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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 전남남원 사전답사 자료(원안)
* * * * 전남 남원
= 인구 및 면적
남원시 인구는 2018. 12. 31 기준 82,554명(남자 40,508 여자 42,046)로 전라북도 인구의 4.50%를 차지하고 있으며, 23개 읍면동 가운데 도통동이 18,201명으로 가장 많고, 덕과면이 1,010명으로 가장 적다.남원시 면적은 752.23㎢로 전라북도(8,062.98㎢)의 9.4%를 차지하고 있으며, 국립공원으로 인하여 지리산을 많이 끼고 있는 산내면의 면적이 가장 넓다.총 면적중 경지가 171.50㎢(전 40.20㎢, 답 131.30㎢), 임야 483.90㎢, 대지 11.30㎢, 공장용지 0.99㎢, 기타 85.09㎢이다.
= 행정구역
- 남원시의 행정구역은 1읍 15면 7동이며, 하부조직으로 180 법정리·동, 481 행정리·통, 1,379반이 있다.- 1995년 1월 1일 남원시와 남원군이 남원시로 통합되었습니다.
= 지역특성
- 위치 ; 남원시는 한반도의 서남부 내륙, 전라북도의 동남부 소백산맥 서사면의 넓은 분지에 위치하며, 시의 동남쪽은 지리산의 주 능선을 경계로 경남 하동군 및 전남 구례군과 북동부는 경남 함양군과 접하고, 서쪽은 임실군·순창군, 그리고 북쪽은 장수군과 인접하고 남쪽의 일부는 섬진강을 경계로 전남곡성과 접하고 있다.- 지리적으로 전라남도·경상남도와 접하는 특징을 지니고 있는 남원시는 88고속도로, 순천-완주 고속도로 와 전라선 철도, 그리고 3개 국도노선(17, 19, 24호)이 통과하며 호남과 영남을 연결하는 내륙의 관문이자 문화적·경제적 접촉지대이다.
* * * 남원 만인의총(南原 萬人義塚)
사적 제272호(1981.04.01.)
면적 : 89,168㎡
소 재 지 : 전북 남원시 향교동 628번지
시대 : 조선시대
조선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때 남원성을 지키기 위하여 왜적과 싸우다가 전사한 사람들을 함께 묻은 무덤이다.= 왜군은 임진왜란때 전라도지방을 차지하지 못해서 결국 패했다고 생각하여, 정유재란 때는 전라도 지역을 점령한 뒤 북상할 계획을 세웠다. 선조 30년(1597) 7월말 왜군 11만명이 황석산성과 남원을 공격하였다. 남원은 지역적으로 전라도와 충청도를 연결하는 요충지로 국가에서도 이곳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방비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왜군의 침입에 대항하여 군·관·민이 합심하여 싸웠으나 남원성은 마침내 함락되고 말았다. 이 싸움에서 만 여명의 관리와 군사, 백성이 사망하였는데, 임진왜란이후 전사한 사람들의 시신을 한곳에 합장하였고 광해군 4년(1612) 충렬사를 세워 8충신을 제향 하였다. 처음 이 무덤은 남원역 부근에 있었으나 민가에 둘러싸이게 되어 1964년 현재 자리로 이전하였다.
* * * 남원성(南原城)
사적 제298호 (1982년 11월 03일 지정)
소재지 ; 전라북도 남원시 동충동 364-1 (동충동)
조선시대 왜군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은 읍성이다. 남원시 동충동에 있다. 본래 남원성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691년(신문왕 11) 쌓은 성이다. 현재의 것은 1597년 선조가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수리하여 크게 쌓은 것이다. 군사뿐만 아니라 행정 기능도 담당하는 성으로 일반적인 성의 양식과 달리 성곽이 장방형을 띠고 있다. 성곽의 둘레는 2.4km에 달하고, 성벽의 평균 높이가 4m이다. 사방에 성문이 있었고 그 중 남문이 가장 컸다. 성내에는 70여 개의 우물이 있었다. 남원시 향교동에 만인의총이 있는데, 정유재란 당시 왜군에 의해 전사한 군인과 민간인의 무덤이다. 남원성은 사적 제298호로 지정되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남원성 (대한민국 구석구석, 한국관광공사)
== 남원성 전투[ 南原城戰鬪 ]
1597년 정유재란 중에 남원성에서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이 왜군과 싸운 전투.
- 임진왜란에 이어 왜군이 재차 침략한 정유재란으로 인해 조선은 다시 한번 위기 상황에 직면했다. 조선에서는 정유재란에서 일본의 침략 목표 지역을 전라도와 충청도라고 여겨, 왜군의 공격을 저지하는 최전방의 보루로서 남원성을 지목하였다.- 남원성은 조선의 조정에서는 물론 명나라에서까지 중요성을 강조할 정도였다. 남원은 지리적으로 경상도에서 소백산맥을 넘어 전라도로 들어오는 관문이자, 충청도와 경기도의 외번(外藩)이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략적 요충지로서의 중요성 때문에 조선에서는 정유재란시 가장 먼저 조선에 왔던 명군을 남원에 배치할 정도였다.
- 왜군이 전라도 구례를 점령하고 남원으로 북상하고 있을 때, 남원에는 명(明)의 부총병 양원(楊元)이 3,000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남원성을 지키고 있었다. 양원은 왜군이 북상한다는 소식을 듣고 전라병사 이복남(李福男)에게 조선군의 증원을 요청하여 관군 1,000명을 받아 4,000여 명의 병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반면에 일본군은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가 거느린 5만 6,000여 명의 대병력이었다. 이들은 8월 13일 남원 교외에 진영을 설치하고, 성 외곽을 포위한 후 조총사격을 가해왔다.이에 조·명 연합군은 승자총통과 비격진천뢰 등을 발사하여 이들을 격퇴시켰다. 그러자 왜군은 14일부터 공성 기구를 새로 제작하고, 참호를 메꾸는 등 본격적인 공격 준비를 갖추기 시작하였다.이때 양원은 전주에 주둔하고 있던 유격장 진우충에게 두 차례나 구원을 요청하였으나, 진우충은 전주성을 비울 수 없다는 핑계로 증원을 거부하였다. 그리하여 양원은 외부로부터의 지원을 받지 못한 채 왜군의 대대적인 공격을 받게 되었다.16일 왜군은 본격적으로 총공격을 퍼부었다. 높은 누각을 만들어 그 위에서 내려다보면서 조총 사격을 가하는 한편, 사다리를 타고 성벽을 기어 올라왔다. 연합군은 이에 필사적으로 저항하였으나, 이 날 밤 왜군은 서문과 남문을 돌파하여 성 안으로 들어왔다.북문을 지키고 있던 조선군이 효과적으로 방어하고 있었으나, 이들도 배후 공격을 받아 더 이상 저항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자 병사 이복남 이하 3,000여 명의 장병들은 화약고에 불을 질러 장렬히 전사하였다.명의 장수 양원은 50여 기를 이끌고 탈출하였다. 한편 전주성의 진우충은 남원에 구원병을 보내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남원성의 함락 소식을 듣자 성을 버리고 달아나 일본군은 남원을 거쳐 전주를 무혈로 점령하였다.
- 결과 남원성 전투는 외부의 지원을 받지 못한 채 성을 지키다가 실패한 대표적 전투이- 정유재란 중에 가장 컸다. 남원성 전투의 패배로 인해 호남과 충청 지방의 일부는 왜군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었고, 서울까지 민심이 동요하기에 이르렀다.
- 의의와 평가 정유재란 중의 남원성 패배를 계기로 문란했던 조선 사회는 완전히 붕괴되어 경제적 파탄과 관료기구의 부패를 낳게 되었다. 결국 남원성 전투의 패배는 남원 지역만의 문제가 아니라, 조선 사회 전체가 왜군에 의해 퇴락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南原城戰鬪]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 * * 남원 만복사지 (南原 萬福寺址)
수량/면적 : 39,269㎡
소 재 지 : 전북 남원시 왕정동 489번지
사적 제349호(1991.03.30.)
시대 : 고려시대
기린산을 북쪽에 두고 남쪽으로 넓은 평야를 둔 야산에 위치한 만복사터는 고려 문종(재위 1046∼1083) 때 지어진 것으로 전한다.5층과 2층으로 된 불상을 모시는 법당이 있었고, 그 안에는 높이 35척(약 10m)의 불상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에는 대웅전을 비롯한 많은 건물들과 수백 명의 승려들이 머무는 큰 절이었으나 정유재란(1597)때 남원성이 함락되면서 불타 버렸다고 한다.발굴조사시 많은 건물의 흔적을 찾았으며 청자와 백자, 많은 기와가 출토되어 고려시대 미술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한다.
- 5층석탑(보물 제30호)·불상좌대(보물 제31호)·당간지주(보물 제32호)·석불입상(보물 제43호)등이 현재 절터 내에 남아있다.고구려식의 절 배치를 따르고 있으며,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절중에 하나로 의의가 크다.
* * 남원 만복사지 오층석탑 (南原 萬福寺址 五層石塔)
보물 제30호(1963.01.21.)
시대 고려시대
고려시대에 승려 도선이 창건하였다고 전하는 만복사의 옛터에 서 있는 탑이다. 원래 이곳에는 절터 중앙에 목탑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1979년부터 1985년까지 7차에 걸친 발굴조사로 많은 건물지와 다수의 유물이 발견되었다. 현재 탑은 4층까지만 남아있고, 5층 이상은 모두 없어졌다.- 탑의 받침대 역할을 하고 있는 기단부(基壇部)는 땅에 파묻혀 있는데, 이는 훗날 이 지역의 땅바닥이 높아졌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 탑신부의 1층 몸돌은 대단히 높고 2층 이상은 약 3분의 1로 크기가 줄어 들었다.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조각하였고, 지붕돌은 밑면 전체가 위로 들려 있어, 마치 목조건축의 지붕을 보고 있는 듯하다. 특이한 점은 각 지붕돌 위에 몸돌을 괴기 위한 별도의 네모난 돌이 끼워져 있는 것으로, 당대 석탑의 특징을 보여주는 한 예이다.- 이 탑은 고려 문종 때인 11세기에 세워진 것으로, 1968년 이 탑을 보수하다가 탑신의 1층 몸돌에서 사리장치가 발견되기도 하였다.
* * 남원 만복사지 석조대좌 (南原 萬福寺址 石造臺座)
보물 제31호(1963.01.21.
시대 고려시대
만복사는 고려시대의 승려 도선이 창건하였다고 전하며, 불상을 올려놓는 받침인 석좌는 절 안에 위치하고 있다. 이 석좌는 거대한 하나의 돌로 상·중·하대를 조각하였는데 육각형으로 조각한 것이 특이하다.- 하대는 각 측면에 안상(眼象)을 새기고, 그 안에 꽃을 장식했으며, 윗면에는 연꽃모양을 조각하였다. 중대는 낮으며, 짧은 기둥을 본떠 새겼다. 상대는 중대보다 넓어지고, 평평한 윗면 중앙에 불상을 끼웠던 것으로 보이는 네모진 구멍이 뚫려 있다. 옆면에 연꽃이 새겨졌던 부분은 주변 전체가 파손되었다.- 이 작품은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8각형에서 벗어난 6각형이며, 안상 안에 꽃을 장식한 것은 고려시대에 유행한 양식으로, 11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
* * 남원 만복사지 당간지주 (南原 萬福寺址 幢竿支柱)
보물 제32호(1963.01.21.)
시대 고려시대
절에 행사가 있을때 절 입구에 당(幢)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이 깃발을 달아두는 장대를 당간(幢竿)이라고 하며, 장대를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이 당간지주는 만복사터에 동·서로 마주보고 서 있으며, 지주사이에 세웠던 깃대는 남아있지 않고 이를 고정시켰던 구멍이 세 군데에 뚫려 있다. 현재 아래부분과 기단이 땅속에 파묻혀 있어 그 이하의 구조는 알 수 없다.- 두 지주 각 면이 고르지 못하여 전체적으로 투박하고 별다른 장식이 없으며, 전체적으로 생략화·단순화된 것으로 보아 고려 전기의 작품으로 여겨진다.
* * 남원 만복사지 석조여래입상 (南原 萬福寺址 石造如來立像)
보물 제43호(1963.01.21.)
시대 고려시대
전라북도 남원시 만복사 절터에 서 있는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높이 2m의 불상이다. 만복사는 고려 문종(재위 1046∼1083) 때 창건된 사찰이고, 이 석조여래입상도 창건 때 같이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동국여지승람』 에 의하면 만복사에는 동쪽에 5층의 전각, 서쪽에 2층의 전각이 있고 그 안에 35척(尺)의 금동불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런 기록으로 보아 만복사가 매우 큰 절이었음을 알 수 있다. - 민머리의 정수리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둥글게 솟아 있다. 살이 오른 타원형의 얼굴은 눈·코·입의 자연스러운 표현과 함께 원만한 인상을 보여준다. 어깨에서 팔로 내려오는 곡선, 몸의 굴곡 등도 아주 원만하고 부드럽게 표현되어 있다. 양 어깨에 걸쳐 입은 옷에는 둥근 칼라와 같은 독특한 옷깃의 접힘이 있으며, 그 아래에는 둥근 옷주름이 표현되어 있다. 오른팔은 들어 손바닥을 보이고 왼팔은 아래로 내려서 역시 손바닥을 보이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 손은 따로 끼울 수 있도록 만들어 놓았는데 지금은 모두 없어진 상태이다. - 광배(光背)는 머리광배와 몸광배로 이루어져 있으며 굵은 선으로 구분되고 있다. 윗부분이 없어진 머리광배에는 활짝 핀 연꽃잎과 연꽃줄기가 새겨져 있고, 몸광배에는 연꽃줄기만이 새겨져 있다. 이들의 바깥에는 불꽃무늬가 조각되어 있고, 좌우에는 각각 2구씩의 작은 부처가 들어 있다. - 남원 만복사지 석조여래입상은 얼굴이나 몸 등에서 매우 원만하고 부드러운 성격이 드러나 있지만 옷주름이나 몸의 자세는 다소 부자연스러운 면이 보인다. 통일신라시대를 거쳐 고려시대로 접어들면서 쇠퇴해가는 불상 양식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 * * 광한루원
광한루원은 우리나라 4대 누각의 하나인 광한루와 더불어 하늘의 옥황상제가 살던 궁전 「광한청허부」를 지상에 건설한 인간이 신선이 되고픈 이상향으로 월궁의 광한청허부와 같다하여 얻어진 이름이다.
- 시인묵객들은 궁궐에는 경회루가 있고, 지방에는 광한루와 더불어 평양의 부벽루, 진주 촉석루, 밀양 영남루와 더불어 우리나라 4대 누각이라 불려지는데 그 중 으뜸은 광한루라 했다.
경회루는 궁궐의 건물로 황실에서 지은 곳이며 지방의 누각 중 평양의 부벽루는 애석하게도 아직은 가볼 수 없는 곳이고, 진주 촉석루는 안타깝게도 6ㆍ25 때 불에 타 지금의 건물은 1960년 5월경 복원한 것으로 복원 역사가 짧으며, 밀양의 영남루 역시 1844년에 지어 복원 역사가 길지 않다.
그러나 광한루는 1419년에 지어 1597년 정유재란 때 불탔으나 1626년에 복원한 건물로 복원 역사 면에서도 단연 으뜸이다.
- 광한루원은 경복궁 경회루의 지원과 전남 담양군에 있는 양산보가 조성한 소쇄원과 함께 한국의 경원을 대표할 만큼 우수하며 독특한 조경양식이 탄생하는 모체가 되고 있다.
정원의 사상적, 역사적 배경은 자연적 사고방식 즉, 신선사상과 음양오행사상, 풍수지리사상 또는 수심양성의 도로 표현되는 송, 죽, 국, 매의 사절과 유교의 선비사상이다. 그중에서도 신선사상이 가장 크다고 불 수 있으며 이러한 신선정원의 양식은 생성시기인 조선시대의 제도적인 원인에 기인하여 유교문화가 지방으로 분산되면서 형성되었다.
