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퉁이를 돌자 군데군데 페인트칠이 벗겨진 오층짜리
서민 아파트가 나타났다.
바스라진 낙엽이 뒹구는 먼지 쌓인 현관을 통해 4층
아파트의 녹슨 현관문을 들어서며 M은 어깨를 심하게
떨었다. 머플러, 선글라스, 코트를 차례로 벗어 던진
M은 볼근육 경련이 일자 이빨을 꽉 물었다.
실패라니! 내 경력에 오점을 남겼어...
15평 아파트의 좁은 공간에 억지로 구겨넣은
화장실 욕조에 뜨거운 물을 받고는 무거운 몸을
담그었다. 눈을 감았다.
목표물은 정확히 내 생각대로 움직여 주었어.
그깟 스무 명 남짓한 경호원들은 문제 될것도
없었지. 목표물에 운집한 수백명의 아낙들.. 놀라울
정도로 질서정연하더군. 작업을 하기엔 모든게
아주 완벽했어..
그런데 왜?
"그래! 자칼!
정치인, 기업인, 테러분자 할 것 없이 제거하고 싶은
상대가 있으면 모두들 자칼을 찾지.."
그놈은 돈만 받으면 누구라도 없애.. 아마 교황도,
아니, 갓난 애기까지도 없앨걸.. 피도 눈물도 없는
돈 밖에 모르는 놈.."
"지금까지 한 번도 실패 한적이 없다는 킬러.."
"음.. 그런데 그놈 얼굴은 아무도 본 사람이 없어.
게다가 자칼이라고 알려져 있을 뿐 본명을 몰라"
"그자가 한국엔 왜?"
"불가리 경감도 그게 이상하다는거야. 이번
대상은 누구의 눈에 가시 박혀 제거되어야
할 만큼의 주요 인물은 전혀 아닌데말야"
"누굽니까?"
특급킬러 자칼에게 제거되어야 할 거물이 한국에
있다는 것이 놀랍다는 듯 나이프 반장은
다급하게 물었다."
"배.용.준.."
"네? 그가 누군데요?"
"아니 이 사람이 배용준도 몰라? 탈렌트 배용준!"
"네에? 아니 그럼... 우리 마누라가 엊그제 냉장고 문에
갖다붙힌 살인미소인가 뭔가하는 그 배우? 설마?
자칼이 배용준을 없애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불가리도, 자네도 .. 모르는데 낸들 아나, 이사람아!"
약수국장은 약지에 빨간 루비반지를 낀 손으로 책상을
꽝! 내리쳤다.
-----------------
나이프는 배용준에 대해 샅샅히 조사토록 정보통
요원 작은앙마에게 지시를 내렸다. 출생 및 가족, 교육,
친구, 일, 스케쥴, 팬..그 누구에게도 원망을 사거나
미치광이 스토커가 있다는 정보는 없었다. 그런 자가
자칼의 표적이 되다니... 도무지 이해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어쨌든 인터폴 불가리경감의 정보이니 그의 신변
에 위험이 있긴 있을 것이다.
그는 현재 드라마도 영화도 찍지 않고 있다. 그렇다고
한가한 것은 아니다. cf 와 팬 사인회, 동료배우들의 영화
시사회 참석등 스케쥴이 적지 않다. 특히 팬 사인회
스케쥴이 나반장 마음에 걸렸다. 수많은 팬들이 운집
해있으면 놈이 쉽게 일을 성사시킬 수 있을텐데..
오늘 마산 신세계 백화점내의 올댄뉴협찬 팬사인회가
있었다. 나반장은 최고의 경비요원과 수사요원들을
포진시켰다.
예상대로 많은 팬들이 구름처럼 모였다. 서울에서,
각 지방에서, 심지어 대만, 홍콩, 일본, 인도네시아등의
동남아에서도 팬들이 몰려왔다. 어떤 키작은 여인은
텍사스에서 날아와 오늘 아침 인천공항에 내린 재미교포
라고 우기며 먼저 싸인받게 해달라고 우기는 촌극까지
벌어졌다. 나반장은 혹시 자신의 마누라도 저러고
다니지나 않을까 씁쓸했다. 수많은 요원들이 배치된걸
자칼이 눈치 챘는지 오늘 배용준에겐 아무사고도
생기지 않았다. 헌데 배용준 그자도 참 알 수 없는
사람이다. 자신이 킬러의 표적이 되었다는 말을 듣자
고개만 한 번 갸웃 했을 뿐 전혀 마음의 동요가 없어
보였다.
