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고 넘는 박달재
-박재홍
천둥산 박달재를 울고넘는 우리임아
물항라 저고리가 궂은비에 젖는구려
왕거미 집을 짓는 고개마다 구비마다
울었오 소리쳤오 이 가슴이 터지도록
부엉이 우는 산골 나를 두고 가는 임아
돌아올 기약이나 성황님께 빌고가소
도토리 묵을 싸서 허리춤에 달아주며
한사코 우는구나 박달재의 금봉이야
제천 처녀가 시집가던 길 …단종이 울고 넘던 고개
이 땅에서 태어나 자랐다면 누구나 한번쯤 박달재를 별로 힘 안 들이고
넘어봤을 성싶다. 충북 제천 땅을 단 한번도 밟아본 적이 없는 사람일
지라도 박달재를 다녀왔다고 말한들 틀린 말은 아니다. 국민가요가
된〈울고 넘는 박달재〉를 틀림없이 한두번은 불러봤을 것이기 때문이다.
박달재는 충북 제천시 봉양읍과 백운면의 경계에 있는 고개이다. 고개의
높이는 453m이며 전체 길이는 4km가량 된다. 차령산맥의 지맥인 구학산
(971m)과 시랑산(691m)이 마주 보면서 산의 능선이 마치 말안장 모양
으로 움푹 들어간 곳에 있다.
박달재는 박달산‧박달령‧박달현‧박달치로 불렸는데, 박달나무가
많이 자생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 이 근처에서 죽었다는 박달이라는
청년의 이름을 따서 박달재라고 부른다고도 한다. 다른 풀이도 있다.
‘박’은 순우리말 ‘밝다’에서 보듯 크고 높고 하얗고 성스럽다는
뜻이고, ‘달’은 산이나 언덕의 옛말이다. 그래서 ‘박달’을 태백산·
백두산처럼 천제를 올리던 성스러운 곳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울고 넘는 박달재〉의 노랫말과 달리 박달재는 천등산에 있지 않다.
천등산을 넘는 고개는 다릿재로, 박달재는 천등산과는 무관하다.
엄밀히 말하면 시랑산을 타고 오르내리는 고개다.
시랑산 박달재가 천등산 박달재로 바뀐 것은 순전히 반야월 선생
(본명 박창오) 덕분(?)이다. 올해 3월26일 95세를 일기로 타계한
반야월 선생은 〈울고 넘는 박달재〉〈소양강 처녀〉로 유명한 원로
가수 겸 작사가이다. 선생은 극단 시절 전국을 유랑하던 중 박달재를
지나다 젊은 부부의 애틋한 이별 모습을 보고 급히 노랫말을
썼다고 한다.
〈울고 넘는 박달재〉가 히트하자 대중 속에 융하,마치 실화처럼
각색되었다. 이후 이곳 전설 속으로 파고들어 금봉 낭자와 박달
선비의 러브 스토리로 엮어졌다.
제천 봉양읍·백운면 경계
제천·충주서 서울 가는 길
‘
울고 넘는 박달재’
노래 덕에 유명해져
주말이면 500여명 찾아
노래 탓에 오해 생겨
시랑산 박달재가 천등산으로
◆울고 넘는 고개 되게 한 역사적 사건들
그리 높지도 않고 원만한 박달재가 왜 울고 넘는 고개가 되었을까.
박달째가 울고 넘는 고개를 대표하게 된 것은 몇가지 역사적
사건들과 관련 깊다. 신라의 마지막 경순왕이 왕건에게 나라를
넘겨준 뒤 박달재를 울면서 넘어갔다는 설이 그중 하나이다.
마의태자와 덕주공주를 떠나보낸 경순왕은 울분과 슬픔을 달래려
명산을 두루 찾아다니다가 이곳, 지금의 백운면 방학리에 머물렀
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제천 사람들 사이에서는 어린 단종이 삼촌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영월로 유배가던 중 박달재를 넘으면서 슬피 울었
다는 얘기가 정설처럼 전해진다. 그 후 천주교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박달재를 넘어 배론성지로 갔고, 구한말 제천에서 봉기한 항일
의병들도 충주성을 점령하기 위해 박달재를 넘었다.
또 제천 처녀들이 충주로 시집갈 때 넘어가던 고갯길이 박달재
라는 얘기도 있다. 물론 박달 선비와 금봉 낭자의 애틋한 전설도
빼놓을 수 없다. 박달재를 둘러싼 역사적 사실과 전설이 비극적
요소를 담고 있기에 울지 않고는 넘기 어려웠을 게 틀림없다.
박달재는 제천이나 충주 사람들이 서울로 가는 지름길이다.
모두들 서울로 서울로 향하던 시절에 박달재는 떠나는 자와 남은
자들에게 이별의 아픔을 안겨 주었을 것이다.