옛적 우리 조상들은 자연에 순응하고, 자연을 거슬러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조성에 세심한 배려를 하여 신선이 사는 이상향을 이 땅에 건립하고자 하였으며, 이러한 생각은 분합문을 달아 열어놓고 지내어 건물이 탁 트이게 처리하였다. 또한 누원 앞에 호수는 은하를 상징하도록 하여 하늘의 옥황상제가 사는 곳처럼 꾸며서 월궁의 광한청허부와 같다고 한 광한루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정원은 인공적인 멋을 가리지 않고 토양 구릉을 자연 그대로 살렸으며, 드문드문 자연석 고인돌을 구릉에 그대로 놓아 작은 언덕 공간처럼 하고, 정원수도 전지를 하지 않고 자연 그대로 자라도록 하여 흡사 숲속에 있는 착각이 들게 한다. 이러한 연유로 건축기술과 사회상, 생활, 이상향 등 당시의 문화를 이해하는 중요한 명승지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현재의 누원 모습은 누원 근처 시장이 불타고 옮긴 것을 비롯하여 수차례 확장 사업을 하면서 차례로 근처의 부지를 매입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 광한루원은 근세 전기에 조영된 대표적인 정원으로 꼽히고 있는데 한국의 독특한 조경양식이 탄생하는데 모체가 되고 있으며 정원을 대표할 수 있을 만큼 질적으로 우수하고 통시대적 문학사에 나타난 정원양식을 표현하고 있어 전통예술을 계승 발전시키는데 중요한 몫을 차지하고 있을 뿐 아니라 문화재적 가치가 있다.
광한루원 앞에는 동서 100m, 남북 59m에 이르는 정방형의 호수와 호수 속의 3개의 섬(삼신산), 그리고 서편에 4개의 홍예로 구성된 오작교로 구성되어 있다. 오작교는 평교지만 교각의 형태가 원형으로 된 홍예교로 누정원을 구성하는 구성물의 일부로 처리되어 있는데 직선적이고 평탄한 노면에 율동감을 주어 경관의 아름다움을 더해주는 요소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호수에 직녀가 베를 짤 때 베틀을 고이는 돌인 지기석을 넣고 견우가 은하수를 건널 때 쓰는 배인 상한사를 띄워 칠월 칠석의 전설의 은하수와 오작교를 상징한다.
호수는 현재 상태에서 1:2의 비를 갖는 장방형으로 축조되어 있으며 그 안에 3개의 섬이 동서방향으로 거의 같은 간격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호수 북쪽 광한루 앞에는 돌 자라가 동남방향으로 향해 놓여 있어 신선사상에 입각한 지킴이의 기능을 갖고 있어 전체적으로 광한루원의 구성은 넓은 은하세계, 즉 천체우주를 상징하고 있다.
* * 01.광한루
보물 제 281호
광한루원은 천체 우주를 상징하여 조성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전통누원이다.
광한루는 원래 1419년 황희 정승이 남원으로 유배되어 왔을 때 "광통루"란 작은 누각을 지어 산수를 즐기던 곳이다.이후 세종 26년(1444)에 하동 부원군 정인지가 이곳의 아름다운 경치에 반해 달나라 미인 항아가 사는 월궁속의 '광한청허부'를 본따 '광한루'라 바꿔 부르게 되었다.광한은 달나라 궁전을 뜻한다. 춘향과 이몽룡도 바로 이곳에서 처음 만나 사랑을 맺게 되었다.
- 위치 : 전라북도 남원시 요천로 1447번지(천거동)
- 규모 : 241.81㎡
- 본루 : 정면5칸, 측면4칸 팔작지붕 루 마루집
- 익루 : 정면3칸, 측면3칸
- 월랑 : 정면1칸, 측면3칸
- 조성년대 : 1419년 황희 광통루 축조
1597년(선조 30년) 정유재란 때 불탐
1599년(선조 32년) 부사 원신 재건
1931년 군수 백정기, 남원면장 양재영 및 진사 이수봉 등이 보수 완료
이 건물은 조선조 초기의 재상이었던 1419년 황희(黃喜)가 남원에 유배되었을 때 누각을 짓고 광통루(廣通樓)라 하였다. 그 후 1434년 세종 16년에 남원부사 민공이 중수하고 당시 충청 전라 경상 삼도 순찰사였던 하동부원군 정인지가 이 누에 올라 경관을 감상하다가 “오호라 호남에서 가장 뛰어난 경관은, 나의 고향의 경승을 감상하게 되면 나의 고향보다 나은 곳이 없고, 더욱이 이곳 광한루보다 나은 곳이 없더라'용성지(龍城誌)'고 했다. 또 일설에는 ”호남의 승경으로 달나라에 있는 궁전 광한청허지부가 바로 이곳이 아니던가“하고 감탄하여 그 후 광한루로 개칭되었다. 그러나 이때의 건물은 1597년 정유재란으로 인해 불타고 현재의 건물은 1626년 당시 남원부사인 신감(申鑑)이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광한루의 앞뒤에는 ‘호남제일루(湖南第一樓), 계관(桂觀), ’광한루(廣寒樓)란 편액이 걸려있다. 호남제일루라는 말 그대로 호남에서 제일가는 누각이라는 뜻이며, 광한과 청허부는 하늘나라 월궁의 옥경에 들어서면 ‘광한 청허지부’가 있다는 신화적 전설을 상징하고, 계관은 달나라의 계수나무 신궁을 상징한다. 광한루 누각에 걸린 여러 편액중 광한루란 편액은 신익성이 호남제일루와 계관의 편액은 1855년 남원부사 이상억이 누각을 중수하면서 손수 써 걸었다. 이 중 계관의 편액은 동학란 때 없어진 것을 1930년대 광한루를 대대적으로 보수할 때 남원유지 강대형이 다시 써 건 것이다. 또한 현재 광한루에 걸린 광한루란 편액은 전민의원 조정훈이 쓴 글씨라고 하는데 금암봉의 금수정과 용성관의 편액 글씨도 썼다고 전해온다.
1879년 광한루가 차츰 북쪽으로 기울어져 이를 방지하기 위해 루의 북쪽에 다락(월랑)을 세워 층층대를 만들어 놓았다. 북쪽의 층층대는 1877년(고종14년)에 부임한 남원부사 이용준이 광한루가 퇴락하여 본관 전체가 북쪽으로 기울어져 무너질 우려가 있어 수지면 고평리에 사는 추(秋) 대목의 묘안을 받아들여 북쪽에 누를 오르내리는 계단을 만들되 본관과 같이 아름드리 기둥을 세워 튼튼하게 고정시켜 본관의 기울음을 바로 잡고 외관으로도 더 화려하게 하였다. 이는 우연하게도 누각 건축사상 큰 의의를 가지게 되는데 그것은 우리나라 누각에 월랑을 가설하게 된 시초이며 이전까지는 누상을 오르내리는 사다리만 설치하였다.
월랑은 상하 2층으로 되어 있는데 하층은 5단, 상층 5단의 층층계단이 있고 양측 난간에는 칸살을 설치하였으며 현관 옥상의 자그마한 지붕은 본관의 높고 큰 지붕과 조화를 이루어 누각의 아름다움을 한층 더해준다.
기단은 막돌바른층 쌓기의 낮은 기단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그 위에 원형의 돌 기둥을 세우고 2층 나루부분에는 나무기둥을 세웠으며 2층 누마루 주위에는 계자 난간을 둘렀고 기둥 사이에는 모두 분합문의 들창을 달아 사방이 모두 개방되게 하여 북쪽으로 교룡산, 남쪽으로 금암봉이 멀리는 지리산 노고단과 반야봉이 보인다.
기둥 위에는 주두를 얹고 기둥머리부터 소 혓바닥 모양을 하나 내고 위에 행공첨차를 놓아 외출목을 구성하고 다시 위에 우설을 내어 이익공과 비슷한 주심포건물을 만들었으며 창방과 주심도리 사이에는 화반을 끼웠다.
가구는 칠량으로 대들보를 전면의 평주와 내진의 평주위에 걸고 보위에 동자주를 세워 종량을 받치며 종량위에 조각된 일공을 세워 종도리를 받치고 있다. 천장은 연등천장으로 연목 및 부연이 있는 겹처마이고 건물 네귀의 춘설에는 활주를 받쳤다.
누의 뒤쪽에는 익랑식(翼廊式)으로 월랑(月廊)이라는 누에 오르는 층계를 만들었고 그 구조의 익공식으로 창방위에 코끼리, 자라와 토끼 등 동물모양의 화반을 놓았다. 누의 뒤쪽으로 연달아 낸 익루는 정면 3칸, 측면2칸의 익루(翼樓)로 1795년(정조19, 부사 이만길 중수시)에 마련되었다고 하는데 3면에는 퇴로를 둘러 개방하였고 그 안쪽으로 정면 2칸, 측면 1칸의 온돌방용 아궁이와 굴뚝이 사방을 쌓은 고막이 벽체에 나있다. 남원지(1960년) 및 증보 남원지(1972년, 조성교)등에는 1925년 보수공사 때 만들어진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어 판단하기 어렵다.
광한루가 다른 누각과 비교할 수 없는 점은 조선후기 문예부흥기라 불리 우는 영정조시대에 창작활동이 활발하여 판소리계 소설 <춘향전>의 무대이며 국악의 성지로 자리매김하고 있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주지의 사실이다.
* * 02.영주각
광한루와 더불어 누원내 신성사상 배경의 정원으로 가꾸기 위해 축조된 상징적 누각으로서
용성지 의 누정편에 보면, '전라관찰사 정철이 요천에서 끌어온 물이 누앞을 좁다랗게 흐르고 있던 개울을 넓혀서 평호로 하고 은하수를 상징케 했으며 주위를 석축으로 하고 호중에 세 개의 섬을 만들어 하나에는 녹죽을 심고, 하나에는 백일홍을 심었으며, 다른 하나에는 연정을 세우고 호중에 여러 종류의 꽃을 가득 심었다'고 되어있다" .이 문헌에 따르면 영주각은 관찰사 정철이 주도한 광한루 확장 공사시 건립된 것으로 보이며 이때는 한주섬(漢州)이라고 불렀던 것 같다. 현재의 영주각은 정조 19년(1795)에 부사 이만길이 재건하고 영주각이란 편액을 손수 써서 걸었다고<증보 남원지>에 기록되어 있다. 그 후 1963년부터 경내가 확장, 정화되면서 1965년에 36회 춘향제를 준비하면서 지금과 같은 단청이 되었다.
영주각은 단층 누각 형태로 기단부는 화강석 장대석을 정밀 가공하지 않고 설치했으나 부분적으로 자연미도 보인다. 1층 하부의 석주는 화강석으로 일정하지 않은 방형으로 가공해서 초석받침위에 세웠고 초석위로 장귀틀과 동귀틀을 끼워 우물마루를 설치하였고 초석 위에 흠을 파서 귀틀장선을 끼웠다.
상층 우물마루에는 누간을 두지 않고 기둥에 흠을 파서 여모중방을 끼우고 머름을 낮게 설치하였으며 후면에 목조계단 5단을 설치하였다. 기둥 위에는 주두를 얹고 기둥머리부터 양서를 하나 내고 위에 쇠서를 구성하여 이익공의 형태를 만들었으며 창방과 주심도리 사이에는 화반을 끼웠고 주심도리와 주두에는 첨자를 끼웠다. 가구는 5량으로 대들보를 외진 기둥 주두위에 얹고 보위에 동자주를 세워 종량을 받치며 종량위에는 판대공을 세워 종도리를 받치고 있다. 천정은 연등천정으로 연목과 부연이 있는 겹처마이고 건물 네 귀의 추녀에는 활주를 받쳤고 기둥머리 이하에는 석간주 가칠하였고 상부는 모로 단청으로 마감되었다.
- 영주각에는 「영주각(瀛洲閣)이란 편액과 영주각에서 바라본 광한루의 풍경을 노래한 4개의 편액이 걸려있다.
- 규모 : 36.02㎡ (정면3칸, 측면2칸 겹처마 팔작지붕)
- 조성연대 :용성지 누정조에는 1582년(선조15년) 전라감사 정철이 삼신산을 만들때 한주섬에 연정을 세웠다고 했으나, 증보 남원지(1972년) 누정조에는 1795년(정조 19년) 남원부사 이만길 중수하고, 영주각 편액을 손수 써서 걸었다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영주각은 1582년 이후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 * 03.방장정
삼신산의 영주(한라산), 봉래(금강산), 방장(지리산) 중방장에 위치하고 있는
방장정은 건축양식보다는 소박한 멋을 살린 아담한 모습을 하고 있다. 방장은 전라감사 송강 정철이 삼신도를 조성함에 그 근원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의 방장정이 세워진 시기는 1963년부터 시작된 광한루원 확장 정화계획에 따라 당시 남원군수 이화익의 창안으로 도편수 이한봉이 건축하였다. 그 모습을 보면 기단부는 형성되어 있지 않고 원형의 가공초석위에 복석형태의 화강석을 얹고 위에 기둥과 귀틀을 세워 장마루를 깔았다. 또한 누 난간은 설치되지 않고 다소 높은 듯한 기둥위에 계두, 양서, 수서 등을 걸치고 주심도리를 높게 설치하였으나 칸사이가 좁은 관계로 화반은 설치 하지 않은 듯하다. 천장은 육각형의 소란대를 걸쳐 우물반자를 설치하였고 연목과 부연을 둔 겹처마를 형성하고 있으며 단청은 기둥머리부터 금모로 단청을 하였다.
- 규모 : 8.37㎡ (1칸 6자 6각 모정)
- 조성년대 : 1964년 12월 31일 준공
* * 04.완월정
완월정 지상의 사람들이 천상의 세계를 꿈꾸며 달나라를 즐기기 위해 지은 것으로 달이 뜨는 방향을 향해있는 수중누각이다. 춘향제 행사의 주요 무대로 사용되고 있다.옛날 옥황상제가 계식 옥경에는 광한전이 있으며, 그 아래 오작교와 은하수가 굽이치고 아름다운 선녀들이 계관의 절경 속에서 즐겼다는 전설이 있다.이 전설에 따라 광한루는 천상의 광한전을 재현한 것이며, 이 완월정은 지상인이 달나라를 즐기기 위하여 전통 조선식 누각을 세워 광한루원의 절경을 한층 돋보이게 하고 있으며, 해마다 이 누각 수중무대에서 우리나라 대표적인 민속 축제인 춘향제가 열리고 있다.
- 규모 : 88.45㎡ (정면 6칸, 측면2칸 겹처마 팔각지붕 5량 굴도리 집)
- 조성연대 : 1971년 5월 21일
완월정은 1971년에 신축된 수중누각으로 1963년 채기묵 남원군수의 재임(1962년 4월 5일~1963년 5월 31일) 당시부터 연차계획을 세워 경내를 확장하고 주변을 정화하는 과정에서 증설된 건물이다. 1969년 기존 호수를 확장하여 인공 방장형 호수를 축조한 후 수중누각으로 신축한 것인데 2층 누각이다. 누각의 이름은 옛날 남원성 남문의 문루(門樓)인 완월루(翫月樓)에서 따온 것이다. 동학농민동기(1894년)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남원성의 남문인 완월루가 지금의 스탠다드차터드은행 네거리에 있었다.
* * 05.춘향관
1992년 완성되었으며, 박남재 화백이 그린 유화9폭의 춘향 일대기와 당시 생활상을 보여주는 서화류, 장신구, 서책 등이 전시되어 있다.고전 소설 속 춘향을 병풍 속 이미지를 통해 만날 수 있는 곳으로 춘향제 역사를 담은 포스터와 사진, 춘향전을 기반으로 제작된 영화, 뮤지컬, 오페라, 창극 등, 춘향 관련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 전시관 : 495 평방미터
- 영상관 : 123.12 평방미터
- 회 랑 : 72.5 평방미터
- 조성시기 : 2016년 4월
* * 06.춘향사당
열녀춘향의 굳은 절개를 영원히 흠모하기 위해서 건립된(1931) 사당이며, 입구대문은 임 향한 일편단심을 줄여 단심문이라 칭한다. 사당의 중앙에는 열녀춘향사라는 현판이 있고 안에는 춘향의 영정이 안치되어 있으며, 이 사당에서 축원을 빌면 백년가약이 이루어진다고 하여 참배객이 늘고 있다.
