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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회 한국산서회와 함께 하는 인문산행
이 바위산 아래에 새 왕조를 펼치다
백악과 삼청동의 바위글씨를 찾아서
글/심산(한국산서회)
사진/류백현(한국산서회)
소개가 많이 늦었다. 어쩌면 제일 먼저 등장했어야 하는 산이다. 서울지역을 중심으로 인문산행을 진행한다고 할 때, 백악(白岳, 342m)은 그 필두에 나서야 할 산임이 자명하다. 다름 아닌 서울의 주산(主山)인 것이다. 우리의 선조들이 집을 짓거나, 마을을 형성하거나, 심지어 나라를 세울 때조차 제일 먼저 했던 일은 주산을 정하는 것이었다. 일단 주산이 결정되고 난 연후에야 그 앞자락에 나라가 들어서고, 마을이 형성되고, 집이 세워지는 것이다.
오늘 우리는 “서울을 서울로 만든” 백악에 오르고, 그 산자락의 명승지에 남겨진 바위글씨들을 짚어보고자 한다. 우리가 선택한 출발지는 백악 자락에서도 그 빼어난 풍광과 그윽한 정취로 이름을 떨쳤던 유란동(幽蘭洞)이다. 한때는 복사꽃이 흐드러져 도화동(桃花洞)이라 불리기도 했던 이곳이 현재의 청운동(淸雲洞)이다. 2019년 4월 6일(토) 아침, 경복고등학교 교정 내 야외 임간교실로 속속 집결한 인문산행 참가자들은 얼추 잡아 열 댓 명 정도 되었다.
경복궁과 청와대를 품고 있는 산
이 자그마하되 옹골찬 산이 역사의 무대에 떠오른 것은 고려 숙종 때의 일이다. 고려가 현재의 서울에 남경(南京)을 설치하고자 그 궁궐터를 모색하던 시절의 기록이 남아있다. 1101년(고려 숙종 6년) 왕명을 받들어 현지답사를 다녀온 최사추와 윤간은 이렇게 보고했다. “삼각산의 면악(面岳) 남쪽 땅이 그 산세와 수세(水勢)로 보아 옛 문헌에 들어맞으니, 면악의 주간(主幹)을 중심으로 남향하여 도읍으로 삼음이 마땅합니다.”
여기서 이 산의 옛 이름이 면악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산의 형세를 ‘얼굴’처럼 인식한 것이다. 더불어 “옛 문헌에 들어맞으니”라는 표현을 보면 당시에 유행하였던 풍수지리설을 적극 받아들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한참 뒤의 기록인 ⟪문헌비고⟫ 산천조를 보면 “백악을 일명 면악이라 한다”고 쓰여 있어 ‘백악=면악’임을 확인할 수 있다. 백악이란 물론 이 산에 ‘잘 생긴 흰 바위들’이 많아 붙여진 이름일 것이다.
조선 중종 때(1537년)에는 명나라 사신 공용경을 맞아 경회루에서 연회를 베풀 때 그에게 이 산의 이름을 지어달라고 조른다. 공용경은 이 산을 ‘(왕궁의) 북쪽 끝에 있다’는 의미로 공극산(拱極山)이라 명명하였다. 아무리 조선이 섬기던 나라의 사신에 대한 예우라지만 불쾌하기 이를 데 없다. 한 나라 도성의 주산 이름을 한낱 외국 사신의 섣부른 취흥(醉興)에 맡기다니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이야기다.
우리에게 보다 익숙하지만 적절하지 않은 다른 이름은 북악산이다. 이 이름은 이른바 ‘북악로’ 혹은 ‘북악스카이웨이’라는 것이 생겨나면서 일반화된 것인데, 본래 작명의 세계에서는 북(北)을 상서롭지 못한 것으로 여긴다. 동대문·서대문·남대문은 있어도 북대문은 없는 것도 그러한 이치다. 서울시에서는 얼마 전 이 산의 공식명칭을 백악으로 정했다. 덕분에 대부분의 서울시 제작 지도와 이정표에서도 백악으로 표기된다. 앞으로 우리도 이 산을 백악이라 부르는 것이 좋겠다.