------------------------
M은 pc방 구석진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있다.
야후에서 <겨울연가사람들>을 검색했다. 새벽 시간
인데에도 몇몇 회원들이 입장해있다. 이번일을 의뢰
받은 후 이 게시판에서 눈팅를 통해 목표물을 잘
파악하고 있다. 별로 힘들지 않은 작업이라 여겼다.
의뢰인은 큰 액수를 제시했다. 지금까지의 일감중에서
가장 큰 보수다. 이번 작업을 마지막으로
M은 은퇴를 고려하고 있다. 이제 더 이상 킬러자칼로
살고 싶지 않다. 하루라도 빨리 이번 작업을 마무리
짓고 싶다. 목표물은 오늘은 대전 충무체육관에서
팬사인회를 갖는다. 어제와 같은 실수는 없으리라..
어제 일은 M으로서는 이해하지 못할 조그마한 충격이
있었다. 백화점 건물 45도 각도의 300m 떨어진 건물
옥상이었다. 물탱크에 몸을 숨기고 목표물에
조준했을 때까지.. 그리고 레이다에 정확히 잡혔을
때까지도..아무 문제가 없었다. 목표물의 옆 모습이
잡혔을 때 바로 방아쇠를 당겼어야했다. 주춤하는
사이 목표물이 고개를 돌려 정면으로 M을 향했다.
최상의 작업환경이었다. 그런데... 목표물이 마치 자신이
겨냥되고 있다는 것을 알고있는 듯이 M을 정면으로
쏘아보며 미소를 날리는 것이 아닌가..
순간 M은 어깨에 힘이 쑥 빠졌다. 정신을 차리고 다시
조준했을 때 목표물은 이미 자리를 뜨고 없었다. 두 번의
실수는 없다고 M은 주먹을 불끈 쥐어본다.
목표물은 팬 사인회를 시작하기 전에 꼭 화장실을 간다.
겨울연가게시판에서 얻은 정보이다. 오늘 충무체육관
에서는 그 시간을 이용하기로 했다. M의 완숙한 기술로
손쉽게 살인 무기가 되는 가느다란 철사줄을 지저분한
코트안주머니에서 만지작거려본다. 목표물의 목에 감기만
하면 일 분 동안의 작업에 불과하다. 아냐, 무소음 38구경
리벌버가 나을까...이번 작업은 M을 불쾌하게 만든다. 도무지
망설임이라곤 모르던 M이 아니었던가. 주춤거리는 자신에게
짜증이 난다.
-----------
"오늘도 팬 사인회라구? 어디야 이번엔?" 나이프는 배용준
경호건으로 오늘도 새벽부터 수사요원들과 회의를 하고 있다.
"오후 2시부터 대전 충무체육관입니다" 배용준에게 정보를
알려주며 그의 팬사인회를 당분간 중지할 것을 요구했다가
일언지하에 거절당한 나이프는 그가 제거 되어야 할 이유도,
킬러자칼에 대해서도 전혀 정보가 없다는것에 화가 치밀었다.
나이프를 더욱 열받게 하는 것은 스케쥴을 바꾸거나 연기
하라는 나이프의 제안을 정중히 거절하며 전혀 동요없이
짜여진 현재 스케쥴대로 움직이는 배용준이었다.
도무지 남의 일 보듯이 하는 그의 처연함이 얄미울
정도였다 매니저 배차장도, 양과장도 어깨만 한 번 으쓱할 뿐
도리 없다는 표정이었다.
어쨌든 정오부터 체육관 주변을 샅샅이 경계하기로 했다.
수상한 인물들에 대한 검문검색은 물론 자신의 지휘하에
있는 전 수사요원들을 적재적소에 배치 시켰다.
약수국장의 불호령으로 봐서는 무슨일이 있어도 그를
보호해야했다. 국장이 그토록 악을 쓰는 모습은 처음이
었다. 언제나 침착한 그녀였다. 처음 그녀 아래로 발령을
받았을 때 감개무량했었다. 냉철한 판단력, 우수한 지모,
수많은 남자요원들을 부끄럽게하며 당당히 국장자리에
오른 그녀를 그는 존경하고 있었다. 대통령 암살정보를
듣는다해도 아마 얼굴만 한번 찌푸릴 약수국장이다.
