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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比스님과 함께 하는 임제록 공부(2020.12.23.PM7시)
임제록 상당(上堂)
입을 열면 벌써 틀린다 /정안(正眼)이란 / 무위진인(無位眞人)
반갑다. 임제록 공부하겠다. 임제록은 상당법어가 있고 그다음에 시중법어가 있다. 상당법어는 주로 격외도리(格外道里) 다. 상식밖의 어떤 행위나 상식밖의 언어 이런 것으로써 법을 보인다, 그것을 격외도리다 라고 말한다.
격이라고 하는 격밖의 도리다. 그래도 우리 한마음을 벗어나는 일은 아니다. 한마음 안에서 격외도리를 구사한다.
1-5 입을 열면 벌써 틀린다
‘오늘은 입을 열면 벌써 틀린다’ 하는 제목하에서 한단락 읽어보겠다.
부운(復云), 차일법연(此日法筵)은 위일대사고(爲一大事故)니 갱유문화자마(更有問話者麽)아 속치문래(速致問來)하라
이재개구(儞纔開口)하면 조물교섭야(早勿交涉也)니라
하이여차(何以如此)오 불견(不見)가 석존운(釋尊云), 법리문자(法離文字)며 불속인부재연고(不屬因不在緣故)라하니라
위이신불급(爲儞信不及)일새 소이금일갈등(所以今日葛藤)이라
임제 스님이 다시 말했다.
“오늘의 법회는 일대사(一大事)를 위한 것이니 다시 묻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빨리 물어라. 그대들이 막 입을 열면 일대사와는 벌써 교섭할 수 없게 된다. 왜 그럴까? 보지 못했는가. 세존이 말씀하시기를 ‘법은 문자를 떠났으며 인(因)에도 속하지 않고 연(緣)에도 있지 않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대들이 믿음이 모자라는 까닭에 오늘 이렇게 어지러이 갈등을 하는 것이다.”
법이라고 하는 것, 진리라고 하는 것은 인(因)에도 속하지 않고 연(緣)에도 속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대들이 그 말을 못 믿기 때문에 내가 법상에 올라와서 이렇게 어지럽게 갈등을 하는 것이다, 시시비비하고 하게 되는 것이다.
공체상시여제관원(恐滯常侍與諸官員)하야 매타불성(昧他佛性)이니 불여차퇴(不如且退)니라 할일할운(喝一喝云), 소신근인(少信根人)은 종무요일(終無了日)이로다 구립진중(久立珍重)하라
“왕상시와 여러 관원들을 꽉 막히게 하고 불성을 어둡게 할까 염려된다. 물러가는 것이 차라리 낫겠다.” 하시며, “할!”을 한 번 하시고는 말했다.
“믿음의 뿌리가 적은 사람들은 마침내 일대사의 일을 마칠 날이 없다. 오래 서 있었으니 편히 쉬어라.”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 이것은 법화경에서도 표현한 말인데, 가장 중요한 일, 하나의 큰 일, 생사를 초월하는 일, 아니면 마음을 깨닫는 일, 견성성불하는 일, 이 모든 것이 하나의 가장 큰 일이다, 그런다.
하나의 가장 큰 일이다. 그러면 생사를 초월하는 일, 견성성불하는 일, 마음을 깨닫는 일, 이 모든 표현들이 일대사인연들에 다 포함된다.
그런데 여기 한구절을 가지고 그 당시 법회하는 법석의 형태를 좀 짐작할 수 있는 것이, ‘오래 서 있었으니 편히 쉬어라’ 그랬다. 법사가 법상에 올라가서 앉고, 다른 청중들은 전부 서서 법문을 듣는다. 그것이 옛날 법이다. 그것이 ‘맞다 틀리다’ 그것이 ‘어느 것이 옳다, 어느 것이 더 좋다’ 말할 것은 아닌데 ‘오래 서 있었으니 편히 쉬어라’ 법문 하는 동안 10분이 됐든, 20분이 됐든 법사로서는 인사상 그렇게 표현한다. 그런데 사실은 아주 짧다. 요즘같이 한 시간씩 하고 아니면 한 시간 반씩 하고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올라가서 한 2분, 3분, 5분, 시간으로 재면 사실은 그정도 밖에 안걸린다. 여기에 제1차 법문도 기껏해야 한 5분 정도 될까말까한 정도의 시간이다.