백악이 특별한 것은 새 왕조 조선의 정궁인 경복궁을 그 안에 품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의 청와대 역시 백악의 품 안에 싸여있기는 매한가지다. 이곳이 천하의 명당이라는 주장도 있다. 현재 청와대 경내에 남아있는 ‘천하제일복지(天下第一福地)’라는 바위글씨가 그것을 웅변한다. 하지만 나의 생각은 다르다. 과연 대한민국 대통령의 공식관저(청와대)가 그곳에 위치해 있어야만 하는가?
경복궁은 명당이다. 서울의 진산은 북한산이다. 북한산 보현봉에서 흘러내린 용맥(龍脈)이 형제봉을 거쳤다가 보토현을 지나 구준봉에서 다시 솟아 서울의 주산인 백악을 이룬다. 그리고 백악에서 점점 고도를 낮추며 한껏 순해진 좋은 기(氣)가 맺히는 혈(穴)이 바로 경복궁이다. 조선의 풍수(風水)에 대하여 우리보다도 더 많이 알고 있었던 일제(日帝)는 바로 이 용맥을 끊어버리기 위하여 백악과 경복궁 사이에 조선총독부 관사를 짓는다.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의 관사는 미군정기에 미군사령관의 관사로 바뀌었고, 똑같은 건물을 이승만 시대에는 경무대라 개칭하였으며, 4.19혁명 이후 다시 이름을 바꾼 것이 바로 오늘날의 청와대인 것이다.
진국백을 모셨던 백악신사가 있던 정상
경복고등학교 교정을 빠져나온 일행은 창의문(자하문)을 향하여 훠이훠이 올라간다. 오늘의 강사인 조장빈 이사가 백악의 상징과도 같은 부아암(負兒岩)을 가리키며 노상강의를 펼친다. 누가 봐도 남근석처럼 보이는 저 바위는 백악을 그린 숱한 진경산수화의 단골소재이기도 하다. 대은암(大隱巖)과 그 주변의 바위글씨 도화동천(桃花洞天)·무릉폭(武陵瀑)·성암(醒巖) 등은 모두 철조망에 가로막혀 그림의 떡이다.
한양도성 백악구간의 출입문인 ‘창의문 안내소’에 이르니 뜻밖의 상황이 펼쳐진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신분증을 제시하고 문건을 작성하여야 겨우 입장이 가능했는데 이제는 그냥 프리패스다. 이렇게 입장 절차가 간소화된 것이 불과 하루 이틀 전이라고 한다. 이 구간에서는 신원확인 절차가 있으니 반드시 신분증을 지참하고 오라고 신신당부했던 주최 측이 머쓱해지는 순간이다. 어찌되었건 기분 좋은 출발이다.
창의문에서 백악의 정상인 백악마루까지는 1Km가 조금 안된다(950m). 거리는 짧지만 고도 올리기는 만만치 않다. 하지만 턱에 까지 차오른 숨을 고르기 위하여 발길을 멈출 때마다 눈 앞에 펼쳐지는 풍광들은 그야말로 ‘서울의 베스트’다. 이 산이 서울의 핵심이자 중심임을 어찌 알고 왔는지 외국인 관광객들의 모습도 심심치 않게 눈에 띈다. 돌고래쉼터와 백악쉼터에서 차(茶)와 과일 등으로 원기를 보충한 일행들은 이내 백악마루를 향하여 힘차게 발걸음을 떼어놓는다.
1395년 12월, 조선의 태조는 이 산 아래에 새 왕조를 연 다음 조정을 수호할 두 명의 산신에게 벼슬을 내리고 사당을 짓는다. 즉 남산의 산신을 목멱대왕이라 봉하며 목멱신사(木覓神祠)를 짓고, 백악의 산신을 진국백(鎭國伯)이라 봉하며 백악신사(白岳神祠)를 지은 것이다. 진국백이란 곧 ‘나라를 편안하게 해줄 벼슬아치’라는 뜻이겠다. 백악과 남산에 백악신사와 목멱신사가 들어섬으로써 이 두 산에서의 민간신앙 및 무속행위는 철저히 금지되었다. 이 두 산에서 제사를 지낼 수 있는 자격을 오직 조정에만 국한시켰던 것이다.