상처가 깊을수록 더 넓게 포용하듯이 박달재는 이질적인 문화가
공존한다. 시랑산이 양기가 강한 남성을 상징하는 산이라면 조금
떨어진 월악산은 여성을 상징한다. 박달재 정상에 남성 성기를
상징하는 목각품이 다수 전시돼 있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또한
박달재 동북쪽에는 한국 천주교 전파의 진원지인 배론성지가 자리
잡고 있고, 남서쪽에는 구한말 외세에 항거한 제천 의병들의
정신적 산실인 자양영당(紫陽影堂)이 굳건히 버티고 있다.
◆‘사랑 고백의 장소’로…
30여년 동안 박달재 휴게소에서는 오직〈울고 넘는 박달재〉노래
한곡만 흘러 나온다. 세월이 흘러 변한 게 있다면 노래를 부르는
가수들이 달라졌다는 겄뿐,
7월의 뙤약볕이 내리쬐는 평일인데도 박달재 휴게소는 차량들로
빼곡했고, 박달재 노래비와 함께 조각공원을 둘러보는 사람들이
여럿 보였다. 인기 드라마나 영화 촬영지를 마치 순례지처럼 찾는
사람이 많듯이 박달재도 예외가 아니다. 제천시 문화관광해설사
여은희씨는 “평일에는200~300명, 주말에는 500명 이상이 순전히
〈울고 넘는 박달재〉노래 때문에 이곳을 찾아온다”고 말했다.
1997년 38번 국도 박달재 정상 밑으로 1,960m의 터널이 뚫리면서
박달재 옛 고개길도 사라질 운명에 놓였다. 하지만 박달재는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문전성시를 이룬다. 이곳을 찾은 사람들은
휴게소나 박달재 아랫마을 묵밥집에서 금봉이 과거시험 보러
떠나는 박달의 허리춤에 매달아 준 도토리묵을 떠올리며 묵밥
한그릇을 뚝딱 비우고는 떠난다.
내년 말 이곳에 한국가요사 기념관이 들어선다. 반야월 선생을
비롯한 국내 유명 작사가‧작곡가‧가수의 기록물,사진‧악보‧소장품
등이 전시될 예정이라 한다.
세월 따라 박달과 금봉의 신분도 상승했다. 한동안 박달 도령과
금봉 낭자로 불려지더니 얼마 전부터는 박달 신선과 금봉선녀로
승격(?)했다. 기왕에 박달재를 박달과 금봉의 애틋한 사랑이 어린
관광자원으로 활용하려 한다면 요즘 젊은이들이 찾아올 수
있도록 ‘사랑 고백의 명소’나 ‘영원한 사랑 언약의 무대’
등으로 꾸며 보면 어떨까.
과거보러 간 박달도령
기다리던 금봉낭자 …
이루지 못한 아픈 사랑
박달재와 관련해 박달 도령과 금봉 처녀의 애틋한 사연이 구전
으로 전해 온다. 옛날 경상도 청년 박달이 한양으로 과거 보러
가는 길에 이 고개를 넘어 아랫마을, 지금의 백운면 평동마을에
이르렀다. 이곳에서 박달은 금봉을 만나 몰래 사랑을 나눴고,
과거에 급제하면 돌아와서 백년가약을 맺겠다고 언약을 했다.
금봉이는 도토리묵을 장만해 가는 길에 요기하도록 박달의
허리춤에 매달아 주었다.
박달이 떠난 이튿날부터 금봉은 마을 밖에서 고개를 길게 늘여
빼고 박달이 돌아오기만 기다렸다. 그렇케 며칠이 가고 돌아올
때가 훌쩍 지났는데도 소식조차 없었다. 한편 과거에 낙방한
박달은 금봉을 볼 면목이 없었다. 나중에야 슬픔에 잠긴 채
터벅터벅 돌아오다가 금봉의 집을 찾았는데, 금봉이 자신을
기다리다 지쳐 3일 전에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박달은
식음을 전폐하고 슬피 울었다.
그때 박달이 고갯마루 방향을 바라보니 꿈에 그리던 금봉이
춤을 추면서 고개 쪽으로 가는 것이었다. 박달은 있는 힘을
다해 고개로 달려가 금봉을 잡으려고 했으나 손이 미치지
못했다. 박달은 간신이 고개 위에서 금봉을 끌어안았으나
금봉은 이내 사라지고 박달은 허공 속 천길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져 죽고 말았다. 그 후 이 고개를 박달재라 불렀다고
한다.
조각공원에는 한양에 과거를 보러간 박달을 목이 빠지도록
기다리는 금봉의 모습을 형상화한 조각이 눈길을 끈다.
출처:www.nongmin.com 제천=김윤석 기자trueys @nongmin.com
[약도]박달재 -충청북도 제천시 백운면 평동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