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용어는 조선 후기의 광산 관계 사료(史料)에 상용(常用)되어왔다. 그러나 사회적·경제적 발전에 따라 내용과 성격이 크게 변화되었다. 설점수세제가 변화되는 시기는 3단계로 구분된다. 첫째는 1651년(효종 2)에 제정된 '채은관제'(採銀官制), 둘째는 1687년(숙종 13)부터 실시된 '별장제'(別將制), 셋째는 1775년(영조 51) 이후 '물주제'(物主制)하의 설점수세제도였다.
조선후기에는 각 군영이 군수광업을 발전시켜나간 한편 호조에서 은의 확보를 목적으로 은광 개발에 주력하여 광업이 발달했다. 그러나 농민을 강제로 동원하는 요역의 방식에 한계를 느껴 1651년 설점수세제(設店收稅制)가 실시되었다. 설점수세제는 영세 민간자본이라도 광산개발에 참여시키기 위해 정부가 광물산지에 제련장과 부대시설을 마련해주고, 민간자본이 노동자를 마음대로 고용할 수 있게 해주되 광물의 일부를 세금으로 바치게 한 제도이다.
별장을 파견해서 관리했으나 18세기에 들어서면서 군영, 감영의 과도한 잡세 징수와 잠채(潛採)로 인해 1775년에 별장을 이용한 방식은 혁파되었다. 대신 수령이 직접 세를 거두는 방식으로 바뀌어 상업자본에 의한 광산개발이 더욱 적극화되었다. 즉 별장제가 호조에서 점소(店所)를 설치한 것에 비해 수령수세제는 민간 물주가 직접 점소를 설치한 것이다. 1816년에는 상평통보의 원료를 확보하기 위해 잠채하는 모든 동광산을 허가하였고, 1817년에는 은광 채굴과 그 제련도 민간상인에게 맡겼다. 이것은 설점수세 광산과 잠채 광산의 구분이 없어지게 되었으며 광산경영이 민간자본들에게 맡겨졌음을 말해준다.
채은관제
1651년 정부는 국용(國用)과 더불어 청나라와의 외교관계에 절실했던 은(銀)을 수취할 목적으로 채은관제하의 설점수세법을 제정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정부는 재정적인 여유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세역(稅役)에 시달린 농민들의 부역노동으로는 관영광업을 계속할 수 없었다. 이때문에 정부는 부상대고(富商大賈)들의 은광개발을 유도하기 위하여 민영광업을 허가하는 설점수세제를 채택한 것이다. 곧 정부가 채은관을 산은지(産銀地)에 파견하여 은맥을 탐사하고 은품(銀品)을 시험한 뒤에 부상대고의 설점을 허가하고 채은관이 수세(收稅)하도록 하는 규정이었다. 그러나 광산투자의 위험성도 문제였지만 당시에는 광산을 경영할 만큼 민간자본이 성숙하지 못한 단계였기 때문에 상인들의 은광개발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무렵 한양의 오군문(五軍門)과 지방의 감(監)·병(兵)·수영(水營)에서는 전국에 걸쳐 연광(鉛鑛)을 개발하고 감관(監官)을 파견, 운영했다. 그것은 군(軍)·영문(營門)의 자금과 농민들의 부역노동에 의존한 관영광산들이었다. 그런데 한국은 연과 은이 동일한 광맥(鑛脈)이 혼재해 있어 연을 먼저 생산한 뒤 이를 다시 제련하여 은을 생산했기 때문에 연광은 곧 은광이었다. 그러나 군·영문은 조총(鳥銃)의 연환(鉛丸) 재료를 수취할 목적으로 광산을 개발했기 때문에 군·영문 소관하의 광산을 연점(鉛店), 은을 수취하는 호조(戶曹) 소관하의 광산을 은점(銀店)이라고 불렀다.
별장제
1687년부터 실시된 별장제하의 설점수세제는 호조가 군·영문의 연점들을 흡수, 관리하고 또 새로이 개발되는 은점들을 관리하기 위해 마련되었다. 이때의 별장은 호조가 선정해 파견한 한양의 부상대고들로서 군·영문으로부터 흡수한 연점, 곧 은점의 수세 임무만을 띤 일종의 수세청부업자들이었다. 호조에 귀속된 은점은 민영화되었고, 그곳의 실질적인 관리경영자는 점역(店役)을 총관하던 두목(頭目)이었으며, 종래 부역노동에 동원되었던 연군(鉛軍)들은 임금노동자 내지 은군(銀軍)으로 변모했다. 이처럼 군·영문의 기존 광산을 흡수한 경우와는 달리 새로이 개발되는 경우, 별장은 설점과 수세 임무를 동시에 져야 했다.
별장에 의한 설점의 절차와 내용을 보면,
첫째, 별장으로서 경력을 지녔거나 별장이 되고자 하는 자가 산은지의 채굴허가를 호조에 요청하면서 착수했다. 호조는 대체로 이들을 별장에 임명하여 현지에 파견하고, 공문을 발송하여 해당 읍의 수령(守令)과 함께 은맥의 풍잔(豊殘)과 은품의 고하(高下) 및 민폐의 유무를 조사하도록 했다.
둘째, 별장과 수령의 조사 결과 경제성이 있고 민폐가 없을 경우 호조는 설점을 허가함과 동시에 점역에 필요한 인부를 모집하도록 했다. 당시 양민·천민을 막론하고 군역이나 신역(身役)을 지고 있던 사회현실에서 호조는 별장으로 하여금 필요한 인원 수의 은군을 모집하게 할 수 있었다.
