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중간한 믿음
설교일 : 2008년 9월 28일
본 문 : 마가복음8:22-26
설교자 : 조재진목사
믿음의 확신을 갖고 사는 것과 확신 없는 믿음으로 사는 것에는 엄청난 차이가 납니다. 똑같이 예수 믿고 교회에 출석하는 것 같지만 대강 믿는 것과 진짜로 믿는 것은 다릅니다. 진정한 믿음은 흉내 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행전 19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서 놀라운 능력을 나타내자 바울을 흉내 내는 사람들이 나왔습니다. 그 중에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도 바울을 흉내 내어 보았습니다. 귀신들린 사람들 데려다 놓고, 시험적으로 ‘바울이 전파하는 예수이름으로 명하노니 귀신아 떠나가라’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귀신들린 사람이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라고 소리를 지르고는 두 사람에게 뛰어올라 두들겨 팼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벗은 몸으로 도망했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흉내 내는 것 가지고는 마귀를 이길 수 없습니다. 흉내 내는 믿음 가지고는 죄를 이길 수도, 세상을 변화시킬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믿음이 흉내 내는 것 정도가 아니라 산 믿음, 세상을 이기는 능력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이런 부분에 도전을 주는 말씀입니다.
제자들의 믿음 세우기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벳세다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때 사람들이 맹인 한 사람을 데리고 와서 고쳐주기를 요청합니다. 주님은 이 맹인의 손을 붙잡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서는 침을 그 눈에 바르고 안수하셨습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무엇이 보이느냐?” 그러자 이 맹인은 보려고 애를 쓰면서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가는 것을 보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이 맹인의 눈에 다시 안수하십니다. 그때야 비로소 이 사람의 눈이 나아서 만물을 밝히 보게 되었습니다.
사실 오늘 읽은 본문의 내용은 우리에게 조금은 생소합니다. 주님께서 이런 방법으로 병자를 치료하신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두 번씩이나 안수해서 병을 고친 것은 본문이 처음이자 마지막입니다. 언제나 주님은 명령하심으로, 또는 손을 대심으로 모든 질병을 단번에 해결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두 번씩이나 안수하시고 나서야 소경의 눈을 치료하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혹시 주님의 능력이 부족해서 일까요? 그것은 아닐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맹인에게 두 번씩 안수하여 병을 고치는 사건을 통해 주님은 지금 제자들에게 무엇인가 중요한 메시지를 들려주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본문의 말씀을 잘 이해하기 위해 우선 본문의 전후 문맥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마가복음 8장을 전체적으로 본다면 맹인을 고치는 사건 앞에는 두 가지 이야기가 나옵니다. 처음 나오는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이방지역에서 떡 일곱 개로 사천 명을 먹이는 기적을 행한 것입니다. 마치 오병이어의 기적처럼, 굶주린 많은 사람들을 먹이시고 남은 조각 일곱 광주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 달마누다 지방으로 갔는데, 거기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게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구하게 됩니다. 주님이 행하신 기적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바리새인들은 또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구하는 것입니다. 이 때 예수님은 탄식하면서 “이 세대가 어찌하여 표적을 구하느냐?...
내가 이 세대에게 표적을 주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배를 타고 다시 유대지역으로 건너오게 되지요. 주님은 그 배 안에서 표적을 구하는 바리새인들의 악한 의도를 생각하면서 제자들에게 “바리새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누룩과 같은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영향력, 악한 생각, 거짓 교훈을 주의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전혀 엉뚱하게 다른 걱정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16절을 한 번 읽어볼까요? “제자들이 서로 수군거리기를 이는 우리에게 떡이 없음이로다 하거늘” 여기에 보면, 제자들은 '바리새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엉뚱하게도 ‘떡이 없다’는 문제로 걱정하면서 서로 수군거렸습니다. ‘우리가 떡을 안 가져온 것을 어떻게 알았지?’
