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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1:40-45) 노이즈 마켓팅의 달인, 예수님
“한 나병환자가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하니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곧 나병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고 깨끗하여진지라 곧 보내시며 엄히 경고하사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가서 네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고 네가 깨끗하게 되었으니 모세가 명한 것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하셨더라 그러나 그 사람이 나가서 이 일을 많이 전파하여 널리 퍼지게 하니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는 드러나게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시고 오직 바깥 한적한 곳에 계셨으나 사방에서 사람들이 그에게로 나아오더라.” (막1:40-45)
메시아의 비밀
신규 상품이나 서비스의 판매를 촉진하는 기법 중에 ‘노이즈 마켓팅’(Noise Marketing)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의도적으로 논란을 불러일으켜서 단기간에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것입니다. 의견이 첨예하게 나뉘는 민감한 이슈를 건드리거나, 특별한 사건을 일으켜 입방아에 오르거나, 말초적 감각에 호소하는 자극적인 광고 등을 하는 것입니다. 문자 그대로 소음을 일으켜서 사람들을 불러 모으려는 것입니다.
마가복음에는 그와 반대로 ‘메시아의 비밀”(Messianic Secret)이라고 부를 만큼, 예수님이 당신께서 행한 일을 아무에게도 발설하지 말라고 명하는 말씀이 자주 등장합니다. 주님이 기적적으로 고쳐주신 불치병자를 비롯해 주님에 의해서 쫓겨 나간 귀신에게까지 침묵을 지키라고 명했습니다. 나중에는 제자들에게 베드로가 당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 것과, 당신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신다는 가르침까지 비밀에 부치라고했습니다.
주님은 당신에 관해서 노이즈 마켓팅이 일어날 것을 미리 방지하려는 뜻이었습니다. 본문에서도 나병 환자를 고쳐주신 후에 삼가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단단히 당부했습니다. 그런데 이 환자가 오히려 많이 전파하여 널리 퍼지는 바람에 주님이 드러나게 사역하지 못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바깥 한적한 곳에 계신 주님을 사방에서 사람들이 오히려 많이 찾아왔는데, 마치 주님이 고차원적으로 노이즈 마케팅을 역이용한 것 같습니다.
주님에게 사람들을 조종 선동하려는 불순한 의도가 있었을 리는 만무합니다. 불치병자나 불구자가 기적적으로 나으면 당장 그 소식은 널리 퍼져나갈 수밖에 없으며 예수님이 그렇게 될 것을 몰랐을 리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왜 굳이 그런 당부를 했는지 궁금합니다. 매번 강조하지만, 성경의 의문점은 본문만 잘 살펴도 그 안에서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선 예수님은 나병을 고쳐준 자에게 제사장에게만 나은 몸을 보이고 결례를 행하라고 명했습니다. 제사장 외에는 비밀에 부치고 절대 동네방네 떠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물론 제사장도 기이하게 여기고서 꼬치꼬치 캐물을 수 있으나 본인이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으면 그만입니다. 제사장은 율법에 따라 정결례만 정확히 치러주면 되고, 또 모든 사역자는 원칙적으로 피상담자나 죄인의 프라이버시를 보호해 줄 책임이 있습니다.
거기다 사역 초기이긴 했어도 이미 유대 지역에 주님에 대한 소문이 자자했습니다. 당시는 질병 치료를 제사장이나 바리새인들이 담당했고 때로는 기적도 일어났기에, 자기들의 강력한 경쟁자로 떠오르고 있는 예수님을 나서서 선전해 줄 리는 없습니다. 그래도 아주 가까운 주변 사람과 나누다 보면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고 어차피 소문은 퍼질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처럼 본인이 곧바로 떠벌리고 다니는 것에 비하면 시간은 더디 걸릴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제사장에게 가서 결례만 치르고 비밀에 부치라고 당부한 첫째 이유는, 혹시 노이즈 마켓팅이 일어나더라도 최대한 시간을 벌겠다는 간단한 뜻이었습니다.
원하시면
그렇다면 예수님이 잘 지켜지진 않았어도 어쨌든 시간을 조금이라도 벌어야만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해집니다. 이에 대해서도 바로 앞의 성경 기사에 답이 있습니다. 주님이 회당에서 귀신 들린 자에게서 귀신을 쫓아내 주었고 또 열병에 걸린 베드로의 장모도 고쳐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의 소문이 온 갈릴리 사방에 퍼졌으며, 주님이 기도하는 이른 새벽 시간부터 많은 사람이 주님께 고침을 받고자 찾아왔습니다.
