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는 행복.
신용카드가 나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니까 꽤 오래 전이네요.
배낭을 메고 집을 나섰습니다. 일정은 약 20일 정도.
여행 일정이 20일이라고 해서 20일 치 경비를 한꺼번에 넣어 다니지는 않고
지갑을 분실했을 경우를 대비하여 돈은 약 3~4 일 분을 지니고 다니다가
돈이 떨어지면 현지 은행에서 카드로 인출을 해서 보충을 합니다.
그땐 카드체크기가 백화점과 호텔에만 있었고 아직 일반에까지 보급되지는 않아서
현금인출 이외에, 카드로 물건을 사거나 밥을 사 먹을 수는 없던 때였습니다.
멋모르는 젊은 연인이 식당에서 밥 먹고 카드를 내면 주인아주머니가
『밥을 먹었으면 돈을 내야지, 곽떼기를 주면 워떡혀?』이런 시절이었습니다.
그리고 아직 주 5일 근무제 이전이라 관공서와 은행이
토요일 오전 근무를 하고 있을 때였고, 지금처럼 365일 24시 자동화코너가 없어서
은행이 문을 열고 있는 시간에만 카드로 현금을 인출할 수 있던 때였습니다.
그날은 토요일이었고, 다른 데 정신을 팔다가 돈 찾을 시간을 놓쳤습니다.
그러니까 낮 1시가 넘어 은행 문이 닫힌 거죠.
지갑을 열어보니 천 원짜리 두 장이 남아 있었고
그 돈으로는 여인숙에 갈 돈이 안되어 찜질방엘 들어간 걸 보면
당시 찜질방 요금이 2천 원이었던 것 같습니다.
지역은 전라도였다는 것만 기억이 나고, 광주였는지 아니면 목포였는지는
생각이 나질 않네요.
그 찜질방에서 물만 마시며 이틀 밤을 보냈습니다.
돈이 한 푼도 없으니 버스를 탈 수가 있나, 밥을 한 끼 사먹을 수가 있나,
그래서 은행 문이 열리는 월요일까지 찜질방 신세를 지기로 한 것입니다.
찜질방엔 식당이 있었지만 돈이 없으니 다른 사람들이 밥 먹고 술 마시는 모습을
연신 군침을 삼키며 그저 구경만 한 거죠.
일요일이 지나고, 드디어 월요일.
날이 밝기가 무섭게 찜질방을 나와서 국민은행을 찾아가
은행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며 계단에 앉아 있는데
10분이 열 시간 같고, 한 시간이 마치 열흘 같더라구요.
은행 문이 열리고 돈을 찾아서 근처 식당으로 달려가 국밥을 사 먹었는데
그 국밥 맛이 아직도 잊혀지지가 않고
그날 국밥 먹던 생각을 떠올리면 지금도 군침이 넘어갑니다.
그렇게 맛있게 먹어본 기억 때문에
그날 이후 국밥을 유독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입맛이 짧고 까다로운 사람은 독신으로 살기가 어려운데
천만 다행히도 나는 그거 하나는 타고난 것 같습니다.
싫어하는 음식이 없고 뭐든 잘 먹는다는 것이
혼자 사는 사람에겐 보통 유리한 게 아니거든요.
내가 좀 멀리하는 음식은 햄과 소시지인데, 이것도 내 돈 내고 사먹지만 않을 뿐
함바집 점심에 반찬으로 나오면 한두 개 집어 먹기는 합니다.
음식의 맛은 요리사의 손끝에서만 결정되는 게 아니고
먹는 사람의 현재 상황에도 크게 좌우됩니다.
그날 먹은 국밥이 온몸에 전율이 올 정도로 맛있었던 건 내가 2박 3 일을
굶었기 때문이지, 실제로 국밥이 맛있었던 건 아니었고
선조 임금님께서『묵』이라는 생선을 두 번 잡수셨는데
같은 생선 맛이 그렇게 달랐던 것도
한 번은 피란길에서, 또 한 번은 궁궐에서 잡수셨기 때문이고
그래서 묵은『은어』가 되었다가 다시『도로 묵』이 되었던 겁니다.
1kg 에 10 만 원짜리 횡성한우 갈비와
1.2kg 에 1만 원 하는 수입 삼겹살 중 어떤 게 맛있습니까?
물론 횡성한우 갈비가 더 맛있겠죠. 하지만, 상황에 따라 그 맛은
달라질 수가 있는데요, 강남의 부자가 먹느냐, 아니면 충주 노가다
강봄이 먹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돈 많은 강남 부자가 늘상 먹는
횡성한우 갈비보다, 벼르고 벼르다가 오랜만에 강봄이 한 번 먹는 수입 삼겹살이
더 맛있을 수도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것보다도, 정말 음식 맛을 좌우하는 건, 다들 동의 하시겠지만
어금니입니다. 진수성찬이 앞에 있으면 뭘 합니까. 어금니가 흔들려서
씹지를 못하는데!
그런 면에서도 나는 아직『먹는 행복』이 남보다 찐한 편입니다.
그동안 잇실과 양치질을 철저하게 해 온 덕분에
없어서 못 먹지, 딱딱해서 못 먹는 음식이 아직은 없으니까요.
나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이 먹는 행복 때문에
스트레스가 풀리면서 삶의 고단함도 좀 덜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내가 아직 극복하지 못한 것 하나는, 술!
밥 먹을 때마다 생각합니다.
『아, 쐬주 한 잔 쫙했으면!』
2017년. 5월. 8일.
민중혁명이 온다. 강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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