‘예수님이 배가 고프신 모양이지? 왜 자꾸 누룩이야기를 하냐’ 라고 제자들이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영적인 교훈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고 오히려 육신적인 문제, 떡이 없다는 것을 인해 걱정하는 그들을 향해 ‘너희가 어찌 떡 없는 것을 가지고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어찌 너희 마음이 이렇게 둔하냐’ 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이런 일이 있고 난 다음 벳세다에 도착한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 나오는 맹인의 눈을 치료하는 일을 하셨습니다. 또 우리가 성경을 계속 읽어 보면 맹인의 눈을 치료하고 난 다음 예수님과 제자들은 빌립보 가이사랴로 가시게 되었는데, 거기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아주 중대한 질문을 하시게 됩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제자들이 이런 저런 대답을 하자 주님은 이어서
“그렇다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주님의 이 물음은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습니다. ‘안되겠다. 다시 처음부터 따져 물어보자 도대체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내가 누구인지 알고 나를 따라오느냐?’ 그 때 베드로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자 주님은 이 대답에 만족해하시면서 다시 한번 제자 됨에 대한 교훈을 하셨습니다.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이런 내용으로 볼 때 마가복음 8장에 나타난 예수님의 지대한 관심은 바로 ‘제자들의 믿음’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의 믿음 세우기” 그것이 바로 마가복음 8장의 관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께서 한 맹인의 눈을 두 번씩이나 안수하여 치료하신 본문의 사건은 제자들의 믿음을 바로 세우는 과정 가운데 하나라는 관점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주님은 맹인을 두 번씩이나 안수하여 고치신 사건을 통해 제자들의 ‘어중간한 믿음’을 폭로하신 것입니다. 첫 번째 안수를 받고 눈은 뜨기는 떴지만 분명히 보지 못하는 맹인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제자들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중간한 믿음의 상태
그렇다면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첫 번째 안수하고 난 이후의 맹인의 상태를 잘 보아야 합니다. 24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쳐다보며 이르되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가는 것을 보나이다 하거늘” 여기에 보면 예수님께서 맹인에게 첫 번째 안수를 하고 난 다음 ‘무엇이 보이느냐?’라고 물었을 때 맹인은 무엇인가 보이기는 하지만 사람인지 나무인지 명확하게 구분하지 못한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이 맹인은 눈을 뜬 것일까요? 아니면 아직 눈을 뜨지 못한 것일까요? 어떻게 보면 눈을 뜬 것 같기는 한데, 또 아닌 것 같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인지 나무인지 구분을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의학적으로는 이런 상태를 어떻게 규명할 수 있는지 잘 모르겠지만, 사실 눈을 뜬것도, 안 뜬것도 아닌 어중간한 상태인 것 같습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오늘 본문이 이 맹인의 어중간한 상태가 바로 제자들의 영적인 모습이라고 고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서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놀라운 기적들, 병든 자를 고치고, 귀신을 내어 쫓고, 풍랑이 몰아치는 바다 위를 걷는 것,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들의 믿음이 대단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떡이 없다’는 현실문제에 부딪히게 되자 그만 믿음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마치 예수님이 누구시며, 어떤 분인지를 잊어버린 것처럼 떡이 없다는 사실 앞에 걱정하고 서로 수군거리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제자들이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을 때에는 대단한 믿음의 사람 같아 보였습니다. 그런데 떡이 없다는 작은 문제가 생기니까
그들의 믿음은 온데 간데 없고 마치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처럼 걱정하고 염려하고 수군거리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제자들의 모습은 영락없이 첫 번째 안수하여 눈을 뜬 맹인의 상태와 같습니다. 눈을 뜬 것인지 아닌지 헷갈리는 것처럼 제자들이 도대체 믿음이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 헷갈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 우리들의 모습 역시 제자들과 비슷하지 않을까요? 열심히 교회 나와서 예배드리고, 온 몸으로 찬양하고 기도할 때 보면 모두 대단히 믿음 좋은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막상 현실적인 문제 앞에 서면 마치 예수님이 누구신지 모르는 사람처럼 염려하고 걱정합니다. 어중간한 상태로 눈뜬 이 맹인은 영락없이 우리 자신의 모습입니다. 저는 바로 이런 상태를 가리켜 ‘믿음의 어중간한 상태’, ‘어중간한 믿음’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한번 따라해 볼까요?
“어중간한 믿음” 안 믿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믿는 것도 아니고, 예수님을 믿겠다고 교회는 나오지만 여전히 세상을 버리지 못하고 어중간한 상태에 있는 모습입니다.
