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 병영상인의 태동
병영성은 1417년 현재 광주광역시 광산구에서 강진 병영면으로 옮겨 오면서 바로 축성이 시작됐다. ‘강진군지(康津郡誌)’나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 등에는 마천목장군이 병마절도사로 부임해서 축성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병영상인의 역사는 병영성 축조 시기부터 시작됐다는 게 대부분 향토사학자들과 주민들의 시각이다.
당시 조선은 전국적으로 상업이 발전하지 않아 각 지방이 자급자족의 형태로 산물거래가 이뤄졌으나 병영성의 축성은 수년간 수백 수천 명이 징발되어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물자 소비가 폭증하고 이에 따른 수요가 증가해 병영사람들이 전국에서 물건을 공급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병영이 설치된 이후 서울의 양반가문 출신의 대소관헌들이 부임했으며 이것이 인연이 되어 서울의 선비들이 병영으로 많이 내려와 정착했다. 또 병영의 상류계급이 병영성의 업무에 참여했으며 서민들은 병영의 소요 물자를 조달하기 위해 자연적으로 상인이 되었다. 이 상인들이 전국 각지를 누비면서 인사 교류는 물론 물자가 유통되어 이 고장의 문화와 경제는 다른 곳 보다 훨씬 선진의 길을 걷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후기 병영상인의 발전
1895년 전라도 병마절도사영이 패영 되었다. 이때 떠나지 못한 거상 밑에서 일하던 사람들은 생계가 막막하여 전에 배운 상술을 자본으로 다시 상업에 뛰어든 것이다. 먼저 적은 밑천으로 부보상이 되어 5일 시장을 전전하며 자본이 축적되면 상점을 차리고 거기서 자본이 커지면 아직 유통구조가 어두운 곳이나 도시로 이주 진출하여 병영의 상인이 전국에 없는 곳이 없다 할 정도로 그 수가 팽창해져 갔으며 가는 곳마다 점차 상권을 장악하기 시작하였다. 북은 속초에서 인천, 서울, 군산,목포, 부산, 광주 등에 많이 진출했고 이 근방은 고흥, 벌교, 보성, 장흥, 강진, 해남,완도 등으로 진출하여 그 곳 상권을 장악하였다. 장사요령은 신용과 시세 판단으로 흠이 없어 상업에 실패한 사람이 없었다.
[출처] 박성수 외 3인, 강진 병영상인에 관한 역사적 재조명, 한국경영사학회, 2010
[표 출처]http://www.hani.co.kr/arti/society/area/473443.html
* 첨언 : 강진일보 홈페이지에 가시면 강진 병영상인에 대해서 연재기사를 보실수 있습니다.
http://www.nsori.com/news/articleView.html?idxno=299
강진병영상인.pdf
첫댓글 승민아. 학습부장 역할 톡톡히 잘 하고 있구나. 수고했다.
저 고향 강진인데... 여태 몰랐던 사실! 재미있게 읽었습니다~