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과서와 휴전선 최두석
교과서와 휴전선
밑 빠진 항아리에
물 붓기는 아니라 하지만
천차만별 중구난방인 학생들 마음에
고루 스미도록
교단에서 진실 말하려면
얼마나 하염없는 인내가 필요한가
윤선생은 오래 기다리다 결국
교원노조 운동으로 교단 떠날 요즘에야
다음처럼 수업준비 하였다
먼저 묻는다
왜 한강에 배가 들지 않느냐고
강이 깊지 않아서가 아니라
하구에 휴전선이 그어졌기 때문이라는
확실한 목소리 들으려면
스무 고개 넘어야 하리라
임진강 만나 밀물로 역류하다
썰물 타고 굽이치는 한강, 강물에
보이지 않는 휴전선 있듯
밤낮 붙들고 씨름하는 교과서에도
휴전선 그어져 있다고 말한다
독재 권력이 독재 유지 위해 설치한
교과서 속 지뢰밭
앞으로의 숙제로 찾아보라고 말한다
교과서에서 통일은 어떻게 될 수 있나
물어보라, 물어보고 침묵의 혹은
거짓의 완강한 벽을 느꼈을 때
그것이 휴전선이라고 말한다
허구한 날 사지선다형 문제에
쳇바퀴 돌리는 다람쥐로
청춘을 갇혀 있게 하는 것
그것이 휴전선이라고 말한다
교과서 만든 교육 개발원은
남아도는 미국의 밀가루와
옥수수 차관으로 수립되었고
사지선다형 문제는
차관으로 미국 유학 간 자들이
수입해 왔다고 말한다
휴전선 만든 주범은 미국이지만
휴전선 뚫는 일은 온전히
우리의 소명이라고 말한다
반짝이는 혹은 의아해하는
눈빛 온몸으로 느끼며
이런 말 하는 선생을
수상쩍게 보는 놈 있다면
녹슨 철모 뒤집어쓴 그의 머리에도
휴전선 그어져 있다고 말한다.
물망초꽃밭, 1991
김통정 최두석
김통정
팔만대장경 옻빛 관목을 시리게 들여다보다가 잠든 밤 꿈 속에서 솟구친 나의 욕망은 서남해안을 흰 돛배로 헤매더니 파도 건너 제주도 애월면 고성리, 청상과부집 장독 밑에서 지렁이로 꿈틀거렸다.
지렁이는 꿈틀거림으로 뭉클뭉클 자라나서 어느 날 문풍지에 스미는 달빛을 타고 과부의 방을 침범했다. 억센 불가항력의 사내로
여자의 허리가 굵어질수록 새벽과 더불어 사라지는 사내의 행방이 궁금했다.
하룻밤은 궁금의 긴 실오라기 끝 바늘을 사내의 옷깃에 꿰었다.
다음날 사내는 장독 밑에서 커다란 지렁이로 죽어 있었다. 누리의 흙을 붉게 적시면서…… (그런지 몇 달 후 여자는 온몸에 비늘 돋친 아이를 낳았다. 이름은 김통정)
물망초꽃밭, 1991
까마귀 최두석
까마귀&
쌓인 댓잎 위에서 주워든 새털
공중에 띄워 입김으로 불어 올리기
홀연히 일어난 회오리 바람
바람 속에서 솟구친 까마귀 몇 마리
까마귀들이 원무를 추다 사라진 하늘에서 눈이 내렸다. 언 땅을 디딘 발등으로 내린 눈은 발자국이 되어 뒤에 남았다. 밭머리 수숫대들은 모갱이 잘린 채 섰고 수숫대로 비껴 본 구석방에서 어머니는 자꾸 허리 아팠다. 구들이 타도록 관솔불을 지펴야지, 벌겋게 달아 오른 솔방울을 생각하며 건너간 들판의 한쪽에서는 수십 마리의 까마귀가 떼죽음했다.
쌓인 눈 위에 흩어진 독약.
물망초꽃밭, 1991
노래와 이야기 최두석
노래와 이야기
노래는 심장에, 이야기는 뇌수에 박힌다.