모든 사람들이 서서 법문을 듣고 법사는 앉아서 법상에서 했다. 선사가 종지, 종풍을 드나리고, 일대사인연을 드날리는 일이라면 그렇게 구질구질하게 설명을 많이 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그래서 보면, 물론 임제록에서도 길게 이야기한 대목도 있지만, 대개 보면 상당법문은 더 짧다. 그 외 법문은 조금 더 길다. 그런 것도 엿볼 수가 있다.
아무튼 그렇게 말씀하셨다.
오늘의 법회는 일대사를 밝히기 위해서 열린 것이다. 일대사란 말로 하자면 인생의 실상이요, 제법의 실상이며, 우주와 생명의 실상이다. 그러나 일대사란 무어라고 입을 열면 벌써 틀려버린다. 왜냐하면 부처님이 말씀하셨듯이 법(法)이란, 즉 일대사란 원인이 있고 결과가 있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수행을 쌓아서 성취하는 물건이 아니다. 참선을 하고 염불을 하고 간경을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고행을 하고 육바라밀을 닦아서 얻어지는 물건이 아니다. 본래로 있는 것이다. 불생불멸(不生不滅)하는 것이며, 부증불감(不增不減)한 것이다. 본래 여여(如如)한 것이다. 이렇게 보고 듣고 알고 느끼고 하는 사실이다.
여기에서 무엇이 모자라는가. 완전무결하다. 이러한 사실을 모르는, 또 이러한 이치를 듣고도 믿지 못하는 사람들 때문에 오늘처럼 이렇게 갈등하는 것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본래 아무 일이 없는 이 이치에 대하여 믿음이 부족한 사람들은 이 일대사를 마칠 날이 없다. 법회 서두에 불교의 대의를 물었을 때 임제 스님은 ‘할’로써 대답하셨다. 굳이 일대사를 표현하라면 나도 ‘할’이다.
표현을 아주 재밌게 했다. 일대사란 말로 표현하면 다 어긋나는 것인데 그래도 말로 최대한 허물을 덜 저지르고, 표현할 수 있는 데까지 표현해 본 것이 할(喝)이고, 제가 설명한 내용이다. 그래서 제목이 ‘입을 열면 벌써 틀린다’ 라고 하는 것이 바로 그런 내용이다.
입을 열면 벌써 틀린다.
뭐라고 하면 그것은 벌써 군더더기고 허물이고 괜히 멀쩡한 살을 긁어서 부스럼을 내는 격이다, 그런 뜻이다.
그래서 입을 열면 벌써 틀린다.
그런 이치가 분명히 있다. 분명히 있고 말고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이고, 그런 이치를 우리가 잘 곰곰이 생각할 줄 알아야 된다. 그래서 그 생각이 깊어지고,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상태, ‘이것인가 저것인가’ 분별로써 맞출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라는 사실, 그런 마음이 자리잡고 있어야 한다. 그런 마음, 그런 상태를 견지하고 있어야 된다. 그러면 생각이 깊어지고 사람이 무거워지고 쉽사리 입을 못 연다.
아는 사람이 어찌 쉽사리 입을 여는가? 모르는 사람이 말이 많고 떠든다. 저같이 모르는 사람이 말이 많고, 그저 설명이 길 뿐이다. 제대로 아는 사람은 그저 묵묵할 뿐이다. 그것을 적정주(寂靜住) 고요한 삶, 또 해탈주(解脫住) 그런다. 머물 주(住)자다. 모든 것에서 벗어난 그런 삶, 그렇게 표현한다.
무언주(無言住) 말이 없는 삶, 그렇게도 표현한다. 이것은 다 화엄경에서의 표현인데 화엄경이 선문 못지않게 수준이 높다. 표현마저 그렇게 수준이 높다.
적정주(寂靜住) 무쟁주(無諍住) 무언주(無言住) 해탈주(解脫住) 이런 등등으로 표현한 것인데 제가 참 좋아하는 구절이다.