보십시오, 무는 어디를 잘라도 무입니다. 윗부분을 잘라도 무고 중간을 자르든지 밑을 잘라도 무입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란 그래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어디를 잘라서 봐도 그 삶의 단면이 그리스도인이어야 합니다. 가정생활을 봐도 그리스도인이고, 직장 생활을 봐도 그리스도인이고... 그런데 만약 저와 여러분들이 교회에서 보는 것과 가정이나 직장에서 보는 것이 서로 다르다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웨슬리 목사님은 이런 상태에 있는 사람들을 가리켜 'almost christian' 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예수 믿는 사람 같은데, 어떻게 보면 아니라는 말입니다. 퍼센트로 환산하면 80-90%는 예수 믿는 사람 같은데, 여전히 100%가 안된다는 말이지요. 뭔가 모자랍니다. 아무리 봐도 ‘real christian’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과거, 6.25사변 직후에 외국에서 많은 원조 물자가 교회를 통해 들어오니까 그것 때문에 교회 나왔던 사람들이 참 많이 있었습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으려고 교회 나오는 것이 아니라 먹을 것을 타먹으려고 교회에 왔습니다. 옛날 선교사님들이 이런 사람들을 보고 ‘rice Christian’ 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쌀 그리스도인?’ 이라는 말입니다. 쌀을 타기위해 교회 나왔지 real christian은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혹시 축복받기 위해? 혹은 병 고치기 위해?, 아니면 가족을 따라 습관처럼, 아니면 멋있는 현대인이 되려면 종교 하나쯤 필요해서.... 그래서 교회에 출석만 하는 사람은 아닙니까?
이런 어중간한 믿음의 상태는, 사도 바울의 표현을 빌자면, 육신에 속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편지하면서 “육에 속한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바울이 이 말을 사용했을 때에는 이런 의미가 있습니다. 분명히 구원은 받은 것 같은데, 삶은 불신자와 똑같다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분명히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임에도 불구하고 불신자들처럼 서로 파벌싸움을 했습니다.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심지어 그리스도파로 나뉘어졌습니다. 또 불신자처럼 못된 습관, 음란한 생각, 타락된 습관을 그대로 가지고 있습니다.
서로 사랑으로 덮어주지 못하고 성도들끼리 고소하고 고발하기도 합니다. 교회가 크고 작은 문제로 인해 날마다 시끄럽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가 받은 은사가 최고라고 뽐냅니다. 다른 사람이 하는 봉사나 받은 은사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식이지요. 바로 이런 모습이 바로 ‘육에 속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임에도 불구하고 불신자와 똑같은 욕구를 가지고 불신자와 똑같은 삶의 문제로 어려움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또 어중간한 믿음의 상태는 헌신없는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에 출석은 하지만 늘 자신의 문제에만 매달려 있습니다. 주님께 제대로 헌신 한번 하지 못하는 믿음입니다. 이런 분들은 언제나 이렇게 말합니다. ‘목사님, 저보고 무슨 제자니 일군이니 이런 말을 하지 마십시오. 부담됩니다.’ 또 이렇게 말합니다. ‘목사님, 저보고 무슨 겟세마네 기도회에 참석하라니 전도대에 들어오라니 그런 것은 강요하지 마십시오. 그냥 주일예배 빠지지 않고 잘 나오고 십일조 잘 할테니 목사님은 그저 제가 복 받고 사업 잘되고 가정이 편안하도록만 기도해 주십시오.