처용이 밤늦게 돌아와, 노래로써
아내를 범한 귀신을 꿇어 엎드리게 했다지만
막상 목청을 떼어내고 남은 가사는
베개에 떨어뜨린 머리카락 하나 건드리지 못한다
하지만 처용의 이야기는 살아 남아
새로운 노래와 풍속을 짓고 유전해 가리라
정간보가 오선지로 바뀌고
이제 아무도 시집에 악보를 그리지 않는다.
노래하고 싶은 시인의 말 속에
은밀히 심장의 박동을 골라 넣는다
그러나 내 격정의 상처는 노래에 쉬이 덧나
다스리는 처방은 이야기일 뿐
이야기로 하필 시를 쓰며
뇌수와 심장이 가장 긴밀히 결합되길 바란다.
물망초꽃밭, 1991
놀부전 최두석
놀부전
아니 볼 수 없다. 오장 칠보를
논두렁에 구멍 뚫기, 패는 곡식 이삭 자르기
말리는 놈 밀어 놓고 발꿈치로 탕탕 차기
결국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흥부의 박은 다시 열리지 않는다
놀부의 성질이 고쳐진 것도 아니다
흥부 재산 가로채 부자가 되고 나자
왈짜패는 새삼 몰려들어 충성을 맹세하고
그가 탄 마지막 박에서 나온 개똥은
나라 곳곳에 즐비하다
흥부야, 곤장 품팔이 가는 흥부야
네 눈동자 속에 나타나 보인다
잔디밭에서 무참히 끌려 간 친구의 얼굴이.
물망초꽃밭, 1991
농섬 최두석
농섬
황사바람 뿌옇게 부는 토요일, 고온리 사람들 창자 울리는 푹격기 폭음 들리지 않는 날이다. 고온리를 쿠니로 들은 양키들, 이른바 쿠니 사격장이 쉬는 날이다. 며칠전 `사격장을 아메리카로'라고 외치며 철조망을 넘어가 과녁 위에 누웠던 주민들 몇은 경찰서 유치장에 갇혀있고 시위 재발 대비해 사격장 한 켠에 백골단 진치고 있는 날이다. 그래도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휴일에만 출입할 수 있는 드 넓은 갯벌에는 도요새 게구멍을 파고 남정네들 낙지를 잡고 아낙네들 조개를 캔다. 물 들면 물살에 몸을 적시다가 썰물 때면 갯벌 위로 떠오르는 섬. 온갖 바다새 물새 알 낳아 품던 무성한 숲은 신기루가 되고 이제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벌거숭이 섬. 농섬에서 쇳덩이를 캐는 사람도 있다. 섬에 쏟아지는 하고많은 폭탄, 폭탄이 박아 놓은 쇳덩이다. 육이오 때부터 폭격이 그치지 않는 농섬. 필리핀이나 괌의 미군기까지 날아와 전쟁연습하는 농섬. 폭격으로 처참하게 무너지며 새삼 식민지가 무엇인지 묻는 농섬. 너를 귀머거리 벙어리라 여기며 등 돌리는 자 누구인가. 너의 간절한 외침 파도 소리에 실려 오는데 귀에 말뚝 박고 태극기를 높이 흔드는 자 누구인가.
성에꽃, 문학과지성사, 1990
누님 최두석
누님
너무 똑똑한 양반이라 벌이도 없는, 남편 모시고
정순이 누나, 수의를 지어 생계 꾸리니
윤달이면 준비성 많은 노인들의 주문이 쇄도해 바쁘고
그 틈에 큰어머니 수의도 미리 지어 두고
간경화증 남편 청춘에 이별한
정님이 누나, 한복 바느질과 하숙으로 삼남매 기르고
중등학교 시절 의지할 곳 없던 나는
거기에 살며 더러 친구들도 데려다 하숙시키고
시집간 지 일년 만에 잉태한 채 죽은
정희 누나, 큰어머니 잦은 눈물의 샘이 되고
그 뒤 매형은 주유소를 차려 돈벌이 제일 잘하고
새로 색시 얻었지만 아직도 사위 노릇 지극하고
육이오 전쟁통에 종두를 못 맞아 곰보가 된
정옥이 누나, 4H니 전화 교환원이니 안간힘이다가
사귄 청년 운전 면허 따게 해 사고 몇 번 치르고
이제 숙련된 그는 영업용 택시를 몰아 가장(家長) 구실하고
대학의 과사무실에서 만난 선배 은숙이 누나는
자취하는 내 쌀 걱정, 추운 걱정 도맡더니
지금 아내가 되어 있다.