그 때 주님은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막1:38)라고 말씀하시고서 그 자리를 피했습니다. 그리고선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회당에서 전도하시고 또 귀신들을 내쫓으셨습니다.(39절) 복음을 전하기 위해 이 땅에 왔기에, 전도하는 시간을 최대한 늘리려면 병의 치유는 줄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바꿔 말해 병의 치유 같은 현실적 축복을 주려고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주님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마8:20)라고 말했습니다. 복음서 기록을 보면 온갖 사람들이 온갖 질병과 상처와 문제를 안고 주님을 찾아왔기에 도무지 쉴만한 틈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오죽하면 폭풍우가 치는 가운데도 뱃머리에서 주무셨겠습니까? 그만큼 너무 피곤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가장 시급한 복음 선포에 전력투구하기 위해서 어차피 시중에서 큰 화제거리가 되겠지만 당분간은 비밀로 부치라고 신신당부한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복음 전도가 시급해도 공사역 내내 당신을 개인적으로 직접 찾아온 자를 외면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심지어 이방인인 로마 백부장의 종이나, 비천한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도 멀리서 말씀 한마디로 고쳐주었습니다. 이 나병 환자도 주님께 먼저 찾아와 꿇어 엎드려 간구했기에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서라도 곧바로 완치해 주었습니다.
거기다 이 나병 환자의 고침은 복음 전파와도 연관이 있었습니다. 그가 “원하시면” 고쳐 달라고 간구했는데 우리말 번역이 조금 부족해 보입니다. 원어 ‘에안 텔레스’는 주님의 현재 감정이나 의사가 어떨지 궁금해하거나 혹은 고칠 가능성이 있을지 타진해 보려는 뜻이 아닙니다. 당신께서 나를 고쳐주실 의지가 있는지 묻는 뜻인데, 주님이 고쳐주고 싶은 마음조차 없는 매정하고 냉혹한 분이라고 여긴 것도 아닙니다.
그도 주님의 성품과 능력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당신께서 얼마든지 고칠 수 있는 분인 줄 잘 알고 있지만, 지금 저를 고쳐주실지 말지는 당신의 의지에 달렸다는 뜻이었습니다. 그가 그렇게 말한 이유는 유대인이면, 특별히 랍비라면 더욱 부정한 상태인 자기와 접촉해선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너무나 당연하게 원한다고 대답했습니다. 그가 당신을 순전히 믿고서 자기 전부를 당신의 처분에 온전히 맡겼기에, 주님도 전혀 주저하지 않고 그렇게 대답한 것입니다. 어쩌면 그가 고침을 받고 싶다는 소망보다 주님이 그가 너무 불쌍해서 고쳐 주고 싶다는 안타까움이 더 컸을 것입니다.
깨끗함을 받으라.
모세의 율법은 공동체의 정결함을 위해서 부정한 환자를 다 나을 때까지 일시적으로 격리하라고 명합니다. 그렇게 하는 목적은 하나님의 백성은 언제 어디서나 죄를 짓지 않아야 하고 육체적 흠결도 제거한 깨끗한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며, 특별히 당신께로 나올 때는 더더욱 그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유대교 종교 지도자들은 율법을 문자적 표피적으로만 적용하여서 완치가 불가능한 불치병자나 불구자의 경우에는 아예 처음부터 부정했던 자라고 간주하고서 공동체에서 추방했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구원 은혜와 완전히 담을 쌓은 천하의 죄인으로 취급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고유 권한인 심판을 행사했기에 주님은 공사역 중에 유일하게 그들만 저주하며 야단쳤습니다.
이 문둥병자가 특이하게도 고쳐 달라고 하지 않고 “깨끗게 해달라고” 요청한 까닭입니다. 그는 유대 공동체에서 추방되어 문둥이 촌에서 살거나, 그렇지 않다고 해도 사람들을 일절 만날 수 없습니다. 사회생활을 전혀 하지 못하는 데다 당시로선 불치병이라 아무 소망 없이 죽음만 기다리는 처지였습니다. 날이 갈수록 상태가 나아지기는커녕 더 추악하게 변해가는 자기 몰골을 보니까 바리새인들의 말처럼 정말로 하나님께 저주받은 것은 아닌지 자꾸 염려되었을 것입니다. 육체적 아픔보다 하나님이 싫어하는 자라고 낙인이 찍힌 정신적 고통이 그를 더 괴롭게 만들었을 것이며 하루에도 몇 번씩 죽고 싶다는 생각이 치밀었을 것입니다.
