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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략설명 | 선교사들의 선교 거점이자 성 도리 헨리코 신부님이 체포된 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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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번주소 |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동천동 734 |
도로주소 |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동천로437번길 67 |
전화번호 | (031)263-1242 |
팩스번호 | (031)263-1252 |
홈페이지 | http://cafe.daum.net/Sonkol |
전자메일 | songol-hl@casuwon.or.kr |
손골 성지는 수원시와 용인시에 걸쳐 있는 광교산(光橋山, 582m) 기슭,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동천로437번길 67에 있다. 원래 손골 성지에는 교우촌이 있었다. 교우촌은 천주교 박해시기 박해를 피해 신자들만이 모여 살던 작은 마을을 말한다. 손골 교우촌은 현재 ‘손골 성지’라고 불리는데 이곳에서는 프랑스 선교사로 병인박해(1866년) 때 순교한 도리(Dorie, 金, 헨리코) 성인과 오메트르(Aumaitre, 吳, 베드로) 성인 두 분을 특별히 기념한다. 아울러 박해시대 손골 교우촌에서 살았던 순교자들과 신앙 선조들의 정신을 기리고 있다.
손골 교우촌의 형성 우리나라에 교우촌이 생기기 시작한 것은 이미 신해박해(1791년) 때부터였다. 하지만 손골에 교우촌이 형성된 정확한 시기는 알지 못한다. 단지 교회사의 흐름에 따라 기해박해(1839년) 이전이 아닐까 추정할 뿐이다.
초기 교회 가장 큰 박해였던 신유박해(1801년) 이후 많은 신자가 박해를 피해 서울이나 경기도에서 멀리 떨어진 강원도나 충청도 등으로 숨어들어 교우촌을 이루며 살았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지방에서도 박해가 일어나자 지방에 살던 신자들도 이주해야 했다. 어떤 신자들은 서울에서 더 멀리 떨어진 경상도나 전라도로 피신하기도 했지만 어떤 신자들은 서울 가까이 이동하여 교우촌을 이루며 살기도 했다. 서울 가까이 가서 살아야 신자들 상호 간 연락도 쉽게 할 수 있고 서로 도우며 신앙생활을 더 원활하게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해박해 이전에 이미 서울 가까이에 몇몇 교우촌이 형성되었다.
손골에도 이즈음 교우촌이 생긴 것이 아닌가 추정하고 있다. 왜냐하면 병인박해 이전에 이미 손골 교우촌은 안정적이었던 것 같기 때문이다. 이 시기가 아니라면 기해박해 직후에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1831년 조선대리감목구(朝鮮代理監牧區)가 설정되고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서울 근교에는 교우촌이 많이 형성되었다. 선교사들이 자연스레 서울 중심으로 사목을 하게 되자 신부들 가까이 있어야 성사나 미사에 참여할 수 있었으므로 서울 근교에 교우촌이 늘어나게 되었다.
박해시기 손골 교우촌의 규모 병인박해 때 손골에서 체포되어 새남터에서 순교한 도리 신부의 편지에 따르면, 도리 신부가 손골에 체류할 당시 손골에는 신자들만 살고 있었고 모두 12가구였다고 한다. 그리고 근처에 3명의 불교 스님이 살고 있었다. 이는 도리 신부가 손골에 있을 때 10여 가구가 살았다는 정부 측 기록과도 일치한다. 한편 박해가 끝난 다음 1900년 하우현에 본당이 생겼을 때 그 공소로 편입된 손골 교우촌의 신자가 47명이었다.
이렇게 볼 때 손골에는 적어도 45-50명 정도의 천주교 신자들이 모여 살면서 신앙생활을 이어갔던 것 같다. 도리 신부의 편지에 따르면, ‘손골의 교우들은 주로 담배 농사를 하며 근근이 생계를 꾸려갔고, 논이 조금 있기는 하였지만 홍수로 폐허가 되어 먹을 것조차 구하기 어려운 생활을 하며 살았다’라고 한다.
손골 교우촌의 중요성 박해시대 서양 선교사들이 입국하면 안전한 곳에서 우리나라에서의 삶에 적응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했다. 선교사들이 신자들을 사목하기 위해서는 우선 새로운 언어와 풍습을 익혀야 했고 조선에서 살기 위한 준비를 해야 했다. 그런데 선교사들이 안전하게 머물면서 이런 준비를 하기 위해서는 신자들만 모여 사는 적합한 교우촌을 찾아야 했다. 이런 교우촌을 선정하는 데 있어서 무엇보다도 그곳에 사는 신자들이 열심하고 믿을 수 있어야 했다.
