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효현의 수필 용띠와 범띠네 가족여행
용띠와 범띠네 가족여행
조 효 현
혹시(或是)나 했더니 역시(亦是)나 그렇다. — 또 비가 오겠지 싶어서 여장(旅裝)을 꾸릴 때 우장(雨裝)도 챙겼더니 늘 그러했듯 여행길에 또 비가 내린다.
음역 04월 03일은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날이다. 약력으로는 해마다 날짜가 다른 05월 중순경의 어느 날이 되고는 한다. 어떻든지, 그 날짜의 바로 앞 주에 있는 토요일과 일요일을 이용하여 매년 01박 02일의 가족여행을 떠나고는 하는데 그럴 적마다 우연(偶然)이겠지만 필연(必然)이듯 매번(每番) 이렇듯 비가 오고는 하는 것이다.
기실, 이때는 장마철이 아닌데도 비가 줄기차게 내리는가 하면 구름 한 점 없던 맑은 날에도 난데없는 구름이 몰려오기도 하고 바람 한줄기 없던 고요한 하늘에도 느닷없는 바람이 일어나며 비바람을 몰아치기도 하니 묘한 일이요, 불가사의한 일이다.
풍설(風說)엔 “비를 몰고 다니는 사람이 있다.”고 하고, “바람을 몰고 다니는 사람이 있다.”고도 한다. 바로 “용띠가 그러하고 범띠가 그러하다.”고들 한다.
실로, 우리 큰딸 내외는 동갑내기로 병진생(丙辰生)의 용띠인데 그들의 둘째 소생인 외손녀도 임진생(壬辰生)의 용띠이다. 그리고 또 내 아내가 경인생(庚寅生)의 범띠이다.
그렇거니 이렇듯 함께 가는 여행길에 비가 올 적마다 내가 싱거운 말로
“용이 하나도 아닌 세 마리에다가 범까지 한 마리 더 보태어 동행을 하는 ‘용띠와 범띠네 가족여행’이라서 이런 것이지 뭐!”
라고 하면 용띠인 내 큰딸은 살가운 말로
“용왕의 후예이신 아바마마가 비를 좋아하시니 하늘도 축복하느라고 은총을 내려주는 것이겠지요. 뭐!”
라고 받아넘기고는 한다.
나는 주역(周易)의 건괘(乾卦)에 “구름은 용을 따르고 바람은 범을 따른다(雲從龍風從虎).”고 하였기에 “마음이 서로 맞는 사람끼리 좇는다.”는 본래의 뜻과는 다르게 농언(弄言)으로 그러고는 하는 말이지만 내 여식은 우리 조씨(曺氏)의 득성설화(得姓說話)에 “창녕조씨(昌寧曺氏)의 시조(始祖)인 조계룡(曺繼龍)은 용왕(龍王)의 아들이다.”고 하였기에 조상을 거룩하게 신격화하는 본래의 뜻과 맞고, 제 아비인 내가 비를 좋아함에 근거하여 진언(眞言)으로 그러고는 하는 말이다.
실제로, 백과사전에도 실려 있는 ‘창녕조씨의 득성설화’를 보면
“ – 전략(前略) ‒ 신라 진평왕 때 학림학사 이광옥(李光玉)의 딸 예향(禮香)이 어려서부터 속병이 있었다. 자라면서 고질이 되었는데 하루는 중이 와서 ‘화왕산상(火旺山上)의 용지(龍池)에 가서 목욕재계하고 치성을 드려보라.’고 하였다. 예향이 그 말대로 하니 갑자기 운무(雲霧)가 일더니 대낮이 밤과 같이 캄캄하다가 이윽고 안개가 걷히면서 병이 낫고 태기(胎氣)가 있어 이상하게 여기는 중에 꿈에 한 장부가 나타나서 ‘나는 용왕의 아들이며 그 아이의 아비이다. 태어나면 겨드랑이에 조(曺)자가 붉게 쓰여 있을 것이다.’고 하였다. 산월(産月)이 되어 아이를 낳고 보니 과연 그대로였다. 학림학사가 왕에게 아뢰니 왕이 궁으로 불러 직접 확인하고는 이상하게 여겨 아이의 성과 이름을 조계룡(曺繼龍)이라고 하사하였다. ‒ 후략(後略) ‒ ”
고 하였으니 내 여식의 말처럼 나는 물(水)의 신(神)인 용왕(龍王)의 후예(後裔)이다. 그렇거니
“용띠와 범띠는 비바람과 유관하고 나는 병술생(丙戌生) 개띠이니 무관하다.”
고 억지를 부려볼 일도 아니거니와 이제 다시 또 말장난으로라도
“비와 바람을 몰고 다니는 용띠들과 범띠는 돌아들 가라. 나는 비와 관계없는 원숭이띠 아들과 돼지띠 며느리와 큰 외손녀 그리고 말띠 둘째딸과 토끼띠 둘째 사위하고만 가련다.”
