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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문학, 영원한 현재진행형! 원문보기 글쓴이: 動友齎
〓 강릉 아동문학의 어제와 오늘 (1)
남진원
제1절 강릉아동문학 이해의 관점
1. 시대 구분 및 인물, 작품의 등재 범위
1)시대 구분
2)인물과 작품의 선정 범위
2. 강릉아동문학의 역사적 배경
1)아동문학의 개념 정립
2)강릉아동문학의 역사적 배경
3. 중세, 근세의 가사, 민요와 아동문학
제2절 강릉의 근대아동문학
–임진왜란(1592년) 전후에서 일제강점기 전후 -
1.조선시대, 강릉아동문학의 배경기
1)한시에서 찾아 본 한문 동시
2)동화문학의 탄생
3)동시조의 등장
2.일제강점기, 강릉아동문학의 개창기
1)일제암흑기에 민속적 질감을 형상화한 동요
2)민족의 독립을 염원한 아동문학 작품
제3절 강릉의 현대아동문학
1. 1960년대, 현대아동문학의 개화기
2. 1970년대 1980년대, 강릉아동문학의 화려한 발아와 성숙
3. 1990년대 2000년대, 전환과 확장의 아동문학시대
4. 2010년대, 기성작가들의 아동문학 회귀
제4절 강릉의 아동문학, 동인 단체
1.조약돌아동문학회
2.솔바람동요문학회
제5절 강릉아동문학의 어제와 오늘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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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절 강릉아동문학 이해의 관점
모든 문학과 예술은 발라드댄스, 즉 원시종합예술에서 분화되었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강릉의 아동문학 역시 그 기원은 원시시대부터 이어져 온 원시종합예술에 그 연원을 두었다고 할 수 있다. 무용은 기도하거나 제사하는 의식에서 춤의 한 형태로, 노래는 집단의 소리에서, 문학은 그런 소리의 형태에서 분화되었다고 보여진다. 강릉의 아동문학 역시 그 발생 기원이나 배경 등에서부터 살펴보아야 강릉아동문학의 정체성과 면목을 그려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강릉의 아동문학은 강릉이란 로컬리티를 빼놓을 수 없다. 시대와 지역, 그리고 인물과 작품 등에 나타나는 연관성과 아동문학의 특성, 문학사적 의미, 작가들의 특징적 작품 활동과 사회적 상황, 동인지 활동의 성과와 문학적 한계 등을 살펴봄으로써 강릉아동문학의 역사적 의미와 생성 발전, 미래에 대한 새로운 발전의 토대를 마련할 것으로 보인다.
강릉아동문학 이해의 관점에서 고려해야 할 부분들이 몇 가지가 있다. 시대 구분, 작품의 등재 범위, 역사적 배경 등을 알아보아야 할 이유가 그것이다.
1. 시대 구분 및 인물, 작품의 등재 범위
1)시대 구분
강릉아동문학사 기술에서 그 이해의 관점은 우선 시대구분의 문제이다. 한 시대가 흘러갔다는 말은 해와 달이 반복적으로 움직이는 기간 중에 어느 기준을 중심으로 한 부분의 특징적인 변화를 볼 수 있을 때 하는 말이다. 문학을 기준으로 하여 볼 때 한 부분 또 한 부분의 특징으로 구분지어 보는 것이 문학적인 시대의 구분이라 볼 수 있다.
문학사는 파편적인 정보나 단편적인 지식의 나열이 아니라 문학의 역사에 대한 통시적이고 총체적인 서술이다. 따라서 문학사에 서술된 지식은 어떤 문학 작품이 전체 문학사 속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설명하는 것이며 이런 문학 작품을 효과적으로 이해하고 감상하는데 필요한 지식을 제공한다.
문학사는 어떤 문학 작품이 생성되고 향유되던 문화적 배경이나 전통에 대한 정보를 제시하는 기능을 갖는다. 문학사는 과거의 맥락 속에서 문학의 객관적인 존재를 확인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현재의 시점에서 과거를 바라보는 주관적인 관점을 서술한 것이다. 현재의 시각에서 과거를 바라보는 관점 때문에 양면성이 있다. 과거에 역사적으로 존재하는 그대로의 문학 실체를 확인하는 것이 하나이고 현재적 효용성이나 이를 서술하는 연구자의 문학적인 관점에 따라 다른 양상을 보인다는 점이다.
문학사의 시대 구분은 서술의 편이성과 기술상의 요구에서 출발한 것이지만 궁극적으로는 문학과 그 역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문제의식을 피력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문학사의 시대 구분 역시 문학 작품이라고 하는 객관적 존재를 사실적으로 확인하는 한 작업인 동시에 연구자의 관점과 연구의 필요성에 의하여 재해석된 문학관의 반영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는 문학의 작품을 중심으로 기준을 잡으면서 동시에 문학과 사회, 시대의 사상이 함께 설명하고 이해되기를 원한다.
강릉아동문학사의 시대 구분은 사회상이나 문화, 사상에 근간을 두었다.
2)인물과 작품의 선정 범위
강릉지역을 중심으로 그곳에서 출생하였거나 관향(貫鄕)이거나 외지에서 강릉지역으로 이주해 와서 의의 있는 문학 활동을 하던 인물, 강릉에서 출생하여 타지에서 문학 활동을 하는 의의 있는 모든 인물을 망라하도록 하였다. 강릉의 아동문학사라고 하면 강릉역사 속에 등장하는 문학적 자산 모두를 인정하는 것이 타당성을 가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자료의 불충분으로 빠진 작품이나 인물이 있을 수 있는 것을 배제하지 않는다. 이런 문제점은 추후 보완해나갈 것으로 알고 있다. 향가, 한시 작품의 번역은 이해의 편의성 및 작품성을 중심으로 필자가 직접 번역하였다. 현재 번역문은 모두 직역에 의존하였다. 직역은 작가의 의도나 작품성이 제대로 전달되기 힘든 점이 있다. 따라서 직역이 아닌 의역에 중점을 두어 작가 본연의 의도를 충분히 반영토록 하였음도 밝힌다.
2. 강릉아동문학의 역사적 배경
1)아동문학의 개념 정립
강릉아동문학을 문학사 정의에 있어서는 반드시 아동문학에 대한 개념정립이 우선하여야 한다는 필요성을 갖는다.
아동문학을 이해하기 위해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요건이 성립되어야 할 것이다. 첫째는 작가가 아동을 독자 대상으로 의식하고 그 내용과 표현에 배려를 하여 창조한 문학이다. 여기서 말하는 아동은 아동심리학에서 본 연령인데 아동기의 연령은 매우 폭 넓은 것을 볼 수 있다. 박화목에 의하면 유아기에서부터 22세인 청년기까지를 포함한다. 그렇다고 한다면 일반 성인만이 즐겨 쓰는 서정시(남녀 간의 연정이나 사랑까지 포함)의 범위를 아동문학의 범주에도 수용하여야 함을 알 수 있고 그 연령기가 아동심리학에서 설명한 것처럼 매우 폭 넓은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번역한 ‘한문 동시’의 출현은 매우 자명하고 타당성을 있는 것이라 볼 것이다.
둘째는 작가가 아동을 독자 대상으로 의식하지는 않았지만 그 창작된 작품이 아동에게 충분히 이해되며 흥미를 가지게 되는 문학, 다시 말하면 아동들도 수용자가 될 수 있는 조건을 갖춘 문학이다. 셋째는 작가가 자기표현의 방법으로 아동문학의 형식을 차용한 문학이다. 이런 경우에는 아동에게 다소 전달 면에서 어려움을 주지만 오히려 그 어떤 아동문학보다 질 좋은 문학이 될 수도 있다. 쌩 떽쥐베리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단순하고 소박한 것이고 진정한 재산은 남을 위해 쓰는 것이라 말했다. 그가 쓴 동화 「어린 왕자」는 어른들을 위한 동화였다. 동화 「어린 왕자」는 작가가 자기표현의 방법으로 아동문학을 차용한 형식이 되었다. 앞으로 말하게 되는, 즉 어른을 위해 쓴 한시이지만 그 번역을 해 보면 동심의식이 표출된 동시적 요소가 있는 동심의 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일은 이미 동시문학 전문지인 2006년 『오늘의 동시문학』봄호에 ≪함께 읽는 옛 위인들의 동시≫라는 기획연재를 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인조 시대 관리인 영의정 이경석, 이산해와 성문준, 길재의 한시를 풀이하여 최향이 동시로 옮긴 바 있다.
동심이 깃든 한시 중에서 어린이가 읽을 수 있는 시는 한시를 풀이하여 나는 ‘한문동시’라 명명하였다.
이렇게 볼 때 아동문학은 아동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지만 아동문학의 독자는 아동으로만 제한 될 수는 없다. 또한 제한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박화목이 정의한 아동문학을 보면 매우 설득력이 있다. 그는 아동문학을, 문학 작가가 아동이나 또는 동심세계를 동경 갈망하는 일반 독자를 대상으로 창조한 동심의 문학이다. 라고 하였다.
이런 측면에서 정리해 보면 아동문학의 본질은 아동이나 성인을 대상으로 하는 폭 넓은 문학이다. 또한 미의식의 진솔성, 사물을 대하는 순수성, 판타지라 할 수 있는 환상성, 통찰과 직관, 그리고 정직성과 교육성 등이 있는 작품임을 말할 수 있다.
2)강릉 아동문학의 역사적 배경
강릉의 아동문학사는 고대에서부터 그 실마리가 이어져 왔음을 알 수 있었다. 처음의 원시예술은 매우 종합적이었다. 처음에는 아동문학은 아예 생성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음은 매우 당연한 사실이라 할 수 있다. 모두들 아동에 대한 무관심과 일종의 기피 현상 때문이다. 그러나 각종 신화나 설화가 모든 문학의 모티브가 된 것처럼 아동문학 역시 신화나 설화에서 그 모티브를 찾아보면 무릎베개 동화로 이어져왔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니 구비문학은 아동문학에 매우 큰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 있다. 즉 문학의 원초적 상태에 머물러 있었던 구비문학은 그 내용이 단손하고 소박한 것이 특징이다. 또 논리의 비약이나 모순이 드러나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러한 비논리성, 비합리성, 모순성 등이 오히려 아동의 미분화단계 정서를 고양시킬 수 있는 점에서 그 유용성을 간과하기는 힘들 것이다.
대표적으로 들 수 있는 것은 우리 문학에서 엿볼 수 있는 단군신화나 고주몽의 신화 등이다. 이와 같은 문학적 배경은 한국아동문학의 원초적 배경이라 할 수도 있다. 강릉아동문학 역시 신화나 설화 등에서 그 배경을 찾아 볼 수 있는데, 신라시대의 헌화가와 해가 등에서 그 시원을 찾아볼 수 있다. 여기에는 매우 역동적이고 본질적인 에너지가 있음을 부인하지 않는다.
헌화가는 순정공이 강릉 태수로 오던 길에 수로부인에게 꽃을 꺾어 바친 노인의 이야기이다.
『삼국유사』 권2 기이2 「수로부인 편」에는 헌화가와 해가사의 노래가 수록되어 있다.
신라 성덕왕 시대(702 – 737)는 신라가 통일을 한 후 20여년이 훌쩍 지난 시대였다. 이 무렵 강릉은 태수가 마을을 다스리고 있었다. 순정공은 신라왕으로부터 강릉 태수라는 벼슬을 받고 강릉으로 올라오는 길이었다. 여러 군사들과 수로부인을 대동하고 올라오고 있었다.
수로부인 편을 보면 철쭉꽃이 높은 벼랑 위에 있는 꽃을 보고 수로부인이 꽃을 꺾어줄 사람이 없느냐고 묻는다. 이에 아무도 엄두를 내지 못하고 조용히 있자, 암소를 몰고 지나가던 노인이 수로부인에게 꽃을 꺾어드리겠다고 하는 내용이 헌화가에 나온다.
헌화가
자주색 펼쳐진
바위 가에
암소를 잡고 있는
내 손을 놓게 해 주시면,
그리고
부끄러워하지 않으신다면
꽃을 꺾어
받치오리다.
꽃을 꺽어
드리오리다.
紫布岩乎邊希 자포암호변희
執音乎手母牛放敎遣 집음호수모우방교견
吾肹不喩慚肹伊賜等 오힐불유참힐이사등
化肹折叱可獻乎理音如 화힐절질가헌호리음여
한 노인이 수로부인에게 높은 벼랑 위에 있는 꽃을 꺾어 바치겠다고 하였다. 수로 부인에 대한 노인의 마음은 순수한 아름다움이다. 헌화가는 동심의 노래요, 아동문학 중에서도 노래에 속하는 동요의 성격을 담고 있다. 이곳의 장소가 정확히 문헌 속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높은 벼랑과 철쭉꽃이라는 것을 적시한 것을 보면 아마도 강릉의 심곡이나 정동진 쪽의 벼랑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심곡이나 정동진 해안 쪽으로는 높은 벼랑이 많으며 그 바위의 색은 자주색을 띄고 있다. 또 진달래와 철쭉꽃이 벼랑에 많이 피어있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노인은 수로부인을 따라 가는데 안인진의 임해정에 이르렀을 때 수로부인은 해룡에게 납치를 당하는 일이 생긴다.
안인진의 ‘임해정(臨海亭)’이라 한 것은 2002년 5월 15일 강호정신문화연구소에서 발간한 이성실씨의 편저로 발간한 『文鄕의 薰香을 찾아서』라는 책 21쪽에 나와 있다.
헌화가와 관련하여 노인이 꽃을 꺾어 바친 후 일어난 일은 해룡이 수로부인을 납치한 일이다. 이에 또 노인이 나타난다. 노인은 이번에 사람들을 불러 모아 지팡이로 땅을 두드리며 소리를 치게 하여 수로부인을 구하였다. 이때 부른 노래가 다음과 같은 해가이다.
거북아 거북아
수로를 돌려보내라
남의 부인을 빼앗아간 죄가
얼마나 큰 것인지 아느냐
만약에 듣지 않고
수로를 내놓지 않으면
그물로 잡아서
구워 먹으리라
이 내용을 보면 매우 교훈적이다. 나쁜 짓을 하면 그 죄를 알아야 하고 잘못을 뉘우치지 않으면 크게 혼이 난다는 교훈을 담고 있다. 아동문학의 본질이 재미와 교육성이라고 볼 때 이 ‘해가(海歌)’는 아동문학의 동요적 모습을 짐작하게 하는 노래라 볼 수 있다.
신라시대부터 조선조까지 문학 작품을 문자로 활용한 것은 한자를 빌어 쓴 향가, 향찰이거나 한자이다. 한글은 세종이 한글을 창제한 이후부터이다.
향가나, 향찰, 한자로 쓴 글들은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지어진 글은 아니다. 그러나 글의 내용을 살펴보면 어린이들이 읽을 수 있거나 읽어도 정서적, 지적으로 도움이 되는 글들이 많이 있다. 이런 글들은 일단 넓은 의미의 아동문학의 영역에 넣고 그 번역은 필자가 내용을 잘 살릴 수 있는 의역으로 다시 내놓았다. 시조 역시 조선시대에는 ‘시조’라는 이름으로 전해오지 않았다. 시조는 ‘단가’라는 이름으로 전해졌다. ‘단가’가 시조라는 이름으로 정착된 것을 썩 이후에 와서이다. 구비문학의 동요나 한시, 가사들도 아동문학이란 이름으로 불리어져 오지 않았다. 그러나 1920년대 방정환이 『어린이』발간함으로써 ‘어린이’란 이름도 당당하게 그 이름을 올렸고 어린이를 위한 문학은 아동문학이란 이름으로 발표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어린이가 읽을 수 있는 작품이라 해도 당시의 어린 아이들이 한자나 향찰로 읽기에는 무리가 있었을 것이기에 널리 많은 독자를 확보했다고는 볼 수 없다. 그러나 새로이 한글로 번역을 해 놓으면 고대의 시가나 고려, 조선시대의 시가들이 모두 현재의 어린이들에게도 읽힐 수 있는 뛰어난 아동문학 작품이라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이런 측면에서 나는 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한자로 쓴 작품 중에 어린이들이 읽기에 좋은 작품을 한글로 번역(재창작)하여 「한문 동시」라고하여 새롭게 명명하여 놓았다.「한문동시」는 박두순이 아동문학 계간 전문지인 『오늘의 동시문학』에서 이미 한시를 번역하여 동시로 기재한 적이 있다. 이렇게 볼 때, 강릉의 아동문학에 대한 역사적 배경은 멀리 신라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헌화가(獻花歌)와 해가(海歌)에 까지 닿는다.
또한 고려시대에는 작자 미상의 고려 가요로 전해지는 「한송정」은 강릉의 문학적 역량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자료이다.
이러한 노래는 김시습, 이율곡, 허성, 허봉, 허난설헌, 허균, 신사임당으로 이어지는 한문 동시 등에서 아동문학 중에 동요와 동시로의 탄생을 예감하고 있었으며 최초의 한글소설인 허균의 『홍길동전』은 소년소설의 시원을 보여주고 있다.
또 하나 특기할 것은 조선 숙종 때 남구만이 쓴 시조의 등장이다.
1689년 기사환국 이후 남구만은 강릉으로 유배 오면서 유배지에서 창작된 것으로 쓴 시조 「동창이 밝았느냐」는 유명한 작품이 있다. 이 작품은 일반 시조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어린이에게 읽히는 것이 더욱 바람직하다. 필자가 국민 학교 시절에도 교과서에서 배운 시조 작품이면서, 동시조(童時調) 작품이다. 「동시조」라는 말은 전통의 시가 형식인 시조에 동심적인 노래를 담은 것으로 1940년 이구조에 의해 주장되었다. 그는 그해 5월 29일자 동아일보에 「어린이 문학론」이라는 제목의 글을 발표하였다. 여기에서 이구조는 동요나 동시보다는 우리에게 뿌리내리고 있는 비교적 자유로운 율조를 가진 시조형으로 어린이들을 지도하여 아동시조를 짓게 하면 좋겠다는 의견을 발표했다. 그 뒤에도 시조 작가나 동요 작가들 사이에도 산발적으로 이 문제를 논의하여 왔다. 그러나 동시조라는 명칭이 일반화된 것은 1964년 배영사에서 간행한 『아동문학』10집에 이석현이 동시조문제를 제기한데서 비롯되었다. 이어서 1968년 시인이며 문학평론가인 박경용이 『카톨릭 소년』3월호에 3회에 걸쳐 「동시조 이야기」를 연재하여 동시조 운동이 본격화 되었다. 1979년에는 시조시인 정완영이 동시조집 『꽃가지를 흔들듯이』를 가람출판사에서 상재하였고 1980년엔 박경용이 『별 총총 초가집 총총』이란 동시집을 상재하였지만 그 내용의 양식은 모두 동시조였다. 남구만이 쓴 「동창이 밝았느냐…」의 시조 역시 동시조 임에 틀림없음을 알 수 있다.
천하의 절경, 비경을 간직한 강릉의 자연환경 아래에서 이처럼 많은 인물들은 직접, 간접으로 강릉아동문학의 생성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3 중세, 근세의 가사, 민요와 아동문학
1)고려 가사의 등장 - 한송정
고려가요 「한송정(寒松亭)」의 노래는 악부에 전해온다. 거문고 밑바닥에 적혀 중국의 강남으로 흘러갔다. 한송정은 강릉시 강동면 하시동리에 있던 정자이다. 강릉 해안의 정자가 다 그렇듯이 동해 바다를 보고 있으며 그 주위에는 소나무가 들어차서 한층 경치가 수려하다. 그 정자에 올라 시를 짓기도 하고 차를 마시기도 하였다.
거문고 밑바닥에 쓰인 글을 사람들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글자는 향찰로 쓰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곳에 사신으로 갔던 고려의 사신 장연우(張延祐)가 이를 한시로 풀어낸 것이라 하였다. 그러니 거문고에 쓰인 작품은 아마 신라시대의 글로 짐작이 된다.
장연우가 풀어내 글은 다음과 같은 한자로 된 5언 절구이다.
한송정
장연우
한송정 주위에
은색 달빛 쏟아지면
아련한 경포 호수
숨죽인 듯 잔잔하다.
오가며 들리는
쓸쓸한 갈매기 노래
기다리던 벗의 소식
전하려는가
아래의 글은 장연우가 거문고 바닥에 쓰인 글을 풀어 쓴 한시이다.
月白寒松亭 (월백한송정)
波安鏡浦秋 (파안경포대)
哀鳴來又去 (애명내우거)
有信一沙鷗 (유신일사구)
- 한송정(寒松亭) -
이 시가가 거문고 밑바닥에 적혀진 것을 보면 글을 짓는 작가나 음율을 아는 가인(佳人)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때는 가을, 한송사의 저녁 종소리가 은은히 들려오다가 멈춘다. 한송정에 와서 차를 마시며 거문고를 뜯고 있는 가인(佳人). 마침 달빛은 은색의 빛을 뿌리며 한송정 주위로 쏟아지는 밤이다. 멀리 바라보니 경포호수는 기척이 없이 고요하다. 이 적막한 밤에 거문고 소리만 멈추었다가 번져나가고 번지다가는 여리게 숨을 죽인다. 그런 중에 기러기 한 마리가 쓸쓸히 울며 지나가고 있다. 행여나 임이 계신 곳의 소식을 기러기가 전하러 온 것 같기도 하다. 벗이 올 것 같기만 하여 거문고 소리에 손의 힘이 더 실리기도 한다. 이런 서정의 품격 높은 풍정을 담고 있는 것이 이 글이다. 문향의 강릉이 아니면 이런 시가가 어찌 전해질 수 있었으리. 과히 문향이라 할 만하지 않은가.