물망초꽃밭, 1991
달래강 최두석
달래강
임진강이 굽어 흐르다 만나는 휴전선, 그 달개비꽃 흐드러진 십 리 거리에서 부모 없이 과년한 오누이가 살고 있었다.
오누이는 몇 마디씩 고구마 넝쿨을 잘라서 강 건너 밭에 심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갑자기 쏟아지는 소나기 고스란히 다 맞고 바라본 누이의 베옷. 새삼스레 솟아 보이는 누이의 가슴 언저리. 숨막히는 오빠는 누이에게 먼저 집에 가라 하고 집에 간 누이는 저녁 짓고 해어스름에도 아직 돌아오지 않는 오빠를 찾아 나섰다. 덤불숲 헤매다 반달이 지고 점점점 검게 소리쳐 흐르는 강물, 그 곁에 누워, 오빠는 죽어 있었다. 자신의 남근을 돌로 찍은 채.
하여 흐르는 강물에 눈물 씻으며 누이가 외었다는 말, ꡒ차라리 달래나 보지, 달래나 보지 그래……ꡓ
물망초꽃밭, 1991
달팽이 최두석
달팽이
임진강물이 역류해 들어오는 문산천, 초병의 총구가 무심히 햇빛에 빛나는 유월 어느날, 기슭에 수양버들 한 그루, 그 아래 화강암 돌비 하나. 너무 한적해서 간혹 물거품을 터뜨리는 냇물 속에 조용히 잠겨 있던 달팽이 무리, 그 달팽이 무리가 뻘흙 위로 상륙한다. 굼실굼실 기슭의 수양버들 밑둥으로 기어 오른다. 제각기 등에 집을 진 채 동둑으로 뻗은 밋밋한 가지를 타고 달팽이의 느릿한 행렬이 이어진다. 마침내 가지 끝에서 온몸을 집 속에 감추고 굴러 떨어진다.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달팽이는 계속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코를 쥐고 떨어진다. 버들가지 속잎이 파르르 파르르 떨리는 그 아래 풀밭에 떨어진 놈은 다시 물을 찾아 굼실거리고 돌비 위로 떨어진 놈은 당장 깨져 죽는다. 달팽이의 시신이 널어 말려지는 돌비, 돌비에는 핏빛 글씨로 `간첩사살기념비'라 씌어 있다. 그때 초병이 걸어와 돌비 앞에서 거수경례를 붙이고 그의 군화 밑에는 굼실거리던 달팽이 몇 마리 깔려 있다.
성에꽃, 문학과지성사, 1990
담양장 최두석
담양장
죽장의 김삿갓은 죽고
참빗으로 이 잡던 시절도 가고
대바구니 전성 시절에
새벽 서리 밟으며 어머니는 바구니 한 줄 이고 장에 가시고 고구마로 점심 때운 뒤 기다리는 오후, 너무 심심해 아홉 살 내가 두 살 터울 동생 손 잡고 신작로를 따라 마중갔었다. 이십 리가 짱짱한 길, 버스는 하루에 두어 번 다녔지만 꼬박꼬박 걸어오셨으므로 가다보면 도중에 만나겠지 생각하며 낯선 아줌마에게 길도 물어가면서 하염없이……그런데 이 고개만 넘으면 읍이라는 곳에서 해가 덜렁 졌다. 배는 고프고 으스스 무서워져 한참 망설이다가 되짚어 돌아오는 길은 한없이 멀고 캄캄어둠에 동생은 울고 기진맥진 한밤중에야 호롱 들고 찾아 나선 어머니를 만났다. ―어머니는 그날 따라 버스로 오시고
아, 요즘도 장날이면
허리 굽은 어머니
플라스틱에 밀려 시세도 없는 대바구니 옆에 쭈그려앉아
멀거니 팔리기를 기다리는
담양장.