그러다가 천국 가는 것이 제 바램의 전부입니다. 그러니까 저를 좀 피곤하게 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은 지금 반쯤 눈을 뜬 맹인을 통해 제자들의 어중간한 믿음을 폭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너희들의 모습이 아니냐?”라고 도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눈을 뜬 것도 아니고 안뜬 것도 아닌 어중간한 상태로는 세상을 살릴 수 없습니다. 밝히 보아야 합니다. 사람과 나무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무엇이 이 시대의 문제인지, 답이 무엇인지, 하나님이 지금 무엇을 하라고 말씀하시는지... 분명한 주님의 뜻을 구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확신에 찬 믿음의 사람이 되려면
그렇다면 믿음의 어중간한 상태에서 어떻게 변화될 수 있을까요? 어중간한 믿음, 불확실한 믿음에서 확신에 찬 믿음의 삶으로 변하기 위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무엇보다 먼저 우리는 정직한 자기 발견이 필요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이 맹인이 예수님 앞에 나온 것은 자발적인 사건이 아닙니다. 22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벳새다에 이르매 사람들이 맹인 한 사람을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손대시기를 구하거늘” 여기에 보면 이 맹인은 처음부터 예수님께 치료받고 싶다는 자기 의지가 있었던 것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저 사람들에게 끌려서 나왔습니다. 그의 마음속에는 갈급함이나 열망이 없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치료하실 때 반드시 “믿음”을 전제했습니다. 그 사람의 믿음을 근거로 치료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아직 그 믿음이 준비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예수님은 첫 번째 안수하고 난 다음 이 사람 속에 믿음이 생기기를 기다렸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일단 ‘안수하시고’ 그리고 난 다음에 ‘무엇이 보이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아마 이 사람은 예수님께서 안수하게 되자 눈에 뭔가 보이기 시작하자 기대감과 믿음이 생기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아 이 분이 내 눈을 뜨게 하겠구나’ ‘이 분이 바로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구나’ 그렇습니다. 아마 이 사람의 마음속에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생겼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은 바로 이런 기대감, 주님을 향한 갈급함, 주님에 대한 믿음을 갖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 중에 이런 분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주로 모태신앙으로 자란 사람들 중에 보면, 부모님이 교회 다니니까 그냥 교회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내 의지가 아닙니다.
그러다가 학생시절을 지나가면서 뭔가 좀 알 것 같습니다. 뭔가 알 것 같기는 한데 그런데 사람들이 ‘예수님이 누구냐?’ 라고 물으면 별로 대답할 말이 없습니다. 또 어떤 경우에는 한 사람이 처음 믿음의 생활을 시작하면서 교회에 나오고 예배에 참석하는 횟수가 늘어가면서 믿음 생활을 조금씩 알아갑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합니다. ‘조금은 알 것 같은데..., 그런데 아직 잘 모르겠어요’ 우리는 이런 상태를 ‘초보 신앙’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이런 초보 신앙의 자리에 머물러는 안됩니다.
내가 밝히 보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예수님을 더 알고 싶은 열망, 하나님의 체험하고 싶은 갈급함을 가져야 합니다. 교회 생활에 익숙해졌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주일 예배만 잘 참석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수님을 깊이 알고 그 분을 만나고 체험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두 번째 우리의 믿음이 확고해 지려면, 우리는 예수님을 더 깊이 알고 더 깊은 관계 속으로 들어가고 싶어 하는 열망을 가져야 합니다.
그냥 형식적으로 교회에 출석하는 것이 아니고, 예배시간이니까 그냥 앉아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 안에 들어가려는 열망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단지 ‘예수님은 참 놀라운 분이시다.’라고 아는 정도로는 안됩니다. 교회 다니지 않는 사람도 그렇게는 말할 수 있습니다. 또 우리는 ‘교회 나오니까 참 좋다 마음이 편안하네’ 라는 정도로도 안됩니다. 가끔 교회 나오는 사람들도 그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그냥 좋은 분, 놀라운 분 정도가 아니라 정말로 내 인생의 구원자로, 내 삶의 해답으로 만나야 합니다.