2 정안(正眼)이란
그다음에 ‘정안이란’ 그랬다. 바를 정(正)자 눈 안(眼)자
사인일일(師因一日)에 도하부(到河府)한대 부주왕상시(府主王常侍)가 청사승좌(請師陞座)하니라 시마곡출문(時麻谷出問),
임제 스님이 어느 날 하북부에 갔더니 부주 왕상시가 스님을 청해서 법좌에 오르게 했다. 그 때에 마곡 스님이 나와서 물었다.
앞에 상당법어 한단락이 끝났고, 이것은 두 번째 단락인데, 임제스님이 하북부에 갔는데 왕상시가 ‘스님 오셨으니까 법문하십시다’ 하고 법상을 차렸는데 그때 마곡 스님이 나와서 묻는다.
대비천수안(大悲千手眼)에 나개시정안(那箇是正眼)고
“대비보살의 천수천안 중에서 어느 것이 바른 눈입니까?”
대비보살은 관세음보살이다. 관세음보살의 천수천안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니까, ‘천수천안 중에서 어느 것이 바른 눈입니까?’ 이렇게 마곡스님이 임제스님에게 물었다.
거기에 대한 임제스님의 말이다.
사운(師云), 대비천수안(大悲千手眼)에 나개시정안(那箇是正眼)고 속도속도(速道速道)하라
임제 스님이 말했다.
“대비보살의 천수천안 중에서 어느 것이 바른 눈인가 빨리 말하라.”
질문과 똑같이 이야기한다. 이것이 선문답에는 흔히 있는 형식이다. 선문답에서 상대방이 묻는 말을 그대로 되받아서 묻는 경우다. 여기 그대로 나와 있다.
이런 데서, 천하의 유명한 임제록에서 본보기를 보였기 때문에 그 뒷사람들은 이것을 보고 그대로 되받아서 질문하는 것 같지만, 그것이 또 대답이기도 하다.
형식은 질문이지만 사실은 대답이기도 하다.
‘대비보살의 천수천안 중에서 어느 것이 바른 눈인가 빨리 말하라’
마곡예사하좌(麻谷拽師下座)하고 마곡각좌(麻谷却坐)하니
그러자 마곡 스님이 임제 스님을 법좌에서 끌어내리고 대신 법좌에 올랐다.
이것은 뭐 깡패들 싸움도 아니고 마곡 스님이 임제 스님의 법상에 앉아 있는 것을 어떻게 하든지 힘으로 끌어 내리고 그 법상자리에 마곡 스님이 도로 올라간 것이다.
‘그대가 대답을 제대로 못했으니까 당신은 법문할 자격 없다. 그러니까 내려와라. 내가 그 자리에 앉겠다’ 이런 형식이다.
이 당시 선사들의 법거량은 이러했다. 이런 것을 법거량이라고 하는데 법거량을 꼭 싸움하듯이 하는 것을 많이 볼 수가 있다.
사근전운(師近前云)
임제 스님은 마곡 스님 앞으로 가까이 가서
이제 끌려 내려온 뒤의 이야기다. 마곡스님은 오히려 법좌에 앉았고, 임제스님은 밑에서 가서
불심(不審)이로다 마곡의의(麻谷擬議)한대
“안녕하십니까?” 라고 하니, 마곡 스님이 어리둥절하여 머뭇거렸다.
머뭇거릴 수밖에, 그렇게 나올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자기가 한 것 같이 힘으로 멱살을 잡고, 아니면 방이나 할로써 할 줄 알았는데 아주 공손하게 ‘스님 안녕하십니까?’ 하고 인사를 하니까, 마곡스님 당신이 기대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니까 어리둥절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사역예마곡하좌(師亦拽麻谷下座)하고 사각좌(師却坐)라
임제 스님 또한 마곡 스님을 법좌에서 끌어내리고 다시 그 자리에 앉았다.
임제스님이 당신이 마곡스님에게 법상을 뺏겼는데 그 법상에서 마곡스님을 끌어내리고 당신이 또 그 자리에 올라가 앉은 것이다. 무슨 아이들 장난도 아니고, 천하의 선사들이 천하의 큰 법을 깨달았다는 선사들이 하는 행위다.
그런데 거기에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 그리고 제일의제(第一義諦) 최고가는 법담이 여기서 오고 간다는 사실이다.
마곡변출거(麻谷便出去)어늘
마곡 스님은 곧바로 밖으로 나가버렸다.