성에꽃, 문학과지성사, 1990
동두천 민들레 최두석
동두천 민들레
어디에 발 뻗고 누우랴. 칼잠 자는 사람들 불편한 잠자리 탓하는 소리 들리는 듯한 동두천 남산모루 공동묘지. 첩첩한 무덤 틈새 비집고 어설프게 자리잡은 작은 무덤, 무덤 위에 피어 있는 민들레 한 송이.
민들레야, 동두천 민들레야. 너에게서 키 작은 양공주의 굴욕과 자존심을 느끼는 것은 다만 신경과민일 뿐이라고 말해다오. 박토에 뿌리내려 밟혀도 짓밟혀도 다시 돋는 끈질긴 생명이라고 계속 우기다가 살랑대는 봄바람에 보란 듯이 꽃씨를 날려 보내렴.
그렇지만 양키의 어지러운 군화발이 반도에서 사라지는 날, 우리가 우리의 살림을 주장하는 그날이 오면 너는 그냥 전설로 남아다오. 이 땅에 태어나 막다른 길로 쫓기고 몰리다가 자살한 양공주, 그녀의 이름이 민들레였다고 속삭이며 담뿍 이슬을 머금고 피어나렴.
물망초꽃밭, 1991
망초꽃밭 최두석
망초꽃밭
고향길 모퉁이 산비알밭
가슴팍 헤치고 부는 바람에
하얗게 흔들리는 꽃무리
고가메댁 호미 들고 어디로 갔나
고가메양반 두엄 지고 어디로 갔나
지금 감자알 굵어지고
초록 완두콩 여물어 갈 무렵
밭둑까지 우거진 망초 꽃무리
벌 나비 불러 흠뻑 흐드러지나니
바람결에 들었던가
고가메양반 서울 가 청소부 되었다는 말
쓰레기 치워 고물 주워
먹고 살 만하다는
구불구불 눌러 쓴 볼펜 글씨
그 누가 편지 한 통 받았다던가
편지 받은 이마저 동네 떠나고
이제는 동네라고도 말할 수 없는
헛헛한 고향, 빈집에 바람보다는
빈 밭에 바람보다는
무수한 꽃망울
무성한 망초꽃 우줄거려 좋아
내 마음 꽃송이 따라 하염없이 흔들리나니
일찍이 망초꽃, 아메리카에서
물 건너 온 사연 잊어도 좋으리
양키의 기병대에 잿더미 된
인디언 마을 옥수수밭
망초꽃밭 되었다는 슬픈 이야기
잠시 잊어도 좋으리.
물망초꽃밭, 1991
샘터에서 최두석
샘터에서
새벽 노을 속
까마귀떼 잠 깨어 날아 오른다
깃들인 자리 대숲
댓잎에 내린 된서리에
부리를 닦고
사나운 꿈자리
날개짓으로 훨훨
털어내며 날아 오른다
눈녹이물 다시 논밭에서
서릿발로 일어선
텅 빈 들판 위로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칼날 바람 타고 잇따라
솟구쳐 오른다
어느새 수백 수천의 까마귀
결빙의 하늘에서 만나
원무를 춘다
거친 숨결 하늘에 뿜어
드디어 능선 위로 불끈
해가 솟는다.