그 백악신사가 바로 백악의 정상, 곧 이 백악마루에 들어서 있었다. 백악마루에는 백악의 정상석(頂上石)이 서 있다. 비록 해발고도 342미터에 불과한 정상이지만 이 산이 갖는 그 엄청난 의미를 아는 것일까 이 작은 표지석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으려는 등산객들의 행렬이 끝없이 이어진다. 정상석과 바투 붙어있는 실제의 정상 바위 밑둥에는 옅게 파여진 성혈(性穴) 세 개가 보인다. 청와대 경호실에서 발행한 책자에는 이것이 ‘삼성혈’이라고 명시되어 있고, 백악신사가 들어서기 전 민간신앙의 흔적이라 소개하고 있는데, 그 흔적이 매우 희미할뿐더러 흔히 볼 수 있는 형상이어서 선뜻 동의하기가 어렵다.
“도성 안에서 가장 아름답고 놀기 좋은 곳”
정상석이 서 있는 백악마루가 오늘의 최고 해발고도 지점이다. 뭔 놈의 인문산행이 이렇게 빡세냐고 항변(?)하는 참가자들에게 당당하게 말씀드릴 수 있다. “이제부터 하산길입니다.” 하산길에도 볼 것이 많다. 백악마루에서 조금만 내려가면 ‘1.21사태 소나무’가 있다. 1968년의 1.21사태 당시 남파특공대 김신조 일당과 교전한 흔적이다. 전망이 좋은 청운대(靑雲臺, 293m)에 대한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아마도 최근에 만든 신조어인 듯하다.
백악 최고의 경관을 보여주는 구간은 아마도 ‘연결통로-백악 곡성-백악 촛대바위’가 아닐까 싶다. 멋들어지게 휘어진 옛 성곽의 자태가 자못 황홀하다. 한양도성의 북문에 해당하는 숙정문을 지나 ‘말바위 안내소’에서 표찰을 반환한다. 너무 시시콜콜 강의를 계속하느라 시간이 많이 흐르는 바람에 참가자들 모두 뱃속에서 꼬르륵 대는 아우성을 더 이상은 참지 못하게 된 시각이다. 일행들은 말바위 근처에 산재한 너럭바위들 위에 앉아 때늦은 점심식사를 한다.
말바위 인근에서 길은 둘로 갈라진다. 계속 한양도성을 따라 혜화동까지 이어지는 와룡공원길과 북촌을 향하여 툭 떨어지는 삼청공원길이다. 백악 자락의 바위글씨들을 살펴보려 하는 우리들은 당연히 후자의 길을 택한다. 옛 문헌에 ‘삼청동천’이라 명기된 이 일대는 오늘날 ‘삼청공원’이라 통칭된다. 서울 토박이인 사람들이라면 잊지 못할 추억 하나 둘쯤은 간직하고 있을 과거의 ‘데이트 명소’이기도 하다.
삼청공원은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만든 도시계획공원의 제1호였다. 그들은 일제 말기인 1940년 3월 12일, 도시계획공원을 140개 조성할 계획을 공표하는데, 조선의 핵심인 경성, 그 중에서도 조선총독부(경복궁의 광화문 뒤에 있었는데 김영삼 대통령이 1995년에 철거하였다)에 가장 가까운 이곳을 첫손가락에 꼽았다. 그만큼 권력의 핵심에 가까웠고 아름다웠던 곳이다. 하지만 설마 백악과 그 주변 계곡이 아름답다는 것을 일본인들이 처음 알아차렸을 리가 있겠는가?
백악은 한 나라를 탄생시킨 주산이다. 당연히 능선과 정상이 늠름하고 그 주변 계곡이 아름답다. 백악의 서쪽 계곡을 대표하는 것이 백운동천이요, 북쪽 계곡을 대표하는 것이 백석동천이며, 동쪽 계곡을 대표하는 것이 삼청동천이다. 일찍이 조선 초중기의 문신인 성현(成俔, 1439-1504)은 자신의 문집 ⟪용재총화⟫에서 이렇게 말했다. “도성 안에 경치 좋은 곳이 비록 적으나 그 중 노닐만한 곳은 삼청동이 가장 좋고, 인왕동이 그 다음이며, 쌍계동·백운동·청학동이 그 다음이라.”
