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에서 우리의 옛 모습을 보다. 대한문학세계 기자, 소운/박목철
전쟁통에 어렵게 어린 시절을 보낸 탓인지 초라함이 낯설지 않고 오히려 정겹게 느껴진다.
캄보디아 공항에 도착해 호텔로 가는 동안 차장 밖에 비친 캄보디아의 모습은 흡사 우리의 60년대
도시 변두리의 모습과 흡사해서 낯설다는 느낌보다는 정겨운 모습으로 다가왔다.
허름한 건물과 포장이 덜 된 도롯가(우리도 옛날에는 도로를 가운데 만 포장 했다)에 좌판을 벌이고
얼핏 봐도 별로 돈 될 것 같지 않은 물건 주위에 몰려서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우리의 옛 모습과 다를 바
없었기 때문이다. 저녁이면 마땅히 즐길 거리가 없으니 하릴없이 거리로 나와 서성이는 것까지 우리의
옛 모습과 닮아 있어 이국(異國)이라기보다는 옛날로 돌아간 듯 정겨운 거리 풍경이었다.
캄보디아를 다녀 보니 이들도 먹고사는 방법이 달라야 한다는 사실을 깨우친듯하다.
국민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하고 산업 시설이 거의 없는 캄보디아이다 보니, 돈 될만한 생산물도 딱히
없는 현실에서 소규모 농사만으로는 돈을 만져 볼 기회가 거의 없을 것이고, 사회 발전에 따라 돈 들어
갈 곳은 점점 많아지는 현실이 곤혹스러웠을 것이다. 캄보디아는 전기마저 베트남에서 보내온 전기를
사서 쓴다고 했다. 그들에게 절실히 필요한 달러 공급원은 조상이 물려준 화려한 문화유산이 전부라
해도 될 정도로 캄보디아에서 관광의 비중은 클 수밖에 없고 소득도 관광에 기댈 수밖에 없다.
* 관광지 주변에는 이런 기념품 가게가 많다. 보통 팔 가격의 3배 정도 부르는 것 같았다.
* 퇴역 군인들의 삶의 수단, 한국 관광객이 지나가면 아리랑을 연주한다. 인심 좋은 한국인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그런 이들의 사정을 모르고 보면 비합리적이고 비능률적인 모습으로 캄보디아를 보게 된다.
관광으로 먹고사는 나라에서, 자기 나라를 찾는 관광객에게 비자비를 별도로 받는다거나,
따로 웃돈을 요구하기도 하고, 하루 치 관람 티켓을 끊는데, 사진을 찍어 붙여야 하는 번거로움에
더해 허술하게 검표하는 시스템까지 얼핏 보면 인력의 낭비가 곳곳에 보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선진화된 사회의 시각 일 수밖에 없고, 당장 일자리가 필요한 캄보디아의 입장에서는 남의 눈치
볼 형편이 아닐 것이다. 자동 검표를 하면 편할 수도 있겠지만, 일자리는 그만치 줄어들 것이고
혼자 해도 충분할 일을 여럿이 나눠 하는 것도 최소한의 소득을 나눠 갖자는 그들의 지혜이다.
웬만한 도롯가에는 어디를 가나 파라솔을 펼친 좌대를 흔히 보게 된다.
도대체 뭘 파는 걸까, 하는 마음에 유심히 관찰하니 과일 몇 종류를 제외하면 팔 물건도 별로
눈에 보이지 않았다. 팔 물건도 없지만, 수입은 절실하니 과일 한 개라도 관광객에게 팔겠다는
그들의 노력이 측은해 보이기도 했다.
우리의 장터에 가보면 할머니들이 산나물이나 잡곡 몇 줌을 들고나와 파는 것을 보고(물건의 양은
할머니들이 자루에 넣어 들고나올 정도를 넘지 못한다) 저걸 다 팔아봐야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하지만 할머니들은 심심해서, 또는 손주 용돈이라도 하는 여유가 있으니 생계가 절실한 캄보디아와는
차원이 다르다 하겠다.
70년대 까지 만 해도 재래시장에서 물건을 사려면 물건값을 놓고 밀고 당기는 심리전을 해야 했고
이웃 나라 중국도 예외가 아니어서 관광지에 도착하면 내리기 전에 미리 가이드의 안내가 있었다.
"관광지에서 산 물건은 그냥 재미로 생각하셔야지 남과 비교하면 짜증 납니다." 라고,
나중에 보면 부채 두 개를 만 원에 산 사람도 있는 데, 같은 물건을 만 원에 8개 나 받은 사람도 있으니
가이드의 안내가 미리 없었다면 짜증 낼 법도 하다. 지금은 물건값을 가지고 흥정하는 일은 거의 없다.