손골 교우촌은 이런 의미에서 다른 어떤 교우촌보다 선교사들의 신뢰를 받았던 것 같다. 박해시기인 1857년부터 1866년까지 무려 5명의 선교사가 손골에 묵으면서 신자들의 도움을 받아 적응기간을 가졌다. 그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들도 신자들을 방문하며 사목하는 것을 잠시 쉬는 여름철 농번기에는 손골을 찾아와 피정도 하고 지친 몸과 마음을 재충전하기도 했다. 이것은 그만큼 손골 교우촌의 신자들이 신앙적으로 견고하고 믿을 수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손골 교우촌과 선교사들 현재까지 밝혀진 한국 교회사 관련 자료 중에서 손골이 처음 언급된 것은 다블뤼(Daveluy, 安敦伊) 신부의 편지이다. 다블뤼 신부가 1853년 9월 18일 부모에게 보낸 편지의 발신지가 손골이었다. 다블뤼 신부는 이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조만간 저는 사목방문을 시작할 것입니다. 이번 사목방문은 아주 편안하고 별로 피곤하지 않을 것입니다.” 편지가 쓰인 날짜를 볼 때 다블뤼 신부의 이러한 언급은 여름 한때 휴식을 취하고 다시 사목방문을 나가면서 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1850년 페레올(Ferreol, 高) 주교는 병중에 있던 다블뤼 신부에게 신자 방문을 일시 중지하고 신학생 교육을 하도록 했다. 그래서 다블뤼 신부는 서울 근교에 머물며 어린 소년들을 모아 라틴어를 가르쳤다. 다블뤼 신부가 라틴어를 가르친 곳이 손골이라고 추정하는 이도 있다. 그러나 손골에서 이런 교육이 있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하지만 적어도 1850년에 다블뤼 신부가 병중에도 어린 소년들을 가르칠 장소, 더 나아가서는 신학교를 세울 장소를 찾아다닐 때 손골 교우촌을 방문했던 것이 틀림없다. 이러한 일들이 있었기 때문에 다블뤼 신부가 1853년 여름을 손골에서 지냈을 것이다.
그러다가 손골이 본격적으로 선교사들에게 조선의 언어와 풍습을 익히는 장소가 된 것은 1857년이다. 1854년 우리나라에 입국한 제4대 조선 대목구장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는 페롱(Feron, 權) 신부가 1857년 3월 입국하자 그를 손골로 보냈다. 이렇게 맨 처음 손골 교우촌에 거주하면서 조선어를 익힌 선교사는 페롱 신부였다. 그리고 페롱 신부가 손골에 있었던 1857년 최양업 신부는 손골로 페롱 신부를 찾아와 함께 지내다 갔다.
1861년 4월 7일 서울 베르뇌 주교댁에는 새로 입국한 선교사 4명이 도착했다. 이들 중 조안노(Joanno, 吳) 신부와 칼레(Calais, 姜) 신부는 손골로 배치되었다. 조안노 신부와 칼레 신부가 손골에서 언어와 풍습을 익힌 기간은 1861년 4월 말부터 그해 말까지인 것으로 여겨진다. 조안노 신부와 칼레 신부가 손골에 있던 1861년 성모승천 축일 때는 베르뇌 주교와 랑드르(Landre, 洪) 신부가 손골로 두 선교사를 찾아와 함께 머물며 휴식과 기도의 시간을 가졌다.
조안노 신부와 칼레 신부 다음으로 손골 교우촌에서 언어와 풍습을 익힌 선교사는 1863년 6월 23일 입국한 오메트르 신부였다. 오메트르 신부는 서울에서 한 달가량 지내고 1863년 7월 말경 손골에 왔다. 오메트르 신부의 손골 생활은 1864년 10월 말까지 지속되었다.
손골에서 언어와 풍습을 익히기 위해 손골에 마지막으로 온 선교사는 도리 신부이다. 도리 신부는 1865년 6월 23일 오후 5시경 손골에 왔다. 도리 신부는 손골에서 열심히 언어와 풍습을 익히던 중 병인박해 맞게 되어 1866년 2월 27일 오후 1시경 손골에서 체포되었고 3월 7일 서울 새남터에서 순교했다.