셋째, 호조는 생산시설과 각종의 자재를 공급했다. 은점에는 규모에 따라 수개 또는 수십 개의 제련용 용광로와 풀무 및 제련장의 건물, 별장·두목·장인·은군들의 막사 및 부대시설 등을 갖추어야 했고, 제련용 등 연료에 필요한 목재들은 인근 야산에서 벌채하도록 허가했다.
곧 별장제하의 설점은 호조가 자체경비로 점소(店所)를 설치할 뿐 아니라 은군을 모집하고 목재를 조달하는 일도 포함되었다. 설점이 끝나면 별장은 점소에 머물지 않고 서울에 거주하면서 수세를 거둘 때에만 현장으로 내려갔다. 수세는 은군수를 기준으로 수납했는데, 은군 1명당 은 6전씩으로 환산했다. 별장은 자기자본을 전혀 투입하지 않았지만 설점과 수세 임무를 지는 대가로 은점의 총생산량 중 2/3 가량을 차지했고, 나머지 1/3 가량이 두목과 은장 및 은군의 몫으로 분배되었다.
물주제
18세기 이래 상품화폐경제의 발전으로 민간자본이 성장하면서 감사(監司) 또는 수령과 결탁하여 비합법적으로 은광개발에 착수했다. 곧 물주자금이 은광업에 투입되기 시작한 것이다. 민간물주의 잠채광업(潛採鑛業)이 성장하면서 별장제하의 설점수세제는 쇠퇴하여 1775년(영조 51)에 호조가 자진 혁파하기에 이른다. 같은 해 은점부터 합법적으로 적용되기 시작한 물주제하의 설점수세제도는 1780년(정조 4)에는 동점(銅店)에도 적용되었고, 1806년(순조 6)에는 금점(金店)에까지 확대되었다.
물주제하의 설점수세제는 물주가 호조로부터 설점허가를 받아낸 뒤 사금광산(沙金鑛山)의 덕대(德大)나 은·동광산의 용주(宂主)에게 광산경영에 필요한 자금을 투입하는 설점과정과, 해당 읍의 수령이 호조에 세금을 수납하는 수세과정을 총칭하는 형태였다. 광맥을 탐사하고 시굴한 자들은 덕대 또는 용주와 몇몇의 전업적(專業的)인 광산기술자들이다. 이들을 합쳐 흔히 ' 동정설점자'(同情設店者)라 불렀다. 이들은 대개가 호조의 허가를 받아낼 만한 사회적 위치나 광산을 운영할 만한 경제적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유력한 물주를 물색했다. 광산의 실질적인 경영자는 덕대나 용주였다. 덕대나 용주는 물주의 자금으로 점소를 설치하고 연료 등을 구입했으며, 임금노동자를 광군(鑛軍)으로 고용했다. 덕대나 용주는 광산의 생산물 중에서 자금의 이윤에 상당하는 몫을 물주에게 지급하고, 광군에게 임금을 지불한 뒤 나머지를 동정설점한 자들과 분배했다. 해당 읍의 수령은 광군 수에 따른 세금을 호조에 수납하는 동시에 감영과 더불어 각종 세목(稅目)의 잡세도 수취했다. 이상과 같이 조선 후기 금·은·동광업에 적용된 설점수세제도는 사회경제적인 발전과 더불어 그것의 내용과 성격이 크게 변질되었던 것이다..
|
잠채 (潛採)
|
조선 후기 정부의 단속·금지를 피해 비밀리에 광산을 경영하던 현상. |
|
본래 조선 정부는 광업에 있어서 부역노동으로 운영하는 관영광업 이외에 개인경영을 일체 허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17세기 이후 국가재정의 파탄으로 직접 광산을 경영할 수 없게 되었고 또한 청나라와의 무역확대로 은의 수요는 증대되었으므로 부득이 광업정책을 수정하게 되었다. 결국 1651년부터 정부의 일정한 통제 아래 은점(銀店)이나 금점의 경영을 허가하고 그들로부터 세금을 수탈하는 제도인 설점수세제(設店收稅制)가 시행되었다. 그러나 18세기에 들어와 금·은 광산의 수가 급증하여 정부의 통제가 어려워지고 광세수입도 급격히 줄어들자, 정부는 필요에 따라 단천(端川)·성천(成川) 등 몇 개 지역의 은점만을 남겨두고 기타 은광들은 모두 금지하는 등 광업금지정책을 완강하게 고집했다. 이로 인해 이 시기를 전후하여 개인들이 몰래 광산을 경영하는 잠채현상이 성행하게 되었으며 특히 금점에서 성행했다. 그것은 금을 얻는 방법이 은·동에 비해 간단할 뿐만 아니라 19세기 이후 금시장이 확대되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이 시기 은·동에 대한 수요가 급격히 늘어나고 광업이 전반적으로 발전하면서 은광·동광에서도 잠채현상은 이미 막을 수 없는 추세로 되었다. 이와 같은 광산개발의 증가와 잠채의 성행은 이후 상업자본이 광산경영으로 진출하고, 토지에서 이탈한 농민들이 광산노동자로 진출함으로써 광산에서의 자본주의적 관계가 발생하게 되었다. |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