그러던 차에 주님에 대한 너무나 소망스러운 소문을 듣고서 지금 과감하게 주님께 나온 것입니다. 주님은 그런 그를 불쌍히 여기고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우선 유대인 랍비가 나병 환자와 상봉하는 것도 금지되어 있는데, 직접 손을 그에게 댔습니다. 가장 정결해야 하는 랍비가 가장 부정한 것을 덥석 만졌습니다. 사람이라면 부모라도 거의 손대지 않을 텐데, 생면 부지의 주님이 손을 댄 것만으로도 인간을 초월하는 존재라는 의미였습니다.
주님은 또 그래서 고쳐주겠다고 약속하거나 질병아 물러가라고 명령하지 않고 “깨끗함을 받으라”라고 선포했습니다. 당신께서 지금 바로 너에게 깨끗함으로 덧입혀 주겠다는 뜻입니다. 주님은 그가 육체적 고통보다 영원히 부정한 죄인으로 취급받아서 사람 구실도 못 하는 것이 가장 괴로웠을 것이라고 다 아셨습니다. 그가 겪고 있는 문제와 고통의 근본 원인을 제거해서 유대 사회의 일원으로 돌아가 정상인으로 생활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한마디로 “너는 절대로 하나님의 저주받은 자가 아니다. 하나님이 너를 정말로 사랑하고 있다”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 것입니다.
이 일 얼마 후에 스스로 움직이지 못하는 중풍 병자를 고치려고 친구들이 지붕을 뚫고 주님 앞에 내렸을 때, 주님은 그 병자에게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막2:5) 어떤 인간도 감히 다른 이의 죄를 사한다고 말할 수 없고 또 그렇게 말한 증표로 중풍병을 낫게 할 능능력도 갖추고 있지 못합니다. 본문의 경우처럼 당신이 바로 하나님이라고 선포한 것입니다.
아무리 육체적 도덕적 영적으로 더러웠던 자라도 당신 앞에 모든 것을 맡기며 엎드리면 절대로 그 외적인 더러움으로 외면하거나 차별하지 않고, 오히려 그 사람 전부를 깨끗하게 바꿔주는 존재임을 주님이 모든 사람 앞에 증명해 보인 것입니다. 한마디로 사람이 더러워서 하나님 앞에 나서지 못하는 경우는 유일한데, 죄로 오염되었음에도 그 죄를 씻지 않았을 때뿐이라는 것입니다. 경제적인 궁핍, 사회적 신분의 비천함, 심지어 나병 환자나 귀신 들린 자라도 진심으로 스스로를 낮춘다면 언제든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있다는 뜻입니다.
시간을 아낀 이유
그런데 주님은 율법상 더럽다고 규정된 사람을 당신께선 직접 손을 대며 접촉하고선 그 환자더러는 대제사장에게 가서 결례를 행하라고 명했습니다. 당신은 율법을 어겨도 되고 그는 지켜야 한다는 이중적인 태도가 아닙니다. 주님은 율법을 제정하신 분으로 율법을 초월하는 신분입니다. 나병 환자에게 손을 댈 때부터 그런 부정함과 전혀 무관하며 질병마저도 주관하는 하나님이심을 이미 드러낸 것입니다. 그러나 이 환자는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를 받아야 하는 인간이므로, 이제 자기 공동체로 돌아가려면 하나님의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유다 백성들은 아직은 예수님을 성자 하나님이 아니라 나사렛 출신의 인간 랍비로만 알고 있습니다. 형식적이고 외식적인 종교 관습과 규율에 고착된 유대 지도층들과 또 그들에게 세뇌되어 부화뇌동하는 사람들은 주님에게 율법의 계명을 어긴 자라고 비난할 것입니다. 주님이 환자더러 비밀에 부치라고 한 또 다른 이유는, 그런 갈등과 분쟁을 두려워한 것은 절대 아니지만, 그런 일로 쓸데없이 시간과 정력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공사역 내내 유대 사회에서 율법 규정으로, 실은 모세 율법이 아니라 바리새인들이 정한 유전 때문에 억울하게 소외된 불쌍한 사람들을 주로 찾아다니면서 조용하게 사역했습니다. 주님은 당신의 그런 행보가 그런 자들과 상종도 하지 않는 유대 지도층으로부터 온갖 오해와 질시와 배척을 받을 것을 다 알고서도 그렇게 했습니다. 당신의 돌봄과 가르침과 깨끗게 함과 죄 사함의 은혜가 절실히 필요해서 진정으로 원하는 당신의 양 떼를 절대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 자를 한 명씩 인격적으로 만나주기에도 시간이 모자랐기에 세상 권세자들의 눈치를 볼 필요는 전혀 없었습니다.
