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장에서, 로마서가 끝났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16장이 또 있습니다. 이 16장은 다른 도시, 아마도 에베소에 보낸 별개의 편지였을 텐데, 나중에 로마서에 덧붙여진 것 같다고 추측하는 학자들이 많습니다. 어쨌든 16장이 붙어있으니 계속 살펴보겠습니다. 1~2절을 보겠습니다.
1 겐그레아에 있는 교회의 일꾼이요 우리의 자매인 뵈뵈를 여러분에게 추천합니다.
2 여러분은 성도의 합당한 예절로, 주 안에서 그를 영접하고, 그가 여러분에게 어떤 도움을 원하든지,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그는 많은 사람을 도와주었고, 나도 그에게 신세를 많이 졌습니다.
이 본문 속에 16장이 쓰여진 목적이 드러나 있는 것 같다고 학자들은 말합니다. 고린도교회 근처에 있는 겐그레아 교회에서 일하던 뵈뵈라는 자매를, 이 편지를 받는 교회에서 일할 수 있도록 추천할 목적으로 쓴 편지였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본문에는 바울이 여러 사람의 이름을 거명하며 그 분들에게 안부를 전해달라고 부탁하는 내용이 이어집니다. 자신이 알고 지냈던 지인들의 이름이므로, 아직 가본 적이 없는 수도 로마의 교인들은 아닙니다. 이 편지가 원래 로마서의 마지막 장일 수 없다는 증거가 되겠습니다.
이어지는 본문에는, 교회 내에서 분란을 일으키는 사람을 경계하라는 내용과, 그곳 교우들의 순종적인 신앙에 대해 찬사를 보내고, 선한 일에는 슬기롭고, 악한 일에는 순진하기를 바란다는 권고와 함께, 주 예수의 은혜가 함께 있기를 빈다는 마지막 인사로 편지글을 마칩니다. 20절을 보겠습니다.
20 평화의 하나님께서 곧 사탄을 여러분의 발밑에 짓밟히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의 은혜가 여러분과 함께 있기를 빕니다.
그런데 아직 완전히 편지가 끝난 것은 아닙니다. 첨가문이 또 붙어있습니다. 21~23절을 보겠습니다.
21 나의 동역자 디모데와 나의 친척 루기오와 야손과 소시바더가 여러분에게 문안합니다.
22 이 편지를 대서하는 나 더디오도 주 안에서 여러분에게 문안합니다.
23 나와 온 교회를 잘 돌보아 주는 가이오도 여러분에게 문안합니다. 이 도시의 재무관인 에라스도와 형제 구아도도 여러분에게 문안합니다. (24절 없음)
이 부분은 우리가 편지를 쓸 때 인사말까지 다 해놓고는 ‘p.s.’ 또는 우리말로 ‘추신’이라고 해서 첨가문을 써붙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바울이 문안인사를 하는 김에 바울의 동역자들과 친척들이 ‘나도 인사 좀 해야겠다’고 그들의 이름을 넣어 함께 안부를 전한 것입니다.
24절은 없다고 ( ) 안에 표기되어 있습니다. 이런 경우는, 어떤 사본에는 있고 어떤 사본에는 없는데, 사본 중에 더 이른 시기의 기록을 따른 결과라고 복음서를 강해할 때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니까 24절은 초기 사본에는 없었는데 후대에 첨가된 본문입니다.
첨가된 본문은 ‘우리 주 예수의 은혜가 여러분과 함께 있기를 빕니다.’ 라는 내용으로, 20절 후반부에 같은 내용의 본문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원래는 이 본문이 20절 후반부에 있었는데, 후대의 사본으로 가면서 24절로 옮겨진 것입니다. 당시에는 요즘 같은 인쇄술이 없었고, 사본을 만들 때마다 일일이 손으로 옮겨 썼기에 이런 일이 발생하게 된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면 이제는 끝이 나야 되는데 또 첨가문이 나옵니다. 25~27절을 보겠습니다.
25 [하나님께서는 내가 전하는 복음 곧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가르침을 통해서, 그리고 오랜 세월 동안 감추어 두셨던 비밀을 계시하심으로써, 여러분의 믿음을 굳세게 하여 주십니다.
26 그 비밀이 지금은 예언자들의 글로 밝히 공개되고,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따라 모든 이방 사람들에게 알려져서, 그들이 믿고 순종하게 되었습니다.
27 오직 한 분이신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영원무궁 하도록 있기를 빕니다. 아멘.]
이젠 정말 끝났습니다. 더 이상의 p.s.는 없습니다. 그런데 이 부분은 사본에 따라 없는 곳도 있고, 15장 맨 뒤에 붙어있는 사본도 있고, 14장 맨 뒤에 붙어있는 사본도 있습니다. 그래서 전체 본문이 [ ]로 묶여있는 것입니다.
성서가 이런 책입니다. 완전무결한 완성본이 아닙니다. 사람의 손길을 많이 탄 책입니다. 그래서 본문이 여기저기 뒤섞여 앞뒤가 안 맞는 말도 많고, 이 글이 왜 갑자기 여기 끼어들었나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생뚱맞은 글이 갑자기 등장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성서비평학이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훼손하기 위해서 칼질을 하는 것이 아니라, 불순물이 섞인 금광석과 같은 성서에서 정금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뽑아내기 위해 성서비평학이라는 용광로가 필요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