성현이 자의적으로 랭킹을 부여한 리스트를 자세히 들여다보자. 백악 자락이 압도적 1위고, 인왕산 자락이 그 뒤를 잇는다. 낙산과 남산은 명함도 못 내민다. 그것은 실제의 산세가 수려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권력의 햇살이 어디까지 미치느냐의 문제일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백악의 동쪽 자락 ‘삼청동’이 조선시대 도성 내의 ‘핫 플레이스’였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조선시대는 물론이거니와 20세기 초엽까지도 삼청동의 유명세는 상상을 초월한다. 위암 장지연(1864-1921)의 <유삼청동기>를 읽어보자. “해마다 한여름이면 서울 장안의 놀이꾼·글 선비는 말할 것도 없고, 아낙네들까지 꾸역꾸역 모여들어서 서로 어깨를 비빌 만큼 발자국 소리도 요란하였다.”
삼청동천에 남아있는 바위글씨들
그토록 아름다웠던 삼청동이니 어찌 문화유산들이 즐비하지 않으랴. 그토록 기세등등했던 삼청동이니 어찌 권력의 흔적들이 산재해 있지 않으랴. 하지만 세월은 가고 권력은 기운다. 특히나 조선왕조의 봉건적 권력들이 남긴 유물들은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 등을 통과하며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오직 남아있는 것은 천년의 세월과 당당히 맞서고 있는 바위들뿐이다. 하여 오늘 우리는 삼청동천에 남아있는 바위글씨들을 찾아 나선 것이다.
이해를 돕기 위하여 그냥 ‘삼청동천’이라 뭉뚱그려 말했을 뿐, 실제로 백악의 동쪽에는 크게 5개의 동천들이 있었다. 삼청동천·옥호동천·운룡동천·월암동천·청린동천 등이 그것이다(이상희, <북촌지역 바위글씨에 나타난 생태문화적 의미 연구> 참조). 이들 중 상당 부분은 국가기관의 공유지 혹은 개인의 사유지에 포함되어 공식적인 답사가 불가능하다. 따라서 오늘 우리는, 자연스러운 동선을 따라가면서, 그리고 불법적인 동선(?)을 최대한 피하는 범위 안에서, 삼청동의 알려지지 않은 능선과 숨겨진 골짜기로 참가자들을 조심스럽게 안내할 생각이다.
제일 먼저 찾은 곳은 영월암(影月巖)이다. 현재는 테니스장 밖에 거의 방치된 채로 남아있는 바위인데, 다소 조악한 필치의 월암동(月岩洞)이라는 바위글씨 역시 일종의 표지석처럼 그 아래에 새겨져 있다. 이 바위가 들어서 있는 자그마한 언덕이 백련봉(白蓮峰)이다. 조선 말기 세도정치의 끝판왕이었던 김조순(1765-1831)이 이 언덕에 옥호정(玉壺亭)을 짓고 살았다. 현재 전해지고 있는 필자미상의 <옥호정도>를 보면 그의 별서가 얼마나 크고 호화스러웠는지를 알 수 있다. 그림 속에 보이는 일관석(日觀石)·옥호동천(玉壺洞天)·혜생천(惠生泉) 등의 바위글씨는 현재 그 존재여부를 확인할 수 없다. 그 자리에 개인주택들이 들어서 있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운룡동천(雲龍洞天)이다. 전서체로 쓰여진 운룡천(雲龍泉)은 어느 음식점의 지하 하수구 옆에 있다. 흡사 복개 이전의 청계천처럼 악취가 진동한다. 그러나 저 바위글씨나마 시멘트로 발라버리지 않은 것만 해도 감사하게 여길 따름이다. 두 그루의 커다란 삼청동 동제목(洞祭木)을 지나 좁은 골목길을 휘감고 올라가니 정조의 수라상에 진상되곤 했다는 마을우물이 나온다. 기천석(祈天石) 바위글씨군(群)은 이 막다른 골목의 끝에 있다.
기천석이란 글자 그대로 ‘하늘에 빌던 바위’다. 이 가파르고 비좁은 바위계곡에는 기천석 이외에도 기천석 강일암 서월당(康日菴 徐月堂)과 고암회(高巖回) 등 바위글씨들이 즐비하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현재의 삼청파출소 자리)에 저 유명한 소격서(昭格署)가 있었다. 조선 초기 조정의 공식관청이었던 소격서는 도교를 받아들여 하늘에 제사를 올리던 곳이다. 기천석 바위군이 이 일대에 포진해 있는 것은 아마도 소격서와 무관하지 않을 듯싶다. 기천석 바위군을 마치 담장처럼 두르고 있는 개성 만점의 개인주택이 눈에 띈다. 바로 <들국화>의 리드싱어였던 록 보컬리스트 전인권의 집이다.