국장도 여자일 뿐인가? 혹시 그녀도 수많은 배용준 팬중의
한 명일까? 에이 말도 안되는... 나반장은 고개를 흔들었다.
수수께끼 투성이야.. 이번 일은..
-------------------------------
나이프 반장과 요원들은 발에 땀이 나도록 뛰었다. 오늘도
역시 많은 팬들이 모였고 1시 30분인 이 시각 이미
번호표를 받은 팬들은 체육관에 입장하여 대부분 자리잡고
앉아있다. 주부팬들이 반수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잘 차려
입은 주부들은 물론 시장에서 야채를 팔다 뛰어온 듯한 차림
새의 아낙도 있었다. 배용준은 대기실에 있다. 복도 곳곳에
아직 자리잡지 못한 여인네들이 분주하게 움직인다.
나이프는 대기실로 가보기 위해 몸을 돌리다가 누군가와 부딪
혔다. 상대는 가방을 떨어뜨렸다.
"앗, 죄송합니다" 하고 상대를 바라보니 묘하게 생긴 나이든
여인이었다. 고생을 무척 많이 한 듯한 주름투성이의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잘 펴지 못하는 허리를 겨우 가누면서 바닥에
떨어트렸던 검은색 싸구려 비닐가방을 줏어들고는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복도 한 쪽 끝으로 사라졌다. 가방은 매우 독특했다.
타원형도 아니고 사각형도 아닌 검은색 가방이었다. 거기에는
어울리지 않게 붉은 자주색의 큰 알파벳 M이 박혀있었다.
배차장으로부터 20분 남짓 밖에 남지 않았다는 말을 들은
용준은 화장실을 다녀오기위해 일어섰다. 화장실은
대기실에서 십여미터 떨어져 있었다. 체육관 화장실은
언제나 지저분하다. 냄새도 심하다. 그는 악취를 피하기
위해 호흡을 하지않고 일을 보았다. 여자 화장실은 무척
붐비는 것 같았은데 남자화장실은 배용준뿐이었다.
일을 마치고 바지의 지퍼를 올렸을 때 인기척이 났다.
입구쪽을 바라보니 여자화장실로 잘못 찾아들어온 늙으수레한
아주머니였다.
-----------------
M은 남자 화장실입구가 잘 보이는 가까운 계단아래쪽에서
서성였다. 마침내 목표물이 화장실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목표물외에는 아무도 화장실에 들어가지 않았다. 정확히
일 분후 M도 화장실로 들어섰다. 목표물이 M을 홀깃 본
다고 느낀 순간 호주머니 속의 손은 방아쇠를 당기고 있었다.
무소음 38구경 리벌브는 성능이 물론 우수했다. 바로 옆
여자 화장실 아낙네들의 시끌벅적한 수다도 M의 작업이
완벽하게 끝나는데에 한 몫을 하였다. 목표물은 싱겁게
쓰러졌다. 그것을 간단히 끌어당겨 청소 도구함에 쑤셔
넣었다. 아마 사람들에게 발견되기까지는 20분 정도 소요
되리라. M은 유유히 사라졌다.
---------
아파트로 돌아온 자칼 M은 TV를 켰다. 이제 곧 브레이크 뉴스
로 자신의 작업이 세상에 알려질 것이다. 콘스프를 따뜻하게
데워 단숨에 마셨다. TV를 켜놓은 채 떠날 채비를 했다.
내일이면 이 나라를 뜬다. 목욕을 해야지... 좁은 욕조에
뜨거운 물을 받아 몸을 담그었다. TV가 보이도록 욕실
문을 열어두었다. 늘상 느끼지만 따뜻한 물은 M을 행복
하게 했다.
이번 일을 의뢰받고 목표물의 팬 게시판에 장난삼아 인사
글을 올렸다. 그리곤 이별의 글도 연이어.. 후후 꽤나
흥미로운 여인들이 많았어. 어쩌면 진짜 친구가 될 수도
있었을텐데. "미소님! 깜짝 놀랐잖아요. 정말 작별인사
하시는줄 알았잖아요. 사람 간 떨어지게 하시네요" 라며
귀엽게 항의하던 향기! 양산돌리는 그녀의 캐릭터는 아마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이다. 그나저나 그녀들의 왕자가
사라져버려 안됐군...