끌려내려왔으니까 또 그렇다고 해서 임제스님을 또 끌어내리는 것은 그것은 또 아닐 것이다. 그러니까 마곡 스님은 다른 모습으로 법을 보여야 된다. 판에 박은 듯이 그냥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마곡 스님은 곧바로 밖으로 나가버렸다.
사변하좌(師便下座)하니라.
그러자 임제 스님도 곧 법좌에서 내려왔다.
법을 거량할 상대가 사라졌으니까 재미없다. 앉아있을 의미도 없다. 앉아있어봐야 괜히 싱겁기만 하다. 그래서 임제 스님도 곧 법좌에서 내려왔다. 이런 광경이다.
그것을 우리가 눈으로 그림을 한 번 그려보면 간단하다.
마곡 스님이 ‘관세음보살이 천수천안이 있다고 하는데 그 천수천안 가운데서 어느 것이 정안입니까? 바른 눈입니까’ 하니까 임제 스님이 똑같이 ‘천수천안 가운데서 어느 눈이 바른 눈입니까?’ 이렇게 되묻는다.
되물으니까 마곡 스님이 임제 스님을 법상에서 끌어내리고, 임제 스님은 마곡 스님 앞에가서 마곡 스님이 기대했던 것과는 전혀 다르게 ‘아유 스님 큰스님 안녕하십니까’ 하고 인사를 한 사실이다.
그러니까 마곡 스님이 머뭇거렸다. 그러자 임제 스님이 또 마곡 스님을 법상에서 끌어내리고, 그리고 당신은 법상에 올라갔고, 그리고 마곡 스님은 곧바로 밖에 나가버리고, 임제스님은 또 그대로 뒤따라서 법상에서 내려오고 법당에서도 나가버렸을 것이다. 그래 각자 방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알듯알듯 하면서도 신기한 선사들, 천하의 대선사들이 주고 받는 법거량의 한 모습이다.
지금은 이런 법거량을 보기가 어려운데 우리 어릴 때 선방에다닐 때만해도 더러 이와 유사한 것을 가끔은 보았다.
여기 제가 이런 해설을 또 붙였다. 다 군더더기고 사족이다. 사실은 없어야 할 설명이다.
관세음보살의 천수천안 중에서 어느 것이 정안(正眼)인가? 하고 물었는데 임제 스님은 똑같은 질문으로 대답하였다. 관음보살에게는 천수천안 뿐만 아니다. 천 손 만 손 팔만 사천 모다라 손이 있고, 천 눈 만 눈 팔만 사천 모다라 눈이 있다. 몇 개의 눈이 있든지 관계없이 이와 같은 형식의 법담은 조사스님들에게 자주 보인다. 능엄경에도 있다. 설법 제일의 부루나가 “청정본연(淸淨本然)한데 어떻게 해서 홀연히 산하대지(山河大地)가 생겼습니까?” 라고 물으니 부처님은 똑같이 “청정본연한데 어떻게 해서 홀연히 산하대지가 생겼는가?” 라고 되묻는다.
임제 스님과 마곡 스님이 천수천안의 질문을 주고받은 것과,
법좌에서 끌어내리는 일을 주고받은 것과 세존과 부루나가 똑같은 말로 법담을 주고받은 것을 한데 묶어서 저 삼계(三界) 밖으로 던져버리고 싶다. 비록 그것을 부처와 부처의 경계요, 조사와 조사들이 주인과 손을 서로 바꿔가며 상즉상입(相卽相入)의 무애자재한 경지를 보여준 것이라 하더라도.
천 개의 눈은 그만 두고 그대의 한 개 눈은 어떤가? 이렇게 환하게 보고 있으니 어찌하겠는가? 똑똑히 듣고 있으니 어찌하겠는가? 그래서 청정본연하지 않은가? 청정본연하니까 산하대지가 이렇게 있지 않은가?
마곡 스님이 밖으로 나가버린 것이나, 임제 스님이 바로 법좌에서 내려온 것은 생생하게 살아있는 진정한 정안을 보여준 멋진 마무리라고 하겠다. 두 사람이 합작으로 엮어낸 빼어난 법문이다. 선가에서는 그것을 빈주호환(賓主互換)이라고 한다.
손님 빈(賓)자 주인 주(主)자 호환(互換) 서로 바꾼다. 빈주호환이라고 한다. 이렇게 제가 불필요한 사족을 붙였다.