운룡동천에서 가장 빼어난 풍광을 갖췄다는 운룡대(雲龍臺) 역시 어느 개인주택의 담장 안에 숨어 있다. 다행히 담장 아래까지 바위가 이어져 있어 까치발을 하고서나마 바위글씨 전체를 감상할 수 있다. 예전에는 이 운룡대에 올라서면 저 아래의 운룡정(雲龍亭, 활을 쏘던 사정)이 훤히 내려다 보였다 한다. 운룡정 역시 소격서와 마찬가지로 현재에는 푯돌로만 남아있을 뿐이다. 장안 제일이었다던 삼청동의 정취는 이제 찾아보기 어려워진 것이다.
권력은 백악의 동쪽 계곡을 휘감아 돌고
일반인들이 별도의 절차 없이 찾아볼 수 있는 바위글씨들은 대략 여기까지다. 나머지는 누군가의 허가를 얻어야만 친견할 수 있다. 훗날을 도모하기 위하여 나머지 바위글씨들도 여기에 부기(附記)해둔다. 청린동천(靑麟洞天)은 가회동 일대를 말한다. 청린동천 옆에는 동벽산정고 천청석기신(洞僻山情古 泉淸石氣新)이라고 새겨져 있다. 골이 깊으니 산의 정취가 예스럽고, 샘이 맑으니 돌의 기운이 새롭다는 뜻이다. 고급주택지인 경남빌라의 정원 안에 있다.
옥호동천이 장동김씨의 사유지였다면, 청린동천은 여흥민씨의 사유지였다. 청린동천 바위글씨는 민영익이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세기의 조선 자체가 이 두 가문의 소유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경복궁 안에 웅크리고 앉아있는 왕 따위야 눈 아래로 보였을 것이다. 중인들은 백악의 서쪽에 살았다. 그것이 서촌이다. 권력을 움켜쥐고 조정을 좌지우지했던 고관대작들은 백악의 동쪽에 살았다. 그것이 북촌이다. 삼청동과 가회동이야말로 북촌의 핵심이다. 권력은 백악의 동쪽 계곡을 휘감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삼청동문(三淸洞門)을 빠져나가려 한다. 이 일대에도 바위글씨들이 많다. 강청대(康淸臺)·안득불애(安得不愛)·사병(似屛) 등인데, 모두 국무총리 공관 경내에 있다. 오늘의 마지막 바위글씨를 감상하기 위하여 총리공관 정문 쪽으로 우루루 몰려가니 경비를 서고 있던 앳된 의경이 순간 당황한다. “걱정하지 마세요. 잠깐 여기 화단 위에 올라서서 저 맞은편의 바위글씨만 보고 금방 내려갈게요.” 삼청동문 바위글씨는 최근 바로 그 턱 밑까지 치고 올라온 크고 작은 건물들 때문에 한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이윽고 일행 중의 한명이 기쁨의 탄성을 내지른다. “아, 보여요, 저기 삼청동문! 글씨가 엄청 크네요!”
월간 [사람과 산] 2019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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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인문산행 예고
인왕산의 자연과 인문환경
-식물과 지질을 중심으로
모임일시: 5월 4일(토) 아침 10시
모임장소: 독립문역 1번출구 세란병원 앞
참가신청: 한국산서회 다음카페(cafe.daum.net/peakbook)
회비: 2만원(연회비 납부 정회원은 1만원)
첫댓글 최근 백악 자락 성북동의 성락원이 임시개방을 했습니다
다들 알고 계시죠?
그런데...벌써...한국가구박물관의 전화와 홈페이지가 불통상태가 된지 오래입니다 ㅎㅎㅎ
성락원의 바위글씨들에는 추사의 '장빙가'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백악의 바위글씨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명품이지요
언젠가 사단법인 한국산서회 명의로 특별탐방할 날이 오기를 기대합니다
글 감사드립니다.
한두시간에 오르내리면 끝이라고 생각하는 산... 이런 글들이 둔중한 울림이 되면 좋겠습니다.
덕분에 즐감 배독합니다. 오월 산행이 기다려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