전화기를 가져왔다. 몸은 욕조물에 담근채 팔만 밖으로
내어 다이얼을 돌렸다. 의뢰인에게 입금을 청해야한다.
"청소를 끝냈습니다. 내일 아침 입금을..."
"무슨소리! 목표물이 오후 5시 싸인회를 예정대로 마치고
체육관을 떠났다는데!" 의뢰인은 짧게 그러나 쌀쌀맞게
대꾸하곤 수화기를 꽝 놓아버렸다.
M의 짙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어찌된 노릇인가..." 분명
작업은 깔끔하게 처리 되었었다. TV에선 연예가 중계라는
프로그램이 진행중이었다. 배용준의 팬 싸인회가 성황리에
끝나고 승용차 검은 에쿠우스를 타고 떠나는 모습이 비쳤다.
"이럴수가?" 벌떡 일어서려던 M은 갑자기 비틀거리며
물 속에 주저앉았다. 다시 일어서려 했지만 보이지 않는
어떤 힘이 M을 누르고 있었다. 일어서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양 어깨를 누르는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M은
얼굴까지 물속에 잠기게 되었다. 코와 입으로 물이 들어가며
이게 끝이로구나 하고 느낀 순간 배용준의 형상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안타깝지만 어쩔수 없다는 착찹한 표정으로
M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M은 마지막 순간에 보았다.
지상에서는 보지 못할 빛나는 하얀 의상속의 배용준을...
그의 등뒤에 달려있는 우아한 날개를... 그리고 눈부신
후광을... 아아 그는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천사였다.
그랬구나. 나는 어리석게도 천사를 목표물로 했었어.
M은 모든걸 포기하였다.
-----------------
자정이 가까운 시간 나이프는 작은앙마부터 전화를
받았다. 수유리의 한 서민아파트가 수상하다는
보고였다. 누군지 몰라도 물가에 어두운지 지저분한
그 아파트를 아주 큰 돈을 지불하고 열흘간 세을 내었
다는데... 이웃들은 입주자를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는 것이다. 나이프는 오랜 경험에서 나온 영감에 전
율하며 차를 몰아 아파트로 향했다. 작은앙마가 그를
맞았다.
"4층 404호입니다. 불은 아직 켜져 있습니다"
권총을 단단히 손에 쥐고 현관 벨을 눌렀다. 반응이
없었다. "내가 문을 따고 들어갈테니 엄호하게" 문은
간단하게 따졌다. 몸을 안으로 날렸으나 허망하게도
아무도 없었다. "이상한데요.. 형광등도 TV도 켜 놓은
채... .아니! 저길보세요!" 차마 보기도 흉한 나이든 여인
의 나신이 물에 잠겨 있었다. 쭈글쭈글했음이 분명한
피부가 물 속에 잠겨 부풀어 있었다. 얼굴은 고통에
일그러져 있었다. 이미 사망한 육신이었다.
집안을 조사했다. 작은앙마가 방안에서 가방 한 개를
가지고 나왔다. 나이프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낮에
체육관 복도에서 보았던 그 가방이었다. 자주색의 M자
가 박힌 검은 가방!
---------------------
약수는 초조함을 감추지 못하였다. 자칼이 실패했다!
어찌된 영문인가. 착수금으로 입금시킨 돈을 회수해야
하는데.. M과는 연락이 두절되었다. "나쁜 놈..
난 이제 파산이야!"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안은 약수는
소리나지 않게 울부짖고 있었다..
끝...
* 깜짝 퀴즈 있습니다. 약수가 배용준을 없애려 했던 동기는?
그러면서도 한편 살인을 막으려는 이유는?
첫댓글 아이구 재미나라.그 키 작은여인 나 아는 그여인이지? ㅎㅎ
세영아!! 퀴즈를 내면 답도 줘야지 뭔데 궁금타.....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 아줌마 등단 했냐?? 다큐보다 픽션이 훨 안쓰질텐데... 대단함다.. 우리 쥔장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