물망초꽃밭, 1991
성에꽃 최두석
성에꽃
새벽 시내버스는
차창에 웬 찬란한 치장을 하고 달린다
엄동 혹한일수록
선연히 피는 성에꽃
어제 이 버스를 탔던
처녀 총각 아이 어른
미용사 외판원 파출부 실업자의
입김과 숨결이
간밤에 은밀히 만나 피워낸
번뜩이는 기막힌 아름다움
나는 무슨 전람회에 온 듯
자리를 옮겨다니며 보고
다시 꽃이파리 하나, 섬세하고도
차가운 아름다움에 취한다
어느 누구의 막막한 한숨이던가
어떤 더운 가슴이 토해낸 정열의 숨결이던가
일 없이 정성스레 입김으로 손가락으로
성에꽃 한 잎 지우고
이마를 대고 본다
덜컹거리는 창에 어리는 푸석한 얼굴
오랫동안 함께 길을 걸었으나
지금은 면회마저 금지된 친구여.
물망초꽃밭, 1991
우렁 색시 최두석
우렁 색시
나의 선조는 최치원이 아니고
차라리 우렁이라 할까
끊임없이 생수 솟구치는 둠벙
둠벙에 깊이 잠겨 사는
주먹만한 우렁이라 할까
세상에서 가장 순박하고 억센
총각이 짓는 논을 골라
풍년 나락이 넘실대는 논고랑을 기어나와
`이 농사 거두어 누구랑 먹고 살지'하는
총각의 혼잣말에 응수한
목소리 해맑은 우렁이라고나 할까
총각이 주머니에 넣었다가
부엌 물덩이에 담가 두었더니
살며시 밥 짓고 바느질한
우렁에서 나온 색시라 할까.
어느날 들에 밥고리 이고 나갔다가
너무 예쁜 죄로 원님에게 들켜
우렁 색시는 원님의 첩이 되었지만
이미 농사꾼의 씨를 받아 아이를 낳으니
그 아이가 나의 선조라 할까
내 시 또한 최치원에게서
혹은 그를 추종한 천년 문학 전통에서
별로 배운 바가 없으니
내 시의 뿌리도 차라리 우렁 색시라 할까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지만
입에서 입으로 끈덕지게 전해 내려와
어린 날 누님의 목소리로 내 귀에까지 들어온
우렁색시 이야기 같은 것이라 할까.
물망초꽃밭, 1991
인천 자유공원에서 최두석
인천 자유공원에서
인천 사람들이 연애를 할 때면
으레 들르는 자유공원
황해의 황홀한 일몰을 구경하다
은근히 손목을 끌어쥐는 곳
특히 한미수교백주년 기념탑 으슥한 그늘에서는
돌연 입술을 맞대기도 하는
추억의 공원
아, 우리에게 자유란 무엇인가
솜사탕을 사 먹으며
새점을 치고 관광사주를 볼 자유인가
비둘기에게 모이를 주고
푸드덕거리는 날개에 둘러싸여 사진 찍을 자유인가
이 땅의 자유는 실로 연애의 자유에서
과연 얼마나 더 나아갔는가
공원은 그러한 소중한 자유를
더글라스 맥아더라는 자가 주었다고
가르친다
망원경을 들고 우뚝 서서
그가 상륙했던 월미도를 바라보며
맥아더의 동상은 설교한다
자유는 미국이요 미국은 곧 자유라고
그렇지만 자유가
민족의 분단처럼 외부에서
일방적인 선물로 주어질 성질의 것인가
도대체 자유라는 게
부두에 무심히 쌓아올려지는
수입 쌀이나 밀 같은 것인가 아니면
기관총이나 미사일 같은 것인가.
물망초꽃밭, 1991
장화홍련 최두석
장화홍련
눈동자 속에 가득한 꽃
그 중 장화홍련(薔花紅蓮)을 읽는다
부러진 가로수 가지에서 안개가 피어나고 무진의 거리를 장화가 걷는다. 몇 군데 가게를 둘러 미래의 아기옷을 사들고 문을 여는 순간 비칠 쓰러졌다. 홍련은 마구 뛰었다. 어느 낯선 민가의 문을 밀치고 들어섰다. 기다리던 장쇠는 이미 칼을 거두었다. 안개가 덮여 왔다. 자욱히 숨막히게 그녀의 치마가 바람에 날려다녔다.