손골 교우촌은 선교 거점 손골 교우촌은 우리나라에 처음 입국한 선교사들이 언어와 풍습을 익히는 장소였을 뿐 아니라 신자들을 사목하고 선교하는 데도 중요한 장소였다. 손골 교우촌이 박해시대 신자 사목의 중요한 축이었기 때문이다. 그 예는 오메트르 신부의 사목활동에서 잘 드러난다. 오메트르 신부는 1863년 7월 말 손골에 와서 다른 선교사들처럼 언어를 배우며 적응기간을 갖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언어와 풍습을 익힌 오메트르 신부는 다음 해인 1864년 성령강림 대축일에 당시 조선교구장(대목구장)이었던 베르뇌 주교를 찾아 서울로 올라갔다. 이때 베르뇌 주교는 오메트르 신부에게 “손골과 가까운 고을” 네 곳을 사목하라고 인사발령을 했다.
발령을 받은 오메트르 신부는 손골로 돌아와 1864년 10월 말까지 머물며 신자들을 사목했다. 이때 손골 인근의 묘루니 교우촌이나 신봉리 교우촌 등 아주 가까운 곳의 신자들을 사목했다. 그러다가 11월 1일 모든 성인의 축일에 다른 지역 신자들을 사목하기 위해 손골을 떠나 미리내로 갔다. 이렇듯 손골은 경기도 지역을 사목하는데 하나의 중요한 축이었다. 손골을 중심으로 가까운 곳을 사목하다가 자리를 옮겨 미리내를 중심으로 사목하고, 또다시 다른 지역으로 옮겨 그곳을 중심으로 신자들을 찾아보며 사목과 전교를 했다.
선교사들의 손골에서의 생활 도리 신부의 편지를 보면, 도리 신부는 손골에 먼저 왔던 다른 선교사들이 머물렀던 바로 그 집에 묵었다. 더욱이 그 집에서 다른 선교사들을 모셨던 이군옥(李君玉, 요셉)의 가족들이 또다시 도리 신부를 돌보았다. 그러니까 손골에 온 선교사들은 모두 같은 집에 머물렀다. 페롱, 조안노, 칼레, 오메트르, 도리 신부가 모두 시차를 두고 한 집에 머물렀다. 아마도 선교사들을 위해 따로 장만한 집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다른 선교사들이 그 집을 찾아와 함께 자면서 쉬어갔다는 사실을 보면, 이군옥은 다른 선교사들이 편안히 쉬다 갈 수 있도록 그 뒷바라지까지도 성실하게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이군옥은 단순히 선교사들의 뒷바라지만 한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조선어를 가르쳐주는 스승 역할까지 했다. 도리 신부는 자신도 이군옥에게 조선어를 배웠는데, 이군옥이 매우 용감한 사람이라고 했다.
이런 사실들을 종합하여 볼 때 손골의 교우인 이군옥과 그의 가족은 지적 수준도 상당했을 뿐 아니라 신앙심이 깊고 신중하게 행동하는 사람이었으며, 선교사들을 최선을 다해 모시려고 노력한 충직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다른 손골 교우들은 물론 선교사들에게 큰 신뢰를 받아 계속해서 선교사들의 뒷바라지를 했던 것 같다.
손골에서 생활하는 선교사들에게 미사를 봉헌할 수 있는 특별한 공간이 따로 있을 수 없었다. 그들의 방이 곧 경당이었다. 그 방에 널빤지로 제대를 만들어 흙벽에 고정했다. 그리고는 선교사들과 신자들은 매일 이곳에서 함께 미사를 봉헌하며 하느님을 찬미했다.
도리 신부의 편지에 따르면 도리 신부는 함께 입국하여 손골에서 5km 정도 떨어진 묘루니 교우촌에 머물던 친구 볼리외(Beaulieu, 徐) 신부를 찾아가기도 하고 또 볼리외 신부가 도리 신부를 찾아오기도 했다. 모처럼 만난 이런 기회를 이용해 이들은 함께 노래를 부르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했지만, 침묵을 지키고 단식을 하며 함께 피정을 하기도 했다.
손골 교우촌의 순교자들 손골 교우촌과 관계있는 순교자로는 우선 도리 신부와 오메트르 신부가 있다. 도리 신부는 1866년 2월 27일 오후 1시경 체포되어 3월 7일 서울 새남터에서 순교했다. 오메트르 신부는 도리 신부 순교 후인 3월 11일 충남 거더리에서 자수한 후 체포되어 3월 30일 보령 갈매못에서 순교했다. 두 순교자 모두 103위 성인 명단에 포함되어 있다.