「한송정(寒松亭)」은 동국여지승람에 ‘다도유적(茶道遺蹟)’으로 전해온다. 강릉의 동쪽 15리에 있다고 하였다. 정자 곁에는 차우물이 있고 돌아궁이, 돌절구 등이 있다. 이 우물은 지금도 물이 퐁퐁 솟는다고 한다. 사선(四仙)인 술랑(述郞), 영랑(永郞), 안상(安祥), 남석행(南 石行) 등이 노닐며 차를 마셨다고 한다. 한송정 옆에는 한송사라는 절도 있었던 모양이다.
한송정은 경포대와 함께 강릉을 대표하는 매우 중요한 명소로 꼽았다. 장연우의 호는 진산(晉山)으로 장진산으로도 불렸다. 홍성 장씨의 시조로 고려시대 무신정권때 문신으로 행정적인 개혁을 단행한 인물이다. 그가 한 업적 중의 하나는 군전(軍田)을 혁파한 일이다.
고려가사 한송정(寒松亭)과 같은 노래가 고려시대부터 등장한 이후 조선시대 전해지는 연산홍 민요 등은 이미 강릉의 문학이 아동문학의 순수한 속성을 내포하고 이어져 옴을 짐작하게 한다.
2)조선 초기 강릉 민요의 등장
강릉지방에는 오래전부터 전해오는 민요 들이 있다. 그 민요의 내용 중에는 어린이들이 즐겨 부를 수 있는 내용이 있다. 이런 민요는 어휘가 어린이의 능력과 수준, 감성을 돋우어줄 수 있는 내용이어서 어린이가 즐겨 부를 수 있는 노래이다.
꽃밭이네 꽃밭이네
사월 보름날에 꽃밭이네
지화자 지화자 영산홍
영산홍,
봄바람에 가지 가지 꽃피었네
지화자 지화자 영산홍
- 「영산홍」 -
‘지화자’는 반복되는데 즐거움이나 흥겨움을 전달하기 위해 곡조에 맞추어 내는 말이다. 영산홍의 개화는 4월에서 5월이다. 4월 보름날에 피는 만개한 영산홍. 얼마나 화려하게 피는 지를 노래의 내용에서 짐작할 수 있다. 흐드러지게 피는 아름다운 꽃을 보고 어찌 흥이 나지 않을까! 그래서 지화자 지화자를 반복하여 소리 냄으로 흥을 최고조로 돋우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민요는 영신가(迎新歌로)로도 불린다. 아름다운 꽃이 만개하는 날 신을 즐겁게 맞이하기 위해 부르는 노래이기도 한 것이다.
민요의 내용을 유추해 보면 강릉은 예로부터 산수 자연이 수려하고 뛰어난 절경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수광의 『지봉유설』에 보면 영산홍은 철쭉 종류로 조선시대 세종 때 일본에서 들여왔다고 한다. 진달래 보다는 늦게 피고 철쭉 보다는 일찍 핀다고 하였다. 이것으로 보건대 영산홍 노래는 조선 초기부터 불리어져 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이 노래는 조선시대부터 불리어져 왔음을 유추할 수 있다.
제2절 강릉의 근대아동문학
–임진왜란(1592년) 전후에서 일제강점기 전후 -
강릉의 근대문학은 한국의 근대사회와 무관하지 않다. 임진왜란은 우리 민족에게 크나큰 수치와 절망, 민족의 아픔을 겪게 한 전쟁이었다. 그러나 전쟁 이후 조선은 외국문물의 유입이 활발해졌고 시민의식이 고양되었다. 광해군 시대의 대동법 시행은 경제 발전에 획기적인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대동법 시행은 시장의 발달을 촉진시켰고 그것은 상공업의 발달에 기여하였다. 근대적 상업자본의 형성도 대동법의 영향이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상업자본의 출현은 부익부 빈익빈의 새로운 계층을 생성하게 되고 농업 중심의 사회가 상업으로 전이되는 농민들의 분화를 재촉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문학적인 측면에서는 민중의 자각이 싹트기 시작하면서 문학 작품도 다층적 분화의 방향으로 서술 창작되기 시작하였다.
강릉을 중심으로 살펴볼 때, 이 기간 중에 삼당시인으로 널리 알려진 서얼 출신 이달은 허난설헌과 그의 동생 허균에게 새로운 사상적 깊이를 더하여 진보적이고 혁신적인 문학 세계를 형성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서양의 근대문물이 유입되고 따라서 문화도 새로운 모습으로 변해가기 시작하였다. 우선 신이나 군주, 가족이나 전체 중심의 사회에서 개인에 대한 자각이 일어났다는 점이다. 고대사회에서 충성이나 맹세를 중시한 점에 비해 근대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이성이나 합리성에 바탕을 둔 사고의 작용이 일어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평민, 즉 보통사람들의 계급을 발생하게 하는 동력이 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을 간과할 수 없는 것이 근대라는 산물이다. 근대문학의 범위는 이런 역사적 사회적 기반위에서 살펴야 한다고 생각한다. 즉 1592년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17세기 영 정조 시대, 18세기의 개항, 갑오경장, 동학혁명으로 이어지는 사이에 점진적으로 근대아동문학의 싹도 자라났다고 보는 것이다.
허균은 최초의 한글소설인 『홍길동전』은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매월당 김시습, 이율곡의 어릴 때 한시, 허 엽의 가족들이 쓴 한시 중 몇 편들을 살펴보면 한문동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한문동시에서는 아동문학의 특징인 동심적 순수를 지향하는 서정성이 담겨 있는 것을 살필 수가 있었다.
그리고 조선 후기의 문신 남구만은 1689년 기사환국 당시 관직을 내어놓고 강릉에 유배와서 전원생활에서 얻은 귀중한 작품인 ‘동창이 밝았느냐…’라는 시조를 창작함으로써 강릉아동문학의 뿌리라 할 수 있는 시조와 동시조의 근원이 되었다.
이후 1894년 동학농민운동의 발발은 인내천(人乃天)사상을 표출하였다. 인내천은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생각으로 인간의 평등사상, 사람이 근본이라는 인본주의(人本主義) 사상은 아동문학 창작에도 정신적 뿌리가 되었다고 보여진다.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면 문학의 암흑기라 하지만 강릉아동문학에는 걸출한 작가인 심연수, 염근수 등의 등장으로 현대아동문학의 교량적 역할을 해낼 수 있었음은 매우 자랑스러운 점이다.
1.조선시대, 강릉아동문학의 배경기
1)한시에서 찾아 본 한문동시
강릉은 그 풍광이 산자수려하고 빼어난 절경이 많아 시인, 문장가가 많이 나오리라는 것을 예감할 수 있다.
이후 고려시대 말엽에는 김극기나 이곡 등의 시인, 문장가들이 강릉의 대관령과 경포대의 진솔하고 순수한 아름다움을 시로 노래하였다. 이런 점에서 보면 강릉은 걸출한 아동문학 작가들이 많이 나오리라는 조짐을 예감할 수 있다.
조선시대로 들어오면 강릉 사람으로 매월당 김시습을 빼놓을 수 없다.
김시습(1435-1493)은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 조선 전기의 학자, 문인, 스님이기도하다. 자는 열경(悅卿), 호는 매월당(梅月堂), 청한자(淸寒子), 동봉( 東峰), 벽산청은(碧山淸隱), 췌세옹(贅世翁), 설잠(雪岑) 등 불리어지는 이름이 많았다.
김시습은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본관이 강릉이다. 아버지 때에 한양으로 이사를 갔다. 그래서 매월당 김시습은 한양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모친은 강릉에서 많이 지내셨다. 15세 되던 해에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김시습은 강릉에서 시묘살이를 하였다. 이런 연고로 김시습 기념관은 경포 호수를 바라보는 강릉시 운정동에 위치하고 있다. 생육신의 한 사람이며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인 금오신화를 지은 작가이다.
김시습은 세 살 때 시를 지었다는데 그 내용은 동시의 유형으로 보여 ‘한문동시’로 명명하였다.
복사꽃 붉어가고
버들잎 푸른 삼월은
저물어가도
솔잎에 맺힌 이슬은
방울방울
푸른 바늘에 꿰인 구슬이다.
1연은 3월 정경의 모습을 시각적 이미지로 그려냈고 2연은 이슬에 대해서는 메타포를 사용하여 푸른 바늘에 꿰인 구슬로 표현하였다. 뛰어난 한시 동시를 쓴 것을 알 수 있다.
桃紅柳綠三月暮 珠貫靑針松葉露
(도홍유록삼월모 주관청침송엽로)
또 알곡을 맷돌에 가는 소리를 듣고 한문 동시를 지었다.
비오는 소리 들리지 않은데
천둥소리나고요
노랑 구름 조각조각
사방으로 흩어져요.
맷돌에서 나는 소리를 천둥소리로 비유하였고 콩알이 부서져 나오는 것을 노랑 구름이 사방으로 흩어진다고 표현하였던 것이다. 동심의 표출이 아름답게 드러나고 있는 작품이다.
無雨雷聲何處動 黃雲片片四方分
(무우뇌성하처동 황운편편사방분)
이율곡(1536-1584)은 이원수(李元秀)와 평산신씨(平山申氏) 신사임당의 4남 3여 중 3남으로 태어났다. 이율곡은 조선 중기의 대학자이며 정치가이다. 이기론에서 주기론을 주장하고 영남학파 이황과 성리학에서 쌍벽을 이룬 기호학파의 대학자이다. 본명이 이이(李珥)이고 율곡(栗谷)은 그의 호이다. 그가 거주하던 경기도 파주의 파평면 율곡리의 ‘율곡’을 따서 호를 삼았다. 본관은 덕수(德水). 어려서부터 어머니 신사임당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1551년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하늘이 무너지는 아픔을 겪었다.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한 후 1554년 율곡은 금강산 마하연으로 들어갔다. 어려서는 외갓집인 강릉에서 지냈다. 그때 외할머니 등에 업혀 놀던 이율곡은 석류나무의 아름다운 석류를 보고 한문동시를 지었다.
석류
이율곡
붉은 주머니 속에
붉은 구슬이 부서져 있네.
마치 일본의 하이쿠 시를 보는 듯하다. 석류나무에 익은 석류를 붉은 주머니로 은유하고 석류 알을 붉은 구슬로 은유하여 석류의 신비함과 아름다움을 표현하였다. 석류와 석류알을 붉은 주머니와 붉은 구슬로 본 것은 깊은 사유에 의해 나온 것이 아니고 직관에 의한 표현이다. 아동문학은 이러한 직관적 표현이 특징 중의 하나이다. 순수한 맑음과 동심의 눈이 아니면 직관적 표현은 나오기 힘들다.
이미 조선 초기와 중기를 거치면서 동시의 표출 방법이 매우 정교하고 놀라웠다는 것은 알 수 있다.
紅皮囊裏碎紅珠 (홍피낭리쇄홍주)
다음은 율곡의 「산중(山中)」이란 한시를 동시로 번역하여 한문동시로 내놓은 작품이다.
산속에서
이율곡
약초 캐기 정신 팔려
길을 잃었네.
문득 돌아보니
산봉마다 물든 단풍
멀리 스님이 물 길어
돌아간 후
모락모락 피어오르네.
차 달이는
연기
위의 한문동시는 율곡이 18세 되던 해인 1554년 금강산 마하연으로 들어갔을 때 쓴 것으로 알고 있다. 산속에서 약초를 캐다가 문득 어디가 어디인지 분간이 안 될 경우가 있다. 그때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문득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어느새 산봉우리마다 단풍이 들어 일대 풍경을 이룬 금강산의 비경에 깜짝 놀라워한다. 단풍의 아름다움을 드러내기 위한 표현이 돋보인다. 또한 스님이 물을 길어 숲속으로 사라진 것을 보고 얼마 안 있어 차 달이는 연기를 보고 길을 찾을 수 있었다는 글의 구조가 완벽하여 감동을 주는 작품이다. 어린이들도 읽으면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한문동시라 할 수 있다.
山中(산중)
李栗谷(이율곡)
採藥忽迷路 채약홀미로
千峯秋葉裏 천봉추엽리
山僧汲水歸 산승급수귀
林末茶烟起 임말다연기
조선 중기의 문신 허 엽(1548-1612 許 曄)의 장남으로 청주 한씨 소생이다. 호는 악록(岳麓)이다. 허봉과 허균의 형이고 난설헌의 오빠이다. 1590년(선조1년) 통신사의 종사관이 되어 황윤길, 김성일 등과 사신으로 일본으로 갔다. 일본의 상황이 어떠하냐고 묻자, 황윤길과 함께 침략이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동인의 주장을 받아들여 아무 대비를 하지 않았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선조는 평안도로 피난을 갔던 것이다. 악록공의 인품과 예지력을 보여주는 예이다. 사람들은 허성이 자기 당파에 편들지 않고 소신있게 이야기한 것을 장하게 여겼다. 허성은 정언, 집의 등의 벼슬을 거쳐 1594년 이조참의가 되고 대사성, 대사간, 부제학을 역임하고 예조, 병조판서에 제수되었고 이조판서에까지 이르렀다. 1607년 영창대군을 부탁하는 유교(遺敎)를 받아 고명칠신(顧命七臣)이라 하였다. 학문과 덕망으로 사람들의 촉망을 받았으며 성리학에 조예가 깊어고 글씨도 명필로 알려졌다. 저서로 『악록집(岳麓集)』이 있다. 다음의 한시는 『악록집』에 실린 글이다.
달밤에
허 성
밝은 달빛 빈 산을
가득 채우니
솔바람도 즐거워
소풍 다녀요.
달이 밝은 밤에 대청마루에 앉아 차를 마시다가 문득 하늘을 쳐다보았다. 밝은 달빛이 온 산을 두루 비추는 게 아름답기 그지없다. 그 미적 정취에 넋을 빼앗기고 만다. 어디 그뿐인가. 작은 바람이 옷깃을 스치니 소나무 사이로 부는 바람이 친한 벗인 냥 반가웠던 것이다. 한시로 동시로 번역해 놓으니 실감나는 한 편의 한문 동시가 되었다. 시의 내용을 보면 보이지 않는 격조가 품위를 다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다른 그의 한문동시로 보려지는 한시 한 편을 보자.
夜坐聯句(야좌연구) - 30수 중의 하나
明月滿空山 (명월만공산)
松風鳴不絶 (송풍명부절)
아래의 작품 또한 절간의 마루에 앉아 있을 때 쓴 시인데 분위기가 달밤이 아니라 봄날의 비오는 밤이다.
밤 빗소리
허 성
산사의 종소리
마음 고요한데
가만가만 소리 내는
밤 빗소리
내일 아침이면
알 수 있을까
파릇한 봄빛이
곁에 다가온 걸…
깊은 산사에서 지내는 밤이다. 저녁 범종 소리가 은은히 들리는데 마음은 오히려 안정되고 고요해진다. 그런 가운데 가만히 봄비가 내린다. 산과들이 봄비에 촉촉이 젖는다. 봄비는 마치 속삭이듯이 내린다. 오늘 밤을 자고나면 모든 산과들이 달라져 있을 것에 기쁨이 가득하다. 봄비가 내려 파릇한 봄 냄새가 퍼져올 것 같은 느낌이 마음이 설레는 것이다. 어른의 입장에서 쓴 시로서 어린이들이 읽기에도 아주 좋은 깨끗하고 담백한 한문동시라 할 수 있다.
夜坐聽雨(야좌청우)
허 성
古寺鐘初定 (고사종초정)
中宵聽雨聲 (중소청우성)
明朝後山色 (명조후산색)
春意看新生 (춘의간신생)
허 봉(許 篈: 1551-1588)은 조선 중기의 문신 허 엽(許 曄)의 둘째로 강릉김씨 소생이다. 호는 하곡(荷谷)이다. 이조 좌랑, 홍문관 교리, 창원부사 등을 지냈다. 1583년 창원부사시절 도승지 박근원, 장흥부사 송응개 등과 함께 병조판서 이율곡을 탄핵하였다가 함경도 변방인 종성에 유배되었다. 후에 함경남도 갑산으로 옮겨졌다. 갑산은 죄인의 유배지로는 널리 지세가 험하고 지내기 힘든 곳으로 유명한 곳이다. 그래서 유배지의 대명사처럼 불리어진 것이 삼수갑산이다.
나중에 영의정 노수신과 에조판서로 있던 유성룡의 주청으로 귀양에서 이듬해 풀려났으나 강직한 성격으로 한양에 돌아오지 않고 백운산에 들어갔다. 이후 춘천, 금강산 대명암에서 생활하는 등 방랑생활을 하다가 38세의 나이로 금화 생창역에서 사망하였다. 하곡은 성격이 곧고 활달하여 생각한 바를 굽히지 않았다. 임금 앞에서 일을 논할 때에도 조금도 굽힘이 없이 자기의 옳은 바를 내세웠다. 관부의 일을 돌봄에도 명쾌하고 조리가 정연하게 일을 처리하였다. 대간으로서나 어사로서 기강을 바로잡는 데에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이 같은 내용은 성호 이익이 그를 평한 글이다.
하곡은 손곡 이달과는 시문의 친구였으며 뛰어난 문장과 재주로 많은 글을 남겼다. 여동생인 허난설헌은 하곡 오라버니가 귀양을 가게 되자 한시 「송하곡적갑산(送荷谷謫甲山)」이란 작품에 혈육의 정을 듬뿍 담아 슬픈 시를 쓰기도 하였다.
버드나무
허 봉
가늘고 길게 길게
늘어진 버들가지
봄바람 불어오니
간들간들
마당 앞을 향해
늘어지려다가
치렁치렁 연못위에
푸른 빛 휘어지네.
매우 강직한 성격의 소유자인 허 봉은 작품에서는 매우 부드럽고 아름다운 시를 짓고 있다. 말끔하고 산뜻한 느낌도 든다. 봄이 되자 푸르러진 버들가지가 바람에 한들거리는 모습이 무척이나 아름답다. 동풍이 살랑살랑 불어오니 버들가지가 마당 쪽으로 몸을 들어보이다가 다시 연못 위에 치렁치렁 푸른 가지를 드리웠다는 낭만과 서정이 담뿍 담긴 글이다. 봄날의 정경이 한 폭의 그림처럼 다가온다. 이외에도 무제(無題)라는 시에서는, ‘강물 위에는 아름다운 여인의 집이 있으니 문은 버드나무 가운데로 열려 있네’ 라는 등 감미로운 서정시가 보이기도 한다.
柳 (류:버드나무)
許 篈(허 봉)
長長楊柳枝 (장장양류지)
裊裊東風吹 (뇨뇨동풍취)
不向場頭見 (부향장두견)
還從池面垂 (환종지면수)
강릉 초당에서 태어나 허난설헌(1563–1589)의 이름은 초희(楚姬), 난설헌(蘭雪軒)은 그의 호이고 경번(景樊)은 그의 자(字)이다. 난초는 사군자의 하나인데 꽃의 모양이 기품이 있고 향기는 그윽하고 감미로워 품위가 있다. 난초를 좋아한 초희는 호(號)에다 난초 난(蘭) 자(字)를 넣어 난설헌(蘭雪軒)이라 지었다.
그는 남존여비를 주장하는 조선의 질서와 현실이 늘 자신을 옥죄어 오는 답답함을 느꼈다.
그가 쓴 시에는 신선과 꿈에 대한 내용이 많다.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욕망을 신선세계나 꿈에서 이루려는 의지의 산물이기도 하다. 따라서 그의 시 중에는 아동문학의 속성인 판타지의 세계가 드러나고 있다. 유선시(遊仙詩)는 판타지 동시에 속한다고도 볼 수 있다. 이런 유선시가 그의 전 작품 중에 절반에 가까울 정도이니 단연 동시적 측면이 강하다고 볼 수 있다.
연밥 따는 노래
허난설헌
가을날 맑은 호수 옥빛으로 흘러가고
무성한 연꽃들은 목란배 매어놓았네
물 건너 마주 보는 정든 벗에게
몰래 연밥 따 던지고
행여나 뉘 봤을까 반나절 부끄러웠다.
목란배는 작고 예쁜 배를 말한다. 가을날 호수는 맑고 투명하여 옥빛이 되어 흘러간다. 그 한쪽에 무성한 연꽃들이 떠 있는 것이 마치 목란배를 매어놓은 듯하다. 물 건너에는 좋아하는 벗이 있다. 그 벗에게 몰래 연밥을 따서 던지며 자신의 마음을 전한다. 마주 보며 얼마나 즐거워할까. 그 모습을 행여나 누가 볼까봐 부끄러워한다는 내용이다. 소녀의 예쁜 마음이 마치 연잎에 구르는 옥빛 불방울같이 곱다.