오늘날도 주님의 지상 사역이 너무 짧았던 것 아닌가라는 아쉬움을 품는 신자가 많습니다. 조금 더 오래 계시면서 더 많은 사랑을 베풀고 더 많은 가르침을 더 자세히 주셨더라면 인류에게 더 도움이 되었을 것이라고 여깁니다. 특별히 성경이 그런 주님의 사역을 더 자세히 풀어서 기록했더라면 우리도 더 쉽게 또 더 확실히 믿었을 수 있을 텐데라고 생각합니다.
주님을 더 깊이 알고 싶다는 심정은 이해가 되지만, 여전히 십자가 복음을 잘 모르는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주님께 삼 년간 직접 배운 제자들도 성령을 받지 않았기에 마지막 만찬 때까지 우리와 비슷한 아쉬움을 강하게 표출했습니다. 그 전에 십자가에 죽으신다는 주님을 베드로가 더 오래 사셔야 한다는 뜻으로 앞장서서 말렸지만,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고 크게 야단만 맞지 않았습니까? (마16:23)
만약 주님이 지상에 더 오래 계셨더라면 더 많은 인간이 병을 고쳐 달라거나, 돈을 잘 벌게 해달라는 요청밖에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주님도 당신을 찾아오는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고 일일이 어쨌든 돌봐주어야 할 것이므로, 마치 주님이 그런 일을 하려고 이 땅에 오셨다고 오해할 것입니다. 겨우 삼 년이었는데도 제자들이 주님의 기적과 치유의 현장에 전부 참여하다 보니 천국 복음보다 주님의 능력에 더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았습니까?
요한 사도는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요21:25)라고 자기가 저작한 복음서의 결론을 내렸습니다. 과장법 표현이긴 하지만 주님이 행한 일을 다 기록하면 그 책만으로도 세상을 다 채우고 남는다고 합니다. 실제로 요한이 그중 일곱 기적만 골라서 기록했으나, 그것만으로도 주님의 주님다우심을 온전히 증명하고도 남았습니다. 요컨대 주님이 삼 년간 베푸신 은혜의 의미와 그 열매만으로도 인간에게 필요한 사랑을 충분히 넘치도록 베푸셨던 것입니다.
일 초도 아까웠던 주님
그러니까 그 삼 년간 주님으로선 얼마나 시간이 아까웠겠습니까? 삶의 문제를 상담해 주고 병을 고쳐주고 귀신을 쫓는 일도 중요하지만, 더 많은 이들에게 하나님과 그의 나라와 의에 대해 더 많이 가르쳐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당신께서 행하는 사역이나 가르침은 당시의 어떤 고매하고 신령한 랍비도 행할 수 없는 신적인 권세가 넘쳤기에 비밀에 부친다고 해서 부쳐질 수도 없었습니다. 이 환자도 필생의 소원으로 자기 생명과 바꿀 만한 은혜를 입었기에 도저히 외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주님은 머리를 누일 틈도 없을 만큼 바쁠 수밖에 없었는데, 그런 와중에도 한 시도 허투루 보내지 않고 복음을 증거하는 데에만 최대한 집중하려 했습니다. 그리고 요한의 마지막 진술처럼 삼 년이 우리에겐 짧은 것 같아도 주님에겐 충분했습니다. 단순하게 풀어서 설명하자면,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근본적으로 인간을 바꿔야 할 사항은 단 하나였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현재 겪는 모든 문제와 고난의 원인을 자기는 아무 잘못한 것 없고 의로우니까 외부 환경과 다른 사람의 잘못으로만 돌리고 하나님이 그것만 해결해 주길 바랐습니다. 원죄 하에 태어난 모든 세대의 모든 인간이 자기만 높이려는 본성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그 반대로 너희가 겪는 모든 문제와 환난의 근본 원인은 너희 속에 있는 그 악하고 교만한 본성 때문이라는 것을 깨우쳐 주려고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각 사람의 인격체 전부가 완전히 뒤집어져서 새롭게 되지 않는 이상, 어떤 인간도 세상에서 겪는 어떤 문제도 절대로 온전히 해결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주님이 그런 구원의 길을 말로 가르치고 삶으로 본을 보이는 것만으로는 사람들이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 한 문제와 고난이 끊어지지 않는데, 자기를 그분보다 더 높이고 있으니까 삼 년을 직접 배운 제자들도 그런 인식을 정확히 하지 못했습니다. 주님은 인간들로 하여금 자신이야말로 천하 죄인으로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다는 사실을 온전히 체험적으로 깨닫게 해주어야만 했습니다.
