법안을 내자고 설득했다. 마침내 한글전용법폐기 반대에 힘썼던 신기남의원이 앞장서서 법안을 냈다. 그러나 한글전용법폐기반대운동에 지쳐있는데다가 안호상 위원장도 돌아가셔서 그 활동이 주춤했다. 건의문이나 내고 가만히 있어서 그 법안이 통과되기 어려웠다
그래서 한국어정보학회 서정수 회장에게 “한글학회와 한글단체 힘만으로는 한글날 국경일을 만들 수 없으니 시민사회단체 대표들을 포함한 큰 단체를 만들어 국회 입법 활동을 돕자.”고 제안했다. 그때 나는 돌아가신 공병우 박사 뜻을 받들어 한국어정보학회 서정수 회장을 모시고 정보통신연구와 한글기계화운동을 하고 있었고 서정수 교수도 한글운동 별동대를 도와주고 계셔서 말씀드리니 찬성했다. 그래서 기독청년회(YMCA)명예총무이며 오랫동안 한글문화단체모두모임 부회장으로 안호상 박사와 함께 한글운동을 하신 전택부 선생님을 모시고 ‘한글날국경일제정범국민위원회’를 결성했다. 국무총리와 대학총장을 지낸 저명인사들을 모시고 위원장에 전택부, 본부장에 서정수, 사무총장에 이대로가 맡아 힘차게 활동을 시작했다.
▲ 정부가 공문서에 한자병기를 한다고 했을 때 앞장서서 반대한 신기남의원(왼쪽). 한글날 국경일 제정을 위해서 이대로 사무총장과 긴밀하게 의논하고 협조한 신기남 의원(오른쪽). © 리대로
그때 오랫동안 한자혼용단체와 싸우느라 조직한 한글운동 별동대인 바로모임을 그 행동대로 전환해 바로 활동을 시작했다. 한자혼용을 막은 저력을 모아 힘차게 입법 활동 지원에 나서니 신기남 의원도 고마워하면서 나와 한글문화연대 김영명 대표, 세 사람이 부부동반 롯데호텔 식당에 모여 한글날 국경일 제정 도원결의를 하자고 했다. 그리고 신기남 의원이 “이대로는 유비, 신기남은 관우, 김영명은 장비”로 하는 형제 결의를 했다. 세 사람이 중심이 되어 시민단체와 국회의원들을 연결해서 꼭 한글날을 국경일로 만들자는 결의였고 다짐이었다. 김영명 교수는 신기남의원의 경기고와 서울대 후배여서 잘 통했고 신 의원은 서울대 국어운동학생회 출신인 권재일 교수와 군대 동기로서 일찍부터 한글사랑꾼이 된 사람이었다.
나에게는 부부 함께 만난 그 자리가 매우 뜻깊은 자리였다. 1990년대 공병우 박사님과 허웅 회장님이 나에게 “이 선생 부인에게 잘 하시오. 집안이 편안해야 활동도 잘 할 수 있는 것이오.”라고 가정도 생각하며 활동을 하라고 걱정을 하셨는데 신가남 의원이 부부동반으로 그런 자리를 마련한 것도 그런 의미가 있었고, 나와 신기남 의원이 서로 신뢰하고 자신감을 가지고 힘차게 활동하는 계기였다. 그렇게 힘을 내어 한글날국경일제정국민위원회(위원장 전택부)는 여의도 세종대동상 앞에 모여 결의대회를 열고 서명운동도 했다. 국회 앞에서 일주일 동안 나와 전교조 이수호 회장, 손혁재 참여연대 사무총장, 참교육학부모회 윤지희 회장, 전국국어교사모임 고승덕 회장 이어서 1인시위도 하며 입법 활동을 힘차게 도왔다.
흥사단 강당에서 한글과 교육단체 대표들이 한글날이 왜 국경일이 되어야 하는 지 토론회도 열었다. 그리고 2002년 한글날에 나는 한글날 경축식을 하는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1인 시위도 했다. 한글날 국경일 제정 홍보책자도 두 차례나 만들고 투쟁백서도 만들어 정부와 국회, 경제단체와 언론기관에 보냈다. 언론에 투고도 하고 모든 방법과 힘을 다 바쳤다. 그러니 배우 손숙 선생이 한 라디오 방송에서 전택부 회장이 김대중 대통령에게 보내는 호소문도 소개해주어서 청와대에 김대중 대통령 민담신청을 했다. 그런데 청와대에서 전택부 회장에게 들어오라고 해서 갔는데 대통령은 말할 것이 없고 대통령 비서실장도 아니고 한 비서가 나온 것을 보고 전택부 위원장이 실망이 커서 그 자리에서 졸도하는 일이 벌어졌다. 큰 기대를 하고 갔다가 너무 무시하는 청와대에 충격이 크셨던 것이다.
그래서 구급차로 아산중앙병원으로 실려가 며칠 뒤 깨어났으나 한 쪽 팔다리를 쓰지 못하는 반신불수가 되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대통령이 되기 전 민주화운동을 할 때부터 전택부위원장과 잘 알고 지내던 사이라 혹시 도와줄까봐 큰 기대를 하셨던 거 같다. 그러나 그때 나는 김종필 총리를 앞세워 한자병기 정책을 추진하는 것을 보면서 기대를 안 했는데 그런 일이 벌어졌다. 그때 전택부 위원장은 정신을 차리고 “나는 죽어도 좋으니 한글날을 꼭 국경일로 만들어 주소”라는 글을 쓰셨다. 그래서 우리는 그 분 88살 생일을 맞이해 “우리의 소원은 한글날 국영일이오”라는 전택부 위원장 미수기념 문집을 만들어 국회의원들에게 뿌리고 16때 국회 마지막 국회에서 통과시켜달라고 운동을 했다.
한글단체는 16대 국회 마지막 회기에 꼭 국경일 법안이 통과되도록 하려고 2003년 9월 여의도 세종대왕동상 앞에서 사회단체 대표와 어린이들까지 참여한 국민 대회를 열고 서명운동도 했다. 한글단체는 오랫동안 거리에서 또 전자통신으로 서명을 받았는데 그 날을 마지막으로 국회의원들에게 건의문과 수만 명 서명한 용지를 함께 국회에 보냈다. 그동안 우리는 사람으로 할 수 있는 힘을 다했으나 국회는 법안 심의도 하지 않고 16대 국회가 문을 닫으면서 그 법안은 자동으로 폐기되었다. 참으로 한글을 우습게 보는 사대주의 식민지 근성은 뿌리가 깊었다. 그러나 국민이 이렇게 한글을 살리고 지키려고 뭉친 것은 처음이었기에 고맙고 든든해하면서 포기하지 않고 17대 국회 때에는 꼭 이루겠다고 다짐한다.
사라진 한글날 국경일 제정운동에 나서다: (jab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