난설헌은 자식이 죽은 슬픔을 쓴 시가 있는데 그 작품은 매우 사실적 기법으로 쓴 시이다. 그밖에 대부분의 시는 중국이 배경이 된 상상적 허구의 작품들이다. 신선들이 사는 세계를 판타지를 섞어 쓴 한시들은 모두 판타지 한문동시에 속하기도 하는 것이다. 현실에서 이룰 수 없는 세계를 꿈속에서 또는 환상적 도가의 신선세계에서 이루고자하는 시적 세계를 담아내고 있다. 현실 도피가 아니라 꿈속 같은 몽환같은 새로운 또 하나의 세계 속에서 살았던 것이다. 위의 작품 「연밥 따는 노래」는 당시풍을 빌려 쓴 한문동시로 젊은 소년 소녀 간의 사랑을 그려놓은 매우 시사적인 작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채련곡(采蓮曲)
허난설헌
秋淨長湖碧玉流 추정장호벽옥류
蓮花深處繫蘭舟 련화심처계란주
逢郞隔水投蓮子 봉랑격수투련자
或被人知半日羞 혹피인지반일수
광상산에서 노닐다
허난설헌
푸른 바다가
신선 세계에 닿아있고
신비한 새들이
아름다운 빛깔로 춤을 추더니
휘휘 늘어진 연꽃
스물일곱송이
서리 내린 달빛 아래
붉게 지네.
허난설헌은 꿈속에서 신선들이 사는 광상산에서 본 아름다운 모습을 시로 남겼다. 환상적 이미지들이 즐거움에서 슬픔으로 변환되는 작품이다.
위의 한문 동시는 허난설헌이 스물두 살 때 상(喪)을 당하여 외가인 강릉에 머무르고 있을 때 쓴 시이다. 잠을 자다가 꿈속에서 바다 한가운데에 있는 산을 보았다. 그 산은 온통 옥으로 된 산이었다. 산을 바라보니 너무 눈이 부셔서 바라볼 수 없었다. 이때 아름다운 두 여인이 나타나 허난설헌과 함께 산에 올랐다. 산에 오르니 바다는 하늘과 맞닿았는데 그 사이로 붉은 해가 솟았다. 산봉우리에는 큰 연못이 있었다. 그곳에는 연꽃이 늘어져 있었는데 밤이 되자, 서리 내린 달빛 아래 붉게 지고 있었다.
두 여인은 이곳이 신선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고 광상산이라고 했다. 그리고 시 한수를 써 달라고 하였다. 난설헌은 처음에는 사양하다가 위의 시를 써서 읊었다. 두 여인은 듣고 글자 한 자 한 자가 모두 신선의 글이라고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허난설헌은 이 시를 쓰고 27세가 되던 해 자신의 쓴 시의 예언대로 세상을 떠났던 것이다.
碧海浸瑤海(벽해침요해)
靑鸞倚彩鸞(청난의채난)
芙蓉三九朶(부용삼구타)
紅墮月霜寒(홍타월상한)
- 몽유광상산(夢遊廣桑山) -
신사임당(1504 – 1551)은 유명한 이율곡의 어머니이다. 또한 시, 서, 화에 뛰어난 재능을 가진 예술가이기도하다.
아버지는 신명화(申命和)이며, 본관은 평산(平山)이다. 어머니는 용인 이씨, 이사온(李思溫)의 딸이다. 남편은 이원수(李元秀)이고, 이이(李珥)의 어머니이다.
신사임당은 결혼 후에도 친정집에서 어머니를 돌보며 지낸다. 그러다가 대관령을 넘어 한양으로 갈 때에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한시로 남겼다.
대관령을 넘으며 어머니를 걱정하다
신사임당
늙으신 어머님을 강릉에 홀로 두고
혼자서 서울로 떠나는 이 마음
어머니 계신 북촌, 고개 돌려 바라보니
저문 산 아래로 흰 구름만 떠간다.
사임당 신씨는 19세에 덕수 이씨(德水李氏) 이원수(李元秀)와 결혼하였다.신씨는 결혼 후에도 강릉에서 친정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이 시는 시댁인 한양으로 가기 위해 어머니를 이별하고 대관령을 넘는 모습이다. 대관령 고개를 오르면서 몇 번이고 어머니 계신 북촌을 돌아보는 모습이 눈에 선하게 그려진다. 가다가는 자꾸 고개 돌려 강릉을 돌아본다는 시구에서 어머니에 대한 깊은 정이 얼마나 깊은지를 알 수 있다.
그녀의 문학은 위의 시에서도 알 수 있듯이 거짓 없는 선함, 정직, 순수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아동문학에서 동시의 특성을 모두 포함하고 있는 한문동시라고도 볼 수 있다. 특히 생활경험이 드러나 생활동시의 한 면을 보이는 점은 감동으로 이어지는 부분이다.
踰大關嶺望親庭(유대관령망친정)
신사임당
鶴髮慈親在臨瀛(학발자친재임영)
身向獨去長安情(신향독거장안정)
回首北坪時一望(회수북평시일망)
白雲飛下暮山靑(백운비하모산청)
2)동화문학의 탄생
허균의 「홍길동전」으로 인해, 최초의 한글 소년소설이 등장했다고 볼 수 있다. 김시습의 소설『금오신화』가 최초의 한문소설이라고 한다면 허균의 『홍길동전』은 최초의 한글소설임과 동시에 최초의 소년소설이라 할 수 있다.
허균(許筠 : 1569 – 1618)은 호가 교산(蛟山)ㆍ학산(鶴山)ㆍ성소(惺所)ㆍ백월거사(白月居士) 등이다. 아버지 허엽(許曄)의 삼남이고 허난설헌(許蘭雪軒)의 동생이다. 삼당시인 이달(李達)에게 글을 배웠다.
허균은 적서차별의 불평등한 사회제도의 모순을 알고 사회 개혁을 이루려고 하였다.
홍길동전은 그의 사상이 녹아내린 작품이다. 홍길동의 모친은 홍판서의 첩인 춘섬이다. 길동은 서자의 신분으로 태어나 호형호제를 하지 못한다. 고립되고 절망감을 안고 집을 나온다. 도적들의 소굴에서 비밀결사조직인 활빈당을 만들어 조선8도를 무대로 하여 의적활동을 벌인다. 해인사 중들을 혼내주고 탐관오리를 벌한다. 길동의 아버지 홍판서는 형과 함께 볼모로 잡히자, 길동은 스스로 잡혀 들어간다. 그러나 탈출에 성공하게 되고 나중에는 형조판서를 지낸 후에는 저도라는 섬으로 들어갔다가 율도국을 정벌하여 율도국의 왕이 되어 나라를 다스린다는 내용이다.
이러한 민중의식은 12세기 초 고려시대 만적의 노비해방운동에서 자라나고 있었다. 1198년 고려 신종 1년 만적이라는 노비는 노비해방운동을 벌였다. 윗사람을 죽이고 자신들도 공경대부(公卿大夫)가 되자고 하였다. 만적은 왕후장상(王侯將相)의 씨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누구든지 그런 신분을 가질 수 있다고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사상은 고려가 불교를 국교로 정하였기에 불교의 평등사상에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여진다. 어찌되었든 홍길동의 이러한 사상은 이미 고려시대부터 자라났던 것이었는데 허균의 시대에 와서 작품으로 구체화되고 실천되었던 것이었다.
홍길동전은 홍길동이란 인물의 활약상을 그린 작품이다. 홍길동은 활빈당을 만들어 관리들의 부정부패를 벌하고 가난한 서민들을 위해 활동하는 의적이다. 나중에는 율도국에서 이상적인 정치를 편다는 내용이다.
홍길동전의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사회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고대소설의 특성을 닮은 권선징악적 성격이다. 부패한 관리들 뿐 만아니라 해인사 탈취사건에서 보듯이 평등과 깨달음을 구하는 승려들의 부정한 행동에도 징벌을 가한다.
3)동시조의 등장
조선 중기 남구만(南九萬 1629-1711)은 시조 「동창이 밝았느냐」를 지었다. 이 시조는 일반인은 물론이고 어린이들에게 읽히는 시조이다. 사실, 이 시조는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렸던 작품이다. 그렇다면 이 시조는 동시조에 해당한다는 것이 더 타당한 것이다.
남구만이 망상에 유배되었을 때 지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망상은 현재 동해시로 편입되어 있으나 조선시대 1413년(세조 3년) 강릉대도호부 옥계면과 망상현을 설치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니 남구만은 강릉에 유배되어 온 것이다.
남구만(南九萬 1629-1711)은 본관이 의령(宜寧)이다. 호는 약천(藥泉)이고 자는 운로(雲路)이며 개국공신으로 태조의 묘당에 배향된 남재(南在)의 후손이다. 아버지는 현령을 지낸 남일성(南一星)이고 어머니는 권박(權瞨)의 딸이다. 조선 중기의 문신인 당대의 실질적 권력자인 송준길이 그의 스승이다.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부제학, 대사간에 올랐으며 두 차례나 대제학에 등용되었다. 1684년엔 우의정에 오르고 이듬해엔 좌의정, 1687년엔 영의정에 올랐다. 1689년 기사환국이 되자, 강릉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에 풀려났다. 1694년 갑술옥사로 다시 영의정에 올랐고 1696년 영중추부사가 되었다.
약천은 숙종 당시 정치 활동의 중심인물로 경제, 행정, 군정, 인재 등용, 의례 등 국가 정책결정 전반에 그의 경륜을 드러내었다. 또 나라의 법을 받들어 사사로움이 없고 매사 붕당을 염려하여 오직 공의를 따랐다고 한다. 학식과 덕망이 높아 그의 문하에서 글을 배우는 선비들이 백여명이 넘었다고 하며 그가 남긴 시조 「동창이 밝았느냐…」는 『진본 청구영언(靑丘永言)』에 전해지고 있다. 강릉에서 동해로 가는 길인 동해고속도로 하행선 휴게소에는 이 시조비가 세워져 있다. 문집에는 『약천집(藥泉集)』이 있다.
남구만은 이곳에 서당을 개설하여 마을 사람들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남구만 선생은 우리 고장에서 많은 영향을 끼친 분으로 자는 운로, 호는 약천, 시호는 문충이다. 그가 1689년(숙종 15)에 강릉으로 가는 도중 망상동 심곡에서 잠시 쉬었는데 이곳의 자연경관과 샘물에서 나오는 물로 어찌나 맑고 물맛이 좋은지 이곳에 심화되어 이곳에다 임시 기거하는 집을 짓고 학문과 풍류를 읊으며 세월을 보냈다. 그는 이곳에서 지방민을 위해 서당을 개설하여 학문과 생업을 주로 가르치며 선도하였는데 그 후 이 마을에서 학자, 효자, 열녀가 많이 났으며 특히 그의 유명한 시조 「동창이 밝았느냐…」도 이 서당에서 지은 것이라 한다.”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초부리에 그의 묘소가 있다.
약천은 평생 동안 많은 글을 지었는데, 그의 손자 남처관이 편집한 『약천집』에 280여수의 한시가 전해진다.
현재 동해시 망상에는 남구만의 뜻을 기리기 위해 ≪약천문화마을≫을 조성하였다. 그의 호 약천(藥泉)은 남구만이 41세 되던 해 서울 광진의 아차산 기슭 약천암에 기거하였을 때 스스로 지은 자호이다. 자신의 삶이나 인생, 정치 여정이 약수처럼 끊임없이 흘러나오길 바라는 마음이 아니었을까? 그랬다면 그의 뜻한 바대로 평생을 약간의 풍파를 제외하고는 대단히 화려하고 안정된 관직생활을 해냈던 인물이다.
현재 ≪약천문화마을≫에는 긴 사래밭이 있다. 그가 쓴 「동창이 밝았느냐」시조는 어린이 어른 할머니 할아버지를 막론하고 모든 국민이 애창하는 국민애송시조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니 이 시조의 내용을 보아도 그렇고 모든 면에서 이 시조를 동시조라 칭하는 것이다.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소 치는 아이는 상기 아니 일었느냐
재 너머 사래 긴 밭을 언제 갈려 하나니
방정환이 어린이에 대한 각성을 널리 알리고 어린이의 권익을 보호하려고 하기 전까지는 아이들은 문학적 독자의 대상에서 소외되었던 것이다. 다만 한시나 시조에서 글을 쓰는 작가가 어린이 같은 순수한 마음으로 작품을 써서 어린이들도 읽을 수 있는 쉬운 생각이나 언어가 되어 있었을 뿐이다. 그러니 한시나 시조가 어린이를 위해 쓴 글은 아니었지만 그 내용을 살펴보면 어린이들에게도 동심을 갖춘 우수하고 좋은 시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작품들 중에서 한시로 지은 작품은 ≪한문동시≫라 명명하고 남구만의 시조는 ≪동시조≫라 하였다. 이미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1964년 아동문학가 이석현이 말한 ‘동시조’는 아동문학 중에서 운문 부문에서 하나의 장르로 정립된 것이다. 시조라는 말도 처음에는 「단가」라고 불려졌지만 후일에 와서「시조」라는 말로 불려졌다. 따라서 남구만의 「동창이 밝았느냐…」시조에 동시조라는 말을 붙이는 것은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고 보여졌다.
많은 학자나 문인들은 이 동시조가 농사를 짓는 농민들에게 일깨움을 주는 「권농가」로 부르기도 한다. 시조의 내용대로라면 응당 이해가 가고도 남는다. 하지만 만약 남구만이 강릉의 유배지에서 쓴 시조가 맞는 것이라면 그 이면에 상징성이 담겨있는 작품이라는 것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는 것이다. 당시 남구만은 기사환국이라는 정치적 변혁으로 귀양을 내려온 입장이다. 따라서 겉으로 드러나는 것은 게으른 아이에 대한 가르침을 주는 시조로 볼 수 있으나 당시 정치 상황의 어지러움을 보고 빗대어 표현한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문학 작품은 여러 가지 비유와 상징, 은유로 구성되어 해석이나 의미의 다양성을 부인할 수 없다. 강릉 원주대 장정룡 교수도 농촌의 환경인 노고지리, 소치는 아이, 사래 긴 밭 등에 의탁하여 본인의 심경과 어지러운 정치 풍토를 풍자하는 것으로 유추하기도 하였다.
이 작품을 볼 때 정치적 상징성을 염두에 두고 읽어도 좋지만 그렇게 보지 않고 순수하게 읽어도 그지없이 좋은 동시조이다. 순수한 자연 풍경의 환경적 아름다움과 농촌 어린이의 부지런함을 일깨우는 소통의 공간으로 감상해도 아름다운 시심을 전해 받을 수 있다.
약천 남구만의 시조 창작은 이곳 강릉에 시조의 뿌리가 되었고 강원시조 창작의 배경이 되었다. 강원시조문학회 창립이 그것이다. 강원시조문학회는 문향 강릉에서 1984년 8월 11일 강릉의 경포대 ≺별과 시≻ 커피숖에서 김원기, 김완성, 남진원, 구영주, 조영수, 이훈, 곽영기 등이 발족 협의를 한 후 8월 19일 강릉대학 초당캠퍼스 회의실에서 강원시조문학회 창립을 하였던 것이다. 김원기와 조영수 구영주 등은 시조를 쓰지는 않았지만 당시 강릉지역에서 문학 활동에 구심점을 이루고 있었기에 참여하였던 것 같다. 이곳에서 임원들이 선출되었는데, 회장에 곽영기, 부회장에 김완성, 총무에 이훈이 선임되었다. 이를 기반으로 1990년에는 강릉을 중심으로 하는 영동시조문학회도 발족하였다. 1990년 12월 21일 ≺청탑≻다방에 정태모, 남진원,김좌기, 김남구, 신대주, 전수자 등이 모여 창립하였다. 회장에는 김좌기가 맡고 총무는 남진원이 맡았다. 이후 매월 모여 작품합평회를 하였는데 장소는 강릉택시부 광장 북쪽 로얄장 8층 라운지였다.
이처럼 남구만의 시조 작품 생성은 강릉지역 시조의 원류가 되었고 시조 창작의 동력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2.일제강점기, 강릉아동문학의 개창기
1)일제암흑기에 민속적 질감을 형상화한 동요
아동문학의 한 장르로 발전해 온 현대 동시의 모태는 1920년대 초, 요적(謠的) 속성이 강한 동요로 시작되었다는 특수성이 있다.
1910년 국권을 잃게 된 일제강점기의 시작은 1945년 광복이 될 때까지 지속되었다. 그러나 1908년부터 최남선은『소년』을 창간한 것을 위시로 『신소년』(1923), 『새벗』(1925), 『별나라』(1926) 등 무려 17종에 달하는 아동문학 잡지가 탄생했다. 이러한 영향 아래, 강릉의 근대아동문학 역시 간과할 수 없는 주요한 역사적 의미를 허술하게 다룰 수 없는 이유가 있다. 따라서 한국아동문학의 1920년대는 다른 문학 분야와 마찬가지로 근대문학의 태동에 있어서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확보하는 시기이다.
이 무렵 아동문학은 강릉 지역에 근거를 두고 활동한 염근수(1907 – 2003)는 1925년과 1926년을 전후하여『새벗』(1925),『별나라』(1926) 어린이 잡지의 주간을 맡기도 하며 그가 쓴 동요를 통해 아동문학 활동에 기여하였다. 또 강릉에서 태어난 심연수는 일본 유학을 마치고 용정에서 활동하였는데 심연수 시인은 그의 많은 시 중에서 역사성과 저항정신을 알 수 있는 동시를 써낸 것은 일제강점기 강릉아동문학의 맥을 잇는 중요한 가교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이 시기는 문학의 암흑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염근수는 토속적이고 향토성에 기반을 둔 동시 작품과 상징적 수법으로 민족 저항의식을 고취하는 작품을 내놓기도 하였다. 심연수는 봄의 들판에 선 소년을 통해, 봄을 기다리며 조국 광복의 꿈을 상징화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암흑기 아동문학은 염근수와 심연수에 의하여 아동문학의 맥을 잇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 두 사람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알아보자.
염근수는 어떤 사람인가? 일제 강점기에 그는 한마디로 우리 민족의 숨결과 냄새를 맡고자 했으며 그 토속적인 향기를 지켜내고자 했던 사람이다.
1907년 황해도 백천에서 태어나 2003년 서울에서 작고하였다. 염근수는 여섯 살에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그는 열서너 살이 될 무렵 집에서 가출을 한다. 공부를 하고 싶어서였다. 돈 한 푼 없는 어린 소년은 1921년 서울에 와서 스스로 학비를 벌어 학교에 들어갔다. 그 학교가 양정학교이다. 마침 독립운동가 민영환의 가문에 들어가 그 집에 있는 아이의 공부 동무를 해 주며 의식을 해결하였다. 이듬해 1922년 양정학교 2학년이 된 무렵 개성 선죽교에 수학여행을 갔다. 그곳에서 선죽교와 충신 정몽주를 생각하며 쓴 동시 「피꽃」을 ≪동아일보≫에 투고하였는데 이것이 ≪동아일보≫에 발표되었다. 그래서 염근수의 등단은 1922년 동아일보 「피꽃」을 발표한 것으로 되어있다.
피꽃
염근수
앞밭에 뒷밭에
삼밭에 꽃은
여섯 해 만에야
곱게 피었고
고려의 서울 땅
정포은 꽃은
선죽교 돌위에
새빨갑니다.
- 1922년 염근수, 「피꽃」 -
이렇게 보면 염근수의 문학 활동기간은 1922년부터 1992년 『서낭굿』을 상재한 시기로 보면 70여년이 된다.
1905년 민영환이 일제 침략에 항거하여 자결한 후 점점 가세는 기울어졌다. 염근수는 더 이상 민영환의 가문에 있을 수 없어 집을 나온다. 어느 곳 한군데 의탁할 길이 막막해진 염근수는 학교도 포기하고 무전취식 여행을 떠난다. 여행 중에 소설가 이광수를 만나고 그의 소개장을 받아쥐고 성울로 올라와 이광수의 부인 허정숙을 만난다. 그 덕분에 동아일보에 몇 편의 작품을 발표한다. 이 때에 어린이 잡지 『별나라』, 『새벗』, 『어린이』등에 동요를 발표하였다. 발표작품 「댕댕이」,「할머니」, 「편지」는 홍난파의 『조선 동요 100곡집』에 실렸다. 잡지 발간도 하였는데 어린이 잡지인 『백두산』을 발행하기도 하고 조선일보 기자 생활도 얼마간 하였다.
문학에 열의를 갖고 한창 활동할 나이인 1929년 23세 되던 해에 먹지 못하는 큰 병에 걸렸다. 염근수는 모든 일손을 놓고 또다시 병을 고치기 위해 세상을 전전했다. 유명한 사찰은 다 다녔고 전남 장성의 백양사에서 한동안 수양을 하며 불교에 심취하기도 했다. 그 후 목포 유달산에 있는 법천사에서 병을 치료하여 완쾌하였다.
25세인 1931년 강릉으로 올라왔다. 1931년에는 강릉 여인 최돈자(崔燉子)와 결혼을 하여 3남 9녀를 두었다. 세 아들은 모두 한의사로 키웠고 아홉 딸은 모두 교사로 근무하였다. 염근수는 강릉에 있는 동안 강릉농학을 매우 발전시켰다. 그는 농악대를 조직하고 거기에 몰입을 하였다. 염근수는 자신의 병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약초공부를 한 모양이었다. 어느 날 필자도 한 번 뵌 적이 있는데 장수의 비결이 무엇이냐고 조심스레 여쭈어 보았더니 평생 동안 약초를 썰고 약초 냄새를 맡아 오래 사는 것 같다고 하였다.
그의 모습은 선풍도골(仙風道骨)이다. 소금강 골짜기 구룡폭포 너럭바위에서 놀다 간다는 옛 신선의 환강처럼 명아주 지팡이, 하얀 머리, 배꼽까지 내려오는 흰 수염은 누가 봐도 신선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즐겨 입는 한복차림으로 거리에라도 나가면 사람들이 보고 놀라서 여기저기서 사진을 찍어대기에 곤욕을 겪기도 하였다.