캄보디아에서도 부르는 대로 물건을 사면 바가지를 쓴다는 사전 교육을 받았기에 기분 좋은 흥정을
오랜만에 해 보았다. 우리 나이쯤 되면 물건값 깍는일은 별로 어색하지도 않고 재미까지 있다.
* 재래시장의 과일가게, 하나 맛보려니 1달러 이하 캄보디아 돈으로 거래되기에 포기했다.
* 우리 오일장에서 흔히 만나는 대장간 제품과 다를 바가 없다.
캄보디아에서는 가게 옆을 지나거나 물건을 쳐다보면 호객을 하며 물건값을 외친다.
달러라는 단위 앞에는 원 달러를 제외하고는 아마 한국말인 듯싶은 단위를 붙이는 것 같았다.
예를 들면, 이 달러, 삼 달러, 오 달러, 등 예전 중국 관광지에서는 한국 돈이 통해 " 만 원"이라는
소리를 많이 들었지만, 캄보디아에서는 한국 돈은 통하지 않는듯 했고, 오직 달러 소리가 요란했다.
외국에서 한국 돈이 통용되는 현장을 보면 왠지 국력이 신장한 듯 흐뭇하던 기억이 있다.
우리도 이제는 한국 돈을 국제화시키려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잠시 해 보았다.
흥정해 보니 아직 캄보디아인은 한국인보다 어리숙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게의 경우, 팔고자 하는 값의 3배 정도를 제시하는 것 같은데, 삼 분의 일로 뚝 잘라 팔래 ?
말래? 하면 흥정은 금세 끝나게 마련이다. 6달러 제시한 물건을 2달러, 하면 바로 4달러, 하고 값을
내리고, 다시 한번, 2달러 한 후, 자리를 뜰 시늉을 보이면 오케이 2달러로 흥정은 끝난다.
중국만 해도 흥정이 성사되기까지 밀고 당기는 기 싸움이 있지만, 캄보디아에서는 기 싸움이 없다.
좋게 말해서 아직 순수함을 잃지 않았다는 뜻이다. 가이드 말로는 예전 캄보디아인은 물건값을
가지고 흥정하지 않았다고 한다. 달라는 대로 주고 사고 바가지는 당연히 없었는데, 바가지는 근래
들어 중국인 관광객이 많아지며 배웠다고 하는데, 글쎄 ?
* 오토바이에 수레를 달고 다니는 일명 톡톡이, 대중교통 수단으로 널리 이용되고 있었다.
* 시내에는 삼성 광고가 많이 보였다. 캄보디아도 빈부 격차가 벌어지는 듯,
캄보디아의 중요한 교통수단은 톡톡 이라고 하는 오토바이에 매달린 수레이다.
오토바이가 크지도 않고, 흔히 우리나라에서 배달에 이용되는 정도의 크기인데, 여기에 매달린
수레에 4명까지 태우고 달리는 것을 보면, 오토바이도 꽤 힘이 세구나! 새삼 감탄하게 된다.
캄보디아 어디를 가나 이 톡톡이가 달리는 광경을 쉽게 보게 된다.
일자리를 얘기했듯 톡톡이도 일자리와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우리나라 같으면 안전이 어떻고
세금이 어떻고 하며, 규제로 톡톡이가 거리를 누비게 두지 않았을 것이 확실하다.
톡톡이를 타고 덜덜거리며 달리며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여기서도 팁 원 달러는 있었다.
(운전사는 자기 차가 아니라 임대해 오는 것으로 팁이 중요한 수입이라고 한다)
사회가 급격히 발전하는 과정에서 빈부의 격차는 더 커지게 마련이다.
소위 돈이 도는 흐름에 올라타지 않으면 성장은 그저 남의 일이고 구경거리일 뿐이다.
시엠립 중심가 거리에 나가 보면 서양인들이 가득하고, 활기가 넘쳐 흐른다.
이곳만큼은 캄보디아의 빈곤함보다는 화려함이 돋보이기도 하지만, 몇 달러라도 벌겠다고
톡톡이를 빌려 나온 운전시 들이 사람만 보면 "톡톡이" 하고 호객을 하는 모습에서
캄보디아의 빛과 그림자가 겹쳐 보이기도 한다. 영화배우 안젤리나 졸리가 자주 들렀다는
카페(레드피아노)에는 사람이 가득 차 앉을 자리도 없었다. 캄보디아에도 신흥 부자가 탄생할
날이 멀지 않으 듯하다.