두 성인 신부들 외에도 손골 교우촌에서 선교사들의 지도를 받았던 신자 중에도 순교한 이들이 여럿 있다. 병인박해가 시작되자 도리 신부는 손골 교우촌에 함께 지내던 신자들을 모두 손골에서 떠나게 한 뒤 홀로 남아 있다가 체포되었다. 손골 교우촌 신자들은 도리 신부의 명령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손골을 떠났지만 다른 곳에 가서도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다가 체포되어 많이 순교했다. 그중에서 다음의 삼대(三代)에 관한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하다.
이 요한 · 아들 베드로 · 손자 프란치스코 삼대가 경기 손골에서 병인 첫 군난에 쫓기어 용인 남성골로 내려와 베드로가 용인 포졸에게 9인이 함께 잡혀 일곱 사람이 배교하고 다 나오고 베드로하고 다른 사람하고 둘만 갇혔더니, 포졸 행수(行首)가 원(員) 모르게 놓아 또 그곳에 살더니, 정묘년(1867년) 10월에 또 삼대가 잡혔더니, 그 포교 하는 말이 “다 누구냐?” 하되 베드로 말이 “다 내 식구라” 하니 그 포교 말이 “지금 영(令)은 엄하나, 그럴 수 없으니 하나만 가자” 하니 베드로 말이 “가자” 하니 베드로의 부친 요한의 말이 “하나만 갈 테면 내가 가겠다”고 부자 다투니, 그 포교 익히 생각하다가 다 놓고 간 후에 충청도 아산 일북면 쇠재 가서 살더니, 경오년(1870년) 2월 23일 야경에 서울 좌변(左邊) 포교와 본골 장교하고 와서 잡으며 묻는 말이 “성교(聖敎)하느냐?” 한 즉 “물을 것 없다. 성교 아니 하면 내가 너에게 잡힐 것 없다” 하고 그 길로 본읍(本邑)에 들어가 하루 묵고 본골 장교하고 요한 · 베드로 · 프란치스코 삼대가 함께 서울 좌포도청으로 들어가서 문목(問目)할 때 대답이 한결같다 하더라.
이렇듯 서로를 보호하기 위해 서로 잡혀가겠다고 했던 할아버지 이 요한과 아들 이 베드로, 손자 이 프란치스코는 1871년 3월 19일(음) 좌포청(左捕廳)에서 다 함께 순교했다.
순례지가 된 손골 손골이 순례지가 된 데에는 참으로 재미있는 역사가 있다. 손골은 한국에서가 아니라 도리 신부의 고향에서 주도해 순례지가 되었다. 도리 신부는 프랑스 방데(Vendee) 지방의 생 틸래드 드 딸몽(Saint-Hilaire de Talmont) 본당 출신이다. 죠셉 그를레(Joseph Grelet) 신부가 1956년부터 1966년까지 이 본당의 주임으로 있었는데 도리 신부를 비롯한 한국 순교자들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그를레 신부는 병인박해 순교자들의 순교 100주년이 되는 1966년 이전에는 도리 신부 등 병인박해 순교자들이 시복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교황청 시성성(諡聖省)을 비롯해 프랑스 주재 교황대사, 한국 주재 교황대사, 프랑스 주교회의, 한국 주교회의 등에 편지를 보내 시복을 속히 해달라고 청원했다.
이렇게 노력하던 그를레 신부는 1963년경 직접 한국을 방문해 손골을 순례했다. 당시는 비행장이 서울 여의도에 있던 시절이었고 지금처럼 한불간의 교류가 많을 때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직접 손골을 찾아와 손골과 도리 신부 고향 딸몽을 연결하였다. 프랑스로 돌아간 그를레 신부는 1964년 “조선, 순교자들의 땅(La Coree, Terre de Martyrs)”이라는 책을 저술했다.