사람도 자연의 모습 그대로가 가장 좋다고 생각하여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살았던 분, 그가 염근수이다. 초목과 나무 열매를 약재로 썰며 살아온 그의 삶, 자연과 더불어, 흙을 사랑하고 나무와 사람의 정을 귀하게 여기며 성품대로 삶을 살았기에 아마 97세란 장수의 삶이 되지 않았는가 생각해 본다. 그는 약초를 썰며 한약방을 운영해 왔기에 경제적인 어려움은 없었던 것 같다.
염근수 시인을 말하려면 반드시 알아야 할 인물이 한 분 있다. 바로 구영주 시인이다. 1989년 염근수가 낸 시집이 『다래아가씨』이다. 이 시집은 순전히 구영주의 힘에 의해서 나오게 된 것이다. 그러니 구영주가 있었기에 묻힐 뻔 했던 염근수의 문학이 빛을 보기 시작했던 것이다.
구영주는 1979년 월간문학 신인상 시 부문에 당선하여 등단한 시인이다. 성격이 활달하고 대인관계에 있어서 친절하고 자상하여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힘이 있었다. 우연히 여든이 넘은 염근수 옹과 구영주 시인의 만남이 있었는데 동요를 많이 써 놓은 것을 알고 깜짝 놀란 구영주는 시집을 내자고 제안했던 것이다. 그렇게 하여 나온 시집이 1989년 오상출판사에서 펴 낸 160편을 묶은『다래 아가씨』이다. 시집 뒤편에는 묶여진 배경이 잘 나타나 있다.
“아홉 자제와 거기에서 난 자손들에게나 읽히고 싶어 틈틈이 백지 책에 친필로 써 둔 것을 아들이 읽더니 맞춤법이라도 다듬어 인쇄하여 나눠 보자고 제안하여 600 여편의 시를 강릉 시인 구영주에게 보내어 추리게 한 것이다.”
아홉 자식을 길러 내느라 50여년 전 취향 같은 것은 잊고 지낼 수밖에 없었던 아동문학가라는 사실은 풍문으로나 전해지고 한방에 더 밝은 염근수의 시는 이렇게 전해진 것이다. 이 시집을 낼 때 염근수는 생활을 위해 버려두었던 시심을 가다듬고 보니 그저 살붙이 끼리나 기념 삼아 돌려볼 일이 되고 말았다고 겸연쩍어 하였다고 말했다.
염근수는 1991년 누리기획에서 발행한 풍물시집 『서낭굿』 서문의 머리글에서 자신의 시들이 여든다섯을 사는 동안 제법 된다고 하였다. 버릴 수 없어 놔 두었는데 책이 되었다고 기쁨을 드러내었다. 그러나 일반 독자들에게 무슨 보람을 주게 될지 알 수 없지만 무딘 붓끝을 헤아려달라고 하며 겸손해 하였다.
누리기획에서는 1992년 나머지 900여편의 시를 놓고 한 차례 추리기를 더하여 『물새 발자욱』이란 제목으로 93편의 동요 동시를 묶어낸다. 『다래 아가씨』에 수록된 시 중에서 75편은 『서낭굿』과 『물새 발자욱』에 누누어 재수록 하였기에 세 권의 시집에 실린 시들을 합하면 모두 260편이 된다. 그런데 1990년 구영주는 강릉의 경포고등학교 국어 교사로 근무하고 있었다. 이때 이미 염근수를 알게 되고 그 전해에 시집까지 내는데 관여한 구영주는 염근수에게 교지에 실을 원고청탁을 하였던 것이다. 경포고등학교 교지인 『보ᄅᆞ미』5집에 염근수의 서사시 「한단별곡」이 발표되었는데 이 작품에는 ‘1989. 11. 25일 강릉 팔송정에서’라는 기록이 붙어 있다.
등단 연수가 오래 되고 천여 편의 시가 있었음에도 시집을 내지 않은 이유는 경제적인 문제라기보다는 그의 문학에 대한 철학 때문이기도하다.
“시는 바로 감동이요, 감회요, 뜻이요, 그래서 나로부터 움터서 나로 다시 돌아와 거듭 태어나는 나의 마음이요, 얼굴입니다.”
이것이 발표 행위를 속되게 여길 만큼 곧은 처신을 하게 했던 것이다. 결코 안이하지 않은 창작 자세와 발표 태도가 오랜 동안 그를 노래하지 않는 시인으로 만들었지만 일단 발표가 이뤄지자 그의 작품성이 곧 평가를 받았다. 1992년 윤석중이 주관하여 주던 새싹문학상이 그것이다.
일제강점기는 일본의 문화말살 정책으로 우리나라는 문학 역시 암흑기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아동문학은 방정환의 등장으로 일대 신선한 아동문학의 조용한 발흥기를 맞이하였다. 방정환이 어린이 문화운동을 펼친 것과 동시에 『어린이』를 발간하였다. 염근수는 이곳에도 동요를 발표하며 꾸준히 작품 창작에 임했다. 살아가면서 건강상, 형편상 해야 할 일이 있었지만 염근수는 꾸준히 동요 동시를 썼다. 다만 발표는 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염근수 동요 동시는 1920년대 동요 동시의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 시적 표현의 방법은 서정이 직정적이고 자연 친근성의 흐름에 이어져 있다.
『서낭굿』에 수록한 몇 편의 작품에서도 그런 표징을 읽을 수 있다. 동시 동요의 제목이나 내용에는 불땅골, 가마소, 깔깔새, 왕챙이벌, 코거리(코뚜레), 안덜(아주 머니), 가이(개) 등 지역에서만 쓰는 언어를 사용하여 된장 맛 나는 작품들이다. 시의 내용은 산골 동네에어 일어나는 일들이다. 사람 없는 산마을에 엄마닭과 병아리가 노는 모습, 무가 자라는 생태적인 측면에 대한 고찰, 사람을 반겨주는 개, 대장간 아저씨 이야기, 마을신인 서낭을 위해 하는 굿 이야기 등 1920년대에서 1960년대까지 이어지는 우리 민족의 토속적 신앙과 아름다운 전통을 동요 동시로 표출하여 놓았다. 그 흐름도 외형율을 띄고 있어 읽으면 리듬의 즐거움을 느끼게 된다.
산골집 인심
염근수
산골집 인심은
너무 좋아요
가자마자 시원한
냉수 한 그릇
앉자마자 산복숭아
씻어 내오고
감자랑 강냉이
먹으라 해요
그뿐인가 산나물
도토리묵에
이름 모를 산열매도
먹어 보래요
이토록 후한 대접
받고 오건만
도리어 대접 못해
미안하대요.
어른들이나 아이들이 모두 읽어도 부담이 없는 즐거운 동요이며 동시이다. 우리들의 옛날 어른들의 인심이 이렇게 후한 모습을 동시로 엮어 놓으니 더욱 감칠맛이 난다. 이 작품은 2005년 3월 5일 ≪한국명작동시선정위원회≫에서 선정하여 예림당에서 묶은 『100년 후에도 읽고 싶은 한국 명작 동시』에 수록된 105편 중의 한 편이다.
고요한 산마을
염근수
이 동네는 강아지도
애들도 없나
너무 너무 고요해
겁이 나네요
언제부터 나무 아래
앉아 쉬건만
사람이란 그림자도
볼 수 없어요
그러자 어데선지
꾸릉투당퉁
육이오 때 포소리가
들려오네요
어머나 바라보니
안덜이 나와
우물 옆 항아리에
감잘 쏟아요
이 동요를 읽으면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고요한 산골 마을에 갑자기 아주머니가 구박(그릇)에 담긴 감자를 쏟는 소리에 놀라는 모습이다. 평화롭고 순박한 산골의 정서가 가감 없이 진솔하게 그려져 있어 감동을 받는다. 대부분 염근수의 동요 동시가 어른이나 아이 할 것 없이 재미를 준다.
염근수의 동요 동시는 모두 이처럼 풍물을 서사적인 내용으로 구성한 시들이다. 따라서 그의 동요 동시들은 그 시대 가장 잘 써놓은 문화이며 역사이다. 『서낭굿』 시집에는 풍물시집이란 말을 달아놓았다.
지역의 특성을 살린 향토색 짙은 작품으로는 ‘가마소’ 동시를 들 수 있다.
해는 정동진 가서 보았고/달은 경포대 가서 보았고/별은 가마소 가서 보았네//해는 정동진 그만이었고/달은 경포대 그만이었고/별은 가마소 그만이었네
-염근수, 「가마소」(솔바람동요문학 9집『꿈꾸는 애벌레』,2013)-
지역의 자연물을, 보는 장소에 따라 특별한 느낌으로 나타낸 동시라 할 수 있다. 염근수는 1931년에 이 동시를 발표했다고 전해진다. 지금 강릉의 정동진은 해돋이 장소로 유명해졌다. ‘가마소’는 대관령 밑에 잇는 작은 마을의 별칭이다. 생긴 모양이 가마솥처럼 생긴 데에서 붙여졌다.
보름달이 어디로/갈까 하다가/산아래 토막집을/찾아갔대요//마당에서 토방에/올라서보니/크고 작은 신발들이/놓였드래요//오손도손 식구 넷/신발 네 켤레/아빠것 엄마것/동생것 내것//잠자는 숨소리가/너무 정다워/창문 어루 만지며/같이 잤대요
- 염근수, 「보름달」-
보름달을 친구로 생각하여 산 아래 토막집 가족들이 잠자는 모습을 보고 너무 정다워 창문을 어루만지다가 같이 잤다는 서사적 이야기가 담겨진 동시라 할 수 있다. 지극히 인간적인 정겨움의 정서는 읽는 이의 마음을 따뜻이 감싸게 한다.
밤 따는 구경은/못하겠어요/밤나무가 가엾어/못보겠어요//높은 가지 올라가/후려 때리고/얕은 가진 땅에서/치켜 때려요//따는 것이 아니라/때리는 거죠/가지째 이파리째/밤송아리째//죽살을 치도록/두드려맞아/후줄그레 가엾어/못보겠어요
- 염근수, 「밤 따는 구경」 -
‘죽살을 치도록’은 ㅌ속어이고 ‘죽을 정도로’의 뜻이다. 밤송이를 ‘밤송아리’라고 한 것도 토속어이다. 지역어를 살려 토속적인 맛을 내고 꾸밈없는 표현을 하여 한층 정감을 준다. 식물에 대한 동심 적 사랑이 깊이를 더하고 있다.
이번에는 동물에 대한 사랑을 그린 작품을 보자.
따라오지 말라고/돌아서면은/섰다가 따라오는/우리 누렁이//돌을 들어 때리는/시늉을 하면/이건 정말 가는 척/우리 누렁이//갔거니 마음놓고/가다보면은/어느새 앞서가는/우리 누렁이//해저물어 집으로/돌아올 때면/어깨동무 내동무/우리누렁이
- 염근수, 「우리 누렁이」 -
시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누렁이’라는 개의 이름은 친근성을 주는 토속어이다. 위의 작품처럼 평범하고도 아름다운 이야기를 동요나 동시로 그려내기는 어렵다. 이 작품은 무기교의 기교로 그려낸 가작(佳作)이다. 재미 면에서도 공감을 느끼고 동물사랑에 호감이 간다.
작품 「서낭굿」도 토속적인 맛을 풍긴다. 제목부터 원시적이고 주술적인 언어이고 ‘일구여덟척’ 같은 투박한 지역 언어를 그대로 사용하여 친근감이 있다.
나무널쪽 고깃배
일구여덟척
움막집
스물몇집
작은갯마을
징 장구 제금 북
쾡정덩더꿍
갯마을이 떠나도록
서낭굿치네
바다만 바라보고
사는 갯마을
믿을 건 서낭당
오직 하나뿐
올 금년도 많이 잡고
무사하도록
갯마을이 떠나갈 듯
서낭굿치네
- 염근수, 「서낭굿」 -
이처럼, 지역 특유의 모습을 묘사하여 지역색을 살리고 시골 분위기에 딱 알맞은 시어를 사용하여 정감이 물씬 묻어나는 작품은 염근수 시의 특징이다.
의미면에서 보면 작품을 통해 자연의 가치를 일깨워주었다. 자연물과 동물을 하나로 잇는 휴머니즘적 문학관을 갖었다. 문학적 상상력을 동원하여 전통적 정서의 환기를 불러 일으켰다. 감각적 아름다움보다는 서사적인 작품이 많았다.
시적 흐름의 평이성으로 인해 정서의 흐름이 물 흐르는 것처럼 흘러가기에 편안함을 준다. 감각적 이미지를 사용하기 보다는 서술적 이미지를 많이 사용함으로 해서 독자와의 공감대가 약한 점 등을 한계점으로 볼 수도 있지만 이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동요 동시는 몇 가지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뚜렷하다.
시대의 흐름에 편승하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취향대로 독자적인 시세계를 이루어놓은 점이다.
지역 특유의 모습을 묘사하여 지역색을 살리고 시골 분위기에 딱 알맞은 시어를 사용하여 정감이 물씬 묻어나는 작품은 염근수 시의 색깔이다.
무엇보다도 작품에서 풍기는 휴머니즘적 인간애는 염근수 문학의 가장 값진 문학의 핵이라 할 수 있다.
작품 전편에 흐르는 순박성, 진솔성, 친근성 등은 기교에 치우치고 손끝으로만 시를 쓰는 후배 문인들에게 다시없는 귀한 선물이라고 할 수 있다.
외형적인 면에서는 7ㆍ5조의 정형율을 유지하였다. 반복법의 사용으로 음악성을 담았다. 지방색을 살린 특유의 언어를 사용하여 향토적 색채를 짙게 풍겼다. 다양한 수사적 기법을 활용하여 사람과 사물의 근본이 하나라는 동양적 사고관을 작품 속에 담았다. 작품 속에 표현된 시각적 이미지에서 자연의 친근미를 드러내었다.
염근수 동요 동시는 1920년대 한국 동요 동시의 흐름에서도 새롭게 조명되어야 할 작가이다. 시적 표현의 방법이 직정적이고 서정적이며 자연 친근성을 토대로 하던 흐름에 이어져 있다. 염근수의 작품은 감각적 이미지를 사용하기 보다는 서사적 이미지를 많이 사용함으로 해서 시적 긴장도가 약한 점 등을 한계점으로 볼 수 있지만 또한 그런 점 또한 넉넉함을 주는 장점도 될 수 있다.
염근수의 동요 동시는 몇 가지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뚜렷하다.
시대의 흐름에 편승하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취향대로 독자적인 시세계를 이루어놓은 점이다.
지역 특유의 모습을 묘사하여 지역색을 살리고 시골 분위기에 딱 알맞은 시어를 사용하여 정감이 물씬 묻어나는 작품은 염근수 시의 색깔이다.
무엇보다도 작품에서 풍기는 휴머니즘적 인간애는 염근수 문학의 가장 값진 문학의 핵이라 할 수 있다.
작품 전편에 흐르는 순박성, 진솔성, 친근성 등은 기교에 치우치고 손끝으로만 시를 쓰는 후배 문인들에게 다시없는 귀한 선물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그는 일제강점기에 민속적 질감을 동요로 형상화하고 지역의 문화를 살려 우리 민족의 얼을 이어가는 소중한 문학적 작업을 한 인물이라 볼 수 있다.
2)민족의 독립을 염원한 아동문학 작품
일제 강점기에 민족 저항시인으로 잘 알려진 윤동주 역시 많은 동시를 썼다. 그러나 강릉에서 태어난 민족시인이며 조국의 광복을 그리다 일본인에게 총을 맞아 사망한 심연수 시인이 있다.
심연수는 1918년 5월20일 강릉시 경포면 난곡리 399번지(현 강릉시 난곡동 399)에서 출생하였다. 부친은 삼척심씨 심운택이고 모친은 강릉최씨 최정배이다. 7세가 되던 1925년, 가족과 함께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던해로 이주하였다. 12세가 되던 1930년에는 만주 간도 밀산을 거쳐 신안진으로 이주한다. 5년 후인 1935년에는 만주 간도 연길현 길안툰으로 이주한다. 길안툰은 현재의 용정이다. 이때가 17세 되던 해였다. 18세에 용정 동흥소학교에 5학년으로 편입한 후 1937년 19세가 되넌 해 3월 4일 용정동흥소학교를 졸업한다. 처음으로 작품을 발표한 것은 1940년 22세 때 만선일보에「여창(旅窓)의 밤」을 게재한 것이다.
고향인 강릉에는 8월 중순 무렵 방문하여 10여일간 머물었다. 이때에 쓴 작품으로 여겨지는 작품들이 있다. 「옛 터를 지나면서」(8월 10일), 「경포대」(8월10일), 「바닷가에서」(8월 14일), 「경호정(鏡湖亭」(8월 15일), 「형제암」(8월 16일), 「새바위」(8월 16일), 「해변 일일(海邊一日)」(8월 16일), 「죽도(竹島)」(8월 17일) 등이다. 이 작품에는 고향을 찾은 시인의 감회가 그려져 있다.
1940년 12월 5일 22세가 되었을 때에는 용정 동흥중학교를 졸업한다. 그리고 졸업 후 다시 고향 강릉을 찾아와 며칠을 머물렀다. 이때의 심경을 일기장에 기록해 두었다.
“아재가 지은 아침밥을 먹고 강릉자동차부를 향해 떠났다. 동녘에서 샛별이 마지막 빛을 지구에 던져주고 있었다. 내가 남대천을 건널 때 새벽하늘을 뒤흔드는 인경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첫 음향을 들었을 때 형언할 수 없는 심사가 가슴에 차올랐다. 첫차는 못타고 다음차를 탔다. 짧으면서도 긴 것 같은 고향 나들이였다.”
강릉을 떠나가는 모습을 글로 남겼다. 형언할 수 없는 심사가 가슴에 차올랐다고 하였다. 유년의 고향, 마음에 담은 고향을 못내 안타까워하는 정이 드러나 있는 글이다.
1941년 23세가 되던 해 2월 일본 유학을 떠난다. 4월에는 일본대학 예술학원 창작과에 입학하고 1943년 7월 13일 일본대학을 졸업한다. 15세이던 그해 겨울 일제의 학병 강제 징집을 피해 만주로 간다. 신안진과 영안현에서 소학교 교사로 근무한다. 1945년 2월 27세이던 심연수는 2월 용정시내 한 예배당에서 백보배와 결혼을 한다. 그리고 8월 영안현에서 용정을 오던 중 왕청현 춘양진에서 피살을 당한다. 1945년 11월 시신을 수습해 용정 토기막 뒷산에 안장하였다.
심연수 시인의 작품이 보존되어 온 것은 그의 동생 심호수의 힘이 컸다. 심호수는 심연수의 둘째 동생으로 평생 농사를 지으며 살아왔다. 그는 심연수의 유고작품들을 항아리에 넣어 땅에 묻어 보관하면서까지 작품을 잘 지켰다.
심연수 사망 후 그의 유작 노트 8권이 남았는데 시 312편 외에 수필 소설 일기 편지 등이 있다.
심연수는 이미 자료 발굴, 시선집 발간, 학술세미나 등으로 상당히 연구가 진행되고 강릉에서는 민족시인 심연수 시낭송대회, 민족시인 심연수 선양사업들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학술세미나 등에서 발표한 몇 몇 학자들의 이야기는 주목을 끈다. 이명재는 심연수를 새롭게 등장한 식민지 시대의 한 사람으로 윤동주와 더불어 일제 암흑기에 꺼져가던 한국민족문학을 불 밝혀 지켜낸 민족문화의 화신이라고 칭송했다. 문효치 역시 우리 문학사에 심연수의 등장은 1940년대 암흑기를 밝혀줄 수 있는 쾌거로 우리 문학사의 공백기에 다량의 작품이 출현됨으로써 이 시대의 문학사는 새로 써야만 할 것이라고 했다.
심연수의 시 작품 중에 「소년아, 봄은 오려니」의 작품은 많은 작품 중에 가장 많이 낭송되고 회자되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심연수가 창작한 시 작품인데 어린이들에게도 읽히는 좋은 동시로서의 가치도 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시적 화자가 어린이 즉, 소년에게 말하는 내용이다. 따라서 동시의 반열에 올릴 수 있는 작품이다.
소년아 봄은 오려니
심연수
봄은 가까이에 왔다
말랐던 풀에 새움이 돋으리니
너의 조상은 농부였다
너의 아버지도 농부였다
전지(田地)는 남의 것이 되었으나
씨앗은 너의 집에 있을 게다
가산(家山)은 팔렸으나
나무는 그대로 자라더라
재 밑의 대장간집 멀리 떠나갔지만
끌 풍구는 그대로 놓여 있더구나
화덕에 숯 놓고 불씨 붙여
옛 소리를 다시 내어봐라
너의 집이 가난해도 그만한 불은 있을 게니
서투른 대장장이의 땀방울이
무딘 연장을 들게 한다더라
너는 농부의 아들
대장장이의 아들은 아니래도……
겨울은 가고야 만다
계절은 순차(順次)를 명심한다
봄이 오면 해마다 생명의 환희가
생기로운 신비의 씨앗을 받더라.