라고 하면 재치가 있는 첫째 여식은 아마도
“우리 내외는 아바마마의 생신을 축하드리려고 이 날이 오기를 ‘제갈공명이 칠성단을 쌓고 동남풍을 기다리듯’ 하였사오며, 애들은 애들대로 외할아버지 생신여행에 함께 가려고 오늘이 오기를 ‘삼사 끼 굶은 흥부자식들이 굿 구경 간 제 어미 기다리듯’ 하였사오니 그런 분부 마시와요.”
라고 대사를 외우듯 아양을 떨 것이고, 경우가 바른 둘째 여식은 아마도
“이까짓 비바람에 전쟁이라도 난 것처럼 이산가족이 되자고요? 아빠의 생신을 축하하는 가족여행인데, 아빠가 금지옥엽이듯 여기시던 이 자식들을 다 흩어놓으시면 별유천지의 무릉도원엘 가신들 즐거우실 것이고, 왕후장상이 먹던 산해진미를 드신들 맛이 있을 것이며, 옥황상제가 거처하는 구름위의 자미궁에 가셔서 주무신들 편안하시겠습니까?”
라고 따지듯 응석을 부릴 것이고, 무던한 아들은 아마도
“아버지! 이런들 어떻고 저런들 어떻습니까? 비바람이야 몰아치든 말든 우리는 가든 길이나 가면 되잖아요. 아버지가 늘 하시던 말씀처럼 ‘일체유심조’라고 모든 것은 다 마음먹기 나름 아닙니까? 오늘도 아버지가 좋아하시는 비를 즐기며 어서 가자고요.”
라고 위로하듯 달랠 것이고, 큰사위와 며느리와 작은 사위는 살붙이들의 언어유희(言語遊戱)에 공연히 끼어들었다가 저희들 내외간에 핀잔이라도 들을까봐 소이부답(笑而不答)으로 그저 웃기나 할 것이겠지만 녹록하지 않은 내 아내는 아마도
“장끼 가는데 까투리 따라가듯, 수탉 가는데 암탉 따라가듯, 봉 가는데 황 따라가듯, 원 가는데 앙 따라가듯 지아비가 가시는데 지어미도 따라 가야 옳기는 하지만 또한 여필종부요, 부창부수라고 아내는 반드시 남편의 뜻을 좇아야 하고 주장하는 대로 따라야 하니 아쉽기는 하지만 하늘과 같은 서방님의 뜻을 받들어 땅과 같은 소첩은 물러가오리다.”
라고 비아냥거리며 휑하니 달아날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거니 실없는 말장난으로 공연한 평지풍파(平地風波)를 일으키지 말고 내가 좋아하는 비나 즐기며 그냥 가야할 일이다. 논어(論語)의 옹야편(雍也編)에도 “호지자(好之者)는 불여락지자(不如樂之者)라.”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고 하였거니 내가 좋아하는 비나 마냥 즐기며 갈 일이다. 여로(旅路)에 내리는 이 비가 벼락을 몰아쳐대며 세상을 온통 물바다로 만드는 낙뢰폭우(落雷暴雨)라면 “괴로운 비, 괴로운 비, 쉬지 않고 내리는 비/ 아궁이 불이 꺼져 동네 사람들 시름이 많네”라고 하던 저 옛적의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이 지은 시 ‘고우행(苦雨行)’이라도 읊조리며 근심할 일이다만 그런 비가 아니고 농사철에 맞춰 순하게 내리는 우순풍조(雨順風調)이니 “비와 바람이 때를 어기지 않고 순조로우니/ 백성들이 곳곳에서 격양가를 부르는구나”라고 하던 고전(古典) 춘향전(春香傳)에 나오는 ‘농부가(農夫歌)’라도 읊조려보며 즐겁게 갈 일이다.
그리고 밤에는 어느 숙소의 창밖에 있는 파초 잎에 후드득거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똑, 똑, 똑 떨어지는 창밖의 빗소리/ 쉬지 않는 저 소리 시 짓기를 재촉해대니”라고 하던 매죽헌(梅竹軒) 성삼문(成三問)이 지은 시 ‘창외파초(窓外芭蕉)’라도 읊조려보며 즐겨 볼 일이다.
그러다가 우연히 나 또한 졸작(拙作)이라도 하나 짓게 되면 왜 아니 희희(嘻嘻)하고 뜻밖의 달작(達作)이라도 쓰게 되면 어찌 아니 낙락(樂樂)하랴.
아니, 아니다. 이렇게 사는 것만도 청복(淸福)인데 분수에 넘는 홍복(洪福)까지 더 바랄 것이랴.
어허 야, 섬겨주는 처자권속(妻子眷屬)이 좋기도 하고 함께하는 가족여행(家族旅行)이 즐겁기도 하다.
(좋은 수필. 2019년 5월호)
(조효현의 제5수필집 용띠와 범띠네 가족여행. 2021년 5월 3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