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음양 개념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겠습니다.
상대적 세계에는 상대적 존재로서만 나타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상대적 존재로 튀어나오다 보니까 개념조차도 상대적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우주 현상계 안에 들어있는, 생명현상을 띄고 있는 모든 존재들은 전부 음양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사람도 남자와 여자, 동물은 수컷과 암컷, 식물도 수술과 암술, 하다못해 무성생식을 하는 단세포도 그 안에는 음양이 같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외관상 ‘양’으로 보이는 남자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온통 ‘양’으로만 되어 있습니까?
여자는 ‘음’이니까 ‘음’으로만 구성되어 있을까요? 그렇게 되면 존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존재라는 그 자체가 이미 ‘음양’의 조화로써 상대성을 갖추어야 존재할 수 있는 것입니다. 크게 볼 때는 남,녀가 음,양으로 되어있지만 그 각각의 안에는 또 음양을 갖추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상대성이 갖고 있는 심오한 세계입니다. 동양철학에서는 인체를 이야기할 때 음양 오행설로 설명합니다. 인체 안에 음과 양의 조화 기운으로 이 한 몸이 유지되고, 남자와 여자라고 하는 음양의 조화로 인해 종족의 생명체가 유지되며, 더 크게 보면 천지의 음양 조화에 의해 이 우주가 잘 굴러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 현상계 내의 아주 미세한 먼지에서 부터 거대한 우주까지 어느 하나 빠짐없이 이 ‘음양’의 조화 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주 중요한 문제는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은 그 존재 방식도 ‘음양의 법칙’에 의해서 존재하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육체인 ‘음’과 눈에 보이지 않는 영혼인 ‘양’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이 영혼이라는 말은 정신이나 마음으로 바꾸어도 같은 의미입니다.
그런데 동양에서 말하는 정신과 서양에서 말하는 정신(spirit)은 의미가 다릅니다. 동양 철학의 ‘정신(精神)’에서의 ‘정(精)’은 육체를 말하는 것이고 ‘신(神)’은 영혼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물질인 ‘정’과 영혼인 ‘신’이 조화를 부려서 발생하는 것을 ‘기(氣)’라고 합니다. “정(精)-기(氣)-신(神)” 그러니까 우리가 보통 서양적 관점에서 ‘정신’을 ‘spirit' 즉 영적인 것으로 이야기하는데, 동양적 사고에서는 이미 이것이 `영`과 `육`의 복합체로 이해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정`은 몸을 구성하고 있는 `음`적인 에너지고, `신`은 눈에 보이지 않는 `양`적인 에너지라는 것입니다. 이 두 개가 합해져서 조화가 이루어져 에너지 파동이 일어나는 것을 `기`라고 하는 것입니다. `음`이 없어지면 `양`이라고 하는 것도 없어집니다. `양`은 `음`의 반대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가 사라지면 나머지도 사라져 버리는 상대적 개념인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세상 사람들, 종교인들이 다 착각하고 있는 것 입니다. 마치 몸과 마음이 따로따로 있는 것으로 보고, 음과 양이 따로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개념상 나누어져 있는 것이지 따로 존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음양 원리 하나만 제대로 터득해도 기독교의 천국과 지옥, 불교의 윤회같은 문제들은 전부 해결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음과 양이 함께 생했다가 함께 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쌍생 쌍멸’이라는 것입니다. 전기를 비유로 들어보겠습니다. +와 -가 결합된 그 상태에서만 불이 들어오게 됩니다. +와 -가 떨어지는 그 순간에 +도 -도 동시에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와 -가 결합될 때에만 전기적 생명현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게 떨어지면 현상도 사라지고 +도 -도 드러날 수가 없습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하면 몸과 마음이라는 것이 태어날 때 쌍생한다는 뜻입니다. 음양 법칙에 의해 동시에 함께 튀어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조화롭게 지내다가 멸하는 순간 몸과 마음의 존재성은 동시에 둘 다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쌍으로 태어났다, 쌍으로 유지되고, 쌍으로 사라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쌍생 쌍멸’이라는 것입니다. 이 ‘쌍생 쌍멸’은 존재계의 피할 수 없는 법칙이며 진리입니다. 이 쌍은 뗄래야 뗄 수가 없습니다. 한 쪽이 사라지면 나머지 한 쪽도 사라지는 것입니다.