최초 영정은 진주사람 강주수가 그려 기증하고 1939년 가을, 이당 김은호가 그린 영정을 나란히 봉안하였으나 6.25중에 훼손되어 1961년 기증받은 이당 김은호 화백이 그린 춘향의 영정이 현재까지 봉안되고 있다.
이러한 춘향사당은 1931년 일제강점기에 남원의 유지들이 주축이 되어 권번의 기생들과 힘을 합하여 민족의식 고취와 춘향의 절개를 이어받고자 설립하고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 * 07.청허부
광한루원의 정문으로 월궁의 출입문을 상징한다.이문을 들어서면서부터 지상의 인간이 천상의세계로 발을 딛게 된다는 상징적인 문이다.
- 규모 : 39.06㎡ (정면 3칸, 측면2칸 맞배지붕)
- 조성년대 : 1971년
청허부는 광한루원의 정문이다. 이 건물은 1971년 최봉채 남원군수가 경역을 확장하면서 신축한 건물로 건평 약 11.83평에 맞배지붕 솟을 삼문형식으로 지어졌는데 광한루원이 천체우주를 지상에 건설한 작은 우주로서 하늘의 옥황상제가 사는 달나라 옥경인 광한 청허부를 상징하므로 옥경을 들어가는 문이라는 의미로 청허부라 했다.
현 정문은 1970년도 당시에는 남원시장(해방 전까지는 전북에서 제일 규모가 큰 시장이었다)과 전국적으로 규모가 큰 우시장이 있었고 주변에 민가가 들어 차 역사적 가치와 춘향이의 얼이 깃든 광한루원 주변을 정화하고자 민가와 시장을 철거하고(당시 시장에 큰 화재가 일어나 폐허가 됨) 그 자리에 청허부를 세우고 정문으로 사용하던 현재의 북문대신 이 문을 정문으로 대체하였다.
우아한 곡선과 자연스런 풍우판 등을 가진 청허부는 들어오면서부터 우리나라 전통 건축문화와 자연스럽게 접하게 해주는 곳이다. 정면의 중앙에는 일중(一中) 김충현이 쓴 청허부란 현액이 걸려 있는데 「청허부」는 하늘나라 옥경의 「광한 청허지부」에서 따온 것으로 이 문이 월궁의 출입문임을 상징하고 있다.
* * 08.오작교
하늘에 사는 옥황상제의 딸 베짜는 직녀와 미천한 소몰이 견우가 신분을 초월한 사랑을 하여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이들의 게이름으로 옥황상제의 노여움을 사 견우와 직녀는 은하수 동쪽과 서쪽으로 격리되어 1년에 한번 칠월칠석날 다리도 없는 은하수에서 만나도록 하였다.
둘의 만남이 너무 애닳아 이날에는 지상의 까치와 까마귀가 모두 은하수로 올라가 다리를 만들어 둘을 만나게 했는데 까마귀와 까치가 만든 다리를 밟고 만나는 견우와 직녀의 눈물이 비를 만들었다. 칠월칠석날이 되면 비가 오고 까마귀와 까치를 볼 수 없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며 까치의 머리가 흰 것은 오작교가 된 까치의 머리를 견우와 직녀가 밟아 벗겨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같은 하늘나라 견우과 직녀의 사랑은 신분의 벽을 뛰어 넘은 이도령, 성춘향의 사랑과 흡사하다. 이러한 전설을 지상에 펼쳐놓은 것이 광한루원의 호수와 오작교다. 그래서 오작교는 까마귀 오(烏), 까치(鵲), 다리(橋)자를 쓴다.
선조15년(1582)에 남원부사 장의국은 광한루를 수리하면서 다리를 새로놓고 오작교라 부르게 됐다. 그 이후 광한루는 정유재란때 불타 1626년 복원됐지만 오작교는 처음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오작교는 길이 57m, 폭 2.4m, 4개의 홍예경간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현존하는 연지교중 국내에서는 규모가 가장 크다.
또한, 오작교를 밟으면 부부 금실이 좋아진다는 전설이 있고 춘향과 이도령의 사랑이 어린곳이기에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다. 처녀가아닌 사람이 다리를 건너면 다리가 무너진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이처럼 광한루와 오작교는 전설과 사랑이 어우러져 있어, 춘향이가 단오날 그네를 뛰는 것을 광한루에 올라앉아 이도령이 보고 첫눈에 반해 사랑이 싹트기 시작한것처럼 사랑하는 연인들의 다리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 * 09.월매집
춘향과 이몽룡이 백년가약을 맺은 부용당과 행랑채를 재현해 놓았으며..
당시 생활상을 알 수 있게 밀랍인형과 생활 도구들을 전시해 놓았다. 사랑의 맹세판과 장원급제 기원단이 있으며 춘향캐릭터 상품도 판매한다. 조선시대 우리나라 고전 '춘향전'의 무대가 된 집이다.남원부사의 아들 이몽룡이 광한루 구경길에 올랐을 때 그네를 뛰고 있던 성춘향에게 반해, 춘향이 살고 있는 월매집 부용당에서 백년가약을 맺은 집으로 춘향 어머니의 이름을 따서 '월매집'이라고 하였다.
* * * 남원향토박물관
소재지 ; 전라북도 남원시 양림길 14-9 (어현동)
개관일 2004년 5월 1일
남원 지역은 예로부터 역사와 전통이 깊은 고장으로 많은 문화유산과 민속자료가 산재해 있다. 오랜 역사를 증거 하는 고대시대의 출토유물, 광한루로 대표되는 수준 높았던 조선시대 양반 문화, 정유재란기 왜적에 대항했던 선열들의 정신과 흔적들이 있다. 또한 남원은 세계적 무형유산인 판소리의 고장이며 『춘향전』, 『흥부전』등 고전 문학의 산실이자 주요 배경지였다.- 남원향토박물관은 산재해 있는 남원의 유형 · 무형의 많은 문화유산을 체계적으로 수집·보존·전시·연구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이러한 체계적 수집, 연구, 전시를 통해 인류의 문화 자산을 널리 인류와 함께 향유하며, 안으로는 지역의 정체성을 함양하여 애향심을 기르고, 밖으로는 남원의 문화를 선양하여 문화유산을 온전히 후손들에게 전하고자 한다.
* * * 남원 황산대첩비지[ 南原 荒山大捷碑址 ]
고려 말 이성계(李成桂)의 황산대첩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비의 터.
사적 제104호(1963년 01월 21일 )
소재지 ;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읍 화수리 344-2
이성계는 1380년(우왕 6) 왜구가 경상도와 전라도에 대거 침입하자 양광(楊廣)·전라(全羅)·경상도(慶尙道)의 순찰사로 뛰어난 전술과 사술(射術)로 적을 무찔러 공을 세웠다. 1577년(선조 10) 호조판서 김귀영(金貴榮)이 왕명으로 비문을 짓고 여성군(礪成君) 송인(宋寅)이 글씨를 썼으며, 따로 운봉현감(雲峰縣監) 박광옥(朴光玉)이 구체적인 전투경과를 기술하여 황산대첩사적비를 세웠다.
- 이 비는 청일전쟁(淸日戰爭) 때 파손·도괴되었는데, 1957년 재건하였으나 비신은 여러 조각으로 깨어지고 비문 또한 거의 마열되었으므로, 오석(烏石)으로 바꾸었다. 따라서 비를 문화재로 지정하였던 것을 해제하고 대신 비지를 사적으로 지정한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남원 황산대첩비지 [南原 荒山大捷碑址] (두산백과)
== 황산대첩[ 荒山大捷 ]
1380년(우왕 6) 9월 이성계(李成桂)가 전라도 지리산 근방 황산에서 왜구(倭寇)를 격퇴시킨 싸움.
- 1376년 홍산대첩에서 최영에게 대패한 왜군이 1378년 5월 지리산 방면으로 다시 침입하였고, 1380년 8월에는 진포(鎭浦:錦江入口)에 500여 척의 함선(艦船)을 이끌고 침입, 충청·전라·경상 3도의 연안지방을 약탈·살육하여 그 참상이 극도에 달하였다. 이때, 원수 나세(羅世)·최무선 등이 화통(火)·화포(火砲)로써 왜선을 격파, 전부 불태워버리자 퇴로를 잃은 왜적은 더욱 발악을 하여 그 피해가 막심하였다.
조정에서는 이를 토벌하기 위하여 이성계를 양광(楊廣)·전라(全羅)·경상도순찰사(慶尙都巡察使)로 임명, 이 지방의 방위책임을 맡게 하였다. 적은 함양(咸陽) ·운봉(雲峰) 등의 험지(險地)를 택하여 동서로 횡행하므로, 이성계는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남원(南原)에서 배극렴(裵克廉) 등과 합류, 각 부서를 정비한 다음 운봉을 넘어 황산 북서쪽에 이르렀을 때 적과 충돌하게 되었다. 이때 적은 산을 의지하여 유리한 위치에 있었으므로 이성계는 고전에 빠졌으나, 이를 무릅쓰고 부하 장병을 격려하여 적을 대파하였다.
- 최영의 홍산대첩과 더불어 왜구 격파에서 가장 특기할 만한 싸움이며, 이를 계기로 왜구의 발호가 쇠퇴하였다. 1577년(선조 10)에 이를 기념하기 위해 황산대첩비가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읍 화수리(花水里)에 세워졌다.
[네이버 지식백과]황산대첩 [荒山大捷] (두산백과)
* * 황산대첩비[ 荒山大捷碑 ]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읍 화수리에 있는 비.
1577년 (선조 10)작. 높이 4.25m. 사적 제104호. 이 비는 이성계가 왜구를 무찌른 승전비로 일제 때 일본인들에 의하여 파괴되었으나 1957년에 귀부와 이수를 이용하여 중건하였다.
- 1577년(선조 10)작. 높이 4.25m. 이 비는 일제 때 일본인들에 의하여 파괴되어 파편만 남아 있는 정도였으나 1957년에 귀부(龜趺)와 이수(螭首)를 그대로 이용하여 중건하였다.
중건된 비는 쌍귀(雙龜)를 떠서 새겨진 듯하며, 본래 모양의 높이·너비·두께 등은 정확히 고찰할 수 없다. 비문은 김귀영(金貴榮)이 짓고 송인(宋寅)이 썼으며, 전액은 남응운(南應雲)이 하였고, 박광옥(朴光玉)이 세웠다. 1380년(우왕 6) 왜구를 물리친 황산대첩의 전승을 되새기기 위하여 세웠다.
비문에는 당시의 전라도관찰사 박계현(朴啓賢)이 옛날 태조가 승전한 황산이 시대가 흐르고 지명이 바뀌어 잊혀져가니 비석을 세우는 것이 좋겠다는 청에 따라 왕명으로 건립하였음을 비롯하여, 이성계가 10배의 적을 대파함으로써 만세에 평안함이 있다는 것, 그리고 이성계의 업적을 기려 이 비를 세운다는 명문 등이 실려 있다.
글씨는 오로지 조맹부(趙孟頫)의 글씨체를 닮은 것으로 결구에 허한 곳이 많고 필력도 주경하지 못하다. 『동국금석평(東國金石評)』에 그의 글씨를 비(肥)와 속(俗)으로 평하였는데 이를 잘 입증해주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荒山大捷碑]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피바위(血巖)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읍 화수리와 인월면 인월리 사이의 람천 가에 위치한 붉은 바위이다. 북쪽으로 황산이, 남쪽으로는 지리산 줄기가 위치한다. 바위의 색깔이 피처럼 붉어 피바위라고 하였으며 이를 한자화하여 혈암이라고 한 것으로 전한다. 『여지도서』(운봉)에 "혈암(血巖)은 황산 아래에 있다. 빛깔이 핏빛으로 물들어 있다. 민간에 전하는 말에 의하면 태조대왕이 왜적을 섬멸할 때 피에 젖어 핏빛으로 물들었다고 한다."라고 기록하였다. 이후 『운봉현읍지』, 『운성지』 등 대부분의 지리지에 혈암과 혈암의 전설이 수록되어 있다. 또한, 『호남지도』, 『해동지도』, 『청구요람』(22층 12면) 등에서 혈암이 황산 남쪽 하천 가에 묘사되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한국지명유래집 전라제주편 지명, 2010. 12., 국토지리정보원)
==「피바위 전설」
- 전라북도 남원시 인월면의 남천내에 있는 바위에 얽힌 이야기.
- 고려 후기인 1380년(우왕 6)에 왜구가 남부 지방으로 쳐들어왔는데, 그 괴수 이름이 아지발도(阿只拔都)였다. 아지발도는 18세 정도였으나, 키가 7척이 넘었고 힘이 장사였으며, 철갑으로 무장하여 화살을 맞아도 살을 뚫지 못하였다.아지발도의 괴력은 아군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아지발도가 장차 개경으로 쳐들어가겠다고 호언장담하자, 고려 조정은 당황한 나머지 이성계를 왜구 토벌 대원수로 삼아 남원에 급파하였다.- 이성계는 여진족의 귀화병과 고려군의 혼성부대를 편성한 뒤 변안열을 참모로 하고 퉁두란을 부원수로 하여 전주와 남원을 거쳐 인월로 향하였다. 이성계 장군은 본진을 황산에 주둔시켰다. 황산은 운봉과 동면의 중간에 우뚝 솟은 해발 695m의 고지였다. 아지발도는 고려 관군이 토벌 나온 것을 알았지만 자기의 용력만 믿고 교만을 부리다가 이성계 장군이 황산에 진을 친 다음에야 인월에 당도하였다.인월과 황산은 가까운 거리였다. 선두를 달린 아지발도군은 말을 몰아 순식간에 황산 및 남천에 이르러 장차 산을 기어오르려 했고, 뒤에는 3천여 명의 왜구들이 들을 메우고 쳐들어오고 있었다.이성계 장군은 퉁두란과 젊었을 때부터 함경도와 만주 국경 지대를 휩쓸고 다니면서 사냥도 하고 무술을 익히던 사이로 백발백중을 자랑하는 천하의 명궁이었다. 두 사람은, 아지발도의 투구를 겨냥해 한 사람이 활을 쏘아 입을 벌리면 다른 사람이 입을 맞추어 죽이기로 작전을 세웠다.작전대로 아지발도가 다가오자 이성계 장군의 첫 번째 화살은 어김없이 아지발도의 투구에 맞았다. 투구가 벗겨지려 하자 아지발도는 당황한 나머지 벗겨지려는 투구 끈을 내리려고 입을 벌렸다.그 순간 눈 깜짝할 사이도 없이 어디서 날아왔는지 화살 한 개가 벌린 입을 쾅 맞추어 목을 꿰뚫어 버렸다. 아지발도의 심장에서 내뿜은 피는 목구멍을 통해 분수처럼 뿜어져 흘러내렸다.순식간에 아지발도는 중심을 잃고 말 위에서 바위로 데굴데굴 굴러떨어졌다. 바위에 벌겋게 피가 고이면서 순식간에 냇물을 피로 물들였다. 그후로 바위를 깨면 붉은색이 나온다고 하여 사람들이 피바위[血巖]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모티브 분석
피바위는 ‘황산대첩비지’에서 인월 방면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남천내에 있는 바위 이름이다. 당시 이성계 장군이 아지발도가 이끄는 3천여 명의 왜구를 맞아 이곳에서 화살로 그의 목을 쐈는데, 이때 왜구가 흘린 피가 바위를 물들여 지금껏 붉다는 전설이다.
[네이버 지식백과]「피바위 전설」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 * * 박초월[ 朴初月 ]
전라북도 남원 지역에서 활동한 현대 여류 판소리 명창.
- 개설 ; 현대 여류 판소리 명창으로서, 김소희, 박록주와 함께 1930년대부터 우리나라 여류 판소리를 대표해 온 인물이다. 서슬과 구성이 있는 목으로 서민적 정서를 표현함으로써 김소희와는 다른 여창 판소리의 경지를 개척했다.창극과 여성 국극에서도 뛰어난 활약을 보였는데, 「춘향가」의 월매 역으로는 최고라는 평가를 받았다. 유성준 바디 「수궁가」로 국가무형문화재 예능 보유자로 지정받았다. 현재 박초월 바디 「수궁가」와 「흥보가」가 활발하게 전승되고 있다.