그를레 신부의 노력은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1966년 도리 신부 순교 100주년을 맞아 도리 신부가 살았던 한국 용인의 광교산 산속의 손골과 도리 신부의 고향 프랑스 방데 지방의 딸몽을 새로운 방법으로 다시 연결하였다. 그를레 신부는 농부였던 도리 신부의 부친이 사용하던 화강암(granit)으로 된 맷돌에서 똑같이 생긴 십자가를 두 개 만들었다. 그런 다음 하나는 도리 신부 고향에 두고 다른 하나는 한국으로 보냈다. 이렇게 해서 도리 신부가 탄생한 곳과 도리 신부가 선교하러 와서 생의 마지막을 보냈던 곳을 연결하고자 했다.
이렇게 일란성 쌍둥이로 태어난 돌 십자가 하나는 1966년 3월 8일(원래 순교일은 3월 7일인데 프랑스에서는 8일로 잘못 알려져 있었다) 도리 신부 순교 기념일에 도리 신부 생가(生家) 벽에 모셨다. 그리고 한국에 보내온 다른 돌 십자가는 당시 손골 공소를 사목하던 수원 북수동 본당 주임 유봉구(柳鳳九, 아우구스티노) 신부가 받았다. 유봉구 신부는 그 돌 십자가를 토대로 손골에 도리 신부의 순교를 기념하는 비(碑)를 세웠다. 한국산 화강암으로 큰 벽돌을 만들고 그 벽돌을 쌓아 탑 모양의 현양비를 세웠다. 이 비의 맨 꼭대기에는 딸몽에서 보내온 돌 십자가를 올려놓았고, 이 도리 신부 현양비는 1966년 10월 24일 축복되었다.
이렇게 현양비를 만들면서 손골 순례가 시작되었고 손골에서 도리 신부를 적극적으로 기념하게 되었다. 도리 신부의 순교정신을 현양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직접 손골을 순례하기까지 한 프랑스인 그를레 신부의 노고가 이런 좋은 결과를 낸 것이다.
도리 신부의 부친이 사용하던 맷돌로 만든 십자가에는 도리 신부 고향 프랑스 방데 지방의 로고가 새겨져 있다. 이 로고에는 심장 두 개가 표현되어 있다. 2016년 10월 손골을 방문한 도리 신부 고향 교구 뤼송 교구장 카스테(Alain Castet) 주교는 이 두 심장을 이렇게 설명했다. “이 두 심장에 정치적인 의미가 부여되기도 했었습니다만, 우리 신자들에게는 예수님과 성모님의 성심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이 로고와 함께 새겨진 UF라는 글자에 주목한다. 이 글자는 라틴어 Utrique Fidelis의 앞글자이다. “양쪽 모두 충성한다”는 의미이다. 즉 “신앙에(pour la foi) 충실하고, 왕에게(pour le roi) 충성한다”라는 의미로 해석한다. 이러한 의미는 프랑스 대혁명 후 1793년부터 1796년까지 왕정복구를 위해 정부군에 대항하여 농민이 주축이 되어 방데전쟁을 일으킨 방데 지방의 역사를 비추어보면 이해할 수 있다.
손골의 도리 신부 현양비 손골에 있는 도리 신부 현양비에 모셔진 돌 십자가는 1966년 도리 신부 고향에서 보내온 원형 그대로 잘 보존되어 있다. 하지만 돌 십자가를 바치는 탑의 형태는 수차례의 변형을 거쳐 현재는 처음 만들어진 형태로 복원되어 있다. 처음 현양비는 화강암 벽돌을 사방으로 4개씩 10단을 쌓아 만든 10층짜리 현양비였다. 그 위에 도리 신부 고향에서 보내온 돌 십자가를 모셨다. 그러다가 1968년 10월 6일 병인박해 순교자 24위가 시복되자 새로운 도리 신부 현양비를 만들었다. 기존의 현양비에다 벽돌을 사방으로 8단을 더 쌓아 18층짜리 현양비를 만들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역시 맨 위에 도리 신부 고향에서 보내온 돌 십자가를 모셨다. 1990년에 손골에 경당(經堂)을 지으면서 이 현양비가 철거되었다. 그러다가 1991년 경당을 준공하면서 새 현양비를 오석(烏石)으로 만들어 세웠다. 그리고는 그 맨 위에 도리 신부 고향에서 보내온 돌 십자가를 모셨다. 그러다가 기온의 변화로 오석이 떨어지는 등 안전에 위험이 있어 2014년 봄에 원래 모습대로 복원하였다.
처음으로 만든 현양비 머릿돌에는 “김 베드루 신부 순교 기념”이라고 쓰여 있었다. 도리 신부를 “김 베드로” 신부로 소개한 것이다. 도리 신부는 우리나라에서 “김”이라는 성(姓)을 택했다. 요동에 있을 때는 성을 두(杜)로 했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그런 성이 낯설어서 고쳤을 것이다.