* 앤젤리나 졸리가 자주 찾았다는 카페, 빈 좌석이 없을 정도로 사람으로 붐볐다.
* 외국인이 차고 넘치는 밤거리,
* 배탈이 우려되어 거리 음식은 그림의 떡. 서구인들은 거리낌 없이 현지 음식을 먹고 있었다.
저마다 성장의 혜택을 보려는 경쟁이 가득한 외국인 거리 야시장,
혐오식품을 파는 포장마차에는 이런 문구가 쓰여 있었다. "사진을 찍으려면, 반 달러를 내시요"
캄보디아, 살기는 나아지겠지만, 살 맛 나는 인정은 점점 말라 가는구나 하는 안쓰러움이 문득
들었다. 경제 발전과 인정이 같이 좋아지는 사회는 정녕 없다는 것인가?
* 뱀 구이인지 튀김인지, 사진을 찍으려면 돈을 내라고 했다.
* 여행을 떠날 때는 멋진 소재를 많이 찾아서 글을 써야지 하는 맘이지만, 여행을 다녀오면 피곤하니 다음에
하는 마음으로 차일피일 미루게 된다. 그러다 보면 시간도 지났는데 하고 의욕도 스러지는 버릇이 늘 반복이다.
사진 몇 장을 추가로 소개하며 캄보디아 여행기는 아마도 끝일 것 같다.
( 주의사항 - 캄보디아인은 달러가 조금만 낡아도 받지 않는다. 여러번 접었다 편 자리가 있어도 노, 다.)
後記,
외국을 다니며 유적을 보다 보면 늘 우리와 비교해 보는 버릇이 있다.
캄보디아, 지금은 우리 한 개 시만도 못한 보잘것없는 약소국이지만 문명의 흔적은 찬란했다.
불국사의 청운교 백운교, 다보탑이나 석가탑, 석굴암의 유적을 배우며, 대단한 예술적 유산이라고 자랑스러웠다.
캄보디아의 석조 예술을 보며, 아! 하는 탄식이 절로 나왔다.
캄보디아의 하나의 사원 만 해도 석굴암이나 불국사의 예술품을 수 백 개 펼쳐 놓은 듯한 웅대함과 정교함,
일본의 목조 건물을 보며 우리의 옛 궁궐의 규모가 너무 초라하다는 생각에 한동안 문화적 혼란을 겪던 느낌과
비슷한 정신적 혼란을 겪었다고나 할까?
하지만 일본을 계속 찾다 보니, 환경의 차이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는 진실에 접근하게 되었다.
일본은 곧고 큰 나무가 널려 있고, 온돌 구조가 아닌 탓에 건물 칸 사이를 정하는데 제약이 없다는 사실,
우린 열 두자(3,6 m) 목재도 구하기 힘든 굽은 소나무뿐이고, 온돌 아궁이와 굴뚝 탓에 건물의 칸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으니 작고 아담한 한옥은 자연이 정해 준 규모라는 깨우침,
캄보디아에서 느낀 문화적 쇼크도 소운의 일시적 무지함이라고 깨닫게 되는 날이 있을 것이다.
* 사원의 전경을 보면 규모가 대단해 보였다. 건축적 시각으로 석 구조로 어떻게 처리했을까?
하는 관점에서 상세히 살펴보았다. 지붕 처리 때문에 폭은 좁게 단순 처리 한 후, 긴 회랑으로 연결하고
양쪽으로 날개같이 처마를 낸 구조를 외부로 길게 펼처 놓은 것이라고 보면 된다.
외부에서 보면 거대한 구조 같지만, 실제는 긴 복도를 외곽으로 펼쳐 놓은 단순한 구조이다.
다층 구조도 단을 쌓아 올려서 같은 형식으로 외곽을 둘러쳐 시각적 다층일 뿐 우리가 생각하는 층위에
층을 올린 다층 구조는 아니다. 따라서 커다란 홀도 존재하지 않는다.
* 외부에서 보면 거대한 다층 구조로 보이지만,
* 석조 건물의 지붕 처리는 어렵다. 이렇게 복도 형태로 외곽을 둘러친 구조이고
* 양쪽으로 캔틸레버(한쪽 고정 내민) 구조물을 덧붙여 회랑의 넓이를 넓혔다.
* 유리가 발명되기 전, 채광과 통풍을 위해 창을 내고, 이런 장식으로 휑함을 덜었다. 우린 창호지가 유리 구실을 했지만,
* 조각 솜씨가 아주 정교하고 아름다웠다. 아마도 인도의 영향을 받지 않았나 생각해 보았다.
* 이 정도 글도 많은 정성을 기울인 것입니다. 부족하지만, 도움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