- 활동사항 ; 박초월은 전라남도 승주군 주암면 봉암리에서 출생하여 어렸을 때 남원으로 이사하였으며, 아영면과 운봉읍에서 생활하면서 판소리를 익힌 것으로 전해진다. 박초월은 12살 때부터 김정문에게 소리를 배우기 시작하였으며, 15살 때부터는 송만갑으로부터 판소리를 배웠다.- 20살 무렵에는 오수암으로부터 서편제 「흥보가」를 배웠고, 25살 무렵에는 정광수로부터 유성준 바디 「수궁가」를 배웠다. 박초월은 임방울에게도 소리를 배운 적이 있다.- 박초월은 16살 때 전주에서 개최된 전국남녀명창대회에서 1등을 차지하여 이름을 얻었다. 18살 때부터 폴리돌(Polydol)에서 「육자배기」, 「흥타령」, 「춘향가」 등을 녹음하였다.- 17살 때에는 조선성악연구회에 가입했고, 이후 대동가극단, 동일창극단 등에서 활동했다. 동일창극단에서는 극단의 대 성공작인 「일목장군」에서 여주인공인 아리주 공주 역으로 크게 인기를 얻었다. 해방 후 박초월은 「춘향전」의 월매 역으로는 당대 제일인자라는 평을 들었다. 1976년에는 서베를린 국제현대음악제에 참가하여 큰 호응을 받았다.- 박초월은 1955년 박귀희와 함께 ‘대한민속예술원’을 창립하여 초대 이사장을 맡아 후진 양성에 노력을 기울였다. 이는 후에 국악예술학교로 발전하였다. 51살 때인 1967년에는 유성준 바디 「수궁가」로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 = 동편제·서편제·중고제의 음악적 차이
최종민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 역임)
- 판소리 음악의 구성
판소리도 문화의 한 부분으로 다른 문화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발달하는 것이니까 지역에 따라 그 스타일이 다를 수 있다. 특히 판소리가 크게 발달한 호남은 동·서의 문화가 서로 다른 특징을 갖기 때문에 농악도 우도 농악(서쪽)·좌도 농악(동쪽)이 다르게 발달해 있고 민요나 판소리도 동·서가 서로 다르게 발달해 있다. 동쪽은 지리산을 경계로 경상도와 접해 있어서 산촌의 지리적 특성과 경상도의 문화적 특성을 함께 가지고 있고 서쪽은 평야 지대가 많고 바다에 접해 있어서 그런 환경과 관계 있는 문화가 발달하게 되었다. 그래서 동편제 판소리는 운봉·남원·구례·곡성 등의 섬진강 동쪽 지역에서 발달하게 되고 소리는 대마디 대장단을 선호하며 잔 기교보다는 소리 자체를 통성으로 꿋꿋하고 튼실하게 내며 소리의 끝이나 아니리의 끝을 여운 없이 탁 그치며 마친다. 그래서 쇠마치로 내리치듯이 마친다고도 한다. 그런 인상 때문에 우조적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한편 서편제는 익산·고창·광주·나주·목포 등지에서 발달하게 되고 소리는 애절하고 기교적이고 붙임새도 다양하고 소리의 꼬리도 길어져서 동편제 소리와는 훨씬 다른 아기자기한 맛이 있다.- 중고제는 경기·충청 지역을 중심으로 발달한 판소리 스타일이다. 경기·충청 지역은 사투리부터가 전라도와는 다르다. 또 음악 언어의 기본이 되는 민요의 토리도 다르다. 때문에 경기·충청 출신들이 판소리를 하면 자연 그 소리의 투가 다르게 될 것이고 그래서 호남 소리인 동편이나 서편과 다른 중고제를 형성하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한때는 경기·충청 출신의 명창들이 많아서 중고제가 크게 발전했었지만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일제 시대 이후 교통이 발달되면서 지역적 특성이 강했던 동·서편제의 소리도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 본래는 지역과 사사 계보가 거의 일치했었기 때문에 동편 지역 출신은 동편 소리를 하게 되어 있었지만 교통이 편리해지니까 동편 지역 출신도 서편 소리를 배우게 되고 한 사람이 여러 제의 소리를 배울 수도 있게 되어서 사사 계보가 막 뒤섞이게 되었다. 그래서 지금은 동편제나 서편제를 하나의 음악 양식으로 이해해야지 어느 지역에 국한한 지역적 스타일로 이해해서는 안 되는 시대가 되었다. 오늘날은 크게 보았을 때 온통 서편 계통의 소리가 보급되고 있어서 동편 소리는 그 명맥이 끊어질 형편에 놓여 있고 동·서편제의 장점을 결합한 보성 소리 같은 것이 유행하는 시대가 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동편제·서편제·중고제의 음악적 차이 (판소리의 세계, 2000. 2. 25. 문학과지성사)
* * * 실상사 백장암[ 實相寺百丈庵 ]
소재지 : 남원시 산내면 대정리 산
백장암은 실상사 소속의 암자로, 이곳의 백장선원은 구산선문(九山禪門) 중에서 가장 먼저 문파를 이루어 한국 선불교의 전통을 계승한 곳이다.
- 백장(百丈)이라는 이름은 ‘평상심이 도이며 마음이 곧 부처’라고 한 8세기경 활동했던 마조도일 선사의 제자인 백장 선사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백장 선사는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를 먹지 않는다’라는 일일부작 일일불식(一日不作 一日不食)의 백장 청규를 만들고 실천하였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불우조」에 실상사의 부속 사찰로 원수사와 장계사, 그리고 백장사가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세 사찰이 실상사의 말사였음을 알 수 있다.그 후 침허 조사가 중창할 때 원수사는 폐사되었고, 백장사에 속한 8개 말사와 실상사에 속하였던 9개 말사가 남아 있었다. 즉 침허 조사가 중창한 이후에는 내원, 정각암, 이명전, 남대암, 조계암, 양수암, 보명암, 세전암, 상암, 금당, 백련암, 수성대, 일출암, 봉계암, 양직암, 장계사, 백장암 등이 남아 있었다. 위의 암자 가운데 백장암, 약수암, 서진암(세전암)은 현존하고 있다.- 백장암의 창건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원래 명칭은 백장사였다고 한다. 1679년(숙종 5)에 화재를 당하자, 대중들은 백장사에서 10년간 두 번이나 화재가 일어났고, 장소도 협소하므로 실상사 옛터에 재건하자고 말하였다. 이에 따라 역시 화재로 소실된 실상사 터에 몇 칸의 작은 건물을 지어 백장암(百丈庵)이라 하였다.- 1868년(고종 5) 10월에 세 번째 화재를 당하여 이듬해에 운월 대사가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였다. 1901년에 네 번째 화재가 난 뒤 이듬해에 남호 대사가 완봉·환월·월허·영담 등과 협력하여 중건하였다.
- 현황 - 백장암은 실상사에서 인월 방향으로 3㎞ 정도 떨어진 지점에 있는 매동마을에서 산으로 1㎞ 정도 올라간 곳에 위치하고 있다. 백장암에는 목조 맞배지붕으로 된 광명전과 선실이 있고, 광명전 위에 문수전이 있다. 광명전은 1910년에 건립되었으며, 선실은 1972년에 지옹 선사가 증축하였다.- 백장암에는 국보 제10호인 백장암 삼층석탑, 보물 제40호인 백장암 석등, 보물 제420호인 청동은입사향로 등의 귀중한 문화재들이 많이 있다. 현재 백장암에는 스님들이 한국 선불교의 전통을 계승하여 참선 수행하는 백장선원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백장암 [百丈庵]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 백장암
성종때 저술한 동국여지승람 불우조를 보면 실상사의 부속사찰로 원수사, 장계사, 백장사가 기록되어 있어 이 세 사찰은 실상사의 말사였던 것이 명확하다. 침허조사가 중창할 때에 이르러 원수사는 폐사되었고, 백장사에 속한 8개 말사와 실상사에 속하였던 9개 말사가 남아있었다. 즉 침허조사의 중창 후에는 내원, 정각암, 이명전, 남대암, 조계암, 양수암, 보명암, 세전암, 상암, 금당, 백련암, 수성대, 일출암, 봉계암, 양직암, 장계사, 백장암 등이 있었다. - 위의 암자 가운데 백장암, 약수암, 서진암(세전암)이 현존하고 있다. 백장암은 실상사에서 남원 인월 방향 국도로 3킬로미터정도 가다가 백장휴게소가 있는 매동마을에서 우측 산도로 1킬로미터 정도 올라간 곳에 위치하고 있다. - 언제 창건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원래는 백장사였다고 한다. 1679년(숙종 5)에 화재를 당하자 대중이, 백장사는 10년 동안에 두 번이나 화재가 일어났고 장소도 협소하니까 실상사 옛터에다 재건하자고 하였다. 따라서 백장사 터에 몇 간의 작은 건물을 지어 백장암이라 하였다. - 1868년(고종 5) 10월에 제3차 화재를 당하였고, 그 다음해에는 운월대사가 아래에 있던 터에서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1901년(광무 4)에 제4차 화재를 당하였고, 다음 해에 남호대사가 완봉, 환월, 월허, 영담 등과 협력하여 다시 세웠다. - 이 백장암은 목조 맞배지붕으로 된 광명전과 선실이 있고, 광명전 위에 문수전이 있다. 이 광명전은 1910년에 건립되었으며, 선실은 1972년에 지옹선사가 증축하였다. 백장암에는 국보 제10호인 백장암 3층석탑, 보물 제40호 백장암 석등, 조선시대 부도군 등이 있으며, 관련 유물로는 보물 제420호 백장사 만력12년명 은입사향로가 있다.
* * 실상사 백장암 삼층석탑[ 實相寺百丈庵三層石塔 ]
국보 제10호(1962.12.20.)
시대 : 통일신라
크기 : 높이 5m
기단(基壇) 구조와 각부의 장식조각이 특이하여 전형적인 신라 석탑과는 다른 형태의 석탑이다. 즉, 보통의 탑은 위쪽으로 갈수록 너비와 높이가 줄어드는 데 비해 이 탑은 아래와 위의 너비가 거의 일정할 뿐 아니라, 높이도 1층만이 높을 뿐 2층과 3층은 비슷하다. 층을 이루지 않고 두툼한 한 단으로 표현된 지붕돌의 받침도 색다르다. 기단부는 낮으며 4면에는 난간을 섬세하게 양각하고 있다. 탑신석은 매층이 돌 하나로 구성되어 있다. 1층은 그 남면에 문비를 중심으로 사천왕상이 조각되어 있으며, 다른 3면에 보살상, 천왕상, 동자상 등이 조각되어 있다. 2층과 3층은 아랫쪽에 난간을 장식하고 그 위로 목조건축의 두공형을 모각하였는데, 2층에는 각 면에 2구씩 음악을 연주하는 천인상(天人像)을 새겼고, 3층에는 각 면 1구씩의 천인좌상(天人坐像)을 양각하였다. 지붕돌 밑면에는 연꽃무늬를 새겼는데, 3층만은 삼존상(三尊像)이 새겨져 있다. 상륜부는 파손된 부분도 있으나 네모진 노반석 위에 복발, 보륜, 보개, 수연 등 부재가 찰주기둥에 꼽혀 있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 일반적인 신라의 석탑양식을 따르지 않고 각 부재마다 자유로운 구조로 되어 있으며, 탑신 전체에 갖가지 조각이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는, 신라 후기를 대표하는 미탑(美塔)이다. [네이버 지식백과][實相寺百丈庵三層石塔] (두산백과)
= 백장암 삼층석탑이 탑은 백장암 경내에 있는 통일신라 시대의 석탑으로 국보 제10호이다. 현재의 백장암 남쪽 아래 경작지에 남아 있어 석탑 바로 뒤에 서 있는 석등과 함께 원위치로 생각된다. 그 북쪽에 법당터로 추정되는 건물지가 뚜렷한 점으로 보아 본래는 백장암이 이 곳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층 탑신 각 면에는 사천왕상과 신장상 2구씩을, 2층 탑신 각 면에는 주악천인상 2구씩을, 3층의 각 면에는 1구씩의 천인좌상을 새기고 있다. 이 석탑은 기단부의 구조와 각 부의 장식적인 조각에서 특이한 수법을 보여주는 것으로, 신라하대에 유행한 불국사의 다보탑과 같은 이형석탑의 하나이다. 각부의 구조가 특이할 뿐만 아니라 탑신부의 탑신과 옥개석 밑에 조각이 가득히 있어 더욱 더 주목된다.
* * 실상사 백장암 석등[ 南原實相寺百丈庵石燈 ]
보물 제40호(1963년 1월 21일)
높이 2.5m.
시대 : 통일신라
전라북도 남원시 산내면 대정리 백장암에 있는 통일신라의 석등. 연화대석 위에 간주를 세우고 그 위에 연화대석을 놓았으며, 화사석과 옥개석, 상륜부까지 전체의 부재가 완전한 석등이다.
- 연화대석 위에 간주(竿柱)를 세우고 그 위에 연화대석을 놓았으며, 화사석(火舍石)과 옥개석, 상륜부까지 전체의 부재가 완전한 석등이다. 8각의 지대석 위에 연화대석을 마련하였는데 모두 하나의 석재로 이루어졌다.
지대석 위는 낮은 16각의 측면을 이루었는데 각 면에는 통식(通式)을 장식한 작은 안상(眼象) 1구씩을 조각하였고, 그 위에 단엽의 8판복련(八瓣覆蓮)을 조각하였으며, 연화문 안에는 화사한 꽃문양을 장식하였다. 연화대석의 상면 중심에는 간주의 굄대를 마련하였는데 원형으로서 측면에는 16판의 단엽앙련(單葉仰蓮)을 둘렀다.
간주는 8각으로 아무런 조식이 없다. 상대석은 8각이며 하면에 받침 1단이 모각되었고 측면에 앙련8판이 둘러졌는데 단엽으로 연판 안에는 작은 꽃문양이 장식되어 있다. 앙련의 윗부분에는 8각의 갑석형을 둘렀고 그 위에 난간을 장식하였는데, 이렇듯 앙련대석에 난간을 둘러 장식한 석등으로는 유일한 예이다.
화사석은 8각으로 4면에만 장방형의 화창구가 둘러져 있으며 다른 4면은 아무런 조각이 없다. 화창구에는 창문을 고정시키기 위한 못구멍이 있는데 이것은 신라석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8각 옥개석은 하면에 화사석을 삽입하도록 파놓았으며, 처마 끝에는 1단의 턱을 마련하여 낙수면에서 흐르는 물을 막도록 하였다.
낙수면은 약간 경사를 보이고 있으나, 전각부에 이르면서 완만해졌고 합각선은 뚜렷하며, 각 모서리의 전각에 반전이 뚜렷하여 경쾌한 옥개석임을 느끼게 한다. 상륜은 원주형으로 이루어져 몇 줄의 선대를 조각하고 5중의 연봉을 장식하였다. 이 석등은 하대의 연화대석과 상대의 난간에서 동자주(童子柱) 등 주목되는 부재가 많은데, 각 부의 비례가 잘 맞는 우수한 석등의 하나이다.
[네이버 지식백과][南原實相寺百丈庵石燈]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백장암 석등이 석등은 백장암 경내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보물 제40호이다. 연화대석 위에 간주를 세우고 그 위에 다시 연화대석을 놓았으며, 상륜부는 도난을 당해 현재 그 원형을 찾을 길이 없다.이 석등에서 특이한 것은 앙련의 윗부분에 난간을 표현한 점이다. 이처럼 앙련대석에 난간을 둘러 장식한 것은 석등으로는 유일한 예이다. 화사석은 8각으로 4면에만 직사각형의 불을 켜는 구멍(화창)이 있으며 다른 4면은 아무런 조각이 없다. 화창구에는 창문을 고정시키기 위한 못구멍이 있는데, 이것은 실상사 경내에 있는 석등과 같은 형식이다.