옛날부터 무지의 깃발아래 모인 종교계에는 기상천외한 코메디들이 많이 있었는데, 그 중에 중세시대의 카톨릭 신부들이 모여서 ‘하나의 촛불 위에 얼마나 많은 천사가 왕림할 수 있을까’하는 문제를 진지하게 토론했다는 이야기는 압권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중세시대뿐 아니라 지금의 세상에서까지 더 진지하게 논의되는 문제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영혼이 임신 몇 개월 째에 태아에게 들어 오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그들은 영과 육을 쌍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독립적 주체로 보기 때문에 그런 우스운 고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몸이 생하면 마음도 생하는 것입니다. 육체가 사라지면 영혼도 사라지고 +가 사라지면 -도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독교에서는 육체는 죽지만 영혼은 죽지 않고 심판 받아서 천국이나 지옥으로 가게 되고, 불교에서는 몸은 죽어서 흙으로 돌아가고 영혼은 자기가 살았을 때 지은 업에 의해서 좋은 일을 많이 한 사람은 다음에 부귀한 사람으로 태어나고 나쁜 일을 많이 한 사람은 짐승으로 윤회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 다들 그렇게 믿고 있지 않습니까. 종교가 사람들을 다 세뇌시켜 버린 것입니다. 이런 엉터리 생각이 왜 나올까요. 절대는 그만 두고라도 우주 현상계의 상대적 법칙을 모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쌍으로 태어나서 쌍으로 사라지는 것입니다. 아주 간단한 원리인데 왜 이것을 모를까요. 왜 윤회를 믿을까요? 에고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자기가 사라진다니까 얼마나 끔찍하겠습니까. 육신이 죽는 것도 감당을 못하는데 영혼까지 사라진다니까 혼비백산해 가지고 영혼불멸설을 믿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하겠습니까. 법칙이 ‘쌍생 쌍멸’이기 때문에 함께 생하고 함께 멸할 수 밖에 없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2500년 전에 위빠사나를 통해서 있는 그대로의 진리를 깨닫고 보니까 ‘무아 연기’인 것을 알았습니다. ‘쌍생 쌍멸’ 이기 때문에 “본래 나라는 것은 없다, 모든 생명적 현상 속에는 그 자성이 공하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미(美)와 추(醜)
다음은 미추, 즉 아름답다와 추하다의 개념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은 뭘 보고 아름답다 추하다고 합니까.
사람을 놓고 이야기할 때, “저 여자는 아름다워.” 또는 “저 여자는 못 생겼어.” 하는데 기준을 어디다 두고 하는 것입니까. 그 기준이라고 하는 것이 사람마다 다 다른 데 말입니다. 내가 볼 때는 아주 못 생겼는데 다른 사람은 죽자 사자 쫓아다니는 일이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마른 사람을 좋아하고, 어떤 사람은 뚱뚱한 사람을 좋아하고, 또 어떤 사람은 키가 큰 사람을 좋아하고, 어떤 사람은 아담한 사람을 좋아합니다. 여기까지는 아름다움이고 여기까지는 추함이라는 기준이 있다면 다를 수 있을까요? 그 기준이라는 것이 상대적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다 그렇습니다.
시비, 옳고 그르다고 하는 것도 기준이 정확하게 있으면 사람들이 왜 싸웁니까? 절대적 기준이 없으니까 내가 옳으니, 네가 옳으니 하며 매일 싸우지 않습니까? 서로 잘났다고 하면서 말입니다.
선(善)과 악(惡)
오늘날 사람들이 가장 헷갈리고 괴롭힘을 당하는 개념입니다. 모든 종교에서 착하게 살자, 선을 행하라, 악하게 살면 벌을 받는다, 이런 말들을 하며 선을 강조했는데 한 번 잘 생각해 봅시다. 선과 악을 나누는 기준이 있습니까? 기준이 있어야 착하게 살든지 악하게 살든지 할 것 아닙니까? 해공도 깨닫기 전에 많이 생각을 해봤습니다. 착하게 살고 싶었으니까요.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게 기준이 없는 것입니다. 어디서 어디까지가 ‘선’이고 어디서 어디까지가 ‘악’인지 기준을 찾지 못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 개념 자체가 상대적 개념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딱 선을 그어놓고 여기까지는 ‘선’, 여기까지는 ‘악’ 이렇게 된다면 이건 절대적 기준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기준이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개념은 상대적 개념이고 상대적 개념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기준도 절대 기준이 아닌 상대적 기준으로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상황마다, 사람마다, 국가마다 다 다른 것입니다. 법이라는 것이 왜 필요합니까? 절대 기준이 있다면 나라마다 법을 만들 필요가 있습니까. 기준이 없으니까 각자 자기들의 관습과 문화와 가치관 그리고 시대상황 등에 따라 다 다른 것입니다. 한국은 한국 상황에 맞게 법을 만들고, 미국은 미국 상황에 맞게 법을 만들고, 아프리카 원주민들은 자기들 상황에 맞게 법을 만드는 것입니다. 아랍 국가에서는 남자 한 명이 여자 네 명을 거느릴 수 있습니다. 거기서는 그것이 법인 것입니다. 그런데 아랍 남자가 한국에 와서 그렇게 하려고 하면 큰일납니다. 기준이 달라서 그런 것입니다. 여기서는 이것이 당연한 것인데 저기서는 맞아 죽을 일이고, 여기서는 큰일날 일인데 저기서는 환영받을 일인 것입니다. 기준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상대적 개념에 의한 선악 기준을 마치 절대 기준인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통 “저 사람은 참 착한 사람이야”라고 말하는데 뭘 가지고 착하다는 것입니까? 자기 기준으로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는 선이니 악이니 하는 것은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고, 쌍으로 존재하는 개념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모든 종교가 악을 없애고 “선한 세상을 만들자.” “유토피아를 건설하자.” “불국토를 건설하자.” 