어떻든 도리 신부가 우리나라에서 김씨 성을 택했으니 김 신부라고 불리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문제는 세례명을 베드로로 표기한 것이다. 손골에 처음 세워진 기념비에만 그렇게 표기된 것이 아니다. 당시 도리 신부는 “김 베드로” 신부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1968년 10월 6일 시복식이 있은 후 만들어진 24위 복자전 등 책에도 그렇게 되어 있다.
도리 신부의 부친은 피에르 도리(Pierre Dorie)이고 모친은 즈느비에브 비뇬노(Genevieve Bignonneau)이다. 도리 신부의 부친은 아들이 태어나자 헨리코(Henri)라는 이름을 붙여주면서 자기와 같은 피에르라는 이름도 하나 더 붙였다. 그래서 도리 신부의 이름을 전체로 적으면 피에르 앙리 도리(Pierre-Henri Dorie)이다. 피에르는 베드로를 프랑스식으로 부른 것이다. 그러니까 도리 신부에게는 피에르라는 이름도 붙여져 있으니 “김 베드로” 신부로 불렀다고 해서 아주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도리 신부는 편지를 쓰면서 언제나 도리 헨리코(Henri Dorie)라는 이름으로 서명하였다. 그러니까 도리 신부의 이름을 전체로 쓸 때는 도리 베드로-헨리코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냥 부를 때는 도리 헨리코라고 불러야 한다. 1984년 시성식을 앞두고 한국천주교회는 이 문제를 파리 외방전교회에 문의한 적이 있었다. 파리 외방전교회에서는 입회 처음부터 도리 헨리코로 정리하고 있다고 알려주었고 한국천주교회도 이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손골 순례지의 발전 손골이 순례지로 거듭나게 된 데에는 프랑스 쪽의 노력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돌 십자가를 받은 유봉구 신부의 수고도 있었다. 그리고 파티마 성모 프란치스코 수녀회 창립자 고 이우철(李宇哲, 시몬) 신부의 수고도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순교자의 후손인 이우철 신부는 순교자들에 대해 남다른 신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손골 가까이 수지 동천동에 모원이 있는 파티마 수녀들에게 손골을 자주 순례하도록 권하였다.
이우철 신부는 고아들을 위해 성심원을 창립하였는데 서울 잠원동에서 수지 동천동으로 성심원을 옮겨 파티마 수녀들과 함께 운영하였다. 그런데 이우철 신부는 성심원 후원자들에게도 손골 교우촌을 소개하고 순례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노력은 이우철 신부 사후(死後)에 결실을 맺었다. 1988년 성심원 후원자들로 구성된 성심가족회에서 손골을 개발하기 위해 성지개발위원회를 구성하고 수원교구의 인준을 받아 1989년부터 개발사업을 시작했다. 성심가족회에서는 1991년까지 손골에 경당을 짓고 대형 십자가와 성모상 등을 건립하였다. 또한 도리 신부 순교현양비도 고쳐 세웠다. 이렇게 하여 손골이 순례지로서 거듭나게 되었다.
파티마 수녀원에서는 1997년부터 손골에 수녀를 파견하여 신자들의 순례를 도왔다. 그리고 수원교구에서는 그로부터 8년 후인 2005년부터 손골에 전담 신부를 두고 있다. 이후 손골 관련 문헌 수집과 번역 등을 통하여 내실을 기하는 한편, 2016년 성지 설립 50주년과 병인박해 150주년을 준비하며 십자가의 길을 새로 조성하고, 새 성당과 사제관 신축을 마무리하여 2016년 5월 7일 새 성당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2017년 5월 6일에는 기존의 경당을 보수해 개관한 손골 기념관 축복식을 가졌다.
손골 기념관 손골 기념관에는 도리 신부의 친필 편지 원본이 3통 있다. 특히 도리 신부가 1865년 10월 16일 손골에서 부모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의 원본이 기념관에 보관되어 있다. 이 친필 편지 원본들은 2007년 10월 17일 도리 신부가 소속되었던 뤼송 교구에서 손골을 순례하면서 손골 성지에 기증하였다.