* * 백장암 청동은입사향로[ 百丈庵靑銅銀入絲香爐 ]
보물 제420호(1965.
시대 : 조선
전라남도 남원시 신내면 금산리에 있는 조선시대 실상사 백장암에서 사용된 청동에 은사(銀絲)를 넣어 만든 향로(香爐).
-개설-절에서는 통상적으로 조석 예불(朝夕禮佛)과 사시예불(巳時禮佛) 때에, 그리고 불공을 드릴 때, 마음의 때를 씻어주는 의미로 부처님 전(前)에 향을 올려 피우는데, 이때 사용되는 기구가 향로로 향완(香椀)이라고도 한다. 향완은 밥그릇 모양의 몸체에 나팔 모양의 높은 받침대를 갖춘 향로를 뜻한다.- 백장암 청동은입사향로는 1584년(선조 17)에 주조된 백장암의 향로로 1680년(숙종 6) 침허 조사에 의해 실상사가 중창(重創)될 때 실상사로 옮겨 사용되었다. 1991년 국립 전주박물관에 위탁, 보관되었으며, 2000년부터 금산사 성보박물관에 수장되어 있다.
-형태-밥그릇 모양의 향로에 나팔 모양의 받침대로 이루어져 있으며, 전체 높이는 30㎝이다. 향로 입 주위에 넓은 테를 둘렀으며, 테의 바깥지름이 30㎝이다. 몸체와 받침대는 따로 만들어 연결되어 있다. 전체에 은실을 이용한 장식이 있다.- 입 주위의 넓은 테에는 가는 선으로 된 원이 9개 있고, 그 안에 범자(梵字: 산스크리트 문자)를 새겼다. 몸통 표면에 이중의 가는 선으로 된 원을 은실로 새기고, 그 안에 5개의 작은 원을 만들었으며, 그 안에 범자를 각각 새겨 넣었다. 원과 원 사이에는 덩굴무늬가 가득 차 있고, 몸통 아래쪽에 두 줄로 18개의 연꽃잎이 있다.받침대는 2단으로 되어 있으며, 위에 길쭉한 연꽃잎 6장이 있고 그 아래로 덩굴무늬가 있다. 은실로 새긴 선 모양은 매우 아름답고 무늬도 화려하고 우아하다.
-특징-입 주위 둥근 테의 아랫부분에는 “운봉백장사은사향완(雲峰百丈寺銀絲香椀)”으로 시작되는 명문(銘文)이 있고, 끝에는 “萬曆十二年甲申三月鑄成(만력 12년 갑신 3월 주성)”이라고 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조선 중기에 제작된 뛰어난 향로로, 당시의 전형적인 작품이다. 특히 제작 연대를 명확히 알 수 있는 명문이 있어 역사적인 의의가 크며, 그 모양과 장식이 매우 아름다워 1965년 보물 제420호로 지정되었다. 민간의 전승에 따르면, 실상사의 토지와 삼림, 그리고 이 향로를 실상사의 3대 보물이라 하여 예로부터 귀하게 여겼다고 한다
[네이버지식백과][百丈庵靑銅銀入絲香爐](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 백장사 만력12년명 청등은입사향로예부터 부처님께 올리는 주된 공양물은 향과 꽃이었는데, 향은 몸의 냄새 뿐만 아니라 번뇌와 망상까지도 소멸시켜 주기 때문에 향공양은 매우 중시되었다. '대지도론' 93권에 "천축은 무더위와 냄새가 심하므로 몸에 향을 바르고 여러 부처님과 스님께 공양한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이처럼 불교에서는 향과 꽃을 꽂는 향로나 꽃병을 정성스럽게 만들었다. 특히 향을 꽂던 향로는 갖은 세공을 다하여 만들었기 때문에 수많은 걸작들이 남아있다. 백장사 만력12년명 청동은입사향로는 넓은 전이 달린 몸체에 나팔형 받침이 붙은 전형적인 향로이다. 몸체에 비하여 받침이 빈약한 감이 있지만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구연 윗부분에는 범어가 새겨진 9개의 작은 원과 당초문양이 빈틈없이 새겨졌고 몸체에는 범자가 있다. 몸 아랫 부분에는 앙련이 있고 큼직한 굽받침에는 소용돌이 무늬가 있다. 받침대는 매우 날렵한 형태로서 정상에 소용돌이 무늬가 있고, 곡면에는 사실적인 연꽃무늬가 묘사되었다. 몸체의 넓은 전 안에는 '운봉백장사은사향완'으로 시작되는 명문이 있고 끝에는 '만력12년 갑신3월주성'이라고 되어 있다. 따라서 만든 때는 조선 1584년(선조 17)임을 알 수 있다.
* * 백장암 보살좌상百丈庵菩薩坐像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66호(1999년 4월 23일)
시대 : 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전기
백장암에 있는 금동 불상.
- 백장암은 실상사와 같은 시대인 9세기 초에 창건된 사찰이다.
임진왜란으로 실상사가 폐허가 되었을 때는 약 200년 동안 실상사의 승려들이 이 절에서 머물렀다고 한다.
- 백장암 보살좌상은 원래 실상사 백장암 안에 보관되어 있었으나, 1997년 5월에 도난당했다가 같은 해 9월에 회수되어 현재 실상사에 보관되어 있다.
-[형태]-머리는 높게 틀어 올려 상투 모양으로 묶은 후 보관(寶冠)을 썼다. 이마 부분에는 머리카락이 굴곡지게 표현되어 양쪽 귀를 돌아 어깨 아래까지 길게 늘어져 있는데, 이는 고려 후기에서 조선 전기 보살상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이다.
얼굴은 사각형에 가까운 편이며, 신체는 어깨가 둥글고 무릎 너비가 좁아 단아한 느낌을 준다. 옷은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데, 탁 트여진 가슴에는 화려한 목걸이가 표현되었다.
- [특징] - 백장암 보살좌상은 아미타구품인(阿彌陀九品印)의 수인을 맺고 있어 관음보살(觀音菩薩)이 분명한데, 전통 양식(고려 후기 조각 양식)의 계승과 새로운 양식의 대두라는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 위가 넓은 통 모양의 보관에는 복잡하고 화려한 꽃무늬와 식물무늬가 맞새김되었고, 꼭대기에는 불꽃에 쌓인 보주(寶珠) 모양의 장식 돌기가 달려 있다. 몸에 걸친 두꺼운 천의는 도포 모양이어서 마치 여래상의 대의처럼 보이며, 몸 전체는 화려한 영락(瓔珞) 장식으로 뒤덮여 있다.
-이러한 장식은 고려 후기의 보살상에서 흔히 나타난다. 반면 사각형에 가까운 얼굴과 신체, 이목구비의 선이 굵고 딱딱한 굳은 얼굴 표정, 고려 후기에 보였던 왼쪽 가슴의 마름모꼴 금구(金具) 장식이 사라진 점, 가슴의 옷깃이 수평적으로 변한 점, 훨씬 가늘고 섬세해진 영락 장식, 왼쪽 무릎 위에 드리운 나뭇잎 모양의 소매 자락이 심엽형(心葉形)으로 도식화된 점 등은 조선 전기적인 특징을 보여준다.
-이러한 특징은 조선 전기에 전라북도 지역을 중심으로 유행했던 일련의 보살상 양식을 반영한 것으로, 이 가운데 1447년에 수리된 것으로 밝혀진 대구 파계사(把溪寺) 목조관음보살좌상(木造觀音菩薩坐像)은 백장암 보살좌상과 조각 양식이 같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 * 백장암 소장 범종百丈庵所藏梵鍾
전라북도 유형 문화재 제211호( 2007년 1월 19일)
시대 : 조선/조선 후기
백장암에 있는 조선 후기 범종.
- 백장암 소장 범종은 범종 하부에 짧은 명문이 있어 종의 내력에 대해 확인할 수 있다. 명문은 “중종중 오십근 유사경인 장무시우 건륭 팔년 계해삼월일 함양 안국암(中鍾重五十斤有司敬仁掌務時宇乾隆捌年癸亥三月日咸陽安國庵)”이라고 적혀 있어, 원래 함양 안국암(安國庵)에서 1743년(영조 19) 주조되었으며 무게는 50근임을 알 수 있다. 전체적으로 푸른 녹이 슬어 있으나 주조 상태와 보존 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 [형태] - 종신의 전체적인 형태는 상부 천판(天板)이 불룩하게 솟아 있고 거의 직선으로 내려오면서 종구(鍾口) 부분이 약간 벌어진 모습이다. 종 상단 천판은 둥글게 솟아 있으며, 천판 위에는 용 한 마리가 네 발로 굳게 디디고 역 ‘U’자형으로 몸을 휜 채 고개를 과도하게 치켜들고 있다. 꼬리로 뒤에 있는 대롱 형태의 음통(音筒)을 휘감고 있으며 음통의 표면은 아무런 문양 없이 단순하게 표현하였다.
- 천판과 종신이 만나는 부분은 가는 융기선으로 구분하였으며, 그 아래 상대(上帶) 내부에 범자문(梵字文)을 배치하였다. 범자문은 조선 시대 범종의 범자문으로 가장 유행하였던 ‘옴마니반메훔’이라 불리는 육자광명진언(六字光明眞言)을 반복해서 둘러 공간을 채우고 있다. 그 아래에는 연곽(蓮廓)을 네 곳에 배치하고 테두리인 연곽대(蓮廓帶)는 연화 당초문으로 장식하고, 내부엔 아홉 개의 연꽃 봉오리 모양인 연뢰(蓮蕾)가 자리하고 있다. 연곽과 연곽 사이 공간에는 조선 후기 범종의 주요 인물상인 보살 입상을 각각 네 곳에 배치하였다. 이 연곽과 보살상 아래로 융기선을 둘러 종신을 구분하고 있는데, 하부에 해당하는 이곳에는 종을 치는 부위인 당좌(撞座)와 장식 문양 등이 없고 명문만을 배치하고 있다.
- [특징] - 조선 후기의 범종 기술과 문양 표현은 과거 통일 신라나 고려 시대 범종에 비해 퇴보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백장암 소장 범종은 섬세하게 주조된 용뉴의 역동적인 모습과 문양판(文樣版)을 활용한 범자문, 보살 입상의 표현이 종신과 균형을 잘 이루고 있어 18세기 범종의 특징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의의와 평가]-전체적으로 한 마리의 용뉴와 음통, 연곽 등 통일 신라부터 이어진 전통 한국 범종의 양식을 유지하고 있지만 둥글게 솟은 천판, 범자문, 보살 입상 등은 조선 시대 새롭게 등장한 요소로서 그 시대성을 함께 보여 주고 있다. 명문을 통해 제작 연대와 봉안처를 명확히 알 수 있어 조선 후기 장인(匠人) 및 지역별로 세분화되는 범종의 양식 변천 연구에서 주목할 만한 작품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 선종의 주요 교리
직지인심(直旨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
* * * 실상사[ 實相寺 ]
사적 제309호(1984.10.19.)
전라북도 남원시 산내면 입석리 33-3외 지리산 천황봉에 있는 절.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사인 금산사의 말사이다.
828년(흥덕왕 3)에 홍척이 구산선문의 하나인 실상산문을 개산하면서 창건하였다.
- 역사적 변천
828년(흥덕왕 3)에 홍척(洪陟)이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실상산문(實相山門)을 개산(開山)하면서 창건하였다. 홍척은 도의(道義, 道儀)와 함께 당나라에 들어가 선법(禪法)을 깨우친 뒤 귀국하였다. 그 후 도의는 장흥 가지산에 들어가서 보림사(寶林寺)를 세웠고, 홍척은 이 절을 세운 뒤 선종(禪宗)을 전파하였는데, 풍수지리설에 의거하여 볼 때 이곳에 절을 세우지 않으면 우리나라의 정기가 일본으로 건너간다고 하여 이 절을 건립하였다고 한다. 그 뒤 2대조 수철(秀澈)을 거쳐 3대조 편운(片雲)에 이르러서 절을 크게 중창하고 선풍을 더욱 떨치게 되었다.
그러나 1468년(세조 14)에 화재로 모두 불타버린 후 200년 동안 폐허로 남아 있었고, 승려들은 백장암(百丈庵)에 기거하면서 그 명맥을 이어왔다. 그 뒤 1679년(숙종 5)에 벽암(碧巖)이 삼창(三創)하였고, 1684년 계오(戒悟)가 현재의 극락전(極樂殿)인 부도전(浮屠殿)을 지었다. 1690년에 침허(枕虛)를 중심으로 300여 명의 수도승들이 조정에 절의 중창을 상소하여 1700년(숙종 26)에 36동의 건물을 세웠다. 또한 1821년에는 의암(義巖)이 다시 중건하였으나 1882년(고종 19)함양 출신 양재묵(楊載默)과 산청 출신 민동혁(閔東赫)에 의해 사찰건물들이 불타 없어지는 수난을 겪었으며, 1884년에 월송(月松) 등이 중건하였다. 1903년(광무 7) 익준(益俊)이 승당을 지었으며, 1932년 칠성각을 세웠다.
특히 불상에는 보화(寶貨)가 많이 들어 있다 하여 일찍이 도굴꾼들에 의해 훼손된 적이 있었다. 그 불상의 복장(腹藏)에는 효령대군(孝寧大君)의 원문(願文)과 사경(寫經) 및 인경(印經)이 수백 권이나 들어 있었고, 고려판 화엄경소(高麗板華嚴經疏) 등 보기 드문 서적도 몇 가지 있었다고 한다. 그 중 일부는 도난당하였고, 나머지는 건물과 함께 불타 버렸다고 한다. 1986년 요사로 사용 중인 선리수도원(禪理修道院)을 건립하였고, 1989년 천왕문을 세웠다. 1991년 범종각을 짓고, 1996년 화엄학림(華嚴學林) 강당과 학사를 건립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 현황
현존하는 당우로는 보광전(普光殿)을 비롯하여 약사전·명부전·칠성각·선리수도원·누각·천왕문·화엄학림강당과 학사,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곳에 극락전과 부속 건물이 있다. 당우 가운데 보광전 안에는 조선시대에 조성된 비로자나불좌상을 중심으로 좌우에 베트남에서 이운해 왔다는 종이로 만든 보살입상이 있고, 범종이 걸려 있다. 종은 1694년(숙종 20)에 만든 것으로 종을 치는 자리에 일본의 지도 비슷한 무늬가 있다. 이것을 치면 일본이 망한다는 소문이 떠돌아서 일제 말기에는 주지가 문초를 당하기도 하였다.
- 이 절에 소장된 중요문화재로는 백장암삼층석탑(국보 제10호)을 비롯하여, 실상사수철화상능가보월탑(實相寺秀澈和尙楞伽寶月塔, 보물 제33호), 실상사수철화상능가보월탑비(보물 제34호), 실상사석등(보물 제35호), 실상사부도(보물 제36호), 실상사삼층석탑(보물 제37호) 2기가 있다. 그리고 실상사증각대사응료탑(實相寺證覺大師凝寥塔, 보물 제38호), 실상사증각대사응료탑비(보물 제39호), 백장암석등(보물 제40호), 실상사철제여래좌상(보물 제41호), 백장암청동은입사향로(百丈庵靑銅銀入絲香爐, 보물 제420호), 실상사약수암목조탱화(實相寺藥水庵木彫幀畵, 보물 제421호) 등이 있다. 또한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45호로 지정된 극락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맞배지붕 건물로서 1832년에 의암이 중건하면서 부도전에서 극락전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내부에는 지불(紙佛)인 아미타여래좌상과 1985년에 조성한 아미타후불탱이 봉안되어 있다.
이 중 실상사삼층석탑은 상륜부가 원형 그대로 남아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걸작품으로 불국사 석가탑의 상륜부를 복원할 때 이 탑을 본떠 복원하기도 하였다. 1980년 2월 2일 도굴꾼에 의하여 크게 파손된 것을 문화재관리국의 기술진들이 원형대로 복원하였다. 또한 약사전에 봉안되어 있는 철제여래좌상(보물 제41호)은 수철이 4,000근의 철을 들여 주조한 통일신라시대의 걸작품이다. 이 불상은 현재 지리산 최고봉인 천황봉과 일직선상에 있는데, 우리나라의 정기를 일본으로 보내지 않겠다는 호국적 이념에서 이곳에 안치했다고 한다.
