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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약 있습니다! | ||||
[사람 사는 이야기-홍승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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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기 싫은 모임이 가끔 있다. 그런 모임 안 가면 그만이라고 말하긴 쉬워도 거절하는 게 쉽지 않다. 그 모임 구성원들과 나의 관계가 깊은 신뢰로 맺어진 경우이거나 취미나 기호가 같아서 맺어진 경우는 더욱 그렇다. 이번 ‘책 읽는 목사 모임’에서 가는 수양회가 그런 경우였다. 한 달에 한 번씩 목사들이 정해진 책을 읽고 모여서 발제를 하거나 듣고 함께 토론을 하는 것은 아주 즐거운 일이다. 아니 즐겁다는 말만으로는 부족하다. 행복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딱 거기까지만 좋다. 더 이상 깊이 엮이는 것은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다. 무슨 거창한 일을 한다고 하룻밤을 같이 지내며 돈과 시간을 들여야 하는지 나는 이해가 안 가는 경우가 많다. 민족의 평화와 통일을 위해 고민하는 것도 아니고 복음의 본질을 어떻게 살 것인지를 깊이 공부하는 것도 아닌데 단순히 쉬고 놀기 위해서 어디론가 가서 맛난 것 먹고 좋은 잠자리에서 자고 오는 것은 마음이 불편하다. 거기다 정치적인 계산까지 깔려 있는 모임인 경우는 괴롭기 그지없다. 그렇게 불편한 맘으로 모임에 다녀오면 영락없이 몸에도 탈이 난다. 그럴 때마다 몸에게 미안하다. 그래서 언제부턴가 나는 결심했다. 의무로 가야하는 모임이 아닌 경우, 내가 기쁘게 갈 수 있는 모임이 아니면 가지 않는다. 그렇게 하는 것이 나뿐 아니라 거기 참석하는 사람을 위해서도 최선이기 때문이다. 괜히 참석해서 인상만 쓰고 있거나 ‘잘못 왔구나!’ 하는 맘으로 앉아 있으면 그 모임에도 피해를 주게 된다. 그래서 이번 책 읽는 모임 수양회는 못 가겠다고 통보했다. 마침 그날 내가 처리해야 할 일이 두 가지나 있었기에 거짓말 안하고 그 수양회에서 빠질 수 있었다. 하지만 어떤 때는 아주 곤란한 경우가 있다. 모임에 가기는 싫은데 나한테 모임에 참석하지 못할 특별한 사정이 없는 경우이다. 그럴 때는 숨을 여러 번 고르고 솔직한 마음을 말하거나 가끔은 거짓말을 했다. 특별한 사정이 있다고 말이다. 그러고 나면 한동안 마음이 찜찜하다. 그래도 이 문제에 대한 뾰족한 수를 못 찾은 나는 그렇게 지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북산 최 아무개 목사님이 내시는 소식지를 보다가 거짓말을 안 하고도 모임에 빠질 수 있는 묘안을 배우게 되었다. 이 묘안은 최 목사님이 쓰시는 방법인데, 가기 싫은 모임에는 선약이 있다고 하고 안 간다는 것이다. 거짓말이 아니라 정말 먼저 한 약속, 즉 선약이 있다는 것이다. 그 선약에 대한 설명을 들으며 나는 무릎을 쳤는데, 그 약속은 자기가 자기 자신과 한 약속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약속의 내용은 ‘가기 싫은 모임에는 가지 않는다.’ 라고 하셨다. 얼마나 절묘한 슬기인가.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서 가기 싫은 모임을 당당히 거절하는 것이다. 세상에 약속이 많지만 자기 자신과 한 약속, 그 약속만큼 엄숙하고 고귀한 약속도 많지 않으리라. 다른 사람은 모르는 약속이지만 그렇기에 더욱 깨어서 지켜야 하는 약속이기에 참으로 소중한 것이다. 그때부터 나도 큰 짐을 내려놓게 되었다. 나도 나 자신과 약속을 한 것이다. 가기 싫은 모임에는 가지 않는다는 약속 말이다. 요즘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 밤마다 텔레비전 앞에 앉는다. 교육방송이 신년기획으로 마련한 마이클 샌델 교수의 ‘정의’(Justice)를 보기 위해서다. 하버드 대학교의 정치철학 강좌를 보여주는 이 프로그램은 교수의 일방적 강의가 아닌 학생들의 토론을 통해 서로 다른 의견과 치열하게 논쟁하고 자신이 가진 견해의 부족한 점을 찾아내는 방식으로 정치철학을 강의하고 배우는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나는 이 프로그램에서 진정한 토론이 무엇인지를 새삼 깨닫게 되었는데, 그 가운데 임마누엘 칸트를 들으면서 거짓말을 하는 것이 가볍게 보고 넘길 일이 아님을 철학적으로 배우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북산 최 아무개 목사님에게 배운 ‘선약’이 더욱 깊게 가슴에 와 닿았다. 가끔 그를 만나면서, 좀 거친 듯 보이지만 그 속에 고운 결을 품고 있는 목사라고 느끼고 있었는데 거기다 진리를 지킬 줄 아는 지혜도 담고 계셨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그를 따르는 젊은 목사들이 꽤 여럿 있는 것이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우리 교회의 교우이면서 내 벗인 서 선생 말마따나 이제는 하고 싶지 않은 일을 이런 저런 상황이나 눈치 때문에 하면서 살고 싶지는 않다. 나이를 조금씩 더 먹어가면서 더욱 그렇다. 이제는 하기 싫은 일은 하지 않으며,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은 하되 그 일에는 최선을 다하는 모습으로 살았으면 한다. 그러려면 내가 내 자신과 한 약속, 즉 선약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홍승표 /목사, 길벗교회, 청주에서 아내와 함께 천연비누 만드는 공방을 하면서 작은도서관 '지혜의 등대> 지킴이를 하고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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