이 시를 읽고 있으면 시적 화자가 소년에게 아주 열심히 봄이 온다는 것을 알리고 있다. 그런데 봄이 왔어도 모든 것이 다 팔린 농부의 아들인 소년의 봄이다. 그렇지만 희망이 있음을 또 알린다. 밭이나 논은 모두 남의 것이 되었으나 나무는 그대로 자란다고 희망의 끈을 보여주고 있다. 이웃집 대장장이의 이야기도 나온다. 그 집 역시 멀리 떠나갔지만 ‘끌 풍구’는 그대로 놓여있다고 희망을 잃지 말라는 의미를 던지는 것이다. ‘내’ 혼자가 아니라 ‘우리’다. 그래서 옛 소리를 다시 내어보라고 한다. 그리고 결정적인 말을 던진다. ‘겨울은 가고 만다’ 그리고 봄이 오면 해마다 생명의 환희가 생기로운 신비의 씨앗을 받더라고 말한다.
소년을 향해 믿음과 굳센 의지의 말을 던지며 봄에 대한 희망을 강력하게 노래하였다. 심연수가 자라온 환경과 생활을 보건대, 단순한 봄에 대한 소망이 아니었다. ‘봄’이야말로 민족의 독립이고 자유의 메시지였던 것이다. 심연수는 왜 어른들이 아닌 소년에게 이 시를 들려주는 것으로 하였을까? 매우 의미심장한 부분이다. 소년이야말로 새로운 나라의 독립된 땅에서 미래를 일구어갈 동력이기 때문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힘차고 강렬하며 그의 시에는 기개나 결기가 흐르는 것을 볼 수 있다. 동시 중에서도 강건하고 늠름한 모습이다. 그런 결기는 선집에 수록된 그의 또 다른 동시라 할 수 있는 「고집」에서도 볼 수 있다.
고집을 써라 끝까지 / 티끌만한 순종도 보이지 말고 / 타고난 엇장을굽히지 말라 / 벽을 문이라고 우기고 /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우기고 / 소금이 쉬어 곰팡이 피고/ 사탕이 썩어 냄새난다면 / 그건 고집없는 탓이지 / 우기고 뻗치다 꺽어진 건 통쾌해도 / 뉘게다 굽석거리는 꼴은 보기 싫도록 역겨웁더라
- 심연수, ‘고집’ 전문 -
순종이 미덕인 사회를 비교해 보면 매우 색다른 일면의 시이다. 암울한 시대 상황에서 순종한다는 것은 곧 일제에 대한 굴종이라는 것을 알기에 심연수는 고집을 쓰라고 하는 것이다.
용정에 살던 윤동주와는 여러 모로 비교되기도 하는 모습이다. 윤동주가 부드럽고 내적 성찰이 강한 시를 쓴 시인이었던 데 비해 윤동주 보다 1년 위인 심연수는 결기와 호연한 기개있는 작품을 썼다. 둘은 비슷한 때에 용정중학교를 다닌 것도 묘한 관계이다. 윤동주가 일본 유학을 했던 것처럼 심연수도 일본 유학을 하였다. 죽고 난 뒤 윤동주가 높이 평가 받은 것처럼 심연수도 사후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한 사람은 옥중에서 사망하였고 한 사람은 총탄에 맞아 사망하였다. 조선시대 성삼문등이 쓴 절명시처럼 그의 시에는 일제에 대한 굴종을 분연히 뒤로 한 채, 호쾌함과 강단(剛斷)이 배어 있다. 이러한 면으로 볼 때 심연수 작품은 항일문학으로 평가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아동문학의 동시로서 손색이 없는 작품임을 감안할 때 강릉아동문학사에 한정할 것이 아니라 일제 암흑기 한국아동문학사에 민족정신이 배인 저항문학으로 평가 받아야 한다는 점이다.
제3절 강릉의 현대아동문학
1. 1960년대, 현대아동문학의 개화기
1960년대 강릉의 아동문학은 김용성, 김원기, 엄기원, 김완기에 의해 개화를 맞이하였다. 제1기 아동문학이랄 수 있는 광복 이후의 강릉아동문학은 1960년에 들어서면서 문을 열었던 것이다.
서울의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 1학년에 다니던 김용성(1938-2008)이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동화 「돌이와 누나」가 당선되었다. 동화를 기점으로 하여 화려한 서막을 올렸다.
김용성은 동시 동화를 포함하여 그리 많다고는 할 수 없는 작품들이지만 거기에는 자연의 모습을 닮은 포근하고 정겹고 따뜻한 인간애가 스며있다. 그는 이러한 작품으로 강릉아동문학의 서막을 열어놓았던 것이다.
강릉의 현대아동문학의 문을 활짝 연 김용성은 어떤 사람인가.
2015년 7월 25일 강릉의 ≪김동명문학관》에서 열린 강원도 작고 문인 재조명에서 정연수는 「김동산의 동시 세계 및 작가의식 연구」에서 매우 상세하게 김용성의 동시세계에 대해 연구한 바를 발표하였다. 김용성은 2001년 월간문학 신인상에 당선되었을 때 ‘김동산’이란 필명으로 응모하였다. 정연수의 연구 발표문 중에 ‘김동산의 생애’, ‘지역문학과 김동산의 문학적 거리’, ‘김동산의 시 세계’ 등에서 많은 부분을 인용 내지 참고하였음을 밝힌다.
강릉에서 출생한 김용성은 1960년 동아일보신춘문예에 동화 「돌이와 누나」가 당선됨으로 문단에 나왔다. 그때가 대학 1년생이었다. 그는 대학생활 서울에서 생활한 것을 제외하고는 모두 강릉에서 지냈다.
강릉중학교를 졸업한 김용성은 중학교 성적이 수석을 할 정도로 뛰어났다. 고등학교는 서울사대 부속고등학교에 들어갔는데 당시로 매우 드문 일이었다. 그러나 그의 건강은 재능만큼 자신이 없었다. 서울사대 부속고등학교에서 건강 때문에 강릉의 강릉상업고등학교로 전학을 하여 강릉으로 내려와 학교를 마친다. 이때 김용성은 인생에 획기적인 스승을 만나는데 고등학교 국어교사인 서근배(1928-2007 徐槿培)이다. 그는 1952년 『문예』를 통해 소설로 등단한 소설가였다. 1955년부터 덕성여고, 상명역, 강릉상업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던 것이다. 강릉상고에 서근보가 근무할 때 김용성은 문학에 대한 영향을 받은 것이다. 서근배는 소설 속에서 인간의 심리적인 면에 매우 디테일하게 표현하였다. 김용성의 동화 『돌이와 누나』에서도 돌이의 마음이 섬세하게 묘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공부에 대한 집념의 끈은 놓지 않았다. 수재들만 들어갈 수 있다는 서울대학교에 합격한 것이었다. 그러나 면접에서 떨어졌다, 면접시험에서 결핵이 있다는 것을 밝혔다가 그것 때문에 떨어진 것이었다. 김용성은 그 일로 고민과 방황을 하다가 다시 도전을 하는데 이번에는 서라벌예술대학이었다. 끝내 그의 노력과 재능은 서라벌예술대학으로 들어가는데 성공하였다. 그는 이번에 그곳에서 소설의 대가 김동리를 만난 것이었다. 김용성은 평소 존경하던 김동리를 스승으로 존경하면서 글쓰는 재미에 한층 깊이 빠진다. 그렇게 글을 쓰던 중 대학교 1학년 때 동아일보신춘문예에 동화가 당선한 것이다.
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강릉으로 내려와 기거하면서 영동공민학교에 들어가 국어 교사를 하였다. 1965년 3월부터는 강일여자고등학교에 국어교사로 근무하는데 그곳에서 교직으로 일생을 보냈다.
김용성은 43세의 나이에 영동중학교 제자였던 임춘자(당시 29세)를 배우자로 맞아 결혼을 하였다. 그 후 아들 김유청, 딸 김시원 외손자 최주안이 있다.
졸업 후에 크리스마스 카드를 선생님께 보내곤 했어요. 그러나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혼자의 몸인 걸 알고 선생님 곁에 있겠다고 말했지요. 그 말을 듣고도 선생님은 완강하게 거절은 안 하더라구요. 중매는 많이 들어오는데, 선생님은 자신의 병력 때문에 자신감이 없어서 선뜻 응하지 못하고 혼자 살았던 거지요.
그런데 술을 그렇게 많이 마시는 줄은 몰랐어요. 술을 무척 좋아했어요. 술이 1년 365일 만땅이었어요. 술을 마시고 수업을 할 정도로 술을 좋아했어요. 동료교사와 어울려 술을 마시다가 취하면 으레 동료들을 집으로 데려와 더 마셨어요. 소주를 얼마나 좋아했는지 집에는 소주병으로 그득했어요. 그걸 고물장수에게 건네주면 술집하는 집이냐고 물을 정도였어요.
위의 말은 시인 정연수가 집을 방문하여 자택에서 부인 임춘자 와의 면담에서 나온 말이다.
술을 많이 마신 것은 아마 오래 살지 못한다는 생각 때문에 더 마셨는지도 모른다고 하였다. 1985년 김용성은 당뇨와 결핵 등의 지병이 악화되면서 동인병원에 2개월 입원하였다. 그로부터 5년간 요양을 위해 5년 간 휴직을 한 후 다시 복직을 하여 교단에서 교사로 활동하다가 1999년 8월 퇴직을 하였다. 퇴직 후에도 교직에 대한 애정이 있어서 기간제 교사로 근무하다가 2008년 12월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작고 1년 후인 2009년 12월에는 유고 동시집 『산골에 사는 옥이』를 발간했다.
강릉은 김용성이 성장에서부터 삶의 생활 터전으로 살아가는데 자리를 내주었다. 그러나 그의 생활은 직장인 학교와 집, 그 사이에 동요들과의 만남이 고작이었다. 동료와의 만남에서는 술이 그 사이에 놓여있었다.
성품이 조용하고 엄하고 사색적인 면이 있으면서 꼼꼼하였다. 또한 검소하고 정직하고, 올바른 잣대로 생활하였기에 부인 역시 늘 검소한 생활로 가정을 이끌어왔다. 아버지인 김용성의 성품은 자녀들에게나 부인에게는 가끔 힘들게 하는 이유가 되기도 하였다.
나서지 않는 조용한 성품은 강릉의 문단생활에서 거의 알려지지 않는 존재로 살아왔다. 강릉지역에서는 선두주자로 문단에 얼굴을 들여 민 그였지만 그의 존재를 아는 문인들은 거의 없었다. 또 동화작가로 등단하여 50년 가까운 기간 동안 동화를 발표한 작품은 손에 꼽을 정도이다.
그가 발표한 동화를 보면 다음과 같다.
1960.1.《동아일보》,「돌이와 누나」, 동아일보신춘문예 당선작.
좋아하던 누나를 위해 선물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생긴 오해를 감성으로 풀어낸 작품이다.
1988. 「트럭과 해수욕」,아동문학평론 48호, 가을.
달려가는 트럭에 올라타고 해수욕장을 가던 경험을 동화화 하였다.
1989. 「아버지와 친구들」,아동문학평론 53호, 겨울
뭇 매를 때리는 졸업식의 전통적인 풍습을 다루며 심리묘사와 우정의 아름다움을 그린 글이다.
1989. 「토실이와 별명」, 월간 아동문학 9월호.
통통한 신체 때문에 상처를 받은 딸 아이에 아버지가 개입하며 벌어지는 이야기이다.
1990. 「막내 삼촌」, 아동문학평론 겨울호.
첫사랑의 기억과 순수한 연애 감정을 다룬 이야기이다.
1992. 「골목 안 이야기」, 아동문학평론 겨울호.
시험으로 인한 스트레스를 겪는 자식과 부모의 갈등을 가로등의 시선으로 바라본 이야기이다.
1993. 「크리스마스 카드」, 월간 소년문학 12월호.
유치원 선생님을 대신하여 딸에게 답장을 쓰는 이야기이로 아빠의 심리묘사가 뛰어나다.
1994. 「덕보와 개」, 월간 소년문학 8월호.
아내와 자식을 잃고 정을 붙여 키우던 강아지까지 일은 슬픔을 다룬 동화이다.
1996. 「난쟁이 왕」, 월간 소년문학 10월호.
희망이 있는 한 좌절은 없다는 메시를 담은 동화이다.
1998. 「눈」, 월간 소년문학 1월호.
먹고 싶은 것을 꿈에서 만나기 위해 잠을 청하다가 눈이 내리는 것을 보고 모두 반가워하는 내용이다.
1999. 「젓가락 행진곡」, 월간 소년문학 1월호.
어머니와 단둘이 살던 아이가 어머니와 젓가락 행진곡을 치는 따뜻한 가족애가 우러나오는 이야기이다.
2004. 「도둑 잡은 이야기」, 학산문학 가을호.
방귀 때문에 도둑을 잡을 수 있었던 이빠의 이야기이다.
2005. 「농부와 아들」, 학산문학 봄호.
게으른 아들에게 스스로 일하는 법을 가르치는 아빠의 이야기이다.
2007. 「매미의 꾀」, 문학공간 9월호.
어른에게 잡혔다가 꾀를 내어 도망가는 매미의 이야기이다.
1960년 신춘문예 당선이후 2007년 까지 14편 남짓 작품을 발표하였다. 그리 많은 작품을 발표한 것으로 볼 수 없다. 아마 건강상의 이유로 집필 활동에 주력하지 못하였던 것 같다. 또한 2001년 월간문학 신인상에 동시를 응모하여 당선한 것을 보면 좀 더 짧은 시간에 느낌을 위주로 짧은 글을 쓸 수 있는 동시가 체질적으로 더 맞았던 것으로 보인다. 2001년을 전후하여 동시를 많이 집필 한 것으로 보인다.
가장 먼저 강릉문단에 동화로 깃발을 내건 김용성이지만 그는 생전에 동화집이나 동시집을 내지 못하였다. 또한 강릉 문인들과의 교류도 없었다. 강릉문인협회나 관동문학회 조약돌아동문학회 솔바람 동요 문학회 등에도 얼굴을 들이미는 법이 없었다. 그저 소리 없이 고독한 창작 공간에서 그만의 세계를 향유하였다고 볼 수 있다. 아내 임춘자는 강릉여성회관과 강릉교육문화관의 창작교실에서 문학수업을 받아 2005년에는 『현대시조』에서 시조 작품으로 등단을 하였다. 부인 임춘자가 강릉교육문화관에서 등단축하식을 할 때엔 직접 오셔서 기쁜 마음으로 아내의 등단을 축하해 주기도 하였다.
김용성의 대표적 동화라 할 수 있는 「돌이와 누나」는 가족간의 따뜻한 정서를 녹여낸 동화이다.
서울에서 대학 생활을 하던 누나가 방학에 내려와 돌이에게 학용품을 선물한다. 돌이는 자신도 누나에 대해 선물을 준비한다. 그것은 자신이 숲속에서 딴 산딸기이다. 산딸기를 종이에 싸들고 누나에게 간다. 누나의 친구인 명순 누나의 집을 찾아갔을 때 돌이는 누나에게 실망을 한다. 누나가 명철이를 방에서 업고 나오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누나가 자신보다 명철이를 더 아끼는 줄 알고 사랑의 마음은 미움의 감정으로 바뀐다. 그러나 자신의 생각이 오해라는 것을 알고 오해를 풀며 누나에 대한 따뜻한 정이 더 깊어진다는 내용이다. 가족 간의 두터운 정을 그려 한국 전통가족의 아름다운 미적 정서를 동화로 표출한 점이 주목을 끈다. 디테일한 심리묘사에서 보여주는 장면을 통해 갈등과 고민을 극복하고 화해와 소통으로 이끌어내는 점에서 아동문학의 가족애 적인 서정성을 이끌어냈다는 점에 의의를 찾을 수 있다.
김용성은 2001년 『월간문학』에 동시「산골에 사는 옥이」, 「풍선」등의 작품이 당선되면서 그 후부터 꾸준히 동시 창작을 하였다. 사후에는 배우자 임춘자(시조시인)가 유고 동시집『산골에 사는 옥이』를 2009년 』《아동문학세상》에서 펴냈다.
그의 동시들은 생활과 자연 속에서 길어낸 동심의 표상들이다. 특히 가족의 사랑을 나타낸 작품이 눈에 띈다. 김용성은 생활 경험을 통해 ‘동생’이란 작품에서 가족의 소중함과 사랑을 그리고 있다.
누나 숙제하는 데/방해만 논다고/꾸중 듣다가 잔다.//아빠 책 읽으시는데/시끄럽게 군다고/야단맞다가 잔다.//언제 꾸중 들었더냐/언제 야단맞았더냐/서운한 빛 눈곱만치도 없다.//바보처럼 입 벌린 채/식식- 색색-/천하에 태평스런 얼굴이다.
- 김용성 동시집 「산골에 사는 옥이」,아동문학세상. 2009 -
철둑 아래 조그만 판잣집에/근호가 살았지/근호 아버지는 신기료 장수/하루 종일 좁은 가겟방에 쭈그리고 앉아/헌 구두를 고치는 신기료 장수/젊은 새 어머니에/새로 생긴 아기 여동생도 하나/네 식구가 성냥갑 같은 단칸방에서 오밀조밀 살았지/아프리카 흑인처럼 까맣고/입술도 두툼하게 튀어나온 근호 튼튼하고 힘이 세서/까부는 아이 없던 근호/노상 아버지 가게 앞에서/구슬치기하거나/자치기를 하며 놀던 아이/그때마다 늘 따거나 이기던 아이/그러다가 심부름을 시키면/냉큼 다녀오고/남의 차례일 때에는/올챙이 닮은 배 불룩 내밀고 서서/먹은 음식 끄윽 다시 올려/되새김질하면서 구경하던 아이 /성이 나면 왕방울 같은 두 눈을/무섭게 부라리지만/절대로 절대로 주먹질은 안 하던 아이/내 친구 근호
- 김용성, 「근호」전문 -
동시에서도 순박한 아이들의 모습을 그려내었다. 도시의 가난한 생활속에서 자라나는 어린이들의 생활모습의 한 단면이 사실적 묘사로 고스란히 담겨있다.
강인하면서도 부드러운 아이들의 모습이다. 신기료장수 아버지 밑에서 또 단칸 방에서 네 식구들이 오밀조밀 살아가고 있지만 이 작품에서도 동화 「돌이와 누나」에서 보듯 따뜻한 가족애가 묻어나온다.
눈이 소복소복
김용성
화롯가에 정답게 빙 둘러앉아
재미난 얘기
도란도란 꽃피우라고
저녁부터 솜 눈이
소복소복 내렸다
아침에 엄마가 장 뜨러 갈 때
장독대 옆에
발자국 찍어 놓으라고
밤사이 소복소복
눈이 내렸다
아이들 마당에 모두 나와
두 손 호- 호-
눈사람 만들며 놀라고
밤사이 소복소복
눈이 내렸다
겨울 풍경 방학 숙제
보고 그리라고
산 위에도 냇가에도
밤사이 소복소복
눈이 내렸다
어린이들은 눈이 내리면 즐거워한다. 하얀 솜 같은 눈은 보기에 깨끗함과 즐거움을 준다. 동심을 잃지 않은 어른들도 눈이 내리면 기뻐한다. 눈은 마치 하늘에서 사람들에게 주는 겨울의 선물처럼 말이다. 엄마가 장 뜨러 갈 때 눈은 엄마 발자국을 장독대 옆에 만들어놓는다. 또 아이들이 눈을 뭉쳐 눈사람을 만들라고 눈이 폴폴 내리는 것이다. 어디 그 뿐인가 방학 숙제로 내 준 겨울 풍경을 그리라고 눈이 내려오는 것이란다. 각 연마다 즐거움과 정겨움이 담겨 있고 하얀 동심이 나타나 있다. 시는 많아도 자꾸 읽고 싶은 시들은 적다. 이 동시는 하얀 겨울을 그리워하며 자꾸 읽고 싶은 동시이다. 1950년대와 60년대의 산골마을의 눈 풍경이 소담스럽게 그려져 있다. 산골 마을의 눈 내리는 모습을 떠올리며 마냥 즐겁고 행복한 미소를 지을 수 있다.
산골에 사는 옥이는 / 계곡물처럼 / 졸졸거리며 산다. // 산골에 사는 옥이는 / 산새처럼 / 재재거리며 산다. // 산골에 사는 옥이는 / 잎새에 비치는 / 햇빛처럼 / 반짝거리며 산다. // 산골에 사는 옥이는 / 그대로 / 순진한 자연이다.
- 김용성,「산골에 사는 옥이」 -
김용성(김동산)이 아동문학에서 그려내고자 했던 것은 계곡물의 맑은 물소리처럼, 산새처럼, 잎새에 비치는 햇빛처럼 꾸밈이 없는 산골소녀의 모습이다.
시인은 어느 날 산골소녀 옥이의 모습으로 호숫가에 걷다가 나뭇가지에서 들려오는 새들의 노랫소리가 재미있어서 자신도 한 마리 새가 되어 보기도 하고 햇빛에 반짝이는 나뭇잎이 되어보기도 한다. 그러면서 동심의 흥겨움을 표현하였다.
강릉아동문학의 새 지평을 연 작가와 작품으로는 단연, 김원기(金元起 1937 – 1988)가 있다. 김원기의 동시 작품은 학 같이 기품 있는 작품들이다.
문학적 배경에 관한 글은 대부분 엄기원이 쓴 김원기론을 참고하였다. 김원기는 1937년 강릉시 구정면 여찬리에서 출생하였다. 아호는 목(牧), 금서(琴書)이다. 김원기는 강릉사범 병설중학교를 다닌 후 1955년 강릉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초등학교 교직생활을 하였다. 교직에 있으면서 방송통신대학을 졸업하였다. 초등 교단에서 작고할 때까지 강릉, 삼척, 평창 등에서 교사, 교감, 장학사, 교장등을 역임하였다.