이 밖에도 절에는 실상사위전개량성책(實相寺位田改量成冊,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88호)이 있으며, 절 입구에는 상원주장군(上元周將軍, 중요민속자료 제15호)을 비롯한 석장승들이 남아 있어 장승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가 된다. 절 일원이 사적 제309호로 지정되어 있다.
- 실상사는 1998년에 문을 연 귀농학교로도 유명하다. 당시 주지스님이었던 도법스님이 만든 학교로서 1997년 우리나라에 IMF로 인해 실직자가 된 사람들 가운데 농촌으로 돌아와 정착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도와주는 역할을 하였다. 이곳에서는 모든 작물을 유기농으로 재배하는 등 생태환경운동의 한 흐름을 형성하고 있다. 현재 인드라망생명공동체라는 이름으로 지리산 실상사를 중심으로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實相寺]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 남원 실상사 수철화상탑[ 南原實相寺秀澈和尙塔 ]
보물 제33호(1963년 1월 21일)
시대 : 고대/남북국/통일신라
건립연도 : 893년
전라북도 남원시 산내면 입석리 실상사에 있는 통일신라의 승탑. 높이 2.42m. 신라 구산선문의 하나인 실상사의 제2조사 수철화상의 탑으로, 신라 석조부도의 전형적인 양식인 8각원당형을 하고 있다.
- 신라 말 선종 산문의 하나인 실상산문(實相山門)을 크게 일으킨 수철(秀澈, 817∼893)의 유골을 모신 승탑이다. 실상사 서쪽에 위치한 극락전의 오른쪽에 있으며, 현재의 자리가 원래의 위치로 보인다. 극락전 왼쪽에는 수철의 스승으로 실상사를 창건한 홍척(洪陟)의 승탑이 서 있다.
승탑은 신라 승탑의 전형적인 양식인 8각원당형(圓堂形)의 모습이다. 단면 8각의 바닥돌은 제법 높은 편이며, 윗면에는 아무런 시설도 없이 바로 받침돌이 놓여 있다. 8각의 아래받침돌은 하나의 돌로 조성되었다. 아래부분에는 제법 높직한 굄을 둘렀고, 그 위의 옆면은 구름 무늬로 장식되었는데, 각 면마다 구름 속의 용이나 사자의 모습이 돋을새김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아래받침돌 위에는 하나의 돌로 조성된 8각의 가운데받침돌 굄돌이 놓여 있는데, 제법 높직하면서 위아래단으로 나뉘어 있다.
가운데받침돌은 낮고 좁은 편으로, 각 면마다 신라 석조물에서 주로 보이는 안상(眼象)이 오목새김되어 있으며, 안상 안에는 사리함(舍利函)이나 주악상(奏樂像) 등의 여러 조각이 새겨져 있어 화사하게 보인다. 윗받침돌은 밑면에 8각의 각진 받침이 3단으로 새겨져 있고, 옆면에는 하나의 꽃잎이 위로 솟아 있는 앙련(仰蓮)의 연꽃무늬 16개가 세겹으로 돋을새김되었는데, 꽃잎 안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지만 모두 48개의 연꽃무늬가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화려하게 보인다. 윗면에는 별다른 장식이 없이 2단의 각진 굄만 있다.
받침돌 위에는 하나의 돌로 만든 8각의 몸돌 굄돌이 얹혀 있다. 굄돌의 높이는 낮은 편인데, 옆면에는 각 면마다 1구씩의 가늘고 긴 안상이 새겨져 있고, 옆면 윗부분의 덮개돌 모양 밑면에는 마치 석탑 받침돌의 덮개돌에 있는 부연(副椽)처럼 각진 받침이 큼직하게 표현되어 있다. 윗면에는 낮고 각진 굄, 높고 둥근 굄, 낮고 각진 굄 등의 3단 굄이 몸돌을 받치고 있지만, 많이 파손되어 뚜렷하지는 않다.
몸돌은 8각의 각 면에 모서리 기둥을 새겼고, 앞면과 뒷면에는 문비(門扉)를 조각하였는데, 문비의 좌우면에는 사천왕상이 돋을새김되었다. 문비와 사천왕상 등의 조각은 8각원당형 승탑의 기점인 (전)원주 흥법사지 염거화상탑(국보 제104호)부터 나타난다.
지붕돌은 전체적으로 평박(平薄)해 보인다. 밑면에는 몸돌 바로 윗부분에 1단의 각진 받침이 있고, 완만한 곡선을 이루고 있는 처마 주변에는 비천상(飛天像)이 조각되었으며, 그 바깥쪽에는 각진 서까래가 새겨져 있다. 윗면인 낙수면에는 8각의 합각(合角)마다 내림마루인 우동(隅棟)이 굵게 표현되었고, 우동과 우동 사이에는 기왓골이 뚜렷하며, 처마의 끝부분에는 수막새와 암막새 기와가 그대로 새겨져 있다. 추녀는 거의 수평에 가까운데, 완만한 곡선을 이룬 전각에는 귀꽃이 없다. 다만, 우동 끝부분에는 잡상(雜像)을 놓았던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 있다. 지붕돌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인 상륜부(相輪部)를 받치도록 8각의 각진 굄을 2단으로 조성해놓았지만, 상륜부의 부재는 현재 노반(露盤)만 남아 있을 뿐이다. 노반의 겉면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고, 윗부분은 덮개돌 모양으로 생겼지만 부연만 조각되어 있다.
이 승탑의 북쪽에는 수철화상을 기리기 위해서 세운 탑비가 있다. 비명의 내용으로 보아, 이 승탑은 893년(진성왕 7)에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네이버 지식백과][南原實相寺秀澈和尙塔]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 남원 실상사 수철화상탑비[ 南原實相寺秀澈和尙塔碑 ]
보물 제34호(1963년 1월 21일)
이칭별칭 : 실상사 수철화상능가보월탑비
시대 : 고대/남북국/통일신라
건립시기·연도 ; 효공왕대(897~912)
전체높이 2.9m. 비신 높이 1.68m, 너비 1.12m.
비신은 푸른 돌로 되어 있으며, 이수(螭首)와 대석(臺石)은 화강암이다. 비문의 마멸과 손상이 심한 편이다.
비의 주인공인 수철(秀澈)은 신라 말기의 선승(禪僧)으로, 본래 심원사(深源寺)에 머물다가 뒤에 실상사에 들어가 실상사의 제2조가 되었다. 893년(진성여왕 7) 5월 77세로 실상사에서 입적하자 왕이 시호와 탑명을 내렸다고 한다. 비문에는 수철의 출생에서 입적 및 조탑(造塔) 경위까지 기록되어 있는데, 실상사에서 수철이 입적하였으나, 원래는 심원사의 승이었기 때문에 비문에는 ‘深源寺○國師秀澈和尙(심원사□국사수철화상)’으로 쓰여 있다.
비문을 짓고 쓴 사람은 알려져 있지 않으며 글씨는 자경(字徑) 2㎝ 내외의 해서(楷書)로 구양순체(歐陽詢體)를 따랐다. 비의 건립 연대 또한 명확하지 않으나 비문 가운데 ‘贈太師景文大王(증태사경문대왕)’ 및 ‘贈太傅獻康大王(증태부헌강대왕)’이라는 구절이 중요한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동문선』권33의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사은표(謝恩表)」 및 『동사강목』 효공왕 1년 7월조에 위와 같이 전대왕(前代王)들을 추증(追贈: 죽은 뒤에 품계를 높여줌)한 기록이 있으므로, 이 탑비의 건립 연대는 효공왕대(897~912)로 추정된다. 비음(碑陰)에는 일찍이 비가 쓰러져 1714년(숙종 40)에 중건한 사실이 새겨져 있다.
탑비의 형식은 당시의 일반적인 탑비 형식과 달리 귀부(龜趺)가 없고 대신 안상(眼象) 6구를 새긴 장방형의 대석 위에 비를 세웠다. 그리고 비좌(碑座)에는 큼직한 복련(覆蓮)을 둘렀다. 이수에는 구름 속에 반룡(蟠龍: 승천하지 않은 용) 두 마리가 대칭하여 여의주를 다투는 듯한 모습이 조각되어 있고 중앙에는 ‘능가보월탑비’라는 전액(篆額)이 음각되어 있는데, 조각 수법이 형식적이며 장엄 조식(莊嚴彫飾)이 약화된 경향이 뚜렷하다
[네이버지식백과][南原實相寺秀澈和尙塔碑](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 = 수철(秀澈), 능가보월(楞加寶月)
출생 : 817년(헌덕왕 9) 사망 : 893년(진성여왕 7)
지리산 실상산파(實相山派)의 개산조(開山祖)인 홍척(洪陟)의 법을 이었으며, 지리산 실상사에서 후학들을 지도하다가 제자들을 불러 “나는 가려 한다.”라는 말을 마치자 열반에 들었다. 나이는 76세, 법랍은 58세였다. 시호를 추증하여 수철(秀澈)이라 하였고, 탑호(塔號)는 능가보월(楞加寶月)이라 하였으며, 대표적인 제자로는 수인(粹忍)·의광(義光) 등이 있다.
* * 남원 실상사 석등[ 南原實相寺石燈 ]
보물 제35호(1963년 1월 21일)
시대 : 고대/남북국/통일신라
건립연대 ; 828년경
높이 5m.
보물 제35호.
팔각기둥의 전형적인 간주석과 달리 고복형 간주석을 지닌 석등으로서, 이 지방에서 유행된 석등형식으로 볼 수 있다.
보광전과 남원 실상사 동서삼층석탑(보물 제37호) 사이에 있다.
신라 석등의 전형적인 양식인 단면 8각을 따르고 있지만, 가운데받침돌이 여느 석등과 같이 8각의 간주(竿柱) 모양이 아닌 북을 옆으로 엎어 놓은 고복형(鼓腹形)이어서 차이가 있다.
석등은 단면 8각의 바닥돌 위에 올려져 있다. 아래받침돌은 8각의 윗단과 아랫단으로 조성되었는데, 아랫단의 각 면에는 안상(眼象)이 얕게 오목새김되었다. 윗단에는 2장의 넓은 꽃잎이 아래로 향해 있는 복련(覆蓮)의 연꽃 무늬가 겹쳐진 채로 얕게 돋을새김되었는데, 각 꽃잎의 끝부분에는 높게 솟아오른 귀꽃이 3개의 구름무늬를 이루며 장식되어 있다. 윗단의 윗부분에는 3단의 받침을 두었다.
가운데받침돌은 단면이 둥글며 3단의 마디로 조성되었다. 곧 아래받침돌 윗단의 위와 윗받침돌의 아래에 바로 붙어서 각각 1단의 마디를 두었고, 위아래 마디 사이에는 제법 높은 또 하나의 마디를 놓았다. 툭 튀어나온 마디에는 가운데부분에 3줄의 띠와 함께 토끼풀처럼 생긴 꽃무늬가 장식되었고, 위아래부분에는 꽃잎이 1장인 단옆(單葉)의 연꽃무늬가 조각되었다. 3단의 마디 사이는 잘록한 편으로, 겉면에는 3줄의 선이 돋을새김으로 장식되어 있다. 가운데받침돌의 맨 윗면에는 3단의 받침이 새겨져 있다.
8각의 윗받침돌은 아래받침돌의 윗단과 달리, 1장의 꽃잎이 위로 겹쳐진 채로 솟아 있는 앙련(仰蓮)의 연꽃무늬가 돋을새김되어 있다. 꽃잎마다 가운데부분에 꽃무늬가 장식되어 특이하다.
불을 켜 놓은 부분인 화사석(火舍石) 역시 단면 8각으로 이루어졌다. 각 면마다 길고 네모난 화창(火窓)을 내었는데, 화창 주변에는 2줄의 선이 그어져 있으며, 문을 고정시켰던 작은 구멍이 뚫려 있다.
8각의 지붕돌은 윗면인 낙수면을 각 면마다 1장의 연꽃잎으로 장식하고서, 맨 윗부분에 다시 연꽃무늬를 겹쳐 새긴 특이한 모습이다. 기왓골이나 우동(隅棟)의 표현은 없이 연꽃잎만으로 각 면을 나누었다. 연꽃잎의 끝부분에는 아래받침돌의 윗단과 같은 모양의 귀꽃이 장식되었지만, 일부는 잘려버렸거나 없어졌다. 머리장식인 상륜부(相輪部)는 상태가 완전한 편이다. 가운데받침돌처럼 마디에 3줄의 띠와 꽃무늬로 장식된 복발(覆鉢)과 3단의 마디가 놓여 있고, 그 위로 귀꽃이 조각된 보개(寶蓋)가 올려져 있는데, 높게 돌출된 보개의 윗부분에는 덩굴 무늬[唐草文]가 새겨져 있다. 맨 위에는 끝부분이 뾰족한 연꽃봉오리 모양의 보주(寶珠)가 놓였는데, 가운데부분에 둥근 장식을 선으로 새겨 놓아 특이하다.
석등의 앞에는 돌로 만든 계단이 서 있다. 계단은 석등에 불을 켤 때 오르내리던 용도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남아 있는 석등 가운데 유일한 사례로, 석등이 공양구(供養具)라는 장식적인 의미와 함께 실용적인 등기(燈器)로 사용된 모습을 알려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이 석등은 전체적인 모습이 구례 화엄사 각황전 앞 석등(국보 제12호)이나 임실 진구사지 석등(보물 제267호)과 비슷하여, 지금의 전라도 일대에서 유행하였던 양식으로 짐작된다. 크기가 장중(莊重)하고 장식이 화려하며 비례미가 단정한 편으로, 통일신라시대의 대표적인 석등으로 평가되고 있다. 건립 시기는 실상사가 창건된 828년(흥덕왕 3)경으로 추정된다.
[네이버 지식백과][南原實相寺石燈]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 남원 실상사 승탑[ 南原實相寺僧塔 ]
보물 제36호( 1963년 1월 21일 )
시대 : 고려
높이 3.2m.
전라북도 남원시 산내면 입석리 실상사에 있는 고려시대의 승탑.
팔각원당 양식이며, 문양이 간소하다. 근처에 자운대화상탑(慈雲大和尙塔)이 있다.
팔각원당의 일반적인 양식을 기본으로 하고 있는 이 부도는 8각으로 된 지대석에는 아무런 문양이 없고 그 위에 하대석이 놓였다.
하대석도 8각으로 밑에 높직한 테가 있고 그 윗면에 운문(雲文)을 둘렀다. 다시 그 위의 중앙에 높고 낮은 3단의 8각굄을 마련하여 중대석을 받치고 있다. 중대석은 높이가 낮고 너비가 좁은 8각으로 표면에는 아무런 무늬도 없다.
상대석은 거의 반구형에 가까운 표면에 8엽연화(八葉蓮花)로 앙련(仰蓮)을 삼았는데 윗면 가장자리에도 연화가 조각되었다. 또, 각 모서리를 따라 귀꽃이 표현되었으나, 입체감을 살리지 못하고 연화에 고착되어버렸다. 이 앙련석 밑에는 8각받침이 있고 윗면에도 각형(角形)으로 된 2단의 8각 몰딩(moulding: 테두리장식)이 있다.
탑신 역시 8각으로 되었는데 1면에만 문비형(門扉形)이 얕게 조각되었을 뿐 다른 면에는 무늬가 없다. 옥개도 8각으로 아랫면의 중앙에 8각받침이 있는데 그 주위에 널찍한 호형(弧形)의 몰딩이 있다. 옥개석 윗면의 경사는 급한 편이며 우동(隅棟: 옥개석의 귀마루)이 내려온 추녀 끝에는 큼직한 귀꽃이 달렸으나, 대부분 손상을 입고 있다.