또 하나 보겠다.
3 무위진인(無位眞人)
무위진인이다. 이 무위진인(無位眞人)이라는 말은 임제스님이 하신 말씀이고 임제록 이후에 선가에서 아주 높이 받드는 말이다. 무위진인(無位眞人) 차별없는 참사람. 임제록을 좋아하셨던 백양사 서옹스님께서도 ‘차별없는 참사람 운동’ 이라고 해서, 차별없는 참사람이라고 하는 기치를 내걸고 선법문을 많이 하시기도 했다.
차별없는 참사람, 그것이 본래 사람,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가지고 있는 참마음의 자리다. 그 자리는 어떤 누구도 차별이 없다. 대통령이다, 청소부다 하는 차별도 없고, 빈부귀천의 차별도 없고, 남녀노소의 차별도 없고, 승속의 차별도 없고, 흑인 백인의 차별도 없고, 차별없는 바로 그 자리가 있다.
누구에게나 똑같이 있다. 배운 사람 못배운 사람, 있는 사람, 없는 사람 아무런 차별없이 평등하게 가지고 있는 그 자리가 바로 차별없는 참사람이다. 불교에서 이것을 들추어내서 이야기하는 것, 이것이 큰 불교의 특장(特長)이기도 하다. 우리가 이 사실에 대해서 잘 알면 불교를 거의 다 잘 알았다, 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유명한 언구다.
무위진인(無位眞人) 차별없는 참사람.
상당운(上堂云), 적육단상(赤肉團上)에 유일무위진인(有一無位眞人)하야 상종여등제인면문출입(常從汝等諸人面門出入)하나니 미증거자(未證據者)는 간간(看看)하라
법상에 올라 말씀하셨다.
“붉은 몸뚱이에 한사람의 무위진인(無位眞人)이 있다. 항상 그대들의 얼굴을 통해서 출입한다. 아직 증거를 잡지 못한 사람들은 잘 살펴보아라.”
여기 설명이 참 잘 되어 있다.
붉은 몸뚱이에 한사람의 무위진인(無位眞人)이 있다.
항상 그대들의 얼굴을 통해서 출입한다.
아직 증거를 잡지 못한 사람들은 잘 살펴보아라
차별없는 참사람이 분명히 있어서 그대의 얼굴을 통해서 출입하고 있다. 들락날락 들락날락 들락날락 얼굴만을 통해서가 아니라 몸 전체에서 전부 출입을 한다. 누가 어디서 부르면 그냥 그쪽으로 돌아보고, 누가 팔을 꼬집으면 바로 그쪽으로 반응을 한다.
‘증거를 잡지 못한 사람들은 잘 살펴보아라’
요거 하나 챙기고, 요거 하나 깨닫고, 요거 하나 확실하게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 그것이 선불교의 과제다. 선불교의 모든 공부가 바로 그 한 가지 사실에 있다. 그것을 알아야 된다.
시유승출문(時有僧出問), 여하시무위진인(如何是無位眞人)고
사하선상파주운(師下禪牀把住云), 도도(道道)하라
그때에 한 스님이 나와서 물었다.
“어떤 것이 무위진인(無位眞人)입니까?”
임제스님이 법상에서 내려와서 그의 멱살을 꽉 움켜잡고 “말해 봐라. 어떤 것이 무위진인인가.”
이것도 앞에서 ‘어떤 것이 정안(正眼)인가’하니까 ‘어떤 것이 정안인가’라고 물은 것이나, 능엄경에서 ‘청정본연(淸淨本然)한데 왜 산하대지(山河大地)가 저렇게 생겼느냐’ 하니까 부처님이 있다가 ‘청정본연하다면 왜 산하대지가 저렇게 생겼느냐’한 것과 형식은 똑같이 그렇게 주고 받은 것이다.
그래 임제스님이 법상에서 내려와서 그 사람의 멱살을 잡고 ‘말해봐라 어떤 것이 무위진인인가’
기승의의(其僧擬議)한대 사탁개운(師托開云), 무위진인(無位眞人)이 시십마간시궐(是什麽乾屎橛)고하시고 변귀방장(便歸方丈)하다
그 스님이 머뭇거리자 임제스님은 그를 밀쳐버리며 말했다.