오메트르 신부의 친필 편지 원본 3통도 있다. 특히 오메트르 신부가 1862년 6월 15일 첫 미사를 봉헌하고 부친에게 보낸 상본과 그 뒷면에 쓴 편지가 있다. 이 친필 편지 원본들은 2011년 7월 3일 손골 봉사자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한국 순례단이 오메트르 베드로 신부가 소속되었던 앙굴렘 교구를 찾아갔을 때 주교좌 성당에서 교구장 주교가 손골 성지에 기증하였다.
도리 신부가 신학생 때 집에서 쓰던 침대보가 있다. 이 침대보는 도리 신부의 누이이며 대모(代母)인 뽈린느 도리(Pauline Dorie, 1833-1908년)의 후손들이 보관하고 있다가 2007년 뤼송 교구 순례단과 함께 손골에 왔을 때 기증한 것이다. 후손들은 침대보 조각에 방데 지방의 로고를 손수 수놓아 기증하였다.
또한 기념관에는 도리 신부가 신학생 때 쓰던 책들도 있다. 이 책들은 도리 신부 생가에 보관되어 있던 것인데 손골 기념관으로 기증한 것이다. 아울러 도리 신부 순교현양비의 머릿돌들이 있다. 처음으로 만든 10층짜리 현양비 머릿돌과 18층짜리 현양비 머릿돌이 모두 보관되어 있다.
손골 성지 순교자들의 방에 모신 순교자 유해 순교자들의 방에는 4분 성인과 손골 무명 순교자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다블뤼 주교 유해는 2011년 12월 29일 수원교구 이성효 주교가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던 유해를 기증해 모셨다. 오메트르 신부 유해는 2011년 7월 3일 앙굴렘 교구 주교좌성당에서 11시 미사 중에 그곳 교구장이었던 끌로드 다장(Claude Dagens) 주교로부터 받아 모신 것이다. 도리 신부 유해는 2000년 4월 7일 서울대교구에서 나누어 받아 모신 것이다. 김대건 신부 유해는 어느 신자가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던 유해를 기증하여 모신 것이다. 그리고 손골 무명 순교자 유해는 2013년 10월 22일 무명 순교자 묘를 옮겨 모실 때 유해를 채취하여 모신 것이다.
손골 무명 순교자 묘 병인박해 때 신앙을 지키기 위해 박해를 피해 손골에 숨어든 신자 4분이 체포되어 수원으로 끌려가던 중 신봉동 개울가에서 처형되었다. 당시에는 ‘선참후계(先斬後啓, 먼저 참하고 나중에 보고하라)’는 명령이 있어 가능했던 일이다. 사람들은 길가에 버려진 순교자들의 시신을 거둬 개울가 작은 언덕에 구덩이를 파고 돌로 덮어 ‘돌무덤’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곳의 옛 이름이 서봉(시봉)이고 순교자들의 이름과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 ‘서봉부락 무명 순교자 돌무덤’이라고 불리며 전해내려 왔다. 참고로 신봉동(新鳳洞)은 1914년 신리(新里)와 서봉리(棲鳳里)이 합쳐져서 신봉리가 되었다가 지금은 신봉동이 되었다.
수원교구에서는 순교자 현양사업을 하면서 1976년 12월 17일 신봉동에 있던 4위 무명 순교자의 묘를 미리내 성지 무명 순교자 묘역으로 옮겨 모셨다. 이 해에 다른 곳에 있었던 무명 순교자들의 묘도 미리내 성지로 옮겼다.
손골 성지에서는 손골 교우촌에서 생활하다 순교하신 4위의 유해를 손골에 모시는 것이 합당하다고 여겼다. 이를 위해 ‘순교자 유해 안치를 위한 소위원회’를 구성하여 수차례 모임을 통해 준비한 다음 2013년 10월 22일 4위 무명 순교자들의 유해를 손골 성지 내로 옮겨 모셨다. 4위 무명 순교자들을 하나의 광중(壙中)에 합장 형식으로 모시기로 하고, 묘를 조성하는데 우선 지하에 석실을 만들었다. 그리고 4위 무명 순교자들의 유해를 4개의 항아리에 각각 모셨고, 봉분은 함께 하나로 만들었다. 손골 무명 순교자는 모두 4위인데 남성이 2위이고 여성이 1위이며 1위는 DNA를 채취하지 못해 확인이 안 된다. [출처 : 손골성지(윤민구 저, 성지 소개 책자) 내용을 중심으로 편집(최종수정 2018년 7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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