바꿔 말해 주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려는 한 가지 목적으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성자 하나님이신 주님이 십자가에서 성부 하나님께 죽음의 제물로 바쳐진 것은 모든 인간의 죗값을 갚으셨다는 뜻입니다. 주님이 사흘 만에 죽음에서 부활하신 것은 하나님께 죗값을 주님이 갚아주어서 깨끗해진 죄인에게 새생명을 주신다는 뜻입니다. 십자가는 그래서 하나님은 죄는 죽기까지 저주하되 죄인은 죽기까지 사랑하신다는 영원하고도 절대적인 증표입니다.
결국 제자들을 포함해서 어떤 사람도 주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똑똑히 목격하지 않고는 주님이 가르친 복음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주님의 공사역 중에 행하신 모든 일들은, 즉 요한이 다 기록하면 지구를 덮고도 남는다는 그 많은 일들은 당신의 십자가 죽음의 의미를 나중에라도 말로써 미리 배운 제자들로 온전히 깨닫게 하려는 준비와 보조 장치였습니다.
주님은 그런 의미로 열심히 가르치고 사역했는데 제자들은 마지막 날 밤까지 서로 자기가 높아지려고 다투었습니다. 그런 모습을 말없이 지켜봐야만 하는 당신의 심정이 얼마나 애타고 괴로웠겠습니까? 그러니까 공사역 내내 새벽마다 아무도 없는 한적한 곳에서 오직 당신의 십자가 사역을 위해 간절히 기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 그런 기도의 최종 결정판이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땀이 피가 되는 모습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때도 주님은 제자들에게 한 시도 깨어 있을 수 없느냐고, 즉 너희도 복음 전파를 위해서 제발 시간을 아껴야 하고, 최소한 기도라도 해야 하지 않느냐고 다그친 것입니다.
복음을 외쳐라.
주님은 베들레헴 마구간에서 탄생하여, 골고다 언덕에서 이 땅에서의 인자로서 삶을 마감하기까지, 죄로 타락해서 하나님과 원수 된 인간을 구원하는 일에만 오롯이 몰두했습니다. 십자가를 향해 매일 묵묵히 한 걸음씩 뚜벅뚜벅 걸어갔으며, 그 길 앞에 사람들의 질시 모함 갈등 나아가 박해가 가로막을 것을 다 알고 계셨습니다. 매일의 사역을 새벽 미명에 한적한 곳에서 기도로 시작할 수밖에 없었던 또 다른 까닭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모든 핍박마저, 수제자 베드로의 부인과 가룟 유다의 배반도 포함해서, 당신의 계획 안에 들어 있었습니다. 사탄과 그 졸개인 귀신들까지 십자가 드라마의 조연과 엑스트라로 완벽하게 동원하셨습니다. 공사역 삼 년간의 모든 순간순간이 태초에 삼위 하나님이 미리 마련해 놓은 십자가 대속 죽음의 구원으로 가는 필연적인 과정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도 인정하듯이 주님은 삼 년이라는 짧은 기간이었어도 역사상 인간에게 최고로 선한 가르침을 주셨고 또 최고로 따뜻한 사랑으로 섬기셨습니다. 그런데도 당시의 유대인이나 로마인이, 즉 모든 세상 사람이 주님께 등을 돌리며 미워하고서 십자가에 매달았습니다. 너희 모두는 하나님보다 자기를 높이는 천하의 죄인이라는 주님의 가르침이 인간의 그 알량한 자존심을 심하게 건드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보다 인간을 더 높이면 그분께 벌 받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이치이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인간은 주님을 거꾸로 죽여 버렸으니, 이 십자가 만큼 인간이 천하의 죄인임을 증명하는 확실한 증거도 없습니다. 또 그래서 인간은 주님의 십자가 은혜 아니고는 구원의 소망이 전혀 없습니다. 