“무위진인이 이 무슨 마른 똥 막대기인가.”라고 하시고는 곧 방장실로 돌아가 버렸다.
‘무위진인이 어찌 이렇게 간시궐 마른 똥 막대기인가’
이것이 화두로도 등장을 하는 말이고, 또 여기에서는 마른 똥막대기가 무엇인가? 이 세상에서 제일 못난 것, 말하자면 중국사찰에서 대중들이 보는 화장실에 대변이 자꾸 쌓이면 그것을 무너뜨려서 평평하게 만드는 일을 하는 막대기를 하나 떡 세워놓는다. 누구든지 용변을 보고 당신이 본 변이 자꾸 차서 올라오면 나중에는 어떻게 하는가? 변을 보는 사람 몸에까지 닿을 것이 아닌가. 그래서 그것을 자꾸 밀어서 옆으로 밀쳐내는 도구다. 그것이 마른 똥막대기다.
똥이 묻어있고, 하도 오래 쓰다 보니까 말라있기도 하고 그래서 간시궐 하는 것이 여기에도 등장하는데, 화두에서 쓰는 간시궐하고 여기에서 쓰는 간시궐이 다르다.
여기서는 뭐라고?
‘저 도대체 마른 똥막대기 같은 놈’ 이런 뜻이다.
그래서 다시보면 ‘무위진인이 이 무슨 마른 똥 막대기인가,라고 하시고는 곧 방장실로 돌아가 버렸다’ 참 아주 간단한 법문이다.
이 법문 주고 받는데 몇 분 걸렸겠는가? 기껏해야 1분 아니면 2분 정도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본래 선가에서 선법문은 요렇게 깔끔하게 주고 받고 끝나는 것이다.
이것이 진짜 선법문이다.
이렇게 돼야 한다. 너절하게 선법문 한답시고 별별 이야기 다 하는 것 하고는 격이 다르다.
다시 한 번 읽겠다.
법상에 올라 말씀하셨다.
“붉은 몸뚱이에 한사람의 무위진인(無位眞人)이 있다.
항상 그대들의 얼굴을 통해서 출입한다.
아직 증거를 잡지 못한 사람들은 잘 살펴보아라.”
이것이 무위진인이다 라고 확실하게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잘 살펴보아라.
그때에 한 스님이 나와서 물었다.
“어떤 것이 무위진인(無位眞人)입니까?”
임제스님이 법상에서 내려와서 그의 멱살을 꽉 움켜잡고 “말해 봐라. 어떤 것이 무위진인인가.”
그 스님이 머뭇거리자 임제스님은 그를 밀쳐버리며 말했다.
“무위진인이 이 무슨 마른 똥 막대기인가.”라고 하시고는 곧 방장실로 돌아가 버렸다.
당신방으로 갔다는 것이다. 무위진인인데 여기 해석을 제가 사족으로 붙였다. 불필요한 설명이지만 여기서 또 우리 같은 초보자가 어느정도 짐작할 수 있도록 제가 사족을 달아놨다.
이것을 한 번 읽겠다.
임제록에서 한 구절만 선택하라면 바로 이 무위진인(無位眞人)이다. 불교는 달리 표현하면 대해탈(大解脫). 대자유(大自由)를 구가하는 종교다. 그 대해탈, 대자유를 어디서 찾을 것인가? 바로 이 무위진인이 답이다. 이는 문자나 이론으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다. 수행하고 증득하는 것도 해당되지 않는다. 무위진인은 이 육신을 근거로 해서 존재하는 사람이다. 남녀노소와 동서남북과 재산이 있고 없고, 지위가 있고 없고에 아무런 차별 없이 동등하게 존재하는 사람이다. 차별이 있는 사람은 가짜사람이다. 차별이 없는 사람이 참사람이다[차별 없는 참사람]. 무위진인은 사람의 얼굴을 통해서 출입한다.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보고 듣고 느끼고 알고 하면서. 또 손과 발을 통해서도 출입한다. 그리고 이 사람의 값은 백두산 백만 개만한 크기의 다이아몬드 값보다도 억만 배가 더 나간다.