꼭대기에는 조식이 있는 원형석재가 놓였고 그 위에 연화문이 있는 보주(寶珠)가 놓여 있다. 형태는 약간 높아 보여 안정감이 없어 보이지만 정제(整齊)된 편이다. 약한 석질의 탓인지 조각은 간소하고 소박한 편이며, 특히 상대석 윗면의 귀꽃 표현은 기력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종류에 속하는 부도로서는 걸작에 속한다고 하겠다. 더욱이, 하대석의 용틀임과 구름무늬는 도드라짐[浮彫]이 강하여 이색적이고 상대석 앙련과 탑신 굄대의 연판 배치는 신라시대의 양식을 충실하게 계승한 것으로 주목된다.
[네이버 지식백과][南原實相寺僧塔]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 남원 실상사 동·서 삼층석탑[ 南原實相寺東·西三層石塔 ]
보물 제37호(1963.01.21.)
시대 : 고대/남북국/통일신라
건립시기 : 828년경
높이 각각 8.4m.
석탑은 실상사의 중심 법당인 보광전(普光殿) 앞에 동서로 있다. 동탑과 서탑은 규모, 양식, 보존 상태 등이 같고, 특히 상륜부(相輪部)가 원래의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2층의 받침돌 주위에는 길고 큰 돌을 둘러서 탑구(塔區)를 설정하였다. 아래층 받침돌은 하대석과 면석(面石)을 하나의 돌에 새긴 4장의 널돌로 구성하였다. 면석에는 모서리 기둥과 1개의 가운데 기둥을 새겼고, 아래부분에 1단의 턱을 만들어 하대석처럼 보이게 하였다. 덮개돌은 윗면의 경사가 급한데, 그 가운데 부분에는 각지고 둥근 3단의 굄이 있다. 윗층 받침돌의 면석은 각 면마다 1장의 널돌을 조립하여 짰는데, 이 면석에도 모서리 기둥과 1개의 가운데 기둥이 새겨져 있다. 덮개돌에는 밑면에 쇠시리인 부연(副椽)이 있고, 경사가 급한 윗면의 가운데 부분에는 역시 각지고 둥근 2단의 굄이 새겨져 있다.
탑신부(塔身部)는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구성되었다. 각 층의 몸돌에는 모서리 기둥이 조각되었으며, 1층 몸돌만 약간 높은 감이 있을 뿐, 위아래 몸돌의 체감률은 착실한 편이다. 지붕돌은 밑면 받침이 4단이고, 처마 밑은 수평이지만 윗면인 낙수면(落水面)은 추녀 윗부분이 반전(反轉)이 강하여 경쾌한 느낌을 준다.
3층 지붕돌 위에는 머리장식인 상륜부가 놓여 있다. 상륜부는 2단의 부연이 있는 노반(露盤), 두 줄의 띠와 꽃무늬가 장식된 납작한 구슬 모양의 복발(覆鉢), 8장의 연꽃잎을 두른 단면이 네모난 앙화(仰花), 꽃무늬를 새긴 둥근 기둥 모양의 간석(竿石)을 사이에 끼우고 귀꽃이 장식된 보륜(寶輪) 4개 등이 아래서부터 위로 갈수록 체감되면서 차례로 얹혀 있고, 그 위에 귀꽃을 장식한 보개(寶蓋)가 올려져 있다. 다만, 동탑에는 서탑과 달리 보개 위에 불꽃무늬를 새긴 수연(水煙)을 두었다. 동탑과 서탑 두 탑의 꼭대기에는 석탑의 중심 기둥인 높은 찰주(擦柱)에 용차(龍車)와 보주(寶珠)를 꽂아 놓았다.
이 두 탑은 양식으로 보아, 같은 시기에 함께 건립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받침돌 가운데 기둥의 수, 받침돌 덮개돌 윗면의 심한 경사, 지붕돌 받침 수의 감소, 전체적인 모습의 고준화(高峻化) 등에서 건립 시기가 불국사 삼층석탑보다는 다소 늦은 것으로 짐작된다. 곧 홍척(洪陟)이 실상사를 창건한 때가 828년(흥덕왕 3)이므로, 석탑도 이때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네이버지식백과]南原實相寺東·西三層石塔](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 * 남원 실상사 증각대사탑 南原實相寺證覺大師塔
보물 제38호(1963.01.21.)
전라북도 남원시 산내면 입성리 실상사 경내에 있는 통일 신라의 승려 홍척대사(洪陟大師)의 승탑.
승탑은 스님들이 입적한 후 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만든 사리탑으로 흔히 부도(浮屠)라고 한다. 이 승탑은 홍척 대사의 사리탑(舍利塔)이다.
[건립경위]-홍척 대사는 통일신라 헌강왕 때에 당나라에 들어갔다가 826년(흥덕왕 1)에 귀국하였다. 그는 신라 하대 구산선문(九山禪門) 중 최초의 산문(山門)인 지리산 실상산문(實相山門)의 개산조(開山祖)이다.
홍척 대사의 입적 연대는 알 수 없지만 9세기 중반경으로 추정되며, 승탑 또한 이때를 즈음하여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홍척 대사의 시호는 증각(證覺)이며, 탑명(塔名)은 응료탑(凝寥塔)이다.
[형태]-남원 실상사 증각대사탑은 지대석을 제외한 모든 부분이 팔각형으로 이루어진 팔각원당형 사리탑이다. 지대석은 평면이 사각형으로 넓게 마련되어 있으며, 그 위로는 팔각형의 기단과 탑신, 지붕돌[옥개석(屋蓋石)]이 올려져 있다.
- 하대는 2매의 돌로 되어 있는데 하단석에는 구름 무늬가 장식되어 있고, 상단석에는 아무런 문양이 없으며, 중대를 받는 1단의 받침이 마련되었다. 중대는 각 면이 두 개의 사각형으로 구획된 받침대 위에 놓여 있는데, 각 면에는 안상(眼象) 내에 비천상과 보살좌상이 각 1구씩 얕게 조각되어 있다.
- 상대는 16엽의 앙련(仰蓮)이 삼중으로 화려하게 배치되었으며, 그 위로 고복형(鼓腹形) 기둥 사이에 안상이 조각된 탑신 받침대가 놓여 있다. 탑신은 2면에는 문비(門扉)와 사천왕상이 조각되어 있다.
- 지붕돌은 추녀 밑에 연목(椽木)을, 지붕의 경사면에는 기와골을 섬세하게 조각하는 등 목조 건축의 세부 양식을 충실하게 묘사하였으며, 추녀 끝에는 풍탁(風鐸)을 달았던 작은 구멍이 나 있다.
지붕돌 정상부에는 각형 2단의 상륜받침이 마련되어 있으며, 상륜부는 현재 단판 8엽의 앙련문이 장식된 앙화석과 연화문이 장식된 보륜(寶輪), 원형의 보주(寶珠)만 남아 있다.
[금석문] - 남원 실상사 증각대사탑 옆에 ‘남원 실상사 증각대사탑비(南原 實相寺 證覺大師塔碑)’가 세워져 있어 홍척 대사의 행적과 생애를 알 수 있다.
[의의와 평가]-남원 실상사 증각대사탑은 남원 실상사 수철화상탑과 함께 9세기 중엽 통일 신라의 팔각원당형 승탑 형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 * 남원 실상사 증각대사탑비[ 南原實相寺證覺大師塔碑 ]
보물 제39호(1963.01.21.)
시대 : 고려
비는 일찍이 상실되고 현재는 귀부(龜趺)와 이수(螭首)만이 남아 있다.
이수 높이 1.03m, 귀부 너비 1.61m. 이수 앞면 가운데에는 ‘凝寥塔碑’라는 전액이 새겨져 있다.
귀부는 편마암으로 오랜 풍화작용에 의하여 세부의 조식을 판별하기는 어려운데, 당대에 일반화된 용두화(龍頭化)한 귀두(龜頭)가 아니라 귀두 그대로를 충실히 따랐으며 이수의 조형도 경주의 ‘태종무열왕릉비’ 계열에 속하는 우수한 작품이다.
증각은 일명 홍척국사(洪陟國師)·남한조사(南漢祖師)로 헌강왕 때에 당나라에 들어갔다가 826년(흥덕왕 1)에 귀국한 뒤 선문구산(禪門九山)의 하나인 실상사파를 일으켜 세운 고승이다. 대사의 묘탑인 남원 실상사 증각대사탑은 탑비의 뒤편 언덕에 있다.
[네이버지식백과][南原實相寺證覺大師塔碑](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증각은 일명 홍척국사(洪陟國師)·남한조사(南漢祖師)로 헌강왕 때에 당나라에 들어갔다가 826년(흥덕왕 1)에 귀국한 뒤 선문구산(禪門九山)의 하나인 실상사파를 일으켜 세운 고승이다.
* * 남원 실상사 철조여래좌상[ 南原實相寺鐵造如來坐像 ]
보물 제41호(1963.01.21.)
시대 : 고대/남북국/통일신라
높이 : 266cm
9세기 중엽경에 조성된 초기 철불의 걸작으로서 당시 철불상의 실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불상이다.
꼿꼿한 자세로 앉아 정면을 향하고 있는 이 불상은 두 발을 양 무릎 위에 올려놓은 완전한 결가부좌(結跏趺坐)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 현재 광배(光背)는 없어졌고 사각대좌(四角臺座) 위에 앉아 있다.
나발(螺髮)로 처리된 머리 위에는 높이 14㎝, 밑변 48㎝나 되는 큼직한 육계(肉髻)가 표현되었으나, 머리와는 확연히 구분되지 않고 있다. 얼굴은 넓적하여 거의 정사각형에 가까운데, 얼굴 길이보다는 너비가 더 넓다. 이마는 좁은 편이지만 박진감이 넘친다. 비교적 넓은 얼굴에 가늘고 긴 초승달 모양의 바로 뜬 눈, 이마에서 거의 일직선으로 내려오는 아담한 코, 두터우면서도 윤곽이 뚜렷한 입 등이 조화 있게 잘 배치되어 있다. 목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삼도(三道)를 표현하였는데 음각선 처리가 아닌 굴곡진 모양으로 나타냈다.
두 손은 모두 나무로 만들어 끼워 놓았는데, 1987년 복원불사(復原佛事) 때 나온 원래의 철제 손들도 같은 모양의 것이어서 나무 손은 후보(後補)하면서 원래의 철제 손을 그대로 복제한 것으로 생각된다. 오른손은 가슴에 들어 엄지와 가운뎃손가락을 맞대고 다른 손가락은 펴서 시무외인(施無畏印)의 수인(手印)을 짓고 있다. 왼손은 무릎에 손바닥을 위로 향하게 올려놓고 엄지와 가운뎃손가락은 맞잡고 있는 모양이다. 이러한 수인은 아미타불(阿彌陀佛)의 하품중생인(下品中生印)이므로 이 불상이 통칭 약사불(藥師佛)이 아니라 아미타불일 가능성이 크다.
법의(法衣)는 통견(通肩)의 대의(大衣)를 걸치고 있다. 어깨에서부터 가슴까지 내려오는 U자형의 굵은 띠 모양 옷깃 안으로 넓게 터서 가슴이 많이 노출되었다. 그 아래로 엄액의(掩腋衣: 대의(大衣) 안에 입는 내의(內衣)로, 왼쪽 어깨에서 내려와 오른쪽 겨드랑이로 들어가도록 둘러 입는다.)가 보인다. 옷주름은 부드럽고 유연한 물결 주름인데, 특히 팔의 주름은 매우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처리하였다.
대좌는 흙으로 만든 사각형의 대좌이나, 현재는 허물어진 부분이 많아 자세한 모습은 잘 알 수 없다.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복원이 가능한 편이다.
[네이버지식백과][南原實相寺鐵造如來坐像](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 * 실상사 약수암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 南原實相寺藥水庵木刻阿彌陀如來說法像 ]
보물 제 421호(1965.07.16.)
시대 : 조선후기
높이 181cm, 너비 183cm.탱화는 불교의 신앙 내용을 그린 그림을 말한다. 일반적인 탱화는 종이나 천에 그려지만, 실상사 약수암 목조탱화는 목판에 불상을 조각하여 만든 점이 특이하다.한 장의 목판에 주존불(主尊佛)을 중심으로 여섯 보살과 두 존자를 조각하였다. 주존불은 판면(板面)에서 약간 두드러져 나왔고 밑에 받침이 있으며 좌우와 위에 섬세한 꽃무늬를 나타낸 테를 돌렸다. 주존은 연화좌(蓮華座) 위에 결가부좌한 좌상이며, 불신이나 법의(法衣)의 표현은 조선시대 불상의 통식(通式)을 따랐으나 무릎 밑으로 옷무늬를 길게 늘어뜨린 것은 이례적 표현이다.배후에는 연꽃을 3중으로 돌린 거신광배(擧身光背)가 있고 그 위에는 앙련(仰蓮:꽃부리가 위로 향한 연꽃) 위에 좌상(座像) 2구와 입상 1구의 화불(化佛)을 상하로 배치하며 상단에 이르렀다.탱화의 하부에 있는 명문(銘文)으로 미루어 1782년(정조 6)에 제작된 것을 알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南原實相寺藥水庵木刻阿彌陀如來說法像] (두산백과)
* * 실상사 극락전[ 實相寺極樂殿 ] = 실상사에 있는 조선 후기의 불전.
전라북도유형문화재 제45호.(1974.09.27.)
시대 : 조선/조선후기
건립시기 : 1831년(순조31)
규모 : 정면 3칸, 측면 2칸의 주심포계(柱心包系) 5량식 맞배지붕건물.
정면은 가운뎃칸의 너비가 3.15m로 세짝 분합문(分閤門)을 달았고, 양 옆칸의 너비가 1.70m로 외짝 분합문을 달았다.
내부는 바닥에 마루를 깔았으며, 뒤쪽 고주(高柱) 사이에 후불벽을 설치하고 그 앞에 불단(佛壇)을 배치하였다. 가구(架構)는 고주에 퇴보(退椺)를 걸고 대들보 위에 중종보(中宗椺: 대들보와 마루보 사이에 건 보)를 걸쳐놓은 다음 여기에 우물천장을 씌웠다.
불단 위에는 아미타여래좌상(阿彌陀如來坐像)이 봉안되어 있으며, 그 좌우에는 정교하게 조각된 목각 보살상이 모셔져 있었으나 몇 년 전에 잃어버렸다. 「사적기(事蹟記」에 의하면, 건립연대는 1831년(순조 31)으로 되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實相寺極樂殿]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 실상사 보광전
실상사의 주법당인 보광전은 1884년(고종 21)에 월송대사가 세운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건물이다. 건물 안에 모셔진 삼존상 중 본존불은 조선시대에 조성한 것이고, 좌우의 관음, 세지 두 보살은 원래 극락전에 아미타불과 함께 봉안되었던 것으로 월씨국(베트남)에서 모셔왔다고도 한다. 현재는 단청이 되어 있지 않아 소박한 모습으로 실상사를 찾는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다. 그렇지만 조선후기의 건축양식을 살필 수 있는 좋은 자료로써, 보광전 주변에는 83평을 추정케 하는 주춧돌이 남아 있어 굉장한 규모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1991년 동국대 박물관에 의한 보광전 주변 발굴에 의한 보광전 주변 발굴에서 이미 증명된 적이 있다. 불상 뒤에는 아미타여래도가 있고, 불단 오른편에는 1981년에 만든 신중불화와 산신불화가 있다.
