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마 입은 남자
조용휘
3월초 신학기는 눈코 뜰 사이 없을 만큼 바빴다. 그날도 2층의 과학실을 3층으로 옮겨가야했다. 여섯 명이 전부인 남자 교직원이 동원되어 과학실험대, 시약 보관장 등 비품을 옮겼다. 작업이 끝나자 수고했다며 교장이 사준 막걸리를 남자교직원들과 함께 나눠 마신 최 부장은 교무실로 내려왔다. 과학실 비품 이동작업으로 인해 뒤늦게 업무처리를 하다 보니 퇴근시간이 이미 지났다. 애주가로 소문난 원로교사인 박 선생과 이 선생이 교무실 문을 열고 머리를 들이 밀었다.
“최 부장, 교문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김 부장과 함께 나와요. 한 잔 더 하게.”
“예, 먼저 가세요. 얼른 마치고 갈게요.”
뒤늦게 업무처리를 끝낸 최부장은 신학기에 전입해 온 김 부장을 데리고 교문 앞으로 갔다. 원로교사 두 사람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와 김 부장은 학교 부근의 곱창집에 들어갔다. 둥근 화덕 안에 연탄을 피워서 철망으로 된 석쇠 위에 곱창을 구워 먹는 집이었다. 김 부장은 곱창에는 소주가 제격이라며 주문을 했다. 두 사람은 잔을 부딪치며 건배를 했다. 맥주 한두 잔이 주량인 최 부장에 비하면 김부장의 주량은 상당히 센 편이었다. 학교 이야기로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다 보니 테이블 위에는 빈 소주병이 늘어 갔다.
신학기에 전입한 김 부장을 환영하는 자리인지라 최 부장은 화장실을 다녀오면서 술값을 계산했다. 자리에 돌아와서도 김 부장과 소주 몇 잔을 더 나눠 마신 후 헤어졌다. 최 부장은 버스 정류장에서 마을버스를 탔다. 그는 생전 처음으로 막걸리에 소주까지 과음을 한 탓에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취기로 인해 깜박 졸았다. 얼마쯤 시간이 흘렀을까?
"손님! 종점입니다. 내려요!"
버스기사의 짜증섞인 목소리에 눈을 떠보니 이미 버스는 종점에 도착해 있었다. 버스정류장을 밝히는 가로등도 잠에 취한 듯 졸고 있엇다. 늦은 밤이라 집으로 가는 골목이 쥐 죽은 듯 고요했다. 집을 향하는 갈지자 걸음의 최 부장 입에서 유행가가 흘러나왔다.
“인생은 나그네 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 가/
구름이 흘러가듯 떠돌다 가는 길에/
정일랑 두지말자 미련일랑 주지 말자/
인생은 나그네 길 강물이 흘러가듯/
정처 없이 흘러서 간다.”
그는 비틀거리는 발걸음으로 서울법대 출신 가수 최희준의‘하숙생'을 큰 소리로 흥얼거리며 걸었다. 요즘 젊은이들은 1960년대 중반 보리 고개 시절, 공전의 히트를 쳤던 대중가요를 기억이나 할까?
‘인생이 별거냐, 구름이 흘러가듯 강물이 흘러가듯 세상 그렇게 사는 거야.’짧은 순간 많은 생각들이 오고갔다.
‘딩동, 딩동’
벨을 누르자 초등학교 2학년인 딸이 현관문을 열어주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빠, 왜 이렇게 늦었어요?”
“예쁜 우리 공주님, 아직까지 자지 않고 아빠 기다렸어요?”
딸아이가 눈을 홉뜨며 빤히 쳐다보고 섰다. 순간 머릿속을 뭔가가 스치고 지나갔다.
“아빠는 내 생일도 잊어버리고... ”
입을 삐죽이 내밀며 울상인 딸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았다.
“아, 우리 예쁜 공주님, 생일을 아빠가 깜빡 했네.”
“미안, 미안, 정말 미안.”
그는 진심으로 딸에게 미안해하였다. 그때였다.
아내가 눈꼬리를 잔뜩 말아 올린 채 별꼴 다보겠다는 듯이,
“당신이 동래곱창이에요.”
그녀는 큰 소리로 최 부장의 목에 걸린 녹색 앞치마를 벗겼다. 아내가 걷어낸 앞치마를 보자 버스 안에서 힐끗거리던 눈길들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그는 취한 척하면서 안방 침대 위로 꼬꾸라졌다. 아내도 자는 척 누웠더니 뒷꼭지에 한마디를 날렸다.
“살다가 어디 한두 번 실수 안하는 사람 있어요. 남의 일에 관심 없다구요.”
퉁명스런 아내의 충고에 최부장은 네 다리를 쭉 펼쳤다. 이리저리 뒤척이며 아내의 잔소리를 따돌렸다.
‘그래, 세상에 실수 안하는 사람이 어디있냐고?’
취한 척 한 쪽 다리를 아내 배에 툭 던졌다. 그러나 머릿속에서는 온갖 생각들이 뒤섞였다.
‘아, 내일 아침 마을버스를 어떻게 타지?’
갑자기 창피한 생각과 걱정이 밀려왔다.
(2014. 11. 21)
첫댓글 하하하~ 맨 정신인 사람도 간혹 그런일 있답니다. 좋아요.
이수학교에서 학년초 대왕학교 김동일교장과 술마시고 취해서 일어난 해프닝을 구성해 봤습니다.
술 먹는 이들의 숨은 에피소드 재미있게 잘 보았습니다
짦으면서도 절로 미소가 나오는 글입니다. 간결하면서도 차분한 문장 기술 방법이 참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