평화로운 가정에서 외아들로 태어나 어른들의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그래서 품성도 밝고 깨끗함을 지녔는데 이런 품성이 아동문학의 밑바탕이 된 것 같다. 김원기는 중학교에 다닐 때부터 문학에 대한 취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 중에 강릉사범학교를 다니면서부터 문학을 가까이할 수 있는 훌륭한 스승을 만난 것이 기회였다. 그 당시 강릉사범학교는 후일 한국문학의 거목이 된 황금찬과 최인희, 김유진, 이인수 등이 있었다. 김원기가 이들로부터 지도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
김원기의 본격적인 문학활동은 196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동시 당선이 되면서이다. 이는 개인의 영예였을 뿐 아니라 강릉지역 신기원을 이룩한 문학사의 쾌거였다. 이렇게 문단에 데뷔한 지 6년 만인 김원기는 1968년 5월 5일 첫 동시집인 『풍선을 한 다발 씩』동시집을 상재한다. 5월 19일에는 강릉극장 옆에 있던 ≪돌체 다방≫에서 출판기념회를 연다. ‘돌체’는 이탈리아 말로 ‘달콤하다’라는 뜻이다. 문단에 나온지 7년만에 첫 동시집을 이곳에서 출판기념회를 한 것이다. 이곳에서 회원들과 김원기의 시들을 모아 시화전도 열었다. 고성 아야진에 있던 박용열도 먼 길을 찾아와 축사를 해 주었다. 어린이들은 김원기의 곡이 붙여진 김원기의 동요를 부르기도 하였다. 다채롭고 재미있는 출판기념회였다.
김원기는 작품도 많이 썼고 지면 발표도 활발하였다. 첫 동시집을 낼 당시 200여편의 작품을 써놓았고 이미 100여편의 작품은 신문과 잡지에 발표하였다.
《조약동아동문학회》는 김원기를 중심으로 회원들이 모여 합평회도 하고 작품집도 발간하였다. 그러니 《조약돌아동문학회》는 김원기를 문학가로 데뷔시켜준 스승이기도 했던 것이다.
1980년엔 시 전문지『현대시학』에서 시 추천을 완료하여 성인 시인으로 등단하기도 한다.
1984년엔 한국 문단에 동요 문학이 퇴색되어 가는 것을 보고 안타까워하는 나머지 강릉에서 동요 창작 운동을 벌인 것이 《솔바람동요문학회》이다. 그래서 1984년 여름에 문학회를 탄생시키고 김원기가 실질적으로 이끌어왔다. 그렇지만 이끌어 갔다기보다는 뒤에서 후배들을 격려하고 정신적인 어른으로 활동하였던 것이다. 이런 행동은 의도적이라기보다는 어릴 때부터 자라온 선비적인 가문과 그의 심성에 기인한 것이었다.
1963년 4월에는 《조약돌아동문학회》 창간 문집을 발간하였는데 첫 머리말에 쓴 글을 보면 그의 소박하고 아름다운 심성이 잘 나타나고 있다.
깨끗하게 산다는 것은 오래도록 동심을 잃지 않고 산다는 것이 아닐까? 조약돌이 크기를 기다린다는 것은 깨끗하게 살기 위함에서이다. 귀엽게 생긴 돌을 땅에 묻어두고 아침 저녁으로 물을 준다. 한 달 쯤 뒤에 흙을 파 본다. 그새 얼마만큼이나 더 컸는지 알 수 없다. 이것이 꼭이 크기를 바라는 건 아니다. 무엇인가 해보고 싶을 뿐이다. 그러니 우리의 작업이 결코 헛되지는 않으리라.
1963. 4, 14.
1986년에는 두번 째 동시집인 『산 위에서』를 아동문예사에서 냈다. 그리고 작고한 뒤때 유고 시집 『환한 햇볕아래 살아 나오리라』는 시집을 대성문화사에서 같이 출간한 것과 동시에 유고동시집인 『귀뚜라미 시계』가 대성문화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 이 세권의 동시집은 김원기의 동시 세계를 한눈에 들여다볼 수 있다.
김원기의 동시 「산위에서」는 초등학교 교과서에 한동안 실려 있던 작품이다. 또한 이 작품은 강릉 경포호수를 바라보며 호숫가에 시비로 우뚝 서 있다.
1990년엔 동화집 『거꾸로 가는 달력』이 《꿈동산》에서 출간되었다. 이 동화집에는 「시계탑 속에 들어간 임금님」, 「거꾸로 가는 달력」,「엿장수」,「감기」,「분갈이」,「땅속 나라의 꿈」,「계집애 같은 아이」,「새 학년」등 8편의 동화가 실렸다.
김원기의 작품세계를 보기위해 먼저 첫 동시집「풍선을 한다발 씩」(문왕출판사.1968)를 보았다. 여기에는 희망과 즐거움, 꿈이 가득 차 있다.
5월의 아가들은/한겨울을/나무 눈 속에서 산다.//나무가 눈 뜰 때/5월의 아가들은/창으로 빠꿈이 얼굴을 내민다.//“아이 눈 부셔,/3월의 해님!”//“저 나부끼는/4월의 깃발을 봐!”//“5월의 바람님이/풍선을 나누어 주네!”//“정말!/우리 모두 나가 보자.”//5월의 아가들은/싱그러운 초록빛 날개 옷을 펴고/나무에서 호롱호롱 날아나왔다.
-김원기, 「5월의 아가」 -
‘5월의 바람’은 신선한 상상력으로 봄의 생명감을 나타내고 있다. 김원기의 절친한 고향 친구인 엄기원은 김원기의 첫 동시집 「풍선을 한다발씩」발문에서 ‘푸르고 싱싱한 시어들이 우리들 가슴에 벅차오르는 감동을 주고 있다.’고 하였다.
산위에서 보면/바다는 들판처럼 잔잔하다./그러나 나는 안다./새싹처럼 솟아오르고 싶은/고기들의 설렘을.//산위에서 보면/들판은 바다처럼 잔잔하다./그러나 나는 안다./고기비늘처럼 번득이고 싶은/새싹들의 설렘을.//산위에 서 있으면/나는 어쩔 수 없이 순한 짐승/그러나 너는 알 거야./한 마리 새처럼 날고 싶은/내 마음의 설렘을.
-김원기, 「산위에서」 -
이 동시는 초등학교 국어교과서에 수록되었던 작품으로 강릉의 경포 호수 주변에 시비가 세워져 있다. 동시에 나오는 고기와 새싹은 어린이의 꿈과 희망을 상징한 표현이다. 실감나게 그려내고 있다.
김원기는 ‘풍선을 한다발 씩’ 의 책 말미 자서에서 어린이의 꾸밈없고 자연스런 표정을 읽으며 동시를 쓴다고 하였다. 이런 표정은 아이들의 얼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때로는 나뭇가지를 스치는 바람에도 있고, 둥둥 뜨는 풍선에도, 간들간들 웃는 꽃잎에도 있다고 한다.
아래에 제시한 동요는 1984년 7월 14일에 《솔바람동요문학회》에서 내놓은 창간호에 실은 김원기의 동요「7월」이라는 작품이다.
7월은 자수정처럼 동그란 얼굴 / 동그란 얼굴 하늘에 날아 / 하늘이 동글동글 부풀어 오르지요 // 7월은 자수정처럼 맑은 눈빛 / 맑은 눈빛 하늘에 배어 / 하늘은 보랏빛 호수가 되지요 // 7월은 자수정처럼 굴러가는 웃음소리 / 굴러가는 웃음소리 하늘에 메아리쳐 / 하늘은 만도정 울림통이 되지요
일정한 음수율로 리듬감을 살린 것으로 동요라는 것을 대뜸 알 수 있다. 그러나 비유의 적절함과 신선한 표현력의 획득으로 작품성이 뛰어난 동시라는 것을 이내 알 수 있다.
엄기원은 김원기의 동요 동시적 특질을 지극한 인간 사랑, 향토적 소재, 참신성, 목가적 세계 등으로 말하고 있다. 좀 더 그의 말을 인용해 서술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지극한 인간 사랑이다. 동시나 시에서 사람이나 생물, 혹은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은 거의 필수적이고 보편적이라 할 수 있지만 김원기의 인간 사랑, 동심 사랑은 지극하다고 할 수 있다. 매우 많은 동시들이 순수하고 소박한 인간 사랑을 담고 있는 게 특징이라 하겠다.
둘째는 향토적인 소재의 시들이라 할 수 있다. 다른 동시인들이 다루고 있는 보편적인 동시 소재와 흡사하지 않은가 하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시인의 보는 눈과 생각하는 마음은 하늘과 땅 만큼 거리감을 느낄 수 있다.
김원기 동시의 전원적인 소재는 가장 순수 소박한 자연의 모습이며 그가 일생의 절반을 살아온 고향이기도하다. 즉 그가 태어나서부터 자라고 결혼하여 아들을 낳아 키울 때까지 30년 간 기 세월을 살아온 고장, 그 고향에 대한 향수이기도하고 본능적인 애향심이기도 할 것이다.
그의 동시집 3권 안에 수록된 일련의 동시들은 자연의 아름다움이나 향토적인 정경과 마음을 담고 있다. 그의 작품속의 자연관은 지극히 평화롭고 회화적인 면이 많다. 그의 시적 회화성은 매우 뛰어나고 아름답다.
김원기의 작품을 당선 시킨 한국일보 신춘문예 심사를 맡았던 이원수는 김원기의 동시집 『풍선을 한 다발씩』서문에서 김원기의 동시 작품을 ‘마음속의 사랑으로 쓴 시’ 라고 말하고 있다
- 『풍선을 한 다발 씩』 이원수의 서문 일부 -
김원기의 동시는 오월의 나뭇일 같이 싱싱하고 들에 핀 풀꽃처럼 향기로운 시입니다. 강원도의 맑은 공기, 청초하고도 부드러운 사람들의 마음씨가 이런 시를 빚어 냈을까요?이 시인은 붓끝의 재주로 시를 쓰지 않고 마음 속의 사랑과 영롱한 눈으로 시를 썼다고 하겠습니다.
- 이하 생략 -
세 번째로 김원기의 동시는 소재와 시어의 참신성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소재나 시어의 참신성은 이 세상 아무도 쓰지 않는 새로운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가장 가깝고 가장 쉬운 것에서 누구나 흘러보내기 일쑤인 일상에서 건져내는 시작(詩作)의 재주를 말하는 것이다. 일련의 동시들을 읽어 보면 그가 얼마나 동시 한 편을 쓰기 위해 많은 것을 찾고 생각했는가를 짐작케 한다. 시속에 담고 있는 언어들이 일상의 언어이면서도 풀밭에 향기로운 꽃처럼 뛰어난 것들이다.
눈물방울만한
초롱꽃 한 송이가
온 숲을 환히
밝혀 주네요.
나무숲을 뚫고
겨우 겨우 내려와
초롱꽃 속살까지 닿은
햇살 한 방울
- 김원기,「초롱꽃」전문 -
언어의 참신성으로 하여 동시가 신선함을 주고 있다. 초롱꽃 속살까지 내려와 닿은 햇살 한 방울은 사랑이다. 그 한 방울의 사랑이 온 숲을, 온 세상을 밝혀주는 것이다. 어린이의 순수한 눈망울 하나, 손짓 하나가 이 세상을 밝히는 등불과 같은 뜻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지 않은가. 작은 몇 낱말을 통해 커다란 빛의 세계를 드러내는 김원기 시인은 천상의 시인이라 할 수 있다.
네 번째로 김원기의 동요는 목가(牧歌的)인 세계를 그리고 있다고 엄기원은 말한다.
이번에는 김원기의 동요에 대해 살펴보자.
김원기는 엄기원의 연구조사에 따르면, 첫 동시집인 『풍선을 한 다발씩』엔 4편의 동요가 실리고 두 번째 동시집 『산위에서』 속에도 4편의 동요가 실렸다. 그러나 유고동시집인 『귀뚜라미 시계』에는 무려 20편의 동요가 수록되었다.
김원기의 3권 동시집에는 28편의 동요가 실려있다. 그러나 솔바람동요문학회가 발족되면서 작고하기 전까지 발표한 동요를 합하면 아마 50여편의 동요가 발표되었으리라고 엄기원은 말하고 있다.
김원기 동요의 두드러진 특징은 자연에 대한 아름다움을 노래하거나 목가적인 모습이다. 김원기의 호는 ‘목(牧)’이다. 나중에 ‘금서(琴書)’라는 호를 쓰기는 했으나 80년대 초까지 매우 즐겨 ‘목(牧)’이란 호를 사용하였다. 김원기의 성품을 잘 대변하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매우 예절 바르고 지극히 유고적인 선비이며 교육자였다. 그렇지만 풀밭에 뛰어다니는 풀무치나 사마귀, 나비와 벌 등 곤충을 사랑하는 동물애호가이며 마음은 자유주의자였다.
종달새야 / 더 까맣게 / 올라가 보렴 //
구름 밭엔 / 구름 밭엔 / 무얼 심었나//
종달새야 / 거기서 / 내려다 보렴 //
보리밭에 / 내가 선 게 / 뵈나 안 뵈나
- 김원기,「종달새」전문 -
동요 「종달새」에서 보이는 것처럼 이러한 그의 목가적인 성품은 동요 속에 그대로 비쳐져 나타나고 있다. 깔끔하고 정제된 언어로 보리밭과 종달새의 이미지를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어린이의 상상력을 한껏 부풀게 하는 김원기 동시의 시적 자유는 하늘에 닿을 만큼 높고 푸르다.
김종영 역시「김원기 선생님의 동요․동시 분석 탐구」에서 그의 작품은 의인화한 작품이 많고 매우 동화적이라 하였다. 그것은 그가 동심적인 눈으로 세상을 보고 동화적인 상상력으로 동요와 동시를 창작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김원기는 한권의 동화집을 내었다. 『거꾸로 가는 달력』이다. 그의 동화는 티 없이 맑은 동심의 세계를 동시로 표현한 데서 더 나아가 서사적 판타지로 상상의 세계를 재미있게 드러내었다. 그의 동화들 역시 맑고 순수한 동심나라에 대한 지향을 그렸다. 모두가 행복한 동심 속에서 꿈꾸며 살아가기를 바라는 것이 김원기의 서원(誓願)이었는지도 모른다.
후배인 박은수(서울 과학기술대학교 신소재공학과 명예교수)는 김원기의 시속에는 가족 사랑이 담겨있고 티 없이 맑은 동심이 세계를 그려내어서 읽는 이에게 신선한 감동을 준다고 하였다.
김원기 동시의 대표작으로 손꼽을 수 있다면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인 「아기와 바람」 그리고 「산위에서」를 들 수 있다.
아기와 바람
김 원 기
뙤약볕이 쬐는
한낮입니다.
아기 방 앞에
바람이 찾아왔습니다.
"아기야,
혼자 심심했지?"
그러나 방에선
대답이 없습니다.
쌔근 쌔근 쌔근
숨소리는 들리는데-
바람은 가만히
방 안을 엿봅니다.
"애개개, 네 활개 활짝 펴고
한잠 드셨네."
바람은 사뿐
아기 곁에 가 앉습니다.
가만 가만 가만
부채질을 해 줍니다.
가슴을 토닥이며
자장가도 불러줍니다.
그러다 바람도
졸음이 왔습니다.
아기 곁에 가만히
누워 버렸습니다.
- 196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
이 작품은 2005년 3월 5일 ≪한국명작동시선정위원회≫에서 선정하여 예림당에서 묶은 『100년 후에도 읽고 싶은 한국 명작 동시』에 수록된 105편 중의 한 편이다.
김원기는 1950년대와 60년대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웠던 시대를 살아냈다. 그것은 또 한편으로는 아동문학가에게는 사물을 보는 순수성의 극대화를 지향할 수 있는 에너지이기도 하였다. 초등학교 교단에 서면서 생활에 큰 어려움 없이 지낼 수 있었기에 그는 문학에 온 힘을 쏟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결과 그가 이루어낸 것은 실로 값진 것이었다. 한국 아동문학사에서도 선두 주자로 달려 나갈 수 있었고 맑은 시심은 동심과 어우러지며 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었다. 강릉아동문학사에서 예술성 높은 본격 창작 작품으로 강릉아동문학의 새 지평을 열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뛰어난 작품성과 겸손한 성품은 한국 동시(童詩) 문단의 현대성에도 크게 기여하였고 후배 문인들에게는 전범(典範)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1960년대 강릉아동문학을 성숙시킨 인물은 엄기원(嚴基元1937 - )이다. 엄기원은 아동문학이란 외길 인생에서 꿋꿋하게 문학을 영위하여왔다. 강릉에서 서울로 이직한 후 서울에서 한동안 초등학교 교편을 잡았다. 그후 교직을 그만 두고 한국아동문학연구소를 개설하고 『아동문학세상』이란 아동문학 전문잡지를 계간으로 발행하였다. 한국아동문학연구소에서는 많은 일을 하고 있지만 전국 아버지 어머니 동화구연대회를 개최하여 우리나라 동화구연에 성숙한 기반을 마련하였다. 또한 『아동문학세상』에서는 많은 아동문학 작가를 발굴하고 아동문학가들의 작품 발표기회를 제공하여 한국아동문학을 활짝 꽃피우는데 성공한 원로아동문학가이다.
엄기원의 아호(雅號)는 남천(南川)이다. 아호는 아동문학가 어효선 선생님으로부터 받았다. 본관은 영월(寧越). 1937년 1월 10일 정선군 임계면 송계리에서 태어났다. 3남 2녀중 맏이다. 어릴 때는 아버지의 직장을 따라 거주지를 자주 옮겨 다녔다. 강릉시 구정면 제비리 구정초등학교에서 졸업하였다.
엄기원은 김원기가 196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동시가 당선된 그 다음해인 1962년, 같은 신문인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골목길」이 당선된다. 엄기원은 1962년 한국일보와 경향신문 신춘문예 동시 부분에 응모하였는데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동시 「골목길」이 1963년 1월 1일자 신문에 당선작으로 발표되었던 것이다. 심사위원은 마해송, 김영일이었다.
강릉에서는 1961년과 1962년이 아동문학에 더할 나위 없는 경사가 있은 해였던 것이다.
엄기원은 어려서 부친이 직장 이동이 잦아서 자주 이사를 하였다. 정선군의 ‘강창회 상회’란 곳에서 일을 하셨다. 그러다가 묵호의 ‘관동택시’ 영업소장으로 자리를 옮기셨다. 이때 엄기원 역시 아버지를 따라 묵호초등학교에 입학한다. 그러나 묵호에서 1학년을 마치니 아버지의 직장이 바뀐다. 양양의 철산으로 옮긴 것이다. 양양의 상평초등학교로 전학을 한다. 3학년 까지 그곳에서 다니며 해방을 맞는다. 얼마 후 조부모님이 계시는 구정면 제비리로 돌아온다. 그곳에 있는 구정초등하교에 전학을 와서 그곳에서 졸업을 한다.
엄기원은 아버지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는다. 생활예절에서부터 교육 전반에 이르기까지 아버지는 가르침을 받았다. 아버지는 확고한 교육철학을 가지고 계셨다.
「스토리문학」이란 문예지에서 다음과 같은 인터뷰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다.
당시 친구의 편지를 받아가지고 기분이 너무 좋아 물고기 배따듯이 옆으로 쭉 찢어서 옆구리로 편지를 꺼내 보이니까 가위를 가져오셔서 ‘얘, 기원아 이리 와봐라’ 하시며 편지라는 것은 보낸 사람에 대한 예의이다. 그러니 ‘이렇게 위를 잘라서 정성들여 자르고 그 편지봉투를 두었다가 꽃씨도 넣어두고 씨앗도 넣어두고 하듯 재활용을 하는 것이다.’라 가르치셨어요.
‘반드시 주소는 똑바로 쓰되 보내는 사람의 주소는 꼭 자기의 이름 주소보다는 크게 쓰고 자신의 주소는 작게 써야 하며 반드시 정자로 써야 한다. 그리고 정(鄭)씨나 강(姜)씨는 반드시 정자로 써 주어야한다는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또 ‘이름자는 반드시 정자로 써야지 약자로 써서는 안 되고 한자로 모른다면 차라리 한글로 쓰는 것이 좋다’하시고, ‘우표를 바르게 붙이지 않는 것은 모자를 삐뚜로 쓰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셨지요.
엄기원은 양양의 상평초등학교에서 3학년까지 다니다가 4학년부터 6학년까지는 강릉시(당시는 강릉군)구정면 제비리 구정초등학교를 다녔다. 학교생활은 학습장 정리도 잘하고 규칙을 잘 지키는 모범생이었다. 아버지는 당시 구정면장을 지내었기에 매우 유복하게 자랐고 할머니 할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지냈다.
학교의 학예발표회 때는 독창을 하기도 하였다. 이미 어릴 때부터 음악을 좋아하였다. 그래서 강릉사범학교를 다닐 때에도 문예반에 들어가지 않고 합창반에 들어갔다. 음악에 대한 집념은 나이가 들어서도 이어졌다. 《디지털 호른》이란 악기로 문인들 행사 때에 연주를 들려주기도 한다. 음악은 어릴 적부터의 꿈이었는데 현재는 꿈을 이룬 ‘어른 소년’으로 행복해 한다.