* * 실상사 약사전
약사전은 몸과 마음의 질병을 낫게 함으로써 중생을 교화하는 서원을 세운 약사여래를 봉안하는 전각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건물이다. 1883년 함양, 산청 유생들의 방화에도 불타지 않고 지금까지 남아 있는데, 특히 ㅈ우앙의 꽃문창살은 단청이 선명해 아름다움을 더하고 있다. 전각 안에는 통일신라시대에 철로 만든 약사불상과 불상 뒤에는 조선 후기에 그린 약사불화가 있다. - 철조 약사여래좌상약사여래는 중생의 병고 뿐만 아니라 현실세계의 부족함을 채워주는 현실이익적인 부처님이다. 이처럼 약사여래는 인간의 생노병사 가운데 가장 고통스러운 병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우리 나라에 약사신앙이 전래된 이후 계속 신앙되었다. - 약사불상이 다른 불상과 구별되는 가장 큰 특징은 한 손에 약그릇을 들고 있는 점이다. 그러나 현재 약사불로 신앙되고 있는 불상 가운데는 약그릇을 가지고 있지 않는 경우도 있는데, 실상사의 약사여래도 약그릇을 갖고 있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이 불상을 통일신라 말 구산선문에서 본존으로 모시던 노사나상(盧舍那像)이라고도 하며, 근래에는 원래의 손이 아미타 수인을 하고 있어 아미타불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제2대 조사인 수철국사가 약사여래상과 석탑 2기를 세웠다는 설이 있어 현재 약사전에 봉안된 철조여래상은 수철국사가 조성한 약사불이 아닌가 한다. - 이 불상은 실상사가 중창될 때까지 들판에 있었으며, 약사전을 세운 후 그 안에 봉안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이 불상에는 보화(寶貨)가 많이 들어 있다는 말이 있어 일찍부터 도굴꾼에 의해 훼손된 적이 있다. 불상의 복장품에는 효령대군의 발원문과 사경(射經) 및 인경(印經)이 수백 권이나 있었고, 고려판 화엄경소 등 보기드문 서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 중 일부는 도난 당하였고, 나머지는 건물과 함께 불탔다고 한다. - 실상사 약사여래불상은 9세기에 접어들면서 유행하는 철불(鐵佛)의 초기작품으로써 귀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이 불상은 건장한 신체와 물결식의 옷주름에서 가장 융성했던 시기의 양식이 남아 있음을 엿볼 수 있다. - 현재의 두 손은 나무로 만들어 끼워넣은 것으로, 1987년 복원할 때 나온 철제 손과 같은 모양이다. 대좌는 흙으로 만들었으나 허물어진 곳이 많아 자세한 모습은 알 수 없다.
* * 실상사 명부전
명부전은 갖가지 지옥의 장면을 그린 시왕(十王)의 그림이나 조각을 모신 전각으로 주존은 지장보살이다. 실상사의 명부전은 길선당(吉禪堂)의 옛터에 건립된 것으로 장육전(丈六殿) 동쪽에 있던 것으로 1821년(순조 21)에 의암대사가 옮겨 지은 것이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건물로 안에는 지장보살 삼존상, 시왕상 10구, 판관상 6구, 인왕상 2구가 있다. 지장보살상 뒤에는 1987년에 조성한 지장시왕도가 있다. - 시왕상은 본존을 중심으로 오른쪽으로는 제1 진광대왕, 제3 송제대왕, 제5ㅓ 염라대왕, 제7 태산대왕, 제9 도시대왕이 있고, 왼쪽으로는 제2 초강대왕, 제4 와관대왕, 제6 변성대왕, 제8 평등대왕, 제10 전륜대왕이 배치되었다.
* * 실상사위토개량성책(實相寺位土改量成冊)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88호
1책 19매로,
1720년(숙종 46)에 작성된 실상사의 토지대장.
성책의 지질은 두꺼운 장지이며, 크기는 가로 46cm, 세로 66cm 정도이다. 현재 전라북도 남원시 산내면 입석리에 있는 실상사에 소장되어 있다.
- 내용 - 본사(本寺)와 부속 암자의 기지(基地) 및 불양답(佛糧畓)을 구분하고, 전답의 소재지·명칭·위치·형태·등급·지적·경작인·조세 등을 표시하고 있다. 각 전답에는 본사 소유토지의 기장번호가 있는데, 이 대장에는 제23속 직전이 기록되어 있어, 이보다 앞선 실상사의 토지대장이 있었던 듯하다. 그리고 새로 측량한 내용은 이전에 측량한 것과 구별하고 있다.
기장 내용의 일부를 보면 “진 제사십팔 서범 오등직전 일복육속 주세 제사십구 동범 사등직전 육복말질동 제사십팔 남범승일등속직전 남북장칠십척 동서광십오척십일복사속 동북향좌지 남토을서산 시 실상사좌지(陳 第四十八 西犯 五等直田 一卜六束 朱世 第四十九 東犯 四等直田 六卜末叱同 第四十八 南犯陞一等續直田 南北長七十尺 東西廣十五尺十一卜四束 東北向坐地 南吐乙西山 時 實相寺坐地)”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서 ‘서범’과 ‘동범’은 토지소유의 위치를 표시한 것이며, ‘오등’ 및 ‘사등’은 토지의 등급, ‘직전’은 직답(直畓)·규전(圭田)주 01)·제전(梯田) 등 토지의 형태를 말하는 것이고, ‘주세’와 ‘말질동’은 경작인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일복육속’은 조세이며 ‘승일등’은 속직전인데, 오등급이었던 직전이 일등급의 직전으로 승급된 것을 뜻한다. 그리고 ‘남북장칠십척’과 ‘동서광십오척’은 토지의 면적을 잰 것이며, ‘동북향좌지’·‘남토을서산’은 이 토지의 동북은 실상사의 좌지(坐地)이고 남은 토을이며 서는 산이라는 뜻이다.
- 의의와 평가 - 이 토지대장은 250년 전에 시행된 토지대장의 정리(整理)·측량법(測量法)·세제(稅制), 소유자와 경작권의 실제 등을 파악할 수 있고, 동시에 실상사의 옛 모습을 고찰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 * 실상사동종(實相寺銅鐘)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37호
제작시기 : 828년(헌덕왕 3)
재질 : 구리
크기 : 높이 28∼99㎝, 입지름 96∼99.5㎝
소장처 : 동국대학교박물관
통일신라시대의 범종.
높이 28∼99㎝, 입지름 96∼99.5㎝. 동국대학교박물관 소장. 1967년전라북도 남원시 산내면 입석리실상사에서 발견되었는데, 발견 당시 이미 상반부를 잃어서 파종(破鐘)으로 남아 있었다.
현재 남아 있는 부분은 유곽(乳廓)·비천상(飛天像)·당좌(撞座) 등이지만 우수한 수법을 볼 수 있다. 하대(下帶)는 아래위에 가는 연주문대(連珠文帶)를 둘러 장식하고 그 안에는 당초문대(唐草文帶)를 정교하게 조각하였는데, 당초문 속에는 비천상과 당좌 바로 아래에 원형문(圓形文)이 있어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鐘)의 양식과 비슷하다.
종신(鐘身)에는 서로 마주보고 있는 2구의 주악비천(奏樂飛天)과 당좌가 배치되어 있다. 당좌는 중앙에서부터 연꽃·인동화문(忍冬花文)·연주(連珠)의 순으로 무늬가 장식되어 있다. 또, 주악상은 구름 위에서 천의(天衣)와 영락(瓔珞)을 위로 날리고 있는 형식이 성덕대왕신종과 상원사동종(上院寺銅鐘)을 연상하게 한다.
생황(笙簧)과 피리를 불고 있는 비천의 풍만한 모습은 신라불상의 양식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이 종은 남아 있는 부분의 입지름으로 보아 상원사동종보다 약간 큰 규모였으리라 추정되는데, 실상사의 창건때인 828년(헌덕왕 3) 함께 주조되었다고 생각된다.
=실상사 동종(銅鐘) 절에서 사용하는 종을 흔히 범종이라고 하는데, 그 소리로써 하루의 일과를 모든 대중에게 알리는 역할을 한다. 범종은 소리로 장엄하고 시간을 알려주며, 귀신을 쫓고 지상 및 하늘과 지옥의 모든 중생을 구제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 실상사에는 통일신라시대의 범종이 있었는데 깨진 상태로 동국대학교 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고, 강희(康熙) 33년(1694)에 주조한 범종은 현재 보광전에 있다. - 이 종은 몸체의 위는 좁고 아래로 가면서 넓게 퍼진 모습이다. 종 몸체에 기록된 글에 의하면 강희 33년에 만든 것으로 무게는 800근이다. 종을 만든 사람은 김상립, 정칠립, 김천수, 김선봉 등으로 여기에서 처음으로 범종을 만든 사람을 편수(便手)로 기록하고 있다. 이와 같은 기록으로 보아 이 종은 침허대사가 실상사를 중창할 때 만든 것으로 보인다. - 용두(龍頭)는 앞을 바라보고 있고, 뒤에 붙은 소리통은 형식적으로 작게 만들었다. 상대(上帶)는 표현하지 않고 대신에 범자(梵字)를 돌아가며 새겼으며, 유곽(乳廓)은 종 몸체 중간쯤에 치우치게 배치하였다. 유곽대에는 당초무늬와 연꽃 모양의 유두(乳頭)가 9개씩 있고, 보살상은 유곽을 중심으로 합장한 채 서 있다. 보살이 서 있는 아래 부분에는 명문(銘文)이 있고 당좌(撞座)와 하대(下臺)는 표현하지 않았다. - 이 종에 얽힌 이야기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전해 온다. 즉 실상사를 중창하고 난 후 국왕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종을 만들고 아침 저녁으로 나라가 번창하기를 기도하며 종을 쳤다고 한다. - 그런데 이 범종에는 우리 나라 지도와 일본의 지도가 새겨져 있어, 이 종을 치면 일본의 경거망동을 경고함과 동시에 우리 나라를 흥하게 한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이와 같은 소문 때문에 일제 말기에는 주지스님이 문초를 당하기도 하였으며 종 치는 것이 금지되기도 하였다. 지금도 지도 일부가 그대로 남아 있어 그러한 사실에 신빙성을 더하고 있다.
* * 약수암
약수암은 지리산 줄기의 작은 산중턱 1킬로미터 지점에 위치해 있다. 1724년(경종 4)에 천은스님이 처음으로 세웠고, 서영대사가 중수하였다. 1901년(광무 5)에 지월대사는 일당을 중수하였고, 1918년에 예암대유 스님이 개인 재산을 모아 보광전을 다시 세웠다.
1937년에는 함양의 불자 한정희의 시주금으로 중수하였으며, 1974년에 운영 비구니 스님이 두 번에 걸쳐 중수하였다. 경내에는 약수샘이 있어 항상 맑은 약수가 솟아나기 때문에 약수암이라 했다고 한다.
약수암에는 목조 팔작지붕으로 된 보광전과 목조 요사채가 있다. 보광전 안에는 1782년(정조 6)에 만든 보물 제421호인 아미타목각탱화가 봉안되어 있다.
* 약수암 아미타 목각탱
목각탱화는 불화의 내용을 부조상으로 표현한 것으로 조각기법과 불화기법이 혼용된 것이다. 이러한 목각탱은 조선 후기에 유행한 것으로 현재 문경 대승사, 상주 남장사, 예천 용문사, 서울 경국사에도 남아 있다. 약수암의 목각탱은 하단부에 "건륭사십칠년임인십일월방장산실상사"라는 기록이 있어 1782년에 제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은 현존하는 6점의 조선후기 목각탱화 중에서 가장 간략한 배치구도를 하고 있다.
비교적 작은 사각형의 목판 1매에 높은 돋을새김으로 조각하였는데 아미타불과 8보살, 2비구가 표현되었다. 즉 화면을 상단과 하단으로 나누어 하단 중앙에는 본존불을 중심으로 4보살과 2비구를 배치하였다.
불격에 따른 크기의 차이가 거의 없는 반면 본존불인 아미타불만은 몸 전체를 감싸는 광배를 지니고 있다. 본존불은 사자 위에 결가부좌하고 있으며, 따로 조각하여 끼워 놓았다. 주위에 서 있는 8보살중 관음보살은 보관에 화불이 있고 손에는 보병을 들었다. 지장보살은 스님의 머리 모양을 하고 지팡이를 짚고 있다. 합장한 2인의 비구는 아난과 가섭으로 생각되며 그 배경에는 연꽃으로 장엄하였다.
이 목각탱화는 원만한 상들의 단순한 배치구도라든가 정교한 세부조각 등 당시 성행하던 목조불감의 불상들과 비교되는 작품으로서 조선후기 목각탱화의 기준작품이 된다고 하겠다.
* * 서진암
서진암은 원래 세암 또는 세진암이라 하였다. 창건 연대는 알 수 없으나 1822년(순조 22)에 불탄 후, 1827년에 성윤두타와 대영비구가 다시 세웠다. 1917년에 운담기순이 기금을 모아 중건하였다. 1927년에는 세진암을 서진암으로 명칭 변경을 신청해 총독부로부터 허가를 받았으며, 193년 화재로 불탄 것을 1935년에 중수하였다. 현재 서진암에는 독특한 손모양을 한 불상과, 1516년(중종 11)에 만든 석조 나한상 외 4구의 나한상이 있다. * 서진암 석조나한상 나한은 깨달음을 얻은 조사를 일컫는 것으로 16나한, 18나한, 500나한 등으로 조성되었다. 현존하는 유명한 오백나한으로는 경북 영천 거조암의 고려시대 오백나한을 들 수 있다. 실상사 서진암에는 현재 석조 나한좌상이 5구가 있는데, 그 중 1구의 바닥에 "정덕십일년병자화주경희"라는 글자가 둥글게 새겨져 있다. 1516년이라는 정확한 조성 연대를 알 수 있어 조선시대 전반기 석조상의 면모를 반영하는 중요한 작품으로 주목된다. 나머지 4구의 상들도 각 부의 양식과 조성기법이 명문에 있는 상과 흡사하여 1516년 당시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 5구의 나한상은 모두 머리에 형태가 약간씩 다른 두건을 쓰고 있으며, 얼굴은 약간 살이 쪘지만 나한상으로서의 면모를 잘 갖추고 있다. 그러나 움추린 어깨와 형식화된 손모양, 양 어깨를 모두 덮은 의복의 옷주름 등의 표현은 조선 전반기 조각양식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게 한다.
* * 남원 실상사 석장승 (南原 實相寺 石長승)중요민속자료 15호 (1969. 12. 15)실상사 입구에 있는 3기의 돌장승이다. 장승은 민간신앙의 한 형태로 마을이나 사찰 입구에 세워져 경계를 표시함과 동시에 잡귀의 출입을 막는 수호신의 구실을 한다. 이 장승 역시 경계표시와 함께 경내의 부정을 금하는 뜻에서 세운 것으로 보여진다. 사찰 입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개울을 사이에 두고 2기의 석장승이 마주하고 있다. 하나는 논두렁에 있고 다른 하나는 큰 고목 아래에 자리잡고 있는데 10m 간격으로 사이가 넓다. 세 장승은 거의 같은 모습으로 머리에 벙거지를 쓰고 있으며 크고 둥근 눈에 뭉툭한 주먹코이다. 윗 송곳니 두 개가 삐져나와 험상궂은 듯 하지만 입가의 미소가 순한 심성을 드러내고 있다. 길게 수염이 표시되고 몸체에는 좌우 각각 상원주장군(上元周將軍)과 대장군(大將軍), 옹호금사축귀장군(擁護金沙逐鬼將軍)이라는 이름이 새겨있다. 다만 수염이 반대로 향하고 있어 상원주장군과 대장군은 대칭적인 한 쌍을 염두에 둔 조각인 듯싶다. 좌측 장승을 받치는 기단석(基壇石)에 있는 기록으로 보아 조선 영조 원년(1725)에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 전문설명 - 이 장승은 실상사(實相寺) 어귀에 잡귀(雜鬼)를 막기 위하여 세워 놓은 것이다. 다른 장승과는 달리 돌로 만들었기 때문에 썩지 않고 오래 보존되어 장승의 옛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이 장승에는 '상원주장군(上元周將軍)'이라 쓰인 것과 '대장군(大將軍)'이라 쓰인 것, 그리고 ‘옹호금사축귀장군(擁護金沙逐鬼將軍)’이라는 글씨가 판독하기 어려울 정도로 희미하게 새겨진 것이 있다. 상원주장군은 두 눈이 크고 둥글며 툭 튀어나왔고 코가 크며 머리에는 벙거지처럼 생긴 모자를 쓰고 있고, 손은 창을 든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어서 옛 장승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대장군은 뒤에 만든 듯, 이러한 특징이 없다. 옹호금사축귀장군은 벙거지를 쓰고 육중한 거구를 하고 있다. 찌푸린 이마살에 튀어나온 눈, 코는 주먹코이며 송곳니가 길게 뻗어나온 모습이다. 장승을 이 지방에서는 벅수라고도 한다.
마산문화유산답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