이와 같은 순진한 소리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 세상이 있다면 정말 좋겠지만 악이 없어져 버리면 선은 어떻게 됩니까? 이것도 어디 지탱할 데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선이라고 하는 것은 악의 반대말이기 때문에, 악이 없어지면 선도 같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둘 다 사라져 버리면 이 상대성인 우주 현상계가 존립할 수 있겠습니까? 안되는 것입니다. 이 우주 현상계가 있는 한은 좋든지 싫든지 선과 악이 쌍으로 함께 같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쉽게 얘기해서 여러분들이 존재하는 한은 영혼과 육체가 함께 있는 것입니다. 육체가 싫다고 내팽개치고 영혼이 혼자 있을 수 없고, 영혼이 귀찮다고 떼어 팽개치고 몸만 혼자 있을 수도 없는 것처럼 이 현상계가 있는 한 선과 악이 함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선과 악이라는 개념, 나와 너라는 개념, 음양이라는 개념, 미추, 시비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쌍으로 존재하는 개념은 절대로 없어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이것이 없어지면 저것도 없어지니까 우주 현상계 자체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세상이 존재하는 한 음양의 모습으로 존재하고, 너와 내가 있고, 선과 악이 함께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상대성인 우주 현상계의 원리에 의해서 튀어나온 것이기 때문에 선과 악이 함께 공존하는 이것이 바로 진리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선이 진리라면 악도 진리인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진리인 악을 쳐 없애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게 없어집니까? 악도 진리이기 때문에 안 없어지는 것입니다. 상대적 우주 현상계 안에서는 이 자체가 진리입니다. 악도 진리라서 안 없어진다고 하니까 여러분 마음에 큰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걱정할 것 없습니다. 이것이 이 우주 현상계 안에서는 함께 공존하는 진리이지만 이것들은 참이 아니고 개념으로만 존재하기 때문에, 본래성품 차원에서 봤을 때는 허상이라는 것입니다. 허깨비라는 말입니다. 본래는 있지 않은데 개념으로만 있는 것입니다. 허상체인 상대적 우주 현상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진 개념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상대적 개념인 허상에 사람들이 매여 가지고 이게 옳으니 저게 옳으니, 이걸 없애야 되느니, 저것은 어쩌니 저쩌니 하면서 시비 분별하고 끌려 다니기 때문에 고통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세상을 어떻게 봐야 될까요. 이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진리로 봐야 된다는 것입니다. 절대 진리인 본래성품이 그대로 드러났다 사라졌다 하는 모습이 이 상대적 우주 현상계이기 때문입니다.
우주 현상계 안에 존재하는 선과 악, 옳고 그름, 좋고 나쁨, 아름다움과 추함 등의 모든 상대적 개념들은 진리인 본래성품 그 자체이기 때문에, 시비 분별 짓고 있는 그것이 바로 어리석음이고 무지인 것입니다.
본래성품 측면에서 전체가 하나로 드러난 우주 현상계를 있는 그대로의 진리로 보지 못하고, 이 몸뚱이 안에 들어있는 티끌과 같은 개체 의식으로 이것 저것 시비 분별하면서 상대적 개념 안에 푹 빠져서 그것의 놀림감이 되어 끌려 다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무아 연기’, 이 상대적 우주 현상계 안에는 그 어떤 존재도 스스로 그리고 홀로 존재하는 것은 없기 때문에, 그 각각의 성품 안에는 ‘나’라고 이야기할만한 주체가 없다는 것입니다. 허상체이고 ‘무아 연기’적 존재이기 때문에 반드시 생했다 멸합니다. 왜 허상일까요. 변하고 사라지고 없어져 버리기 때문입니다. 이 허상체들은 연기적 방법에 의해 존재하고 유지되고 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저걸 만들어놓고 저것이 이걸 만들어 놓고 다른 것을 존재시키면서 사라집니다. 그리고 상대적 존재는 홀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반드시 상대가 있어야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나’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오직 ‘나’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영원히 변하지 않고, 시작도 끝도 없는,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면서 이것과 저것 모두인 오직 하나로서 존재하는 절대인 본래성품입니다. 이것만이 참나인 것입니다. 본래성품에서 나투어진 이 존재 하나는 허상체로서의 모습이고, 그 허상체가 튀어나올 때 어쩔 수 없이 뒤집어 씌워진 상대적 인식에 의해서 마치 나누어져 있는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실제로 나누어진 것이 아닙니다. 개체 의식으로 착각했을 때 나누어진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이고, 인식될 수 없으며, 현상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그것이 실재이고, 그것이 드러날 때는 의식으로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깨닫지 못한 사람은 이 몸 하나만 나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것만 ‘나’이고 다른 것은 ‘너’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분리 의식이 되는 것입니다. 이 분리 의식은 이 개체를 ‘나’라고 인정하는 개체 의식에서 나오는 것인데 실제로 이 개체 의식이라고 하는 것은 상대적 개념에서만 나오는 것이지 실재인 본래성품에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진리는 본래 쌍으로 이루어진 하나입니다.
<해공선생님께서 정신세계원에 연재하신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