1949년 7월 구정면 구정초등학교, 1952년 3월 강릉사범 병설 중학교, 1955년 강릉사범학교를 졸업한 후 강릉지역에서 교편생활을 시작했다.
·1955년 3월 강릉사범학교 본과 졸업하면서 초등학교 2급 정교사 자격을 받고 고향마을 제비초등학교 교사를 시작으로 강릉의 묵호·사천·강릉초등학교에서 12년간 교사 생활을 한다.
아동문학은 강릉사범학교를 졸업한 후 교직에서 어린이들의 문예지도를 하면서부터였다. 강릉의 사천초등학교에서 4년 동안 근무하다가 강릉초등학교로 발령이 났다.
1960년 3월에는 강릉에서 김원기, 엄성기, 최종숙, 박은수, 박영규, 김기숙, 황태근 등과 <조약돌> 문학동인회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엄기원은 강릉초등학교에서 근무할 당시 서울의 추계초등학교에서 채용하겠다는 연락을 받고 이후, 추계초등학교에서 근무한다. 1968년 9월부터 1981년 8월까지 13년간 서울의 추계초등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한다.
그리고 13년간의 교사 생활을 정리하고 고심 끝에 아동문학연구 발전에 힘쓰기로 결심을 한다.
드디어, 1982년 2월, 염리동에 있는 3층 옥탑방에 10평짜리 사무실을 열고 《한국아동문학연구소》를 개설하였다. 그리고 첫 행사로 ‘전국 할아버지 할머니 동화구연대회’ 를 열었다. 1984년 3월 계간지 『아동문학연구』를 창간한 이후 2005년 10월에는 『아동문학세상』으로 개칭한다.
1986년 1월엔 한국문인협회 아동문학분과 위원장에 선출된다.
1987년부터 2001년까지 교육부 초등국어 집필 편찬 심의위원을 지냈다.
2005년 7월엔 엄기원 육필시비가 충남 보령 모산 한국육필시 공원에 세워졌다.
엄기원이 받은 상으로는 ·제7회 한정동 아동문학상 (1975) ·제1회 눈솔상(아동문학부문) ((1985) ·제6회 한국 PEN문학상 (1987) ·제5회 대한민국동요대상 (1992) ·제31회 한국문학상 (1994) ·제8회 방정환 문학상 (1998) ·제8회 한국아동문화대상 (1999) ·제15회 예총 예술문화상 대상 (2001) ·제3회 지구문학상 (2002) ·제4회 김영일 아동문학상 (2003) ·제4회 천등아 동문학상 (2004) ·제14회 박홍근 아동문학상(2004) 등이 있다.
출간한 동요·동시집은 ·『나뭇잎 하나』,(1966. 문왕출판사), ·『아기와 염소』, (1971. 가톨릭출판사) ·『아기 크는 집』, (1974. 세종문화사) ·『어린이 만세』, (1976. 시문학사) ·『꽃이 피는 까닭』, (1980. 서문당) ·『동시집을 펼치면』, (1986. 우성문화사) ·『산을 오르는 마음』, (1987. 대교문화) ·『들길을 걷다보면』, (1990. 미리내) 동요집 ·『참 잘했지』, (1991. 아동문예사) ·『너희는 금빛 날개를 달고』, (1994. 한글) ·『모두가 즐거워요』, (1995. 한국음악교육연구회) 노랫말 동요곡집 ·『대장과 졸병』, (1997. 익산) 동시선집 ·『365일 동시 여행』, (2000. 현민) 동시선집 ·『저학년을 위한 좋은 동시 101』, (2001. 영림카디널) 동시선집 ·『개구쟁이 편지 쓰는 날』, (2001. 대한) ·『미술관에 간 동시』, (2003. 영림카디널)동시화집 ·『고학년을 위한 좋은 동시 123 』,(2005. 영림카디널) 동시선집 등이 있다.
출간한 창작동화·소년소설로는 ·『달을 보고 짖는 개』, (1980. 삼성당) ·『이상한 청진기』, (1982. 견지사) ·『수탉』, (1983. 꿈동산) ·『호랑이의 연설』, (1984. 독서지도회) ·『별나라에 다녀온 아이』, (1987. 성문사) ·『이야기하는 교실』, (1987. 대교문화) ·『전국동물단합대회』, (1988. 교육문화사) ·『싸움은 이겼어도』, (1990. 삼덕출판사) ·『엄마 행복이 뭐야』, (1991. 한국어린이교육연구원) ·『단종과 엄흥도』, (1991. 대교출판) ·『평양에서 온 친구들』, (1991. 신원문화사) ·『앞장 선 꼴찌』,(1993. 서원) ·『숙제없는 학교』, (1993. 글세계) ·『별난 결혼식』, (1997. 민지사) ·『불독장군 이야기』, (1998. 삼성당) 그림동화집 ·『꽃님이 좀 바꿔주세요』, (2001. 한국파스퇴르) 그림동화집 ·『내 친구 명섭이』, (2002. 꼬마나라) 등이 있고 그 외 수필집 ·『원색교실』, (1997. 문리사) 수상집 ·『현대동시의 교육적 효용』, (1981), 대학원 석사논문집 등이 있다.
또한 엄기원은「아동문학세상」이란 어린이 전문 문예지를 계간으로 매년 발행하여오며 한국아동문단을 이끌어가는 많은 신인들을 배출하여 아동문학 문단에 기여하고 있다.
엄기원의 작품세계는 작품을 통해 다음과 같이 드러난다.
작품의 진솔성을 추구한다. 지나친 과장이나 위선 따위는 절대 넣지 않겠다고 말한다. 그의 말을 빌리면 ‘아동문학은 아동들이 보는 문학이므로 사실이어야만 하고 교훈적이어야만 합니다. 인간의 본질적인 마음이 담겨있는 글이어야만 아동문학으로서의 가치가 있지요.. ’ 이렇게 말하며 인간주의 문학을 강조한다. 존경하는 작가는 마해송 선생이라고 주저 없이 말한다. 그분의 순수하고 검소한 모습에 존경심이 일었다고 하셨다.
박민수는 엄기원의 작품 연구, 「엄기원 시의 상상력과 그 의미 작용」이란 논문에서 상상력의 본질을 규명하기 위해 근원적이라 할 수 있는 시적 자아와 시점, 제재 선택상의 특수성을 살펴보았다. 그에 의하면 엄기원의 시는 주로 어른 자아로서 어린이의 세계를 관찰하거나 어린이들을 교훈적으로 이끌거나, 어떤 미적 체험을 매개해 주는 존재양상을 보인다고 하였다. 이때 미적 체험은 주로 계절적인 것이 중심을 이루는 것이었으며, 여기에 역사적이거나 현실적인 제재가 덧붙어 들어가는 양상을 보여준다고 하였다. 상상력을 중심으로 한 이러한 양상 중 특히 샂적 자아의 설정은 엄기원의 시가 지닌 특징, 또는 한계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어른 시적 자아의 설정에 의한 시적 언술은 자칫 어림이들에게 어른의 주관적 미의식이나 사상을 주입, 또는 강요하는 형식이 됨으로써 어린이들의 능동적 공감을 이끌어 내기 힘든 경우가 있을 수 있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 경우 자칫 어린이들의 순수한 미적 체험 욕구에 따른 충실한 예술적 호소력을 발휘하지 못할 수 있다고도 한다. 그러나 엄기원의 시는 이러한 위험을 극복하기 위한 내적 긴장 확보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고도 하였다.
또한 의미 작용 측면에서 엄기원의 시는 순수 서정의 심미적인 것이 지배적이면서 여기에 현실 의식을 내용으로 한 많은 시들이 병립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고 하였다. 이때 순수 서정의 심미적인 것은 주로 계절에 따른 정서가 중심을 이루는 것이었고, 현실의식을 내용으로 한 것은, 역사적이거나 현실적인 문제를 비판적으로 접근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처럼 순수 서정의 심미적인 것과 비판적 역사 현실 문제가 병행되고 있는 것은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는 작가의 진장한 예술 의식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분석적 기술적 관점에서 엄기원의 시를 살핀 결과 엄기원의 시가 드러내주는 보다 귀중한 메시지는 어린이들에 대한 사랑, 이 세상이 보다 아름다워지기를 바라는 순수한 꿈 등이었다고 말한다.
대표작이라 볼 수 있는 동시 「아기와 염소」,「병아리」등에서 보듯 엄기원의 동시는 동심의 순수성을 고양하여 목가적인 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인간과 동물이 친근함으로 소통하는 자연적 세계관을 형성하였다. 시적 자아는 걸음마를 배우는 아기와 아기를 바라보는 염소, 그 모습을 바라보는 어른 등, 중첩된 구조를 보이고 있다. 아기의 눈을 통해 들여다보는 세계와 염소가 보는 세계, 어른이 보는 세계를 주관적 해석을 통해 동심의 세계를 그려내고 있는 작품이다.
또 동시 「참 잘했지」에서 보듯 작품의 소재가 자연과 동물 중심에서 이탈하여 자아에 대한 각성 내지 확인으로 교훈적 내용과 내면의 세계를 조응하는 모습이 드러나 있다. 자신의 생활경험을 통해 내면에 대한 자기 응시는 1960년대 등단 작가에 들어서서 강릉의 아동문학뿐 아니라, 한국 동시가 더 새로워지고 깊어졌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아기와 염소
엄기원
걸음마를 배우는 아기가
염소 앞에 갔습니다.
풀을 뜯던 염소가
아기를 보았습니다.
염소는 아기가 귀여운 모양입니다.
염소는
턱밑의 긴 수염을
흔들어 보였습니다.
아기는 까르르 웃었습니다.
이번엔
도라지 같은
뿔을 자랑했습니다.
아기는 두 손으로
뿔을 잡아 당겨보고
또 까르르 웃었습니다.
염소는 아기처럼 착했습니다.
아기는 염소처럼 착했습니다.
(1971)
병아리
엄기원
조그만 몸에
노오란 털옷을 입은 게
참 귀엽다.
병아리 엄마는
아기들 옷을
잘도 지어 입혔네.
파란 풀밭에 나가 놀 때
엄마 눈에 잘 띄라고
노란 옷을 지어 입혔나 봐.
길에 나서도
옷이 촌스러울까 봐
그 귀여운 것들을
멀리서
꼬 꼬 꼬
달음질 시켜 본다.
이 작품은 2005년 3월 5일 ≪한국명작동시선정위원회≫에서 선정하여 예림당에서 묶은 『100년 후에도 읽고 싶은 한국 명작 동시』에 수록된 105편 중의 한 편이다.
엄기원의 「이상한 청진기」동화는 재미있으면서도 교훈을 주는 동화이다. 세상에서 처음 보는 병원인데 마음을 고쳐주는 병원이다. 의사 선생님이 소녀에게 가장 친하던 친구인 지현이를 미워하는 마음을 고쳐주는 내용이다. 순수 창작동화이면서도 교훈성이 많이 담긴 동화의 영역에 머물러 있다.
이상한 청진기
엄기원
우리 마을에는 병원이 또 하나 생겼습니다. 외과․내과․산부인과․치과 ․이비인후과․안과․소아과 병원이 따로따로 있는데 또, 무슨 병원이 생겼을까요.
세상에서 처음 보는 이상한 병원이 생긴 거예요.
‘양심병원’입니다.
참 재미있는 병원이지요? 이 병원은 다른 병원보다 아주 작은 사무실에 S인 의사 한 분과 간호사 한 분 뿐입니다.
의사 선생님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하얗습니다.
늙어서 머리도 하얀데 흰 가운을 입고, 흰 바지에 흰 양말, 구두까지 흰 색입니다. 또, 간호사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노랗습니다. 노랑머리에 노랑 간호 모자를 쓰고, 가운도 노랗고, 노랑 스타킹에 노랑 구두를 신었습니다.
그리고 의사와 간호사는 손님이 오건 말건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선생님, 오늘도 환자가 한 분도 없는데요.”
“응, 그거야 좋은 일이지. 암, 좋구 말구…….”
“그렇지만 선생님이 너무 심심하잖아요.”
“허허, 우리가 심심하더라도 환자가 적은 것은 좋은 일이야.”
의사 선생님은 돋보기안경을 코에 걸고 무슨 이상한 책을 읽으며 말했습니다.
어느 날, 오랜 만에 병원 문이 열리며 아주 예쁜 소녀가 엄마의 손을 잡고 들어섰습니다.
병원에 들어선 소녀와 엄마는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의사 선생님의 옷차림과 간호사의 옷차림이 너무도 색달랐기 때문입니다.
“어서 오십시오, 어디가 아파서…?”
“네. 애가 이상하게 얼굴이 핼쓱해지면서 밥도 먹지 않고 밤이면 자면서 헛소리를 하거든요.”
“간호사. 청진기 가지고 와요.”
“네. 선생님.”
간호사가 청진기를 가지고 왔습니다. 이 청진기에는 새까만 두 개의 꼭지가 있었습니다. 먼저 한 쪽 꼭지로 소녀의 가슴과 배, 등에 대고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러더니 의사 선생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 며칠 전 학교에서 한 친구를 몹시 미워했지?”
“그런 일이 없어요.”
“아이야, 틀림없이 그런 일이 있었는데.”
“그런 일이 없는데요.”
“그럼 할 수 없지. 간호사, 이 소녀에게 엘투씨원 피에이치액을 먹여요.”
의사가 시키는 대로 간호사는 소녀에게 이상한 약을 먹였습니다. 그러더니 조금 지나서 이상한 청진기로 가슴 부분을 찍었습니다.
그 결과 필름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현상되어나 타났습니다.
<지난 4월 26일 넷째 시간 학급 반장 선거에서 2표 차로 친구 지현이에게 졌다. 나는 그 순간부터 가장 친하던 지현이가 미워졌다. 지현이가 우리 반에 없었으면 내가 반장이 되었을 텐데. 정말 지현이기 밉다. 오늘도 공부 시간에 지현이가 일어서서 부르는, 차렷, 경례 소리가 몹시 얄밉게 들렸다.>
“자, 이게 네 병이야, 이젠 더 속일 수 없겠지?”
의사는 필름을 소녀에게 주며 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글씨는 본인에게만 보일 뿐, 다른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니, 선생님. 이 필름엔 아무것도 나타나 있지 않잖아요?”
엄마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의사 선생님께 물어보았습니다.
“아니야, 엄마 내가 잘못했어. 선생님의 진찰이 맞아. 선생님 잘못했어요. 어떻게 하면 이 병을 고칠 수 있어요?”
“아니, 얘가 정신이 나갔니? 뭐가 잘못했다는 거냐? 세상에 우리 은주보다 더 착한 애가 어디 있다구……. 그럼 네가 무얼 훔치기라도 했단 말이냐?”
“그게 아니야…….”
“그게 아니면 뭐냐? 누구하고 싸우기라도 했니?”
“글쎄, 그게 아니래두…….”
소녀의 눈에는 눈물이 글썽했습니다.
그 눈물은 잘못을 뉘우치는 눈물이었습니다.
“자, 이번에는 이쪽 청진기로 네 고쳐진 마음을 진찰해야겠다.”
의사 선생님은 다른 꼭지로 소녀의 가슴을 진찰했습니다.
그리고 가만히 귀를 기울였습니다.
<선생님, 이제부터는 절대로 남을 미워하지 않겠다고 약속하겠어요. 그리고 내일 학교에 가면 반장이 된 지현이에게도 잘못했다고 사과하고, 친하게 지내겠어요.>
소녀의 마음에서 뉘우침의 말소리가 청진기의 줄을 타고 또렷이 들려왔습니다.
의사 선생님은 매우 만족한 기분으로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이제 병은 깨끗이 고쳐졌습니다. 이 어린이는 오늘부터 밥도 잘 먹고, 잠도 잘 것입니다. 그리고 학교생활도 아주 즐거워질 것입니다.”
의사 선생님은 엄마를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아니, 선생님. 우리 애가 어디가 아팠는지, 왜 그런 병에 걸렸는지 좀 속 시원히 설명해 주십시오.”
어머니는 몹시 궁금한 표정으로 선생님에게 물어보았습니다.
그러나 의사 선생님은 그저 빙그레 웃기만 할 뿐, 대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소녀는 밝은 마음으로 병원을 나섰습니다.
이 병원 의사 선생님은 이상한 청진기 하나로 소녀의 마음의 병을 깨끗이 고쳐주었습니다.
그러나 양심이 병든 어른 환자는 한 사람도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1981)
엄기원은 평생을 아동문학을 위해 살아왔고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다. 그래서 엄기원을 한마디로 말하면 아동문학이란 꽃나무를 키우고 사는 외길 인생의 키다리아저씨라고 할 수 있다. 강릉의 후배 문인들에게 더한 층 자긍심과 긍지로 아동문학 창작에 열정을 쏟아 붓는 동력이 되고 있다.
1960년대를 이끌었던 작가로 또 한분은 김완기(金完起 1938 - )이다. 김완기는 동심과 자연 속에서 꿈을 빚는 교육자이며 작가이다.
김완기의 호는 송천(松泉), 초등학교 은사님이 지어 주셨다고 한다. 1938년 11월 4일 강릉의 지변리에서 아버지 김진성(金振星)과 어머니 정봉남(鄭奉男)의 3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강릉관아 터에서 북쪽으로 십리 정도쯤 가면 율곡 이이가 태어나서 자란 오죽헌이 있다. 오죽헌으로 들어가면 이율곡이 태어난 방으로 알려진 몽룡실이 있다. 김완기는 어릴 때 가까운 오죽헌에 가서 놀며 희망적인 꿈을 키웠다. 그곳에 들어가서 자유롭게 놀며 이율곡이 쓰던 붓, 벼루, 글씨와 유품들을 볼 수 있었고 신사임당의 초충도, 포도, 대나무, 매화 같은 그림의 예쁜 무늬를 어린 가슴에 새기곤 하였다.
김완기는 강릉 김씨 옥가파 38대 장손으로 태어나 엄격한 조부모님 아래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는 고향집 뒤뜰의 오죽처럼 꼿꼿하게 살라는 가르침을 늘 되새기곤 하였다고 술회한다.
김완기는 초등학교 시절 좋은 선생님을 만나 문학의 싹을 틔울 수 있었다. 2015년『열린아동문학』여름호에 「아동문학의 오래된 샘」이란 제목의 인터뷰 글에는 초등학교 시절의 이야기와 중학교 사범학교 다닐 때 문학에 흥미를 갖고 공부하는 계기가 되는 이야기들이 나온다.
초등학교 5학년 때의 선생님인 최상벽 선생님을 만나 동요와 동시에 대해 눈을 뜨게 해 준 것을 다음 글에서 알 수 있다.
6∙25가 터지기 전 해인 초등학교 5학년 때였어요. 새 학기가 시작하는 날 훤칠한 키에 멋지게 생긴 남자 선생님이 출석부를 들고 교실에 들어오셨어요. “노래를 좋아하고 시를 암송하는 여러분이 되는 게 나의 소망이어요. 이 시간부터 여러분과 나는 두 가지 약속으로 …” 이렇게 말씀하시며 주머니에서 하모니카처럼 생긴 대나무 토막을 꺼내셨어요. 모두 눈이 뚱그레지며 숨죽이고 있는데 도, 레,미,파, 솔, 라, 시… 구멍 8개를 뚫은 대나무 하모니카를 입에 대고 연주하는 거예요. 처음 들어보는 아름다운 소리였습니다. ‘산토끼 토끼야…’, ‘따따따 주먹손으로…’ 이런 노래였는데 그날부터 우린 매일 대나무 하모니카를 입에 대고 동요 부르기를 했습니다. 어린 마음 밭에 동요를 심어준 고마운 최상벽 선생님이었습니다. 또 하나는 시 암송을 시키는 거예요. ‘매주 월요일에 시 한편을 칠판에 적을 테니 베껴 쓰고 외워서 토요일에 암송해야 집에 간다.’라고 말씀하시자 우린 그냥 신기하고 흥미로워 매주 한 편 씩 재미있게 암송했습니다.
‘따뜻한 봄날에 / 동무들과 / 백제의 옛 서울 찾아드니 / 무심한 구름은 오락가락 / 바람은 예대로 부는구나 / 부소산 얼굴은 아름답고 / 우는 새 소리도 즐겁도다 …’
- 부소산 -
선생님은 시가 뭔지 동요가 뭔지 모르던 어린 우리들에게 글의 재미와 동요의 재미를 눈뜨게 해 주었지요. 지금도 가끔 동창회에서 그때 친구들을 만나면 머리는 희끗희끗해도 그날 암송하던 동요 동시와 대나무 하모니카 반주의 동요곡을 함께 불러보기도 합니다.
김완기가 문학에 매우 깊은 영향을 받는 것은 중고등학교 무렵이다. 전쟁의 포성소리가 한창일 무렵 김완기는 강릉사범 병설중학교에 입학한다. 그곳에는 황금찬이 국어교사로 근무하고 있었다. 가끔 문학 특강을 해주는데 많은 영향을 받는다. 또 황금찬은 청록파 시인인 박목월, 조지훈, 박두진을 학교에 모셔와 시 창작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강릉사범학교 본과에 입학하면서는 윤명을 스승으로 모셨다. 문예부장을 맡으면서 문학동아리 활동도 활발하게 하였다. 이 분들의 영향으로 강릉은 문학에 대한 열기가 더욱 고조되었다. 그 무렵, 극작가인 신봉승, 아동문학가 엄기원, 소설가 홍성암을 비롯한 많은 문인들이 문단에 나와 활동하고 있는 길이 열렸던 것이다.