주님을 향한 갈급함이 하나님의 기적을 가져오고, 그 열망으로 통해 믿음의 깊은 차원, 두 번째 안수하심으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저는 제가 군목을 제대하고 부목사로 사역했던 원주제일교회에서 일어난 놀라운 기적에 대해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 교회 치과 의사인 한대희 권사라는 분이 계시는데, 심장마비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의학적으로는 거의 심장이 멈추어서 다 끝난 상황이었는데, 사흘 만에 살아난 것입니다. 사람들은 너무 놀라서 그가 다시 살아나는 모습을 영상으로 찍어서 교회에서 보여주었답니다. 교인들이 이 일로 인해 감격해 하고 난리가 났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실 죽었다가 살아난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진짜 중요한 것은, 그리고 제 마음을 감동케 한 것은 한대희 권사가 심장마비로 병원에 중환자실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고 원주 기독병원 중환자실 복도를 점거한 채 100여명의 청년들과 청장년들이 밤새워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함께 기도한 것, 하나님의 역사를 갈망하며 밤새워 기도한 것, 이 갈급함이 너무 중요한 것입니다.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께 매달려 갈급함으로 기도하는 것, 사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께 데모하는 것이지요. ‘하나님 살려주십시오, 한대희 권사를 살려주십시오’ 하나님은 그렇게 간절히 기도하는 그들의 기도에 응답하셨고, 죽었던 그를 다시 살아나게 된 것입니다. 이 때 함께 기도했던 청년들은 마치 자기가 죽었다가 산 것처럼 자기들이 감사 헌금하고, 자기들이 간증하고..,
그런데 더 흥미있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못하고 ‘틀렸다’라고 생각하고 그 밤에 그냥 돌아왔던 교인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제가 믿지 못했다’고 회개하는 일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길을 갈급하게 사모하는 기도, 그런 갈망이 일어나는 것, 지금까지 내가 다른 사람의 손에 끌려 왔지만, 그냥 모태신앙으로 교회 생활을 해왔지만, ‘이제 제가 두 번째 주님의 안수를 기다립니다.’ 라는 갈급함, 바로 이 갈급함을 우리는 회복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과의 개인적인 만남
세 번째 우리가 확고한 믿음의 사람이 되려면 예수님과 인격적으로, 그리고 개인적으로 반드시 만나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과 일대 일로 만나야 구원을 받을 수 있고, 예수님을 더 깊이 알며, 우리의 믿음이 성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 본문 23절의 말씀을 같이 읽어보십시다 “예수께서 맹인의 손을 잡으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 여기에 보면 주님은 막 7장에서 귀먹고 말더듬는 자를 치료하실 때에 개인적인 만남을 시도하셨듯이(그때 주님은 귀먹고 말더듬는 자의 귀에 손을 대고 또 그 혀에 손을 대시며 ‘에바다’라고 말씀하셨지요) 이 맹인을 치료할 때도 동일하게 맹인의 손을 붙잡고, 시끄럽고 복잡한 마을을 떠나 일대일로 이 맹인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의 눈에 침을 뱉으시고 그에게 안수하셨습니다. 주님의 이런 행동들은 주님과 맹인의 일대일의 만남, 친밀한 교제를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단순히 우리의 질병을 고쳐주시는 분만이 아니라 우리와 인격적으로 만나고 교제하기 원하십니다. 그렇게 주님과의 개인적으로 만남을 통해 주님을 더 깊이 알고 더 견고한 믿음의 사람으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믿음이란 ‘예수님과의 관계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한번 따라해 볼까요? ‘예수님과의 관계성’ 그렇습니다. 예수님과의 개인적이고 친밀한 관계가 바로 우리의 믿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과의 개인적인 만남으로부터 시작하여 날마다 주님과 교제하면서 그 분과의 관계가 깊어져야 합니다.
이런 깊은 관계로 나아가는 것이 우리들의 믿음을 견고하게 만들어 줍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1:8-9에서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하시리라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은 예수님과 개인적으로 얼마나 친합니까? 아무도 없을 때 혼자 예수님과 만나고, 그 분을 쳐다보고, 그 분의 호흡을 느끼며 그 분의 옷자락을 붙잡아 보셨습니까? (표현이 너무 낭만적입니다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누가 제자입니까? 누가 진정한 믿음의 사람입니까? 어떤 경우에도 주님을 따르는 확고한 믿음의 사람일 것입니다. 어중간해서는 안됩니다. 반쯤 눈을 떠서도 안됩니다. 사람인지 나무인지 구별이 안되어서는 주님을 따르는 자가 될 수 없습니다. 혹시 여러분들의 믿음은 아직까지 어중간한 상태로 눈뜬 소경과 같지 않습니까? 뭔가 보이기는 보이지만 잘 모르거나 확신이 없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주님의 두 번째 안수를 사모하십시다. 우리는 밝히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분명히 알고, 그 분을 만나고, 그 분과 함께 하는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