그렇게 얼굴을 통해서 출입하는 모습이 분명하고 확실하건만
스스로는 잘 알지 못한다. 그래서 한 스님이 새삼스럽게 “무위진인이 무엇입니까?” 하고 물은 것이다. 자신이 무위진인이면서 달리 무위진인을 찾는 것이다. 종로에 서서 “서울이 어디입니까?” 하고 묻는 것이다. 안타깝다. 그래서 임제 스님은 “너 무위진인아, 어디 한 번 대답해 봐라.” 무위진인은 무위진인만이 알 수 있으니까. 한데 어찌된 일인지 무위진인은 대답이 없다. 똥막대기 같은 무위진인을 뒤로 하고 방장실로 들어가는 것으로써 임제 스님은 대해탈, 대자유의 무위진인을 잘 보여주었다.
이 무위진인 말고 어디서 대해탈을 누릴 것인가. 어디서 대자유를 누릴 것인가. 불교는 이렇게 명료하다. 명명백백, 소소영령 그 자체다. 너무 밝아서 눈이 부신다. 마치 천 개의 태양이 동시에 떠 있는 듯 하다. 지금 보고 듣고 하는 이 사실이다.
임제일구치천금(臨濟一句置千金).
임제 일구가 천금의 가치를 한다.
임제록의 이 한 구절 법문이 천금의 값을 한다. 어찌 천금으로 그 값을 대신 하겠는가. 만고에 빼어난 말씀이다.
어느 해(1971년) 겨울철 봉암사에서 서옹 스님이 임제록을 강의하시면서 들려준 말씀이 있다. 일본의 어느 유명한 선사는 전쟁을 맞아 원자폭탄으로 일본 열도가 불에 탈 때 “일본이 다 타도 이 임제록 한 권만 남아있으면 된다.”라고 하였단다. 필자는 이 한마디로써 일본에 사람이 있음을 믿는다. 그래서 일본을 얕보지 않는다. 임제록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는데 어찌 얕볼 수 있겠는가. 나는 도반의 절을 방문했을 때 그의 방에 ‘무위진인(無位眞人)’이나 ‘수처작주(隨處作主)’라는 족자가 하나만 걸려있으면 그 도반을 달리 본다. 더 친해지고 더 존경하게 된다. 글씨야 졸필이든 말든 관계없다.
제가 임제록 강설을 쓸 때에, 아주 기가 펄펄 했을 때이다. 비록 몸에 병고를 앓고 있을 때 쓰긴 했는데, 임제록 삼매에 드니까 저도 모르게 그렇게 임제록 강설을 다 끝낼 때까지는 기가 펄펄해서 천하를 다 내 것인양 생각하고 그런 기분에서 임제록을 썼었다.
그때 쓰던 분위기라든가 내 마음 상태가 이런 구절에서 잘 나타나 있다.
임제록을 쓰고 나서 ‘내가 평생 부처님 밥을 얻어먹었는데 부처님 밥값을 비로소 했다’ 이런 말도 스스로 한 적이 있다.
제가 근래에는 화엄경에 크게 심취해서 나중에 전체적으로 정리를 하니까, 임제록은 한마음 도리는 잘 드러냈는데 보살행이 없더라, 보살행이 부족하다. 보살행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거의 보살행 이야기가 지금까지도 한 마디도 없다. 선불교의 특징은 그런 것이니까 그렇게 이해하고, 그렇게 선불교의 특징과 대승불교의 특징을 이왕 우리가 이렇게 공부하는 김에 잘 이해하고 치우침이 없도록 했으면 좋을 것 같다.
오늘 임제록 공부는 여기까지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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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오신 분들 한 번 살펴보겠다.
많은 분들이 이렇게 동참하셨다.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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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생무변서원도(衆生無邊誓願度 중생을 다 건지오리다)
번뇌무진서원단(煩惱無盡誓願斷 번뇌를 다 끊으오리다)
법문무량서원학(法門無量誓願學 법문을 다 배우오리다)
불도무상서원성(佛道無上誓願成 불도를 다 이루오리다)
성불하십시오.
첫댓글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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格外道里 한마음 안에서 펼치는 상식 밖의 행위나 언어. 禪佛敎의 요체.
喝 말을하기위해 입을 여는 순간 틀려버리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소리를 지른다.
禪師스님들의 법거량을 알아차리기는어렵습니다. 禪 역시 어렵고 공부거리가 참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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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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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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