김완기는 엄기원이 196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하고 나서 6년 째 인 1968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동시 「선생님의 눈속엔」이란 작품이 당선된다. 이렇게 하여 1960년대의 강릉문단은 화려한 신춘문예 당선 속애서 화려하게 펼쳐진다.
『아동문학세상』2003년 봄호에 김완기는 「문학은 나의 영원한 동반자」라는 글을 발표하였다. 여기에는 서울살이를 하면서 문학을 한 내용이 나온다.
‘김완기는 1969년 봄, 학교를 서울로 옮기고 선배 문인을 모시며 문단 활동을 본격화했다. 김영일 회장이 재창건한 한국아동문학회에서 활동하며 70년대 중반엔 한국아동문학회 사무국장도 맡아 일을 하였다. 그러다보니 이원수, 김영일, 박경종, 석용원, 박화목, 박홍근, 어효선, 장수철, 홍은순, 박송, 유경환, 엄기원 등의 동요 동시인 15명으로 구성된 한국동요동인회 멤버로 가입하였다.’
김완기의 아동문학 작품을 쓰는 마음가짐은 어떠한 것인지 그의 말을 들어본다.
동심으로 바라보면 세상이 새롭고 아름답게 다가옵니다. 늘 체감하는 관습적인 세계가 아닌 숨겨진 사물과 일상의 진솔한 의미를 동심의 그릇에 담고 싶었습니다. 오랜 세월 어린이 곁에서 함께 호흡하며 온기를 나누다 보니 그들의 풋풋하고 싱그러운 모습을 습관처럼 그려내게 되었지요. 생각하는 것, 행동하는 것, 교감하는 것, 초롱초롱한 눈빛까지도 촉촉한 한 편의 시와 동화로 보였습니다.
내가 햇병아리 교사 시절 시골학교 운동장에 가난한 농촌 아이들과 흙벽돌 도서실을 지으면서 소망하던 문학의 잎싹을 틔우기 시작한 지 50년이 흘렀습니다. 당시 아동문학가 몇 분께 편지를 보냈더니 상록수 젊은 교사라며 몇 권씩 보내준 작품집을 아이들과 읽으며 나도 동시 동화를 쓰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동시 동화는 본디 작가와 어린이가 동심으로 만나는 공간이라고 봅니다. 그들에게 살아가는 방식, 우주에 존재하는 것들과 삶의 가치를 어떻게 공유하며 공감하게 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게 나의 몫이라고 여겨왔습니다. 작품의 멋과 맛이 넉넉하고 정갈하기 위해 동심이란 순수를 어떻게 형상화할 것인지도 치열하게 되묻는 작가정신이 필요했습니다. 하얀 백묵가루로 만난 어린이들과의 문학교육이 하나의 열정이었다면 동심으로 담아내는 동시 창작은 하나의 애정이었다고 봅니다.
이 글은 2015년 5월 20일 ❰문학의 집∙서울❱이 주최한 「이 작가를 말한다」나의 삶 나의 문학 강좌에서 발표한 글의 한 부분이다.
문학 입문기에는 선배 문인들의 조언을 들으며 피나는 노력을 하였다. 선배 문인 중에 최태호 학장은 존경하는 분으로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하였다.
1957년부터 초등학교 교사로 부임한 이후, 27세가 되던 1964년 봄이었다. 독서교육에 미친 듯이 빠져 있던 김완기는 춘천교육대학 부속초등학교로 발령을 받는다. 그곳의 춘천교육대학에는 동화작가인 최태호가 학장으로 있었다. 부임 첫날 김완기는 학장실로 신고를 하러 갔다. 학장은 첫 모습에도 인자하게 보였다.
“김선생에게 두 가지 책무가 있는데, 하나는 문예교육이고 또 하나는 책을 가까이 하는 교사 양성의 길잡이가 돼줘야 하겠어요.”하고 말하였다.
최태호 학장은 먼 강릉에서 이 일 때문에 데려왔다고 하시고 문학 작품 쓰기도 열심히 하라고 격려를 해 주셨던 것이다. 이때에는 이웃 학교인 효제초등학교에 동화 쓰는 임교순이 있었다. 모두들 어려운 관문인 신춘문예에 도전하고 있었던 것이다.
(김완기가 1968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동시가 당선되고 난 3년 후인 1971년엔 임교순이 「연못 속의 동네」란 작품이 한국일보 신춘문예 동화에 당선 되었던 것이다.)
리터엉 할아버지로 이름이 난 최태호 학장은 동화 창작을 하던 이야기를 들려주시고 작가로 활동하려면 정식 등단하는 길 밖에는 없으니 열심히 응모하라고 일러주기도 하였다. 그리고 공감하는 감동적인 글이어야 독자 곁에 다가갈 수 있다고 작품 쓰기에 대해 안내를 해 주기도 하였다.
김완기의 문학관은 천사주의이다. 우선 어린이들이 사는 세상을 천국으로 인정하고 들어간다. 그들이 주고받는 눈빛은 천사처럼 맑고 따뜻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하얀 어린이들의 마음 밭에 삶의 기쁨을 심어주려 한다. 어린이의 순수함을 어떻게 동시라는 그릇에 담아낼까 하며 고민을 하며 창작을 한다. 또한 누구나 공감하는 동시가 좋은 작품이라 여긴다. 아이도 어른도 함께 공감하는 세계를 그려내는 것을 추구한다. 한 줌의 흙을 빚는 도예공과 같음을 비유로 든다. 또한 동시 한 편이 세상을 아름답게 한다는 작은 소망으로 동시 창작에 임하다보니 본인도 마음이 풋풋해진다고 한다. 동심으로 살면 세상이 아름다워진다는 생각에 자꾸 동시 창작의 불씨를 지핀다고도 말한다.
후배 작가들에게는 아마추어가 아닌 프로 정신으로 자신을 닦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냥 덤벙덤벙 쓰겠다는 안일한 생각으로는 좋은 작품이 나오지 않는다고 이야기한다. 잘 익은 토실토실한 열매가 깊은 맛과 영양을 주듯이 작품도 그래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려면 기다림으로 잘 익을 때까지 정성으로 다듬어야 하고 고민하는 작가정신이 필요하다고 한다. 또한 자기만의 독특한 색깔을 만들어가야 한다고 말한다.
김완기는 동시 한 편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든다는 신념을 가지고 평생 시를 써 온 분이다.
그동안 국어교과서에 6편의 동시(5-7차 교육과정), 음악교과서에 1편(6-8차 교육과정)이 실릴 정도로 많은 동시와 좋은 동요를 써왔다.
제5차에서 6차, 7차 교육과정에 수록된 작품은「고드름」(3-2), 「산새」(5-2), 「산」(4-1), 「시를 쓸 때면」(4-2), 「우리나라 지도」(5-1), 「조약돌」(5-2) 등이고 6학년 음악교과서에는 「봄오는 소리」(한용희 작곡)가 수록되어 텔레비전에 많이 소개되고 널리 불려졌다.
2008년에는 충남 보령시 성주개화예술공원 안에 육필시공원에 「봄오는 소리」시비가 세워져 있다. 2011년에는 대구광역시 도로공원에 「우리나라 지도」시비가 세워졌다.
2002년부터 국어교과서에 실렸던 동시 「우리나라 지도」는 남북 분단의 아픔과 통일에 대한 염원을 담은 작품이다.
아래의 글은 본인의 작품에 대한 설명이다.
어릴 적에 동네 아이들과 10리 길 동해 백사장에 달려가 뛰놀던 바닷가에서 서울에 재직하던 학교의 어린이들과 하룻밤을 바다 캠핑을 하면서 썼지요.
아이들은 반짝이는 은빛 모래밭에 손가락으로 커다랗게 엄마 아빠 얼굴과 친구들 모습을 그리는 거예요. 어떤 아이는 자기 소망을 모래 위에 쓰기도 했어요. 한 아이는 파도치는 모래밭 위에다 엉뚱하게 우리나라 지도를 그리고 있었는데 분단된 한반도 모습이었어요. 토끼 모양의 우리 나라 땅 한 가운데에 휴전선 긴 가로줄을 그어놓고 그 아래에 ‘통일이 빨리 왔으면, 우리 할아버지 고향에 가 보고 싶어요.’라고 글씨를 써놓았는데 파도가 달려와 스르르 지워버리는 장면입니다. 그 모습에서 파도가 하나 된 통일 한반도 모습을 다시 그려보라고 새 도화지를 자꾸만 깔아주는 걸 비유를 통해 그려낸 동시가 나중에 초등 국어교과서에 실렸습니다.
본인 스스로 작품에 대해 말한다.
70년대 작품은 주로 생활시 보다는 자연의 서정을 담은 시들이 많다. 1978년에 펴낸 동시집『너희들도 하늘만큼』, 1980년에『하늘을 달리는 새떼』에 수록된 작품들을 보면 하늘, 새, 나무, 바위, 바다, 풀, 개울, 샘물 같은 자연의 오묘함을 그려내려고 했는데 그 무렵엔 일상보다 사물과 자연에 대한 글감이 더 감흥을 준게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
김완기는 어린이들이 행복한 모습으로 환한 세상을 꿈꾸며 맑고 밝게 살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이 동시 속에 수용되어 있다. 또한 동시 「우리나라 지도」에서 보듯 남북 분단의 아픔과 통일에 대한 염원도 담겨 있다.
동시집에는 다음과 같은 저서가 있다.
『매화』, 울진문화사, 1962.『 하늘이 단지 속에』, 현대아동문화사, 1975. 『너희들도 하늘 만큼』, 을지출판사, 1978. 『하늘을 달리는 새떼』,을지출판사, 1980. 『산마을 산토끼』,남광, 1990. 『엄마, 이게 행복인가 봐』, 한모임, 2004. 『연잎에 개구리 미끄럼 타는 날』,꿈소담이, 2007. 『동그란 나이테 하나』, 아동문학세상, 2012. 『눈빛 응원』, 노문사, 2015. 『김완기동시선집』,지식을 만드는 지식, 2015.
햇살 무게
김완기
산새가 솔가지에 앉으면
산새 무게 만큼
솔잎이 촐랑거리고
다람쥐가 도토리나무 오르면
다람쥐 무게 만큼
도토리 알 뚝, 떨어뜨리지만
햇살은
알속의 애벌레를 고물거리게 하고
땅 속의 꽃씨들을 곰틀거리게 하고
우주의 의사다, 다 거저로.
거저지만 날마다 재고 있단다
햇살 무게 저울엔
쑥쑥 크라는 눈금 하나뿐이라고
나도 그 눈금에 들어있다.
동시 「햇살 무게」의 작품에서 보듯 자연의 신비, 더 나아가 우주의 신비를 햇살의 무게라는 이름으로 비유하여 나타내고 있다. 글 속의 화자인 ‘나’ 역시 자연의 일부로 자연의 변화에 의해 생장소멸하고 있음을 그렸다. 자연이나 우주의 크나 큰 힘이 얼마나 아름다움을 생성하는 변화의 무게로 다가오는지를 가르쳐준다.
어떻게 아나
김완기
우리 집 울타리 나팔꽃
어떻게 아나?
해 뜨는 새벽 여섯시
해님과 주고받는
실줄 감아놓고 있었나?
우리 집 마당가 분꽃
어떻게 아나?
별 반작이는 저녁 일곱 시
별님과 주고받는
비밀 안테나 감춰놓고 있었나?
동시 「어떻게 아나」역시 같은 주제를 담고 있다. 자연의 식물들이 때를 맞춰 움직이는 생명의 신비로움을 동시로 펼쳐보인다. 여기엔 자연을 대하는 시적 화자의 감동과 놀라움의 눈이 숨겨져 있다.
시를 쓸 때면
김 완 기
시를 쓸 때면
내 귀는
청진기가 된다.
새 이야기
꽃 이야기
돌이야기
벌레들의 숨소리
나무들의 맥박소리
시를 쓸 때면
내 눈은 망원경이 된다.
해 이야기
별 이야기
눈 이야기
무지개가 보인다.
옥토끼가 보인다.
- 초등학교 4학년 교과서에 실렸던 작품 -
( 시인의 귀, 시인의 눈은 일반 사람들과 어떻게 다를까요? 외관상으로 봐서는 조금도 다른 점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시인의 귀와 눈은 마음으로 알아듣고 마음으로 내다봅니다. 다시 말하면, 들리지 않는 것도 들을 수 있고 보이지 않는 것도 볼 수 있다는 것이 남다릅니다. 그래서 시인의 귀는 청진기가 되고 시인의 눈은 망원경이 된다고 노래한 것입니다.)
- 감상: 허동인 글 -
산새
김완기
아기새는
혼자서 생각을 키웁니다.
긴 긴 밤
엄마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하늘의 별을 셉니다.
그 작은 가슴
그 작은 눈으로
고운 걸 예쁜 걸
하나 씩 배우는 기쁨
둥지에 해님이 얼굴을 내밀면
아침이 열리는 것을 알게 됩니다.
엄마새가 산속을 날으는 시간이
조금씩 길어지면
파란 하늘에 내 힘으로
텀벙 뛰어들어 보라는 것도
눈짓으로 알게 됩니다.
- 6차 초등학교 5학년 교과서 수록 -
우리나라 지도
김완기
파도가 철썩이는
모래밭
손가락으로 커다랗게
아침의 나라
우리 땅 지도를 그려봅니다.
한반도 허리에
그어진 금
잘못 그렸다고 일러주려는지
숨가쁘게 달려와
사르르 지워 버립니다.
고운 손 예쁜 마음으로
하나 된 우리나라 지도
다시 그려보라고
백사장 모래 위에
새 도화지 자꾸만 깔아줍니다.
- 제7차 초등학교 5학년 국어교과서 수록 -
참 좋은 말
김완기
‘사랑해요’ 이 한마디 참 좋은 말
우리 식구 자고나면 주고받는 말
‘사랑해요’ 이 한마디 참 좋은 말
아빠 엄마 일터 갈 때 주고받는 말
이 말이 좋아서 온종일 일맛이 나지요.
이 말이 좋아서 온종일 가슴이 콩닥콩닥인대요.
이 동요는 2007년 MBC 창작동요 대상으로 수상한 작품이다. 유치원과 초등학교에서 지명곡으로 많이 불리워진 것 같다.
봄 오는 소리
김완기
땅속에 꽃씨가 잠을 깨나 봐
들마다 언덕마다 파란 숨결 소리에
포시시 눈을 뜨는 예쁜 꽃망울
산을 넘고 강을 건너 봄 오는 소리
꿈꾸던 나무가 깨어나나 봐
뿌리로 물을 긷는 고운 맥박 소리에
쏙쏙쏙 고개드는 밭가의 냉이들
산을 넘고 강을 건너 봄 오는 소리
80년대에 들어서 2010년대 초반까지 음악교과서에 수록된 동요이다. 서정성이 짙어 오랜 세월 동안 어린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이 밖에도 「행복한 가치집」(박동한 곡), 「기분 좋은 날」(윤소희 곡), 「무얼까」(정연택 곡), 「새들의 아침 인사」(이재식 곡), 「내 마음의 꿈」(신귀복 곡) 등이 가끔씩 텔레비전과 창작동요 발표시간에 들을 수 있는 노래이다.
신작로
김완기
친구와
말다툼
입이 뾰로통
신작로 양쪽으로
돌멩이를 던진다
미루나무 위로.
헤어지는
갈림길
둘이는
밀이 없다.
저만치
뒤돌아보면
친구도
뒤돌아본다.
오가는 마음
작로 넓은 길.
이 작품은 2005년 3월 5일 ≪한국명작동시선정위원회≫에서 선정하여 예림당에서 묶은 『100년 후에도 읽고 싶은 한국 명작 동시』에 수록된 105편 중의 한 편이다.
김완기의 동시는 단순히 자연에 대한 아름다움이나 혜택을 넘어서서 자연의 경이로움을 담아내고 있다. 또한 깊은 의미도 깃들어 있어 동시의 품격을 높인다. 김완기는 1968년 신춘문예 당선 이후 줄곧 교직과 문단에서 활동해온 현역 노장의 작가이다. 그의 시 세계는 처음엔 어린이 사랑에서부터 시작하여 지금은 자연의 경이로움과 우주의 생명력에 대한 신비로움을 느낀다. 그로부터 또한 겸손함을 배운다.
1961년 김원기 등단 이후 60년대 강릉아동문단의 주역인 두 사람, 엄기원 김완기는 2010년대의 아동문학 흐름까지 이끌어가는 노익장을 보이고 있다. 그것은 또 현재진행형이다.
1997년 집문당에서 발행한 『한국현대아동문학 작가 작품론』에 수록된 「김완기론」의 집필자 윤명철은 김완기의 작품세계를 다음과 같이 분석하고 있다.
그가 생각하는 아동상은 늘 맑고 고운 꿈을 간직한 아이들이다. 1990년 한국아동문학 작가상 수상 때 인터뷰의 기사를 보면 “아이들의 순수한 동심에 금이 가지 않는 얘기들로 무한한 가능성을 심어 주는 것이 늘 창작활동느껴 왔습니다.” , “아동문학에는 흥미 위주 보다는 어린이들의 심성을 계발시킨다는 문학 본질의 도덕성이 담겨 있어야 합니다.”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아울러 표현 면에서 표면적인 수식어보다는 은은한 가운데 중심을 찌르는데 문학의 묘미가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문학가이기 이전에 , 참다운 교육자로서 어린이에 대한 사랑은 그의 문학의 출발점이자 근원이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동시인 이전에 교육자로, 아동문학의 전달자로서 아동문학사적 측면에서 높이 자림매김을 해야 할 것이다. 그의 문학적 특성을 요약해 보면, 첫째, 그의 작품은 자연과 아동의 동일화에 근거하여 자연 소재를 통한 어린이들의 꿈의 형상화에 중점을 두고 있다. 둘째, 그는 식상하기 쉬운 자연소재들을 내면성 있는 참신한 표현들로 재창조하고 있다. 이것은 동시의 표현을 한 차원 높여주는 동시사적(童詩史的)의의가 있다.
김완기는 평생을 교단에서 어린이와 함께 생활하며 교육해 왔다. 김완기는 동화에도 많은 창작을 하여왔다.
자연사랑, 어린이사랑이 중심을 이루었다. 교육현장의 체험을 통해 겪은 일들이 글의 소재가 많이 되었다. 특히 불우한 아이들이나 장애아에 대한 사랑이 지극하다. 그가 쓴 동화 「벙어리 도장포」도 그와 같은 내용이다. 여기엔 한 농아 어린이가 헤쳐 온 삶의 모습이 감동적으로 그려져 있다. 작가는 이 동화를 쓰기까지의 과정을 다음과 같이 술회하였다.
오래전에 ‘벙어리 도장포’란 동화를 쓴 적이 있습니다. 이 동화의 주인공이 내가 가르친 한 농아 어린이 얘기였어요. 나는 교단에 처음 서는 햇병아리 교사 때부터 불우하고 가난한 어린이에 먼저 눈길이 갔습니다. 1967년 첫 발령지 경포초등학교에서 5학년 남자반을 담임했는데, 그땐 수업 전 출척을 불렀지요. 말 못하고 듣지 못하는 황영구 어린이는 교실에 들어오지 않고 운동장 느티나무 아래에서 나뭇잎만 꼬깃꼬깃 접고 있는 걸 보았습니다. 누구도 가까이하지 않고 따돌림을 받기에 교실에 들어오기 싫었던 거예요. 가난한 장애아 황 군에게 나의 도시락을 함께 먹으며 사랑을 보이니까 아이들 관심도 달라지더군요. 2년간 담임하면서 장애아에 특별한 재능이 있음을 발견했지요. 그림 그리기가 뛰어났어요. 판화, 목각, 수채화, 붓글씨 같은 숨은 재능을 계속 개별지도로 졸업을 맞았는데 가난해서 중학교 입학이 불가능해지자 궁리 끝에 서울 종로에 있는 국립농아학교 교장 선생님께 편지를 썼습니다. 기숙사에다 학비 없는 국립학교에 입학할 기회를 줬으면 좋겠다는 장문의 편지를 보냈더니 미술실기 시험을 치르러 오라 해서 함격한 거예요 한 농아 어린이가 헤쳐온 삶의 모습이 담긴 ‘벙어리 도장포’ 이야기에서 장애를 딛고 꿋꿋이 내일을 개척하는 야멸찬 모습을 진솔하게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주요 저서를 보면 다음과 같다.
『어깨동무 삼총사』,꿈나무, 1980. 『푸른 바다를 다리는 기차』,꿈동산, 1983. 『꽃마차 공주님』,글방, 1985. 『열두달 듣고 싶은 별님 이야기』,남광, 1992. 『둘만의 약속』, 웅진출판사, 1992. 『꾸러기 친구들』,꿈동산, 1993. 『꼴찌가 일등 했어』, 민지사. 1997. 『가재와 버들개지』, 남광. 1997. 『내 배꼽이 더 크단 말이야』, 여명, 2002. 『동물원 수의사 선생님』, 달맞이, 2005.
문학 활동을 하면서 김완기는 1976년 한정동아동문학상, 1990년 한국아동문학 작가상, 1997년 대한민국동요대상, 2003년 한국동시문학상, 2004년 김영일 아동문학상, 2007년 한국펜문학상, 2013년 박경종아동문학상 등 굵직한 문학상을 수상하며 한국아동문학의 우뚝한 산맥으로 자리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