세상에서 인간이 취할 수 있는 방도로는 구원은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제자들마저 주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보고서야, 그것도 오순절 성령을 받고서야 비로소 그 십자가에 비추어서 자신이 너무나 철저한 죄인이라고 자각할 수 있었습니다. 또 속에서 나오는 것이 주님의 가르침 대로 음란 거짓 속임수 죄악뿐임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성령이 오시기 전의 공사역 중에는 주님이 당신의 정체성에 대해 비밀에 부치라고 당부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마가는 1장 첫 절에서 본문에 이르기까지 곧(immediately)이라는 표현을 여덟 번 정도 사용했고 본문에도 두 번 나옵니다. 주님의 오심과 함께 이 땅에 십자가 구원이 삼 년 만에 급히 이뤄질 것이고 또 그에 대해서 죄인들이 정말로 시급하게 반응해야 한다고 강조하려는 것입니다. 주님은 죄에 빠져서 당신과 원수 된 죄인들을 구원하려고 삼 년간 단 일 초도 낭비하지 않았습니다. 언제 죽을지 모르고 또 주님이 언제 다시 오실지 모르기에 신약 이후의 신자와 불신자들도 주님께 나아감에 일 초도 낭비할 여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당신의 이 땅에서 행했던 사역을 제자들에게, 즉 모든 신자에게 위임했습니다. 정말로 진지하게 우리가 주님처럼 시간을 아끼며 그 사역을 감당하고 있는지 심각하게 되돌아봐야 합니다. 지금은 주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과 승천이 완료되었고, 성령이 보편적으로 강림하여 택한 자에게 역사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그 구원 진리를 정확히 기록한 성경도 완비되었습니다.
신약 신자는 얼마든지 목이 터지라고 예수님만이 유일한 길이요 생명이요 진리라고 외쳐야 합니다. 사람의 궁극적인 운명은 예수 십자가 은혜 안에 들어온 자와 끝까지 거부하는 자 둘로만 나뉘는데, 그것을 정하는 일이 이 문둥병자의 경우처럼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고 최고로 시급하다고 전파해야 합니다. 자신부터 그렇게 성령에 의해서 급격히 깨끗게 된 모습으로 증명해야 합니다. 요컨대 이제는 생명과 죽음 둘로만 나누는 십자가 복음을 노이즈 마켓팅해야 합니다.
우리가 십자가 복음만 올바르게 전하면 주님과 초대 교회 신자들처럼 반드시 세상의 오해 질시 박해를 받게 됩니다. 순전한 복음에 따라 오는 필연적 결과로 우리가 열심히 헌신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 죽음은 세상에서 형통 안일하게 해주는, 또 그래서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는 메시지가 전혀 아닙니다. 그런 세상에 대고 그와 정반대로 거룩과 신령으로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라고 강력히 권해야 합니다. 그 전에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죽어 마땅한 천하의 죄인이므로 긴급히 회개하고 십자가 앞에 엎드리라고 그들의 자존심을 심하게 건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성령님이 생명과 죽음으로 나눌 것이며, 그렇게 전하는 신자를 세상 박해로부터 끝까지 보호해 주실 것입니다.
노이즈 마켓팅이라고 해서 무조건 외치라는 것이 아니라, 주님처럼 고차원적으로 외진 곳에서 잃어버린 양 한 마리라도 되찾아 오는 방식이면 됩니다. 복음을 제대로 전하고 주님 사랑으로 섬기면 그 안에 강력한 권세가 드러나기에 그 자체로 이미 노이즈 마켓팅이 됩니다. 특별히 인생은 생각보다 짧고 금방이라서 시간을 최대한 아껴야 합니다. 천국에서 주님을 얼굴로 맞대면할 때 부끄럽지 않아야 할 것 아닙니까?
(8/31/2025) 박진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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