교외의 쓰레기 처리장에서는
장미가, 연못에서는
연꽃이 썩는다
내 눈동자도 썩어 들어간다.
물망초꽃밭, 1991
전길수씨 최두석
전길수씨
문산에서 경의선 따라
염소들 한가히 풀 뜯는 철길 걷는다
수수가 바람에 우줄거리고 모밀꽃
꿀벌을 부르는 철길 걷는다
마침내 노반도 침목도 사라진 철길은
임진강 십 리 앞에서
칙칙폭폭 소리도 없이 여우굴로 접어든다
여우굴에서 십오 년째 버섯을 기르는 전씨는 오 년 전 북한쌀이 판문점을 넘어오던 해에 철거 명령을 받았다고 한다. 그렇지만 그는 변 함없이 계속 볏짚에 깻묵과 닭똥을 버무려 양송이를 길렀다. 남북 합의는 언제나 깨지기 마련이고 복구 공사 착수 후에 옮겨도 충분하다고 계산한 때문이었다. 그런데 막상 재벌 왕초 정주영이 북행길에 올랐을 때는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싶어 옮겨갈 땅까지 빌어 놓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요즘 자신이 성급했음을 후회하고 있다.눈이 오나 비가 오나 굴 속은 사철 양송이 재배의 최적지, 굴을 미리 포기하는 것은 인절미 두고 보리개떡 찾는 격이라고 말한다. 통일만 된다면 이까짓 버섯이 문제냐고, 언제라도 털고 일어서겠다고 기염을 토하지만 문익환과 임수경의 방북은 막무가내 인정하려 않는다. 경의선 기차를 이용하지 않았으므로 당연히감옥에 가야 한다고 침을 튀긴다.
성에꽃, 문학과지성사, 1990
전태일 최두석
전태일&
달 없는 어둠 속을 검게 숨죽여 흐르는 강물, 별들은 모두 선잠 깬 듯 깜박거린다. 한사코 그늘에서 그늘로만 옮겨 디디며 살아온 자의 생애가 오늘밤 급한 여울을 이루며 흘러 내린다.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지는 물살이 한줄기 도도한 강물로 흐른다. 문득 물결을 타고 어룽더룽 두꺼비 한 마리 헤엄쳐 오른다. 무겁게 알 밴 몸이 물살을 따라 흐르다가 다시 자맥질하며 거슬러 오른다. 마침내 기슭으로 기어올라 엉거주춤 뒷발에 한껏 힘을 주고 두리번거린다. 가슴을 벌럭이며 결연히, 어찌할 수 없는 천적 독사를 찾아나선다. 그리하여 드디어 온몸으로 잡아 먹힌다. ……이제 며칠 후면 독사의 뱃가죽을 뚫고 수백 마리 새끼 두꺼비가 기어 나오리라. 독사의 살을 먹으며 굼실굼실 자라리라.
물망초꽃밭, 1991
정여립 최두석
정여립
천하에 어찌 일정한 주인이 있으랴. 지당한 말을 너무 일찍 한 탓에 정여립은 살해되고, 더불어 천여 명이 죽고 다치면서 당쟁은 불 붙고…… 이제 사람들은 다 잊어버린 사건이 되었지만 그의 이름은 금산의 모악산 골짜기, 파뿌리 할머니의 입을 통해 억센 장사로 되살아 난다. 힘차게 바위를 굴려 성을 쌓는다. 누이는 삼씨를 뿌려 어느새 천 벌의 옷을 다 지어가고 그들의 어미는 뜨거운 팥죽으로 딸을 유혹한다. 어미의 뜻을 짐작한 누이는 부러 내기에 져서 죽고…… 할머니는 마치 오누이의 어머니인 양 한숨을 쉰다. 목숨내기가 어찌 그리 장난같을까. 한숨은 저녁 어둠에 스며 자욱히 퍼지고 정여립이 정말로 모반했을까 의심하는 오늘날, 실상 그가 진짜 반역자였으면 싶다.
물망초꽃밭, 19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